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배경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1906년 12월 19일,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현의 카미얀스케(Кам'янське우크라이나어)에서 금속 공장 노동자인 일리야 야코블레비치 브레즈네프와 나탈리야 데니소브나 마잘로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쿠르스크 근처의 브레즈네보 출신이었고, 어머니의 부모님은 예나키예베 출신이었다.
1.1. 유년기 및 교육
브레즈네프는 출생 당시 일부 문서(예: 여권)에는 우크라이나인으로, 다른 문서에는 러시아인으로 기재되었다. 그는 1979년에 출판된 회고록 《기억》에서 자신을 "국적으로는 러시아인이며, 프롤레타리아이자 세습 금속공"이라고 명시하며 스스로를 러시아인으로 여겼음을 밝혔다. 1921년 가족과 함께 쿠르스크로 이사한 후 15세부터 그곳의 제철소에서 일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그는 처음에는 토지 관리, 나중에는 야금학 분야에서 기술 교육을 받았다. 1935년 카미얀스케 야금 기술 학교를 졸업하고 우크라이나 동부의 철강 산업 분야에서 야금 엔지니어로 일했다.
1.2. 초기 활동과 정치 입문
브레즈네프는 1923년 공산당 청년 조직인 콤소몰에 가입했고, 1929년(다른 기록에서는 1931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의무 병역을 마쳤으며, 전차 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전차 공장에서 정치 위원으로 복무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브레즈네프는 정부와 당의 공석을 활용하여 빠르게 승진한 많은 간부 중 한 명이었다. 1936년 드니프로제르진스크 야금 기술 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이후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로 전근되었다. 1937년 5월 카멘스코예 시 소비에트 부의장이 되었으며, 1938년 5월 니키타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장악한 후에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지역 공산당의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에는 이 도시의 방위 산업을 담당하는 지역 당 서기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후에 권력 상승에 큰 도움이 될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마피아"로 알려진 지지자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2.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2.1. 군사 경력과 정치 위원 활동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브레즈네프는 대부분의 중간급 당 관료들처럼 즉시 징집되었다. 그는 8월 26일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가 독일에 함락되기 전에 이 도시의 산업 시설들을 소개하는 작업을 지휘했으며, 이후 정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0월에는 남부 전선의 정치 행정 부국장으로 임명되어 여단 정치 위원(대령) 계급을 받았다.
독일이 1942년 우크라이나를 점령했을 때, 브레즈네프는 캅카스 지역으로 파견되어 자캅카스 전선의 정치 행정 부국장이 되었다. 1943년 4월에는 제18군의 정치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 말, 제18군은 붉은 군대가 주도권을 되찾고 우크라이나를 거쳐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일부가 되었다. 당시 전선군의 고위 정치 위원은 전부터 브레즈네프의 경력을 지원해온 그의 후원자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브레즈네프는 1931년 당에 입당한 직후 흐루쇼프를 만났고, 그의 계급이 계속 오르면서 흐루쇼프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날 무렵, 브레즈네프는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한 후 프라하에 입성한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최고 정치 위원이었다.
브레즈네프는 1946년 8월 소장 계급으로 소련군을 떠났다. 그는 전쟁 내내 군사 지휘관이 아닌 정치 위원으로서 활약했다.
3. 권력 장악 과정
전후 브레즈네프는 소련 정치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여 최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3.1. 전후 경력과 중앙위원회 승진
브레즈네프는 1946년 8월 소장 계급으로 소련군을 떠난 후, 1946년 5월 자포리자 지역 당 위원회의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그의 부관은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마피아의 중요 인물 중 한 명인 안드레이 키릴렌코였다. 우크라이나의 재건 프로젝트에 참여한 후, 그는 1948년 1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로 돌아와 지역 제1서기가 되었다. 1950년 브레즈네프는 소련 최고 입법 기관인 소비에트 최고회의의 대의원이 되었다. 그해 7월 그는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파견되어 몰도바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으며, 집단 농업 도입을 완료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천 명의 루마니아계 민족 주민들을 몰도바에서 다른 소련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집단농장화를 강제했다. 당시 몰도바에서는 후에 그의 충실한 인물이 될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선동선전부장을 맡고 있었다.
1952년, 브레즈네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만나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간부회(구 정치국) 후보 위원과 소련 공산당 서기국의 서기 중 한 명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후, 브레즈네프는 군 및 해군 정치 총국 제1부국장으로 강등되었다.
3.2. 흐루쇼프 시대의 성장과 핵심 인물 부상
브레즈네프의 후원자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되었고, 흐루쇼프의 라이벌인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편에 서서 말렌코프에 맞섰다. 1954년 2월 그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당의 제2서기로 임명되었고, 흐루쇼프가 말렌코프에게 승리한 후인 5월에는 서기장으로 승진했다. 표면적으로 그의 임무는 새로 개척된 땅을 농업적으로 생산성 있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를 포함한 소련의 미사일 및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관여했다. 초기에 성공적이었던 처녀지 개간 운동은 곧 비생산적으로 변했고 늘어나는 소련의 식량 위기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이로 인해 브레즈네프는 1956년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1956년 2월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임명되어 국방 산업, 소련 우주 프로그램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포함), 중공업, 수도 건설 등을 총괄했다. 그는 이제 흐루쇼프의 측근 중 고위층이 되었고, 1957년 6월에는 반당집단이라 불리는 당 지도부 내 말렌코프의 스탈린주의 구세력과의 투쟁에서 흐루쇼프를 지지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패배 후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의 정식 위원이 되었다. 1960년 5월 그는 소비에트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승진하여 명목상 국가 원수가 되었지만, 실제 권력은 소련 공산당 제1서기와 총리인 흐루쇼프에게 있었다. 그는 이 직책을 통해 해외 순방이 가능해졌고, 고가의 서방 의류와 자동차에 대한 취미를 키웠는데, 이는 나중에 그에 대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3.3. 흐루쇼프 실각과 집권
흐루쇼프의 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1962년경까지는 확고했지만, 그가 나이가 들면서 점차 변덕스러워졌고 그의 리더십은 동료 지도자들의 신뢰를 약화시켰다. 소련의 심각한 경제 문제도 흐루쇼프의 리더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켰다. 브레즈네프는 겉으로는 흐루쇼프에게 충성했지만, 1963년 흐루쇼프를 권력에서 제거하려는 음모에 가담했으며, 주요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같은 해 1963년, 브레즈네프는 또 다른 흐루쇼프의 총애를 받던 인물인 프로르 코즐로프의 뒤를 이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고, 이는 그를 흐루쇼프의 유력한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1964년 흐루쇼프는 그를 제2서기, 즉 당 부대표로 임명했다.

1964년 10월 스칸디나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돌아온 흐루쇼프는 음모를 알지 못한 채 흑해의 피춘다 리조트로 휴가를 떠났다. 돌아오자 그의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관계자들은 그의 업무에 대해 축하했다.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흐루쇼프를 방문하여 현재 상황에 대해 너무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힌트를 주었다. KGB 수장인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트니는 흐루쇼프에게 자신의 지도부에 대한 음모가 있다면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이 음모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흐루쇼프가 해고했던 니콜라이 이그나토프는 여러 중앙위원회 위원들에게 은밀히 의견을 구했다. 몇 차례의 헛수고 끝에, 동료 공모자인 미하일 수슬로프는 10월 12일 흐루쇼프에게 전화하여 소련 농업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내 흐루쇼프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했고, 미코얀에게 "만약 나에 대한 문제라면, 나는 싸우지 않겠다"고 말했다. 미코얀을 중심으로 한 소수파는 흐루쇼프를 제1서기 직책에서 해임하되 각료회의 의장직은 유지하기를 원했지만, 브레즈네프를 중심으로 한 다수파는 그를 아예 모든 정치 활동에서 배제하기를 원했다.
브레즈네프와 니콜라이 포드고르니는 중앙위원회에 흐루쇼프의 경제적 실패를 비난하고, 그를 자율주의와 부도덕한 행동으로 비난했다. 브레즈네프의 동맹자들의 영향으로 정치국 위원들은 10월 14일 흐루쇼프를 해임하기로 투표했다. 일부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그에게 어떤 종류의 처벌을 가하기를 원했지만, 이미 서기장 직책을 보장받은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를 더 이상 처벌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브레즈네프는 같은 날 제1서기로 임명되었지만, 당시에는 다른 지도자가 임명될 때까지 "가게를 지키는" 임시 지도자로 여겨졌다. 알렉세이 코시긴은 정부수반으로, 미코얀은 국가원수로 유임되었다. 브레즈네프와 그의 동료들은 스탈린 사망 후 채택된 일반적인 당 노선을 지지했지만, 흐루쇼프의 개혁이 소련의 안정성을 많이 훼손했다고 느꼈다. 흐루쇼프가 해임된 한 가지 이유는 그가 다른 당원들을 계속해서 무시하고, 공모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의 집단적 이상을 경멸했기" 때문이었다. 소련 신문 《프라우다》는 집단지도체제, 과학적 계획, 전문가 상담, 조직적 규율, 그리고 제도의 종식과 같은 새로운 지속적인 주제들을 다루었다. 흐루쇼프가 공적인 장에서 사라졌을 때, 대부분의 소련 시민들, 심지어 인텔리겐치아들까지도 앞으로 몇 년간 소련 사회의 안정화, 꾸준한 발전, 그리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기대했기 때문에 대중적인 소란은 없었다.
정치학자 조지 W. 브레슬라우어는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를 지도자로서 비교했다. 그는 그들이 각자의 개성과 여론의 상태에 따라 합법적인 권위를 구축하기 위해 다른 길을 택했다고 주장했다. 흐루쇼프는 정부 시스템을 분권화하고 완전히 종속되었던 지방 지도부에 권한을 부여하는 데 노력했지만, 브레즈네프는 권한을 중앙집권화하려고 노력했으며,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의 다른 구성원들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
3.3.1. 권력 공고화

흐루쇼프를 대신하여 당의 제1서기가 되자 브레즈네프는 명목상 소련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초기에는 국가 총리인 알렉세이 코시긴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자 나중에 최고평의회 상임간부회 의장이 된 니콜라이 포드고르니와 함께 비공식적인 트로이카 체제의 일원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었다. 흐루쇼프가 당 지도력과 소련 정부 지도력을 결합하면서 나머지 정치국을 무시했기 때문에, 1964년 10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어떤 한 개인도 서기장과 총리 직책을 동시에 겸임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체제는 브레즈네프가 1970년대 후반에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브레즈네프는 먼저 전 KGB 의장이자 당시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이었던 알렉산드르 셸레핀의 야망에 맞서야 했다. 1965년 초 셸레핀은 자신의 권력 장악 시도의 일환으로 소련 내에서 "복종과 질서"의 회복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그는 국가 및 당 기관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이용하여 정권 내에서 지지를 얻었다. 브레즈네프는 셸레핀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임박한 위협임을 인지하고, 셸레핀을 당-국가 통제 위원회에서 제거하기 위해 소련의 집단 지도부를 동원했고, 1965년 12월 6일에는 해당 기구를 완전히 해산시켰다.
1965년 말까지 브레즈네프는 포드고르니를 서기국에서 해임시켜 당 기구 내에서 포드고르니가 지지를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크게 축소시켰다. 그 후 몇 년 동안, 포드고르니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키워낸 측근들이 중앙위원회에서 해임되면서 그의 지지자 네트워크는 점차 약화되었다. 1977년까지 브레즈네프는 포드고르니를 국가원수 자리에서 교체하고 정치국에서 해임할 만큼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1965년 셸레핀과 포드고르니를 자신의 지도력에 대한 위협에서 배제한 후, 브레즈네프는 남은 정치적 라이벌인 알렉세이 코시긴에게 관심을 돌렸다. 1960년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처음에는 코시긴이 정치국 내에서 소련 외교 정책의 지배적인 리더로 인식했다. 같은 시기에 코시긴은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경제 행정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5년에 그가 시행한 몇 가지 경제 개혁들(당내에서 총체적으로 "코시긴 개혁"으로 알려짐) 이후 그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이는 프라하의 봄 (소련 모델과의 급격한 단절로 인해 1968년 무력 진압됨)과 시기적으로 겹치면서, 당의 구세력 사이에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브레즈네프의 소련 지도부 내 입지를 강화시켰다. 1969년, 브레즈네프는 제2서기 미하일 수슬로프 및 다른 당 관료들과의 충돌 이후 그의 권한을 더욱 확대했으며, 이후 그들은 정치국 내에서 브레즈네프의 우위를 다시는 도전하지 않았다.
브레즈네프는 소련 권력 구조 내에서 정치에 능숙했다. 그는 팀 플레이어였고, 결코 경솔하거나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흐루쇼프와는 달리, 그는 동료들과 충분한 협의 없이 결정을 내리지 않았고, 항상 그들의 의견을 들을 용의가 있었다. 1970년대 초, 브레즈네프는 국내적 입지를 공고히 했다. 1977년, 그는 포드고르니의 은퇴를 강요하고 다시 소비에트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의장이 되어 이 직책을 행정 대통령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코시긴은 1980년 사망 직전까지 총리직을 유지했지만(후임은 니콜라이 티호노프), 브레즈네프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의 지배적인 인물이었다.
4. 최고 지도자 시기 (1964-1982)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최고 지도자로 재임했던 1964년부터 1982년까지의 주요 국내외 정책과 업적은 다음과 같다.
4.1. 국내 정책
브레즈네프 시대의 주요 국내 정책과 그가 소련 사회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4.1.1. 이념 발전과 '발전된 사회주의'
브레즈네프는 '발전된 사회주의'를 소련식 사회주의로 정의했으며, 그는 소련이 사회주의를 성공적으로 건설했고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전환 단계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브레즈네프는 전국 전력화, 생산에 원자력 사용, 컴퓨터 계획, 고도로 기계화된 농업 등 소련의 첨단 기술 발전을 강조했다. 그는 국가의 고도로 발전된 생산력 덕분에 소련 내 모든 사회 계층이 그 어느 때보다 서로에게 더 가까워졌다고 믿었다. 따라서, 브레즈네프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인민 정부를 향해 나아갔다. 브레즈네프는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국적 및 물질적 조건에 관계없이 소련 모델의 사회주의 발전과 사회 변혁을 겪을 것이라고 믿었다.
4.1.2. 정치적 억압과 문화 통제

브레즈네프의 안정화 정책에는 흐루쇼프의 자유화 개혁 종식과 문화적 자유에 대한 탄압이 포함되었다. 흐루쇼프 시대 동안 브레즈네프는 스탈린의 자의적인 통치에 대한 지도자의 비난, 스탈린 숙청의 많은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 그리고 소련 지식인 및 문화 정책의 신중한 자유화를 지지했다. 그러나 소련의 지도자가 되자마자 그는 이러한 과정을 되돌리기 시작했고, 점차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 1965년 5월 대독 승전 20주년 기념 연설에서 브레즈네프는 스탈린을 처음으로 긍정적으로 언급했으며, 1966년 4월 8일에는 제1서기 직함을 스탈린의 직함이었던 서기장으로 개칭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소련 전역에는 약 5,000명의 정치범과 종교범이 있었고, 이들은 비참한 환경에서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소련 국가에 의해 정신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겨져 소련 전역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브레즈네프 통치 하에 KGB는 대부분의 반정부 조직에 침투하여 그나 그의 권력 기반에 대한 반대가 거의 없도록 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는 스탈린 시대에 볼 수 있었던 전면적인 폭력은 삼갔다. 1966년 작가 율리 다니엘과 안드레이 시냡스키의 재판은 스탈린 통치 이후 최초의 공개 재판으로, 억압적인 문화 정책으로의 회귀를 알렸다. 유리 안드로포프 휘하의 국가보안위원회(KGB)는 스탈린 시대에 누렸던 권한 중 일부를 되찾았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숙청은 재현되지 않았으며, 스탈린의 유산은 소련 인텔리겐치아 사이에서 여전히 불신을 받았다. 또한, 정치국 위원의 80% 이상이 엔지니어 출신으로 구성된 기술관료 체제를 구축했다.
4.1.3. 경제 정책과 '정체 시대'
기간 | 연간 GNP 성장률 (CIA 추정) | 연간 NMP 성장률 (그리고리 카닌 추정) | 연간 NMP 성장률 (소련 공식 통계) |
---|---|---|---|
1960-1965 | 4.8% | 4.4% | 6.5% |
1965-1970 | 4.9% | 4.1% | 7.7% |
1970-1975 | 3.0% | 3.2% | 5.7% |
1975-1980 | 1.9% | 1.0% | 4.2% |
1980-1985 | 1.8% | 0.6% | 3.5% |
1960년부터 1970년까지 소련의 농업 생산량은 매년 3%씩 증가했다. 산업 또한 개선되어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년) 기간 동안 공장 및 광산 생산량은 1960년 대비 138% 증가했다. 정치국은 공격적으로 반개혁주의적이었지만, 코시긴은 브레즈네프와 정치국 모두에게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개혁 공산주의 지도자 야노시 카다르의 신경제 메커니즘 (New Economic Mechanism, NEM)을 용인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고, 이는 소매 시장의 제한적인 설립을 허용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는 1970년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지도 하에 다른 접근 방식이 채택되었다. 그는 정부가 중공업의 급속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서방 차관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소련은 값싼 석유 및 가스 수출 형태로 동구권에 대한 막대한 보조금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승인했다. 소련은 모든 종류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68년 프라하의 봄에 대한 대응으로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있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흐루쇼프의 지방분권 실험이 폐기되었다. 1966년, 집권 2년 만에 브레즈네프는 소련의 지역 경제를 관리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인민경제회의를 폐지했다.
제9차 5개년 계획은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으로 산업 소비재가 산업 생산재보다 더 많이 생산되었다. 시계, 가구, 라디오와 같은 소비재가 풍부하게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여전히 국가 투자의 대부분을 산업 생산재 생산에 할애했다. 이러한 결과는 정부 내 대부분의 고위 당 관료들에게 소련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로 여겨지지 않았다. 1975년에는 소비재가 산업 생산재보다 9% 더 느리게 확장되고 있었다. 브레즈네프가 소련 소비자 만족과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위한 투자 전환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책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1928년부터 1973년까지 소련 경제는 미국과 서유럽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서부 소련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지만, 서방 원조와 1941~1945년 소련의 간첩 활동은 러시아가 선진 기술, 특히 핵 기술, 무선 통신, 농업, 중공업 개발에서 서방 경제를 앞지르게 했다.) 1970년대 초까지 소련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업 생산 능력을 가졌고,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철강, 석유, 선철, 시멘트, 트랙터를 생산했다. 1973년 이전에는 소련 경제가 미국 경제보다 빠르게 성장했으며 (아주 작은 차이였지만), 서유럽 경제와도 꾸준한 속도를 유지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소련 경제는 서유럽의 1인당 생산량의 절반, 미국의 3분의 1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73년부터 서방을 따라잡는 과정이 끝나고 소련은 서방 경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컴퓨터 기술에서 점차 뒤처지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이미 '정체 시대'가 분명해졌다.
정체 시대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만든 용어로, 지속적인 냉전의 군비 경쟁, 서방 사회의 변화를 무시하고 국제 무역에 참여하기로 한 소련의 결정, 소련 사회의 권위주의 심화, 아프가니스탄 침공, 역동적이지 못한 노인정치로의 관료제 변모, 경제 개혁의 부재, 만연한 정치적 부패, 그리고 국가 내 다른 구조적 문제들을 포함한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국내적으로는 미숙련 노동자들의 증가하는 요구, 노동력 부족, 생산성 및 노동 규율 저하로 인해 사회적 정체가 심화되었다. 브레즈네프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코시긴을 통해 경제를 개혁하려고 "산발적으로" 시도했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러한 개혁 중 하나는 1965년에 코시긴이 시작한 경제 개혁이었지만, 그 기원은 흐루쇼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개혁은 결국 중앙위원회에 의해 취소되었지만, 중앙위원회는 경제 문제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소련의 지도자가 된 후 고르바초프는 브레즈네프 통치 하의 경제를 "사회주의의 최하 단계"로 묘사했다.
CIA의 보고에 따르면, 소련 경제는 1970년대에 미국 GNP의 57%에 도달하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1975년경부터 경제 성장은 둔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중공업과 군사비 지출을 소비재보다 우선시하는 정권의 지속적인 정책 때문이었다. 또한, 소련의 농업은 도시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고, "성숙한 사회주의"의 결실로 정부가 약속했던 생활 수준 향상을 제공할 수 없었으며, 이는 산업 생산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GNP 성장률은 연간 1~2%로 둔화되었다. 1970년대 GNP 성장률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수준에서 감소하면서, 서유럽과 미국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결국 정체는 미국이 소련보다 연간 평균 1% 더 빠르게 성장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소련 경제의 정체는 서방과의 기술 격차가 더욱 확대되면서 심화되었다. 중앙 집중식 계획 시스템의 번거로운 절차로 인해 소련 산업은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혁신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컴퓨터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소련 컴퓨터 산업의 주변기기 및 디지털 용량에 대한 통일된 표준 부족에 대응하여, 브레즈네프 정권은 모든 독립적인 컴퓨터 개발을 중단하고 모든 미래 모델을 IBM 시스템/360을 기반으로 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IBM/360 시스템을 채택한 후에도 소련은 충분한 플랫폼을 구축하지 못했으며, 디자인 개선도 이루지 못했다. 기술이 서방에 계속 뒤처지면서 소련은 서방 디자인을 불법 복제하는 데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코시긴의 다섯 번째 정부가 추진한 마지막 중요한 개혁이자, 일부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이전 시대의 마지막 개혁이라고 여기는 것은 중앙위원회와 각료회의의 공동 결정으로 "생산 효율성 향상 및 작업 품질 개선을 위한 경제 메커니즘의 계획 개선 및 효과 강화"라는 제목의 1979년 개혁이었다. 이 개혁은 1965년 개혁과는 대조적으로, 부처의 의무와 책임을 강화하여 중앙 정부의 경제 개입을 늘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1980년 코시긴의 사망과 후임자인 니콜라이 티호노프의 경제에 대한 보수적인 접근 방식 때문에 이 개혁은 거의 실행되지 못했다.
소련의 제11차 5개년 계획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성장률은 5%에서 4%로 변화했다. 이전의 제10차 5개년 계획에서는 6.1% 성장을 목표로 했지만 달성하지 못했다. 브레즈네프는 서유럽 및 아랍 세계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 붕괴를 연기할 수 있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도 소련은 중공업 부문에서 미국을 능가하는 생산량을 기록했다. 브레즈네프 통치의 또 다른 극적인 결과는 일부 동구권 국가들이 소련보다 경제적으로 더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브레즈네프는 서구의 고가 자동차(영국제 롤스로이스, 서독제 메르세데스-벤츠 600, 프랑스제 시트로엥 SM, 미국제 링컨 컨티넨탈 등)와 서양 의류를 선호하는 취미가 있었고, 그의 가족은 스캔들로 끊임없이 시달렸다. 딸 갈리나 브레즈네바의 사교계 활동과 화려한 사생활은 소문이 무성했고, 갈리나의 남편이자 제1내무차관이었던 유리 추르바노프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목화 생산 계획과 관련하여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샤라프 라시도프와 공모하여 통계 데이터 위조, 뇌물 수수, 부정 축재에 연루된 "우즈베크 목화 스캔들"에 휘말렸다. 아들 유리 브레즈네프도 횡령 혐의로 KGB의 조사를 받았다. 이러한 브레즈네프 일가를 둘러싼 스캔들은 측근이자 이념 담당 서기였던 미하일 수슬로프가 오랜 세월 동안 은폐했으나, 1982년 1월 수슬로프가 사망하자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고, 수슬로프의 후임으로 이념 담당 (제2서기)을 맡았던 유리 안드로포프는 이를 간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브레즈네프 사후 그의 친척과 유족들을 부패 혐의로 체포하고 단속했다.
4.1.4. 농업 정책

브레즈네프의 농업 정책은 집단 농장의 전통적인 조직 방식을 강화하고, 중앙에서 생산 할당량을 강제했다. 흐루쇼프의 농장 통합 정책은 브레즈네프에 의해 계속되었는데, 이는 그가 흐루쇼프와 마찬가지로 더 큰 콜호스가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브레즈네프는 농업에 대한 국가 투자를 늘릴 것을 추진했으며, 1970년대에는 모든 국가 투자의 27%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수치에는 농업 장비 투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1981년에만 330.00 억 KRW가 농업에 투자되었다.
1980년 농업 생산량은 1966년에서 1970년 평균 생산량보다 21% 높았다. 곡물 생산량은 18% 증가했다. 이러한 개선된 결과는 고무적이지 않았다. 소련에서는 농업 생산량을 평가하는 기준이 곡물 수확량이었다. 흐루쇼프 시대에 시작된 곡물 수입은 사실상 소련 기준으로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다. 브레즈네프가 미국과의 상업 무역 협정 체결에 어려움을 겪자, 그는 아르헨티나와 같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소련의 국내 사료 작물 생산이 심각하게 부족했기 때문에 무역은 필수적이었다. 또 다른 어려움을 겪는 부문은 1970년대에 2% 감소한 사탕무 수확량이었다. 브레즈네프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은 국가 투자를 늘리는 것이었다. 정치국 위원 겐나디 보로노프는 각 농장의 인력을 그가 "연계(links)"라고 부르는 단위로 나누는 것을 주장했다. 이 "연계"는 농장의 낙농 부문을 운영하는 것과 같은 특정 기능을 맡게 될 것이다. 그의 주장은 노동력이 커질수록 책임감을 덜 느낀다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1940년대에 안드레이 안드레예프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제안했고, 스탈린 사망 전후로 흐루쇼프가 반대했던 것이다. 보로노프 역시 성공하지 못했고, 브레즈네프는 그의 제안을 거부했으며, 1973년 그는 정치국에서 해임되었다.
"연계" 실험은 지역 차원에서는 허용되었으며, 당시 스타브로폴 지역 위원회 제1서기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지역에서 연계 실험을 했다. 한편,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소련 정부의 농업 개입은 "상상력이 부족하고" "무능했다". 농업 문제에 직면하여 정치국은 "농업 생산의 전문화 및 집중화 추가 발전에 관한 결의안"이라는 제목의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 결의안은 서로 가까운 콜호스들이 생산량 증대를 위해 협력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식량 및 농업 부문에 대한 국가 보조금은 파산한 농장이 운영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생산물 가격 인상은 석유 및 기타 자원 가격 인상으로 상쇄되었다. 1977년까지 석유 가격은 1960년대 후반보다 84% 더 비쌌다. 다른 자원의 비용 또한 1970년대 후반에 상승했다.
브레즈네프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 1977년과 1981년에 두 가지 법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소련 내 사유지 최대 면적을 0.5 ha로 늘릴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조치는 농업 생산량 확대를 위한 중요한 장애물을 제거했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사유지는 총 경작 면적의 4%만을 차지하면서도 국가 농업 생산량의 30%를 생산했다. 이는 일부에게 소련 농업의 붕괴를 막기 위해 탈집단화가 필요하다는 증거로 여겨졌지만, 소련의 주요 정치인들은 이념적,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러한 과감한 조치를 지지하는 것을 꺼렸다. 근본적인 문제는 숙련 노동자의 증가하는 부족, 파괴된 농촌 문화, 작업의 질보다는 양에 비례하는 노동자 임금, 그리고 작은 집단 농장과 도로가 없는 시골에 비해 너무 큰 농업 기계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브레즈네프의 유일한 선택지는 대규모 간척 및 관개 프로젝트와 같은 계획 또는 급진적인 개혁뿐이었다.
4.1.5. 사회와 생활 수준
브레즈네프가 18년 동안 소련을 통치하는 동안 1인당 평균 소득은 절반 증가했는데, 이 증가분의 4분의 3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에 발생했다. 브레즈네프 집권 후반기에는 1인당 평균 소득이 4분의 1 증가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전반부에는 1인당 소득이 연간 3.5% 증가했는데, 이는 이전 해보다 약간 낮은 성장률이었다. 이는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의 대부분 정책을 되돌린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1인당 소비량은 브레즈네프 시대에 약 70% 증가했지만, 이 증가분의 4분의 3은 1973년 이전에 발생했고 그의 통치 후반기에는 4분의 1에 불과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초기에 소비 생산량 증가의 대부분은 코시긴 개혁 덕분이었다.
1970년대 소련의 경제 성장이 정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 수준과 주거 환경은 크게 개선되었다. 브레즈네프 휘하의 소련 지도부는 경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사회 복지를 확대하여 소련 국민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려 노력했다. 이는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약간의 기여를 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러시아 SFSR의 생활 수준은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뒤처졌는데, 이는 많은 러시아인들이 소련 정부의 정책이 러시아 국민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게 만들었다. 국가는 보통 노동자들을 한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이동시켰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소련 산업의 고질적인 특징이 되었다. 공장, 광산, 사무실과 같은 국영 산업은 무규율한 인력으로 채워졌고, 이들은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게으른 노동력"으로 이어졌다. 소련 정부는 효과적인 대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실업률이 낮았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노동자를 교체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일부 분야는 개선되었지만, 대부분의 민간 서비스는 악화되었고 소련 시민의 생활 환경은 급속히 저하되었다. 의료 시스템의 쇠퇴로 인해 질병이 증가했다. 생활 공간은 선진국 기준으로는 여전히 상당히 작았고, 평균적인 소련인은 13.4제곱미터의 공간에서 살았다. 수천 명의 모스크바 주민들이 노숙자가 되었고, 대부분은 판자촌, 문간, 주차된 전차 등에서 살았다. 1970년대 후반에는 영양 상태 개선이 멈췄으며, 예를 들어 예카테린부르크에서는 필수 식료품 배급이 다시 시작되었다.
국가는 근면한 시민들에게 휴양 시설과 연간 휴가를 제공했다. 소련의 노동조합은 근면한 조합원과 그 가족에게 크림반도와 조지아의 해변 휴가를 제공했다.
사회적 경직성은 소련 사회의 공통적인 특징이 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인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일반 노동자도 공부하고 소련 당국에 순종하면 화이트칼라 직업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브레즈네프의 소련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매력적인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 직책을 고수했다. 단순히 무능력한 것은 누구를 해고할 좋은 이유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처럼 브레즈네프가 물려준 소련 사회는 정체된 상태가 되었다.
4.2. 외교 및 국방 정책
브레즈네프 시대의 주요 외교적 성과와 국방 정책, 그리고 냉전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4.2.1.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브레즈네프 독트린

브레즈네프 정권의 첫 위기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 지도부가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지휘 아래 공산주의 체제를 자유화하려 시도하면서 발생했다 (이를 "프라하의 봄"이라 부른다). 7월, 브레즈네프는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를 "수정주의자"이자 "반소련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강경한 공개 발언에도 불구하고,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은 아니었다. 기록 보관소의 증거에 따르면 브레즈네프는 처음에는 개혁 지향적인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일시적인 타협을 모색했다. 그러나 결국 브레즈네프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자제하거나 반대하면 국내 및 동구권 내에서 혼란이 가중될 위험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프라하 내에 "혁명 정부를 재설치하라"는 소련 지도부 내 압력이 커지자 브레즈네프는 8월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명령하고 둡체크를 해임했다. 소련의 개입 후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치국 위원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개혁가 보후밀 시몬을 만나 "내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소련의 무력 지원에 찬성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오늘 여기 앉아 있지 못했을 것이며, 나 또한 아마 그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스크바가 의도했던 안정화 효과와는 달리, 침공은 동구권 내에서 추가적인 반대 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프라하의 봄 진압 이후 브레즈네프는 소련이 "사회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위성국의 내정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사실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1956년 헝가리 혁명에서 시행했듯이 기존 소련 정책의 재진술에 불과했다. 브레즈네프는 1968년 11월 13일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5차 대회 연설에서 이 독트린을 재차 강조했다.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세력이 일부 사회주의 국가의 발전을 자본주의로 전환시키려 한다면, 이는 해당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통 문제이자 우려가 된다. - 브레즈네프, 1968년 11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5차 대회 연설
"사회주의"라는 언급은 크렘린에 충성하는 공산당의 통제를 의미했다. 이 새로운 정책은 동구권뿐만 아니라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긴장도 고조시켰다. 1969년까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는 브레즈네프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 14개 집권 공산당 중 5개도 모으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실패한 회의 이후 소련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선도적인 중심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80년대 후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부인하며, 동유럽의 모든 위성국에서 소련 지배가 평화적으로 전복되는 것을 용인했다.
1980년~1981년 폴란드에서는 연대자유노조 운동의 등장으로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다. 10월 말까지 연대자유노조는 3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고, 12월에는 900만 명에 달했다. 폴란드 정부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89%가 연대자유노조를 지지했다. 폴란드 지도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분열되었고, 대다수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제안한 계엄령 선포를 원하지 않았다. 소련과 다른 동구권 국가들은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는 군사 행동을 촉구했다. 호네커는 브레즈네프에게 보낸 공식 서한에서 폴란드에서 확대되는 문제를 통제하기 위한 공동 군사 조치를 제안했다. CIA 보고서는 소련군이 침공을 위해 동원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1980년~1981년 동구권 국가 대표들은 크렘린에서 폴란드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회동했다. 브레즈네프는 결국 1981년 12월 10일 폴란드의 국내 문제를 내버려 두는 것이 더 낫다고 결론 내렸고, 폴란드 대표들에게 소련이 요청받을 경우에만 개입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이는 사실상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종식을 의미했다. 소련의 군사 개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1981년 12월 13일 전시 상태를 선포하여 모스크바의 요구에 굴복했다.
4.2.2. 중소 관계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소련의 외교 관계는 1960년대 초반 니키타 흐루쇼프가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자유주의적인 동유럽 국가들과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한 후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의 소련은 1950년 2월 중국과 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여 군사 동맹을 맺고 중국에 막대한 경제 및 기술 원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스탈린 비판을 한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중국은 점차 소련에 대해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마오쩌둥은 소련이 내세우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마오쩌둥 사상을 주창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일본을 포함한 각국의 공산당에서 소련파와 중국파가 대립했다. 1964년 저우언라이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지만 관계 개선에는 이르지 못했다. 1969년에는 우수리 강(중국명 진바오 섬)의 다만스키섬에서 양국 군대가 무력 충돌하는 중소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한편, 베트남 전쟁에서 양국은 모두 북베트남을 지지했다. 그러나 베트남 통일 후 양국의 대응은 갈라졌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에서 크메르 루주의 민주 캄푸치아를 침공하여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을 수립했다. 캄푸치아 왕국 민족 통일 전선 시대부터 캄보디아를 지원해온 중국은 이에 대한 징벌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과 중국은 노로돔 시아누크 전 국왕과 폴 포트가 이끄는 삼파 연합 정부를 지원했고, 소련은 베트남과 헹 삼린 정권을 지지하는 구도였다. 유사하게 오가덴 전쟁, 앙골라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에서도 미국, 중국과 소련이 대리전의 양상을 띠었다.
1980년대 초까지 중국과 소련 양측은 양국 관계 정상화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이 소련에 제시한 조건은 중소 국경 지역의 소련군 병력 감축, 아프가니스탄 및 몽골 인민 공화국 주둔 소련군 철수였으며, 더 나아가 중국은 소련이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브레즈네프는 1982년 3월 타슈켄트 연설에서 관계 정상화를 촉구했다. 완전한 중소 관계 정상화는 몇 년이 더 걸려, 마지막 소련 지도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4.2.3. 미국과의 관계 및 데탕트

브레즈네프가 18년 동안 소련의 지도자로 재임하는 동안, 그의 대표적인 외교 정책 혁신은 바로 데탕트의 추진이었다. 흐루쇼프 해빙 시대에 추구된 접근 방식과 일부 유사점이 있었지만, 브레즈네프의 정책은 흐루쇼프의 선례와 두 가지 면에서 크게 달랐다. 첫째, 그 목표가 더 포괄적이고 광범위했으며, 군비 통제, 위기 예방, 동서 무역, 유럽 안보 및 인권에 관한 협정 체결을 포함했다. 둘째, 정책의 핵심은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 균형을 맞추는 중요성에 기반을 두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국방비 지출은 1965년에서 1970년 사이에 40% 증가했으며, 이후에도 매년 증가세를 이어갔다.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1982년에는 GNP의 12%가 소련군에 지출되었다. 브레즈네프 휘하에서 소련의 군사 예산은 8배 증가하여, 가장 많은 수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 핵탄두, 항공기, 전차, 재래식 병력 및 기타 군사 자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군비 증강으로 인해 1970년대 중반까지 소련이 세계 최강의 군사 강국으로서 미국을 능가했다는 주장이 서방 관찰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SALT I 조약에 서명했다. 이 협정의 첫 번째 부분은 양측의 핵미사일 개발에 제한을 두었다. 협정의 두 번째 부분인 탄도탄 요격 미사일 조약은 양국이 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을 금지하여, 미국이나 소련 모두 핵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상대를 공격할 수 없도록 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헨리 키신저의 소련에 대한 데탕트 정책은 흔들리고 있었다. 데탕트는 양국 간에 어떤 종류의 "연결"이 발견될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했으며, 미국은 SALT I 서명과 소련-미국 무역 증가가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의 공격적인 성장을 막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는 브레즈네프가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공산주의 게릴라에 대한 군사 지원을 계속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럴드 포드가 지미 카터에게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미국의 외교 정책은 소련과 공산주의 세계에 대해 어휘적으로 더욱 노골적으로 공격적이 되었다. 미국이 지지하는 억압적인 반공 정부 및 조직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카터 대통령 임기 후반기에는 미군에 대한 지출이 증가했다. 브레즈네프가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승인하자, 카터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의 조언에 따라 개입을 비난하며 "1945년 이후 평화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묘사했다. 미국은 소련에 대한 모든 곡물 수출을 중단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1980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소련은 이에 대응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984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브레즈네프 통치 기간 동안 소련은 미국에 대한 정치적, 전략적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첫 SALT 조약에서 양대 강대국이 합의한 제한의 결과로, 소련은 냉전 기간 중 처음으로 미국과 핵무기 균형을 달성했다. 또한, 헬싱키 협정 협상의 결과로 브레즈네프는 중앙 및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패권 합법화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미국의 베트남 전쟁 패배와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의 영향력 저하를 초래했다. 소련 해군은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제독의 지휘 아래 적극적으로 해양으로 진출하여 처음으로 세계적인 해군 강국이 되었고, 남예멘의 아덴만, 베트남의 캄란만, 시리아의 타르투스 등에 부동항을 확보하여 중동 및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1971년 12월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는 인도를 지원하여 군함을 파견했고, 1973년 10월 제4차 중동 전쟁에서도 아랍 국가들을 물품 지원하며 실전 부대 전개 준비를 수행했다. 쿠바를 대리하여 미국의 배후라고 여겨지는 라틴 아메리카의 분쟁, 1975년 3월 앙골라 내전, 1977년 7월부터 1978년 3월까지의 오가덴 전쟁 등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데 성공했다.
4.2.4. 아프가니스탄 전쟁
1978년 아프가니스탄의 사우르 혁명 (공산주의 혁명) 이후, 공산주의 정권이 주민들에게 강요한 권위주의적 조치들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을 초래했고, 무자헤딘이 정권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이끌었다. 소련은 소련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을 것을 우려했고, KGB 보고서가 아프가니스탄을 몇 주 안에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한 후, 브레즈네프와 몇몇 고위 당 관리들은 전면 개입에 동의했다.
현대 연구자들은 브레즈네프가 아프가니스탄 상황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받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의 건강이 나빠졌고,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주장하는 이들이 속임수와 위조된 증거를 사용하여 정치국에서 다수파를 장악했다. 그들은 수십만 명의 정규군 부대를 보내는 대신, 이미 1950년대부터 대규모로 주둔해 있던 1,500명에서 2,500명의 소련군 고문단과 기술자 인력을 유지하는 비교적 온건한 시나리오를 옹호했다. 일부는 브레즈네프의 서명이 그에게 전체 상황을 알리지 않은 채 얻어졌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러한 결정을 결코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소련의 미국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은 브레즈네프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침공의 진짜 주모자는 미하일 수슬로프라고 믿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 주치의 미하일 코사레프는 브레즈네프가 정신이 온전했을 때 전면적인 개입에 저항했다고 회상했다. 국가 두마 부의장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는 일부가 군사적 해결책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강경파 국방부 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만이 정규군 부대 파견을 고집한 유일한 정치국 위원이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소련군 지휘부의 일부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어떤 형태의 적극적인 소련군 주둔에도 반대하며, 소련이 아프간 정치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개입 결정은 브레즈네프의 후임자들에게 마지막이자 치명적인 유산이 되었다. 아프간 개입은 데탕트의 종말을 불러왔고, 미국이 부과한 곡물 거래 중단과 같은 경제 제재는 소련의 경제 문제를 급속히 악화시켰다. 미국은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재군비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후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가속화되었다.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서 막대한 경제적 부담은 소련의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는 나중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더 나아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이어졌다. 게다가 침공 행위는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했고, 1980년 7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1980년 하계 올림픽은 일본을 포함한 서방권 국가들, 중국,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보이콧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5. 개인 숭배

브레즈네프 통치 말기는 개인 숭배 현상이 심화되는 시기였다. 그가 훈장을 사랑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는데(총 100개 이상을 받았다), 1966년 12월 60세 생일에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브레즈네프는 이 영웅 칭호와 함께 레닌 훈장과 황금별 훈장을 생일 기념으로 세 차례 더 받았다. 70세 생일에는 소련 최고 군사 영예인 소비에트 연방 원수 계급을 수여받았다. 원수 계급을 수여받은 후 그는 제18군 참전 용사 모임에 참석하여 긴 코트를 입고 "주목! 원수님 오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1978년 희귀한 승리 훈장을 자신에게 수여했는데, 이 훈장은 수상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989년 사후 취소되었다. 75세 생일에 계획되었던 대원수 계급으로의 승진은 그의 계속되는 건강 문제로 인해 조용히 보류되었다.
브레즈네프의 과도한 영광에 대한 열망은 노보로시스크 근처 흑해 연안의 작은 전투인 말라야 제믈랴를 결정적인 군사 작전으로 다룬 자신의 형편없이 쓰인 제2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도 나타났다. 그의 책의 명백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레닌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언론에 의해 극찬을 받았다. 이 책은 처녀지 개간 운동에 관한 책 등 두 권의 다른 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의 개인 숭배와는 달리, 브레즈네프의 개인 숭배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공허하고 뻔뻔한 것으로 여겨졌고, 사람들에게 존경심이나 두려움을 강요하기 위한 숙청이 없었기 때문에 호응을 얻지 못하고 무관심을 받았다. 브레즈네프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국제 정상회담(예: 1979년 6월 지미 카터와 체결한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정)에 몰두하느라 바빴고, 국내 중요 문제들은 그의 보좌관들에게 맡겼다. 브레즈네프에 대한 지도부 내의 음모는 없었고, 그는 건강이 나빠지면서 점차 권력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그의 건강 악화는 소련 언론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지만, 공식 행사에 불참하고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현실은 명확해졌다.
브레즈네프의 허영심은 많은 러시아 정치 유머의 대상이 되었다. 니콜라이 포드고르니는 그에게 이 점을 경고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사람들이 나를 놀린다면, 그건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다"라고 대답했다.
사회주의 형제적 키스 전통에 따라 브레즈네프는 그의 경력 동안 많은 정치인들과 입술에 키스했다. 그중 한 번은 에리히 호네커와의 키스로, 베를린 장벽 개방 후 드미트리 브루벨이 그린 벽화 "오! 하느님, 이 치명적인 사랑에서 제가 살아남게 도와주소서"의 주제가 되었다.
브레즈네프의 가장 큰 열정은 각국 정상들이 선물한 외제차를 운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로 자신의 다차와 크렘린 사이를 이 차들로 운전했는데,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공공 안전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고 한다. 1973년 리처드 닉슨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닉슨이 방금 선물한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워싱턴을 운전하고 싶다고 표현했다. 미국 비밀경호국이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차에서 깃발을 떼고, 선글라스를 끼고, 사람들이 내 눈썹을 못 보게 해서, 여느 미국인처럼 운전할 것이다"라고 말했고, 이에 헨리 키신저는 "저는 당신과 함께 운전해 봤는데, 당신은 미국인처럼 운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6. 개인 생활 및 특성

브레즈네프의 개인 생활은 가족 관계, 생활 방식, 그리고 건강 문제로 인한 쇠퇴가 두드러졌다.
### 건강 문제 ===
브레즈네프의 개인 숭배 현상은 그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던 시기에 심화되었다. 그의 신체 상태는 나빠지고 있었다. 그는 1970년대까지 골초였고, 수면제와 진정제에 중독되었으며, 과음하기 시작했다. 그의 조카 류보프 브레즈네바는 그의 의존증과 전반적인 건강 악화를 직무 스트레스와 국가의 전반적인 상황, 그리고 극도로 불행했던 가족 생활(아내와 자녀, 특히 문제 많았던 딸 갈리나의 변덕스러운 행동, 실패한 결혼, 부패 연루 등이 브레즈네프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에 큰 타격을 주었다)로 인한 심각한 우울증 때문이라고 보았다. 브레즈네프는 아내와 이혼하고 자녀들을 호적에서 파내려 여러 번 고려했지만, 친척과 정치국이 부정적인 여론을 우려하여 만류했다.
수년 동안 브레즈네프는 비만이 되었다. 197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의 중추신경계는 만성적으로 퇴화했고, 그는 여러 차례의 경미한 뇌졸중과 불면증을 겪었다. 1975년에는 첫 심장마비를 겪었다. 레닌 훈장을 받을 때 브레즈네프는 비틀거리며 걸었고, 말을 더듬었다. 한 미국 정보 전문가에 따르면, 미국 관리들은 브레즈네프가 수년 동안 심각한 동맥경화증을 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다른 불특정 질병도 앓았다고 믿었다. 1977년, 미국 정보 관리들은 브레즈네프가 통풍, 백혈병, 수십 년간의 과도한 흡연으로 인한 폐기종, 그리고 만성 기관지염도 앓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추측했다. 그는 심장 박동 이상을 조절하기 위해 인공 심장 박동기를 달았다고 보도되었다. 가끔 기억 상실을 겪고, 말하기 문제와 함께 몸의 협응력에 어려움을 겪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브레즈네프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도 보고된다. 그는 우울해하고, 자신의 나빠지는 건강과 오랜 동료들의 죽음에 낙담하고 있다고 한다. 도움을 받기 위해 그는 일종의 현대판 그리고리 라스푸틴과 같은 아시리아인 여성으로부터 정기적인 상담과 최면을 받기 시작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회고록 《나의 삶》에 따르면, 브레즈네프가 알마티의 아우에조프 극장에서 리셉션을 가졌을 때 사건이 발생했다. 약 1,000명의 손님들이 모여 앉은 후, 딘무하메드 코나예프가 브레즈네프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그러나 손님들이 잔을 들자마자 브레즈네프는 예기치 않게 일어나 출구로 향했고, 공화국의 모든 지도부가 그를 따랐다. 브레즈네프는 밖으로 나가 자신의 차에 다가갔고, 1분도 안 되어 의전 차량은 출발했다. 나자르바예프는 브레즈네프가 자신의 방문 목적을 잊었다는 것이 분명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의 쇠약한 상태를 알아채지 못한 척했다고 언급했다.
1975년 뇌졸중을 겪은 후, 브레즈네프의 소련 지도 능력은 심각하게 저해되었다. 소련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그의 능력이 약화되면서, 그는 KGB 의장 유리 안드로포프, 오랜 외무부 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 그리고 국방부 장관 안드레이 그레치코 (1976년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로 교체됨)로 구성된 강경파 "브레인 트러스트"의 의견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보건부는 항상 브레즈네프의 곁에 의사들을 두었고, 그는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났다. 이 시기에 소련 공산당의 대부분의 고위 관료들은 브레즈네프를 살아있게 유지하고 싶어 했다. 비록 점점 더 많은 관리들이 그의 정책에 불만을 가졌지만, 정권 내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국내 혼란기를 감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방 평론가들은 브레즈네프의 후계자가 누구일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후보는 브레즈네프보다 나이가 많은 미하일 수슬로프와 안드레이 키릴렌코, 그리고 젊은 표도르 쿨라코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였다. 쿨라코프는 1978년 자연사했다.
7. 사망
1981년 겨울부터 1982년까지 브레즈네프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정치국이 후계 문제를 고민하는 동안, 모든 징후는 병약한 지도자가 죽어가고 있음을 나타냈다. 후계자 선택은 수슬로프의 영향력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는 1982년 1월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안드로포프는 수슬로프의 중앙위원회 서기국 자리를 차지했다. 5월까지는 안드로포프가 서기장 직책을 노릴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동료 KGB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브레즈네프의 재임 기간 동안 정치적 부패가 심해졌다는 소문을 퍼뜨려 정치국 내에서 브레즈네프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안드로포프의 행동은 그가 브레즈네프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82년 3월, 브레즈네프는 타슈켄트 공장을 시찰하던 중 금속 난간이 공장 노동자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브레즈네프와 그의 경호원들에게 쓰러지면서 뇌진탕과 오른쪽 빗장뼈 골절을 입었다. 이 사건은 서방 언론에서 브레즈네프가 뇌졸중을 겪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한 달간의 회복 기간을 거친 후 브레즈네프는 11월까지 간헐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1982년 11월 7일, 그는 레닌 묘 발코니에서 열린 10월 혁명 65주년 기념 연례 군사 퍼레이드와 노동자 시위에 참석했다. 이 행사는 그가 사망하기 사흘 전의 마지막 공식석상이었다. 그는 1982년 11월 10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브레즈네프의 시신은 모스크바 노동조합회관의 '원주 홀'에 안치되었다. 삼일간의 전국적인 애도 기간 후 국장이 치러졌으며, 일본의 스즈키 젠코 총리를 포함한 70여 개국의 고위 인사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레닌 묘와 모스크바 크렘린 벽 사이에 위치한 12개의 개별 무덤 중 하나였다. 장례식에는 그의 아내와 가족들도 참석했다. 브레즈네프는 원수 제복에 훈장을 모두 단 채로 매장되었다. 쿠바, 니카라과, 모잠비크, 아프가니스탄, 인도 등 여러 나라가 그의 죽음에 대해 국가적 애도를 선포했다.
브레즈네프 사망 발표가 지연된 배경에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 내 후계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 투쟁이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당일(사망 발표 전날), 소련 TV 방송국들은 오락 프로그램 등의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블라디미르 레닌의 공적을 기리는 프로그램이나 제2차 대전 독소 전쟁(대조국전쟁)을 회상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했으며, 앵커들도 격식 있는 복장으로 방송에 임했다. 라디오를 틀어도 들리는 것은 침울한 클래식 음악뿐이어서, 분명히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러한 이상 징후에 비추어 누군가 소련의 고위 인사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소련 국내외에서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흘 전 열린 혁명 65주년 기념 퍼레이드에 불참하여 은퇴가 확실시되던 안드레이 키릴렌코 정치국 위원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측되었다. 그러나 우호국인 앙골라의 독립기념일에 맞춰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대통령에게 보낸 축전 서명에 관례를 어기고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서명이 없었던 것에서 점차 브레즈네프가 사망했다는 관측이 유력해졌다.
8. 유산과 평가

브레즈네프는 이오시프 스탈린 다음으로 가장 오랜 기간 소련을 통치했다. 그는 평화주의자이자 상식적인 정치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경제 문제를 무시하고 소련 정치 체제의 쇠퇴를 방치하여 장기적인 '정체 시대'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했을 때 브레즈네프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이 급증했으며, 그가 "맹렬한 신스탈린주의 노선"을 따랐고 국가를 현대화하고 시대에 발맞추는 데 지속적으로 실패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의 경력에서 주요 결정 중 하나였던 아프가니스탄 개입 또한 소련의 국제적 위상과 내부 역량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일부 러시아 여론조사에서는 브레즈네프 시대가 상대적 안정과 복지 혜택으로 인해 그의 후임자들과 비교하여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99년 여론조사에서 그는 20세기 최고의 러시아 지도자로 선정되었고, 2007년 브치옴 여론조사에서는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이 20세기 소련 역사 중 다른 어떤 시기보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살고 싶다고 응답했다. 2013년 레바다 센터 여론조사에서는 브레즈네프가 56%의 지지율로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을 제치고 20세기 러시아의 가장 좋아하는 지도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8년 레이팅 사회학 그룹 여론조사에서도 우크라이나 응답자의 47%가 브레즈네프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가졌다. 이처럼 일부 긍정적 평가는 주로 특정 시기 이후의 혼란과 대비되는 '안정'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되지만, 그의 통치가 남긴 장기적인 폐해와 사회 정체는 비판의 주요 대상이 된다.
서방에서는 브레즈네프 통치와 관련하여 '정체 가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9. 영예와 기념
브레즈네프는 조국과 해외에서 수많은 칭호와 영예를 받았다. 그의 해외 칭호로는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영예와 몽골 인민 공화국 영웅 등이 있다. 브레즈네프는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4번,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1번 받았다. 또한 8개의 레닌 훈장, 2개의 10월 혁명 훈장, 2개의 적기 훈장, 1개의 보흐단 흐멜니츠키 훈장 2급, 1개의 조국 전쟁 훈장 1급, 1개의 적성 훈장을 포함한 수많은 국내 훈장과 메달을 수여받았다. 1978년에는 승리 훈장을 수여받았지만, 1989년 사후 수상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문학 분야에서 레닌상과 국제 레닌 평화상도 수상했다.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자동차 산업 도시인 나베레즈니예 첼니는 브레즈네프 사망 후 1988년까지 "브레즈네프 시"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본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아르크티카급 쇄빙선 1번함인 '아르크티카'도 브레즈네프 사망 후 1988년까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라는 이름으로 운용되었다. 1982년 기공된 항공모함 '어드미럴 쿠즈네초프'는 1983년 건조 중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로 개명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