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및 배경
1.1. 어린 시절과 초기 스포츠 활동
하킴 올라주원은 1963년 1월 21일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살림과 아비케 올라주원 부부의 여섯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시멘트 사업을 하는 중산층 요루바족이었으며, 올라주원은 부모님이 자신과 형제자매들에게 근면, 규율, 정직, 연장자에 대한 존경,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 등의 미덕을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나이지리아가 후진적으로 묘사되는 것에 불쾌감을 표현하며, 라고스가 매우 국제적인 도시였고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있는 학교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어린 시절 올라주원은 축구 골키퍼로 활동했으며, 이는 훗날 농구 선수로서의 민첩한 풋워크와 신체 크기에 걸맞은 균형감각, 그리고 샷 블로킹 능력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핸드볼도 즐겼습니다. 15세가 되어서야 라고스의 무슬림 교사 칼리지에서 지역 농구 토너먼트에 참가하며 농구를 처음 접했습니다. 초기에는 덩크조차 할 수 없었으나, 농구가 자신에게 특별한 스포츠이며 인생의 길임을 즉시 깨달았다고 회상했습니다.
1.2. 미국 이민과 고등 교육
1980년, 올라주원은 농구 선수로 활약하기 위해 나이지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는 휴스턴 대학교의 가이 루이스 감독 친구의 추천으로 휴스턴 대학교에 방문하여 코칭 스태프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처음 미국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마중 나온 학교 관계자가 아무도 없었고, 학교에 전화하자 택시를 타고 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상하며 초반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교육 이수 또한 그에게 중요한 우선순위였으며, 휴스턴 대학교에서 체육 교육학을 전공했습니다.
2. 대학 경력
2.1. 휴스턴 대학교와 "파이 슬라마 자마"

올라주원은 NCAA로부터 출전 허가를 받지 못해 1980-81 시즌을 레드셔츠로 보낸 후, 1981-82 시즌에는 벤치 멤버이자 팀의 식스맨으로 활약했습니다. 이 시즌에 그는 경기당 18분을 뛰며 8.3득점, 6.2리바운드, 2.5블록을 기록했고, 휴스턴 쿠거스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게 패배하며 파이널 포에서 탈락했습니다.
올라주원은 출전 시간을 늘리기 위해 코칭 스태프에게 조언을 구했고, 당시 휴스턴 로키츠의 센터이자 NBA MVP였던 모제스 말론과 함께 훈련하라는 추천을 받았습니다. 올라주원은 여름 내내 휴스턴의 폰데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말론과 함께 경기를 뛰며 자신의 기량을 급속히 향상시켰습니다. 그는 말론이 당시 NBA 최고의 센터였기에, 최고의 선수와 맞붙으며 게임을 개선할 수 있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여름 훈련 후 올라주원은 완전히 다른 선수로 변모했습니다. 그의 덩크가 너무나도 쉬워 보여 대학 감독이 "꿈같다"고 말한 후, 그는 "더 드림"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와 팀 동료들(클라이드 드렉슬러 포함)은 림 위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여 "파이 슬라마 자마"라는 별칭을 얻으며 대학 농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2.2. NCAA 토너먼트 성공과 드래프트
올라주원은 2학년과 3학년 시절 NCAA 챔피언십 게임에 연속으로 진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83년에는 마지막 순간에 역전패하며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대학교에 패했고, 1984년에는 패트릭 유잉이 이끄는 조지타운 대학교에 패배했습니다. 1982-83 시즌에는 경기당 13.9득점, 11.4리바운드, 5.1블록을 기록했고, 1983-84 시즌에는 16.8득점, 13.5리바운드, 5.6블록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1983년 NCAA 토너먼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헬름스 재단 선정 올해의 대학 농구 선수로도 뽑혔습니다. 1984년에는 합의된 퍼스트 팀 올아메리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983-84 시즌 이후, 올라주원은 대학에 남을지 아니면 NBA 드래프트에 조기 참가할지 고민했습니다. 당시 1985년 NBA 드래프트 로터리 도입 전에는 동전 던지기로 1순위 지명권을 결정했습니다. 올라주원은 휴스턴이 동전 던지기에서 이겨 자신을 지명할 것이라고 강하게 믿었기 때문에 조기 드래프트 참가를 결정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의 직감은 옳았고, 휴스턴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제치고 1순위 지명권을 얻었습니다. 올라주원은 1984년 NBA 드래프트에서 휴스턴 로키츠에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습니다. 이 드래프트는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존 스톡턴 등 엄청난 재능을 가진 선수들로 유명했습니다.
올라주원의 자서전 《리빙 더 드림(Living the Dream)》에 따르면, 당시 로키츠에게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1984년 드래프트 2순위 지명권을 랄프 샘슨과 맞바꾸는 트레이드 제안이 포틀랜드로부터 있었습니다. 만약 로키츠가 이 트레이드를 수락했다면, 올라주원은 조던이 2순위로 지명되어 자신과 대학 시절부터 호흡을 맞춘 드렉슬러와 함께 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스포츠 작가 샘 스미스는 이러한 트레이드가 "리그 역사와 아마도 마이클 조던의 전설 자체를 바꾸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실제로 1991년부터 1998년까지 모든 NBA 챔피언십 팀에는 조던이나 올라주원이 있었으며,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모든 NBA 파이널에는 드렉슬러, 조던, 올라주원 중 적어도 한 명이 참여했습니다.
3. 프로 경력
3.1. 휴스턴 로키츠: 초기 (1984-1987)
올라주원의 루키 시즌에 휴스턴 로키츠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팀의 승패 기록은 1983-84 시즌 29승 53패에서 1984-85 시즌 48승 34패로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그는 1984년 신인상을 수상한 신장 2.24 m의 랄프 샘슨과 함께 "트윈 타워"라는 별칭을 얻으며 NBA 최초의 강력한 센터 듀오를 형성했습니다. 올라주원은 루키 시즌에 경기당 20.6득점, 11.9리바운드, 2.68블록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1985년 신인상 투표에서 마이클 조던에 이어 2위를 차지했으며, 조던 외에 유일하게 표를 받은 신인이었습니다. 올라주원은 1985년 NBA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 NBA 올루키 팀과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습니다. 그와 샘슨은 1970년 윌트 체임벌린과 엘진 베일러 이후 경기당 20득점 이상,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팀 동료가 되었습니다.
올라주원은 1985-86 시즌 동안 경기당 23.5득점, 11.5리바운드, 3.4블록을 기록했습니다. 로키츠는 51승 31패를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고, 디펜딩 챔피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만났습니다. 로키츠는 4승 1패로 레이커스를 비교적 쉽게 꺾으며 스포츠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올라주원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올라주원은 3차전과 4차전 승리에서 75득점을 기록했으며, 시리즈 후 레이커스 감독 팻 라일리는 "우리는 모든 것을 시도했습니다. 4명의 선수를 붙였고, 다른 각도에서 도움 수비를 펼쳤습니다. 그는 그저 위대한 선수입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로키츠는 1986년 NBA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흔히 NBA 역사상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히는 보스턴 셀틱스에 2승 4패로 패했습니다.
3.2. 팀 리더로서의 성장과 이름 변경 (1987-1993)

1987-88 시즌 동안, 무릎 부상으로 조기 은퇴 위기에 처했던 샘슨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1988-89 시즌은 올라주원이 로키츠의 명실상부한 리더가 된 첫 번째 풀 시즌이었습니다. 이는 돈 채니 신임 감독의 부임과도 시기적으로 일치했습니다. 로키츠는 정규 시즌을 45승 37패로 마쳤으며, 올라주원은 경기당 13.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찰스 바클리를 1리바운드 차이로 제치고 리그 리바운드 선두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경기당 24.8득점과 3.4블록이라는 뛰어난 개인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올라주원은 플레이오프에서 경기당 37.5득점, 16.8리바운드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으며, 4경기 플레이오프 시리즈 최다 득점 기록(150점)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키츠는 시애틀 슈퍼소닉스에 1승 3패로 1라운드에서 탈락했습니다.
1989-90 시즌은 로키츠에게 실망스러운 해였습니다. 팀은 41승 41패로 시즌을 마쳤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레이커스에 4경기만에 탈락했습니다. 올라주원은 NBA 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수비 시즌 중 하나를 보냈습니다. 그는 경기당 14.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데이비드 로빈슨을 2리바운드 차이로 제치고 다시 한번 NBA 리바운드 왕을 차지했으며, 경기당 4.6블록을 기록하며 리그 블록 선두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NBA가 1973-74 시즌부터 블록샷을 공식 통계로 기록한 이래 한 시즌에 경기당 14개 이상의 리바운드와 4.5개 이상의 블록샷을 동시에 기록한 유일한 선수입니다. 이로써 그는 카림 압둘 자바와 빌 월튼에 이어 한 시즌에 리바운드와 블록샷 부문에서 리그 선두를 차지한 세 번째 선수가 되었습니다. 올라주원은 또한 이 시즌에 쿼드러플 더블을 기록하며 NBA 역사상 세 번째 선수가 되었습니다.
1990-91 시즌, 로키츠는 올해의 감독 채니의 지휘 아래 52승 30패를 기록했습니다. 올라주원은 1990-91 시즌에 경기당 21.8득점을 기록했지만, 시카고 불스의 빌 카트라이트의 팔꿈치에 맞아 눈 주위 뼈가 골절되는 부상으로 인해 충분한 경기(56경기)를 뛰지 못해 리바운드 타이틀 자격을 잃었습니다. 만약 그가 자격을 갖췄다면 경기당 13.8리바운드로 3년 연속 리바운드 타이틀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경기당 3.95블록으로 리그 선두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로키츠는 플레이오프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스윕당했습니다.
다음 1991-92 시즌은 올라주원의 로키츠 재임 기간 중 최저점이었습니다. 팀은 42승 40패를 기록하며 올라주원 커리어 최초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시즌 초반 가속화된 심장박동으로 인해 2주간 결장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뛰어난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는 팀을 평범함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했습니다. 1986년 파이널 진출 이후, 로키츠는 플레이오프에 5번 진출했지만, 그 플레이오프 시리즈 기록은 1승 5패였고 4번이나 1라운드에서 탈락했습니다. 시즌이 끝난 후, 올라주원은 그의 불합리한 계약 때문에 트레이드를 요청했습니다. 그의 연봉은 최고 센터에 비해 현저히 낮았고, 그의 계약은 재협상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구단이 자신을 질 좋은 선수들로 둘러싸려는 노력이 부족하며, 로키츠가 우승보다는 수익에 더 관심이 많다고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구단은 또한 그가 계약 상황에 대한 불만으로 햄스트링 부상을 가장하고 있다고 비난하여 올라주원을 격분시켰습니다. 그의 에이전트는 구단과의 차이가 "화해 불가능하다"고 언급했으며, 올라주원은 구단주 찰리 토머스와 구단 프런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1992-93 시즌이 다가오면서, 휴스턴 크로니클의 한 기자는 올라주원의 트레이드가 "가장 확실한 일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트레이드되지 않았고, 로키츠는 루디 토먀노비치 신임 감독과 함께 시즌을 시작했습니다. 올라주원은 1992-93 시즌에 패싱 능력을 향상시켜 경기당 3.5어시스트라는 새로운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패스 의지는 그의 득점을 증가시켜 상대 팀이 그를 더블팀이나 트리플팀으로 막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올라주원은 경기당 26.1득점이라는 새로운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습니다. 로키츠는 55승이라는 새로운 프랜차이즈 기록을 세웠고,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 진출하여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7차전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100 대 103으로 패했습니다. 그는 MVP 투표에서 찰스 바클리에게 22표 대 59표로 2위를 차지했습니다. 팀은 정규 시즌 막바지에 그에게 4년 연장 계약을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올라주원은 1991년 3월 9일, 자신의 이름을 '아킴'에서 더 통상적인 철자인 '하킴'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는 "이름 철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는 매일 꾸란을 공부했습니다. 집에서, 모스크에서... 비행기에서도, 경기 전후에도 읽었습니다. 나는 신앙을 흡수하고 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배웠습니다. 나는 신앙을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전적으로 헌신했습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클라이드 드렉슬러는 1995년에 "그의 종교가 그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올라주원은 라마단 금식 기간(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음식과 음료를 삼가는 것)에도 불구하고 리그 엘리트 센터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95년 라마단이 2월 1일에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라주원은 2월의 NBA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3.3. MVP와 연속 우승 (1993-1995)
올라주원은 1993-94 시즌과 1994-95 시즌의 활약을 바탕으로 클러치 플레이어이자 역사상 최고의 센터 중 한 명이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샤킬 오닐, 디켐베 무톰보와 같은 센터들뿐만 아니라 데니스 로드먼과 칼 말론과 같은 다른 수비형 선수들을 압도했습니다. 특히 그의 경쟁은 텍사스에 기반을 둔 라이벌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데이비드 로빈슨과의 대결에서 빛났습니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두 선수 모두 전성기였던 7시즌 동안 30번의 맞대결에서 올라주원은 경기당 26.3득점, 47.6%의 야투 성공률을 기록했으며, 로빈슨은 22.1득점, 46.8%의 야투 성공률을 기록했습니다.
올라주원은 1994년 NBA 파이널에서 뉴욕 닉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로키츠를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닉스는 올라주원의 대학 시절부터 오랜 라이벌이었던 패트릭 유잉의 팀이었습니다. 시리즈에서 1승 2패로 뒤지던 닉스는 3승 2패로 6차전을 맞이했습니다. 로키츠가 86 대 84로 앞서고 있던 마지막 순간, 닉스의 존 스타크스는 파이널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는 3점 슛을 시도했지만, 올라주원이 경기 종료 직전 극적인 블록슛으로 이를 막아냈습니다. 7차전에서 올라주원은 25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닉스를 꺾고 휴스턴에 1961년 아메리칸 풋볼 리그 챔피언십을 차지했던 휴스턴 오일러스 이후 첫 프로 스포츠 챔피언십을 안겨주었습니다. 올라주원은 유잉과의 직접 맞대결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시리즈 내내 유잉보다 더 많은 득점을 올렸으며, 유잉의 18.9득점, 36.3% 야투 성공률에 비해 경기당 26.9득점, 50% 야투 성공률을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활약으로 올라주원은 NBA 파이널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올라주원 커리어의 정점이었습니다。1994년, 그는 NBA 역사상 최초로 MVP, 챔피언십, 파이널 MVP, 올해의 수비수 상을 한 시즌에 모두 수상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리그 MVP 상을 수상한 최초의 외국 태생 선수였습니다.
1994년 12월 1일, 올라주원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상대로 37득점, 13리바운드, 1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트리플 더블을 달성했습니다. 팀의 더딘 출발과 올라주원이 빈혈로 인해 시즌 막바지 8경기를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로키츠는 1995년에 챔피언 자리를 지켰습니다. 시즌 중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서 올라주원의 옛 휴스턴 대학교 "파이 슬라마 자마" 팀 동료인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영입하며 전력이 보강되었습니다. 올라주원은 정규 시즌 동안 경기당 27.8득점, 10.8리바운드, 3.4블록을 기록했습니다. 올라주원은 플레이오프에서 그의 커리어 중 가장 인상적인 순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최근 리그 MVP에 선정된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데이비드 로빈슨은 올라주원에게 압도당했습니다. 올라주원은 56.0%의 야투 성공률로 경기당 35.3득점을 기록한 반면, 로빈슨은 44.9%의 야투 성공률로 23.8득점을 기록했으며, 마지막 두 경기에서는 로빈슨의 41득점에 비해 81득점을 기록했습니다. 시리즈를 결정짓는 경기에서 올라주원은 39득점, 17리바운드, 5블록을 기록했습니다. 훗날 올라주원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로빈슨은 《라이프》지에 "하킴? 하킴은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로키츠는 그 시리즈의 모든 원정 경기에서 승리했습니다. 1995년 NBA 파이널에서 로키츠는 젊은 샤킬 오닐이 이끄는 올랜도 매직을 스윕했습니다. 올라주원은 모든 경기에서 오닐보다 더 많은 득점을 올렸고, 각 경기에서 30점 이상을 기록하며 정규 시즌보다 5점 더 많은 득점을 올린 반면 오닐의 득점은 1점 감소했습니다. 올라주원은 다시 한번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는 1995년 플레이오프에서 53.1%의 야투 성공률로 경기당 33.0득점, 10.3리바운드, 2.81블록을 기록했습니다. 1994년과 마찬가지로, 올라주원은 1995년에도 로키츠의 유일한 올스타였습니다.
3.4. 우승 이후 시기 (1995-2001)
로키츠의 2년 연속 챔피언십 시대는 1996년 NBA 플레이오프에서 서부 컨퍼런스 챔피언 시애틀 슈퍼소닉스에게 2라운드에서 탈락하며 막을 내렸습니다. 마이클 조던이 1995년 3월 18개월간의 공백기에서 돌아온 후, 그의 시카고 불스는 다음 3년(1996-98) 동안 리그를 지배했습니다. 불스와 로키츠는 NBA 플레이오프에서 한 번도 맞붙지 않았습니다.
로키츠는 1996-97 NBA 시즌에 찰스 바클리를 영입하며 57승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시즌을 21승 2패로 시작했지만,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유타 재즈에게 2승 4패로 패했습니다. 1995-96 시즌 26.9득점, 1996-97 시즌 23.2득점을 기록했던 올라주원의 득점력은 1997-98 시즌에 16.4점으로 하락했습니다. 1998년 로키츠가 재즈에게 1라운드에서 1승 4패로 패한 후, 드렉슬러는 은퇴했습니다. 1998-99 시즌, 로키츠는 베테랑 올스타 스코티 피펜을 영입했고, 락아웃으로 단축된 정규 시즌에서 31승 19패를 기록했습니다. 올라주원의 득점력은 경기당 18.9점으로 다시 상승했으며, 그는 개인 통산 12번째이자 마지막 올NBA 팀에 선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에도 1라운드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게 패했습니다. 시즌 후, 피펜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3.5. 토론토 랩터스와 은퇴 (2001-2002)
휴스턴은 젊은 가드 커티노 모블리와 2000년 NBA 공동 올해의 신인 스티브 프랜시스를 영입하며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2001년 8월 2일, 올라주원은 로키츠의 1300.00 만 USD 계약 제안을 거절한 후 토론토 랩터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이 트레이드는 드래프트 픽(휴스턴은 이 픽으로 2002년 NBA 드래프트에서 15순위로 보슈탸н 나х바르를 지명)과 맞바꾼 것이었으며, 올라주원은 3년 동안 1800.00 만 USD를 받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랩터스에서의 첫 경기에서 그는 매직을 상대로 22분 만에 11득점을 기록했습니다. 올라주원은 이 시즌에 경기당 7.1득점, 6.0리바운드로 커리어 최저치를 기록했으며, 등 부상으로 인해 2002년 가을에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올라주원은 은퇴 당시 총 3,830개의 블록슛으로 리그 역대 최다 블록슛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1973-74 NBA 시즌부터 블록슛이 공식 통계로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의 기록입니다. 은퇴 직후 그의 등번호 34번은 로키츠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그의 NBA 커리어 동안 올라주원은 1,238경기에서 51%의 야투 성공률로 경기당 21.8득점, 11.1리바운드, 2.5어시스트, 3.1블록을 기록했습니다.
4. 플레이 스타일과 시그니처 무브
마이클 조던은 올라주원에 대해 "만약 내가 역대 최고의 팀을 위한 센터를 선택해야 한다면, 올라주원을 선택할 것이다. 샤크, 패트릭 유잉, 윌트 체임벌린 등 많은 선수가 제외될 것이다. 내가 올라주원을 선택하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는 그 포지션에서 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득점, 리바운드, 블록슛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가 NBA 역사상 스틸 부문에서 상위 7위에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항상 코트에서 훌륭한 결정을 내렸다. 경기의 모든 면에서 나는 그에게 점수를 줘야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올라주원은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매우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수비에서는 그의 희귀한 민첩성과 힘의 조합 덕분에 다양한 유형의 선수들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샷 블록 능력과 프론트코트 선수로서는 독특한 스틸 능력으로 유명했습니다. 올라주원은 NBA 역사상 한 시즌에 200개 이상의 블록과 200개 이상의 스틸을 동시에 기록한 유일한 선수입니다. 그는 커리어 동안 경기당 평균 3.09블록과 1.75스틸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역대 스틸 부문 상위 10위 안에 드는 유일한 센터입니다. 올라주원은 또한 경기당 평균 11.1리바운드를 기록한 뛰어난 리바운더였습니다. 그는 1989년과 1990년 두 차례 NBA 리바운드 부문 리그 선두를 차지했습니다。그는 두 차례 NBA 올해의 수비수로 선정되었고, 다섯 차례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22년, NBA는 올해의 수비수 상을 "하킴 올라주원 트로피"로 개명했습니다.
공격에서는 올라주원이 림 주변에서의 정확한 슛 터치와 낮은 포스트에서의 민첩한 풋워크로 유명했습니다. 공을 잡으면 하킴은 다양한 페이크와 스핀 무브를 선보였는데, 이는 그의 상징적인 "드림 셰이크"에서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커리어 동안 경기당 평균 21.8득점을 기록한 다득점 선수였으며, 경기당 평균 3.3개의 공격 리바운드를 기록한 평균 이상의 공격 리바운더였습니다. 또한 올라주원은 주변 선수처럼 "페이스업" 상황에서 득점할 수 있는 숙련된 드리블러였습니다. 그는 1973-74 시즌부터 블록슛과 스틸이 통계로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 NBA에서 쿼드러플 더블을 기록한 단 네 명의 선수 중 한 명입니다. 2022년, NBA 창립 75주년을 기념하여 《디 애슬레틱》은 역대 최고의 선수 75명을 선정했으며, 올라주원을 NBA 역사상 11번째로 위대한 선수로 지명했습니다.
4.1. 공격 기술: "드림 셰이크"
피트 뉴웰은 "지금까지 '빅맨'에게서 본 최고의 풋워크"라고 평가했습니다.
올라주원은 빅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뛰어난 공격형 선수로 자리매김했으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일련의 페이크와 스핀 무브를 완성했습니다. 이는 "드림 셰이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경이로운 속도와 파워로 실행되는 이 동작들은 여전히 "빅맨" 풋워크의 정점으로 여겨집니다. 샤킬 오닐은 "하킴은 다섯 가지 움직임과 네 가지 카운터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에게 20가지 움직임을 제공한다"고 말했습니다. 올라주원 자신은 이 기술의 기원을 어린 시절 축구 선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드림 셰이크는 사실 제가 농구에 적용한 축구 동작 중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중 하나를 달성했습니다. 첫째, 상대를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하여 반대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 둘째, 상대를 얼어붙게 하여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것; 셋째, 상대를 흔들어 슛을 방해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 드림 셰이크는 카림 압둘 자바의 스카이 훅처럼 막기 매우 어려운 기술이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드림 셰이크 중 하나는 1995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2차전 스퍼스와의 경기에서 일어났습니다. 데이비드 로빈슨이 자신을 막고 있을 때, 올라주원은 크로스오버를 한 후 골대 쪽으로 돌파하며 레이업을 페이크했습니다. 뛰어난 수비수였던 로빈슨은 올라주원을 따라붙어 제자리에 버텼습니다. 올라주원은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점프슛을 페이크했습니다. 1995년 NBA MVP로 선정된 로빈슨은 페이크에 속아 슛을 블록하기 위해 점프했습니다. 로빈슨이 공중에 떠 있는 동안, 올라주원은 업-앤-언더 무브를 사용하여 쉽게 레이업을 성공시켰습니다.
올라주원은 농구를 과학이라고 언급하며, 그의 시그니처 무브를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포인트 가드가 저에게 공을 던지면, 저는 공을 받기 위해 점프합니다. 하지만 이 점프는 두 번째 움직임, 즉 베이스라인 움직임을 위한 준비 동작입니다. 저는 이것을 '터치 랜딩'이라고 부릅니다. 수비수는 제가 점프했기 때문에 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지만, 저는 착지하기 전에 이미 움직여 버립니다. 수비수들은 '와, 그가 빠르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제가 어디로 갈지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는 민첩성을 바탕으로 방어하지만, 점프는 그를 속이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내려오기 전에, 저는 움직임을 시작합니다. 점프할 때, 착지하면서 몸을 돌립니다. 붐! 수비수는 반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저를 수비하기 위해 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 그 민첩성을 보여줬을 때, 그는 그 민첩성에 반응해야 하므로, 베이스라인을 페이크하고 점프 훅으로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드림 셰이크의 일부입니다. 드림 셰이크는 드리블하고 점프하는 것입니다. 이제 피벗 발이 없습니다. 드리블할 때 저는 그것을 움직여서 여기로 오면 점프합니다. 점프함으로써, 이제 저는 피벗 발이 없습니다. 저는 드리블을 하여 이제 어떤 발이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얼어붙고, 제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모릅니다. 그것이 셰이크입니다. 그를 혼란스럽게 하고 점프 스톱을 하면 이제 피벗 발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제가 어디로 돌아서고 언제 돌아서는지 모릅니다."
5. 국가대표팀 경력
1980년, 미국에 오기 전 올라주원은 전아프리카 게임에서 나이지리아 주니어 대표팀으로 뛰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가 처음 미국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에서 뛰려고 했을 때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FIBA 규정은 선수가 국제 대회에서 두 국가 이상을 대표하는 것을 금지하며, 국적 변경 시 3년의 대기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올라주원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아 당시 "드림팀"에 선정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올라주원은 1993년 4월 2일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FIBA의 예외 조항을 받아 드림팀 III에서 뛸 수 있었습니다. 이 팀은 애틀랜타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대회 기간 동안 그는 샤킬 오닐과 데이비드 로빈슨과 함께 출전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8경기 중 7경기에 출전하여 2경기에 선발로 나섰습니다. 7경기에서 평균 5득점, 3.1리바운드, 8어시스트, 6스틸을 기록했습니다.
6. 개인 생활
올라주원은 1996년 8월 8일 휴스턴에서 달라 아사피와 결혼했습니다.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으며, 올라주원에게는 대학 시절 리타 스펜서와의 이전 관계에서 얻은 딸 아비 올라주원도 있습니다. 아비솔라는 맥도날드 올아메리칸 게임에서 서부 여자팀 대표로 뛰었으며, WNBA에서 활약했습니다.
올라주원은 영어 외에도 프랑스어, 아랍어, 요루바어를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그는 1996년 피터 노블러와 공동 집필한 자서전 《리빙 더 드림(Living the Dream)》을 발간했습니다. 18년간의 NBA 경력 동안 올라주원은 급여로 1.10 억 USD 이상을 벌었습니다.
올라주원은 루키 시즌 이후 에토닉 슈즈와 시그니처 라인인 '드림 슈즈'에 대해 5년간 250.00 만 USD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후 그는 LA 기어와 신발 후원 계약을 맺었고, 스팔딩의 운동화 라인 모델이 되어 다양한 매장(예: 페이리스 슈소스)에서 34.99 USD에 판매되는 운동화를 홍보했습니다. 이는 그가 나이키, 리복, 아디다스 또는 기타 유명 소매 브랜드의 운동화를 후원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유명 프로 스포츠 선수 중 한 명이 되게 했습니다. 올라주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난한 워킹맘이 120 USD짜리 나이키나 리복을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상점에서나 다른 아이들에게서 이 신발을 훔칩니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7. 은퇴 이후의 삶
올라주원은 휴스턴에서 20시즌 연속 활약했습니다. 먼저 휴스턴 대학교 쿠거스에서 대학 선수로, 그리고 휴스턴 로키츠에서 프로 선수로 뛰었습니다. 그는 휴스턴의 상징이자 도시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민 중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올라주원은 휴스턴 부동산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추정 수익은 1.00 억 USD를 초과합니다. 그는 샤리아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이자를 지불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현금으로만 부동산을 매입합니다. 올라주원은 이슬람 연구를 위해 가족과 함께 이주한 요르단과 휴스턴 근처의 목장을 오가며 시간을 보냅니다.
2006년 NBA 오프시즌에 올라주원은 첫 "빅맨 캠프"를 열어 젊은 프론트코트 선수들에게 포스트 플레이의 정교한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올라주원은 팀을 감독하는 데는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지만, 젊은 선수들을 돕는 것을 통해 농구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리그가 가드 위주로 변하고 빅맨의 중요성이 감소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올라주원은 "덩치만 큰 빅맨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속도와 민첩성을 갖춘 선수라면 그렇지 않다. 빅맨이 올바르게 플레이한다면 항상 빅맨의 게임이 될 것이다. 수비에서 빅맨은 리바운드하고 슛을 블록할 수 있다. 공격에서는 더블팀을 유도하고 기회를 창출한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더할 수 있고, 팀 전체를 더 쉽게 만들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이 캠프를 무료로 운영합니다. 올라주원은 에메카 오카포, 야오 밍, 코비 브라이언트, 드와이트 하워드, 르브론 제임스, 외메르 아시크, 도나타스 모티유나스,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카멜로 앤서니, 자베일 맥기, 케네스 패리드 등 여러 NBA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습니다. 2016년 4월 스포팅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올라주원은 코비 브라이언트가 자신의 최고의 로우-포스트 제자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많은 선수들과 함께 일했지만,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한 선수는 코비 브라이언트였다. 그가 플레이하는 것을 보면, 그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포스트로 내려가 완벽하게 실행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올라주원은 2008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2008년 4월 10일, 로키츠는 도요타 센터 외부에 그를 기리는 조각상을 공개했습니다. 올라주원은 2013년 NBA 드래프트에 참석하여 은퇴하는 데이비드 스턴 커미셔너가 1라운드 마지막 픽을 발표할 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올라주원은 1984년 스턴이 처음으로 발표했던 1순위 지명자였습니다.
2015년 8월 1일, 올라주원은 NBA 아프리카 게임 2015에서 팀 아프리카를 위해 특별 출연했습니다. 그는 2016년 FIB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8. 수상 및 업적
- 2회 NBA 챔피언십 우승 (1994, 1995)
- 2회 NBA 파이널 최우수 선수상 (1994, 1995)
- 1회 NBA 최우수 선수상 (1994)
- 2회 NBA 올해의 수비수 (1993, 1994)
- 6회 올NBA 퍼스트 팀 (1987, 1988, 1989, 1993, 1994, 1997)
- 3회 올NBA 세컨드 팀 (1986, 1990, 1996)
- 3회 올NBA 서드 팀 (1991, 1995, 1999)
- 5회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1987, 1988, 1990, 1993, 1994)
- 4회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1985, 1991, 1996, 1997)
- 12회 NBA 올스타 선정
- NBA 통산 블록슛 1위 (3,830개)
- 올림픽 농구 금메달 (1996)
- NBA 50주년 기념 올타임 팀 선정 (1996)
- NBA 75주년 기념 팀 선정
- NBA 커리어 통산 득점, 리바운드, 스틸, 블록슛 부문에서 모두 역대 11위 안에 든 유일한 선수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8)
- FIBA 명예의 전당 헌액 (2016)
- 2016년 ESPN 선정 역대 NBA 선수 순위 10위
- 2018년 SLAM 매거진 선정 역대 NBA 선수 순위 12위
9. 경력 통계
9.1. NBA
9.1.1. 정규시즌
시즌 | 팀 | GP | GS | MPG | FG% | 3P% | FT% | RPG | APG | SPG | BPG | PPG |
---|---|---|---|---|---|---|---|---|---|---|---|---|
1984-85 | 휴스턴 로키츠 | 82* | 82* | 35.5 | .538 | - | .613 | 11.9 | 1.4 | 1.2 | 2.7 | 20.6 |
1985-86 | 휴스턴 | 68 | 68 | 36.3 | .526 | .000 | .645 | 11.5 | 2.0 | 2.0 | 3.4 | 23.5 |
1986-87 | 휴스턴 | 75 | 75 | 36.8 | .508 | .200 | .702 | 11.4 | 2.9 | 1.9 | 3.4 | 23.4 |
1987-88 | 휴스턴 | 79 | 79 | 35.8 | .514 | .000 | .695 | 12.1 | 2.1 | 2.1 | 2.7 | 22.8 |
1988-89 | 휴스턴 | 82* | 82* | 36.9 | .508 | .000 | .696 | 13.5* | 1.8 | 2.6 | 3.4 | 24.8 |
1989-90 | 휴스턴 | 82* | 82* | 38.1 | .501 | .167 | .713 | 14.0* | 2.9 | 2.1 | 4.6* | 24.3 |
1990-91 | 휴스턴 | 56 | 50 | 36.8 | .508 | .000 | .769 | 13.8 | 2.3 | 2.2 | 3.9* | 21.2 |
1991-92 | 휴스턴 | 70 | 69 | 37.7 | .502 | .000 | .766 | 12.1 | 2.2 | 1.8 | 4.3 | 21.6 |
1992-93 | 휴스턴 | 82 | 82* | 39.5 | .529 | .000 | .779 | 13.0 | 3.5 | 1.8 | 4.2* | 26.1 |
1993-94 | 휴스턴 | 80 | 80 | 41.0 | .528 | 0.421 | .716 | 11.9 | 3.6 | 1.6 | 3.7 | 27.3 |
1994-95 | 휴스턴 | 72 | 72 | 39.6 | .517 | .188 | .756 | 10.8 | 3.5 | 1.8 | 3.4 | 27.8 |
1995-96 | 휴스턴 | 72 | 72 | 38.8 | .514 | .214 | .724 | 10.9 | 3.6 | 1.6 | 2.9 | 26.9 |
1996-97 | 휴스턴 | 78 | 78 | 36.6 | .510 | .313 | 0.787 | 9.2 | 3.0 | 1.5 | 2.2 | 23.2 |
1997-98 | 휴스턴 | 47 | 45 | 34.7 | .483 | .000 | .755 | 9.8 | 3.0 | 1.8 | 2.0 | 16.4 |
1998-99 | 휴스턴 | 50* | 50* | 35.7 | .514 | .308 | .717 | 9.6 | 1.8 | 1.6 | 2.5 | 18.9 |
1999-2000 | 휴스턴 | 44 | 28 | 23.8 | .458 | .000 | .616 | 6.2 | 1.4 | .9 | 1.6 | 10.3 |
2000-01 | 휴스턴 | 58 | 55 | 26.6 | .498 | .000 | .621 | 7.4 | 1.2 | 1.2 | 1.5 | 11.9 |
2001-02 | 토론토 랩터스 | 61 | 37 | 22.6 | .464 | .000 | .560 | 6.0 | 1.1 | 1.2 | 1.5 | 7.1 |
커리어 | 1,238 | 1,186 | 35.7 | .512 | .202 | .712 | 11.1 | 2.5 | 1.7 | 3.1 | 21.8 | |
올스타 | 12 | 8 | 23.2 | .409 | 1.000 | .520 | 7.8 | 1.4 | 1.3 | 1.9 | 9.8 |
9.1.2. 플레이오프
시즌 | 팀 | GP | GS | MPG | FG% | 3P% | FT% | RPG | APG | SPG | BPG | PPG |
---|---|---|---|---|---|---|---|---|---|---|---|---|
1985 | 휴스턴 로키츠 | 5 | 5 | 37.4 | .477 | |||||||
.1000 | 13.0 | 1.4 | 1.4 | 2.6 | 21.2 | |||||||
1986 | 휴스턴 | 20 | 20 | 38.3 | .530 | .000 | .638 | 11.8 | 2.0 | 2.0 | 3.5 | 26.9 |
1987 | 휴스턴 | 10 | 10 | 38.9 | 0.615 | .000 | .742 | 11.3 | 2.5 | 1.3 | 4.3 | 29.2 |
1988 | 휴스턴 | 4 | 4 | 40.5 | .571 | .000 | 0.884 | 16.8 | 1.8 | 2.3 | 2.8 | 37.5 |
1989 | 휴스턴 | 4 | 4 | 40.5 | .519 | |||||||
.680 | 13.0 | 3.0 | 2.5 | 2.8 | 25.3 | |||||||
1990 | 휴스턴 | 4 | 4 | 40.3 | .443 | |||||||
.706 | 11.5 | 2.0 | 2.5 | 5.8 | 18.5 | |||||||
1991 | 휴스턴 | 3 | 3 | 43.0 | .578 | .000 | .824 | 14.7 | 2.0 | 1.3 | 2.7 | 22.0 |
1993 | 휴스턴 | 12 | 12 | 43.2 | .517 | .000 | .827 | 14.0 | 4.8 | 1.8 | 4.9 | 25.7 |
1994 | 휴스턴 | 23 | 23 | 43.0 | .519 | 0.500 | .795 | 11.0 | 4.3 | 1.7 | 4.0 | 28.9 |
1995 | 휴스턴 | 22 | 22 | 42.2 | .531 | 0.500 | .681 | 10.3 | 4.5 | 1.2 | 2.8 | 33.0 |
1996 | 휴스턴 | 8 | 8 | 41.1 | .510 | .000 | .725 | 9.1 | 3.9 | 1.9 | 2.1 | 22.4 |
1997 | 휴스턴 | 16 | 16 | 39.3 | .590 | .000 | .731 | 10.9 | 3.4 | 2.1 | 2.6 | 23.1 |
1998 | 휴스턴 | 5 | 5 | 38.0 | .394 | .000 | .727 | 10.8 | 2.4 | 1.0 | 3.2 | 20.4 |
1999 | 휴스턴 | 4 | 4 | 30.8 | .426 | |||||||
.875 | 7.3 | 0.5 | 1.3 | 0.8 | 13.3 | |||||||
2002 | 토론토 랩터스 | 5 | 0 | 17.2 | .545 | |||||||
.667 | 3.8 | 0.4 | 1.4 | 0.8 | 5.6 | |||||||
커리어 | 145 | 140 | 39.6 | .528 | .222 | .719 | 11.2 | 3.2 | 1.7 | 3.3 | 25.9 |
10. 함께 보기
- 전미 농구 협회
- 휴스턴 로키츠
- 토론토 랩터스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 FIBA 명예의 전당
- 클라이드 드렉슬러
- 랄프 샘슨
- 패트릭 유잉
- 데이비드 로빈슨 (농구)
- 샤킬 오닐
- 이스람
- 라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