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앨런 아이버슨의 어린 시절은 그의 삶과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농구와 미식축구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두각을 나타냈다.
1.1. 출생과 가족 배경
앨런 이제일 아이버슨은 1975년 6월 7일 미국 버지니아주 햄프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앤 아이버슨은 당시 15세의 미혼모였으며, 친부인 앨런 브로턴은 아이버슨의 양육에 관여하지 않았다. 아이버슨은 어린 시절 햄프턴의 빈민가에서 할머니와 13명의 동거인들과 함께 살며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환경을 겪었다. 1991년에는 여동생 레이샤가 태어났는데, 그녀는 건강상의 문제를 겪어 가족의 의료비 부담이 컸다. 아이버슨의 의붓아버지 마이클 프리먼은 그에게 농구를 가르쳐준 인물이었으나, 마약 소지 및 판매 혐의로 자주 수감되었다. 아이버슨은 어린 시절 전기가 끊기거나 음식이 없는 날도 있었고, 심지어는 파이프가 터져 집 안이 물에 잠기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두 인물로 어머니와 토니 클락을 꼽았다. 토니 클락은 아이버슨이 학교를 빼먹으면 그의 어머니에게 알릴 정도로 그를 엄격하게 지도했으나, 아이버슨이 15세 때 살해당했다.
1.2. 어린 시절과 별명
아이버슨은 어린 시절 "버바 척"(Bubba Chuck영어)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이는 어린 시절 친구인 제이미 로저스가 아이버슨이 항상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누구든 가르칠 수 있었다고 언급한 데서 유래한다. 그는 이후 프로 경력 동안 "디 앤서"(The Answer영어)와 "A.I."라는 별명을 얻었다.
1.3. 고등학교 시절
아이버슨은 버지니아주 햄프턴에 위치한 베델 고등학교에 재학하며 미식축구와 농구에서 뛰어난 이중 스포츠 선수로 활약했다. 미식축구에서는 쿼터백, 러닝백, 킥 리터너, 디펜시브 백으로 뛰었고, 농구에서는 포인트 가드로 활약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는 두 종목 모두에서 팀을 버지니아주 주 챔피언십으로 이끌었으며, AP 통신 선정 고등학교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특히 미식축구에서는 2학년 시즌에 패스 14개, 러닝 15개, 리턴 5개를 포함해 총 34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팀을 주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그는 "부" 윌리엄스가 이끄는 AAU 농구 팀에서도 뛰며 1992년 17세 이하 AAU 전국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아이버슨은 윌리엄스를 자신의 삶에서 가장 영감을 준 코치로 꼽았다.
1.4. 법적 문제와 투옥
1993년 2월 14일, 아이버슨은 햄프턴의 한 볼링장에서 친구들과 다른 손님들 사이에 벌어진 난투극에 연루되었다. 당시 17세였던 아이버슨은 난투극이 시작된 직후 현장을 떠나는 모습이 담긴 비디오가 공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으로 기소되어 "폭도에 의한 신체 상해"라는 중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법규는 린치를 방지하기 위해 드물게 사용되는 버지니아주 법령이었다. 그는 15년형(실형 5년, 집행유예 10년)을 선고받았다. 아이버슨은 이 사건에 대해 "내가 누구인지 모두가 아는 볼링장에서 의자로 사람 머리를 때리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미친 짓이다. 그리고 내가 어떤 남자라고 여자 머리를 의자로 때리겠는가? 차라리 남자를 의자로 때렸다고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아이버슨은 뉴포트뉴스 시티 팜이라는 교정 시설에서 4개월을 복역한 후, 버지니아주 주지사 더글러스 와일더의 사면을 받았다. 1995년에는 버지니아주 항소법원이 증거 불충분으로 그의 유죄 판결을 최종적으로 뒤집었다. 이 사건과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다큐멘터리 영화 노 크로스오버: 앨런 아이버슨 재판에서 다뤄졌다. 아이버슨의 고등학교 농구 코치는 "그들은 아이버슨을 본보기로 삼으려 했다"고 주장했고, 그의 변호사 제임스 엘리슨은 "보석금을 받지 못하는 피고인은 살인범뿐이다"라고 말했다. 언론인 톰 브로코와 대중은 아이버슨의 석방에 큰 역할을 했다. 수감된 4명의 흑인 남성을 위한 집회와 행진이 있었고, 브로코는 감옥에 있는 아이버슨과 특별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인터뷰에서 아이버슨은 매우 미안해하며 침울한 모습을 보였고, 브로코는 "형량이 놀랍도록 가혹하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아이버슨은 수감 생활에 대해 "나는 감옥 생활을 긍정적인 것으로 활용해야 했다. 감옥에 가면 누군가 당신의 약점을 보고 그것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나는 결코 약점을 보이지 않았고, 강하게 버텨냈다"고 말했다. 이 수감 생활로 인해 그는 베델 고등학교에서 스포츠를 할 수 없게 되었고, 문제 학생들을 위한 리처드 밀번 고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마지막 해를 마쳐야 했다. 그러나 그가 베델에서 보낸 3년은 조지타운 대학교 농구팀 헤드 코치 존 톰슨이 아이버슨을 만나 그에게 전액 장학금을 제안하기에 충분했다.
2. 대학 농구 경력
앨런 아이버슨은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2년간의 대학 농구 경력을 쌓으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짧은 대학 생활 동안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하며 여러 상을 수상했고, 결국 NBA 드래프트에 조기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2.1. 조지타운 대학교
1994-95 시즌, 아이버슨은 조지타운 대학교에서의 첫 시즌에 빅 이스트 신인상을 수상하고 올 루키 토너먼트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다. 그는 평균 20.4점을 기록하며 호야스(조지타운 대학교 농구팀)를 NCAA 토너먼트 스위트 16에 진출시켰으나, 노스캐롤라이나 타 힐스에게 패배했다.
1995-96 시즌, 아이버슨은 조지타운에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시즌에 팀을 빅 이스트 챔피언십으로 이끌고 NCAA 토너먼트 엘리트 에이트까지 진출시켰으나, UMass 미닛맨에게 패배했다. 그는 대학 경력을 평균 22.9점으로 마쳤으며, 이는 호야스 역대 최고 기록이다. 아이버슨은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고, 조지타운에서 보낸 두 시즌 동안 모두 빅 이스트 올해의 수비 선수상을 수상했다. 2학년 시즌에 기록한 124개의 스틸은 팀 기록이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이미 세계 최고의 포인트 가드로 평가받기도 했다.
가족의 재정적 어려움과 여동생의 건강 문제로 인해, 아이버슨은 2학년을 마친 후 1996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존 톰슨 감독 밑에서 NBA에 조기 진출한 첫 번째 선수였다. 또한 1995년 후쿠오카에서 열린 월드 유니버시티 게임에 미국 대표팀으로 참가하여 레이 앨런, 팀 던컨 등과 함께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대회에서 아이버슨은 평균 16.7점, 6.1어시스트, 2.9스틸을 기록하며 미국 팀의 득점, 어시스트, 스틸 부문에서 모두 선두를 차지했다.
3. 프로 경력
앨런 아이버슨의 프로 경력은 1996년 NBA 드래프트에서 시작되어 2011년 터키 리그에서 마무리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고, 이후 여러 팀을 거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3.1.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96-2006)
아이버슨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10년간 활약하며 팀의 상징적인 선수로 성장했다. 그는 신인 시절부터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2000-01 시즌에는 NBA MVP를 수상하며 팀을 NBA 파이널로 이끌었다.
3.1.1. 데뷔 및 신인 시절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두 시즌을 보낸 후, 아이버슨은 1996 NBA 드래프트에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다. 그는 키 1.8 m (6 ft)로, 일반적으로 장신 선수들이 지배하는 리그에서 역대 최단신 전체 1순위 지명 선수가 되었다.
아이버슨이 합류한 필라델피아 팀은 직전 시즌 18승 64패의 저조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NBA 데뷔전에서 아이버슨은 밀워키 벅스에게 103점 대 111점으로 패배했지만, 30점과 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996년 11월 12일, 뉴욕 닉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101점 대 97점으로 승리하며 당시 개인 최고 기록인 35점, 7리바운드, 6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했다. 1997년 3월 12일, 당시 55승 8패를 기록 중이던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에서는 37점을 기록하며 마이클 조던을 상대로 인상적인 크로스오버를 선보였다. 그는 윌트 체임벌린의 신인 기록인 3경기 연속 40점 이상 득점 기록을 넘어 5경기 연속 40점 이상을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경기에서 기록한 50점도 포함된다. 시즌 평균 23.5점, 7.5어시스트, 2.1스틸을 기록한 아이버슨은 NBA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아이버슨은 1996-97 시즌에 식서스를 22승 60패의 기록으로 이끄는 데 그쳤다.
테오 래틀리프, 에릭 스노우, 래리 휴즈, 아론 맥키의 합류와 래리 브라운 신임 감독의 지휘 아래, 아이버슨은 다음 시즌에도 76ers의 발전을 도왔고, 팀은 9승을 더하며 31승 51패로 시즌을 마쳤다. 필라델피아에서 함께 뛰던 기간 동안, 아이버슨과 동료 가드 휴즈는 그들의 뛰어난 운동 능력과 덩크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플라이트 브라더스"(the Flight Brothers영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99년 1월 26일, 아이버슨은 6년 7090.00 만 USD의 최대 계약 연장에 서명했다. 록아웃으로 단축된 1998-99 시즌은 76ers에게 큰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아이버슨은 평균 26.8점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 선두를 차지했고, 첫 득점왕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첫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다. 식서스는 28승 22패로 시즌을 마쳐 아이버슨에게 첫 플레이오프 진출 기회를 안겨주었다. 그는 10번의 플레이오프 경기 모두 선발 출전하여 여러 잔부상에도 불구하고 평균 28.5점을 기록했다. 아이버슨은 식서스를 3번 시드 올랜도 매직을 4경기 만에 꺾는 이변으로 이끌었으나, 2라운드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6경기 만에 패배했다. 특히 매직과의 1라운드 3차전에서는 플레이오프 단일 경기 10스틸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팀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1999-2000 NBA 시즌 동안, 식서스는 아이버슨의 리더십 아래 계속 발전하여 49승 33패로 시즌을 마쳤고, 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아이버슨은 평균 26.2점, 4.8어시스트, 4리바운드, 1.3스틸을 기록했다. 필라델피아는 1라운드에서 샬럿 호네츠를 통과했지만, 2년 연속으로 2라운드에서 인디애나에게 6경기 만에 탈락했다.
이 시즌에 아이버슨은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이후 11시즌 연속으로 올스타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그해 샤킬 오닐 외에 NBA MVP 투표를 받은 유일한 선수였다. 2000년 오프시즌 동안, 76ers는 당시 감독 래리 브라운과의 수많은 불화로 인해 아이버슨을 트레이드하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디트로이트 피스턴스와 합의에 도달했으나, 트레이드에 포함된 맷 가이거가 500.00 만 USD의 트레이드 키커를 포기하기를 거부하면서 거래가 무산되었다.
3.1.2. MVP 시즌과 NBA 파이널

2000-01 시즌 동안, 아이버슨은 팀을 프랜차이즈 기록인 10승 0패의 시즌 시작으로 이끌었으며, 2001 NBA 올스타전 선발로 선정되어 경기 MVP를 수상했다. 식서스는 시즌 56승 26패의 기록으로 동부 컨퍼런스 최고 성적을 거두며 1번 시드를 차지했다. 아이버슨은 또한 당시 개인 최고 기록인 평균 31.1점을 기록하며 두 번째 NBA 득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동시에 아이버슨은 경기당 2.5스틸로 NBA 스틸 타이틀을 차지했다. 아이버슨은 NBA MVP로 선정되었는데, 1.8 m (6 ft)의 키와 75 kg (165 lb)의 체중으로 MVP를 수상한 가장 작고 가벼운 선수가 되었다. 그는 가능한 124표 중 93표의 1위 표를 받았다. 그는 또한 그의 업적으로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다. 아이버슨의 수상 외에도, 최근 영입된 빅맨 디켐베 무톰보는 NBA 올해의 수비 선수상을, 동료 가드 아론 맥키는 NBA 올해의 식스맨상을, 래리 브라운은 NBA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이 모든 것이 아이버슨과 함께 그해 식서스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아이버슨과 식서스는 1라운드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꺾었고, 이어서 빈스 카터가 이끄는 토론토 랩터스와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맞붙었다. 이 시리즈는 7차전까지 이어졌다. 랩터스와의 2라운드 2차전에서는 플레이오프 팀 기록인 54점을, 5차전에서는 마이클 조던 이후 동일 시리즈에서 여러 차례 50점 이상을 기록하며 52점을 올렸다. 다음 라운드에서 식서스는 밀워키 벅스를 역시 7경기 만에 꺾고, 코비 브라이언트와 샤킬 오닐 듀오가 이끄는 디펜딩 챔피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의 2001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벅스와의 7차전에서는 입안의 출혈을 숨기면서까지 경기를 강행했고, 이 경기에서 역대 4위 타이 기록인 44점을 올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아이버슨은 76ers를 1983년 챔피언십 이후 첫 파이널로 이끌었다. 2001 NBA 파이널 1차전에서 아이버슨은 플레이오프 개인 최고 기록인 48점을 기록하며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레이커스를 107점 대 101점으로 꺾었다. 이는 레이커스가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당한 유일한 패배였다. 이 경기에서 그는 중요한 슛을 성공시킨 후 타이론 루를 넘어가는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아이버슨은 2차전부터 5차전까지 각각 23점, 35점, 35점, 37점을 기록했지만, 식서스는 많은 이들의 예상처럼 스윕당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기를 패배했다. 아이버슨은 2000-01 NBA 시즌 동안 개인적으로나 식서스 선수로서 가장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아이버슨은 이 시즌 동안 오른쪽 팔꿈치의 점액낭염 회복을 위해 농구 슬리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카멜로 앤서니와 코비 브라이언트를 포함한 다른 선수들도 이 슬리브를 착용했으며, 팬들도 패션 아이템으로 슬리브를 착용했다. 아이버슨은 팔꿈치가 나은 후에도 오랫동안 슬리브를 계속 착용했다. 일부에서는 슬리브가 아이버슨의 슈팅 능력을 향상시켰다고 믿었다. 사이콜로지 투데이의 스티븐 코틀러는 이러한 슬리브가 미래의 부상을 예방하는 플라시보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제안했다.
2001 시즌이 끝난 후, 앨런 아이버슨은 리복과 파트너십을 맺고 10년 5000.00 만 USD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에는 연간 80.00 만 USD와 55세가 되었을 때 3200.00 만 USD의 신탁 기금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었다.
3.1.3. 필라델피아에서의 후기

NBA 파이널 진출의 기세를 몰아, 아이버슨과 식서스는 2001-02 시즌을 높은 기대로 시작했지만, 부상에 시달렸고 43승 39패의 기록으로 겨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 시즌에 60경기만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버슨은 평균 31.4점을 기록하며 두 번째 연속 득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76ers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5전 3선승제 시리즈에서 3-2로 패배했다. 패배 후, 브라운 감독은 아이버슨이 팀 연습에 불참한 것을 비판했다. 아이버슨은 이에 대해 "우리는 여기 앉아서, 내가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인데, 연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며, "연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지, 경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22번이나 반복하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2002-03 시즌은 식서스에게 좋지 않은 시작을 알렸다. 그들은 수비의 핵심이었던 디켐베 무톰보를 뉴저지 네츠로 트레이드했고, 아론 맥키와 에릭 스노우의 공격 및 수비 생산성이 모두 감소했다. 이 세 선수는 2년 전 파이널 진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선수들이었다. 아이버슨은 다시 한번 뛰어난 득점력(평균 27.6점)을 보여주었고, 식서스는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재정비하여 48승 34패의 기록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들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배런 데이비스가 이끄는 뉴올리언스 호네츠를 꺾었다. 아이버슨은 나중에 데이비스를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막기 어려웠던 상대 포인트 가드로 묘사했다. 6경기 동안 진행된 2라운드 시리즈에서 76ers는 디트로이트 피스턴스에게 탈락했다.
래리 브라운 헤드 코치는 2003년 플레이오프 패배 후 76ers를 떠났다. 그가 76ers를 떠난 후, 그와 아이버슨 모두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진심으로 서로를 아꼈다고 밝혔다. 아이버슨은 2004년 미국 남자 올림픽 농구팀의 공동 주장이 되면서 브라운과 재회했다. 2005년, 아이버슨은 브라운이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 최고의 코치"라고 말했다.

랜디 에이어스가 76ers의 다음 코치가 되었지만, 선수들과의 호흡을 맞추는 데 실패했고, 시즌 21승 31패로 시작한 후 해고되었다. 2003-04 NBA 시즌 후반기 동안, 아이버슨은 식서스의 임시 헤드 코치 크리스 포드의 규율적인 접근 방식에 불만을 품었다. 이로 인해 아이버슨이 연습 불참으로 정지당하고, 아파서 경기에 불참할 것을 포드에게 알리지 않아 벌금을 물고, 부상에서 복귀하는 과정에서 포드가 아이버슨에게 벤치에서 출전할 것을 요구하자 "모욕감"을 느껴 경기에 출전하기를 거부하는 등 여러 논란이 발생했다. 아이버슨은 재앙적인 시즌에 당시 개인 최고 기록인 34경기를 결장했으며, 식서스는 1998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2004-05 시즌에는 아이버슨과 식서스가 짐 오브라이언 신임 헤드 코치의 지도 아래 반등했으며, 1라운드 드래프트 픽 안드레 이궈달라와 시즌 중 트레이드로 영입된 올스타 포워드 크리스 웨버가 합류했다.
2005년 2월 12일, 아이버슨은 올랜도 매직을 상대로 112점 대 99점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개인 최고 기록인 60점을 기록했는데, 이 중 27번의 자유투 시도 중 24개를 성공시켰으며, 6어시스트와 5스틸도 더했다. 2005년 4월 8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상대로 103점 대 98점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아이버슨은 23점, 7리바운드, 개인 최고 기록인 1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재기한 아이버슨은 평균 31점으로 네 번째 NBA 득점왕 타이틀을 획득했고, 연간 8어시스트를 기록하며 76ers가 43승 39패의 기록으로 플레이오프에 다시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그들은 결국 동부 컨퍼런스 챔피언이 된 래리 브라운이 이끄는 디트로이트 피스턴스에게 1라운드에서 패배했다. 이 시리즈에서 아이버슨은 3개의 더블-더블을 기록했으며, 식서스의 유일한 승리 경기에서는 37점과 1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오브라이언 감독이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 및 구단 경영진과의 불화로 인해 그는 한 시즌 만에 해고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76ers의 전설적인 선수였던 모리스 칙스가 임명되었는데, 아이버슨은 칙스가 2001년 NBA 파이널 진출 당시 팀의 어시스턴트 코치였기 때문에 이 인사를 칭찬했다. 2005-06 시즌 동안, 아이버슨은 개인 최고 기록인 평균 33.0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식서스는 3년 만에 두 번째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2006년 4월 18일, 아이버슨과 크리스 웨버는 식서스의 팬 감사 행사 및 홈 경기 마지막 날에 늦게 도착했다. 선수들은 경기 시작 90분 전에 보고해야 했지만, 아이버슨과 웨버는 경기 시작 직전에 도착했다. 모리스 칙스 감독은 두 선수 모두 경기에 출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론에 알렸고, 빌리 킹 단장은 아이버슨과 웨버에게 벌금을 부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6년 오프시즌 동안, 아이버슨이 덴버 너기츠, 애틀랜타 호크스, 보스턴 셀틱스로 트레이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어떤 거래도 성사되지 않았다. 아이버슨은 식서스에 남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아이버슨과 식서스는 2006-07 NBA 시즌을 3승 0패로 시작했지만, 15경기 만에 5승 10패로 부진에 빠졌다. 실망스러운 시작 후, 아이버슨은 식서스에게 트레이드를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그는 부인했다), 그 결과 아이버슨은 더 이상 경기에 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워싱턴 위저즈와의 다음 경기(ESPN 전국 중계)에서 식서스 회장 에드 스나이더는 "우리는 그를 트레이드할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는 상황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떠나고 싶어 하고 우리는 그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며 트레이드 소문을 확인했다.
아이버슨은 10년간의 필라델피아 생활을 팀 역사상 최고 득점 평균(평균 28.1점)으로 마쳤으며, 총 득점 목록에서 역대 2위(19,583점)에 올랐다. 식서스는 그가 떠난 후 2012년까지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3.2. 덴버 너기츠 (2006-2008)

2006년 12월 19일,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아이버슨과 포워드 이반 맥팔린을 덴버 너기츠로 보내고, 그 대가로 안드레 밀러, 조 스미스, 그리고 2007 NBA 드래프트의 1라운드 픽 2개를 받았다. 트레이드 당시 아이버슨은 NBA 득점 2위였고, 새로운 팀 동료인 카멜로 앤서니는 득점 1위였다. 이로써 아이버슨과 앤서니는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득점 듀오로 기대를 모았다.
2006년 12월 23일, 아이버슨은 너기츠 소속으로 첫 경기를 치렀다. 새크라멘토 킹스에게 패배했지만, 22점과 1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너기츠에서의 첫 해에 그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첫 경기를 이긴 후 4경기를 내리 패배하며 탈락했다.
아이버슨은 2007년 1월 2일 너기츠와 그의 전 팀인 필라델피아 76ers 간의 경기 후 심판 스티브 자비를 비판한 혐의로 NBA로부터 2.50 만 USD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경기 중 그는 두 번의 테크니컬 파울을 범하고 퇴장당했다. 경기 후 아이버슨은 "나는 그 플레이에서 파울을 당했다고 생각했고, 그가 개인적으로 경기를 불렀다고 말했다. 어쨌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내가 리그에 들어온 이래로 그와 나 사이에는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그가 나를 나쁘게 보이게 만들기에 완벽한 경기였다"고 말했다.
전 심판 팀 도나히는 그의 책 개인 파울: NBA를 뒤흔든 스캔들에 대한 1인칭 계정에서 자비가 아이버슨에 대한 오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을 지지했다. 도나히는 2009년 12월 60분과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다른 두 명의 심판이 2007년 1월 6일 너기츠가 유타 재즈와 경기를 하기 전에 아이버슨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유리한 판정을 주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아이버슨은 12번의 자유투를 시도했는데, 이는 양 팀의 다른 어떤 선수보다 많은 수치였다. 12번의 골밑 돌파 중 그는 5번의 파울을 얻어냈고, 그 중 3번은 도나히 자신이 불렀으며, 메흐메트 오쿠르가 명백히 파울을 범한 한 플레이에서는 판정을 받지 못했다.
2008년 3월 19일, 아이버슨은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매진된 관중 앞에서 115점 대 113점으로 패배한 경기에서 팀 내 최고 득점인 32점을 기록하며 기립 박수를 받았다.
3.3. 디트로이트 피스턴스 (2008-2009)

2008년 11월 3일, 아이버슨은 덴버 너기츠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턴스로 트레이드되었고, 그 대가로 가드 천시 빌럽스, 포워드 안토니오 맥다이스, 센터 셰이크 삼이 너기츠로 향했다. 로드니 스터키가 이미 아이버슨이 선호하는 등번호 3번을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버슨은 피스턴스에서 빌럽스가 이전에 착용했던 등번호 1번으로 변경했다.
아이버슨은 디트로이트에서의 첫 5경기 중 4경기에서 24점 이상을 기록했고(이 중 3승), 꾸준히 20점 이상과 6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시즌이 진행될수록 그는 로드니 스터키에게 출전 시간을 빼앗겼다. 일부에서는 피스턴스 농구 운영 사장 조 듀마스가 아이버슨에게 장기적인 역할을 부여할 계획이 없었지만, 스터키를 미래의 포인트 가드로 만들고 아이버슨의 만료되는 계약으로 샐러리 캡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 그를 트레이드했다고 추측했다.
2009년 4월 3일, 아이버슨이 2008-09 시즌 잔여 경기에 출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듀마스는 아이버슨의 지속적인 허리 부상을 이유로 그의 비활성화를 언급했지만, 이틀 전 아이버슨은 피스턴스 코치 마이클 커리가 자신을 벤치로 옮기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은퇴하는 것이 낫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3.4. 멤피스 그리즐리스 (2009)
2009년 9월 10일, 아이버슨은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1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하나님이 멤피스를 내가 경력을 계속할 장소로 선택하셨다"며, "그들이 승리하는 팀을 만드는 데 전념하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버슨은 다시 벤치 선수로 뛰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2009년 11월 7일 "개인적인 이유"로 팀을 떠났다. 11월 16일, 그리즐리스는 "상호 합의"에 따라 그의 계약을 해지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그리즐리스에서 3경기를 뛰었으며, 평균 12.3점, 1.3리바운드, 3.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5.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복귀 (2009-2010)

2009년 11월 25일, 분석가 스테픈 A. 스미스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이버슨의 은퇴 계획을 알리는 성명을 게시하며, "나는 여전히 최고 수준에서 경쟁할 수 있다고 강하게 느낀다"고 덧붙였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11월 30일, 아이버슨과 그의 대리인들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대표단과 그의 전 팀으로의 복귀에 대해 논의했고, 이틀 후 계약 제안을 수락했다. 에드 스테판스키 단장은 계약 조건을 밝히지 않았지만, 익명의 소식통은 아이버슨이 리그 최저 연봉으로 1년 비보장 계약에 동의했다고 전했다. 아이버슨은 10년 이상 경력 선수에 대한 130.00 만 USD의 최저 연봉 중 일할 계산된 부분을 받게 되며, 2010년 1월 8일까지 로스터에 남아있을 경우 계약이 2009-10 시즌 잔여 기간 동안 보장될 예정이었다. 스테판스키는 주전 가드 루 윌리엄스가 턱 골절로 최소 30경기를 결장할 것으로 예상되자 아이버슨을 영입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2009년 12월 7일, 아이버슨은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매진된 관중으로부터 우레와 같은 기립 박수를 받으며 전 소속팀인 덴버 너기츠와의 경기에서 패배했다. 그는 경기에서 11점, 6어시스트, 5리바운드, 1스틸, 그리고 턴오버 없이 경기를 마쳤다. 필라델피아 복귀 후 첫 승리는 일주일 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경기에서 20점을 기록하며 식서스의 12연패(아이버슨 복귀 전 9연패)를 끊었다. 이 경기에서 그는 야투 성공률 70%를 기록했다.
2010년 1월 3일, 그는 덴버로 돌아와 너기츠와 맞붙었고, 108점 대 105점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17점과 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는 11시즌 연속으로 2010 NBA 올스타전 선발로 뽑혔다. 코비 브라이언트와 디펜딩 챔피언 레이커스에게 99점 대 91점으로 패배한 경기에서 시즌 최고 기록인 23점을 기록했다.
2010년 2월 22일, 아이버슨은 4세 딸 메시야의 건강 문제로 인해 76ers를 무기한 떠났다. 그는 몇 년 후 딸이 가와사키병을 앓고 있었다고 밝혔다. 3월 2일, 스테판스키는 아이버슨이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시즌 잔여 기간 동안 76ers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의 마지막 NBA 경기는 2010년 2월 20일 데릭 로즈가 이끄는 시카고 불스와의 원정 경기였다.
3.6. 베식타시 JK (2010-2011)
2010년 10월 26일, 야후! 스포츠는 아이버슨이 터키 슈퍼 리그 팀이자 유로컵에 참가하는 베식타시와 2년 400.00 만 USD 순수입 계약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구단은 2010년 10월 29일 뉴욕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계약을 발표했다. 등번호 4번을 달고, 아이버슨은 2010년 11월 16일 유로컵 경기에서 세르비아 팀 KK 헤모팜에게 91점 대 94점으로 패배한 경기에서 베식타시 데뷔전을 치렀다. 아이버슨은 23분 동안 15점을 기록했다.
아이버슨은 2011년 1월 종아리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 시즌에 베식타시에서 10경기만 뛰었으며, 이후 더 이상 프로 농구를 하지 않았다.
3.7. 은퇴 및 은퇴 후 활동
2013년 1월, 아이버슨은 NBA D-리그의 텍사스 레전즈에서 뛸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2013년 10월 30일, 아이버슨은 농구에 대한 열정을 잃었다고 밝히며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그날 밤 76ers의 2013-14 시즌 홈 개막전에서 그는 2쿼터 시작 시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의 은퇴 발표 기자회견에는 전 조지타운 코치 존 톰슨과 76ers의 전설 줄리어스 어빙이 참석했다. 아이버슨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항상 식서스 선수일 것이며, 은퇴하는 날이 항상 "힘든" 날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신 "행복한" 날이었다고 말했다.
2013년 11월, 76ers는 2014년 3월 1일 워싱턴 위저즈와의 홈 경기에서 특별 하프타임 기념식을 통해 아이버슨의 등번호 3번을 공식적으로 영구 결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행사는 20,000명의 관중과 줄리어스 어빙, 모제스 말론, 전 팀 사장 팻 크로체와 같은 76ers의 전설적인 선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는 2016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샤킬 오닐과 야오밍과 함께 헌액되었다. 아이버슨은 명예의 전당 경력에 대해 언론에 이야기할 때 존 톰슨과 래리 브라운을 언급하며 그들에게 공을 돌렸다.
2017년, 3대3 프로 농구 리그인 BIG3의 창설이 발표되었고, 아이버슨은 3's 컴퍼니의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할 예정이었다. 3월에는 더마 존슨이 아이버슨의 공동 주장이 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3's 컴퍼니는 2017년 BIG3 드래프트에서 안드레 오웬스, 마이크 스위트니, 루벤 패터슨을 지명했다. 6월 25일, 3's 컴퍼니는 2017 BIG3 시즌의 첫 경기를 볼 혹스와 치렀다. 이 경기에서 아이버슨은 9분 동안 6번의 야투 시도 중 1개를 성공시켜 2점을 기록했다. 9분만 뛴 것에 대해 아이버슨은 "나는 코치, 선수, 주장이 되기 위해 계약했다. 코치 역할은 경기 내내 계속될 것이다. 선수 역할은 당신이 기대하는 것과 같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예전의 앨런 아이버슨을 경기장에서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021년, 아이버슨과 전 NBA 선수 앨 해링턴은 "아이버슨 컬렉션"이라는 대마초 제품 라인을 출시하는 사업 제휴를 발표했다. 아이버슨은 해링턴이 설립한 비올라 브랜즈의 다양한 사업 이니셔티브 개발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이들은 또한 대마초 사용에 대한 낙인을 줄이기 위한 교육 노력에도 협력할 것이다.
2023년 10월, 아이버슨은 리복의 농구 부사장으로 임명되었다. 2024년, 76ers는 훈련 시설 외부에 아이버슨의 동상을 공개했다. 뉴포트뉴스시는 아이버슨의 고향 투자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앨런 아이버슨 웨이"라는 거리 이름을 붙였고, 버지니아주 주지사 글렌 영킨은 3월 5일을 "앨런 아이버슨 데이"로 선포했다. 2015년 8월 14일, 미국 가수 포스트 말론은 "화이트 아이버슨"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 노래의 제목과 가사에 아이버슨이 언급되었다. 이 노래는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14위로 데뷔했으며, 스포티파이에서 10억 스트림, 유튜브에서 10억 뷰를 기록했다. 앨런 자신도 이 노래가 스포티파이에서 10억 스트림을 달성하자 "10억 스포티파이 스트림을 축하한다. 전 세계가 이 노래를 사랑하고, 나는 그 일부가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계속 그 자세를 유지해달라, 포스트"라고 반응했다.
4. 국가대표 경력
앨런 아이버슨은 미국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여러 국제 대회에 참가하여 활약했다.
4.1. 월드 유니버시티 게임
아이버슨은 1995년 일본에서 열린 미국 월드 유니버시티 게임 팀의 일원이었다. 이 팀에는 미래의 NBA 스타인 레이 앨런과 팀 던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버슨은 평균 16.7점, 6.1어시스트, 2.9스틸을 기록하며 미국 선수 중 득점, 어시스트, 스틸 부문에서 모두 선두를 차지했다. 그는 팀이 무패 기록을 달성하고 개최국인 일본을 141점 대 81점으로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4.2. FIBA 아메리카스 선수권 대회
아이버슨은 2003년 8월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2003 FIBA 아메리카스 올림픽 예선 토너먼트에 미국 대표팀으로 선발되었다. 미국은 10승 0패의 완벽한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2004년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했다. 아이버슨은 출전한 8경기 모두 선발로 뛰었으며, 평균 14.3점으로 팀 내 득점 2위를 기록했다. 또한 경기당 3.8어시스트, 2.5리바운드, 1.6스틸을 기록했으며, 야투 성공률 56.2%, 3점슛 성공률 53.6%, 자유투 성공률 81.0%를 기록했다.
8월 25일 캐나다와의 111점 대 71점 승리 경기에서 그는 미국 올림픽 예선 단일 경기 최고 기록인 28점을 기록하고, 단일 경기 최고 기록인 7개의 3점슛을 성공시켰다. 23분만 뛰면서도 그는 야투 13개 중 10개, 3점슛 8개 중 7개, 자유투 1개 중 1개를 성공시켰고, 3어시스트, 3스틸, 1리바운드를 추가했다. 그의 3점슛 7개는 모두 3쿼터 마지막 7분 41초 동안 기록되었다.
그는 토너먼트 전체 득점 공동 10위, 스틸 공동 4위, 3점슛 성공률 5위, 어시스트 공동 7위, 야투 성공률 9위(.562)를 기록했다. 아이버슨은 또한 8월 28일 푸에르토리코와의 경기 전반에 입은 오른손 엄지손가락 염좌로 인해 미국의 마지막 두 경기에 결장했다. 8월 17일 뉴욕에서 열린 푸에르토리코와의 101점 대 74점 시범 경기에서 그는 26분 동안 야투 6개 중 4개를 성공시켜 9점을 기록하고, 5어시스트와 3리바운드를 추가했다. 그는 2003년 4월 29일 2003년 미국 시니어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4.3. 올림픽
아이버슨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미국 국가대표팀으로 참가하여 동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팀은 르브론 제임스와 함께 연습에 늦어 한 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다. 아이버슨은 팀이 연장전 끝에 승리한 첫 경기에서 중요한 슛을 성공시키며 팀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팀은 전반적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며 동메달에 그쳤다. 아이버슨은 이 대회에서 팀 던컨과 함께 팀의 공동 주장을 맡았다.
5. 플레이 스타일과 영향력
앨런 아이버슨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이고 폭발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NBA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경기력은 물론, 그의 패션과 태도는 스포츠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5.1. 독창적인 플레이 스타일
아이버슨은 183 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샤킬 오닐과 같은 216 cm의 장신 센터들과 매년 득점왕 경쟁을 벌일 정도로 뛰어난 득점원이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크로스오버 드리블은 긴 팔 길이와 날카로움을 활용하여 수비수를 제치고, 높은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득점을 올렸다. 그는 당시 빅맨들이 경기를 지배하던 시대에 체격 차이를 극복하는 플레이 스타일로 카리스마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현대 농구의 "스코어링 가드"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래리 브라운 감독이 부임한 후, 그는 포인트 가드에서 슈팅 가드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에릭 스노우가 포인트 가드를 맡게 되었고, 아이버슨은 득점에 전념하며 득점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5.2. 문화적 영향력
아이버슨은 콘로우 헤어스타일, 랩 음악과 농구의 결합, 그리고 대중문화에서 문신을 대중화시킨 인물로 평가받으며 NBA와 미국 스포츠 문화 전반을 변화시킨 인물로 여러 언론에서 언급된다. 2024년, 76ers는 훈련 시설 외부에 아이버슨의 동상을 공개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그의 고향인 뉴포트뉴스시는 그의 고향 투자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앨런 아이버슨 웨이"라는 거리 이름을 붙였고, 버지니아주 주지사 글렌 영킨은 3월 5일을 "앨런 아이버슨 데이"로 선포했다.
그는 다양한 색상의 헤어밴드, 팔 전체를 지지하는 슈팅 슬리브, 자신의 등번호 3번이 새겨진 핑거 서포터, "디 앤서"와 같은 문구가 새겨진 손목 밴드, "W.W.J.D"(What Would Jesus Do?영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의 약자)가 새겨진 실리콘 밴드 등을 착용하고 경기에 임했으며, 이는 젊은 선수들의 패션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15년 8월 14일, 미국 가수 포스트 말론은 자신의 노래 "화이트 아이버슨"의 제목과 가사에 아이버슨을 언급했다. 이 노래는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14위로 데뷔했으며, 스포티파이에서 10억 스트림, 유튜브에서 10억 뷰를 기록했다. 앨런 자신도 이 노래가 스포티파이에서 10억 스트림을 달성하자 포스트 말론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6. 개인 생활
앨런 아이버슨은 농구 외적으로도 다양한 활동과 개인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의 가족 관계, 사업 활동, 그리고 재정 상황 등은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6.1. 가족과 결혼
아이버슨은 16세 때부터 고등학교 시절 여자친구였던 타와나 터너와 교제했으며, 뉴저지주 부히스 타운십의 메인 스트리트 맨션에서 결혼했다. 그들에게는 티아우라, 앨런 2세, 이사야, 메시야, 드림 등 다섯 명의 자녀가 있다. 그의 딸 메시야는 가와사키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3월 2일, 타와나 아이버슨은 이혼 소송을 제기하며 자녀 양육권, 양육비, 위자료를 요구했다. 아이버슨에 따르면, 부부는 2013년 이혼이 확정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재결합했다. 아이버슨의 사촌인 쿠란 아이버슨 또한 농구 선수이다. 그는 한때 래퍼 다 브랫과 교제했으나, 아이버슨의 불륜으로 인해 관계가 끝났다고 다 브랫은 주장했다.
6.2. 기타 사업 및 활동
2000년 오프시즌 동안, 아이버슨은 "40 바"(40 Bars영어)라는 랩 싱글을 녹음했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가사로 인해 비판을 받은 후, 결국 음반을 발매하지 못했다. "줄즈"(Jewelz영어)라는 예명으로 발매될 예정이었던 이 앨범은 동성애자에 대한 비하적인 발언을 담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시민 단체와 NBA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의 비판 이후, 그는 가사를 변경하기로 동의했지만, 결국 앨범은 발매되지 않았다.
2015년 5월 14일, 아이버슨은 자신의 삶을 다룬 쇼타임 네트워크 다큐멘터리 아이버슨을 지지하기 위해 CBS 디스 모닝에 출연하여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재정적 어려움에 대한 소문을 부인했다. 그는 "그것은 신화다. 소문일 뿐이다...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이라고 말했다.
2021년, 아이버슨과 전 NBA 선수 앨 해링턴은 "아이버슨 컬렉션"이라는 대마초 제품 라인을 출시하는 사업 제휴를 발표했다. 아이버슨은 해링턴이 설립한 비올라 브랜즈의 다양한 사업 이니셔티브 개발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이들은 또한 대마초 사용에 대한 낙인을 줄이기 위한 교육 노력에도 협력할 것이다。
2023년 10월, 아이버슨은 리복의 농구 부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5년간의 프로 생활 동안 약 1.55 억 USD를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트립 클럽에서 한 번에 3.00 만 USD에서 4.00 만 USD를 사용하고, 자동차, 보석, 개인 제트기 여행에 돈을 쓰는 등 과도한 낭비를 하여 현역 시절 수입을 모두 탕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까지 그는 120.00 만 USD의 주택 담보 대출을 연체하여 자택이 압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리복과의 평생 스폰서 계약을 통해 2030년까지 3200.00 만 USD를 확실히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법적 문제 및 논란
앨런 아이버슨은 그의 경력 동안 여러 차례 법적 문제와 논란에 휘말렸다.
1997년 8월, 오프시즌 동안 아이버슨과 그의 친구들은 늦은 밤 과속으로 경찰에 의해 정지되었다. 그는 은닉 무기 소지와 대마초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지 않는 답변을 했고, 사회봉사를 선고받았다.
2002년, 아이버슨은 가정 불화 후 아내 타와나를 집 밖으로 내쫓고, 나중에 그녀를 찾으러 다니면서 두 남자를 총으로 위협한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증인들의 진술이 모순되고 증거가 부족하다는 판사의 판단에 따라 그에 대한 모든 혐의는 나중에 철회되었다.
2004년 2월 24일, 아이버슨은 애틀랜틱시티의 발리스 애틀랜틱시티 카지노에서 쓰레기통에 소변을 보았고, 카지노 측으로부터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2005년 12월 9일, 식서스가 샬럿 밥캣츠를 꺾은 후, 아이버슨은 늦은 밤 애틀랜틱시티의 트럼프 타지 마할 카지노를 방문했다. 쓰리 카드 스터드 포커 테이블에서 한 판을 이긴 후, 아이버슨은 딜러에게 1.00 만 USD 상당의 칩을 초과 지급받았다. 딜러가 실수를 깨닫고 칩을 돌려달라고 요청하자 아이버슨은 거부했고, 그와 카지노 직원들 사이에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다. 애틀랜틱시티 카지노 규정에 따르면, 카지노가 도박꾼에게 유리하게 잘못 지급했을 경우, 도박꾼은 정당하게 얻지 못한 돈을 돌려줘야 한다.
또한 2005년, 아이버슨의 경호원 제이슨 케인이 워싱턴 D.C. 나이트클럽에서 한 남성을 폭행한 혐의를 받았다. 이 남성 마를린 고드프리는 아이버슨 일행이 들어갈 수 있도록 클럽의 VIP 구역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고드프리는 뇌진탕, 고막 파열, 눈의 혈관 파열, 회전근개 파열, 베인 상처와 멍, 그리고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아이버슨은 직접 고드프리를 만지지 않았지만, 고드프리는 경호원에 의해 입은 부상에 대해 아이버슨을 고소했다. 2007년, 배심원단은 고드프리에게 26.00 만 USD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009년 3월, 컬럼비아 특별구 항소 법원은 항소심에서 이 판결을 지지했다.
2011년 8월, 오하이오주의 한 남성이 2009년 디트로이트의 한 술집에서 아이버슨의 경호원이 자신을 폭행했다고 주장하며 아이버슨에게 250.00 만 USD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 판사는 아이버슨이나 그의 경호원이 원고 가이 워커를 폭행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판단하여 사건을 기각했다.
2013년, 아이버슨은 자신의 자녀들을 납치하고 어머니에게 돌려주기를 거부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이 주장을 부인했고, 그의 전처는 나중에 주장을 철회했다.
8. 수상 및 영예
앨런 아이버슨은 그의 프로 경력 동안 수많은 개인상과 영예를 얻었으며,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8.1. 주요 수상 경력
- NBA 최우수 선수 (2001)
- 4× NBA 득점왕 (1999, 2001, 2002, 2005)
- 11× NBA 올스타 (2000-2010)
- 2× NBA 올스타전 MVP (2001, 2005)
- 3× 올-NBA 퍼스트 팀 (1999, 2001, 2005)
- 3× 올-NBA 세컨드 팀 (2000, 2002, 2003)
- 올-NBA 서드 팀 (2006)
- 3× NBA 스틸왕 (2001, 2002, 2003)
- NBA 신인상 (1997)
-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97)
- NBA 루키 챌린지 MVP (1997)
- NBA 75주년 기념팀
- 올아메리칸 컨센서스 퍼스트 팀 (1996)
- 빅 이스트 퍼스트 팀 (1996)
- 빅 이스트 세컨드 팀 (1995)
- 2× 빅 이스트 올해의 수비 선수 (1995, 1996)
- 빅 이스트 신인상 (1995)
- 퍼레이드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 (1993)
8.2. 명예의 전당 및 영구 결번
2016년, 아이버슨은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4년 3월 1일,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아이버슨이 현역 시절 착용했던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는 행사를 가졌다.
9. 통계
9.1. NBA 통계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출전 | 분당 출전 | 야투율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96-97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76 | 74 | 40.1 | .418 | .341 | .702 | 4.1 | 7.5 | 2.1 | 0.3 | 23.5 |
1997-98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80 | 80 | 39.4 | .461 | .298 | .729 | 3.7 | 6.2 | 2.2 | 0.3 | 22.0 |
1998-99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48 | 48 | 41.5 | .412 | .291 | .751 | 4.9 | 4.6 | 2.3 | 0.1 | 26.8 |
1999-00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70 | 70 | 40.8 | .421 | .341 | .713 | 3.8 | 4.7 | 2.1 | 0.1 | 28.4 |
2000-01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71 | 71 | 42.0 | .420 | .320 | .814 | 3.8 | 4.6 | 2.5 | 0.3 | 31.1 |
2001-02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60 | 59 | 43.7 | .398 | .291 | .812 | 4.5 | 5.5 | 2.8 | 0.2 | 31.4 |
2002-03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82 | 82 | 42.5 | .414 | .277 | .774 | 4.2 | 5.5 | 2.7 | 0.2 | 27.6 |
2003-04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48 | 47 | 42.5 | .387 | .286 | .745 | 3.7 | 6.8 | 2.4 | 0.1 | 26.4 |
2004-05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75 | 75 | 42.3 | .424 | .308 | .835 | 4.0 | 7.9 | 2.4 | 0.1 | 30.7 |
2005-06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72 | 72 | 43.1 | .447 | .323 | .814 | 3.2 | 7.4 | 1.9 | 0.1 | 33.0 |
2006-07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15 | 15 | 42.7 | .413 | .226 | 0.885 | 2.7 | 7.3 | 2.2 | 0.1 | 31.2 |
덴버 너기츠 | 50 | 49 | 42.4 | .454 | .347 | .759 | 3.0 | 7.2 | 1.8 | 0.2 | 24.8 | |
2007-08 | 덴버 너기츠 | 82 | 82 | 41.8 | .458 | .345 | .809 | 3.0 | 7.1 | 2.0 | 0.1 | 26.4 |
2008-09 | 덴버 너기츠 | 3 | 3 | 41.0 | .450 | .250 | .720 | 2.7 | 6.7 | 1.0 | 0.3 | 18.7 |
디트로이트 피스턴스 | 54 | 50 | 36.5 | .416 | .286 | .786 | 3.1 | 4.9 | 1.6 | 0.1 | 17.4 | |
2009-10 | 멤피스 그리즐리스 | 3 | 0 | 22.3 | 0.577 | 1.000 | .500 | 1.3 | 3.7 | 0.3 | 0.0 | 12.3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25 | 24 | 31.9 | .417 | .333 | .824 | 3.0 | 4.1 | 0.7 | 0.1 | 13.9 | |
경력 | 914 | 901 | 41.1 | .425 | .313 | .780 | 3.7 | 6.2 | 2.2 | 0.2 | 26.7 | |
올스타 | 9 | 9 | 26.6 | .414 | .667 | .769 | 2.6 | 6.2 | 2.3 | 0.1 | 14.4 |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출전 | 분당 출전 | 야투율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99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8 | 8 | 44.8 | .411 | .283 | .712 | 4.1 | 4.9 | 2.5 | 0.3 | 28.5 |
2000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10 | 10 | 44.4 | .384 | .308 | .739 | 4.0 | 4.5 | 1.2 | 0.1 | 26.2 |
2001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22 | 22 | 46.2 | .389 | .338 | .774 | 4.7 | 6.1 | 2.4 | 0.3 | 32.9 |
2002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5 | 5 | 41.8 | .381 | .333 | .810 | 3.6 | 4.2 | 2.6 | 0.0 | 30.0 |
2003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12 | 12 | 46.4 | .416 | .345 | .737 | 4.3 | 7.4 | 2.4 | 0.1 | 31.7 |
2005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5 | 5 | 47.6 | 0.468 | 0.414 | 0.897 | 2.2 | 10.0 | 2.0 | 0.4 | 31.2 |
2007 | 덴버 너기츠 | 5 | 5 | 44.6 | .368 | .294 | .806 | 0.6 | 5.8 | 1.4 | 0.0 | 22.8 |
2008 | 덴버 너기츠 | 4 | 4 | 39.5 | .434 | .214 | .697 | 3.0 | 4.5 | 1.0 | 0.3 | 24.5 |
경력 | 71 | 71 | 45.1 | .401 | .327 | .764 | 3.8 | 6.0 | 2.1 | 0.2 | 29.7 |
9.2. 대학 통계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출전 | 분당 출전 | 야투율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94-95 | 조지타운 | 30 | 29 | 32.2 | .390 | .232 | .688 | 3.3 | 4.5 | 3.0 | 0.2 | 20.4 |
1995-96 | 조지타운 | 37 | 37 | 32.8 | .480 | .366 | .678 | 3.8 | 4.7 | 3.4 | 0.4 | 25.0 |
경력 | 67 | 66 | 32.5 | .440 | .314 | .683 | 3.6 | 4.6 | 3.2 | 0.3 | 23.0 |
10. 영화 출연
- 라이크 마이크 (2002) - 본인 역
- 이매진 댓 (2009) - 본인 역
- 마이 아더 홈 (2017)
- 허슬 (2022) - 본인 역
11. 관련 항목
- NBA 통산 득점 순위
- NBA 통산 자유투 득점 순위
- NBA 통산 어시스트 순위
- NBA 통산 스틸 순위
- NBA 통산 턴오버 순위
- NBA 단일 경기 득점 순위
- NBA 단일 경기 스틸 순위
- NBA 플레이오프 단일 경기 득점 순위
- NBA 시즌별 득점왕 목록
- NBA 시즌별 출전 시간 순위
- NBA 신인 시즌 득점 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