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및 교육
샤킬 오닐의 어린 시절은 가족의 잦은 이사와 농구에 대한 열정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농구 선수로서의 재능을 발휘하며 대학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1.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
샤킬 래숀 오닐은 1972년 3월 6일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루실 오닐과 조 토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부인 조 토니는 고등학교 농구 선수로 올스테이트 가드였으며 시튼 홀 대학교 농구 장학금을 제안받기도 했으나, 약물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오닐이 갓난아기일 때 마약 소지 혐의로 수감되었다. 출소 후 그는 오닐의 삶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오닐의 자메이카계 의붓아버지이자 직업군인인 미국 육군 상사 필립 아서 해리슨에게 친권을 포기하는 데 동의했다. 오닐은 수십 년 동안 생부와 소원하게 지냈으며, 1994년 랩 앨범 《샤크 푸: 더 리턴》의 수록곡 "Biological Didn't Bother"에서 "필이 내 아버지"라고 말하며 토니에 대한 경멸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3년 해리슨의 사망 이후 오닐의 토니에 대한 감정은 누그러졌고, 둘은 2016년 3월 처음으로 만났다. 이때 오닐은 토니에게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아요. 나는 좋은 삶을 살았고, 필이 있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오닐은 키가 큰 가족 출신이다. 그의 생부와 어머니는 각각 185 cm와 188 cm였으며, 오닐은 13세 때 이미 198 cm에 달했다. 그는 뉴어크의 미국 소년소녀 클럽이 자신에게 안전한 놀이 공간을 제공하고 길거리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곳은 나에게 할 일을 주었다. 나는 단지 슛을 쏘러 갔을 뿐, 팀에서 뛰지도 않았다"고 회상했다. 의붓아버지의 군인 경력 때문에 가족은 뉴어크를 떠나 독일과 텍사스주의 군사 기지로 이사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오닐의 가족은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정착했다. 16세 때 오닐은 키가 208 cm로 자랐고, 로버트 G. 콜 고등학교에서 농구를 시작했다. 그는 2년 동안 팀을 68승 1패의 기록으로 이끌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팀이 주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1989년 시즌 동안 그가 기록한 791개의 리바운드는 모든 등급의 선수 중 주 기록으로 남아있다. 오닐의 훅 슛 능력은 카림 압둘-자바와 비교되었고, 그에게 압둘-자바와 같은 등번호 33번을 입고 싶다는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고등학교 팀에는 33번 유니폼이 없었기 때문에, 오닐은 대학에 가기 전까지 32번을 입기로 선택했다.
1.2. 대학 농구 경력
198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오닐은 LSU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는 몇 년 전 서독의 빌트플레켄에 있는 미국 육군 기지에 의붓아버지가 주둔했을 때 유럽에서 타이거스의 코치 데일 브라운을 처음 만났다. LSU에서 브라운 밑에서 뛰는 동안, 오닐은 2차례 NCAA 남자 농구 올-아메리칸에 선정되었고, 2차례 SEC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1991년에는 아돌프 럽 트로피와 AP 통신 및 UPI로부터 올해의 대학 농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오닐은 NBA 경력을 위해 LSU를 일찍 떠났지만, 프로 선수가 된 후에도 학업을 계속했다. 그는 나중에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교 체육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LSU 농구 연습 시설 앞에는 408 kg에 달하는 오닐의 청동 동상이 세워져 있다.
2. 프로 경력
샤킬 오닐은 19년 동안의 NBA 경력에서 여러 팀을 거치며 농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각 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수많은 업적을 달성했다.
2.1. 올랜도 매직 (1992-1996)
오닐은 올랜도 매직에서 NBA 경력을 시작하며 신인왕을 수상하고 팀을 플레이오프와 NBA 파이널로 이끌었다.
2.1.1. 신인왕 수상 (1992-1993)
올랜도 매직은 1992년 NBA 드래프트에서 오닐을 전체 1순위로 지명했다. 올랜도로 이주하기 전 여름,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매직 존슨의 지도를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오닐은 테리 캐틀리지가 33번 유니폼을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32번을 입었다. 오닐은 NBA 데뷔 첫 주에 '이주의 선수'로 선정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신인 시즌 동안 오닐은 경기당 평균 23.4득점(56.2% 야투 성공률), 13.9리바운드, 3.5블록을 기록했다. 그는 1993년 NBA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1985년 마이클 조던 이후 처음으로 올스타 선발로 뽑힌 신인 선수였다. 매직은 41승 41패로 이전 시즌보다 20승을 더 거두었지만,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타이브레이커에서 밀려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그 해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작가 잭 맥컬럼은 오닐이 "매티 [구오카스를 내보내고 브라이언 [힐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전했다.
2.1.2. 첫 플레이오프 진출 (1993-1994)
1993-94 시즌, 오닐의 두 번째 시즌에는 힐이 감독이 되었고 구오카스는 프런트 오피스로 재배치되었다. 오닐은 경기당 득점 평균을 29.4점(리그 2위, 데이비드 로빈슨에 이어)으로 끌어올렸고, 60%의 야투 성공률로 NBA 전체 1위를 기록했다. 1993년 11월 20일 뉴저지 네츠와의 경기에서 오닐은 24득점, 개인 최고 기록인 28리바운드, 15블록을 기록하며 경력 첫 트리플 더블을 달성했다. 그는 올스타전에 선정되었고 올-NBA 서드 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새로 드래프트된 앤퍼니 "페니" 하더웨이와 함께, 매직은 50승 32패의 기록으로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첫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오닐은 경기당 20.7득점, 13.3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페이서스가 매직을 스윕하며 탈락했다.
2.1.3. 첫 득점왕 및 NBA 파이널 진출 (1994-1996)
오닐의 세 번째 시즌인 1994-95 시즌에 그는 경기당 29.3득점으로 NBA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MVP 투표에서 데이비드 로빈슨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하더웨이와 함께 세 번째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그들은 리그 최고의 듀오 중 하나를 형성하며 올랜도가 57승 25패의 기록과 애틀랜틱 디비전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매직은 1995년 NBA 플레이오프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구단 역사상 첫 플레이오프 시리즈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시카고 불스를 꺾었다.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물리친 후, 매직은 1995년 NBA 파이널에 진출하여 디펜딩 챔피언 휴스턴 로키츠와 맞붙었다. 오닐은 첫 파이널 출전에서 28득점(59.5% 야투 성공률), 12.5리바운드, 6.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킴 올라주원과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이끄는 로키츠는 4경기 만에 시리즈를 스윕했다.
오닐은 1995-96 시즌의 상당 부분을 부상으로 결장하며 28경기를 뛰지 못했다. 그는 경기당 26.6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올-NBA 서드 팀에 선정되었으며, 네 번째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오닐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매직은 정규 시즌 60승 22패를 기록하며 NBA 기록인 72승을 달성한 시카고 불스에 이어 동부 컨퍼런스 2위를 차지했다。올랜도는 1996년 NBA 플레이오프 첫 두 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애틀랜타 호크스를 쉽게 물리쳤지만, 마이클 조던의 불스에는 상대가 되지 못했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스윕당했다.
2.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96-2004)
레이커스 시절 오닐은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관계 속에서 NBA MVP와 3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보냈으나, 결국 팀을 떠나게 되었다.
2.2.1. O'Neal-Bryant 탠덤 구축 (1996-1999)

오닐은 1995-96 NBA 시즌 이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1996년 여름, 오닐은 미국 올림픽 농구팀에 선발되었고, 이후 애틀랜타에서 열린 1996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팀의 일원이 되었다. 올림픽 농구팀이 올랜도에서 훈련하는 동안, 올랜도 센티넬은 매직이 오닐의 복귀 조건 중 하나로 힐을 해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발표했다. 82%가 "아니오"라고 답했다. 오닐은 힐 밑에서 뛰는 동안 권력 다툼을 겪었다. 그는 팀이 "힐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설문조사의 또 다른 질문은 매직의 제안 금액인 1억 1,500만 달러에 오닐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물었고, 응답자의 91.3%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오닐의 올림픽 팀 동료들은 그를 설문조사로 놀렸다. 그는 또한 올랜도 언론이 오닐이 오랜 여자친구와 결혼 계획 없이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좋은 롤모델이 아니라고 암시한 것에 대해 불쾌해했다. 오닐은 올랜도에서의 사생활 부족을 "마른 연못 속의 큰 물고기 같은 느낌"에 비유했다. 그는 또한 하더웨이가 자신을 매직의 리더로 생각하며 오닐이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팀의 첫 번째 완전한 날, 언론은 오닐이 7년 1억 2,100만 달러 계약으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합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오닐은 돈 때문에 로스앤젤레스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계약에 대해 그는 자신의 제품 광고 중 몇 가지를 언급하며 "돈, 돈, 돈, 돈, 돈 소리는 지겹다. 나는 그저 경기를 하고, 펩시를 마시고, 리복을 신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레이커스는 1996-97 시즌 동안 56승을 거두었다. 오닐은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첫 시즌에 평균 26.2득점, 12.5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다시 30경기 이상을 결장했다.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2라운드에서 유타 재즈에 5경기 만에 탈락했다. 레이커스에서 첫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오닐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상대로 46득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1969년 제리 웨스트가 53득점을 기록한 이후 레이커스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가장 높은 득점이었다. 1996년 12월 17일, 오닐은 시카고 불스의 데니스 로드먼을 밀쳤고, 로드먼의 팀 동료인 스코티 피펜과 마이클 조던이 로드먼을 제지하며 더 이상의 충돌을 막았다. 로스앤젤레스 데일리 뉴스는 오닐이 로드먼과 싸우기 위해 출장 정지를 기꺼이 감수할 의향이 있다고 보도했고, 오닐은 "강하게 말하는 것과 강한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다음 시즌에 오닐은 평균 28.3득점, 11.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58.4%의 야투 성공률로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4시즌 연속으로 이어진 첫 기록이었다. 레이커스는 61승 21패로 시즌을 마쳤고, 퍼시픽 디비전 1위를 차지했으며, 1998년 NBA 플레이오프에서 서부 컨퍼런스 2번 시드를 받았다. 첫 두 라운드에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시애틀 슈퍼소닉스를 물리친 후, 레이커스는 다시 재즈에 패했는데, 이번에는 4-0 스윕으로 탈락했다.
오닐과 십대 슈퍼스타 코비 브라이언트의 탠덤으로 인해 레이커스에 대한 기대는 커졌지만, 1998-99 시즌 동안 인력 변화는 불안정의 원인이 되었다. 오랜 기간 레이커스의 포인트 가드였던 닉 밴 엑셀은 덴버 너기츠로 트레이드되었고, 그의 전 백코트 파트너인 에디 존스는 백업 센터 엘든 캠벨과 함께 글렌 라이스를 영입하기 위해 트레이드되었는데, 이는 슈터를 원하는 오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델 해리스 감독은 해고되었고, 전 레이커스 포워드 커트 램비스가 시즌을 감독으로 마쳤다. 레이커스는 록아웃으로 단축된 시즌 동안 31승 19패의 기록으로 마쳤다. 그들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서부 컨퍼런스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팀 던컨과 데이비드 로빈슨이 이끄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스윕당했다. 스퍼스는 1999년 첫 NBA 타이틀을 획득했다.
2.2.2. MVP 및 우승 시즌 (1999-2002)
1999년,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는 필 잭슨을 감독으로 고용했고, 팀의 운명은 곧 바뀌었다. 잭슨은 오닐에게 "은퇴할 때쯤이면 [NBA의] MVP 트로피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즉시 오닐에게 도전했다.
1999년 11월 10일 휴스턴 로키츠와의 경기에서 오닐과 찰스 바클리는 퇴장당했다. 오닐이 바클리의 레이업을 블록한 후, 오닐이 바클리를 밀쳤고, 바클리는 공을 오닐에게 던졌다. 2000년 3월 6일, 오닐의 28번째 생일에 그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를 상대로 123-103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개인 최고 기록인 61득점과 23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오닐의 61득점 경기는 2023년 12월 13일 야니스 아데토쿤보가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상대로 64득점을 기록하기 전까지 NBA 역사상 3점슛 없이 60득점 이상을 기록한 마지막 경기였다.
오닐은 또한 1999-2000 정규 시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는데, NBA 역사상 첫 만장일치 MVP가 되는 데 한 표가 부족했다. 당시 CNN의 프레드 히크먼은 대신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앨런 아이버슨을 선택했는데, 아이버슨은 다음 시즌에 MVP를 수상했다. 오닐은 또한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리바운드 2위, 블록 3위를 기록했다. 잭슨의 영향으로 오닐은 수비에 대한 새로운 헌신을 보였고, 그 결과 2000년 첫 NBA 올-디펜시브 팀 선정(세컨드 팀)을 받았다.
2001년 NBA 파이널에서 76ers를 상대로 오닐은 3차전에서 2000-2001 올해의 수비수인 디켐베 무톰보를 등지고 플레이하다 파울 아웃당했다. 오닐은 "나는 경기 최고의 수비수가 그렇게 플라핑할 줄은 몰랐다. 심판들이 그런 것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가 매번 내가 그를 등지고 플레이할 때마다 플라핑하고 울지 말고 남자답게 맞서 싸우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2001-02 시즌 훈련 캠프 한 달 전, 오닐은 왼발 새끼발가락의 망치발가락 변형에 대한 교정 수술을 받았다. 그는 더 빠른 복귀를 위해 더 복잡한 수술을 피했다. 그는 2001-02 정규 시즌 시작에 맞춰 준비되었지만, 발가락은 자주 그를 괴롭혔다.
2002년 1월, 그는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에서 코트 위에서 벌어진 난투극에 연루되었다. 그는 득점을 막기 위한 고의적인 파울 후 센터 브래드 밀러를 주먹으로 때렸고, 이로 인해 밀러, 포워드 찰스 오클리, 그리고 다른 여러 선수들과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오닐은 3경기 무급 출장 정지와 1.50 만 USD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이 시즌 동안 오닐은 평균 27.2득점, 10.7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는 훌륭한 기록이지만 그의 경력 평균보다는 낮았고, 시즌 동안 수비에서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2002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새크라멘토 킹스와 맞붙었을 때, 오닐은 "우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C'로 시작해서 'T'로 끝난다"고 말했다. 오닐은 킹스의 센터 블라데 디바츠의 플라핑을 언급하며 "속임수(cheat)"를 의미했다. 오닐은 디바츠를 "그녀"라고 부르며, 자신은 파울을 얻기 위해 과장된 접촉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재능 없는 사람이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덧붙였다.
2001-2002 시즌 이후, 오닐은 친구들에게 오른쪽 엄지발가락의 통증 때문에 더 이상 절뚝거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기동성과 폭발력은 종종 사라졌다. 교정 옵션은 발가락 재건 수술부터 더 많은 신발 깔창과 소염제를 사용한 재활 운동까지 다양했다. 오닐은 이미 이러한 약물의 잦은 복용이 장기적으로 미칠 손상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그는 자신의 경력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결정을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잭슨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사용하여 오닐과 브라이언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레이커스를 3연속 우승(2000년, 2001년, 2002년)으로 이끌었다. 오닐은 세 번 모두 NBA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으며, NBA 파이널 역사상 센터 중 가장 높은 득점 평균을 기록했다.
2.2.3. 발가락 수술부터 이적까지 (2002-2004)
오닐은 발가락 수술에서 회복하기 위해 2002-03 시즌의 첫 12경기를 결장했다. 그는 엄지발가락의 퇴행성 관절염인 강직성 무지외반증으로 인해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그는 여름 내내 훈련 캠프 직전까지 수술을 기다렸고, "나는 회사 시간에 다쳤으니, 회사 시간에 회복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오닐은 3개월 더 결장해야 하는 더 침습적인 수술을 받을지 고민했지만, 더 복잡한 시술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레이커스는 11승 19패의 기록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시즌 말, 레이커스는 5번 시드로 떨어졌고 2003년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다.
2003-04 시즌을 위해 팀은 오프시즌 동안 로스터 개선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노장 스타인 포워드 칼 말론과 가드 게리 페이턴의 자유 계약 서비스를 모색했지만, NBA 샐러리 캡 제한으로 인해 다른 팀들이 제시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을 제안할 수 없었다. 오닐은 영입 노력에 도움을 주었고, 두 선수 모두에게 NBA 챔피언십 우승 기회를 위해 더 큰 연봉을 포기하고 팀에 합류하도록 개인적으로 설득했다. 2003-04 시즌 초, 오닐은 남은 3년 계약에 대해 3000.00 만 USD의 연봉 인상을 포함한 계약 연장을 원했다. 레이커스는 오닐의 나이, 신체 상태, 부상으로 인한 결장 경기 수를 고려하여 그가 더 적은 돈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프리시즌 경기 중, 오닐은 레이커스 구단주 제리 버스에게 "돈을 줘"라고 소리쳤다. 오닐과 브라이언트 사이의 긴장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이 불화는 2003-2004 시즌 훈련 캠프 직전 브라이언트가 ESPN 기자 짐 그레이와의 인터뷰에서 오닐이 몸매가 좋지 않고, 리더십이 부족하며, 팀의 최선보다 자신의 연봉 요구를 우선시한다고 비난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레이커스는 2004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2004년 NBA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패했다. 레이커스 보조 코치 텍스 윈터는 "샤크는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스스로를 패배시켰다. 그는 너무 수동적으로 플레이했다. 그는 한 번의 큰 경기를 치렀을 뿐이다... 그는 항상 득점하는 데 관심이 있지만, 수비와 리바운드에는 충분히 집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리즈가 끝난 후, 오닐은 구단주 버스의 요청으로 레이커스 감독 필 잭슨이 떠난 것뿐만 아니라, 오닐의 팀 내 미래에 대한 레이커스 단장 미치 컵책의 발언에 분노했다. 오닐은 팀의 결정이 브라이언트의 비위를 맞추려는 욕구에 집중되어 다른 모든 우려를 배제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고, 즉시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컵책은 댈러스 매버릭스의 디르크 노비츠키를 원했지만, 매버릭스 구단주 마크 큐반은 그의 213 cm 선수를 보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마이애미가 오닐에게 관심을 보였고, 결국 두 구단은 트레이드에 합의했다. 윈터는 "[오닐]은 자신이 원하는 것, 즉 엄청난 연봉 인상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떠났다. 구단주가 그가 원하는 것을 줄 방법이 없었다. 샤크의 요구는 구단을 인질로 잡았고, 그가 행동한 방식은 구단주를 그다지 기쁘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2.3. 마이애미 히트 (2004-2008)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한 오닐은 팀을 챔피언십으로 이끌며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갔으나, 부상과 팀 내 불화로 인해 결국 팀을 떠나게 되었다.
2.3.1. MVP 준우승 (2004-2005)
2004년 7월 14일, 오닐은 마이애미 히트로 트레이드되었고, 그 대가로 캐론 버틀러, 라마 오돔, 브라이언 그랜트, 그리고 미래의 1라운드 드래프트 지명권(레이커스는 이 지명권으로 2006년 드래프트에서 조던 파마를 지명했다)을 받았다. 오닐은 레이커스에서 입었던 등번호 34번에서 매직 시절 입었던 32번으로 돌아갔다. 히트와 계약하면서 오닐은 팬들에게 마이애미에 챔피언십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마이애미로 트레이드되기를 원했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떠오르는 스타 드웨인 웨이드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며, 그에게 "플래시"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오닐의 합류로 새롭게 변모한 히트는 예상을 뛰어넘어 2004-05 시즌 59승으로 동부 컨퍼런스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그는 73경기에 출전했는데, 이는 2001년 시즌 이후 가장 많은 출전이었고, 경기당 평균 22.9득점, 10.4리바운드, 2.3블록을 기록했다. 오닐은 12번째 연속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올-NBA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렸으며, 3월 활약으로 동부 컨퍼런스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오닐은 또한 2004-05 시즌 MVP를 피닉스 선스 가드 스티브 내쉬에게 NBA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로 아쉽게 내주었다.
깊은 허벅지 타박상으로 절뚝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닐은 히트를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로 이끌었고, 디펜딩 챔피언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의 7차전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이후 오닐과 다른 이들은 히트 감독 스탠 밴 건디가 오닐에게 충분한 플레이를 지시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2005년 8월, 오닐은 히트와 5년 1.00 억 USD의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지지자들은 오닐이 연봉 삭감을 감수하려는 의지와 히트가 오닐의 장기적인 서비스를 확보하기로 한 결정을 칭찬했다. 그들은 오닐이 연간 2000.00 만 USD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특히 그보다 못한 선수들도 거의 같은 금액을 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했다.
2.3.2. 네 번째 우승 (2005-2006)

2005-06 시즌 두 번째 경기에서 오닐은 오른쪽 발목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다음 18경기를 결장했다. 오닐이 복귀하자 밴 건디는 가족 문제를 이유로 사임했고, 팻 라일리가 감독직을 맡았다. 오닐은 나중에 밴 건디를 "기회주의자"이자 "공황의 대가"라고 불렀다. 많은 비평가들은 히트의 라일리 감독이 시즌 내내 오닐의 출전 시간을 경력 최저 수준으로 제한하며 올바르게 관리했다고 평가했다. 라일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오닐이 플레이오프 시점에 더 건강하고 신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닐은 득점, 리바운드, 블록에서 경력 최저(또는 거의 최저) 평균을 기록했지만, 인터뷰에서 "기록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승리에 관심이 있지, 기록에 관심 없다. 0점을 득점하고 이기면 행복하다. 50점, 60점을 득점하고 기록을 깨고 지면 화가 난다. 내가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경기당 20점을 평균하면 엄청난 시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5-06 시즌 동안 히트는 오닐 없이 .500의 기록만을 달성했다.
2006년 4월 11일, 오닐은 토론토 랩터스를 상대로 15득점, 11리바운드, 개인 최고 기록인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두 번째 경력 트리플 더블을 달성했다. 오닐은 2005-06 시즌을 야투 성공률 리그 1위로 마쳤다.
2006년 NBA 플레이오프에서 히트는 먼저 젊은 시카고 불스를 만났고, 오닐은 1차전에서 27득점, 16리바운드, 5블록의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고, 2차전에서는 22득점을 기록하며 마이애미가 시리즈 2-0 리드를 잡는 데 기여했다. 시카고는 홈에서 두 번의 압도적인 활약으로 시리즈를 동점으로 만들었지만, 마이애미는 5차전에서 홈 승리로 맞섰다. 마이애미는 시카고로 돌아가 6차전에서 시리즈를 마무리했는데, 오닐이 30득점, 2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또 다른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마이애미는 뉴저지 네츠와 맞붙기 위해 진출했고, 뉴저지는 놀라운 1차전 승리를 거두었지만, 히트는 이후 4연승을 거두며 디트로이트와의 리매치를 확정했다. 피스톤스는 시리즈 내내 웨이드를 막을 수 없었고, 오닐은 3차전에서 21득점, 12리바운드를 기록했고, 4차전에서는 27득점, 1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마이애미가 시리즈 3-1 리드를 잡는 데 기여했다. 피스톤스는 디트로이트에서 5차전을 이겼고, 웨이드는 다시 부상을 입었지만, 히트는 오닐이 28득점, 16리바운드, 5블록을 기록하며 6차전에서 승리하여 마이애미가 구단 역사상 첫 NBA 파이널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파이널에서 히트는 디르크 노비츠키가 이끄는 댈러스 매버릭스를 상대로 언더독이었고, 매버릭스는 홈에서 압도적인 방식으로 첫 두 경기를 이겼다. 웨이드와 오닐, 앙투안 워커, 제이슨 윌리엄스의 균형 잡힌 활약으로 히트는 홈에서 다음 세 경기를 모두 이겼고, 이후 댈러스에서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구단 역사상 첫 NBA 타이틀과 오닐의 네 번째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웨이드가 공격을 주도했기 때문에 오닐은 압도적인 시리즈를 펼칠 필요가 없었고, 시리즈 평균 13.7득점, 10.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2.3.3. 부상과 웨이드의 부재 (2006-2007)
2006-07 시즌에 오닐은 11월 왼쪽 무릎 부상으로 수술을 받아 35경기를 결장했다. 그가 결장한 경기 중 하나인 레이커스와의 크리스마스 경기 이후, 그는 한때 '두 번째 아버지'라고 불렀던 잭슨을 "베네딕트 아놀드"라고 비난했다. 잭슨은 이전에 "내가 [코치했던] 유일한 비노동자는 아마 샤크일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오닐이 없는 동안 히트는 고전했지만, 그가 복귀하자 다음 8경기 중 7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웨이드가 왼쪽 어깨를 탈구하는 불운이 팀을 덮쳤고, 오닐이 팀의 중심이 되었다. 비평가들은 30대 중반의 오닐이 팀을 플레이오프까지 이끌 수 있을지 의심했다. 히트는 연승을 달리며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에서 살아남았고, 4월 5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상대로 마침내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다.
전년도 리매치에서 히트는 2006-07 NBA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불스를 만났다. 히트는 불스를 상대로 고전했고, 오닐은 괜찮은 기록을 올렸지만 시리즈를 지배할 수는 없었다. 불스는 히트를 스윕했고, 이는 50년 만에 디펜딩 NBA 챔피언이 1라운드에서 스윕당한 첫 사례였다. 이는 오닐이 13년 만에 2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한 첫 사례였다. 2006-07 시즌에 오닐은 25,000득점을 달성하며 NBA 역사상 14번째로 이 이정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이 시즌은 오닐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득점 평균이 경기당 20점 아래로 떨어진 시즌이었다.
2.3.4. 경력 최저 기록 및 불화 (2007-2008)
오닐은 2007-08 시즌을 힘겹게 시작하며 득점, 리바운드, 블록에서 경력 최저 기록을 기록했다. 그의 공격에서의 역할은 줄어들었고, 경기당 평균 17개의 야투 시도에 비해 10개만을 시도했다. 또한 오닐은 파울에 시달렸고, 한때 5경기 연속 파울 아웃당하기도 했다. 오닐의 14년 연속 올스타 출전 기록은 이 시즌에 끝났다. 오닐은 다시 부상으로 경기를 결장했고, 히트는 15연패를 기록했다. 오닐에 따르면, 라일리는 그가 부상을 꾀병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8년 2월 훈련 중, 오닐은 지각한 제이슨 윌리엄스에게 훈련장을 떠나라고 지시한 감독 라일리와 언쟁을 벌였다. 둘은 얼굴을 맞대고 말다툼을 벌였고, 오닐이 라일리의 가슴을 찌르자 라일리가 그의 손가락을 쳐냈다. 라일리는 곧 오닐을 트레이드하기로 결정했다. 오닐은 마이애미를 떠날 무렵 웨이드와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웨이드가 자신을 옹호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오닐은 2007-08 시즌 마이애미 히트에서 33경기를 뛰었고, 이후 피닉스 선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오닐은 33경기 모두 선발 출전하여 경기당 평균 14.2득점을 기록했다. 피닉스로 트레이드된 후, 오닐은 선스에서 28경기 모두 선발 출전하여 경기당 평균 12.9득점을 기록했다.
2.4. 피닉스 선스 (2008-2009)

피닉스 선스는 2008년 2월, 당시 9승 37패로 리그 최하위였던 마이애미 히트로부터 오닐을 숀 매리언과 마커스 뱅크스를 내주고 영입했다. 오닐은 2008년 2월 20일, 그의 전 소속팀인 레이커스를 상대로 선스 데뷔전을 치렀고, 15득점 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레이커스가 130-124로 승리했다. 오닐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이 패배는 내 탓이다. 팀원들과 호흡이 맞지 않았다 [...] 하지만 나에게 4, 5일 정도 시간을 주면 정말 잘 맞출 수 있을 것이다"라며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규 시즌 28경기에서 오닐은 평균 12.9득점, 10.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기여했다. 트레이드의 한 가지 이유는 선스가 2007년 NBA 플레이오프에서 스퍼스에 6경기 만에 탈락한 후, 플레이오프에서 선스와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맞붙을 경우 팀 던컨을 제어하기 위함이었다. 오닐과 피닉스 선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스퍼스를 만났지만, 이번에도 5경기 만에 탈락했다. 오닐은 경기당 평균 15.2득점, 9.2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오닐은 히트보다 선스에서의 새로운 상황을 더 선호했다. 오닐은 "이 감독 밑에서 뛰는 것이 좋고, 이 친구들과 뛰는 것이 좋다"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프로들이다. 아무도 나에게 크리스 퀸이나 리키 데이비스와 뛰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팀에 속해 있다"고 말했다. 라일리는 오닐이 전 팀 동료들을 비방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오닐은 이에 대해 라일리에게 욕설로 응수했는데, 그는 히트에서 뛰는 동안 라일리를 종종 "위대한 팻 라일리"라고 불렀었다. 오닐은 선스 트레이닝 스태프가 자신의 경력을 연장시켜 주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굽혀지지 않는 그의 관절염 발가락과 그로 인해 다리에 가해지는 부담을 연결시켰다. 트레이너들은 그에게 코어 근력, 유연성, 균형을 키우는 데 집중하도록 했다.
2008-09 시즌, 오닐의 활약은 향상되어 시즌 전반기(41경기) 동안 평균 18득점, 9리바운드, 1.6블록을 기록하며 선스를 23승 18패의 기록과 디비전 2위로 이끌었다. 그는 2009년 올스타전에 복귀했으며, 전 팀 동료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공동 MVP로 선정되었다.
2009년 2월 27일, 오닐은 45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개인 통산 49번째 40득점 이상 경기를 펼쳤고, 토론토 랩터스를 133-113으로 꺾었다.
2009년 3월 3일 올랜도와의 경기에서 오닐은 매직의 센터 드와이트 하워드에게 득점에서 19-21로 밀렸다. 오닐은 당시 23세였던 하워드를 언급하며 "18세 선수들을 상대로 득점 경쟁을 하려니 너무 늙었다"며 "더 이상 내 역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닐은 밤새도록 더블 팀 수비를 당했다. 오닐은 "나는 사람들과 1대1로 플레이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 경력 내내 사람들과 1대1로 플레이해야 했다. 더블 팀을 하거나 더블 팀을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경기 중 오닐은 하워드를 상대로 플라핑을 했다. 히트에서 오닐을 지도했던 매직의 스탠 밴 건디 감독은 "오닐이 어떤지 알기 때문에 매우 실망했다. 남자답게 일어서서 플레이하자고 생각했고, 우리 선수는 오늘 밤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오닐은 이에 대해 "플라핑은 평생 그렇게 플레이하는 것이다. 나는 차징 파울을 얻으려 했고, 콜을 얻으려 했다. 아마 플라핑이었을지 모르지만, 플라핑은 잘못된 단어 사용이다. 플라핑은 그의 코칭을 묘사할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오닐의 레이커스 팀 동료였던 마크 매드슨은 "리그의 모든 사람이 샤크에게 플라핑을 시도하고 샤크는 절대 플라핑하지 않는다"며 이를 재미있어했다. 2006년 타임지 인터뷰에서 오닐은 자신이 NBA 커미셔너라면 "상대방을 이기게 해야지, 플라핑해서 콜을 얻거나 심판에게 잘 보이거나 아첨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3월 6일, 오닐은 로키츠와 야오밍과의 다가오는 경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으며 "1대1 경기가 아닐 테니 시도조차 하지 마라"며 "다른 모든 팀처럼 나를 더블, 트리플 팀으로 막을 것이다... 나는 [야오]와 1대1로 플레이할 기회가 거의 없다... 하지만 내가 그를 (수비에서) 막을 때는 나 혼자만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야오 대 샤크의 대결로 만들려 하지 마라. 샤크 대 네 명의 다른 선수들의 대결이다"라고 말했다.
2009년 NBA 플레이오프는 오닐의 신인 시즌인 1992-93 시즌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참가하지 못한 시즌이기도 했다. 그는 올-NBA 서드 팀에 선정되었다. 선스는 비용 절감을 위해 오닐이 트레이드될 수 있음을 통보했다.
2.5.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009-2010)
2009년 6월 25일, 오닐은 벤 월러스, 사샤 파블로비치, 50.00 만 USD, 그리고 2010년 2라운드 드래프트 픽을 대가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클리블랜드에 도착하자 오닐은 르브론 제임스를 언급하며 "내 좌우명은 매우 간단하다. 왕을 위해 반지를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임스는 팀의 리더였고, 오닐은 그에게 따랐다. 2010년 2월 25일, 오닐은 보스턴 셀틱스의 글렌 데이비스를 상대로 슛을 시도하다가 심각한 오른쪽 엄지손가락 부상을 입었다. 그는 3월 1일 엄지손가락 수술을 받았고,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 맞춰 복귀했다.
1라운드에서 시카고 불스를 물리친 후, 캐벌리어스는 2라운드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했다. 2016년 9월, 오닐은 "내가 클리블랜드에 있을 때 우리는 1위였다. 빅 베이비 [글렌 데이비스]가 내 손을 부러뜨렸고, 시즌 후반에 5주 동안 결장해야 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 겨우 복귀했지만, 2라운드에서 보스턴에게 졌다. 화가 났다. 내가 건강했다면 그 해에 우승을 차지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오닐은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와 센터 역할을 분담했기 때문에 2009-10 시즌 동안 거의 모든 주요 통계 부문에서 경력 최저 기록을 평균했다.
2.6. 보스턴 셀틱스 (2010-2011)
코비 브라이언트가 오닐보다 더 많은 우승 반지를 가졌다고 언급하는 것을 듣고, 보스턴 셀틱스의 주요 구단주인 와이클리프 그루스벡은 오닐을 영입할 기회라고 보았다. 셀틱스 감독 닥 리버스는 오닐이 특혜를 받지 않고, 로스앤젤레스나 마이애미에서처럼 라커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계약에 동의했다. 2010년 8월 4일, 셀틱스는 오닐과 계약했다고 발표했다. 계약은 총 280.00 만 USD의 베테랑 최소 연봉으로 2년 계약이었다. 오닐은 더 큰 미드레벨 예외 계약을 원했지만, 셀틱스는 대신 저메인 오닐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애틀랜타 호크스와 댈러스 매버릭스도 관심을 표명했지만, 오닐의 연봉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그는 2010년 8월 10일 셀틱스에 의해 소개되었고, 등번호 36번을 선택했다.
오닐은 "나는 공을 독점하고 밤에 30개의 슛을 던지는 드웨인 웨이드나 코비 같은 작은 선수들과 경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닐은 팀 던컨과만 경쟁한다고 덧붙였다. "만약 팀 던컨이 다섯 개의 반지를 얻으면, 어떤 작가에게 '던컨이 최고다'라고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공개적으로 그는 셀틱스에서 선발로 뛰든 교체로 뛰든 상관없다고 주장했지만, 두 번째 유닛의 일원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사적으로는 선발로 뛰고 싶었지만, 속으로만 간직했다. 오닐은 시즌 내내 오른쪽 다리의 다양한 질병으로 인해 경기를 결장했는데, 여기에는 무릎, 종아리, 엉덩이, 아킬레스건 부상이 포함되었다. 셀틱스는 2월에 센터 켄드릭 퍼킨스를 트레이드했는데, 부분적으로는 오닐이 퍼킨스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셀틱스는 퍼킨스가 부상으로 결장한 경기에서 33승 10패를 기록했고, 오닐이 20분 이상 뛴 경기에서는 19승 3패를 기록했다. 코르티손 주사를 요청한 후, 오닐은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27경기를 결장한 후 4월 3일에 복귀했지만, 오른쪽 종아리 염좌로 인해 5분밖에 뛰지 못했다. 그 해에 그가 뛴 마지막 정규 시즌 경기였다. 오닐은 2011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결장했다. 그는 더 많은 코르티손 주사를 주장했고 2라운드에 복귀했지만, 히트가 셀틱스를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시킬 때 그는 두 경기에서 12분으로 제한되었다.
2.6.1. 은퇴
2011년 6월 1일, 오닐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은퇴를 발표했다. 트위터에 올린 짧은 영상에서 오닐은 "해냈다. 19년 동안, 베이비. 정말 고맙다. 그래서 너희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다. 은퇴할 것이다. 사랑한다. 곧 다시 이야기하자"고 트윗했다. 2011년 6월 3일, 오닐은 올랜도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3. 국가대표 경력
오닐은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올림픽 금메달과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MVP를 수상하며 국제 무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3.1. 올림픽 및 FIBA 업적
대학 시절, 오닐은 드림팀의 대학생 선수 자리를 두고 고려되었지만, 결국 미래의 팀 동료인 크리스천 레이트너에게 돌아갔다. 그의 국가대표 경력은 1994년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이 대회에서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 그는 드림팀 II를 8승 0패의 기록으로 금메달로 이끌었으며, 경기당 평균 18득점, 8.5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두 번의 더블-더블을 달성했다. 네 경기에서 20점 이상을 득점했다. 2010년 이전까지 그는 FIBA 월드컵 금메달을 획득한 마지막 현역 미국 선수였다.
그는 1994년 로스터에서 레지 밀러와 함께 드림팀 III에도 선발된 두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더 많은 스타 파워로 인해 그는 하킴 올라주원과 데이비드 로빈슨과 교대로 출전했으며 3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그는 경기당 평균 9.3득점, 5.3리바운드, 총 8블록을 기록했다. 다시 한번, 8승 0패의 완벽한 기록으로 애틀랜타 1996년 올림픽에서 또 다른 금메달을 획득했다. 오닐은 레니 윌킨스 감독이 결승전에서 로빈슨을 더 많이 출전시킨 것에 대해 불쾌해했는데, 윌킨스는 이전에 오닐에게 그것이 아마 로빈슨의 마지막 올림픽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1996년 경험 이후, 그는 국제 대회 출전을 거부했다. 그는 1999년 FIBA 아메리카 챔피언십 대표팀에서 제외된 것에 대해 분노하며 "존중 부족"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0년 올림픽에 참가할 기회를 포기했는데, 두 개의 금메달이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오닐은 또한 2002년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2004년 올림픽 출전 제안을 거부했으며, 2006-2008년 미국 예비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는 데 처음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결국 초대를 거절했다.
4. 선수로서의 특징
샤킬 오닐은 경이로운 신체 능력과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로 코트를 지배했으며, 그의 강점과 약점은 그의 경력 내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4.1. 신체적 능력과 지배력
오닐은 경기당 평균 23.7득점(58.2% 야투 성공률), 10.9리바운드, 2.3블록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로우 포스트 존재감을 확립했다. 216 cm의 키, 147 kg의 체중, 그리고 미국 신발 사이즈 23호(41 cm)를 자랑하는 그는 경이로운 신체 조건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거대한 체격은 대부분의 상대 선수에게 힘의 우위를 제공했다. NBA에서의 첫 시즌 동안 두 번이나 그의 강력한 덩크슛은 강철 백보드 지지대를 부러뜨렸고, 이로 인해 리그는 다음 1993-94 시즌부터 백보드의 지지 강도와 안정성을 높이게 되었다.
4.2. 플레이 스타일과 기술
오닐의 "드롭 스텝"(오닐은 이를 "블랙 토네이도"라고 불렀다)은 수비수를 포스트업한 후 돌아서서 팔꿈치를 지렛대 삼아 힘으로 제압하고 매우 높은 성공률의 슬램 덩크를 성공시키는 효과적인 공격 무기였다. 또한, 오닐은 골대 근처에서 득점하기 위해 오른손 훅 슛을 자주 사용했다. 덩크 능력은 그의 경력 야투 성공률 .582에 기여했는데, 이는 아티스 길모어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야투 성공률이다. 그는 NBA에서 야투 성공률 1위를 10번 차지하며 윌트 체임벌린의 9번 기록을 경신했다.
상대 팀들은 종종 오닐에게 많은 파울을 범하여 자신들의 빅맨들의 출전 시간을 줄였다. 오닐의 페인트 내부에서의 위압적인 신체적 존재감은 많은 팀들의 공격 및 수비 전략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4.3. 약점
오닐의 가장 큰 약점은 자유투 성공률이었는데, 경력 평균 52.7%에 불과했다. 그는 2000년 12월 8일 시애틀 슈퍼소닉스와의 경기에서 11개의 자유투 시도를 모두 실패하여 기록을 세웠다. 오닐은 자신의 자유투 문제가 정신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연습에서는 종종 80%의 성공률을 보였기 때문이다. 오닐의 형편없는 자유투를 악용하기 위해 상대 팀들은 종종 그에게 고의적인 파울을 범했는데, 이 전술은 "핵-어-샤크"로 알려져 있다. 오닐은 자유투 시도 횟수에서 역대 3위로, 2010-11 시즌까지 1,207경기에서 11,252개의 자유투를 시도했다. 2008년 12월 25일, 오닐은 5,000번째 자유투를 실패하며 체임벌린과 함께 NBA 역사상 두 번째로 이 기록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오닐은 경력 내내 단 한 개의 3점슛만을 성공시켰다. 그는 1995-96 NBA 시즌 올랜도 매직에서 이 슛을 성공시켰다. 그의 경력 3점슛 기록은 22개 시도 중 1개 성공(4.5%의 경력 성공률)이다.
4.4. 수비 기여도
오닐은 유능한 수비수로, 세 차례 올-NBA 세컨드 디펜시브 팀에 선정되었다. 그의 존재감은 골대 근처에서 슛을 시도하는 상대 선수들을 위협했으며, 그는 경력 동안 경기당 평균 2.3개의 블록슛을 기록했다.
필 잭슨은 오닐이 경력에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고 믿으며, 그가 "10시즌 연속 MVP 선수가 될 수 있었고, 되어야 했다"고 말했다. 2022년, NBA 75주년을 기념하여 디 애슬레틱은 역대 최고의 선수 75명을 선정했으며, 오닐을 NBA 역사상 8번째로 위대한 선수로 꼽았다.
5. 수상 및 영예
샤킬 오닐은 NBA와 대학, 국제 대회에서 수많은 수상 경력과 영예를 얻으며 농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5.1. NBA 수상 및 영예
- 4회 NBA 챔피언 (2000년, 2001년, 2002년, 2006년)
- 3회 NBA 파이널 MVP (2000년, 2001년, 2002년)
- 2000년 NBA MVP
- 15회 NBA 올스타 (1993년-1998년, 2000년-2007년, 2009년)
- 3회 NBA 올스타전 MVP (2000년, 2004년, 2009년)
- 8회 올-NBA 퍼스트 팀 (1998년, 2000년-2006년)
- 2회 올-NBA 세컨드 팀 (1995년, 1999년)
- 4회 올-NBA 서드 팀 (1994년, 1996년, 1997년, 2009년)
- 3회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2000년, 2001년, 2003년)
- 1993년 NBA 신인상
- 1993년 NBA 올-루키 퍼스트 팀
- 2회 NBA 득점왕 (1995년, 2000년)
- NBA 50주년 기념 올스타팀
- NBA 75주년 기념 팀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의해 등번호 34번 영구 결번
- 마이애미 히트에 의해 등번호 32번 영구 결번
- 올랜도 매직에 의해 등번호 32번 영구 결번
2013년 4월 2일,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는 그의 등번호 3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016년 2월 26일, 마이애미 히트는 2016-17 시즌 동안 오닐의 등번호 32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이로써 오닐은 미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여러 팀에서 등번호가 영구 결번된 32명 중 한 명이 되었다. 히트는 2016년 12월 22일, 그의 전 소속팀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의 경기 하프타임에 그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024년 2월 13일, 올랜도 매직은 오닐의 등번호 32번을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그는 윌트 체임벌린과 피트 마라비치에 이어 세 개의 NBA 팀에서 등번호가 영구 결번된 세 번째 선수가 되었다.
5.2. 대학 및 국제 대회 수상
- 1991년 아돌프 럽 트로피 수상
- 2회 컨센서스 NCAA 남자 농구 올-아메리칸 (1991년, 1992년)
- LSU 타이거스에 의해 등번호 33번 영구 결번
- 1996년 올림픽 금메달
- 1994년 FIBA 농구 월드컵
- 1994년 FIBA 농구 월드컵 MVP
- 1994년 미국 농구 올해의 남자 선수
- 1991년 AP 통신 올해의 선수
- 1991년 UPI 올해의 선수
- 2005년 BET 스포츠맨 오브 더 이어
- 2012년 스포츠 에미상 - 뛰어난 홍보 발표
- 2022년 아카데미상 - 단편 다큐멘터리 (《더 퀸 오브 바스켓볼》의 총괄 프로듀서로서)
5.3. 명예의 전당 헌액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2016년)
- 전미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 (2014년)
- FIBA 명예의 전당 (2017년)
6. 경력 통계
샤킬 오닐의 NBA 정규 시즌, 플레이오프, 그리고 대학 시절의 주요 통계 기록은 그의 압도적인 지배력을 보여준다.
6.1. NBA 통계
6.1.1. 정규 시즌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경기 수 | 경기당 출전 시간 | 야투 성공률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92 | 올랜도 매직 | 81 | 81 | 37.9 | .562 | .000 | .592 | 13.9 | 1.9 | .7 | 3.5 | 23.4 |
1993 | 올랜도 | 81 | 81 | 39.8 | .599* | .000 | .554 | 13.2 | 2.4 | .9 | 2.9 | 29.3 |
1994 | 올랜도 | 79 | 79 | 37.0 | .583 | .000 | .533 | 11.4 | 2.7 | .9 | 2.4 | 29.3* |
1995 | 올랜도 | 54 | 52 | 36.0 | .573 | .500 | .487 | 11.0 | 2.9 | .6 | 2.1 | 26.6 |
1996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 51 | 51 | 38.1 | .557 | .000 | .484 | 12.5 | 3.1 | .9 | 2.9 | 26.2 |
1997 | 레이커스 | 60 | 57 | 36.3 | .584* | .000 | .527 | 11.4 | 2.4 | .7 | 2.4 | 28.3 |
1998 | 레이커스 | 49 | 49 | 34.8 | .576* | .000 | .540 | 10.7 | 2.3 | .7 | 1.7 | 26.3 |
1999† | 레이커스 | 79 | 79 | 40.0 | .574* | .000 | .524 | 13.6 | 3.8 | .5 | 3.0 | 29.7* |
2000† | 레이커스 | 74 | 74 | 39.5 | .572* | .000 | .513 | 12.7 | 3.7 | .6 | 2.8 | 28.7 |
2001† | 레이커스 | 67 | 66 | 36.1 | .579* | .000 | .555 | 10.7 | 3.0 | .6 | 2.0 | 27.2 |
2002 | 레이커스 | 67 | 66 | 37.8 | .574 | .000 | .622 | 11.1 | 3.1 | .6 | 2.4 | 27.5 |
2003 | 레이커스 | 67 | 67 | 36.8 | .584* | .000 | .490 | 11.5 | 2.9 | .5 | 2.5 | 21.5 |
2004 | 마이애미 히트 | 73 | 73 | 34.1 | .601* | .000 | .461 | 10.4 | 2.7 | .5 | 2.3 | 22.9 |
2005† | 마이애미 | 59 | 58 | 30.6 | .600* | .000 | .469 | 9.2 | 1.9 | .4 | 1.8 | 20.0 |
2006 | 마이애미 | 40 | 39 | 28.4 | .591 | .000 | .422 | 7.4 | 2.0 | .2 | 1.4 | 17.3 |
2007 | 마이애미 | 33 | 33 | 28.6 | .581 | .000 | .494 | 7.8 | 1.4 | .6 | 1.6 | 14.2 |
2007 | 피닉스 선스 | 28 | 28 | 28.7 | .611 | .000 | .513 | 10.6 | 1.7 | .5 | 1.2 | 12.9 |
2008 | 피닉스 | 75 | 75 | 30.0 | .609* | .000 | .595 | 8.4 | 1.7 | .6 | 1.4 | 17.8 |
2009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 53 | 53 | 23.4 | .566 | .000 | .496 | 6.7 | 1.5 | .3 | 1.2 | 12.0 |
2010 | 보스턴 셀틱스 | 37 | 36 | 20.3 | .667 | .000 | .557 | 4.8 | .7 | .4 | 1.1 | 9.2 |
경력 | 1,207 | 1,197 | 34.7 | .582 | .045 | .527 | 10.9 | 2.5 | .6 | 2.3 | 23.7 | |
올스타 | 12 | 9 | 22.8 | .551 | .000 | .452 | 8.1 | 1.4 | 1.1 | 1.6 | 16.8 |
6.1.2. 플레이오프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경기 수 | 경기당 출전 시간 | 야투 성공률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94 | 올랜도 매직 | 3 | 3 | 42.0 | .511 | .000 | .471 | 13.3 | 2.3 | .7 | 3.0 | 20.7 |
1995 | 올랜도 | 21 | 21 | 38.3 | .577 | .000 | .571 | 11.9 | 3.3 | .9 | 1.9 | 25.7 |
1996 | 올랜도 | 12 | 12 | 38.3 | .606 | .000 | .393 | 10.0 | 4.6 | .8 | 1.3 | 25.8 |
1997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 9 | 9 | 36.2 | .514 | .000 | .610 | 10.6 | 3.2 | .6 | 1.9 | 26.9 |
1998 | 레이커스 | 13 | 13 | 38.5 | .612 | .000 | .503 | 10.2 | 2.9 | .5 | 2.6 | 30.5 |
1999 | 레이커스 | 8 | 8 | 39.4 | .510 | .000 | .466 | 11.6 | 2.3 | .9 | 2.9 | 26.6 |
2000† | 레이커스 | 23 | 23 | 43.5 | .566 | .000 | .456 | 15.4 | 3.1 | .6 | 2.4 | 30.7 |
2001† | 레이커스 | 16 | 16 | 42.3 | .555 | .000 | .525 | 15.4 | 3.2 | .4 | 2.4 | 30.4 |
2002† | 레이커스 | 19 | 19 | 40.8 | .529 | .000 | .649 | 12.6 | 2.8 | .5 | 2.5 | 28.5 |
2003 | 레이커스 | 12 | 12 | 40.1 | .535 | .000 | .621 | 14.8 | 3.7 | .6 | 2.8 | 27.0 |
2004 | 레이커스 | 22 | 22 | 41.7 | .593 | .000 | .429 | 13.2 | 2.5 | .3 | 2.8 | 21.5 |
2005 | 마이애미 히트 | 13 | 13 | 33.2 | .558 | .000 | .472 | 7.8 | 1.9 | .4 | 1.5 | 19.4 |
2006† | 마이애미 | 23 | 23 | 33.0 | .612 | .000 | .374 | 9.8 | 1.7 | .5 | 1.5 | 18.4 |
2007 | 마이애미 | 4 | 4 | 30.3 | .559 | .000 | .333 | 8.5 | 1.3 | .3 | 1.5 | 18.8 |
2008 | 피닉스 선스 | 5 | 5 | 30.0 | .440 | .000 | .500 | 9.2 | 1.0 | 1.0 | 2.6 | 15.2 |
2010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 11 | 11 | 22.1 | .516 | .000 | .660 | 5.5 | 1.4 | .2 | 1.2 | 11.5 |
2011 | 보스턴 셀틱스 | 2 | 0 | 6.0 | .500 | .000 | .000 | .0 | .5 | .5 | .0 | 1.0 |
경력 | 216 | 214 | 37.5 | .563 | .000 | .504 | 11.6 | 2.7 | .5 | 2.1 | 24.3 |
6.2. 대학 통계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경기 수 | 경기당 출전 시간 | 야투 성공률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89-90 | LSU | 32 | - | 28.2 | .573 | .000 | .556 | 12.0 | 1.9 | 1.2 | 3.6 | 13.9 |
1990-91 | LSU | 28 | - | 31.5 | .628 | .000 | .638 | 14.7 | 1.6 | 1.5 | 5.0 | 27.6 |
1991-92 | LSU | 30 | - | 32.0 | .615 | .000 | .528 | 14.0 | 1.5 | 1.0 | 5.2 | 24.1 |
경력 | 90 | - | 30.5 | .610 | .000 | .575 | 13.5 | 1.7 | 1.2 | 4.6 | 21.6 |
7. 코트 밖 활동
샤킬 오닐은 농구 코트 밖에서도 미디어, 음악, 연기, 사업, 자선 활동, 법 집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7.1. 미디어 활동 및 대중적 이미지

오닐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침착함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자신을 "더 빅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보 마스터"라고 불렀다. 언론인들과 다른 사람들은 오닐에게 "샤크", "더 디젤", "샤크 푸", "더 빅 대디", "슈퍼맨", "더 빅 아가베", "더 빅 칵투스", "더 빅 샤크투스", "더 빅 갈락투스", "윌트 챔버니지", "더 빅 바리시니코프", "더 리얼 딜", "더 빅 셰므록", "더 빅 레프러콘", "샤코비치", "더 빅 컨덕터" 등 여러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언론이 가장 좋아하는 인터뷰 대상이었지만, 예민해서 몇 주 동안 말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언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때는 자신의 칸막이 앞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인터뷰 기법을 사용했다.
2000년 미국 배우 조합 파업 당시, 오닐은 디즈니의 광고에 출연했다. 오닐은 피켓 라인을 넘었다는 이유로 노조로부터 벌금을 부과받았다.
오닐의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선동적인 발언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새크라멘토 킹스 간의 오랜 라이벌 관계를 부추겼다. 오닐은 새크라멘토 팀을 자주 "퀸스"라고 불렀다. 2002년 우승 퍼레이드에서 오닐은 레이커스가 오닐과 함께 세 번째 챔피언십을 향해 힘든 7경기 시리즈에서 킹스를 이긴 후, 새크라멘토가 캘리포니아의 수도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또한 신인 센터 야오밍에 대해 인터뷰할 때 중국인을 조롱하여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 오닐은 기자에게 "야오밍에게 '칭총 양, 와, 아소'라고 전해라"고 말했다. 오닐은 나중에 그것이 라커룸 유머였고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고 말했다. 야오는 오닐이 농담을 한 것이라고 믿었지만, 많은 아시아인들이 그 유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야오는 "중국어는 배우기 어렵다. 어렸을 때도 힘들었다"고 농담했다. 오닐은 나중에 경력 초기에 야오를 대했던 방식에 대해 후회했다.
2005년 NBA 플레이오프 동안 오닐은 자신의 부진한 플레이를 댈러스 매버릭스의 센터 에릭 댐피어에 비유했는데, 댐피어는 최근 경기 중 한 경기에서 단 한 점도 득점하지 못했다. 이 발언은 플레이오프 동안 수많은 해설자들의 인용과 언급을 불러일으켰지만, 댐피어 자신은 모욕에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둘은 2006년 NBA 파이널에서 만났다.
오닐은 언론에 매우 솔직했으며, 종종 레이커스 팀 동료 코비 브라이언트를 비난했다. 2005년 여름, 브라이언트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죄송합니다, 누구시죠?"라고 답했고, 2005-06 시즌 내내 브라이언트를 모르는 척했다.
오닐은 또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했으며(원래 1998년 시즌 24의 두 번째 에피소드 진행자로 선정되었으나, 스케줄 문제로 켈시 그래머로 교체되었고, 해당 에피소드에서 두 개의 스케치에 출연했다), 2007년에는 ABC의 리얼리티 쇼 《샤크의 빅 챌린지》를 진행했는데, 플로리다 아이들에게 살을 빼고 건강을 유지하도록 도전하는 내용이었다.
2006년 1월 16일 레이커스가 히트와 맞붙었을 때, 오닐과 브라이언트는 경기 전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헤드라인을 장식했는데, 이는 오닐이 로스앤젤레스를 떠난 이후 곪아왔던 이른바 "브라이언트-오닐 불화"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닐은 NBA 전설 빌 러셀의 조언을 받아 브라이언트와 화해했다고 말했다. 2008년 6월 22일, 오닐은 뉴욕의 한 클럽에서 브라이언트에 대한 디스 랩을 선보였다. 랩을 하는 동안 오닐은 브라이언트가 자신의 아내 숀과의 이혼의 원인이라고 비난했고, 운율의 일부로 정관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브라이언트가 자신 없이는 챔피언십에서 우승할 수 없다고 조롱했다. 오닐은 관중들에게 "코비, 내 엉덩이 맛이 어떠냐"고 여러 번 조롱적으로 외치도록 유도했다. 오닐은 자신의 행동을 "프리스타일이었다. 그게 전부다. 모두 재미로 한 것이다. 전혀 심각한 것이 아니다. MC들이 요청받으면 프리스타일을 하는 것이다. 코비와는 완전히 괜찮다. 아무 문제 없다"고 정당화했다. 힙합 음악의 다른 대표자들인 스눕 독, 나스, 코리 건즈조차 오닐의 말에 동의했지만, 애리조나주 마리코파군 보안관 조 아르파이오는 "인종차별적 비하 발언과 다른 상스러운 언어 사용"을 이유로 오닐의 마리코파군 보안관 보조 배지를 회수할 의사를 밝혔다. 그의 노래에 나온 인종차별적 인용문은 "백인 남자가 나보다 더 니거가 되려고 하는 것과 같다"였다.
2005년 ESPN에서 오닐의 리얼리티 시리즈 《샤킬》이 방영되었고, ABC에서 《샤크의 빅 챌린지》라는 시리즈를 진행했다.
2011년 7월 14일, 오닐은 TNT의 NBA 농구 경기 분석가로 합류하여 어니 존슨, 케니 스미스, 찰스 바클리와 함께 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트루TV에서 한 시즌 동안 방영된 《업로드 위드 샤킬 오닐》이라는 쇼를 진행했다.
2015년 9월, 스포츠웨어 거대 기업 리복을 홍보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했을 때, 오닐은 대한민국의 버라이어티 텔레비전 쇼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의 출연진에 합류하여 서인천고등학교에 다녔다. 이 쇼는 다양한 유명인들이 3일 동안 학생으로 선정된 고등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쇼의 프로듀서인 김노은은 "이번 시즌 게스트 목록에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추성훈이 처음으로 케이블 채널에 출연할 것이다. 샤킬 오닐도 쇼에 출연할 것이다. 많은 노력 끝에 그를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 오닐은 홍보를 위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며 마지막 날 학교를 방문할 것이다. 그는 학생들과 점심을 먹을 것이다. 우리는 추성훈과 샤킬 오닐의 빅 매치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샤킬 오닐을 위한 특별 유니폼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2년 10월, 오닐은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스포츠와 장기 계약 연장을 체결하여 《인사이드 더 NBA》의 진행자로 계속 활동하게 되었다.
2024년 5월 3일, 오닐은 지나 로드리게스와 함께 ABC의 새 게임 쇼 《럭키 13》의 공동 진행자로 발표되었다. 이 시리즈는 2024년 7월 18일에 첫 방송되었다.
7.2. 음악 활동

1993년부터 오닐은 랩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5장의 스튜디오 앨범과 1장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했다. 그의 랩 실력은 처음에는 비판을 받았지만, 한 비평가는 그가 "도약이 아니라 작은 발걸음으로 래퍼로서 발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993년 그의 데뷔 앨범 《샤크 디젤》은 RIAA로부터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오닐은 마이클 잭슨의 1995년 앨범 《HIStory》의 수록곡 "2 Bad"에 게스트 래퍼로 참여했다. 그는 영화 《카잠》의 사운드트랙에 "We Genie"를 포함한 세 곡을 기여했다. 오닐은 또한 아론 카터의 2001년 히트 싱글 "댓츠 하우 아이 비트 샤크"에도 참여했다. 샤크는 이 곡의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샤킬 오닐은 2010년 12월 20일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오닐은 1980년대 LSU에서 DJ를 시작했다.
오닐은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을 프로듀싱하고 DJ 디젤(DJ Diesel영어)이라는 예명으로 전 세계를 투어한다.
2017년 7월, 오닐은 NBA 포인트 가드 론조 볼의 아버지인 라바 볼을 겨냥한 디스 트랙을 발표했다. 이 3분짜리 곡은 볼이 자신과 그의 어린 아들 라멜로가 오닐과 그의 아들 셰리프를 농구 경기에서 이길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발표되었다.
2021년 10월 23일, 오닐은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21년 일렉트릭 데이지 카니발의 베이스포드 스테이지에서 DJ 디젤로 공연했다.
2023년 6월 7일, 오닐은 헤어티지(Hairitage영어)와의 협업으로 데뷔 앨범 《고릴라 워페어》의 첫 싱글 "Bang Your Head"를 DJ 디젤로 발매했다. 이 앨범은 8월 18일에 발매되었다.
그는 래퍼 레드맨의 앨범 《머디 워터스 투》의 수록곡 "Lite It Up"에 피처링했다. 이 앨범은 2024년 12월 24일에 발매되었다.
7.3. 연기 및 방송 출연
《블루 칩스》와 《카잠》을 시작으로, 오닐은 일부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은 영화에 출연했다.
오닐은 1997년 영화 《스틸》에서 주인공 존 헨리 아이언스/스틸 역을 맡아 주요 만화책 슈퍼히어로를 연기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한 명이다. 그는 마이클 자이 화이트의 영화 《스폰》이 《스틸》보다 2주 먼저 개봉했기에 그보다 앞선다.
오닐은 《커브 유어 엔수지애즘》 에피소드에 래리 데이비드의 캐릭터가 스트레칭 중 실수로 그를 넘어뜨려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신으로 출연했으며, 《마이 와이프 앤 키즈》와 《더 파커스》에 각각 두 에피소드씩 출연했다. 그는 영화 《프레디 갓 핑거드》, 《잭 앤 질》, 《무서운 영화 4》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오닐은 2001년 311의 히트 싱글 "유 우든트 빌리브" 뮤직비디오, P. 디디의 "배드 보이 포 라이프" 뮤직비디오, 아론 카터의 "댓츠 하우 아이 비트 샤크" 뮤직비디오, 아울 시티의 "바닐라 트와일라잇" 뮤직비디오, 마룬 5의 "돈트 워너 노우"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오닐은 영화 《CB4》에 짧은 "인터뷰" 장면에 출연했다. 오닐은 마이애미 경찰 제복을 입고 마이크 더 타이거를 나무에서 구하는 《스포츠센터》 광고에 출연했다. 보도에 따르면 오닐은 《엑스맨 2》(2003)에 출연하기를 원했지만, 영화 제작자들에게 무시당했다. 오닐은 코미디 속편 《그로운 업스 2》에서 플루주 경관 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애니메이션 버전의 자신을 여러 차례 목소리 연기했는데, 애니메이션 시리즈 《스태틱 쇼크》(2002년; "스태틱 샤크" 에피소드), 《조니 브라보》(1997년; "백 온 샤크" 에피소드), 《엉클 그랜파》(2014년; "퍼펙트 키드" 에피소드), 그리고 《레고 무비》(2014년)에 출연했다. 그는 또한 2013년 영화 《개구쟁이 스머프 2》에서 스무스 스머프 역으로 목소리 연기를 했다.
7.4. 비디오 게임 출연
오닐은 비디오 게임 《NBA 라이브 96》, 《NBA 2K6》, 《NBA 2K7》, 《NBA 쇼타임: NBA 온 NBC》, 《NBA 후프즈》, 《NBA 인사이드 드라이브 2004》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오닐은 아케이드 버전의 《NBA 잼》(1993), 《NBA 잼》(2003), 《NBA 볼러스》(2004), 《NBA 라이브 2004》, 《NBA 볼러스: 페놈》(2006)에 현역 선수이자 1990년대 올스타로 출연했다. 오닐은 슈퍼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과 세가 제네시스용 격투 게임 《샤크 푸》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속편인 《샤크 푸: 어 레전드 리본》은 2018년에 발매되었다. 오닐은 또한 2002년 《퀘스트 포 더 코드》에 성우로 출연했으며, 2004년 《백야드 바스켓볼》, 플레이 가능한 권투 선수로 《레디 2 럼블 복싱: 라운드 2》, 그리고 잠금 해제 가능한 캐릭터로 《델타 포스: 블랙 호크 다운》에 출연했다. 오닐은 《UFC 언디스퓨티드 2010》에서도 잠금 해제 가능한 캐릭터였다.
7.5. 사업 및 투자
2022년 기준, 오닐은 4.00 억 USD의 순자산으로 NBA에서 가장 부유한 5명 중 한 명이다. 그는 1990년대 초반에는 채권 투자에 적극적이었지만, 이후 주식 시장에 진출하여 제너럴 일렉트릭, 애플, 펩시코와 같은 다양한 기업에 투자했다. 그는 주식 투자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회사와 개인적인 유대감을 느꼈을 때라고 설명했다. 오닐은 프로스티드 플레이크를 더 선호했기 때문에 위티스 시리얼 광고를 거절했다. 그는 또한 적극적인 부동산 기업가이기도 했다. 오닐은 올랜도의 주택 소유주들이 주택 압류에 직면했을 때 돕기 위한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로 사업 확장을 모색했다. 그의 계획은 압류된 주택의 모기지를 매입한 후, 더 저렴한 조건으로 주택을 다시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는 약간의 이익을 얻겠지만, 올랜도에 투자하고 주택 소유주들을 돕고 싶어 했다.
보라이 개발(Boraie Development영어)과 협력하여 오닐은 고향인 뉴어크에서 시티플렉스12(CityPlex12영어)와 원 리버뷰를 포함한 프로젝트를 개발했다.
오닐은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소셜 비디오 서비스인 투트 인더스트리(Tout Industries영어)의 자문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이 서비스에 자신의 NBA 은퇴 소식을 처음으로 알린 대가로 이 직책을 맡았다.
2013년 9월, 오닐은 새크라멘토 킹스 프로 농구팀의 소수 지분 소유주가 되었다. 2018년 4월, 오닐은 킹스의 NBA 2K 리그 계열사인 킹스 가드 게이밍의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2022년 1월, 오닐은 킹스 지분을 매각했다.
오닐은 구글의 초기 투자자였다. 2015년 6월,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증권 중개 회사인 로열3 홀딩스(Loyale3 Holdings Inc.영어)에 투자했는데, 이 회사의 웹사이트와 모바일 앱은 기업이 IPO의 일부를 최소 100 USD를 투자하는 소액 투자자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게 하고, 투자자들이 이미 상장된 회사 주식을 정기적으로 소액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한다.
오닐은 e스포츠 팀 NRG e스포츠의 투자자이다. 그는 또한 《카운터-스트라이크: 글로벌 오펜시브》 리그 《E리그》를 홍보하는 TV 광고에 출연했다.
오닐은 단순하고 성공이 입증된 프랜차이즈 사업을 선호한다. 2016년 말, 그는 애틀랜타의 폰세 데 레온 애비뉴 295번지에 있는 크리스피 크림 매장을 인수했다. 오닐은 또한 이 회사의 글로벌 대변인이다. 그는 155개의 파이브 가이즈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전체 매장의 약 10%)을 소유했으며(이후 매각), 17개의 앤티 앤스 레스토랑을 소유하고 있다. 오닐은 또한 150개의 세차장, 40개의 헬스 클럽, 뉴어크의 영화관, 그리고 빅 치킨 브랜드의 치킨 샌드위치를 소유하고 있다.
2018년, 오닐은 미디엄 레어와 협력하여 매년 개최되는 음악 축제, 서커스, 카니발이 결합된 샤크의 펀 하우스를 만들었다. 이 행사는 보통 유명 DJ와 공연자들을 초청한다.
2019년 초, 오닐은 파파존스 이사회에 합류하고 애틀랜타 지역의 9개 매장에 투자했다. 또한, 그는 3년 계약의 일환으로 회사의 대변인이 되었다. 이듬해, 파파존스는 오닐에게 헌정하는 피자인 샤크-아-로니(Shaq-a-Roni영어)를 출시했다.
2021년, 오닐은 다른 유명 운동선수 및 유명인사들과 함께 FTX라는 암호화폐 거래소의 유료 대변인이었다. 2022년 11월, FTX는 파산 신청을 했고, 수십억 달러의 고객 자금과 오닐의 개인 지분을 날려버렸다. 그는 다른 대변인들과 함께 미등록 증권을 홍보한 혐의로 고소당했다. 2022년 2월, 미국 제11순회 항소법원은 비트커넥트에 대한 소송에서 1933년 증권법이 표적 소셜 미디어 광고에도 적용된다고 판결했다.
2022년 롱비치에서 오닐의 할로윈 행사 샤크토버페스트(Shaqtoberfest영어)가 처음으로 열렸다.
2023년 10월, 오닐은 리복의 농구 부문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7.6. 자선 활동 및 지역 사회 참여
오닐은 뉴어크의 미국 소년소녀 클럽이 자신에게 안전한 놀이 공간을 제공하고 길거리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2005년 6월, 조지 미칸 명예의 전당 센터가 사망했을 때, 미칸을 큰 영향력으로 여겼던 오닐은 그의 가족에게 모든 장례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고, 가족은 이를 수락했다.
7.7. 법 집행 관련 활동
오닐은 경찰서의 업무에 높은 관심을 유지했으며, 법 집행에 개인적으로 참여했다. 오닐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보안관 예비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로스앤젤레스 항만 경찰의 예비 경찰관이 되었다。
2005년 3월 2일, 오닐은 명예 미국 연방보안관 직함을 부여받고 세이프 서핀 재단(Safe Surfin' Foundation영어)의 대변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인터넷에서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자를 추적하는 동명의 태스크포스에서 명예직을 수행했다.
마이애미로 트레이드된 후, 오닐은 마이애미 비치 예비 경찰관이 되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2005년 12월 8일, 그는 선서했지만, 다른 경찰관들의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비공개 행사를 선택했다. 그는 이 직책에서 연간 1 USD의 급여를 받기로 했다. 그 직후, 마이애미에서 오닐은 증오 범죄 (동성애 혐오적 욕설을 외치며 남성을 폭행)를 목격하고 마이애미-데이드 경찰에 신고했으며, 자신의 휴대폰으로 용의자를 묘사하고 경찰이 범인을 추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오닐의 행동으로 인해 두 명의 용의자가 가중 폭행, 폭행, 증오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2006년 9월, 오닐은 버지니아주 베드포드 카운티의 한 시골 주택에 대한 급습에 참여했다. 오닐은 지역 보안관 부서에 의해 "명예 부보안관"으로 임명되었다. 오닐은 SWAT 요원 자격이 없었다.
2008년 6월, 버지니아주 베드포드 카운티와 애리조나주 마리코파 카운티 보안관 부서는 오닐이 코비 브라이언트에 대해 랩을 하고 인종차별적 비하 발언을 사용하는 영상이 공개된 후 오닐의 특별 부보안관 직위를 철회했다.
2015년 1월 20일, 오닐은 도럴 경찰서의 예비 경찰관으로 선서했다. 2016년 12월, 오닐은 조지아주 존스보로의 클레이턴 카운티 보안관 부서의 부보안관으로 선서했다. 오닐은 카운티에서 가장 키가 큰 부보안관으로 기록되어 있다.
7.8. 프로 레슬링 및 종합격투기 출연
오닐은 평생 프로 레슬링 팬으로, 수년 동안 네 개의 다른 프로모션에서 텔레비전 중계 행사에 여러 차례 출연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레슬러는 토니 애틀러스, 정크야드 독, 앙드레 더 자이언트, 브록 레스너이다.
1994년, 오닐은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 (WCW)에 여러 차례 출연했으며, 배시 앳 더 비치 페이 퍼 뷰에서는 헐크 호건과 릭 플레어의 WCW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 경기 우승자에게 타이틀 벨트를 수여하기도 했다. 2009년 7월, 오닐은 월드 레슬링 엔터테인먼트 (WWE)의 《WWE RAW》 생방송의 특별 진행자를 맡았다. 쇼의 일부로, 오닐은 213 cm의 레슬러 빅 쇼와 물리적인 충돌을 벌였다. 2012년 9월, 오닐은 토털 논스톱 액션 레슬링 (TNA)의 《임팩트 레슬링》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헐크 호건과 백스테이지 세그먼트를 가졌다.
2016년 4월, 오닐은 레슬매니아 32의 앙드레 더 자이언트 추모 배틀 로열에 깜짝 유명인 참가자로 출전하며 첫 경기에 참여했다. 오닐은 데미안 샌다우를 제거했고, 빅 쇼와 또 다른 대결을 펼쳤지만, 다른 대부분의 레슬러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7월 2016년 ESPY 어워드 레드카펫에서 빅 쇼와 오닐은 또 다른 짧은 대결을 펼쳤다. 레슬매니아 33에서 경기가 제안되었고, 오닐은 이를 수락했다. 2017년 1월, 둘은 소셜 미디어에서 서로를 도발하며 잠재적인 경기를 준비하는 훈련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몇 주간의 논의 끝에 경기는 취소되었다.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의 데이브 멜처에 따르면, 양측이 계약에 합의하지 못하여 금전적인 이유로 경기가 취소되었다고 한다. 빅 쇼는 나중에 오닐의 스케줄 문제로 인해 취소되었다고 말했다.
2020년 11월 11일 《AEW 다이너마이트》 에피소드에서 제이드 카길이 코디 로즈를 방해하며 올 엘리트 레슬링 (AEW)에 오닐이 등장할 것을 예고했다. 그는 《빙 더 엘리트》에 카메오로 출연했으며, 이후 오닐이 최근 AEW 녹화 현장, 풀 기어를 포함하여 백스테이지에 출연했음이 확인되었다. 그는 12월 9일 《AEW 다이너마이트》 에피소드에 출연하여 토니 스키아보니와 브랜디 로즈와의 앉아서 하는 인터뷰에서 AEW에 대해 언급했다. 인터뷰 말미에 오닐이 브랜디에게 몇 주 전 브랜디의 팔을 부러뜨린 카길에게 조언을 구하라고 말하자 브랜디는 오닐에게 물을 뿌렸다. 2021년 3월 3일 《AEW 다이너마이트》의 특별 에피소드인 더 크로스로드에서 오닐은 제이드 카길과 팀을 이루어 코디 로즈와 레드 벨벳을 물리쳤다. 경기 중 오닐은 브로디 리에게 그의 시그니처 제스처와 파워밤으로 경의를 표했으며, 코디가 오닐에게 플라잉 크로스바디 태클을 날려 오닐이 링 에이프런에 서 있다가 링사이드에 설치된 두 개의 테이블을 뚫고 넘어지게 했다.
- 종합격투기**: 오닐은 2000년에 종합격투기 (MMA) 훈련을 시작했다. 조나단 버크의 그레이시 짐(Gracie Gym영어)에서 그는 권투, 주짓수, 무에타이, 레슬링을 훈련했다. 짐에서 그는 디젤(Diesel영어)이라는 별명을 사용했다. 오닐은 2009년 6월 17일 유튜브에 올린 영상에서 킥복서이자 종합격투기 선수인 최홍만에게 종합격투기 규칙 경기를 제안했다. 최는 오닐과 싸우고 싶은지에 대한 이메일 질문에 "네, 기회가 있다면요"라고 답했다. 최는 또한 오닐이 이길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아니요"라고 간단히 답했다。2010년 8월 28일 보스턴에서 열린 UFC 118 인터뷰에서 오닐은 최와 싸우고 싶다는 의사를 다시 밝혔다. 2023년, 차엘 소넨은 자신이 오닐과 다회 UFC 세계 챔피언 조르주 생 피에르 간의 그래플링 경기를 주선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7.9. 광고
오닐은 텔레비전 광고에 자주 출연한다. 그는 1995년 《아이 러브 루시》(Job Switching 에피소드), 《보난자》, 《우디 우드페커》와 같은 쇼를 패러디한 펩시 광고를 포함하여 여러 광고에 출연했다. 그는 또한 리복, 네슬레 크런치, 골드 본드, 뷰익, 더 제너럴, 파파존스, 훌루, 엡손, 카니발 크루즈, 프로스티드 플레이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비타민 워터, 아이시핫 등의 회사 광고에도 출연했다.
8. 개인사
샤킬 오닐의 사생활은 그의 결혼과 자녀, 학업 성취, 그리고 농구 외적인 다양한 관심사를 포함한다.
8.1. 가족 및 관계

오닐은 침례교 신자인 어머니와 이슬람교 신자인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두 종교를 모두 가르쳤다고 말했다. 로빈 라이트는 자신의 책 《록 더 카스바》에서 오닐을 무슬림으로 언급했으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도 그를 무슬림으로 지칭했다. 그러나 오닐은 "나는 무슬림이고, 나는 유대인이며, 나는 불교도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오닐은 2002년 12월 26일 숀 넬슨과 결혼했다. 부부에게는 셰리프를 포함한 네 명의 자녀가 있다. 넬슨은 또한 이전 관계에서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두었다.
2007년 9월 4일, 오닐은 마이애미-데이드 순회 법원에 넬슨과의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넬슨은 나중에 부부가 다시 합쳤고 이혼 소송이 철회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9년 11월 10일, 넬슨은 화해할 수 없는 차이를 이유로 이혼 의사를 다시 제기했다. 이혼은 2011년에 확정되었다. 오닐은 실패한 결혼에 대해 자신을 탓하며,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고 "탐욕스러웠다"고 말한다.
2015년, 셰리프는 고등학교 농구 하이라이트에서 201 cm의 파워 포워드 신입생으로 등장했으며, 그의 아버지와 "정반대의 플레이 스타일"을 가졌다고 묘사되었는데, 이는 그의 더 운동선수다운 체격과 더 나은 슛 거리에 기인했다. 셰리프는 UCLA 브루인스에서 대학 농구를 하다가 LSU로 전학했다.
2023년 11월, 오닐의 딸 미아라(Me'Arah영어)는 플로리다 게이터스와 국가대표 의향서에 서명했다. 2024-25 시즌은 플로리다에서 그녀의 신입생 시즌이었다.
8.2. 교육 및 학업 성취
오닐은 3년 만에 NBA를 위해 LSU를 중퇴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에게 결국 학업을 마치고 학사 학위를 취득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2000년 LSU에서 일반 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그 약속을 이행했고, 정치학을 부전공했다. 필 잭슨 감독은 오닐이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홈 경기를 결장하게 해주었다. 졸업식에서 그는 군중에게 "이제 진짜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후 오닐은 2005년 피닉스 대학교를 통해 온라인 MBA 학위를 취득했다. MBA 학위 취득에 대해 그는 "내가 현실로 돌아갈 때 이력서에 쓸 만한 것이다. 언젠가 농구공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9시부터 5시까지의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선수 경력 말년에 오닐은 배리 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그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는 "리더십 스타일에서 유머와 공격성의 이중성"이었다. 오닐은 2012년 배리 대학교에서 Ed.D.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ABC 뉴스 기자에게 로스쿨에 진학하여 학업을 더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9년, 오닐은 시러큐스 대학교의 S. I. 뉴하우스 퍼블릭 커뮤니케이션스 스쿨에서 스포츠캐스터 U. 훈련 캠프에 참석했다. 또한, 그는 뉴욕 필름 아카데미의 영화 제작 콘서바토리에서 연출과 촬영을 공부했다.
8.3. 은퇴 후 관계
2010년 여름, 오닐은 리얼리티 TV 스타 니콜 "후프즈" 알렉산더와 교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오닐의 서드베리 자택에서 거주하다가 2012년 8월에 헤어졌다.
오닐은 2014년 초 매사추세츠주 가드너 출신의 모델 라티시아 롤(Laticia Rolle영어)과 교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2018년 3월에 헤어졌다.
8.4. 농구 외 활동

오닐은 오메가 프시 파이 형제회 회원이다.
오닐은 2009년 뉴저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오닐은 2011년 프리메이슨이 되었고, 보스턴의 위도우스 선 로지 28호(Widow's Son Lodge No. 28영어)의 회원이 되었다. 오닐은 프린스 홀 프리메이슨이다.
2012년 1월 31일, 오닐은 35명의 위대한 맥도날드 올-아메리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오닐의 의붓아버지 필립 아서 해리슨은 2013년 9월 10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오닐은 NHL의 뉴저지 데블스 팬으로, 이 팀은 그의 고향인 뉴어크에 연고지를 두고 있으며, 수년 동안 여러 경기에 참석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2014년 1월 11일, 오닐은 데블스와 플로리다 팬서스 간의 경기에서 시구를 하고 잠보니를 운전했다. 오닐은 또한 잉글랜드 축구 클럽 노샘프턴 타운 FC의 팬이며, 그들의 공식 유튜브 페이지에 지지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오닐은 NFL의 댈러스 카우보이스 팬이다. 그에 따르면, 축구는 사실 그의 첫 번째 스포츠였고, 그는 자신의 우상인 에드 "투 톨" 존스처럼 되고 싶어 한다.
2016년, 오닐은 조지아주 맥도너에 있는 14.3에이커 규모의 두 채의 주택 단지를 115.00 만 USD에 구입했다. 이 단지는 애틀랜타에서 남동쪽으로 약 48 km 떨어져 있다.
오닐은 2013년 공화당 소속의 뉴저지주 주지사 크리스 크리스티의 재선 캠페인을 지지하며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했다. 그는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조 바이든의 가상 집회에 참여했으며,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했다.
오닐은 리복과의 4000.00 만 USD 계약을 거절했는데, 한 어머니가 자신의 신발이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23년 7월, 오닐은 자신의 첫 번째 개인 제트기인 2700.00 만 USD 상당의 봄바디어 챌린저 650을 구입했다. 이 비행기에는 꼬리 부분에 상징적인 "덩크맨" 로고가 새겨져 있다.
오닐은 시카고 스카이 선수이자 전 LSU 타이거스 여자 농구팀 선수인 엔젤 리즈의 멘토이다. 리즈는 오닐을 아버지 같은 존재로 여긴다. 리즈는 오닐의 저지 레전드 프로덕션(Jersey Legends Productions영어)이 제작한 프라임 비디오의 《더 머니 게임: LSU》의 주인공이다.
9. 유산 및 평가
샤킬 오닐은 농구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그의 경력과 은퇴 후 활동은 그의 다면적인 유산을 형성하고 있다.
9.1. 전반적인 영향력과 유산
샤킬 오닐은 NBA 역사상 가장 지배적인 선수 중 한 명이자 역대 최고의 센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득점(9위), 야투 성공(6위), 리바운드(15위), 블록(8위)에서 역대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다. 또한 역대 필드골 성공률(58.2%)에서 3위를 기록했다. 그는 NBA 50주년 기념 올스타팀과 NBA 75주년 기념 팀에 선정되며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2022년, NBA 75주년을 기념하여 《디 애슬레틱》은 역대 최고의 선수 75명을 선정했으며, 오닐을 NBA 역사상 8번째로 위대한 선수로 꼽았다.
9.2. 비판 및 논란
필 잭슨은 오닐이 경력에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고 믿으며, 그가 "10시즌 연속 MVP 선수가 될 수 있었고, 되어야 했다"고 말했다. 오닐은 야오밍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 코비 브라이언트에 대한 디스 랩, 그리고 "핵-어-샤크" 전술을 유도하는 낮은 자유투 성공률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체중 문제와 잦은 부상 또한 그의 경력에서 논란의 대상이었다.
9.3. 은퇴 후 활동
선수 은퇴 후, 오닐은 TNT의 NBA 농구 경기 분석가로 활동하며 찰스 바클리, 어니 존슨, 케니 스미스와 함께 《인사이드 더 NBA》에 출연하고 있다. 그는 또한 디젤(Diesel영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렉트로닉 음악 프로듀서이자 투어링 DJ이다.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계속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다양한 사업 투자와 프랜차이즈 운영을 통해 성공적인 사업가로도 자리매김했다. 그는 새크라멘토 킹스의 소수 지분 소유주였고, NBA 2K 리그 팀의 단장을 맡기도 했다. 오닐은 리복의 농구 부문 사장으로 임명되는 등 스포츠 산업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그는 경찰관으로서의 활동과 자선 활동을 통해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10. 외부 링크
- [https://www.shaq.com/ 샤킬 오닐 공식 웹사이트]
- [https://www.nba.com/playerfile/shaquille_oneal/index.html NBA.com 샤킬 오닐 프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