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남오세티야는 남캅카스에 위치한 지역으로, 공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이다. 국제적으로는 대부분 조지아의 영토로 간주되지만, 1991년 조지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008년 전쟁 이후 러시아를 비롯한 일부 유엔 회원국(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나우루, 시리아)만이 독립을 승인하였다. 조지아는 남오세티야를 자국의 피점령지인 '츠힌발리 지역' 또는 '구 남오세티야 자치주'로 규정하고 있다.
수도는 츠힌발리이며, 면적은 약 3900 km2이다. 인구는 2022년 추산 약 56,500명으로, 오세트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조지아인, 러시아인 등이 거주한다. 공용어는 오세트어와 러시아어이다.
역사적으로는 알란족의 후예인 오세트인이 중세부터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러시아 제국과 소련 시대를 거치며 자치주로 편입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조지아와의 민족 갈등이 격화되어 수차례의 분쟁을 겪었으며, 특히 2008년 전쟁은 남오세티야의 국제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남오세티야는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으로의 편입 논의도 지속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캅카스 산맥 남사면의 산악 지형이 대부분이며, 온대기후와 고산기후가 나타난다. 경제는 주로 농업에 기반하며, 러시아의 재정 지원이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통화는 러시아 루블이 사용된다.
남오세티야의 인권 상황은 분쟁 과정에서의 민간인 피해, 조지아계 주민에 대한 인권 침해 및 인종 청소 논란, 난민 문제 등으로 국제적인 우려를 낳고 있다.
2. 역사
남오세티야 지역은 고대 알란족의 이동과 정착에서부터 시작하여 중세 조지아 왕국과의 관계, 근대 러시아 제국 및 소련 시기, 그리고 현대 조지아와의 분쟁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역사적 변천을 겪어왔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독립을 둘러싼 조지아와의 갈등은 수차례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
2.1. 고대 및 중세
오세트인은 스키타이의 후예로 여겨지는 유목 이란계 민족인 알란족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세기경 북캅카스 산맥에는 알란족의 통합 왕국인 알라니야가 등장했다. 그러나 1239년에서 1277년 사이 알라니야는 몽골 제국과 이후 티무르 제국 군대의 침입으로 멸망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알란족 인구가 학살당했다. 살아남은 알란족은 중앙 캅카스 산맥으로 후퇴하여 점차 산을 넘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조지아 왕국 영토 내로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자카고리 마을에서는 13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리아-네스토리우스 문자로 쓰인 오세트어 비문이 발견되기도 했다.
17세기에는 카바르딘인 왕자들의 압력으로 오세트인들이 북캅카스에서 카르틀리 왕국으로 두 번째 대규모 이주를 시작했다. 남캅카스의 산악 지역으로 이주한 오세트인 농민들은 종종 조지아 봉건 영주들의 땅에 정착했다. 카르틀리 왕국의 조지아 왕은 오세트인들의 이주를 허용했다. 조지아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미하일 타티셰프에 따르면, 17세기 초에는 이미 대 리아흐비 강 상류 근처에 소수의 오세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770년대에는 카르틀리 지역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오세트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 시기는 1772년 조지아를 방문했던 요한 안톤 귈덴슈테트의 여행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발트 독일인 탐험가였던 그는 현대의 북오세티야를 단순히 오세티야라고 불렀으며, 카르틀리(현대 남오세티야 지역)는 조지아인이 거주하고 산악 지역은 조지아인과 오세트인이 함께 거주한다고 기록했다. 귈덴슈테트는 또한 카르틀리의 최북단 국경이 대캅카스 산맥이라고 썼다. 18세기 말까지 현대 남오세티야 영토 내 오세트인 정착지는 쿠다로(제조라 강 하구), 대 리아흐비 강 협곡, 소 리아흐비 강 협곡, 크사니 강 협곡, 구다(테트리 아라그비 강 하구), 트루소(테레크 강 하구) 등이었다.
2.2. 러시아 제국 통치기
현대 남오세티야 영토를 포함한 조지아의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은 1801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오세트인들은 새로운 행정 체제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을 독립적인 존재로 여겼다. 1821년부터 1830년까지 남오세티야 병합 단계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1830년 파울 폰 레넨캄프 장군에 의한 남오세티야 정복으로 끝났다. 1830년까지 오세티야는 완전히 러시아의 통제 하에 놓였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조지아가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시기에도 오세트인의 조지아 지역으로의 이주는 계속되었으며, 트리알레티, 보르조미, 바쿠리아니, 카헤티 등지에도 오세트인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2.3. 소련 시대
소련 수립 이후 남오세티야 지역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1922년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에 남오세티야 자치주가 설립되었고, 이는 해당 지역의 민족 구성 및 정치적 지형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자치주 시기 동안 남오세티야는 일정한 문화적 자치권을 누렸으나, 동시에 소련 중앙 정부와 조지아 공화국 정부의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2.3.1. 남오세티야 자치주 성립 배경 및 과정

러시아 혁명 이후 현대 남오세티야 지역은 조지아 민주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18년, 볼셰비즘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이 경작하던 토지의 소유권을 요구하던 시다 카르틀리(내부 조지아)의 토지 없는 오세트인 농민들과, 합법적 소유자였던 조지아 귀족을 지지하는 멘셰비키 정부 사이에 분쟁이 시작되었다. 오세트인들은 처음에는 중앙 정부의 경제 정책에 불만을 품었으나, 긴장은 곧 민족 분쟁으로 변모했다. 첫 번째 오세트인 봉기는 1918년 2월에 발생하여 조지아 왕자 3명이 살해되고 그들의 토지가 오세트인들에게 점령되었다. 트빌리시 중앙 정부는 국가방위군을 파견하여 보복했으나, 조지아 부대는 오세트인들과 교전 후 후퇴했다. 이후 오세트인 반군은 츠힌발리 마을을 점령하고 조지아 민간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19년과 1920년의 봉기 동안 오세트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은밀한 지원을 받았으나 패배했다. 오세트인 측 자료에 따르면 1920년 봉기 진압으로 5,000명의 오세트인이 사망했으며, 이후 기아와 전염병으로 1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된다.

1921년 붉은 군대의 조지아 침공 이후 수립된 소비에트 조지아 정부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코카서스국(캅카스국)의 압력 하에 1922년 4월 남캅카스 오세트인들을 위한 자치 행정 단위인 남오세티야 자치주(AO)를 창설했다. 일부에서는 볼셰비키가 조지아 민주 공화국에 맞서 싸우고 지역 분리주의자들을 지지한 대가로 오세트인들에게 이러한 자치권을 부여했다고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러시아 침공 이전에는 별개의 독립체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행정 경계 설정은 상당히 복잡한 과정이었다. 조지아인들의 수많은 항의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지아 마을들이 남오세티야 자치주에 포함되었다. 츠힌발리 시는 오세트인 인구가 다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수도가 되었다. 고리 군과 두셰티 군 일부 외에도 쿠타이시 현의 라차 군(서부 조지아) 일부도 남오세티야 자치주에 포함되었다. 이 모든 영토는 역사적으로 조지아 고유의 땅이었다.
북캅카스의 역사적 오세티야는 1924년 북오세티야 자치주가 창설되기 전까지 자체적인 정치적 실체를 갖지 못했다.
2.3.2. 자치주 시기 (1922년-1990년)

남오세티야 자치주 시기 동안 오세트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오세트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러시아어와 조지아어가 행정 및 국가 언어였다. 소비에트 시대 조지아 정부 통치 하에서 오세트인들은 오세트어 사용과 학교에서의 오세트어 교육을 포함한 소수 민족 문화 자치권을 누렸다. 그러나 조지아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는 시도 등 민족 간 긴장을 유발하는 정책들도 존재했다.
사회경제적으로는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가 유지되었으며, 일부 공업 시설도 건설되었으나 발전은 더딘 편이었다. 민족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웠으나, 잠재적인 갈등 요인이 상존했다. 1989년에는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 오세트인의 3분의 2가 남오세티야 자치주 외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자치주의 경계 설정이 오세트인의 실제 거주 분포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2.4. 조지아-오세티야 분쟁
소련 말기 민족주의의 대두와 함께 남오세티야의 독립 요구가 거세지면서 조지아와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이 분쟁은 1990년대 초반의 전쟁, 1992년 휴전 이후의 불안정한 평화, 그리고 2008년의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지며 남오세티야의 현대사를 규정하는 핵심 사건이 되었다.
2.4.1. 분쟁의 시작과 전개 (1989년-1992년)
1989년 조지아인과 오세트인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이 지역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두 공동체는 1918년~1920년의 사건들을 제외하고는 서로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두 민족은 정상적인 수준의 교류를 유지했고, 조지아-오세티야계 혼혈 결혼도 많았다.
남캅카스 지역 오세트인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은 분쟁의 원인 중 하나였다. 조지아 역사학계는 오세트인의 남캅카스(조지아)로의 대규모 이주가 17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반면, 오세트인들은 고대부터 이 지역에 거주해왔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현존하는 자료로는 뒷받침되지 않는다. 일부 오세트인 역사가들은 오세트인 조상의 현대 남오세티야로의 이주가 13세기 몽골 침공 이후 시작되었다고 인정하며, 1990년대 한 남오세티야 사실상 외무 장관은 오세트인이 이 지역에 처음 나타난 것은 17세기 초라고 말하기도 했다. 1921년 러시아 침공 이후 수립된 남오세티야는 소비에트 시대 동안 조지아인들에게 인위적인 창조물로 여겨졌다.
1988년 남오세티야 인민 전선(아데몬 니하스)이 창설되었다. 1989년 11월 10일, 남오세티야 지역 의회는 조지아 최고회의에 이 지역을 "자치 공화국" 지위로 승격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남오세티야 당국이 남오세티야 자치주를 남오세티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ASSR)으로 전환하기로 한 결정은 갈등을 격화시켰다. 11월 11일, 이 결정은 조지아 의회인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에 의해 철회되었다. 조지아 당국은 자치주 제1당 서기를 해임했다.
조지아 최고회의는 1990년 여름 지역 정당을 금지하는 법을 채택했다. 남오세티야 지역 의회는 이를 아데몬 니하스에 대한 조치로 해석하고, 1990년 9월 20일 소련 내 "남오세티야 소비에트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는 "국가 주권 선언"을 통과시켰다. 오세트인들은 이후 조지아 의회 선거를 보이콧하고 12월에 자체 선거를 실시했다.
1990년 10월, 조지아 의회 선거에서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의 "원탁" 블록이 승리했다. 1990년 11월 11일, 감사후르디아 정부는 오세트인 선거가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남오세티야의 자치 지위를 완전히 폐지했다. 감사후르디아는 오세트인 자치 폐지를 정당화하며 "그들(오세트인)은 여기 조지아에 국가를 가질 권리가 없다. 그들은 소수 민족이다. 그들의 고향은 북오세티야이다... 여기서 그들은 이주민이다."라고 말했다.
1990년 12월 12일 조지아 의회가 남오세티야 자치주 영토에 비상사태를 선포하자, 조지아와 소련 내무부 군대가 이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1991년 초 조지아 국가방위군이 창설된 후, 1991년 1월 5일 조지아 군대가 츠힌발리로 진입했다. 1991~1992년 남오세티야 전쟁은 통제 불능의 민병대에 의한 국제인도법의 전반적인 무시로 특징지어졌으며, 양측 모두 잔학 행위를 보고했다. 소련군은 1991년 1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명령에 따라 휴전을 중재했다. 1991년 3월과 4월, 소련 내무부 군대는 양측 민병대를 적극적으로 무장 해제하고 민족 간 폭력을 억제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감사후르디아는 소련 지도부가 남오세티야 분리주의를 조장하여 조지아가 소련을 탈퇴하지 못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지아는 1991년 4월 독립을 선언했다.
전쟁의 결과로 약 10만 명의 오세트인이 남오세티야와 조지아 본토를 떠나 대부분 국경을 넘어 북오세티야로 피난했다. 추가로 2만 3천 명의 조지아인이 남오세티야를 떠나 조지아의 다른 지역으로 피난했다. 많은 난민들이 북오세티야의 프리고로드니 구역으로 향했다. 1944년, 많은 남오세티야인들이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인구시인이 추방된 북오세티야 지역으로 재정착했다. 1990년대 남오세티야인들의 옛 인구시 영토로의 새로운 이주 물결은 오세트인과 인구시인 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1991년 4월 29일, 남오세티야 서부는 1991년 라차 지진의 영향을 받아 2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집을 잃었다.
1991년 말, 감사후르디아의 비판자들에 대한 불관용과 정치 권력 집중 시도로 인해 조지아 내에서 그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1991년 12월 22일, 쿠데타 이후 감사후르디아와 그의 지지자들은 국가방위군의 지원을 받는 반대파에 의해 트빌리시의 여러 정부 건물에 포위되었다. 이어진 격렬한 전투로 200명 이상이 사상하고 조지아 수도 중심부는 폐허가 되었다. 1월 6일, 감사후르디아와 그의 지지자 일부는 망명을 위해 도시를 떠났다. 그 후, 조지아 군사위원회라는 임시 정부가 자바 이오셀리아니, 텐기즈 키토바니, 텐기즈 시구아의 3인방에 의해 구성되었고, 1992년 3월 그들은 전 소련 장관이었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를 조지아 국가위원회 통제를 맡도록 초청했다.
1992년 1월 19일 남오세티야에서 독립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며, 유권자들은 두 가지 질문을 받았다: "남오세티야가 독립 국가가 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그리고 "1991년 9월 1일 러시아와의 재통일에 관한 남오세티야 의회의 해결책에 동의하십니까?" 두 제안 모두 승인되었으나 국제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오세티야 지역 의회는 이후 "국가 독립법"을 통과시키고 1992년 5월 29일 남오세티야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2.4.2. 1992년 휴전 이후 상황 (1992년-2008년 이전)
1992년 6월 24일, 셰바르드나제와 남오세티야 정부는 러시아가 중재한 소치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에는 무력 사용을 피할 의무가 포함되었고, 조지아는 남오세티야에 대한 제재를 가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조지아 정부는 아할고리 마을을 포함하여 남오세티야의 상당 부분을 계속 통제했다. 오세트인, 러시아인, 조지아인으로 구성된 합동 평화유지군이 창설되었다. 1992년 11월 6일,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는 평화유지 작전을 감시하기 위해 조지아에 사절단을 설치했다. 그 이후 2004년 중반까지 남오세티야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2003년 장미 혁명 이후, 2004년 미헤일 사카슈빌리가 조지아 대통령이 되었다. 2004년 의회 및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는 조지아의 영토 보전을 회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초기 연설 중 하나에서 사카슈빌리는 분리주의 지역을 향해 "조지아도, 조지아 대통령도 조지아의 해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압하지야와 오세티야 친구들에게 즉각적인 협상을 제안한다. 우리는 그들의 미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그들의 이익을 고려하여 모든 국가 모델을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2004년부터 조지아 당국이 아자리야에서 성공한 후 이 지역을 다시 통치하려는 노력을 강화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조지아는 러시아에서 밀수된 식료품과 연료를 판매하는 이 지역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던 에르그네티 암시장을 폐쇄하기 위해 경찰을 파견했다. 조지아 당국은 조지아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로키 터널을 통한 에르그네티 시장으로의 대규모 물품 밀수로 인해 국가가 상당한 관세 수입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조지아는 로키 터널을 공동 통제 및 감시 하에 두자고 제안했지만 남오세티야 측은 이를 거부했다. 시장에 대한 밀수 방지 작전은 남오세티야의 조지아 의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조지아 평화유지군과 남오세티야 민병대 및 러시아 출신 자유 전투원들 사이에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에는 수십 명의 조지아 평화유지군 인질 납치, 조지아 통제 마을에 대한 총격 및 포격이 포함되어 수십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했다. 8월 13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반복적으로 위반되었다.
조지아 정부는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주장과 남오세티야 측의 통제되지 않는 군대에 대해 항의했다. 조지아 정부 관리들은 남오세티야의 주요 안보 직책이 (전직) 러시아 안보 관리들에 의해 점유되어 있다고 밝혔으며, 일부 정치 연구자들은 기관들이 러시아 연방에 아웃소싱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남오세티야인, 북오세티야인, 러시아인, 조지아인으로 동등하게 구성된) 평화유지군을 중립적이지 않다고 간주하고 교체를 요구했다. 남오세티야의 평화유지를 국제화하기 위한 다양한 제안이 조지아 측에서 나왔다. 미국 상원의원 리처드 루가에 따르면, 미국은 2006년 분쟁 지역에서 러시아 "평화유지군" 철수를 요구하는 조지아의 요청을 지지했다. 이후 EU 남캅카스 특사 피터 심네비는 "2006년 조지아-러시아 스파이 사건에서 러시아의 행동은 EU의 흑해 인근 지역에서 중립적인 평화유지군으로서의 신뢰를 손상시켰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 위원장), 리처드 루가, 멜 마르티네스는 2008년 6월 러시아가 조지아의 영토 보전을 훼손하려 한다고 비난하고 CIS 위임 하에 운영되는 러시아 구성 평화유지군 교체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했다.
2.4.3.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조지아와 러시아 간의 긴장은 2008년 4월부터 고조되기 시작했다. 2008년 8월 1일, 조지아 평화유지군을 수송하던 차량을 겨냥한 폭탄 폭발이 발생했다. 남오세티야 측이 이 사건을 일으킨 책임이 있었으며, 이는 적대 행위의 시작을 알리고 조지아 군인 5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에 대응하여 남오세티야 민병대원 여러 명이 공격을 받았다. 남오세티야 분리주의자들은 8월 1일부터 조지아 마을에 포격을 시작했다. 이러한 포격 공격으로 인해 조지아 군인들은 8월 1일부터 주기적으로 응사했다.
2008년 8월 7일 오후 7시경, 조지아 대통령 미헤일 사카슈빌리는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하고 평화 회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남오세티야 분쟁 지역에 위치한) 조지아 마을에 대한 공격이 격화되자 곧 조지아군의 총격이 이어졌고, 이후 8월 8일 밤 자칭 남오세티야 공화국의 수도인 츠힌발리 방향으로 진격하여 8월 8일 아침 그 중심부에 도달했다. 한 조지아 외교관은 8월 8일 러시아 신문 코메르산트에 츠힌발리를 장악함으로써 트빌리시는 조지아가 조지아 시민 살해를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군사 전문가 파벨 펠겐가우어에 따르면, 오세티야의 도발은 조지아의 대응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는 사전에 계획된 러시아 군사 침공의 구실로 필요했다. 조지아 정보부와 여러 러시아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규 (비평화유지) 러시아군의 일부는 조지아의 군사 행동 이전에 이미 로키 터널을 통해 남오세티야 영토로 이동했다.
러시아는 조지아가 "남오세티야에 대한 침략"을 자행했다고 비난하고, 2008년 8월 8일 "평화 강제 작전"이라는 구실로 조지아에 대한 대규모 육해공 침공을 개시했다. 조지아 내 목표물에 대한 러시아의 공습도 시작되었다. 압하지야군은 8월 9일 조지아가 점령하고 있던 코도리 계곡을 공격하며 제2전선을 열었다. 츠힌발리는 8월 10일까지 러시아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러시아군은 조지아 도시들인 주그디디, 세나키, 포티, 그리고 (휴전 협상이 타결된 후) 고리를 점령했다. 러시아 흑해 함대는 조지아 해안을 봉쇄했다.

남오세티야에서 조지아인에 대한 민족 청소 작전이 남오세티야인들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츠힌발리 주변의 조지아 마을들이 파괴되었다. 전쟁으로 192,000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전쟁 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1년 후 약 30,000명의 조지아인이 여전히 난민 상태로 남아있었다. 코메르산트에 실린 인터뷰에서 남오세티야 지도자 에두아르드 코코이티는 조지아인들의 귀환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2008년 8월 12일 휴전 협정을 중재했다. 8월 17일,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다음 날부터 러시아군이 조지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러시아는 8월 26일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독립 공화국으로 승인했다. 러시아의 승인에 대응하여 조지아 정부는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러시아군은 10월 8일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에 인접한 완충 지대를 떠났고, 조지아 유럽 연합 감시단이 완충 지대에 대한 권한을 인수했다. 전쟁 이후 조지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러시아가 점령한 조지아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2009년 9월 30일, 유럽 연합이 후원한 조지아 분쟁에 관한 독립 국제 사실 조사단은 수개월간의 상호 도발이 선행되었지만, "공개적인 적대 행위는 2008년 8월 7일에서 8일 밤에 시작된 츠힌발리 마을과 주변 지역에 대한 대규모 조지아 군사 작전으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2.5. 2008년 전쟁 이후
2016년,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러시아와의 통합에 관한 국민투표가 제안되었으나 무기한 보류되었다. 2017년 남오세티야 국호 변경 국민투표가 2017년 4월 9일에 실시되었으며, 투표자의 4분의 3 이상이 "남오세티야 공화국"과 "알라니야국"이라는 명칭에 법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남오세티야 헌법 개정안을 지지했다.
남오세티야는 이날 자비예프 살해 사건 이후 2020년부터 2021년까지 가장 중요한 시위로 동요했다. 아나톨리 비빌로프에 대한 남오세티야 야당의 목소리 높은 일원이었던 자비예프는 남오세티야 경찰에 의해 고문으로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수개월간의 시위와 여러 정부 장관의 해임이 이어졌다.
2022년 3월 26일, 아나톨리 비빌로프 대통령은 남오세티야군이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파병되었다고 발표했다. 비빌로프 대통령은 2022년 3월 30일 남오세티야가 러시아의 일부가 되기 위한 법적 절차를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러시아 정치인들은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러시아 법이 외국 (일부)의 연방 가입을 허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오세트인들의 의지를 표현"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세트 지도자 비빌로프는 장문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병합에 관한 국민투표와 북오세티야 가입에 관한 두 번째 투표 등 두 차례의 국민투표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2022년 4월 7일 선거 절차를 시작했다. 5월 13일, 병합 국민투표는 7월 17일로 예정되었다.
비빌로프가 2022년 남오세티야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신임 대통령 알란 가글로예프는 5월 30일 국민투표를 중단했다. 가글로예프는 2022년 8월 조지아와의 국경 통과 지점이 한 달에 열흘간 개방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3. 지리
남오세티야는 캅카스 산맥의 남사면에 위치한 산악 지역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접경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은 주로 대캅카스 산맥의 남쪽 경사면과 그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구릉지대는 남오세티야 중앙부에 위치한 이베리아 평원의 일부이다. 리히 산맥이 남오세티야의 서쪽 지리적 경계를 형성하지만, 남오세티야의 북서쪽 모퉁이는 이 산맥의 서쪽에 위치한다.
대캅카스 산맥은 남오세티야와 러시아의 북쪽 국경을 이룬다. 남오세티야에서 러시아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는 로키 터널을 통과하는 트란스캅카스 고속도로(TransKAM)뿐이며, 이 도로는 1986년에 완공되었다. 남오세티야에 위치한 트란스캅카스 고속도로 구간은 명목상 조지아의 S10 고속도로의 일부이지만, 사실상 트빌리시는 이 부분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로키 터널은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당시 러시아군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러시아와 남오세티야 사이 캅카스 산맥을 통과하는 유일한 직통로이기 때문이다.

남오세티야의 면적은 약 3900 km2이며, 산맥을 경계로 인구가 더 많은 북오세티야(러시아 내 공화국)와 분리되어 남쪽으로는 조지아의 므트크바리강 거의 근처까지 뻗어 있다. 남오세티야의 89% 이상이 해발 1000 m 이상에 위치하며,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3938 m의 할라차산이다.
3.1. 지형

대캅카스 산맥에 존재하는 약 2,000개의 빙하 중 대략 30%가 조지아 내에 위치한다. 이 중 대 리아흐비 강 유역의 10개 빙하와 리오니강 유역의 일부 빙하가 남오세티야에 속한다.
남오세티야 대부분은 쿠라강 유역에 속하며, 북서부 일부는 흑해 유역에 속한다. 리히 산맥과 라차 산맥이 이 두 유역을 나누는 분수계 역할을 한다. 남오세티야의 주요 강으로는 대 리아흐비 강, 소 리아흐비 강, 크사니강, 메주다 강, 틀리돈 강, 살타니스 운하, 프차 강 및 기타 여러 지류들이 있다.
3.2. 기후
남오세티야의 기후는 동쪽으로부터의 아열대 기후 영향과 서쪽으로부터의 지중해성 기후 영향을 받는다. 대캅카스 산맥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막아주는 장벽 역할을 하여 지역 기후를 완화시키는데, 이로 인해 높은 고도에서도 북캅카스보다 따뜻하다. 남오세티야의 기후대는 흑해와의 거리 및 고도에 따라 결정된다. 조지아 동부 평야는 산맥에 의해 흑해의 영향으로부터 차단되어 더 대륙성인 기후를 나타낸다.
구릉지대와 산악 지역(대캅카스 산맥 포함)은 시원하고 습한 여름과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을 경험하며, 많은 지역에서 적설량이 종종 2 m를 초과한다. 남오세티야 서쪽에서 흑해로부터 유입되는 습한 공기 덩어리는 종종 리히 산맥에 의해 차단된다. 남오세티야에서 가장 습한 시기는 일반적으로 봄과 가을이며, 겨울과 여름은 가장 건조한 경향이 있다. 고도는 남오세티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해발 1500 m 이상의 기후 조건은 저지대보다 훨씬 춥다. 해발 2000 m 이상 지역은 여름철에도 종종 서리가 내린다.
남오세티야의 1월 평균 기온은 약 4 °C이며, 7월 평균 기온은 약 20.3 °C이다. 남오세티야의 연평균 강수량은 약 598 mm이다. 일반적으로 남오세티야 대부분 지역의 여름 평균 기온은 20 °C에서 24 °C 사이이며, 겨울 평균 기온은 2 °C에서 4 °C 사이이다. 습도는 비교적 낮고 남오세티야 전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500 mm에서 800 mm이지만, 고산 기후 및 고지대 지역은 뚜렷한 미기후를 나타낸다.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강수량이 조지아 동부 평야보다 때때로 두 배나 많다. 고산 기후 조건은 약 2100 m에서 시작되며, 3600 m 이상에서는 일 년 내내 눈과 얼음이 존재한다.
남오세티야 국경을 순찰하는 러시아군은 "잠식 점령"을 통해 지역 경계를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조지아가 통제하는 영토로 한 번에 몇 피트씩 은밀하게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정치
남오세티야는 대통령제를 채택한 공화국으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간의 권력 분립을 기반으로 하며, 다당제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러시아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놓여 있으며, 정치적 자율성은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주요 정당들이 활동하고 있으나, 정치 상황은 러시아와의 관계 및 내부 권력 구조에 크게 좌우된다.
4.1. 정부 구조
남오세티야 헌법 제47조에 따르면, 남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이다. 공화국 대통령은 직접 보통 선거로 5년 임기로 선출되며, 동일 인물은 최대 2회 연임할 수 있다. 남오세티야의 입법 기관은 단원제 의회로, 34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17개 단일선거구와 비례대표제로 선출된 17명의 대표로 구성된 혼합형 선거제도를 통해 5년 임기로 선출된다 (헌법 제57조).
현재 대통령은 2022년 5월 24일부터 재임 중인 알란 가글로예프이며, 총리는 콘스탄틴 주소예프이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이전까지 남오세티야는 조지아인이 거주하는 마을과 오세트인이 거주하는 마을이 뒤섞인 형태였다. 오세트인이 다수인 수도 츠힌발리와 대부분의 다른 오세트인 거주 지역은 분리주의 정부가 통치했고, 조지아인이 거주하는 마을과 타운은 조지아 정부가 관리했다. 이러한 두 공동체의 근접성과 혼합은 조지아-오세티야 분쟁을 특히 위험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민족적으로 순수한 영토를 만들려는 어떠한 시도도 대규모 인구 이동을 수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분쟁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며, 남오세티야 분리주의 당국은 트빌리시로부터 사실상 독립하여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다. 양측 간에 주기적으로 회담이 열렸지만,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정부(1993년~2003년) 하에서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그의 후임자인 미헤일 사카슈빌리(2004년 당선)는 조지아 정부 권한의 재확립을 정치적 우선 과제로 삼았다. 2004년 5월 남서부 아자리야 주의 사실상 독립을 성공적으로 종식시킨 후, 그는 남오세티야에서도 유사한 해결책을 모색하겠다고 약속했다. 2004년 충돌 이후, 조지아 정부는 이 문제를 국제적 관심사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 2005년 1월 25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 평의회 의원 총회 회의에서 남오세티야 분쟁 해결을 위한 조지아의 비전을 제시했다. 10월 말, 주라브 노가이델리 총리는 빈에서 열린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상임이사회에서 조지아의 행동 계획을 발표했으며, 미국 정부와 OSCE는 이를 지지했다. 남오세티야 사실상 당국은 이 계획이 "현실적이지 않으며", "남오세티야 측에 새로운 것이 없다"고 반응했다. 12월 6일, 류블랴나에서 열린 OSCE 각료이사회는 조지아의 평화 계획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각료이사회 이전에 러시아 외무부는 조지아 계획을 거부하며, 2004년 9월 UN 총회에서 사카슈빌리가 제시한 계획(남오세티야 측이 선호했던 계획)과 다르다고 밝혔다. OSCE 결의안 이후, 남오세티야 측은 조지아 계획을 연상시키는 자체 계획을 발표하여 트빌리시에서 낙관론을 불러일으켰다.
4.2. 주요 정당 및 정치 상황
남오세티야의 주요 정당으로는 통일 오세티야, 니하스당, 인민당 등이 활동하고 있다.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니하스당 소속의 알란 가글로예프가 현직 대통령이었던 아나톨리 비빌로프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비빌로프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통합을 적극 추진하려 했으나, 가글로예프 대통령은 이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며 러시아와의 통합 관련 국민투표를 연기한 바 있다.
2020년부터 2021년까지는 이날 자비예프 살해 사건으로 인해 남오세티야에서 상당한 규모의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야당 인사이던 자비예프가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이 사건은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으며, 여러 정부 각료가 해임되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남오세티야의 정치 상황은 러시아의 영향력과 내부 권력 투쟁,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4.3. 행정 구역

남오세티야는 4개의 라이온(지방)과 1개의 직할시로 구성된다.
- 자우구 (드자우 라이온)
- 즈나우르구 (즈나우르 라이온)
- 레닌고르구 (레닌고르 라이온)
- 츠힌발구 (츠힌발리 라이온)
- 츠힌발리 (직할시)
5. 군사
남오세티야의 군대는 2017년 러시아 연방군에 부분적으로 통합되었다. 러시아군은 츠힌발리에 주둔하는 제4호위군사기지를 설립했으며, 도시 북쪽(자르쳄)과 자바 인근 우가르단타 마을(러시아 공수부대 분견대 주둔)에 훈련장을 두고 있다. 또한 러시아는 트빌리시 통제 하의 조지아와의 경계선 근처에 약 20개의 소위 "군사화된 국경수비대 기지"를 설치했으며, 이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지휘 및 책임 하에 남오세티야와 조지아 간의 "국경"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남오세티야에는 약 3,000~3,500명의 러시아 군인과 약 1,500명의 FSB 요원이 국경수비대 기지에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오세티야 사실상 당국에 따르면, 약 450명의 남오세티야 시민이 제4 러시아 군사기지에서 근무하고 있다.
2022년 3월 26일, 당시 대통령 비빌로프는 남오세티야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기간 동안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고 밝혔으며, "우리 군인들은 러시아를 방어하고, 오세티야도 방어하기 위해 간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군인의 약 4분의 1이 탈영하여 남오세티야로 도보로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비빌로프는 나중에 탈영병들이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6. 국제적 지위와 대외 관계
남오세티야는 2008년 전쟁 이후 러시아에 의해 독립 국가로 승인받았으나, 국제 사회의 대다수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조지아의 영토로 간주한다. 현재 러시아,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나우루, 시리아 등 5개 유엔 회원국만이 남오세티야를 독립국으로 승인하고 있다. 조지아는 남오세티야를 자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며 '피점령지법'을 통해 이 지역과의 교류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남오세티야는 러시아에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과거부터 러시아 연방으로의 편입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6.1. 독립 선언과 국제적 승인 현황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러시아는 남오세티야를 독립 국가로 승인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일방적인 승인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유럽 평의회 등 서방 블록으로부터 조지아의 영토 보전 침해라는 이유로 규탄을 받았다. EU의 외교적 대응은 동유럽 국가들과 영국의 강경 대응 요구, 그리고 독일, 프랑스 등 다른 국가들의 러시아 고립 회피 의사로 인해 지연되었다. 전 미국 특사 리처드 홀브룩은 이 분쟁이 러시아 서쪽 국경을 따라 다른 구소련 국가들의 분리주의 운동을 부추길 수 있다고 말했다. 며칠 후, 니카라과가 남오세티야를 승인한 두 번째 국가가 되었다. 베네수엘라는 2009년 9월 10일 남오세티야를 승인하여 세 번째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이후 나우루와 시리아가 승인국 명단에 추가되었다.
유럽 연합, 유럽 평의회, NATO 및 대부분의 유엔 회원국은 남오세티야를 독립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분리주의 정부가 통치하는 사실상의 공화국은 1992년 첫 번째 국민투표가 대부분의 정부로부터 유효성을 인정받지 못한 후, 2006년 11월 12일 두 번째 독립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츠힌발리 선거 당국에 따르면, 국민투표는 조지아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과반수의 지지를 얻었으며, 남오세티야 유권자의 99%가 독립을 지지했고 투표율은 95%였다. 이 국민투표는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스웨덴 등에서 온 34명의 국제 감시단에 의해 78개 투표소에서 감시되었다. 그러나 민족적 조지아인의 참여 부족과 트빌리시 조지아 정부의 승인 없는 그러한 국민투표의 불법성으로 인해 유엔, 유럽 연합, OSCE, NATO 및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유럽 연합, OSCE, NATO는 이 국민투표를 규탄했다.
분리주의자들이 실시한 국민투표와 당시 남오세티야 대통령이었던 에두아르드 코코이티에 대한 선거와 병행하여, 오세트인 반대 운동("평화를 위한 남오세티야 인민")은 남오세티야 내 조지아 통제 지역에서 자체 선거를 조직했으며, 이 지역의 조지아인과 일부 오세트인 주민들은 드미트리 사나코예프를 남오세티야의 대안 대통령으로 지지하는 투표를 했다. 사나코예프의 대안 선거는 민족적 조지아인 인구의 전폭적인 지지를 주장했다.

2007년 4월, 조지아는 분리주의 운동의 민족적 오세트인들로 구성된 남오세티야 임시 행정부를 창설했다. 드미트리 사나코예프가 이 기구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임시 행정부는 최종 지위와 분쟁 해결에 관해 중앙 조지아 당국과 협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7년 5월 10일, 사나코예프는 조지아 대통령에 의해 남오세티야 임시 행정부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2007년 7월 13일, 조지아는 총리 주라브 노가이델리를 의장으로 하는 국가위원회를 설립하여 조지아 국가 내 남오세티야의 자치 지위를 개발하도록 했다. 조지아 관리들에 따르면, 이 지위는 오세트인 사회 내 모든 세력 및 공동체와의 "포괄적인 대화"의 틀 내에서 구체화될 예정이었다.
남오세티야, 트란스니스트리아, 압하지야는 때때로 구소련의 "동결 분쟁" 지역으로 불린다.
현재까지 남오세티야를 독립국으로 승인한 유엔 회원국은 다음과 같다.
기타 미승인 국가 중 남오세티야를 승인한 곳은 다음과 같다.
- 압하지야
- 트란스니스트리아
- 아르차흐 공화국 (2024년 해체 전까지)
-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사실상)
-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2022년 러시아 편입 전까지)
-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2022년 러시아 편입 전까지)
과거 승인했으나 철회한 국가는 다음과 같다.
- 투발루 (2011년 승인, 2014년 철회)
6.2. 조지아와의 관계
남오세티야의 독립 선언 이후 조지아와의 관계는 지속적인 갈등과 영토 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조지아는 남오세티야를 자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며 어떠한 형태의 독립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조지아의 국내법인 '피점령지법'을 통해 명확히 드러나며, 이 법은 남오세티야 및 압하지야로의 허가 없는 방문이나 경제 활동을 엄격히 규제한다.
6.2.1. 조지아의 입장 및 점령지법
2008년 10월 말,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조지아 의회가 통과시킨 점령지 관련 법안에 서명했다. 이 법은 분리 지역인 압하지야와 츠힌발리(구 남오세티야 자치주 영토)를 대상으로 한다. 이 법은 해당 영토로의 자유로운 이동, 경제 활동, 부동산 거래 체결에 대한 제한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이 법에 따르면 외국 시민은 조지아를 통해서만 두 분리 지역에 입국해야 한다. 압하지야 입국은 주그디디시에서, 남오세티야 입국은 고리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조지아 나머지 지역에서 남오세티야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는 고리시를 통과하지만, 이 도로는 2008년 이후 에르그네티에서 양방향으로 폐쇄되었다. 조지아인과 남오세티야인에게 개방되었던 주요 통과 지점인 아할고리구로의 통로는 2019년부터 남오세티야에 의해 폐쇄되었다. 또한 남오세티야 당국은 외국인의 입국을 "러시아 연방 영토를 통해서만"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조지아 법규는 분리 지역으로의 입국이 불법으로 간주되지 않는 "특별한" 경우도 열거하고 있다. 해당 지역으로의 여행이 "조지아의 국가 이익에 부합하거나, 분쟁의 평화적 해결, 점령 해제 또는 인도주의적 목적"에 기여하는 경우 분리 지역 입국에 대한 특별 허가가 발급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은 또한 조지아 법규에 따라 허가, 면허 또는 등록이 필요한 경우 기업 활동이든 비기업 활동이든 모든 유형의 경제 활동을 금지한다. 또한 해당 지역을 통한 항공, 해상 및 철도 통신과 국제 환승, 광물 탐사 및 송금을 금지한다. 경제 활동을 다루는 조항은 1990년까지 소급 적용된다.
이 법은 군사 점령을 수행한 국가인 러시아 연방이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에서의 인권 침해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러시아 연방은 또한 조지아에 거주하며 적절한 허가를 받고 점령지에 입국한 조지아 시민, 무국적자 및 외국 시민에게 가해진 물질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 책임도 진다. 이 법은 또한 점령지에서 활동하는 사실상의 국가 기관 및 공무원은 조지아가 불법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법은 분리 지역에 대한 "조지아의 완전한 관할권 회복"이 실현될 때까지 유효하다.
2009년 11월,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새로운 조지아 대사관 건물 개관식에서 미헤일 사카슈빌리 조지아 대통령은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주민들도 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이곳은 여러분의 집이기도 하며, 여기서 여러분은 항상 지지와 이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6.3. 러시아와의 관계
남오세티야는 2008년 전쟁 이후 러시아의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지원 하에 놓여 있으며, 사실상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에 있다.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승인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며 재정 지원을 제공하는 등 남오세티야의 존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남오세티야의 대러시아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한편, 러시아 연방으로의 편입 논의를 지속적으로 야기하고 있다.
6.3.1. 러시아의 지원 및 영향력
남오세티야는 러시아로부터 군사적, 정치적, 재정적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승인하고, 이곳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이러한 군사적 지원은 남오세티야의 안보를 보장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정치적으로도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남오세티야의 주요 정치적 결정은 러시아와의 협의를 거치는 경우가 많으며, 러시아는 남오세티야 정부 구성에도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적으로 남오세티야는 러시아의 재정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남오세티야 국가 예산의 대부분은 러시아로부터의 지원금으로 충당되며, 이는 남오세티야 경제가 자립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야기한다. 2010년까지 러시아의 기부금은 남오세티야 예산의 거의 99%를 차지했으며, 2021년에는 이 비율이 83%로 감소했지만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이다. 2021년 11월에는 러시아에서 남오세티야로 이어지는 예비 전력선이 가동되어 지역에 중단 없는 전력 공급을 보장하는 데 기여했다. 이 건설에는 13.00 억 RUB 이상이 소요되었으며, 러시아의 남오세티야 투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2015년 3월 18일, 러시아와 남오세티야는 "동맹 및 통합" 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는 남오세티야 군대를 러시아군에 통합하고, 남오세티야 세관을 러시아 세관에 통합하며, 러시아가 남오세티야 국가 공무원 급여를 북캅카스 연방관구와 동일한 수준으로 지급하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AP 통신은 이 조약을 "거의 완전한 통합"이라고 기술하며 2014년 러시아와 압하지야 간의 협정과 비교했다. 조지아 외무부는 이 조약 체결을 러시아에 의한 분쟁 지역의 "실질적 병합"이라고 규정했으며, 미국과 유럽 연합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6.3.2. 러시아 연방 편입 시도 및 논의
2008년 8월 30일, 남오세티야 의회 부의장 타르잔 코코이티는 남오세티야와 북오세티야가 하나의 통일된 러시아 국가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이 지역이 곧 러시아에 흡수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러시아군과 남오세티야군은 주로 조지아인이 거주하는 남오세티야 동부의 가장 큰 마을인 아할고리 주민들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수락하거나 떠날 것을 선택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남오세티야 대통령이었던 에두아르드 코코이티는 나중에 남오세티야가 러시아에 합류함으로써 독립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는 많은 생명을 희생하여 얻은 독립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오세티야는 러시아에 합류할 계획이 없습니다." 이는 그가 같은 날 일찍 남오세티야가 러시아 연방 내 북오세티야에 합류할 것이라고 시사했던 이전 발언과 모순된다는 지적이 있었다.
2015년 12월, 레오니트 티빌로프 대통령은 러시아 연방 주체인 북오세티야-알라니야와 유사하게 국호를 남오세티야-알라니야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티빌로프는 더 나아가 2017년 4월 이전에 러시아 연방 가입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통일된 "오세티야-알라니야"를 이룰 것을 제안했다. 2016년 4월, 티빌로프는 그해 8월 이전에 국민투표를 실시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5월 30일, 티빌로프는 2017년 4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 이후로 국민투표를 연기했다. 2017년 국호 변경 국민투표에서는 투표자의 거의 80%가 국호 변경을 지지했으며, 대통령 선거에서는 모스크바의 지지를 받았던 현직 티빌로프(비빌로프와 달리 통합 국민투표를 조속히 실시하지 않으려는 모스크바의 바람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음)를 누르고 아나톨리 비빌로프가 승리했다.
2022년 3월 30일, 아나톨리 비빌로프 대통령은 가까운 시일 내에 러시아 연방과의 통합을 위한 법적 절차를 시작할 의사를 밝혔으나, 이후 2022년 남오세티야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 후임 대통령인 알란 가글로예프는 러시아와의 통합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며 관련 국민투표를 중단시켰다.
6.4. 기타 국가 및 국제기구와의 관계
남오세티야는 러시아와 조지아 외의 다른 국가들과는 매우 제한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는 남오세티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조지아의 영토로 간주한다. 유엔, 유럽 연합(EU),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등 주요 국제기구 역시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조지아의 영토 보전을 지지하는 공식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 국제기구는 남오세티야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며, 중재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남오세티야 정부와의 공식적인 관계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남오세티야는 압하지야, 트란스니스트리아 등 다른 미승인 국가들과는 상호 승인 및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7. 경제
남오세티야의 경제는 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러시아로부터의 재정 지원이 국가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경제 발전이 저해되고 있으며, 산업 기반은 매우 취약한 실정이다.
7.1. 주요 산업 및 현황

남오세티야의 경제는 주로 농업 중심이며, 경작지는 국토 면적의 10% 미만이다. 주요 생산물은 곡물, 과일, 포도 등이다. 임업과 축산업도 유지되고 있다. 수도인 츠힌발리 주변에는 일부 공업 시설도 존재한다. 1990년대 전쟁 이후 남오세티야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002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남오세티야의 GDP는 1500.00 만 USD(1인당 250 USD)로 추정되었다. 2017년 남오세티야 행정부는 GDP를 거의 1.00 억 USD로 추산했다. 남오세티야의 빈곤선은 2007년 4분기 월 3062 RUB로, 러시아 평균보다 23.5% 낮았으나 남오세티야 주민들의 소득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인구 대다수는 자급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남오세티야 당국은 밀가루 생산량을 늘려 밀가루 수입 의존도를 줄임으로써 재정을 개선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2008년 밀 재배 면적을 130헥타르에서 1,500헥타르로 10배 늘렸다. 2008년 밀 수확량은 2,500톤으로 예상되었다. 남오세티야 농업부는 2008년에 일부 트랙터를 수입했으며, 2009년에는 더 많은 농기계를 도입할 예정이었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이전, 남오세티야의 산업은 22개의 소규모 공장으로 구성되어 2006년 총생산액은 6160.00 만 RUB이었다. 2007년에는 단 7개의 공장만이 가동되었다. 2009년 3월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생산 시설이 가동을 멈추고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성공적인 공장조차도 노동력 부족, 부채, 운전자본 부족을 겪고 있었다. 가장 큰 현지 기업 중 하나는 130명의 직원을 둔 에말프로보드 공장이다. 또한 2008년 전쟁 이후 조지아는 아할고리 지역에 대한 전력 공급을 차단하여 해당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악화시켰다.
2021년 말 기준, 취업자 수는 20,734명, 실업자로 등록된 사람은 2,449명이었으며, 총 노동 가능 연령 인구는 34,308명(남성 18~65세, 여성 18~60세)이었다. 남오세티야가 보유한 유일하게 중요한 경제 자산은 러시아와 조지아를 연결하는 로키 터널 통제권으로, 전쟁 전 남오세티야 정부는 화물 통행에 대한 관세를 통해 예산의 상당 부분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아르메니아는 조지아에게 남오세티야와 조지아 간의 통과 경로를 개설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조지아는 이를 거부했다. 남오세티야의 2022년~2025년 사회경제 발전 프로그램은 러시아가 자금을 지원한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남오세티야가 2025년까지 북캅카스 연방관구의 사회경제적 지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7.2.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의존
2008년 전쟁 이후 남오세티야와 그 경제는 러시아의 경제 지원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전쟁 1년 후, 전 대통령 에두아르드 코코이티는 재건 작업에 대한 러시아의 원조에 감사를 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까지 러시아의 기부금은 남오세티야 예산의 거의 99%를 차지했다. 2021년까지 이 비율은 83%로 감소했지만 (총예산 88.00 억 RUB 중 러시아 연방의 남오세티야 공화국에 대한 재정 지원 73.00 억 RUB),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이다.
2021년 11월에는 러시아에서 남오세티야로 이어지는 예비 전력 송전선이 가동되어 이 지역에 중단 없는 전력 공급을 보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건설에는 13.00 억 RUB 이상이 소요되었으며, 남오세티야에 대한 러시아 투자 프로그램의 틀 내에서 건설되었다.
7.3. 통화

남오세티야는 법정 통화로 러시아 루블(RUB)을 사용한다. 과거에는 기념주화인 '자린'(зӕрин자린오세트어)을 발행하기도 했으나, 이는 실제 통용 목적보다는 수집가들을 위한 것이었다. 자린은 20, 25, 50 자린 동전과 100 자린 바 형태로 존재하며, 순은(.925) 또는 순금(.999)으로 제작되었다.
남오세티야는 러시아 루블을 모델로 한 '남오세티야 루블'도 공식 통화로 지정하고 있으나, 실제 유통량은 매우 적다. 1, 5, 10, 20, 50 코페크 동전과 1, 2, 5, 10, 50, 100 루블 동전을 주조하지만 지폐는 발행하지 않는다. 남오세티야 루블은 러시아 루블과 등가로 고정되어 있으며, 남오세티야, 러시아, 압하지야에서 법정 통화로 인정되지만 러시아 루블에 비해 유통량이 훨씬 적고 주로 의례적인 목적으로 사용된다. 일상생활에서는 러시아 루블이 압도적으로 사용되며, 남오세티야 루블과 러시아 루블은 종종 혼용되고, 남오세티야 지폐가 없기 때문에 러시아 지폐와 남오세티야 동전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8. 사회
남오세티야 사회는 오세트인이 주를 이루지만, 조지아인, 러시아인 등 소수 민족도 함께 거주하는 다민족 사회의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분쟁으로 인한 인구 이동과 민족 갈등의 역사는 사회 통합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공용어로는 오세트어와 러시아어가 사용되며, 종교적으로는 동방 정교회가 주를 이룬다.
8.1. 인구 구성

조지아-오세티야 분쟁 이전 남오세티야 인구의 약 3분의 2는 오세트인이었고 25~30%는 조지아인이었다. 남오세티야 동부 4분의 1에 해당하는 아할고리 지역과 그 주변은 주로 조지아인이 거주했으며, 중부와 서부는 주로 오세트인이 거주했다. 북부 산악 지대 대부분은 인구가 희박하다.
조지아의 2002년 인구 조사는 당시 조지아의 실질적인 통제 하에 있던 지역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오세티야에 대해서는 불완전했다. 이는 아할고리 지역의 조지아인 거주 지역과 츠힌발리 주변, 파타라 리아흐비 계곡 및 디디 리아흐비 계곡의 조지아인 공동체에 해당했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2007년 남오세티야에는 47,000명의 오세트인과 17,500명의 조지아인이 거주했다.
2008년 전쟁 당시 조지아 관리들에 따르면 15,000명의 조지아인이 조지아 본토로 이주했으며, 남오세티야 관리들은 30,000명의 오세트인이 북오세티야로 피난했고 총 500명의 남오세티야 시민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남오세티야 당국이 실시한 2015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의 총인구는 53,532명이었으며, 이 중 오세트인이 48,146명(89.9%), 조지아인이 3,966명(7.4%), 러시아인이 610명(1.1%)이었다. 조지아 당국은 이 데이터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공식 출생률과 학교 출석률을 기반으로 한 추정치는 약 39,000명이었을 수 있으며, 2009년의 독립적인 추정치는 인구를 26,000명으로 보았다.
남오세티야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1월 1일 기준 인구 추정치는 56,520명이었다. 이 중 33,054명이 츠힌발리에 거주했다.
다음은 남오세티야의 시대별 민족 구성이다.
조사 연도 | 오세트인 | 조지아인 | 러시아인 | 아르메니아인 | 유대인 | 기타 | 총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26 | 60,351 | 69.07% | 23,538 | 26.94% | 157 | 0.18% | 1,374 | 1.57% | 1,739 | 1.99% | 216 | 0.25% | 87,375 |
1939 | 72,266 | 68.10% | 27,525 | 25.94% | 2,111 | 1.99% | 1,537 | 1.45% | 1,979 | 1.86% | 700 | 0.66% | 106,118 |
1959 | 63,698 | 65.80% | 26,584 | 27.46% | 2,380 | 2.46% | 1,555 | 1.61% | 1,723 | 1.78% | 867 | 0.90% | 96,807 |
1970 | 66,073 | 66.46% | 28,125 | 28.29% | 1,574 | 1.58% | 1,254 | 1.26% | 1,485 | 1.49% | 910 | 0.92% | 99,421 |
1979 | 65,077 | 66.41% | 28,187 | 28.77% | 2,046 | 2.09% | 953 | 0.97% | 654 | 0.67% | 1,071 | 1.09% | 97,988 |
1989 | 65,232 | 66.21% | 28,544 | 28.97% | 2,128 | 2.16% | 984 | 1.00% | 397 | 0.40% | 1,242 | 1.26% | 98,527 |
2015 | 48,146 | 89.94% | 3,966 | 7.41% | 610 | 1.14% | 378 | 0.71% | 1 | 0.00% | 431 | 0.81% | 53,532 |
8.2. 언어
남오세티야의 공용어는 오세트어와 러시아어이다. 오세트어는 이란어파에 속하는 언어로, 오세트인의 모국어이다. 현재 러시아의 북오세티야-알라니야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키릴 문자를 사용한다. 러시아어는 소련 시절부터 행정, 교육, 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현재도 남오세티야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북오세티야와의 통합 및 러시아 연방 편입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상황도 러시아어 사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수 민족인 조지아인들은 조지아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분쟁 이후 그 사용 범위는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8.3. 종교
남오세티야에서 주로 믿는 종교는 동방 정교회이다. 오세트인, 조지아인, 러시아인 대부분이 정교회 신자이다. 오세트 전통 신앙의 요소들도 일부 남아있으며, 특히 우아스트르지(성 게오르기우스와 동일시됨) 숭배는 중요한 민속 신앙으로 여겨진다. 소수 종교로는 이슬람교 등이 있으나 그 영향력은 미미한 편이다.
9. 문화
남오세티야의 문화는 오세트인의 전통과 러시아 문화의 영향이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교육 시스템은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스포츠 분야에서는 축구가 인기가 있다. 국가 공휴일은 역사적 사건과 전통적 의미를 기리는 날들로 구성되어 있다.
9.1. 교육
남오세티야의 주요 고등 교육기관은 수도 츠힌발리에 위치한 남오세티야 국립대학교이다. 이 대학은 남오세티야의 학문과 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남오세티야 교육 당국은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을 러시아의 고등 교육기관에 진학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는 러시아의 교육 시스템과 남오세티야의 교육 시스템 간의 연계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반적으로 남오세티야의 교육 시스템은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러시아어 교육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9.2. 스포츠
남오세티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 중 하나는 축구이다. 남오세티야 축구 국가대표팀이 구성되어 있으며, 국제 축구 연맹(FIFA)이나 유럽 축구 연맹(UEFA)의 회원은 아니지만, 독립 축구 협회 연맹(CONIFA)이 주관하는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남오세티야 대표팀은 2019년 CONIFA 유러피언 풋볼컵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레슬링 등 격투기 종목이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며, 러시아 스포츠계와의 교류도 활발한 편이다.
9.3. 공휴일
남오세티야의 주요 국가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 1월 1일~2일: 새해
- 1월 7일: 정교회 성탄절
- 2월 23일: 조국 수호자의 날
-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
- 5월 19일: 남오세티야 국기의 날
- 5월 29일: 남오세티야 공화국 독립 선언 기념일
- 6월 12일: 러시아의 날
- 8월 26일: 러시아의 남오세티야 독립 승인 기념일
- 9월 20일: 공화국의 날 (독립 기념일)
- 11월 23일: 용기와 국민 통합의 날 (성 게오르기우스 축일 / 우아스트르지)
이러한 공휴일들은 남오세티야의 역사적 사건, 민족적 정체성, 그리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10. 인권 상황 및 논란
남오세티야는 분쟁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1991~1992년 남오세티야 전쟁과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을 포함한 여러 차례의 무력 충돌로 인해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광범위한 난민 문제와 강제 이주가 초래되었다.
특히 조지아계 주민들에 대한 인권 침해 및 민족 청소 논란은 국제 사회의 주요 우려 사항이다. 2008년 전쟁 당시 남오세티야군과 러시아군에 의해 조지아계 주민들이 거주하던 마을들이 파괴되고, 주민들이 강제로 추방당했다는 보고가 다수 존재한다. 국제인권단체들은 이러한 행위가 국제인도법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해왔다. 전쟁 이후에도 조지아계 난민들의 귀환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이들의 재산권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남오세티야 내부에서도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기본적인 인권이 제한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2020년에는 야당 운동가 이날 자비예프가 경찰 구금 중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여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는 남오세티야 내 사법 시스템과 구금 시설의 인권 상황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러시아군과 남오세티야 보안군이 조지아와의 행정경계선(ABL)을 따라 철조망, 울타리 등을 설치하며 이른바 '경계화(borderization)'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현지 주민들의 이동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고 농경지 접근이 차단되는 등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가족 이산, 생계 수단 상실 등의 문제가 야기되고 있으며, 국제 사회는 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국제 사회의 접근이 제한적이라는 점도 남오세티야의 인권 상황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데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독립적인 인권 감시 기구나 국제 구호 단체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여, 정확한 실태 조사와 피해자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