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찰스 웨이드 바클리(Charles Wade Barkley영어, 1963년 2월 20일 ~ )는 미국의 전 농구 선수이자 현재는 텔레비전 농구 분석가, 작가이다. "서 찰스"(Sir Charles영어), "빵 트럭"(the Bread Truck영어), "리바운드의 둥근 언덕"(the Round Mound of Rebound영어), 그리고 일본에서는 "날아다니는 냉장고"(空飛ぶ冷蔵庫소라토부 레이조코일본어) 등의 별명으로도 불리며, NBA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파워 포워드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바클리는 오번 대학교에서 대학 농구 선수로 활약한 후, 1984년 NBA 드래프트에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의해 5순위로 지명되며 NBA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필라델피아(1984~1992), 피닉스 선즈(1992~1996), 휴스턴 로키츠(1996~2000)에서 총 16시즌을 뛰었다. 1993년 NBA MVP를 수상했으며, 11차례 NBA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1차례 올-NBA 팀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1991년 NBA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고 1987년에는 리바운드 왕에 올랐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드림팀의 일원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NBA 역사상 네 번째로 20,000득점, 10,000리바운드, 4,000어시스트를 달성한 선수 중 한 명이며, 이후 팀 던컨, 케빈 가넷, 르브론 제임스 등이 이 기록을 달성하여 현재는 그 이상의 선수들이 있다. 2006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개인 자격으로 헌액되었고, 2010년에는 1992년 드림팀의 일원으로서 다시 헌액되었다.
바클리는 현역 시절부터 팬과 언론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으며, 솔직하고 논쟁적인 언행으로 유명했다. 1991년 관중에게 침을 뱉은 사건이나 1993년 "나는 롤모델이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TNT의 '인사이드 더 NBA'에서 농구 분석가로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가며 5차례 스포츠 에미상을 수상했다.
개인적으로는 도박 습관과 음주운전 사건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으나, 사회 문제에 대한 거침없는 발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정치적 입장을 바꾸며 인종 문제, 성소수자 권리, 경찰 개혁,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시각 등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단순한 농구 스타를 넘어 사회적 공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2. 어린 시절과 교육
찰스 바클리는 미국 앨라배마주 리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의 성장 배경과 학창 시절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1.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
바클리는 1963년 2월 20일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동쪽으로 약 27359 m (17 mile) 떨어진 리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당시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되던 백인 전용 병원에서 태어난 최초의 흑인 아기였으며,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에도 흑인 학생 그룹의 일원이었다. 바클리의 부모님은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동생 대릴 바클리를 포함한 가족을 버렸던)가 가족을 떠나면서 이혼했다. 이후 어머니는 재혼하여 존 글렌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다른 형제인 레니는 영아기에 사망했다. 그의 새아버지는 찰스가 11살이던 해에 사고로 사망했다.
2.2. 고등학교와 대학 경력
바클리는 리즈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학년 때 그의 신장은 0.1 m (5 in)였고 체중은 100 kg (220 lb)였다. 그는 농구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하고 후보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여름 동안 신장이 0.2 m (6 in)로 크게 성장했고, 4학년이 되어서는 대표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경기당 평균 19.1득점, 17.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26승 3패의 기록으로 이끌고 주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이러한 기량 향상에도 불구하고, 바클리는 앨라배마주에서 가장 주목받던 선수였던 보비 리 허트를 상대로 26득점을 기록한 주 고등학교 준결승전 전까지는 대학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번 대학교 농구팀의 소니 스미스 감독의 보조 코치는 이 경기를 관전하고 "바람처럼 플레이할 수 있는 뚱뚱한 선수를 보았다"고 보고했다. 이후 바클리는 스미스 감독에게 스카우트되었고, 오번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바클리는 3시즌 동안 오번 타이거스에서 뛰었다. 그는 체중 조절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선수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매년 사우스이스턴 콘퍼런스 리바운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는 자신의 키와 몸무게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슬램덩크와 블록샷으로 팬들을 열광시키며 인기 있는 선수가 되었다. 육중한 바클리가 수비 리바운드를 잡은 후, 패스 대신 코트 전체를 드리블하며 반대편 골대에서 양손 덩크슛으로 마무리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신체적 능력과 기술 덕분에 그는 "리바운드의 둥근 언덕"(The Round Mound of Rebound영어)과 "크리스코 키드"(Crisco Kid영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학 경력 동안 바클리는 평균적인 센터보다 키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센터 포지션에서 뛰었다. 그의 공식적인 키는 0.2 m (6 in)로 기재되어 있지만, 그의 저서 ''''틀릴 수도 있지만 의심한다''''(I May Be Wrong but I Doubt It)'''에서는 0.2 m (6 in)로 언급되어 있다. 그는 오번 대학교 올-센추리 팀의 일원이 되었고, 여전히 62.6%의 야투 성공률로 오번 대학교 역대 최고 야투 성공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1984년 사우스이스턴 콘퍼런스 올해의 선수를 비롯해 3차례의 올-SEC 선정과 1차례의 세컨드 팀 올-아메리칸 선정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이후 '버밍햄 포스트-헤럴드'는 바클리를 1980년대 SEC 10년간의 선수로 선정했다.
바클리는 3년간의 대학 경력 동안 경기당 평균 14.1득점(야투 성공률 62.6%), 9.6리바운드, 1.6어시스트, 1.7블록을 기록했다. 1984년에는 타이거스를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NCAA 남자 농구 토너먼트에 진출시켰고, 야투 성공률 80%로 23득점, 17리바운드, 4어시스트, 2스틸, 2블록을 기록하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2001년 3월 3일, 오번 대학교는 바클리의 등번호 3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그는 밥 나이트 감독이 이끄는 1984년 미국 남자 올림픽 농구 국가대표팀의 스프링 트라이아웃에 초대된 74명의 대학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바클리는 4월의 최종 20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5월의 최종 16인 선발에서 존 스톡턴, 테리 포터, 모리스 마틴과 함께 탈락했다. 나이트 감독에 따르면, 바클리는 부실한 수비 때문에 탈락했다.
2010년, 바클리는 오번 대학교 재학 시절 스포츠 에이전트들로부터 돈을 요구하여 받았음을 인정했다. 바클리는 에이전트들에게 요구했던 금액을 "푼돈"이라고 부르며, "에이전트가 나에게 돈을 빌려주고 내가 졸업하면 갚을 수 없는가?"라고 말했다. 바클리에 따르면, 그는 첫 NBA 계약을 맺은 후 빌렸던 모든 돈을 갚았다.
3. 프로 농구 경력
찰스 바클리의 NBA 프로 농구 선수로서의 여정은 그가 소속했던 팀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그는 뛰어난 기량과 강렬한 개성으로 각 팀에서 리더 역할을 수행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3.1.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84-1992)
바클리는 오번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해를 마치지 않고 1984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그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의해 전체 5순위로 지명되었는데, 이는 시카고 불스가 마이클 조던을 지명한 두 순위 뒤였다. 그는 줄리어스 어빙, 모제스 말론, 모리스 칙스와 같은 베테랑 선수들이 포함된 팀에 합류했다. 이들은 필라델피아를 1983년 NBA 챔피언십으로 이끌었던 선수들이었다. 말론의 지도를 받으며 바클리는 체중을 관리하고 경기 준비 및 컨디션 조절 방법을 배웠다. 바클리는 말론을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로 꼽았으며, 종종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

루키 시즌에 바클리는 정규 시즌 동안 경기당 평균 14.0득점, 8.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NBA 올-루키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다. 1985년 NBA 플레이오프에서 식서스는 동부 콘퍼런스 결승에 진출했으나, 보스턴 셀틱스에게 5경기에서 패했다. 루키로서 바클리는 플레이오프에서 경기당 평균 14.9득점, 11.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두 번째 시즌인 1985-86 시즌에는 비시즌 동안 모제스 말론의 지도 아래 훈련을 통해 기량을 향상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팀의 주요 리바운더이자 두 번째 득점원이 되었으며, 경기당 평균 20.0득점, 12.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식서스의 주전 파워 포워드가 되어 팀을 1986년 NBA 플레이오프로 이끄는 데 기여했으며, 플레이오프에서는 경기당 평균 25.0득점(야투 성공률 .578), 15.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라델피아는 동부 콘퍼런스 준결승에서 밀워키 벅스에게 4대3으로 패했다. 그는 올-NBA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1986-87 시즌을 앞두고 모제스 말론이 워싱턴 불리츠로 트레이드되면서 바클리는 팀의 리더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1986년 11월 4일, 바클리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경기에서 34득점, 10리바운드, 커리어 하이인 14어시스트를 기록했지만 팀은 125대121로 패했다. 1987년 3월 20일에는 덴버 너기츠와의 경기에서 26득점, 커리어 하이와 타이 기록인 16개의 공격 리바운드를 포함한 25리바운드, 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116대106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경기당 평균 14.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자신의 첫이자 유일한 리바운드 타이틀을 획득했고, 경기당 5.7개로 공격 리바운드 부문에서도 리그 1위를 차지했다. 또한 0.594의 야투 성공률로 23.0득점을 평균하며 NBA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했고, 두 시즌 연속 올-NBA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1987년 NBA 플레이오프에서는 경기당 평균 24.6득점, 12.6리바운드를 기록했으나, 두 시즌 연속으로 벅스에게 5경기 1라운드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패배했다.
다음 시즌인 1987-88 시즌, 줄리어스 어빙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바클리는 식서스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었다. 1988년 11월 30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의 경기에서 41득점, 22리바운드, 5어시스트, 6스틸을 기록하며 114대106 승리를 이끌었다. 80경기에 출전하여 팀 동료 중 가장 많은 300분 이상을 뛰면서, 그는 경기당 평균 28.3득점(야투 성공률 .587), 11.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가장 생산적인 시즌을 보냈다. 그는 두 번째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커리어 처음으로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다. 식서스의 프랜차이즈 선수로서 그의 명성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 모델로 처음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74-75 NBA 시즌 이후 처음으로 식서스는 1988년 NBA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1988-89 시즌에도 바클리는 계속해서 좋은 활약을 펼쳤으며, 경기당 평균 25.8득점(야투 성공률 .579), 12.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세 시즌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두 시즌 연속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다. 바클리가 경기당 평균 27.0득점(야투 성공률 .644), 11.7리바운드, 5.3어시스트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식서스는 1989년 NBA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에게 스윕당했다.
1989-90 시즌 동안, 바클리는 MVP 투표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매직 존슨에 이어 2위를 기록했으나, 더 많은 1위 표를 얻었다. 그는 '스포팅 뉴스'와 '바스켓볼 위클리'로부터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경기당 평균 25.2득점, 11.5리바운드, 그리고 커리어 하이인 .600의 야투 성공률을 기록했다. 그는 3년 연속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고, 4번째 올스타 선정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필라델피아가 정규 시즌 53승을 기록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나, 동부 콘퍼런스 준결승 5경기 시리즈에서 시카고 불스에게 패했다. 1990년 NBA 플레이오프에서 또 다른 패배에도 불구하고 바클리는 평균 24.7득점, 15.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990-91 시즌에도 그의 뛰어난 활약은 계속되어, 경기당 평균 27.6득점(야투 성공률 .570), 10.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의 5번째 연속 올스타전 출전은 최고의 활약으로 이어졌다. 그는 동부 콘퍼런스 팀이 서부 콘퍼런스 팀을 116대114로 이기는 데 기여했으며, 17득점과 2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윌트 체임벌린이 1967년 기록한 22리바운드 이후 올스타전 최다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바클리는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으며, 시즌 종료 후 4년 연속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다. 그 해 '뉴욕 타임스'가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센터 데이비드 로빈슨에게 가상의 길거리 농구 경기에서 바클리와 조던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고 묻자, 로빈슨은 "바클리를 선택할 것이다. 그가 경기에 집중할 때, 그는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1991년 NBA 플레이오프에서 필라델피아는 다시 한번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게 동부 콘퍼런스 준결승에서 패했고, 바클리는 경기당 평균 24.9득점, 10.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991-92 시즌은 바클리의 필라델피아에서의 마지막 해였다. 마지막 시즌에 그는 매직 존슨을 기리기 위해 자신의 등번호 34번 대신 32번을 달았다. 존슨은 시즌 시작 전 HIV 양성 판정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76ers는 원래 빌리 커닝햄을 기리기 위해 등번호 32번을 영구 결번했으나, 커닝햄의 승인 하에 바클리가 착용할 수 있도록 해제되었다. 존슨의 발표 이후 바클리는 존슨의 건강 상태를 가볍게 여겼던 것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선수들이 존슨과의 접촉으로 HIV에 감염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바클리는 "우리는 그저 농구를 할 뿐이다. 매직과 보호되지 않은 성관계를 갖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식서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바클리는 경기당 평균 23.1득점(야투 성공률 .552), 11.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6회 연속 올스타 선정 및 7회 연속 올-NBA 퍼스트 팀 또는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그는 식서스 경력을 팀 역사상 총 득점 4위(14,184점), 평균 득점 3위(경기당 23.3점), 리바운드 3위(7,079개), 어시스트 8위(2,276개), 야투 성공률 2위(.576)로 마감했다. 그는 7시즌 연속 리바운드와 야투 성공률에서 필라델피아를 이끌었으며, 6시즌 연속 득점에서도 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바클리는 식서스가 35승 47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자 필라델피아를 떠나겠다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나중에 찰스 바클리 본인이 트레이드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불행했고 떠나고 싶었다고 반박했다. 76ers는 계약 만료까지 기다려 슈퍼스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잃는 대신 그를 트레이드했다. 바클리는 시즌 종료 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트레이드될 뻔했지만, 76ers는 몇 시간 후에 그 계약을 철회했다. 1992년 7월 17일, 그는 제프 호너섹, 팀 페리, 앤드루 랭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공식적으로 피닉스 선즈로 이적했다.
필라델피아에서 8시즌 동안 바클리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케너의 '스타팅 라인업' 장난감 라인에서 액션 피규어가 제작된 몇 안 되는 NBA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또한 나이키와 자체 시그니처 신발 라인을 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거침없는 언행과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코트 위에서 여러 사건을 야기했는데, 특히 1990년 디트로이트 피스턴스의 센터 빌 라임비어와의 싸움은 16.25 만 USD라는 기록적인 벌금을 초래했다.
3.1.1. 침 뱉는 사건
1991년 3월 26일, 뉴저지 네츠와의 경기 중 바클리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며 자신을 야유하던 팬에게 침을 뱉으려 했으나, 실수로 어린 소녀에게 침이 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NBA 운영 사장이었던 로드 손은 바클리에게 침을 뱉고 팬에게 욕설을 한 이유로 1경기 출장 정지와 1.00 만 USD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 사건은 전국적인 뉴스가 되었고, 바클리는 이 일로 비난받았다. 그러나 바클리는 결국 그 소녀와 가족과 친구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사과하고, 그들에게 향후 경기 티켓 등을 제공했다.
은퇴 후 바클리는 자신의 경력에 대해 "나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고 생각하지만, 단 한 가지 후회하는 것은 침 뱉는 사건이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것은 나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 그 사건은 내가 경기 중에 너무 강렬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너무 이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너무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진정해야 했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기고 싶었다. 올바른 방식으로 경기를 하고 경기를 존중하는 대신, 나는 오직 승리만을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3.2. 피닉스 선즈 (1992-1996)
1992-93 시즌 피닉스 선즈로의 트레이드는 바클리와 선즈 모두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선즈에서의 첫 경기에서 바클리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를 상대로 111대105 승리를 거두며 37득점, 21리바운드(이 중 12개는 공격 리바운드), 8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거의 트리플-더블을 달성했다. 그는 경기당 평균 25.6득점(야투 성공률 .520), 12.2리바운드, 그리고 커리어 하이인 5.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선즈를 NBA 최고 기록인 62승 20패로 이끌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바클리는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7회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는 트레이드된 직후 시즌에 리그 MVP를 수상한 역대 세 번째 선수가 되었고, 여러 개인 최고 기록을 세우며 선즈를 1976년 이후 첫 1993년 NBA 파이널 진출로 이끌었다. 바클리가 조던에게 선즈의 우승이 "운명"이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카고 불스에게 6경기에서 패했다. 그는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경기당 평균 26.6득점, 13.6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경기당 평균 27.3득점, 13.0리바운드, 5.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파이널 4차전에서 바클리는 32득점, 12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트리플-더블을 달성했다.
심각한 허리 통증으로 인해 바클리는 1993-94 시즌이 피닉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고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는 커리어 최악의 부상 문제를 겪으면서도 경기당 평균 21.6득점(야투 성공률 .495), 11.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8회 연속 올스타전에 선정되었으나, 오른쪽 대퇴사두근 건 파열로 인해 출전하지 못했으며, 올-NBA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렸다. 바클리가 부상과 씨름하는 와중에도 선즈는 56승 26패의 기록을 달성하며 서부 콘퍼런스 준결승에 진출했다. 시리즈에서 2대0으로 앞서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즈는 결국 7경기에서 하킴 올라주원이 이끄는 당시 우승팀인 휴스턴 로키츠에게 패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1라운드 플레이오프 시리즈 3차전에서 바클리는 31개의 야투 시도 중 23개를 성공시키며 56득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역대 세 번째로 높은 득점이었다.
비시즌 동안 은퇴를 고려한 후, 바클리는 11번째 시즌을 위해 복귀했고 계속해서 부상과 싸웠다. 그는 시즌 전반기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기량을 회복하여 9회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선즈가 59승 23패의 기록을 달성하는 동안 그는 경기당 평균 23득점(야투 성공률 .486), 11.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995년 NBA 플레이오프에서 시리즈에서 3대1로 앞서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즈는 다시 한번 디펜딩 챔피언이자 결국 2년 연속 우승팀이 된 휴스턴 로키츠에게 7경기에서 패했다. 바클리는 플레이오프에서 경기당 평균 25.7득점(야투 성공률 .500), 13.4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준결승 7차전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출전 시간이 제한되었다.
1995-96 시즌은 바클리의 피닉스 선즈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는 경기당 평균 23.3득점(야투 성공률 .500), 11.6리바운드, 그리고 커리어 하이인 자유투 성공률 .777을 기록하며 팀의 득점, 리바운드, 스틸 부문에서 선두를 달렸다. 그는 서부 콘퍼런스 선수들 중 가장 많은 득표를 얻어 10번째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 11월 22일에는 18번째 커리어 트리플-더블을 기록했다. 또한 그는 NBA 역사상 20,000득점과 10,000리바운드를 모두 달성한 10번째 선수가 되었다. 플레이오프에서 바클리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1라운드 플레이오프 4경기에서 패배했을 때 경기당 평균 25.5득점, 13.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선즈가 41승 41패의 기록과 1라운드 플레이오프 패배로 시즌을 마친 후, 바클리는 샘 캐설, 로버트 호리, 마크 브라이언트, 처키 브라운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휴스턴으로 이적했다.
선즈에서 뛰는 동안 바클리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4시즌 모두 올-NBA 팀과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3.2.1. "나는 롤모델이 아니다" 논란
찰스 바클리는 선수 경력 내내 운동선수들이 롤모델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감옥에서 농구공을 덩크할 수 있는데, 그들이 롤모델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1993년, 그의 주장은 "나는 롤모델이 아니다"라는 나이키 광고의 문구를 직접 작성하면서 전국적인 뉴스를 장식했다. 댄 퀘일 전 미국 부통령은 이 광고를 "가족 가치 메시지"라고 칭하며, 바클리가 부모와 교사들에게 자신에게 자녀 양육을 맡기지 말고 스스로 롤모델이 되라고 촉구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바클리의 메시지는 롤모델의 본질에 대한 큰 사회적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는 언론이 선수들에게 롤모델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어느 정도 질투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그들이 '이 젊은 흑인 아이가 먹고살기 위해 경기를 하며 이 많은 돈을 벌고 있으니, 우리가 그를 힘들게 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될 수 없는 사람을 존경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처럼 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마이클 조던처럼 될 수 없습니다."
3.3. 휴스턴 로키츠 (1996-2000)
1996-97 시즌 휴스턴 로키츠로의 트레이드는 바클리가 NBA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할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NBA 50주년 기념 역대 최고 선수 50인에 선정된 하킴 올라주원과 클라이드 드렉슬러 두 명의 베테랑이 포함된 팀에 합류했다. 시즌 시작 전, 바클리는 1996년 10월 25일 프리시즌 경기에서 찰스 오클리와 싸운 죄로 개막전 출장 정지와 5000 USD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오클리가 바클리에게 악의적인 파울을 범하자, 바클리는 오클리를 밀쳐 대응했다. 휴스턴 로키츠에서의 첫 경기에서 바클리는 커리어 하이인 3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시즌 내내 부상과 싸웠고 53경기밖에 뛰지 못했는데, 왼쪽 골반 열상 및 타박상으로 14경기, 오른쪽 발목 염좌로 11경기, 출장 정지로 4경기를 결장했다. 그는 야투 성공률 .484로 경기당 평균 19.2득점을 기록하며 팀 내 2위 득점원이 되었다. 이는 그의 루키 시즌 이후 처음으로 경기당 20득점 미만을 기록한 것이었다. 올라주원이 대부분의 슛을 시도하는 동안, 바클리는 주로 리바운드에 집중하여 경기당 평균 13.5개를 기록하며 자신의 경력에서 두 번째로 좋은 기록을 남겼다. 로키츠는 정규 시즌을 57승 25패로 마감하고 서부 콘퍼런스 결승에 진출했으나, 유타 재즈에게 6경기에서 패했다. 1997년 NBA 플레이오프에서 또 다른 플레이오프 패배를 기록하며 바클리는 경기당 평균 17.9득점, 12.0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997-98 시즌은 바클리에게 또 한 번 부상이 잦았던 해였다. 그는 야투 성공률 .485로 경기당 평균 15.2득점, 11.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로키츠는 41승 41패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감했고, 1998년 NBA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유타 재즈에게 5경기 만에 탈락했다. 부상으로 인해 출전이 제한되었던 바클리는 시리즈 4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9.0득점, 5.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21.8분 출전에 그쳤다. 락아웃으로 단축된 시즌 동안 바클리는 42경기의 정규 시즌 경기에 출전하여 야투 성공률 .478로 16.1득점, 경기당 평균 12.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윌트 체임벌린에 이어 NBA 역사상 23,000득점, 12,000리바운드, 4,000어시스트를 모두 달성한 두 번째 선수가 되었다. 로키츠는 단축 시즌을 31승 19패로 마감하고 1999년 NBA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출전에서 바클리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게 1라운드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을 때 야투 성공률 .529로 23.5득점, 경기당 평균 13.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플레이오프 경력을 123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23득점(야투 성공률 .513), 12.9리바운드, 3.9어시스트로 마감했다.
1999-2000 시즌은 바클리의 NBA에서의 마지막 해였다. 시즌 초반 바클리는 야투 성공률 .477로 경기당 평균 14.5득점, 10.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999년 11월 10일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 샤킬 오닐과 함께 퇴장당했다. 오닐이 바클리의 레이업 슛을 블록한 후, 오닐이 바클리를 밀쳤고, 바클리는 오닐에게 공을 던졌다. 36세의 나이에 1999년 12월 8일, 그의 경력이 시작된 필라델피아에서 왼쪽 대퇴사두근 건이 파열되면서 시즌과 커리어가 조기에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부상이 경력의 마지막 이미지가 되는 것을 거부한 바클리는 4개월 후 단 한 경기를 위해 복귀했다. 2000년 4월 19일, 밴쿠버 그리즐리스와의 홈 경기에서 바클리는 자신의 커리어 동안 흔히 볼 수 있었던 공격 리바운드와 풋백으로 기억에 남을 득점을 성공시켰다. 그는 부상자 명단에서 복귀하여 목표를 달성했고, 기립 박수 속에서 코트를 떠났다. 그는 "오늘 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나 자신을 위해 했다. 많은 경기를 이기고 졌지만, 마지막 기억은 코트에서 실려 나가는 것이었다. 코트에서 실려 나갔던 정신적 장벽을 극복할 수 없었다. 내 발로 코트를 걸어 나가는 것이 심리적으로 중요했다"고 말했다. 이 득점 후, 바클리는 즉시 은퇴하며 16년 동안의 명예의 전당 커리어를 마감했다.
3.4. 올림픽 경력
바클리는 밥 나이트에 의해 1984년 하계 올림픽 미국 남자 농구팀 선발전에 초대되었다. 그는 최종 선발까지 진출했지만, 프론트코트 선수들 대부분을 능가하는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나이트 감독에 따르면, 바클리는 수비 부족 때문에 탈락했다.
바클리는 1992년 하계 올림픽과 1996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하여 미국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전에 NBA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금지했던 국제 규칙이 1992년에 변경되면서, 바클리와 다른 NBA 선수들은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팀은 "드림팀"(Dream Team영어)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올림픽 예선전에서 6승 0패, 올림픽 본선에서 8승 0패를 기록했다. 팀은 경기당 평균 117.3득점이라는 올림픽 기록을 세웠고, 경기당 평균 43.8점 차이로 승리했는데, 이는 1956년 미국 남자 올림픽 농구 국가대표팀만이 능가하는 기록이다. 바클리는 야투 성공률 71.1%로 팀 내 최다인 18.0득점을 기록했으며, 브라질과의 127대83 승리 경기에서 30득점을 기록하며 당시 올림픽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 또한 그는 3점 야투 성공률 87.5%로 미국 남자 올림픽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경기당 4.1리바운드와 2.6스틸을 추가했다. 앙골라와의 경기에서 바클리는 헤를란데르 코임브라의 가슴을 팔꿈치로 가격했고, 경기 후 자신은 먼저 맞았다고 주장하며 사과하지 않았다. 바클리는 해당 플레이에서 고의적인 파울을 범한 것으로 판정받았다. 코임브라가 얻은 자유투는 미국 팀의 46대1 런 동안 앙골라가 기록한 유일한 득점이었다.
1996년 애틀랜타 하계 올림픽에서 바클리는 득점, 리바운드, 야투 성공률에서 팀을 이끌었다. 그는 야투 성공률 81.6%로 경기당 평균 12.4득점을 기록하며 미국 남자 올림픽 기록을 세웠다. 또한 그는 경기당 6.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바클리의 리더십 아래, 팀은 다시 한번 8승 0패의 완벽한 기록을 달성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4. 선수 특징과 특성
찰스 바클리는 주로 파워 포워드로 뛰었지만, 때로는 스몰 포워드와 센터로도 활약했다. 그는 농구 선수로서는 독특한 체격으로 유명했다. 대부분의 스몰 포워드보다 체격이 건장했지만, 자신이 상대했던 대부분의 파워 포워드보다 키가 작았다. 그러나 바클리는 힘과 민첩성의 독특한 조합 덕분에 키가 더 큰 상대와 더 빠른 상대 모두를 능가할 수 있었다.
바클리는 엄청난 득점력을 자랑하는 선수였으며, 커리어 정규 시즌 동안 경기당 평균 22.1득점, 플레이오프에서는 경기당 평균 23.0득점을 기록했다. 바클리는 매우 효율적인 공격수였으며, 1986-87 시즌부터 1990-91 시즌까지 매 시즌 2점 야투 성공률에서 NBA 1위를 차지했다. 또한 1986-87 시즌과 1987-88 시즌에는 유효 야투 성공률에서도 리그 1위를 기록했으며, 1988-89 시즌과 1989-90 시즌에는 공격 효율성에서도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는 NBA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선수이자 정확한 득점원 중 한 명이었으며, 코트 어디에서든 득점할 수 있었고, NBA 최고의 클러치 선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NBA 경력 동안 바클리는 매우 드문 기술 조합을 가지고 있었고 다양한 포지션에서 뛸 수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상대에게 어려운 상대였다. 그는 한 플레이에서 자신의 게임의 모든 측면을 활용했다. 득점원으로서 그는 페이드어웨이 슛이나 강력한 덩크로 속공을 마무리하는 등 외곽과 포스트에서 다양한 스핀 동작과 함께 득점할 수 있었다. 그는 커리어 정규 시즌 야투 성공률 54.13%, 플레이오프 커리어 야투 성공률 51.34%(1989-90 NBA 시즌 동안 커리어 최고 시즌 평균 60% 포함)로 역대 가장 효율적인 득점원 중 한 명이었다.
바클리는 1986-87 시즌 동안 커리어 하이인 경기당 평균 14.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리그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한 NBA 역사상 가장 키가 작은 선수이다. 129 kg (284 lb)에서 114 kg (252 lb) 사이를 오갔던 작은 체구에 비해 끈질기고 공격적인 플레이 방식은 그를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바운더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는 정규 시즌 커리어 동안 경기당 평균 11.7리바운드, 플레이오프 커리어 동안 경기당 평균 12.9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정규 시즌 커리어 총 12,54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바클리는 3년 연속 NBA에서 공격 리바운드 1위를 차지했으며, 수비 리바운드를 잡은 후 코트 전체를 드리블하여 강력한 덩크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파워 포워드 중 가장 유명했다.
바클리는 또한 공격적인 태도, 발놀림, 그리고 스틸을 예상하기 위해 코트의 상황을 읽는 능력으로 뛰어난 수비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파워 포워드 포지션에서 역대 스틸 2위, 그리고 파워 포워드 포지션에서 역대 경기당 평균 스틸 1위를 기록했다. 스몰 포워드와 파워 포워드 포지션 모두에 비해 키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한 역대 블록샷 순위에서도 상위권에 올랐다. 그의 속도와 점프 능력은 그를 코트 아래로 달려가 더 빠른 선수의 체이스다운 블록을 성공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파워 포워드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SLAM' 잡지의 NBA 위대한 선수 랭킹에서 바클리는 역대 상위 20인에 들었다. 잡지에서 NBA 명예의 전당 헌액자 빌 월튼은 바클리의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클리는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처럼 특정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는 선수다. 그는 모든 것을 소화하며 농구를 한다. 바클리가 하는 일을 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 그는 압도적인 리바운더이자, 압도적인 수비수, 3점 슈터, 드리블러, 플레이메이커다."
5. 은퇴 후 경력
선수 은퇴 후 찰스 바클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농구 해설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5.1. 텔레비전 분석가

2000년부터 바클리는 TNT의 스튜디오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NBA 경기 중계의 프리게임 및 하프타임 쇼에 출연하며, 특별 NBA 행사에도 참여한다. 또한 때때로 현장 경기 분석가로도 활동한다. 그는 '인사이드 더 NBA' 팀의 일원이며, 이 프로그램은 어니 존슨 주니어, 케니 스미스, 샤킬 오닐과 함께 NBA 경기를 요약하고 전반적인 NBA 사안에 대해 논평하는 경기 후 쇼이다. 바클리는 TNT에서의 활약으로 5차례 스포츠 에미상 '최우수 스튜디오 분석가' 부문을 수상했다.
한 경기 중계 중, 바클리가 마브 앨버트와 함께 코트 사이드에서 딕 바베타 심판의 나이를 놀리자, 앨버트는 바클리에게 "딕이 당신을 달리기 시합에서 이길 것 같다"고 답했다. 이에 바클리는 2007년 NBA 올스타 위크엔드에서 바베타에게 5000 USD를 걸고 달리기 시합을 제안했다. 승자는 돈을 기부할 자선단체를 선택하기로 했다. NBA는 추가로 5.00 만 USD를 기부하기로 했고, TNT는 2.50 만 USD를 보탰다. 두 사람은 농구 코트의 세 바퀴 반 길이를 달렸고 결국 바클리가 승리했다. 경기 후 두 사람은 스포츠맨십을 보여주며 키스했다.
바클리는 또한 2004년 칼리지 게임데이 역사상 최초의 연예인 게스트 예측자로 유명하다.
2011년부터 바클리는 터너 스포츠와 CBS의 NCAA 남자 농구 디비전 I 토너먼트 공동 중계의 스튜디오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11년부터 모든 파이널 포 경기를 중계했다.
또한 2012년 1월 7일 NBC의 NFL 와일드카드 플레이오프 중계에서 게스트 해설자로 활동했다. 같은 날 밤 그는 맨해튼 GE 빌딩 내 '풋볼 나이트 인 아메리카' 스튜디오 옆에서 녹화되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진행을 맡았다.
바클리는 2012년 11월 방송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제는 '이봐, 13년 동안 이 일을 해왔고 계약이 끝날 때까지 가면 17년이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 17년은 긴 시간이다. 방송에서는 평생이다. 개인적으로는 나를 위한 다음 도전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2016년에 은퇴할 계획이라고 반복해서 말한 후에도 그는 터너 스포츠와 또 다른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나중에 2023년 60세가 되면 은퇴하고 싶다고 밝혔다.
2022년 10월, 바클리는 TNT를 소유한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스포츠와 10년간의 계약 연장에 서명하며 '인사이드 더 NBA' 분석가로 남게 되었다.
2024년 6월, 바클리는 2024년 스탠리 컵 결승 2차전의 ABC 중계(ESPN 제작)에 스튜디오 분석가로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2024년 6월, 바클리는 2024-25 NBA 시즌 종료 후 텔레비전에서 은퇴할 의사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8월에 이 결정을 번복하고 TNT 스포츠와 10년, 2.10 억 USD 계약을 유지하기로 했다.
5.2. 기타 미디어 출연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바클리는 TNT에서 게스트들과 함께 스포츠 및 일반 주제 토크쇼인 ''''들으세요! 찰스 바클리, 어니 존슨과 함께''''(Listen Up! Charles Barkley with Ernie Johnson)'''를 진행했다. 2016년 7월에는 바클리가 '더 레이스 카드'라는 6부작 논스크립트 쇼를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이 쇼는 '아메리칸 레이스'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2017년 5월 11일 TNT에서 첫 방송되었다.
2023년 가을, 바클리는 게일 킹과 함께 CNN에서 뉴스 토론 프로그램인 '킹 찰스'를 공동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수요일 밤 10시에 방영되는 한정 시리즈였다. '킹 찰스'는 다음 해 4월에 종영되었다.
5.3. 배우 활동
그는 1996년 영화 '스페이스 잼'에서 자신 역할로 출연했다. TV 시리즈 '슈츠' 시즌 5의 3화에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잭 솔로프에게서 하비 스펙터가 빼앗은 고객과 사진을 찍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찰스는 또한 '모던 패밀리' 시즌 8에도 출연했다. 그는 또한 '클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위 베어 베어스'에서 자신의 애니메이션 버전을 목소리 연기했다. 2019년에는 '골드버그 패밀리'의 "더 피냐 콜라다 송" 에피소드에서 체육 교사이자 외계인 음모론자로 출연하여 떠나는 멜러 코치의 잠재적인 대체자로 잠시 훈련받았다. 바클리는 1993년부터 2018년 사이에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를 네 차례 진행했다.
6. 사생활
찰스 바클리의 사생활은 결혼과 가족, 취미, 재정 습관, 법적 문제 등 다양한 공적인 측면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6.1. 가족과 개인적인 관심사
조지 로페즈가 '로페즈 투나잇'에서 진행한 DNA 검사 결과, 바클리는 14%의 아메리카 원주민, 11%의 유럽인, 75%의 아프리카인 혈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바클리와 모린 블룸하르트는 바클리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뛰던 1980년대 중후반에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1989년에 결혼했으며, 현재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 거주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피닉스 기반의 '프레시 스타트 여성 재단'의 명예 회원이다.
그들의 딸 크리스티아나는 1989년에 태어났다. 바클리는 딸의 이름이 델라웨어주의 '크리스티아나 몰'에서 따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현재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고 있다.
6.2. 도박
바클리는 강박적인 도박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07년 ESPN의 트레이 윙고와의 인터뷰에서 바클리는 도박으로 약 1000.00 만 USD를 잃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블랙잭을 하면서 "6시간 동안" 250.00 만 USD를 잃었음을 인정했다. 바클리는 자신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인정했지만, 그는 습관을 감당할 여유가 있기 때문에 심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동료 터너 스포츠 방송인 어니 존슨 주니어가 이 문제에 대해 접근했을 때, 바클리는 "문제없다. 약물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라면 문제가 되지만, 나는 너무 많은 돈을 걸고 도박을 한다. 계속 할 수 있는 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렇다,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할 것이냐고? 그렇다, 계속 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큰 손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바클리는 여러 차례 돈을 땄다고 주장한다.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여행 중에는 블랙잭을 통해 70.00 만 USD를 따고 슈퍼볼 XLI에서 시카고 베어스를 꺾을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에 베팅하여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많이 이겨도 많지 않다. 내가 잃을 때만 많다. 그리고 당신은 항상 잃는다. 재미있고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계속 할 것이지만, 카지노를 파산시키려 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2008년 5월, 윈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는 바클리가 2007년 10월부터 발생한 40.00 만 USD의 빚을 갚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바클리는 빚 상환 기간이 지났음을 인정하고 즉시 카지노에 빚을 갚았다. 빚을 갚은 후 바클리는 TNT 프리게임 쇼에서 "도박을 그만둬야 한다...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1~2년 동안은 도박을 하지 않을 것이다... 돈을 잃을 여유가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6.3. 골프
바클리는 NBA 경력 중 골프를 시작했으며, 농구 경력이 끝난 후에도 경쟁심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이 스포츠를 계속했다. 그는 아메리칸 센추리 챔피언십 프로-암 토너먼트에 정기적으로 참가하며, 종종 하위권에 머물렀다. 그는 특히 나쁜 스윙으로 인해 형편없는 골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후 스윙 개선 훈련을 받아 2021년 아메리칸 센추리 챔피언십에서 향상된 성과를 보여주었다.
바클리는 더 매치의 세 번째 대회인 '챔피언스 포 체인지'에 참가했다. 필 미컬슨과 한 팀을 이룬 바클리는 페이턴 매닝과 스테픈 커리 팀을 4대3으로 꺾는 큰 이변을 연출했다.
6.4. 법적 문제
2008년 12월 31일, 바클리는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서 정지 신호를 위반하여 차량이 정지되었다. 경찰관은 바클리의 입에서 술 냄새를 맡고 현장 음주 측정 테스트를 실시했으나, 그는 이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는 음주운전 혐의로 체포되었고 그의 차량은 압수되었다. 바클리는 음주 측정기 검사를 거부했고, 혈액 검사를 받았다. 그는 이후 소환되어 풀려났다. 길버트 경찰은 바클리가 사건 내내 협조적이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음주운전 혐의로 체포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대우했다고 언급했다. 사건에 대한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바클리는 수요일 이른 시간에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간 이유에 대해 여성 동승자로부터 구강성교를 받기 위해 서둘렀다고 경찰에게 말했다. 경찰이 발표한 테스트 결과에 따르면 바클리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49였는데, 이는 애리조나의 법적 한계인 0.08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체포 두 달 후, 바클리는 음주운전 관련 두 가지 혐의와 빨간불 위반 한 가지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그는 10일의 징역형과 2000 USD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이 형량은 바클리가 알코올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3일로 감경되었다.
체포 사건의 여파로 바클리는 TNT 해설 업무에서 두 달간의 공백기를 가졌다. 그의 부재 기간 동안 T-모바일은 바클리가 출연하는 기존 광고를 방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09년 2월 19일, 바클리는 TNT로 복귀하여 NBA 프리게임 쇼의 첫 부분을 이 사건과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할애했다. 그의 복귀 직후, T-모바일은 다시 바클리가 출연하는 광고를 방영하기 시작했다.
2011년, 바클리는 웨이트 워처스의 대변인이 되어 그들의 "남자처럼 살 빼기"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텔레비전 및 온라인 광고에 출연했다.
7. 공개적 입장과 사회적 논평
찰스 바클리는 사회적 문제와 정치적 견해에 대해 솔직한 발언과 활동을 해왔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 변화, 인종 문제, 성소수자(LGBT) 권리, 경찰 개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시각 등 그의 사회 참여적 면모를 조명해왔다.

바클리는 수년간 공화당 소속임을 밝혀왔다. 1995년에는 앨라배마주 주지사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에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바꾸며 "그들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나는 공화당원이었다"고 말했다. 2006년 7월 플로리다주 데스틴에서 열린 전국 학교 이사회 연합의 남부 지역 회의에서 바클리는 앨라배마 주지사 출마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진심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정부가 허튼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은 동성 결혼이나 이라크 전쟁, 불법 이민과 같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다투고 싶어 합니다... 제가 출마한다면, 우리는 학교 개선, 마약과 범죄로부터 우리 동네를 청소하고 앨라배마를 모든 사람에게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실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2006년 9월, 바클리는 다시 주지사 출마 의사를 재확인했다。 그는 "2014년까지 출마할 수 없다... 7년 동안 그곳에 살아야 하므로, 지금 당장 그곳에서 집을 찾고 있다"고 언급했다. 2007년 7월, 그는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를 지지하는 영상 메시지를 발표했다. 2007년 9월, '먼데이 나이트 풋볼' 방송 중 바클리는 2014년 주지사 선거 출마를 위한 거주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앨라배마에 집을 샀다고 발표했다. 또한 바클리는 이전에 보도된 바와 같이 민주당원이 아닌 무소속이라고 선언했다. 바클리는 "공화당원들은 허튼소리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며, "민주당원들은 조금 덜 허튼소리로 가득 차 있다"고 덧붙였다.
2008년 2월, 바클리는 2014년에 무소속으로 앨라배마 주지사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8년 10월 27일,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2014년 선거 주기에 출마할 계획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지만, 2009년 11월 24일 '제이 레노 쇼' 인터뷰에서는 그 생각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2014년에 출마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했다. 2015년 8월, 바클리는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존 케이식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2019년 랜스 암스트롱의 팟캐스트에서 그는 정치에 출마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했다.
바클리는 LGBT 권리를 지지한다. 2006년 그는 폭스 스포츠에 "저는 동성 결혼의 강력한 지지자입니다. 그들이 결혼하고 싶다면, 신의 축복이 있기를"이라고 말했다. 2년 후 CNN의 울프 블리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보수적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속이 뒤집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 제가 부르는 가짜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저는 그들이 판사와 배심원이 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동성 결혼을 찬성합니다. 동성애자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제 알 바가 아닙니다. 저는 낙태 찬성론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기독교인들이, 우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나라에서 가장 위선적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를 정말 짜증 나게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처럼 행동하지만 전혀 용서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2011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날 TNT 더블헤더 방송 중, 바클리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딸 버니스 킹의 발언에 대해 "사람들은 이것을 흑백 문제로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남자, 모든 여자의 평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에 대해 차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동성애자들을 사랑합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입니다"라고 답했다. 바클리는 여러 차례 자신과 함께 뛰었던 동성애자 선수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2013년 보스턴 셀틱스 선수 제이슨 콜린스의 커밍아웃에 대해 바클리는 "동성애자 선수와 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2년에는 바클리가 한 행사에서 LGBT 커뮤니티를 강력히 지지하는 발언을 하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저는 이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당신이 동성애자이고 트랜스젠더라면,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당신을 괴롭힌다면, 찰스가 '빌어먹을'이라고 말했다고 전하세요." 그는 2023년 미국에서 딜런 멀바니라는 트랜스젠더 배우의 광고 출연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버드 라이트 보이콧에 반대하며 목소리를 냈다. 그는 레이크 타호에서 열리는 연예인 골프 토너먼트에서 관중들에게 버드 라이트를 사줄 것이며, 보이콧하는 사람들을 "레드넥"이라고 비난했다.
퍼거슨 시위에 대해 논평하며 바클리는 퍼거슨의 약탈자들을 "쓰레기"라고 불렀고, 흑인 동네에서 일하는 경찰관들을 칭찬했으며, 마이클 브라운 총격 사건에서 경찰관 대런 윌슨을 기소하지 않기로 한 대배심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전인 2013년, 바클리는 트레이번 마틴 총격 사건에서 조지 짐머만의 무죄 평결에 동의를 표명했다.
2014년, 바클리는 라디오 프로그램 '애프터눈스 위드 앤서니 앤 롭 엘리스'에서 시애틀 시호크스의 쿼터백 러셀 윌슨이 "충분히 흑인답지 않다"는 비난을 받는다는 소문에 대해 질문받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행히도, 제가 백인 친구들에게 말하듯이, 우리 흑인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백인들 때문이 아니라 다른 흑인들 때문입니다. 흑인이라면 다른 흑인들로부터 너무 많은 쓰레기 같은 일들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은 더럽고 어두운 비밀이며, 저는 이것이 드러나서 기쁩니다. 우리가 전체적으로 결코 성공하지 못할 이유 중 하나는 다른 흑인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폭력배나 바보가 아니면 충분히 흑인답지 않다고 생각하도록 세뇌되어 있습니다. 학교에 가고, 좋은 성적을 받고, 똑똑하게 말하고, 법을 어기지 않으면 좋은 흑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럽고 어두운 비밀입니다. 지적이지 않고 성공하지 못한 흑인들이 많습니다. 똑똑하고, 말을 잘하고, 학교에서 잘하고, 성공한 흑인을 무너뜨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우리는 '이봐, 감옥에 가면 거리의 명성이 생긴다'고 말하는 유일한 민족 집단입니다. 흑인으로서 겪는 전형적인 헛소리입니다, 친구."
바클리는 또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지명 초기부터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가 그 해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승리하기 전, 바클리는 트럼프가 대선 레이스 내내 홍보하던 말과 메시지에 대한 혐오감을 표명했다. 2017년 9월, 트럼프 대통령이 2016년 NFL 시즌 동안 국가 연주 시 무릎을 꿇었던 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쿼터백 콜린 캐퍼닉을 비난하자, 바클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완전한 실망감을 표했다(그러나 바클리는 선수들이 국가 연주 시 무릎을 꿇는 시위 방식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7년 12월, 바클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세금 법안을 비웃으며 "고맙습니다 공화당원들, 부유층, 우리 1%들을 잘 돌봐주실 것이라고 항상 믿었습니다. 미안해요, 가난한 사람들. 저는 당신들을 위해 희망하지만, 당신들은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2017년 8월 유나이트 더 라이트 랠리에서 부각된 남부연합 기념물 철거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바클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그 동상들에 대해 평생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대부분의 흑인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그 멍청한 동상들에 대해 평생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겁니다. 우리 흑인들이 해야 할 일은 교육을 받고, 서로를 죽이는 것을 멈추고, 더 많은 경제적 기회를 찾고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중요하고 의미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신나치에게 소리치거나, '이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바클리는 2017년 미국 상원 앨라배마주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의 더그 존스를 지지했다. 앨라배마 상원 선거 기간 동안 바클리는 존스의 경쟁자인 로이 무어가 주에 대한 완전한 망신이라고 언급했다.
바클리는 경찰 개혁과 교정 시설 개혁을 지지하지만, 2020년에는 경찰 예산 삭감에 반대하며 "흑인들은 누구에게 전화해야 하나요? 고스트버스터즈에게요?"라고 말했다. 브리오나 테일러 살해 사건 이후, 바클리는 "이 젊은 여성이 목숨을 잃은 것이 슬프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경찰에게 총을 쏘았고 경찰관에게 총을 쏘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그녀의 상황이 조지 플로이드나 아모드 아베리와는 "다르다"고 덧붙였다.
또한 2020년, 바클리는 스포츠가 너무 정치적으로 변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제 걱정은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이것을 서커스로 바꾸는 것입니다"라며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켜고 항상 논쟁을 듣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인 2020년, 바클리는 "지금 학교에서 아이들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보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이들을 집에 두는 것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를 더욱 벌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NBA 버블에서 2019-20 NBA 시즌을 재개하려는 NBA의 계획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일부 선수들이 코로나19 양성 반응을 보일까 봐 우려했다.
브랜든 '스쿠프 B' 로빈슨과의 '스쿠프 B 라디오'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바클리는 만약 자신이 하루 동안 세상을 다스린다면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모두를 없앨 것이라고 말했다. "둘 다 끔찍하다"고 덧붙이며 "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항상 싸운다"고 말했다.
8. 유산과 영예
찰스 바클리는 농구계와 사회에 전반적인 영향력을 미쳤으며, 그가 받은 공식적인 인정과 명예로운 기록들은 그의 유산을 증명한다.
8.1. 전반적인 평가

찰스 바클리는 16년간의 NBA 경력 동안 농구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고 거침없으며 지배적인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스포츠에 미친 그의 영향은 리바운드 타이틀, 어시스트, 득점, 그리고 육체적인 플레이를 넘어섰다. 그의 대립적인 태도는 종종 코트 위에서 테크니컬 파울과 벌금을 초래했으며, 그의 거대한 페르소나는 때때로 "나는 롤모델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프로 선수들을 롤모델로 거부하는 광고에 출연했을 때처럼 코트 밖에서 국가적인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말이 종종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바클리에 따르면 그의 입은 항상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논란의 원인이 아니었다. 그는 "저는 논란을 만들지 않습니다. 제가 입을 열기 훨씬 전부터 논란은 존재했습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킬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선수들과의 코트 위 싸움 외에도 코트 밖에서 대립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밀워키 벅스와의 경기 후 싸움 중에 한 남자의 코뼈를 부러뜨려 체포되었고,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는 얼음 잔에 맞은 후 한 남자를 판유리 창문 밖으로 던진 혐의로도 체포되었다. 바클리는 계속해서 팬과 언론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선수로서 바클리는 끊임없이 NBA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93년에는 리그 MVP를 수상했다. 그는 "서 찰스"와 "리바운드의 둥근 언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육체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구사했다. 그는 11차례 올-NBA 팀에 선정되었고, 미국 올림픽 농구팀의 일원으로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두 팀 모두에서 득점을 이끌었으며, 1992년 "드림팀"과 1996년 남자 농구팀이 완벽한 16승 0패 기록을 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NBA 역사상 20,000득점, 10,000리바운드, 4,000어시스트를 기록한 단 네 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은퇴했다. 2023년 기준으로 그는 NBA 역사상 12번째로 높은 PER을 기록하고 있으며, 윈 셰어에서는 14위이다.
1996년, 바클리는 NBA 5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NBA 50주년 기념 역대 최고 선수 50인에 선정되며 역대 가장 위대한 50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영예를 안았다. 그의 대학 및 NBA 업적을 인정하여, 바클리의 등번호 34번 저지는 2001년 3월 3일 오번 대학교에 의해 공식적으로 영구 결번되었다. 같은 달,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도 바클리의 등번호 34번 저지를 공식적으로 영구 결번했다. 2004년 3월 20일, 피닉스 선즈는 바클리를 "선즈 명예의 전당"에 포함시키며 그에게도 영예를 안겼다. 선수로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바클리는 2006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21년 10월, NBA 75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바클리는 NBA 75주년 기념 팀에 선정되며 역대 가장 위대한 75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영예를 안았다. NBA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디 애슬레틱'은 역대 상위 75명의 선수를 순위 매겼고, 바클리를 NBA 역사상 22번째로 위대한 선수로 선정했다.
8.2. 영예와 수상 내역
- NBA 최우수 선수 (1993)
- 11회 NBA 올스타 (1987~1997)
- NBA 올스타전 MVP (1991)
- 5회 올-NBA 퍼스트 팀 (1988~1991, 1993)
- 5회 올-NBA 세컨드 팀 (1986~1987, 1992, 1994~1995)
- 올-NBA 서드 팀 (1996)
-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5)
- NBA 리바운드 왕 (1987)
- NBA 50주년 기념 역대 최고 선수 50인
- NBA 75주년 기념 팀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등번호 34번 영구 결번
- 피닉스 선즈 등번호 34번 영구 결번
- NCAA 남자 농구 올-아메리칸 서드 팀 - NABC (1984)
- 사우스이스턴 콘퍼런스 올해의 남자 농구 선수 (1984)
- 오번 대학교 등번호 34번 영구 결번
- SEC 남자 농구 토너먼트 MVP (1984)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2006년 개인 헌액, 2010년 1992년 올림픽 "드림팀" 일원 헌액)
- 1992년 하계 올림픽 금메달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 1996년 하계 올림픽 금메달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 1992년 FIBA 아메리카 챔피언십 금메달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9. 경력 통계와 기록
찰스 바클리의 NBA 정규 시즌 및 플레이오프 경력 동안의 상세한 통계 자료와 그가 세운 주목할 만한 기록들을 제시한다.
9.1. 정규 시즌 통계
시즌 | 팀 | GP | GS | MPG | FG% | 3P% | FT% | RPG | APG | SPG | BPG | PPG |
---|---|---|---|---|---|---|---|---|---|---|---|---|
1984-85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82 | 60 | 28.6 | .545 | .167 | .733 | 8.6 | 1.9 | 1.2 | 1.0 | 14.0 |
1985-86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80 | 80 | 36.9 | .572 | .227 | .685 | 12.8 | 3.9 | 2.2 | 1.6 | 20.0 |
1986-87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68 | 62 | 40.3 | .594 | .202 | .761 | 14.6 | 4.9 | 1.8 | 1.5 | 23.0 |
1987-88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80 | 80 | 39.6 | .587 | .280 | .751 | 11.9 | 3.2 | 1.3 | 1.3 | 28.3 |
1988-89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79 | 79 | 39.1 | .579 | .216 | .753 | 12.5 | 4.1 | 1.6 | .9 | 25.8 |
1989-90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79 | 79 | 39.1 | .600 | .217 | .749 | 11.5 | 3.9 | 1.9 | .6 | 25.2 |
1990-91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67 | 67 | 37.3 | .570 | .284 | .722 | 10.1 | 4.2 | 1.6 | .5 | 27.6 |
1991-92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75 | 75 | 38.4 | .552 | .234 | .695 | 11.1 | 4.1 | 1.8 | .6 | 23.1 |
1992-93 | 피닉스 선즈 | 76 | 76 | 37.6 | .520 | .305 | .765 | 12.2 | 5.1 | 1.6 | 1.0 | 25.6 |
1993-94 | 피닉스 선즈 | 65 | 65 | 35.4 | .495 | .270 | .704 | 11.2 | 4.6 | 1.6 | .6 | 21.6 |
1994-95 | 피닉스 선즈 | 68 | 68 | 35.0 | .486 | .338 | .748 | 11.1 | 4.1 | 1.6 | .7 | 23.0 |
1995-96 | 피닉스 선즈 | 71 | 71 | 37.1 | .500 | .280 | .777 | 11.6 | 3.7 | 1.6 | .8 | 23.2 |
1996-97 | 휴스턴 로키츠 | 53 | 53 | 37.9 | .484 | .283 | .694 | 13.5 | 4.7 | 1.3 | .5 | 19.2 |
1997-98 | 휴스턴 로키츠 | 68 | 41 | 33.0 | .485 | .214 | .746 | 11.7 | 3.2 | 1.0 | .4 | 15.2 |
1998-99 | 휴스턴 로키츠 | 42 | 40 | 36.3 | .478 | .160 | .719 | 12.3 | 4.6 | 1.0 | .3 | 16.1 |
1999-00 | 휴스턴 로키츠 | 20 | 18 | 31.0 | .477 | .231 | .645 | 10.5 | 3.2 | .7 | .2 | 14.5 |
커리어 | 1,073 | 1,012 | 36.7 | .541 | .266 | .735 | 11.7 | 3.9 | 1.5 | .8 | 22.1 | |
올스타 | 11 | 7 | 23.2 | .495 | .250 | .625 | 6.7 | 1.8 | 1.3 | .4 | 12.6 |
9.2. 플레이오프 통계
시즌 | 팀 | GP | GS | MPG | FG% | 3P% | FT% | RPG | APG | SPG | BPG | PPG |
---|---|---|---|---|---|---|---|---|---|---|---|---|
1985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13 | 2 | 31.4 | .540 | .667 | .733 | 11.1 | 2.0 | 1.8 | 1.2 | 14.9 |
1986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12 | 12 | 41.4 | .578 | .067 | .695 | 15.8 | 5.6 | 2.3 | 1.3 | 25.0 |
1987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5 | 5 | 42.0 | .573 | .125 | .800 | 12.6 | 2.4 | .8 | 1.6 | 24.6 |
1989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3 | 3 | 45.0 | .644 | .200 | .710 | 11.7 | 5.3 | 1.7 | .7 | 27.0 |
1990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10 | 10 | 41.9 | .543 | .333 | .602 | 15.5 | 4.3 | .8 | .7 | 24.7 |
1991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8 | 8 | 40.8 | .592 | .100 | .653 | 10.5 | 6.0 | 1.9 | .4 | 24.9 |
1993 | 피닉스 선즈 | 24 | 24 | 42.8 | .477 | .222 | .771 | 13.6 | 4.3 | 1.6 | 1.0 | 26.6 |
1994 | 피닉스 선즈 | 10 | 10 | 42.5 | .509 | .350 | .764 | 13.0 | 4.8 | 2.5 | .9 | 27.6 |
1995 | 피닉스 선즈 | 10 | 10 | 39.0 | .500 | .257 | .733 | 13.4 | 3.2 | 1.3 | 1.1 | 25.7 |
1996 | 피닉스 선즈 | 4 | 4 | 41.0 | .443 | .250 | .787 | 13.5 | 3.8 | 1.0 | 1.0 | 25.5 |
1997 | 휴스턴 로키츠 | 16 | 16 | 37.8 | .434 | .289 | .769 | 12.0 | 3.4 | 1.2 | .4 | 17.9 |
1998 | 휴스턴 로키츠 | 4 | 0 | 21.8 | .522 | .000 | .571 | 5.3 | 1.0 | 1.3 | .0 | 9.0 |
1999 | 휴스턴 로키츠 | 4 | 4 | 39.3 | .529 | .286 | .667 | 13.8 | 3.8 | 1.5 | .5 | 23.5 |
커리어 | 123 | 108 | 39.4 | .513 | .255 | .717 | 12.9 | 3.9 | 1.6 | .9 | 23.0 |
9.3. NBA 기록
- 한 하프에서 가장 많은 공격 리바운드: 13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대 뉴욕 닉스, 1987년 3월 4일
- 한 쿼터에서 가장 많은 공격 리바운드: 11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대 뉴욕 닉스, 1987년 3월 4일
- 래리 스미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대 덴버 너기츠, 1986년 3월 23일)와 타이 기록.
- 리바운드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한 최단신 선수: 0.2 m (6 in)
9.3.1. 플레이오프
- 한 하프에서 가장 많은 자유투 성공: 19개, 피닉스 선즈 대 시애틀 슈퍼소닉스, 1993년 6월 5일
- 7경기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자유투 시도: 100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대 밀워키 벅스, 1986년 동부 콘퍼런스 준결승
- 7경기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턴오버: 37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대 밀워키 벅스, 1986년 동부 콘퍼런스 준결승
10. 저서
찰스 바클리가 저술했거나 참여한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 '터무니없는 (Outrageous) (1991): 스포츠 작가 로이 S. 존슨과 협력하여 쓴 자서전. 이 책에서 존슨이 내린 편집 결정 때문에 바클리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오보'되었다고 유명하게 재치 있게 말했다.
- '더 라이프 오브 라일리' (The Life of Reilly) (2000):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칼럼니스트 릭 라일리의 책에 서문을 썼다. 바클리는 이 서문에서 "스포츠계의 모든 사람 중에서 제가 판유리 창문 밖으로 던지고 싶은 사람은 라일리가 아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른 백인 남자들은 정말 공기역학적으로 보인다"고 재치 있게 말했다.
- '틀릴 수도 있지만 의심한다 (I May Be Wrong, But I Doubt It) (2002): 절친한 친구 마이클 윌본이 편집과 해설에 참여했다.
- '누가 큰 흑인 남자를 두려워하는가? (Who's Afraid of a Large Black Man?) (2005):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스포츠, 정부 분야의 주요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모아 놓은 책. 마이클 윌본도 이 책에 기여했으며 많은 인터뷰에 참석했다.
11. 같이 보기
- 날스 바클리
- 바클리 셧 업 앤 잼! (비디오 게임)
- 바클리 셧 업 앤 잼 2 (비디오 게임)
- 바클리, 셧 업 앤 잼: 가이덴 (비디오 게임)
- 고질라 vs 찰스 바클리 (비디오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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