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오가타 사다코는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쌓은 부친과 외교관이자 정치인인 조부를 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국제적인 환경에서 성장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1. 유년기 및 교육
오가타 사다코는 1927년 9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나카무라 사다코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나카무라 도요이치(中村豊一)는 직업 외교관으로 1943년에는 핀란드 주재 일본 대사가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외무대신 요시자와 겐키치의 딸이자 총리대신 이누카이 쓰요시의 손녀였다. 이누카이 쓰요시는 오가타 사다코가 네 살 때인 1932년 5·15 사건으로 암살당했는데, 이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그의 반대 때문이었으며, 이 암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일본 군부에 대한 민간 통제가 종식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그녀는 네 살부터 여덟 살까지 미국에서 살았으며, 포틀랜드의 캐틀린 게이블 스쿨에 다녔다. 여덟 살부터 열 살까지는 일본의 점령기 동안 아버지가 광저우와 홍콩에서 일본 영사로 근무하면서 중국에서 지냈다. 가족이 일본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에 머물렀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도쿄의 성심여자대학을 졸업하고 영어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일본 여성들이 해외에서 공부하는 것이 흔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지타운 대학교와 그곳의 에드먼드 A. 월시 외국인 서비스 스쿨에서 공부하여 국제 관계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녀는 증조부인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의 암살 이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던 일본이 왜 무모한 침략 전쟁에 돌입했는지 그 이유를 연구하고 싶어 했다. 1963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만주국 건국 이면의 정치학에 대한 논문을 완성한 후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연구는 일본의 중국 침략 원인을 분석했다.
1.2. 초기 활동
1960년에 그녀는 오가타 시주로와 결혼하면서 이름이 나카무라 사다코에서 오가타 사다코로 바뀌었다. 1965년, 그녀는 도쿄의 국제 기독교 대학에서 강사가 되었고, 나중에 준교수로 재직했다. 1968년에는 일본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이치카와 후사에의 추천으로 일본의 유엔 사절단에 임명되었으며, 1970년에는 여러 유엔 총회 세션에서 일본을 대표했다. 또한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유엔 일본 정부 대표부 특명전권공사를 역임했다. 1978년부터 1979년까지는 유니세프 집행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1980년부터는 도쿄의 조치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을 가르쳤으며, 교수로서 국제 관계 연구소장을 지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부인 문제 기획 추진 회의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유엔 인권 위원회 일본 정부 대표를 역임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국제 인도주의 문제 독립 위원회 위원으로,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조치 대학 국제 관계 연구소장으로 활동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조치 대학 외국어 학부장을 지냈으며, 1990년에는 유엔 인권 위원회 미얀마 인권 상황 전문관을 맡았다. 또한 일본 모의 유엔 활동의 창시자로서 일본 모의 유엔 실행 위원회(현 일본 모의 유엔, JMUN)의 고문으로 발족에 참여했다. 그녀는 1991년 UNHCR에 합류하기 전까지 조치 대학에서 외국어 학부장을 지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오가타 사다코는 외교 및 국제 봉사, 그리고 학술 활동을 통해 국제 인도주의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2.1. 외교 및 국제 봉사 경력
오가타 사다코는 유엔과 일본 정부, 그리고 난민 교육 재단 등 다양한 국제기구와 정부 기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국제적인 인도주의 위기 해결과 인간 안보 증진에 기여했다.
2.1.1. 유엔 난민고등판무관 (UNHCR)
오가타 사다코는 1990년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었고, 1991년부터 UNHCR의 수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UNHCR의 수장으로 임명된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UNHCR 재임 기간은 당초 3년으로 예상되었으나, 두 차례(1993년 11월, 1998년 9월) 재선되어 2001년까지 10년 이상 봉사했다.
UNHCR의 수장으로서 그녀는 효과적인 전략을 이행하고 수많은 난민들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여기에는 걸프 전쟁 이후 쿠르드족 난민,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난민, 르완다 집단학살의 난민, 그리고 냉전 희생자를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난민 등이 포함된다. 튀르키예와 이라크 국경의 쿠르드족 난민 문제에 직면하여 오가타는 UNHCR의 임무를 확대하여 국내실향민(IDPs) 보호까지 포함하도록 했다. 그녀는 보스니아 전쟁 중 사라예보 공성전과 일부 유럽 공군과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공수 작전에서 군대를 인도주의 작전에 투입하는 등 실용적인 리더였다. 이 기간 동안 UNHCR의 예산과 직원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그녀의 탁월한 협상 능력과 작은 체구는 그녀에게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2001년 UNHCR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녀는 유엔 인간 안보 위원회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2.1.2. 일본 국제협력기구 (JICA) 회장
2001년 9.11 테러 이후, 그녀는 아프가니스탄 재건 지원을 위한 일본 총리 특별 대표로 임명되었다. 2002년 초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부는 다나카 마키코를 대신할 일본 외무대신 후보로 오가타에게 접근했으나, 오가타는 그 직책을 수락하기를 거부했다. 오가타는 공식적으로 거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노구치 구니코는 오가타가 "여성들을 위해 평생 싸워왔기 때문에 단지 상징적인 인물이나 명예직으로 이용되는 것을 몹시 싫어했을 것"이라고 뉴욕 타임스에 전했다.

다음 해인 2003년 10월 1일, 일본 정부는 그녀를 국제협력기구(JICA) 회장으로 임명했다. 공식 임명 전부터 젊은 JICA 직원들이 그녀의 리더십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명했다고 보도되었다. 그녀는 "현장 중심"이라는 개념과 인간 안보에 대한 강조를 바탕으로 JICA를 이끌었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과 민다나오에서 평화 구축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녀의 리더십 아래 JICA는 융자 지원을 추가하여 2008년 세계 최대의 양자 원조 기관이 되었다. 그녀는 JICA 회장으로 8년 이상(두 임기 이상) 계속 재직했으며, 2012년 4월에 은퇴했고 후임으로 다나카 아키히코가 임명되었다.
2012년 4월 17일, 당시 겐바 고이치로 외무대신이 도쿄에서 "오가타 사다코 씨의 우리나라 및 국제사회에 대한 공헌에 경의를 표하는 리셉션"을 개최했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도 연설했는데, 그는 "2011년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160개 이상의 국가와 40개 이상의 국제기구에서 일본에 대한 지원 제의가 있었던 것은 오가타 사다코 씨의 업적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2.1.3. 난민 교육 재단 (RET International)
2000년 12월,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 사무소(UNHCR)에서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나는 동시에 UNHCR 50주년을 기념하여 오가타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난민 교육 재단(RET International영어)의 출범을 발표했다. RET에 대한 오가타의 비전은 유엔 난민 기구의 수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녀가 목격했던, 특히 청소년 교육 분야에서의 거대한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었다.
"난민 교육 신탁"(Refugee Education Trust영어)의 약자인 이 단체는 난민들을 위한 중등 교육에 전념할 것이었는데, 오가타는 이를 해결해야 할 중요한 격차로 보았다. 그녀는 청소년들에게 어떠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으면 불법 활동, 갱단, 미성년 노동, 마약 밀매, 성폭행, 인신매매 및 폭력에 극도로 취약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RET는 이들이 이러한 위협에 맞설 수 있는 기술을 제공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회복력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처음에는 RET가 교육을 도구로 사용하여 난민 캠프에서만 활동했다. 그러나 난민 이주 패턴이 변하고 새로운 위기가 발생함에 따라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패러다임이 변화했고, 이 단체는 난민 캠프에 특화된 방법들을 개발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취약 환경의 젊은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현재(2025년 기준) 이 단체는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 15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수년 동안 UNHCR을 포함한 여러 유엔 기관뿐만 아니라 각국 정부, 그리고 민간 재단과 직접 협력하여 취약 공동체에 기회를 제공해 왔다.
2.1.4. 기타 공공 봉사 활동
오가타는 2004년 11월 27일 일본의 황실전범에 관한 자문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위원회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사적 자문 기구로 일본 내각부 소속이었다. 위원회는 2005년 1월 25일부터 일본의 황위 계승 문제와 황실전범을 논의하기 위해 17차례 회의를 개최했다. 2005년 11월 24일, 자문 위원회의 권고안에는 여성 구성원의 황위 계승권(여계 계승 포함)과 황실 여성 구성원에게까지 장자 계승을 확대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오가타와 미치코 상황후의 모교는 모두 성심여자대학이다. 그녀는 또한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재단에도 참여했다.
2.2. 학술 활동 및 저술
오가타 사다코는 국제 정치학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과 저술을 펼쳤다. 주요 저서들은 그녀의 연구 분야와 사상을 잘 보여준다.
- Defiance in Manchuria: the Making of Japanese Foreign Policy, 1931-1932영어(Greenwood Press, 1964) - 한국어 번역판: 『만주사변과 정책의 형성 과정』(원서방, 1966), 『만주사변-정책의 형성 과정』(이와나미 현대문고, 2011).
- Normalization with China: A Comparative Study of U.S. and Japanese Processes영어(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1988) - 한국어 번역판: 『전후 일중·미중 관계』(도쿄대학출판회, 1992).
- 『난민 만들지 않는 세계로』(이와나미 쇼텐, 1996).
- 『나의 일-유엔 난민 고등판무관 10년과 평화 구축』(소시샤, 2002).
- The Turbulent Decade: Confronting the Refugee Crises of the 1990s영어(WW Norton, 2005) - 한국어 번역판: 『분쟁과 난민-오가타 사다코의 회상』(슈에이샤, 2006).
- 『함께 산다는 것-be humane』(PHP 연구소, 2013).
- 『여성과 부흥 지원-아프가니스탄 현장에서』(이와나미 쇼텐, 2004) - 유니펨 일본과 공저.
- 『전환기의 해외 원조』(일본방송출판협회, 2005) - 편저.
- 『세계의 난민』(아카시 쇼텐, 1984) - 안셀모 마타이스와 공편.
- 『글로벌 거버넌스의 역사적 변용-유엔과 국제 정치사』(미네르바 쇼보, 2007) - 한자와 아사히코와 공편.
- 『구술 오가타 사다코 회고록』(이와나미 쇼텐, 2015).
3. 사상 및 철학
오가타 사다코의 사상과 철학은 그녀의 개인적 배경, 학문적 탐구, 그리고 국제 인도주의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깊이 형성되었다.
3.1. 주요 사상 형성 배경
오가타의 사상은 그녀의 학문적 배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국제 관계학 석사 학위를,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그녀는 제국주의와 전쟁의 원인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특히 증조부인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군국주의에 반대하다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으면서 일본이 왜 무모한 침략 전쟁에 돌입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탐구는 단순히 과거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에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집중되었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UNHCR)으로서 10년이 넘는 재임 기간 동안 그녀는 발칸반도 전쟁, 르완다 집단학살,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전 세계의 참혹한 난민 위기 현장을 직접 마주했다. 현장에서의 직접적인 경험은 그녀의 "현장 중심주의" 철학을 강화시켰으며, 단순히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실천적인 사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난민의 고통을 단순히 통계 숫자로 보지 않고, 개개인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3.2. 사상의 특징 및 내용
오가타 사다코의 사상적 핵심은 '인간 안보' 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에 있었다. 그녀는 전통적인 '국가 안보'가 아닌, 개개인의 생존, 생활, 존엄을 보장하는 '인간 안보'를 국제사회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로 제시했다. JICA 회장 재임 시 이 개념을 일본의 개발 원조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단순히 물자 지원을 넘어 사회 기반 시설 구축, 교육, 보건 등 다각적인 접근을 통해 주민들의 생활 안정과 자립을 지원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그녀는 '현장 중심주의'를 강조했다. 이는 그녀가 UNHCR 수장 시절 난민 캠프를 직접 방문하고, 분쟁 지역의 군사 작전에도 인도주의적 지원을 연계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잡한 국제 문제의 해결은 책상에 앉아서는 불가능하며, 실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현장에서 직접 행동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난민 교육 재단(RET International) 설립은 오가타 사다코의 사상이 구체화된 중요한 사례이다. 그녀는 청소년들이 교육 기회를 박탈당할 경우 범죄, 착취, 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난민 청소년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회복탄력성을 키우고 자립적인 삶을 살아가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의 이러한 사상은 1995년 자유 훈장 수락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는 "만약 우리가 난민들의 곤경이나 그들을 받아들인 국가들의 부담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재발하는 폭력으로 인해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난민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평화롭고 관용적인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조건이 시급히 조성되어야 합니다."라고 역설하며 난민 문제 해결에 대한 국제사회의 책임과 인도주의적 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가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4. 개인사
오가타 사다코의 개인사는 그녀의 공적인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가족 관계는 그녀의 성장 배경과 일본 사회 내에서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
4.1. 결혼 및 가족
1960년 오가타 사다코는 일본은행 간부이자 후에 상임 이사가 된 오가타 시주로(1927-2014)와 결혼했다. 결혼 후 그녀는 나카무라 사다코에서 오가타 사다코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녀에게는 한 명의 아들인 오가타 아쓰시(영화감독)와 한 명의 딸이 있다.
그녀의 증조부는 5·15 사건으로 암살당한 이누카이 쓰요시 일본 총리이며, 조부는 외교관이자 이누카이 내각의 외무대신을 지낸 요시자와 겐키치이다. 그녀의 어머니 츠네코는 이누카이 겐의 자녀인 이누카이 미치코(평론가), 이누카이 야스히코(전 교도 통신 사장), 안도 가즈 (수필가)와 사촌 관계이다.
남편 오가타 시주로의 아버지인 오가타 다케토라는 아사히 신문사 부사장을 지냈고, 자유당 총재 및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부총리를 역임했다. 오가타 씨는 다케토라의 조부인 오가타 이쿠조(본성 오토 씨, 빗추국 출신)가 오가타 고안과 의형제를 맺고 그 성을 따르면서 시작되었다.
그녀의 외삼촌인 이구치 사다오는 외무사무차관과 미국 주재 일본 대사를 지낸 외교관이다. 외무사무차관과 시종장을 지낸 외교관 가와시마 유는 그녀의 사촌이다. 또한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이자 전후 미국 유학을 했으며 일본 여성 유엔 직원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사자나미 요코(구 성 가와시마)도 그녀의 사촌이다.
5. 사망
오가타 사다코는 2019년 10월 22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일로 정삼위에 추서되었다. 그녀의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
6. 평가
오가타 사다코는 국제사회에서 탁월한 지도력과 인도주의적 공헌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6.1. 긍정적 평가
오가타 사다코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UNHCR) 재임 시절 보여준 강력한 리더십과 실천적 접근 방식으로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협상 능력과 카리스마로 복잡한 국제 분쟁 속에서 난민들을 위한 길을 열었다. 특히 걸프 전쟁 후 쿠르드족 난민 문제에 직면하여 UNHCR의 mandate를 확대하여 국내실향민(IDPs) 보호까지 포함시킨 것은 그녀의 혁신적인 기여로 평가된다. 이는 난민 개념을 재정의하고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대응 범위를 넓힌 중요한 변화였다.
그녀의 지도 아래 UNHCR의 예산과 직원이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은 그녀의 효율적인 조직 관리 및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현장 중심의 접근 방식을 고수하며 난민들의 실제 필요에 부응하고, 때로는 군사력을 인도주의 작전에 연계하는 과감한 결정을 통해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일본 국제협력기구(JICA) 회장으로서 '인간 안보' 개념을 일본의 대외 원조 정책에 깊이 뿌리내리게 한 것도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그녀는 단순히 경제적 지원을 넘어 교육, 보건, 평화 구축 등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총체적인 지원을 강조하여 JICA를 세계 최대의 양자 원조 기관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그녀의 업적이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따뜻한 지원으로 이어졌다고 언급한 것은 그녀의 영향력이 일본의 국격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7. 영향력
오가타 사다코는 국제 정치학 및 인도주의 분야에서 다방면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7.1. 후대에 미친 영향
오가타 사다코는 일본인 여성으로서 국제 무대에서 최고위직에 오르며 후대 여성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조치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 교수를 역임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고, 일본에서 모의 유엔 활동을 창시하며 젊은 세대가 국제 문제에 대한 이해와 참여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특히 '현장 중심주의'와 '인간 안보'라는 그녀의 핵심 사상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의 정책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인도주의 지원 및 개발 원조 분야의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녀의 난민에 대한 깊은 이해와 헌신은 전 세계 인도주의 활동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7.2. 특정 분야에 대한 기여
오가타 사다코는 국제 정치와 인도주의 분야에 혁신적인 기여를 했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으로서 그녀는 난민 보호의 개념을 확대하여 국내실향민까지 포함시켰는데, 이는 현대 복합 위기 상황에서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국내실향민들이 발생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매우 선구적인 결정이었다. 그녀는 1990년대의 주요 난민 위기(걸프 전쟁, 유고슬라비아 전쟁, 르완다 집단학살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난민들의 생존과 존엄성을 지키는 데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일본 국제협력기구(JICA) 회장으로서 그녀는 일본의 개발 원조 철학에 '인간 안보' 개념을 확고히 정립시켰다. 이는 단순히 경제 성장을 위한 인프라 구축을 넘어, 개인의 존엄성 보장과 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춘 포괄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과 필리핀 민다나오 등지에서 평화 구축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분쟁 후 재건과 안정화에 기여했다. 난민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 난민 교육 재단(RET International)을 설립한 것은 교육을 통한 장기적인 문제 해결과 자립 지원에 대한 그녀의 신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여이다.
8. 기념 및 추모
오가타 사다코는 그녀의 뛰어난 업적과 인도주의적 공헌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추모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을 딴 'JICA 오가타 연구소'는 국제 개발 및 인도주의 연구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오가타 사다코는 생전에 수많은 영예와 훈장을 받았다. 일본 국내에서는 2001년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고, 2003년에는 최고 영예인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2004년에는 도쿄도 명예 도민이 되었으며, 사망 후인 2019년에는 정삼위에 추서되었다.
국제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상과 훈장을 받았다.
- 1993년: Colombe d'Oro per la Pace이탈리아 황금 비둘기 평화상이탈리아어
- 1994년: 자유주의 인터내셔널의 자유를 위한 상
- 1995년: 필라델피아 자유 훈장
- 1996년: 유네스코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평화상
- 1997년: 라마사이상 평화·국제 이해 부문
- 1999년: 아사히 신문 특별상
- 2000년: 서울평화상
- 2001년: 러시아의 우호훈장,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 대공로십자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기사, 북극성 훈장 코망데르 1등급, 인디라 간디상
- 2002년: 풀브라이트 국제 이해상, 브라운 대학교 인문학 명예 박사 학위, 엘리노어 루스벨트 발킬 훈장
- 2005년: 세계 시민상
- 2006년: 필리핀의 라칸둘라 훈장 마링갈 나 피누노
- 2008년: 네덜란드의 오라녜 나사우 훈장 그랜드 오피서
- 2009년: 고토 신페이 상
- 2011년: 성 미카엘과 성 제오르지오 훈장 데임 커맨더(DCMG), 키르기스스탄 국가 우호장(다네케르 장)
- 2012년: 대서양 평의회의 지구 시민상
- 2013년: 멕시코의 아스테카 독수리 훈장 반다, 필리핀의 시카투나 훈장 다투
- 2017년: 코소보 인도주의 메달 마더 테레사
9. 관련 항목
-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 사무소
- 국내실향민
- 르완다 집단학살
- 일본 국제협력기구
- 인간 안보
- 이누카이 쓰요시
- 요시자와 겐키치
- 오가타 시주로
- 오가타 아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