1. 개요
Sérgio Vieira de Mello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포르투갈어 (1948년 3월 15일 ~ 2003년 8월 19일)는 브라질 출신의 유엔 외교관으로, 34년 이상 유엔의 다양한 인도주의 및 정치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며 평화와 인권 증진에 헌신했다. 그는 방글라데시, 수단, 키프로스, 모잠비크, 페루, 캄보디아, 레바논, 유고슬라비아, 중앙아프리카, 코소보, 동티모르 등 세계 각지의 분쟁 지역과 인도주의적 위기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분쟁 조정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특히 동티모르에서는 유엔 과도기 행정관으로서 독립을 위한 전환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02년 유엔 인권 최고 대표로 임명된 그는 2003년 5월 이라크 유엔 사무총장 특별 대표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 같은 해 8월 19일 바그다드의 카날 호텔 폭탄 테러로 20명의 직원과 함께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생전 그는 유엔 사무총장의 유력한 후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브라질 정부는 그의 유산을 기리고 지속 가능한 평화, 국제 안보, 그리고 분쟁 상황에 처한 개인들의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증진하기 위한 헌신에 경의를 표하며 사후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메달을 수여했다. 그는 사후에 태어난 딸 베네딕타를 두었으며, 그녀 또한 훗날 유엔에서 근무하게 된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외교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문화와 환경을 경험하며 성장했고, 이는 훗날 그의 국제적인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1948년 3월 15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외교관 아버지 아르날두 비에이라 지 멜루와 어머니 질다 두스 산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성인이 된 후 평생 조현병을 앓았던 누나 소니아가 있었다. 아버지의 외교관 근무지를 따라 가족은 어린 시절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이탈리아 제노바와 밀라노, 레바논 베이루트, 이탈리아 로마 등 여러 도시에서 보냈다.
1965년 그는 리우데자네이루 연방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나, 잦은 파업으로 수업이 중단되자 유럽에서 학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파리 대학교 (소르본)에서 Vladimir Jankélévitch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프랑스어 밑에서 철학을 계속 공부했다. 파리에서는 국제대학촌 내 라틴 아메리카 출신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인 Maison de l'Argentine메종 드 라르장틴프랑스어 아파트에 머물렀다. 그는 샤를 드골 정부에 반대하는 1968년 파리 학생 시위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 곤봉에 머리를 맞아 오른쪽 눈썹 위에 영구적인 흉터가 남았다. 그는 또한 시위를 지지하는 편지를 프랑스 좌파 잡지 Combat콩바프랑스어에 게재했는데, 당시 군사 독재 체제였던 브라질로 돌아가는 것을 잠재적으로 위험하게 만들었다.
1969년 소르본 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하여 가족 친구와 함께 지냈고, 유엔난민기구 (UNHCR)에서 편집자로 첫 직장을 얻었다. 그는 경력 초기에 소르본 대학교에서 도덕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통신 과정을 통해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4년에 제출된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현대 사회에서 철학의 역할"이라는 제목이었다. 1985년에는 프랑스 교육 시스템에서 가장 높은 학위인 두 번째 "국가" 박사 학위를 "Civitas Maxima시비타스 막시마라틴어: 초국가성 개념의 기원, 기초 및 철학적, 정치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제출했다. 그는 모국어인 포르투갈어 외에도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에 능통했으며, 아랍어와 테툼어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2.2. 초기 경력 개발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1969년 졸업 후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가 유엔난민기구 (UNHCR)에서 편집자로서 첫 직무를 시작하며 국제 기구에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인도주의 활동에 발을 들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 유엔 경력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30년 이상 유엔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분쟁 지역과 인도주의적 위기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경력은 초기 현장 활동부터 고위직 리더십, 그리고 평화 유지 및 과도기 행정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펼쳐졌다.
3.1. 초기 유엔난민기구(UNHCR) 활동
유엔난민기구(UNHCR)에 합류한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당시 방글라데시 현장으로 파견되었고, 1972년에는 제1차 수단 내전을 종식시키고 약 65만 명의 수단 난민 및 이재민의 귀환을 허용한 아디스아바바 협정 이후 수단에 파견되었다. 1974년 터키의 침공 이후에는 키프로스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초기 임무들은 정치적이기보다는 난민들에게 식량 원조, 피난처 및 기타 유형의 원조를 조직하는 운영적인 역할이었다. 그는 현장에 남아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후 발생한 모잠비크 내전 동안 모잠비크에서 3년 동안 유엔난민기구 작전을 담당했으며, 짐바브웨 (당시 로디지아)에서 백인 통치와 내전을 피해 도피하는 난민들을 돕기 위해 부국장으로서 사실상 임무를 이끌었다. 이후 페루에서 3년을 더 근무했다.
3.2. 외교 및 인도주의 임무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캄보디아의 유엔난민기구 특사로 활동하며 크메르 루주와 대화를 나눈 최초이자 유일한 유엔 대표가 되었다. 1981년부터 1983년 사이에는 유엔 레바논 임시군의 고위 정치 고문으로 근무했다. 1985년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아르헨티나 사무소장으로 라틴 아메리카에 돌아왔다. 1990년대에는 캄보디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지뢰 제거 작업에 참여했다. 중앙아프리카의 난민 문제 해결에 힘쓴 후, 그는 1996년 유엔난민고등판무관보가 되었다. 그는 또한 홍콩의 보트피플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 중반에는 피지를 방문하여 2000년 피지 쿠데타 당시 납치된 피지 총리와 의회 의원들의 인질 사태에 대한 협상 해결을 돕기 위해 영국 연방 사무총장 돈 맥키넌과 함께 노력했다.
3.3. 고위직 및 리더십 역할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1996년 유엔난민고등판무관보로 임명되었고, 2년 후인 1998년에는 유엔 인도주의 업무 조정관 겸 긴급 구호 조정관 (유엔 사무차장급)이 되었다. 그는 2001년 1월까지 이 직책을 다른 직책과 동시에 수행했다. 그는 또한 유엔 본부에서 인도주의 작전의 조정관으로 활동했다.
3.4. 평화 유지 및 과도기 행정
1999년 유엔이 세르비아의 코소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인수한 후,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코소보의 특별 유엔 특사로 활동했다. 1999년 12월부터 2002년 5월까지는 동티모르의 유엔 과도기 행정관을 맡아, 이전에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였던 동티모르를 독립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또한 코소보에서 초기 2개월 동안 특별 대표로 활동했다.
3.5. 인권 고위 대표
2002년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유엔 인권 최고 대표로 임명되어 제네바에서 근무했다. 이 직책은 그의 마지막 임무 중 하나였으며, 그는 전 세계의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유엔의 노력을 이끌었다.
3.6. 이라크 임무
2003년 5월,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유엔 사무총장의 이라크 특별 대표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원래 4개월 동안 지속될 예정이었다. 뉴욕 타임스 매거진 기자 제임스 트라우브의 저서 "최고의 의도들"에 따르면, 비에이라 지 멜루는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의 압력을 받기 전까지 세 차례나 이 임명을 거절했다. 사만다 파워의 저서 "세르지우: 세상을 구하기 위한 한 남자의 싸움"에 따르면, 비에이라 지 멜루는 2003년 3월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관타나모만 수용소의 인권 상황에 대해 논의했는데, 이는 미국에게 논란이 많은 문제였다. 2003년 6월, 비에이라 지 멜루는 아부그라이브 교도소가 재건되기 전에 이를 조사하는 팀의 일원이었다. 그는 이라크 유엔 특별 대표로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2003년 8월 19일 카날 호텔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4. 개인사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국제적인 경력만큼이나 복잡한 면모를 지녔다.
1973년 그는 제네바의 유엔난민기구 본부에서 프랑스인 직원 Annie Personnaz아니 페르소나즈프랑스어를 만나 결혼했으며, 두 아들 로랑과 아드리앙을 두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프랑스의 토농레뱅에 살다가 몇 년 후 제네바 국경 근처의 프랑스 마을 마송지에 영구적인 집을 마련했다.
결혼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세르지우의 사망 이전에 별거 상태였으며, 2003년 1월 9일 이혼 소송이 제기되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2001년부터 그는 동티모르 유엔 임무의 일반 서비스 지원 직원으로 일했던 Carolina Larriera카롤리나 라리에라스페인어와 관계를 맺었다. 세르지우와 카롤리나의 관계는 그의 사망 시까지 지속되었다. 브라질에서는 중혼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카롤리나 라리에라가 10년 이상의 소송 끝에 그의 전 부인, 상속인 및 유산에 대해 승소하여 시민 결합이 유효하게 인정되었다.
유엔은 세르지우와 카롤리나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카롤리나는 자신이 카날 호텔 폭탄 테러 생존자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그녀의 진술이 공격에 관한 보고서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망 후, 그녀는 유엔의 어떤 추모 행사에도 초대받지 못했으며, 전 부인 아니 페르소나즈는 유엔에 의해 세르지우의 미망인으로 인정되었다. 아니 페르소나즈는 여전히 프랑스에 거주하며, 두 아들과 친한 친구 및 동료들과 함께 그의 이름과 기억을 기리기 위해 스위스 자선 단체인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을 공동 설립했다.
5. 사망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2003년 8월 1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유엔 특별 대표로 근무하던 중 카날 호텔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이 테러는 알카에다 테러 조직의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배후를 자처했다. 알카에다의 성명은 비에이라 지 멜루가 동티모르가 독립 국가가 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즉 이슬람 칼리프 국가로부터 영토를 빼앗았기 때문에 암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죽음은 평화 증진을 위한 효과적인 노력으로 얻은 그의 명성 때문에 널리 애도되었다. 비에이라 지 멜루는 생전에 자신의 고향이자 34년 동안 살았던 리우데자네이루에 묻히고 싶다고 밝혔으나, 그의 시신은 브라질이 아닌 스위스 제네바의 왕들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고향인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그를 기리는 국장과 군 의장대가 동원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국제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다. 그는 두 아들 아드리앙과 로랑을 남겼다.
6. 유산 및 기념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사망 후에도 그의 삶과 업적이 국제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기념 사업과 이니셔티브를 통해 기억되고 있다.
6.1. 사후 훈장 및 표창
비에이라 지 멜루는 사후 여러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 최고 훈장인 Légion d'honneur레지옹 도뇌르프랑스어로, 제네바에서 그의 미망인과 두 아들에게 수여되었다. 그는 또한 브라질 정부가 시민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Ordem de Rio Branco히우 브랑쿠 훈장포르투갈어과 2003년 그의 고향 리우데자네이루의 최고 훈장인 Medalha Pedro Ernesto페드루 에르네스투 메달포르투갈어을 받았다. 2004년 4월에는 동서 연구소로부터 "올해의 정치인상"을 사후에 수상했다. 2003년에는 유엔 인권상을, 2004년에는 Pax Christi International Peace Award팍스 크리스티 국제 평화상라틴어을 받았다. 2003년 Villa Decius Association빌라 데키우스 협회폴란드어의 주도로 인권, 민주주의, 관용을 증진하기 위한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폴란드상"이 제정되었으며, 2004년에 첫 시상이 이루어졌다.
6.2. 기념 사업 및 이니셔티브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센터는 그의 어머니 Gilda Vieira de Mello질다 비에이라 지 멜루포르투갈어와 그의 생존 배우자 Carolina Larriera카롤리나 라리에라스페인어 (전 유엔 외교관이자 하버드 출신 전문가)가 그의 유산을 기리기 위해 설립했다. 이 센터는 세르지우의 국적 국가인 브라질과 그가 건국을 도운 동티모르를 비롯한 전 세계의 후원자들과 협력한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센터는 국제 관계를 전문으로 하는 전국적인 대학 네트워크와 미래의 세계 대사 세대를 통해 활동한다. 특히 이 센터는 기술, 기업가 정신 및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멘토와 제자를 동원하고 쉽게 복제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평화 모델을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하버드 대학교와 MIT 엔지니어 및 교육 전문가들과 협력하여 지역 사회와 학교의 역량을 강화한다. 센터는 상아탑 전문가들과 피라미드 하층 및 소외된 젊은이들을 연결하여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발굴한다. ANAPRI아나프리포르투갈어 (국제 관계 전문가 전국 협회)와 함께 의회를 동원하여 해당 분야의 전문화를 위한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고 있다. 센터는 브라질 및 해외에 있는 100개 이상의 학교 및 기관 네트워크를 참여시키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교육 도구와 현물 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제네바에서 매년 국제 영화제 및 인권 포럼 기간 동안 수여되는 그의 아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를 기리는 질다 비에이라 지 멜루 상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상에는 5000 CHF의 상금이 수여된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은 그의 기억을 기리고, 그의 이상을 추구하며, 그의 미완성 임무를 계속하기 위해 2007년에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그의 두 아들과 별거 중이던 아내, 그리고 일부 친구 및 동료들의 주도로 제네바에 설립되었다. 2008년 코피 아난이 첫 연례 강연을 시작했으며, 이후 오가타 사다코 (2009년), 베르나르 쿠슈네르 (2010년), 조제 마누엘 바호주 (2011년), 코르넬리오 소마루가 (2012년)가 강연을 이어갔다. 강연은 제네바 국제 개발 연구 대학원에서 열린다.
200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는 스웨덴이 후원한 총회 결의안 A/63/L.49 "유엔 긴급 구호 조정 강화"를 채택하면서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이 결의안은 다른 중요한 인도주의적 결정들 중에서도 8월 19일을 세계 인도주의의 날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의안은 인도주의적 대의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임무 수행 중 사망한 모든 인도주의 및 유엔 관련 인력에게 특별한 인정을 부여하며, 모든 회원국, 유엔 기구, 기타 국제 기구 및 비정부 기구가 기존 자원 내에서 매년 적절한 방식으로 이를 기념할 것을 촉구한다. 이 획기적인 결의안의 배경에는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의 가족이 8월 19일을 모든 인도주의 인력에게 적절한 추모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한 것이 있었다. 2008년 4월 초,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 이사회는 8월 19일을 세계 인도주의의 날로 지정하는 초안 결의안을 작성하여 총회의 후원 및 채택을 추진했다. 프랑스, 스위스, 일본, 브라질이 이 초안 결의안에 연락을 받고 공동 후원하기로 합의했다.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는 유엔 인간 정주 계획의 일부인 유엔 주택권 프로그램을 설립했으며, 이 프로그램은 "국가 및 기타 이해관계자들이 서식지 의제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의 사망 후, 이탈리아 도시 볼로냐의 중앙 나빌레 지구의 현대적인 부분에 Piazza Sérgio Vieira de Mello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광장이탈리아어이 헌정되었다.
6.3. 문화적 영향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의 삶은 2020년 개봉한 전기 영화 "세르지우"의 소재가 되었으며, 바그너 모라가 주연을 맡았다.
7. 경력 연표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가 유엔에서 맡았던 주요 직책과 활동 시기는 다음과 같다.
- 1969년~1971년: 유엔난민기구 (UNHCR), 스위스 제네바 프랑스어 편집자
- 1971년~1972년: 유엔난민기구 (UNHCR), 동파키스탄 다카 프로젝트 책임자
- 1972년~1973년: 유엔난민기구 (UNHCR), 수단 주바 프로그램 책임자
- 1974년~1975년: 유엔난민기구 (UNHCR), 키프로스 니코시아 프로그램 책임자
- 1975년~1977년: 유엔난민기구 (UNHCR), 모잠비크 마푸투 부대표 및 대표
- 1978년~1980년: 유엔난민기구 (UNHCR), 페루 리마 대표
- 1980년~1981년: 유엔난민기구 (UNHCR), 스위스 제네바 인사과 경력 개발 및 훈련 부서장
- 1981년~1983년: 유엔 레바논 임시군, 평화유지활동국 (DPKO), 레바논 고위 정치 담당관
- 1983년~1985년: 유엔난민기구 (UNHCR), 스위스 제네바 인사 부서장
- 1986년~1988년: 유엔난민기구 (UNHCR), 스위스 제네바 비서실장 및 집행위원회 비서
- 1988년~1990년: 유엔난민기구 (UNHCR), 스위스 제네바 아시아 국장
- 1990년~1991년: 유엔난민기구 (UNHCR), 스위스 제네바 대외 관계 국장
- 1991년~1993년: 유엔 캄보디아 잠정 통치기구 (UNTAC), 평화유지활동국 (DPKO), 캄보디아 프놈펜 송환 및 재정착 작전 국장,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오가타 사다코 특별 특사
- 1993년~1994년: 유엔 보호군 (UNPROFOR), 평화유지활동국 (DPKO),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정치 담당 국장
- 1994년~1996년: 유엔난민기구 (UNHCR), 스위스 제네바 작전 및 기획 국장
- 1996년 10월~12월: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 유엔 사무총장 특별 특사
- 1996년~1998년: 유엔난민기구 (UNHCR), 스위스 제네바 유엔난민고등판무관보
- 1998년~2002년: 유엔 인도주의 업무 조정관 (유엔 사무차장급), 미국 뉴욕
- 1999년 6월~7월: 코소보 유엔 사무총장 특별 대표
- 1999년~2002년: 유엔 동티모르 과도 행정 기구 (UNTAET), 평화유지활동국 (DPKO), 동티모르 딜리 과도기 행정관 및 유엔 사무총장 특별 대표
- 2002년~2003년: 유엔 인권 최고 대표, 스위스 제네바
- 2003년 5월~8월: 이라크 유엔 사무총장 특별 대표
8. 관련 항목
- 평화 운동가 목록
- 루이스 카를루스 다 코스타
- 세계 인도주의의 날
- 세르지우 (2009년 영화)
- 세르지우 (2020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