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나우루 공화국은 오세아니아의 미크로네시아에 위치한 섬나라로, 지리적으로 태평양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은 동쪽으로 약 300 km 떨어진 키리바시의 바나바섬이다. 면적은 21 km2로 바티칸 시국과 모나코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작은 나라이며, 공화국 중에서는 가장 작고, 섬나라 중에서도 가장 작다. 인구는 약 10,800명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적다. 나우루라는 이름은 '해변으로 간다'는 뜻의 나우루어 'Anáoero아나오에로나우루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과거에는 '플레전트섬'(Pleasant Island플레전트 아일랜드영어)으로도 불렸다.
나우루의 역사는 약 3,000년 전 미크로네시아인과 폴리네시아인의 정착으로 시작되었다. 19세기 말 독일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국제 연맹의 위임통치령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이 공동 관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군에게 점령당했으며, 전쟁 후에는 유엔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가 1968년 독립을 이루었다.
나우루는 풍부한 인광석 매장량 덕분에 20세기 중후반 세계 최고 수준의 1인당 국민소득을 누렸으나,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로 인해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이후 조세 피난처 시도,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외 난민 수용소 운영 등을 통해 경제를 유지하려 했으나, 여전히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일부에서는 종속국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현재 나우루는 유엔, 영국 연방, 태평양 제도 포럼, 아프리카 카리브 태평양 국가 기구 등의 회원국이다.
2. 역사
나우루의 역사는 선사 시대 미크로네시아인과 폴리네시아인의 정착부터 시작되어 유럽인의 발견, 식민 통치, 양차 세계 대전의 영향, 그리고 독립과 그 이후의 경제적 부침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광석 발견은 섬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꾸었으며, 독립 이후 경제 호황과 위기를 동시에 가져왔다.
2.1. 선사 시대와 초기 정착

나우루에 처음으로 사람이 정착한 것은 최소 3,000년 전으로, 미크로네시아인들이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지며, 폴리네시아인의 영향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우루의 선사 시대에 대해서는 비교적 알려진 바가 적지만, 섬이 오랫동안 고립되어 독자적인 언어가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나우루에는 12개의 부족 또는 씨족이 있었으며, 이는 현재 나우루 국기에 있는 12각 별로 상징된다. 나우루인들은 전통적으로 모계 혈통을 따랐다. 주민들은 양식업을 했는데, 밀크피시(나우루어: 이비자, Ibija이비자나우루어) 치어를 잡아 민물에 적응시킨 후 부아다 석호에서 길러 안정적인 식량 공급원으로 삼았다. 그 외 현지에서 재배한 식량으로는 코코넛과 판다누스 열매 등이 있었다. 나우루라는 이름은 '해변으로 간다'는 뜻의 나우루어 'Anáoero아나오에로나우루어'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2.2. 유럽인의 발견과 식민화
1798년, 영국인 선장 존 펀이 그의 교역선 헌터호를 타고 나우루를 발견한 최초의 서양인으로 기록되었으며, 섬의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플레전트섬'Pleasant Island플레전트 아일랜드영어이라고 명명했다. 적어도 1826년부터 나우루인들은 식량과 신선한 식수를 구하기 위해 섬에 들르는 포경선 및 교역선의 유럽인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했다. 마지막 포경선은 1904년에 방문했다.
이 시기 무렵, 유럽 선박에서 탈주한 사람들이 섬에 살기 시작했다. 섬 주민들은 식량을 야자술과 화기로 교환했다. 이 화기들은 1878년에 시작되어 10년간 이어진 나우루 내전에 사용되었다.
영국과의 협정 이후, 독일 제국은 1888년 나우루를 병합하여 행정 관리 목적으로 독일령 뉴기니의 마셜 제도 보호령에 편입시켰다. 독일인의 도착은 내전을 종식시켰고, 왕들이 섬의 통치자로 세워졌다. 아웨이다 왕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길버트 제도에서 온 기독교 선교사들이 1888년에 도착했다. 독일 정착민들은 섬을 "나우오도" 또는 "오나웨로"라고 불렀다. 독일은 거의 30년 동안 나우루를 통치했다. 나우루인 소녀와 결혼한 독일 상인 로베르트 라슈는 1890년에 임명된 최초의 행정관이었다.
1900년, 탐사자 앨버트 풀러 엘리스가 나우루에서 인광석을 발견했다. 태평양 인산염 회사Pacific Phosphate Company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영어는 1906년 독일과의 협정에 따라 매장량 개발을 시작하여 1907년 첫 선적을 수출했다.
2.3. 위임 통치와 신탁 통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나우루는 오스트레일리아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1919년, 연합국은 영국의 조지 5세 국왕이 국제 연맹 위임통치 하의 관리 당국이 되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1919년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정부 간에 체결된 나우루섬 협정은 섬의 행정과 정부 간 영국 인산염 위원회British Phosphate Commission, BPC브리티시 포스페이트 커미션영어에 의한 인광석 채굴을 규정했다. 국제 연맹 위임통치의 조건은 1920년에 작성되었다.
20세기 초, 섬은 인플루엔자 유행병과 지속적인 식민 갈등을 겪었으며, 원주민 나우루인의 사망률은 18%에 달했다. 1923년, 국제 연맹은 오스트레일리아에게 나우루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부여했으며, 영국과 뉴질랜드가 공동 수탁국이 되었다. 1940년 12월 6일과 7일, 독일 보조순양함 코메트와 오리온이 나우루 근해에서 5척의 보급선을 격침시켰다. 그 후 코메트는 나우루의 인광석 채굴 지역, 석유 저장고, 선적용 캔틸레버 구조물 등을 포격했다.

1942년 8월 25일, 일본군이 나우루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비행장 2곳을 건설했는데, 이는 1943년 3월 25일 처음으로 폭격을 받아 나우루로의 식량 공급이 중단되었다. 일본군은 나우루인 1,200명을 추크 제도로 강제 이주시켜 노동자로 일하게 했다. 추크 제도 역시 일본군 점령 하에 있었다. 태평양 섬들에서 일본 본토로 향하는 연합군의 개구리 뜀 작전(아일랜드 호핑) 전략의 일환으로 나우루는 그냥 지나쳐졌다. 나우루는 1945년 9월 13일, 소에다 히사야키 사령관이 섬을 오스트레일리아 육군과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해군에 항복하면서 마침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항복은 제1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사령관 버논 스터디 중장을 대표한 존 로울스톤 스티븐슨 준장이 군함 HMAS 디아만티나 함상에서 받았다. 추크에서 일본군 포로 생활에서 살아남은 나우루인 745명을 송환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그들은 1946년 1월 BPC 선박 트리엔자호를 타고 나우루로 돌아왔다.
1947년 유엔에 의해 신탁통치가 수립되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이 수탁국이 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공동 관리 당국이 되었다. 나우루섬 협정은 첫 번째 행정관을 오스트레일리아가 5년 임기로 임명하도록 규정했으며, 이후의 임명은 세 정부가 결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행정권은 오스트레일리아 단독으로 행사했다.
1948년 나우루 폭동은 중국인 구아노 채굴 노동자들이 임금과 노동 조건에 항의하며 파업을 벌였을 때 발생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행정 당국은 원주민 경찰과 현지인 및 오스트레일리아 관리들로 구성된 무장 자원병을 동원하여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들은 기관단총과 기타 화기를 사용하여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발포하여 2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당했다. 노동자 약 50명이 체포되었고 이 중 2명은 구금 중 총검에 찔려 사망했다. 죄수들을 총검으로 찌른 병사는 기소되었으나 나중에 상처가 "우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소련과 중화민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유엔에 오스트레일리아를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1964년, 나우루 인구를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주 해안의 커티스섬으로 이전하는 제안이 있었다. 당시 나우루는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뉴질랜드 회사들에 의해 인광석이 광범위하게 채굴되어 경관이 심하게 손상되어 1990년대에는 섬이 거주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섬 복구는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1962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 로버트 멘지스는 채굴에 관여한 세 나라가 나우루 주민들을 위한 해결책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며 그들을 위한 새로운 섬을 찾을 것을 제안했다. 1963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커티스섬(나우루보다 훨씬 컸음)의 모든 토지를 매입한 후 나우루인들에게 섬에 대한 부동산 완전소유권을 제공하고 나우루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인 시민이 될 것을 제안했다. 커티스섬으로 나우루인들을 재정착시키는 비용은 1,000만 오스트레일리아 파운드(2022년 기준 3.24 억 AUD)로 추산되었으며, 여기에는 주택 및 기반 시설 건설과 목축업, 농업, 어업 산업 설립 비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나우루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시민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오스트레일리아가 동의하지 않는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 커티스섬에 대한 주권을 부여받기를 원했다. 나우루는 커티스섬으로 이전하는 제안을 거부하고, 대신 나우루에서 자신들의 광산을 운영하는 독립 국가가 되기로 선택했다.
2.4. 독립
나우루는 1966년 1월 내정 자치를 획득했고, 2년간의 제헌 회의를 거쳐 1968년 1월 31일 해머 드로버트 초대 대통령 하에 독립을 달성했다. 1967년 나우루 국민들은 영국 인산염 위원회의 자산을 매입했고, 1970년 6월에는 현지 소유의 나우루 인산염 공사Nauru Phosphate Corporation, NPC나우루 포스페이트 코퍼레이션영어로 관리권이 넘어갔다. 광산 수입은 나우루인들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중 하나로 만들었다. 1989년, 나우루는 섬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의 행정, 특히 인광석 채굴로 인한 환경 피해를 복구하지 못한 점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소했다. 특정 인광석 지대: 나우루 대 오스트레일리아 사건은 나우루의 채굴 지역을 복구하기 위한 법정 밖 합의로 이어졌다.
2.5. 독립 이후의 발전과 위기
독립 후 인광석 수출로 짧은 기간 경제 호황을 누렸으나, 1990년대에 인광석이 고갈되면서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국가 신탁 기금은 잘못된 투자와 부실 관리로 바닥을 드러냈고, 국영 항공사인 나우루 항공의 유일한 항공기가 압류되기도 했다. 경제난 타개를 위해 나우루는 한때 조세 피난처 및 불법 자금세탁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으며, 2001년부터 2008년까지, 그리고 2012년부터 다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로부터 경제 지원을 받는 대가로 나우루 지역처리센터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자 수용시설을 운영했다. 이 시설은 인권 문제로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인해 일부 자료에서는 나우루를 오스트레일리아의 종속국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최근 나우루는 심해 광물 채굴 등 새로운 수입원 모색과 함께 정치적 안정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코로나19 범유행에 대응하여 2020년 3월 17일 리오넬 아잉기메아 대통령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3. 지리
나우루는 적도로부터 남쪽으로 55.95 km 떨어진 남서 태평양에 위치한 21 km2 면적의 타원형 섬이다. 섬은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으며, 썰물 때 드러나고 여러 뾰족한 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산호초의 존재는 항구 건설을 막았지만, 산호초 사이의 수로를 통해 작은 배들이 섬에 접근할 수 있다. 해변에서 내륙으로 150 m에서 300 m 폭의 비옥한 해안 지대가 펼쳐져 있다.
나우루의 지형, 환경, 기후, 생태계는 인광석 채굴로 인해 큰 변화를 겪었으며, 이는 섬의 지속 가능성에 중요한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3.1. 지형과 환경


나우루는 융기된 산호섬으로, 섬 중앙부에는 '톱사이드'Topside톱사이드영어라 불리는 고원이 있다. 이 고원은 과거 풍부한 인광석 매장지였으나, 1세기 이상 지속된 채굴로 인해 현재는 석회암 첨탑이 솟아 있는 황량한 불모지로 변했다. 섬의 가장 높은 지점인 커맨드 리지는 해발 71 m이다. 해안 지대는 좁고 비옥하며, 주민 대부분이 이 지역에 거주한다. 섬의 남서쪽에는 부아다 석호가 유일한 담수호 역할을 한다.
인광석 채굴은 나우루 국토의 약 80%를 황폐화시켰으며, 표토 유실, 식생 파괴 등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야기했다. 채굴 과정에서 발생한 미사와 인산염 유출은 주변 배타적 경제 수역의 해양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쳐 해양 생물의 약 40%가 폐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우루에는 강이 없으며, 부아다 석호는 물이 유입되거나 유출되지 않는 폐쇄성 수역이다.
3.2. 기후
나우루는 적도와 바다에 근접해 있어 연중 덥고 매우 습한 열대 해양성 기후를 나타낸다. 11월부터 2월 사이에는 몬순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내린다. 연간 강수량은 변동성이 크며 엘니뇨 남방 진동(ENSO)의 영향을 받는데, 여러 차례 심각한 가뭄이 기록되기도 했다. 나우루의 기온은 낮에는 30 °C에서 35 °C 사이이며, 밤에는 약 25 °C로 비교적 안정적이다.
나우루에는 하천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은 지붕 집수 시스템을 통해 모으거나, 인광석을 실으러 오는 배들이 밸러스트로 가져온다.
나우루 야렌구의 기후 데이터는 다음과 같다.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평균/합계 |
---|---|---|---|---|---|---|---|---|---|---|---|---|---|
평균 최고기온 (°C) | 30 | 30 | 30 | 30 | 30 | 30 | 30 | 30 | 30 | 31 | 31 | 31 | 30.3 |
일일 평균기온 (°C) | 27.5 | 27.5 | 27.5 | 27.5 | 27.5 | 27.5 | 27.5 | 27.5 | 27.5 | 28 | 28 | 28 | 27.6 |
평균 최저기온 (°C) | 25 | 25 | 25 | 25 | 25 | 25 | 25 | 25 | 25 | 25 | 25 | 25 | 25 |
강수량 (mm) | 280 | 250 | 190 | 190 | 120 | 110 | 150 | 130 | 120 | 100 | 120 | 280 | 2080 |
평균 강수일수 (일) | 16 | 14 | 13 | 11 | 9 | 9 | 12 | 14 | 11 | 10 | 13 | 15 | 152 |
출처: Weatherbase |
3.3. 생태계


나우루의 동물군은 식생 부족과 인광석 채굴의 결과로 매우 빈약하다. 많은 토착 조류들이 서식지 파괴로 인해 사라지거나 희귀해졌다. 섬에는 약 60종의 관속식물이 자생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중 고유종은 없다. 코코넛 농업, 채굴, 그리고 외래종 도입으로 인해 자생 식생이 심각하게 교란되었다.
토착 포유류는 없지만, 토착 곤충, 육상게, 그리고 고유종인 나우루솔새를 포함한 조류가 서식한다. 폴리네시아쥐, 고양이, 개, 돼지, 닭 등은 배를 통해 나우루로 유입되었다. 다양한 산호초 해양 생물 덕분에 낚시는 섬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활동이며, 스쿠버 다이빙과 스노클링 또한 인기가 있다. 유일하게 비옥한 지역은 좁은 해안 지대로, 코코넛나무가 무성하게 자란다. 부아다 석호 주변의 땅에서는 바나나, 파인애플, 채소, 판다누스 나무, 그리고 타마누 나무(칼로필룸 이노필룸)와 같은 토착 활엽수가 자란다.
4. 정치
나우루는 대통령 중심 공화제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이 이루어져 있다. 의회는 단원제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연립 정부가 구성되기도 한다. 사법부는 독립되어 있으며, 행정 구역은 14개로 나뉜다.
4.1. 정부 구조와 의회

나우루는 공화국이며 의원내각제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이며,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신임에 의존한다. 나우루 의회는 19석으로 구성된 단원제이며, 의원들은 3년 임기로 선출된다. 의회는 의원 중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고, 대통령은 5~6명으로 구성된 내각을 임명한다. 2021년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귀화 시민과 그 후손은 의원이 될 수 없다.
나우루에는 정식 정당 구조가 미약하며, 후보자들은 보통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현 의회 의원 19명 중 15명이 무소속이다. 나우루 정치에서 활동해 온 4개의 정당으로는 나우루당, 민주당, 나우루 우선당, 중앙당이 있다. 그러나 정부 내의 정치적 동맹은 정당 소속보다는 확장된 가족 관계에 기반하여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1992년부터 1999년까지 나우루에는 나우루 섬 위원회(NIC)로 알려진 지방 정부 시스템이 있었다. 이는 1951년에 설립된 나우루 지방 정부 위원회의 후속 기구였다. 9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지방 자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NIC는 1999년에 해체되었고 모든 자산과 부채는 중앙 정부에 귀속되었다. 나우루의 토지 소유권은 특이하다: 모든 나우루인은 섬의 모든 토지에 대해 특정 권리를 가지며, 토지는 개인과 가족 그룹이 소유한다. 정부 및 기업 법인은 어떠한 토지도 소유하지 않으며, 토지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토지 소유자와 임대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비나우루인은 섬의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
4.2. 사법
나우루의 대법원은 대법원장이 이끌며, 헌법 문제에 있어 최고 권위를 갖는다. 다른 사건들은 2인 판사로 구성된 항소법원에 상소할 수 있다. 의회는 법원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항소법원의 판결은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에 상소할 수 있었으나, 이는 드물게 발생했으며 2018년 3월 12일 나우루 정부가 일방적으로 협정을 종료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법원의 항소 관할권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하급 법원으로는 지방 법원과 가정 법원이 있으며, 두 법원 모두 대법원 등기소장이기도 한 상주 치안판사가 담당한다. 그 외에 공무원 항소 위원회와 경찰 항소 위원회라는 두 개의 준사법기관이 있으며, 두 기관 모두 대법원장이 주재한다.
4.3. 행정 구역
나우루는 14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뉘며, 이들은 8개의 선거구로 그룹화되고 다시 마을 단위로 세분된다. 가장 인구가 많은 구역은 데니고모두구로, 1,804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이 중 1,497명은 나우루 인산염 공사가 운영하는 "로케이션"이라는 정착촌에 거주한다. 다음 표는 2011년 인구 조사를 기준으로 한 구역별 인구이다.
번호 | 구역 | 이전 명칭 | 면적 (ha) | 인구 (2011년) | 마을 수 | 인구 밀도 (명/ha) |
---|---|---|---|---|---|---|
1 | 아이워 | Aiue | 110 | 1,220 | 8 | 11.1 |
2 | 아나바르 | Anebwor | 150 | 452 | 15 | 3.0 |
3 | 아네탄 | Añetañ | 100 | 587 | 12 | 5.9 |
4 | 아니바레 | Anybody | 310 | 226 | 17 | 0.7 |
5 | 바이티 | Beidi, Baiti | 120 | 513 | 15 | 4.3 |
6 | 보에 | Boi | 50 | 851 | 4 | 17.0 |
7 | 부아다 | Arenibok | 260 | 739 | 14 | 2.8 |
8 | 데니고모두 | Denikomotu | 118 | 1,804 | 17 | 15.3 |
9 | 에와 | Eoa | 120 | 446 | 12 | 3.7 |
10 | 이유브 | Ijub | 110 | 178 | 13 | 1.6 |
11 | 메넹 | Meneñ | 310 | 1,380 | 18 | 4.5 |
12 | 니보크 | Ennibeck | 160 | 484 | 11 | 3.0 |
13 | 우아보에 | Ueboi | 80 | 318 | 6 | 3.0 |
14 | 야렌 | Moqua | 150 | 747 | 7 | 4.0 |
합계 | 나우루 | Naoero | 2,120 | 10,084 | 169 | 4.8 |
5. 대외 관계
나우루는 독립 이후 영국 연방에 가입했으며, 유엔 등 국제 기구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와는 국방 및 경제 지원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대만)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외 난민 수용소 운영은 국제적인 논란을 낳았다.
5.1. 주요 국가와의 관계
나우루는 대한민국과 197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82년에 수교하였다.
나우루의 가장 중요한 양자 관계는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관계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나우루에 상당한 경제 및 기술 지원을 제공하며, 나우루 국방에 대한 비공식적 책임을 지고 있다. 2005년 9월 오스트레일리아와 나우루 간의 양해각서는 나우루에 재정 지원과 기술 지원을 제공하며, 여기에는 예산 편성을 위한 재무 장관, 보건 및 교육 고문이 포함된다. 이 지원은 나우루가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입국 신청이 처리되는 동안 망명 신청자들을 수용하는 대가로 이루어진다. 나우루는 오스트레일리아 달러를 공식 통화로 사용한다.
나우루는 유엔 회원국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중화민국(ROC, 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PRC, 중국) 양측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얻기 위해 하나의 중국 정책에 따라 인정을 바꾸는 외교를 펼쳤다. 2002년 7월 21일, 나우루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대가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1.30 억 USD을 받았다. 이에 대응하여 중화민국은 이틀 후 나우루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나우루는 이후 2005년 5월 14일 중화민국과 관계를 재수립했고, 2005년 5월 31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는 공식적으로 단절되었다. 그러나 2024년 1월 15일, 나우루는 다시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재수립했다.
2008년 나우루는 코소보를 독립 국가로 인정했고, 2009년에는 러시아, 니카라과, 베네수엘라에 이어 조지아의 분리 독립 공화국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인정한 네 번째 국가가 되었다. 이 인정의 결과로 러시아는 나우루에 5000.00 만 USD의 인도적 지원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7월 15일, 나우루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받은 900.00 만 USD의 개발 원조로 자금을 조달하는 항구 개보수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나우루 정부는 이 원조가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인정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기 복사 측정 프로그램은 섬에 기후 모니터링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5.2. 국제 기구 가입 현황
1968년 독립 후, 나우루는 영국 연방에 특별 회원으로 가입했고, 1999년에 정회원이 되었다. 1991년에는 아시아 개발 은행(ADB)에, 1999년에는 유엔(UN)에 가입했다. 나우루는 남태평양 지역 환경 프로그램, 태평양 공동체(SPC), 남태평양 응용 지구과학 위원회의 회원국이다. 2021년 2월, 나우루는 헨리 푸나의 사무총장 선출에 관한 분쟁 이후 마셜 제도, 키리바시, 미크로네시아 연방과 공동 성명을 통해 태평양 제도 포럼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최근 나우루는 국제 재생 에너지 기구(IRENA)의 회원국이 되었다. 나우루 공화국은 2016년 4월 국제 통화 기금(IMF)의 189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5.3. 난민 정책과 논란
나우루의 수입 중 상당 부분은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의 원조 형태였다. 2001년, 좌초된 배에서 438명의 난민을 구조한 노르웨이 선박 MV 탬파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정박하려 했다. 탬파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배는 입항이 거부되고 오스트레일리아 군대에 의해 승선당했다. 난민들은 결국 나우루로 이송되어 구금 시설에 수용되었고, 이는 나중에 존 하워드 정부의 태평양 해법의 일부가 되었다. 나우루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조를 받는 대가로 이들 난민을 위해 스테이트 하우스와 톱사이드로 알려진 두 개의 구금 센터를 운영했다. 2005년 11월까지 2001년에 처음 보내진 난민 중 단 두 명만이 나우루에 남아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2006년 말과 2007년 초에 추가로 망명 신청자들을 나우루로 보냈다. 난민 센터는 2008년에 폐쇄되었으나, 2012년 8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태평양 해법을 재채택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국제앰네스티는 나우루에 거주하는 전쟁 난민들의 상황을 "끔찍하다"고 묘사했으며, 8세 정도의 어린 아이들이 자살을 시도하고 자해 행위를 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2018년에는 약 30명의 어린이가 체념 증후군으로도 알려진 외상성 위축 증후군을 앓는 등 "정신 건강 위기"로 상황이 주목받았다. 2023년 중반까지 이 수용소는 2012년 개소 이후 처음으로 완전히 비워졌으며, 개소 이후 총 4,183명이 구금되었다. 2024년에는 수십 명의 난민이 다시 이곳에 구금되어 청구 심사를 받고 있다. 이러한 역외 난민 수용소 운영은 국제 사회로부터 심각한 인권 침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6. 군사

나우루에는 정규군이 없다. 나우루 경찰이라는 소규모 경찰력이 민간 통제 하에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양국 간의 비공식 협정에 따라 나우루의 국방을 책임지고 있다.
7. 경제
나우루 경제는 20세기 후반 인광석 수출로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으나, 자원 고갈 이후 급격한 위기를 맞았다.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조, 역외 난민 수용소 운영 수수료, 어업권 판매, 그리고 최근에는 심해 채굴 가능성 탐색 등으로 경제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관광 산업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7.1. 과거 인광석 경제 호황

1970년대에 나우루 경제는 가장 강력했으며, 국내 총생산(GDP)은 1981년에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추세는 경제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인광석 채굴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나우루는 인광석 수출 덕분에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으며, 국민들은 세금 없는 복지 국가의 혜택을 누렸다. 당시 정부는 막대한 수입을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무상 교육, 무상 의료, 주택 보조금 등을 제공했으며, 국영 항공사인 나우루 항공은 파격적인 가격으로 항공편을 운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자원의 유한성을 간과한 채 이루어졌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7.2. 경제 위기와 다각화 노력

1980년대 초부터 인광석 채굴량이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나우루 경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인광석 고갈 이후, 나우루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인광석 매장량이 거의 고갈되자, 정부는 섬의 축적된 광산 부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한 나우루 인산염 로열티 신탁에 RONPhos 수입의 일정 비율을 예치했다. 이 신탁은 인광석 매장량이 고갈된 후 시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장기 투자를 관리했다.
그러나 부실 관리로 인해 신탁의 고정 자산과 유동 자산이 상당히 감소했으며 완전히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다. 실패한 투자에는 1993년 뮤지컬 레오나르도 더 뮤지컬: 사랑의 초상 자금 조달이 포함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머큐어 호텔과 멜버른의 나우루 하우스는 2004년 부채를 청산하고 나우루 항공의 유일한 보잉 737이 2005년 12월 압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매각되었다. 2006년 6월 해당 항공기가 보잉 737-300으로 교체된 후 정상적인 항공 서비스가 재개되었다. 2005년, 회사는 멜버른에 남아있던 부동산인 공터였던 사보이 태번 부지를 750.00 만 AUD에 매각했다.
신탁 기금의 가치는 1991년 13.00 억 AUD에서 2002년 1.38 억 AUD으로 급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우루는 현재 정부의 많은 기본 기능을 수행할 자금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나우루 국립은행은 지급 불능 상태이다. CIA 월드 팩트북은 2005년 1인당 GDP를 5000 USD으로 추정했다. 아시아 개발 은행의 2007년 나우루 경제 보고서는 1인당 GDP를 2400 USD에서 2715 USD 사이로 추정했다.
나우루에는 개인 소득세가 없다. 실업률은 23%로 추정되며, 정부는 취업자 중 95%를 고용하고 있다. 아시아 개발 은행은 행정부가 경제 개혁을 시행할 강력한 공공 위임 사항을 가지고 있지만, 인광석 채굴의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중기 전망은 외부 지원에 계속 의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1990년대에 나우루는 조세 피난처가 되어 수수료를 받고 외국인에게 여권을 제공했다. 정부 간 자금세탁방지 금융대책기구(FATF)는 나우루를 자금 세탁 방지 투쟁에서 "비협조적인" 15개국 중 하나로 지목했다. 1990년대에는 다른 요건 없이 단 2.50 만 USD만으로 나우루에 허가된 은행을 설립할 수 있었다. FATF의 압력으로 나우루는 2003년 조세 회피 방지법을 도입했고, 그 후 외국 핫머니가 나라를 떠났다. 2005년 10월, 법안과 그 시행 결과가 만족스러워지자 FATF는 비협조국 지정을 해제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나우루 구금 센터는 국가에 상당한 수입원을 제공했다. 나우루 당국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폐쇄 조치에 우려를 표했다. 2008년 2월, 키어런 케케 외무장관은 폐쇄로 인해 나우루인 100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섬 인구의 10%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구금 센터는 2012년 8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2017년 7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세 투명성 기준 국제 포럼은 나우루의 조세 투명성 기준 등급을 상향 조정했다. 이전에는 나우루가 국제 조세 투명성 기준 및 규정을 준수하지 못한 14개국과 함께 목록에 올라 있었다. 이후 OECD는 나우루에 대해 신속한 준수 절차를 진행했고, 나우루는 "대체로 준수함" 등급을 받았다.
데이비드 아데앙 재무장관이 발표한 나우루 2017-2018년 예산은 1.29 억 AUD의 세입과 1.29 억 AUD의 세출을 예상했으며, 향후 2년 동안 국가의 완만한 경제 성장을 전망했다. 2018년, 나우루 정부는 심해 채굴 회사인 딥그린(DeepGreen, 현 더 메탈스 컴퍼니의 완전 자회사인 나우루 오션 리소시스 Inc, NORI)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들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 기술 개발에 사용될 수 있는 광물과 금속을 함유한 망간 단괴를 채취할 계획이었다.
7.3. 관광
관광업은 나우루 경제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섬의 주요 관광 자원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유적지, 인광석 채굴 현장이 남긴 독특한 풍경, 그리고 아름다운 해안선과 산호초 등이 있다. 그러나 열악한 항공 연결성, 부족한 숙박 시설, 제한적인 관광 인프라가 관광 산업 발전에 큰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는 관광 산업 육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환경 복원 문제와 경제 다각화라는 더 큰 과제에 직면해 있다.
8. 인광석 산업과 환경 파괴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인광석 채굴은 나우루 경제의 중추였으나, 섬 전체의 환경을 극심하게 파괴하고 독특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 채굴 방식, 환경 및 사회경제적 영향, 그리고 복구 노력은 나우루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8.1. 채굴의 역사와 방식
나우루의 인광석은 20세기 초 앨버트 풀러 엘리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1906년 독일과 영국 자본이 합작한 태평양 인산염 회사(Pacific Phosphate Company)가 채굴을 시작했으며, 1907년 첫 수출이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정부가 공동으로 설립한 영국 인산염 위원회(British Phosphate Commissioners, BPC)가 채굴권을 인수했다. 나우루 독립 후 1970년에는 국영 기업인 나우루 인산염 공사(Nauru Phosphate Corporation, NPC, 이후 RONPhos)가 설립되어 채굴 사업을 이어받았다.
주요 채굴 방식은 노천 채굴이었다. 섬 중앙 고원의 표토를 걷어내고 그 아래에 있는 고품질의 인광석을 채굴했다. 이 방식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고 기술적으로 용이했지만, 환경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1차 채굴이 고갈된 후에는 남아있는 인광석을 추가로 채굴하는 2차 채굴도 진행되었다.
8.2. 환경에 미친 영향
광범위한 인광석 채굴은 나우루 국토의 약 80%를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들었다. 섬 중앙부의 '톱사이드' 지역은 표토가 모두 사라지고 석회암 첨탑만이 뾰족하게 솟아 있는 기괴한 풍경으로 변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야기했다:
- 토지 황폐화 및 표토 유실: 비옥한 표토가 사라져 농경이 불가능해졌고, 식생이 파괴되었다.
- 생물 다양성 감소: 자생 동식물의 서식지가 파괴되어 많은 종이 사라지거나 희귀해졌다. 특히 나우루솔새와 같은 고유종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 수자원 오염: 채굴 과정에서 발생한 침출수와 먼지가 지하수와 부아다 석호를 오염시켰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 해양 생태계 파괴: 채굴로 인한 토사 유출과 인산염 먼지가 연안 산호초를 뒤덮어 해양 생물의 약 40%가 폐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 경관 파괴: 아름다웠던 섬의 자연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다.
8.3. 사회경제적 영향
인광석 산업은 나우루 사회와 경제에 다음과 같은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다:
- 경제 호황과 '자원의 저주'':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나우루는 인광석 수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1인당 국민소득을 기록했다. 국민들은 세금 없이 무상 교육, 의료 등 높은 수준의 복지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부는 장기적인 경제 계획 수립을 저해했고, 자원 고갈 이후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초래하는 '자원의 저주' 현상으로 이어졌다.
- 전통 생활 방식의 변화: 전통적인 자급자족 농경 및 어업 생활은 수입품에 의존하는 소비적인 생활 방식으로 급격히 변모했다.
- 경제 구조 왜곡: 경제가 단일 산업(인광석)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어 다른 산업 발전의 기회를 놓쳤다.
- 신탁 기금의 부실 운용: 미래를 위해 조성된 나우루 인산염 로열티 신탁은 해외 투자 실패와 부실 관리로 대부분 탕진되었다.
- 인광석 고갈 이후의 사회 문제: 자원 고갈은 높은 실업률, 정부 재정 파탄, 공공 서비스 질 저하 등 장기적인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이는 국민들의 건강 악화(특히 비만과 당뇨병)와도 연결된다.
8.4. 복구 노력과 과제
나우루 정부는 채굴로 파괴된 국토의 환경 복구를 위해 노력해왔다. 1989년, 나우루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상대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여 과거 식민 통치 기간 동안의 환경 파괴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이 소송은 1993년 오스트레일리아가 나우루에 복구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하면서 법정 밖에서 해결되었다.
그러나 광범위한 파괴 지역을 완전히 복구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톱사이드' 지역의 복구에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며, 일부 전문가들은 완전한 생태학적 복원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본다. 현재 일부 지역에서 표토를 다시 가져와 식생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규모는 제한적이다. 국토 회복은 나우루의 장기적인 생존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9. 사회
나우루의 사회는 고유한 민족 구성과 언어, 종교적 다양성을 지니고 있으며, 교육과 보건 시스템은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특히 높은 비만율과 이로 인한 질병 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식생활과 농업은 인광석 채굴의 영향으로 크게 변화했다.
9.1. 인구 구성
2018년 7월 기준 나우루의 인구는 약 9,692명이다. 이전에는 인구가 더 많았으나, 2006년 인광석 채굴량 감소로 인해 키리바시와 투발루 출신 이민 노동자 약 1,500명이 본국으로 송환되면서 인구가 줄었다.
민족 구성은 나우루인이 58%로 가장 많고, 기타 태평양 제도 주민 26%, 유럽인 8%, 중국인 8% 순이다. 나우루는 남태평양에서 서구화된 국가 중 인구 밀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
9.2. 언어
나우루의 공용어는 나우루어와 영어이다. 나우루어는 독특한 미크로네시아어군 언어로, 가정에서는 나우루인의 96%가 사용한다. 영어는 정부 및 상업 분야에서 널리 사용된다.
9.3. 종교

나우루에서 가장 주된 종교는 기독교이다. 주요 교파로는 나우루 회중교회(35.71%), 로마 가톨릭교회(32.96%), 하나님의 성회(12.98%), 침례교(1.48%) 등이 있다. 나우루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나 정부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와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활동을 제한한 바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국영 나우루 인산염 공사에 고용된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키리바시의 타라와에 교구를 둔 타라와와 나우루 교구의 사목을 받는다.
9.4. 교육
나우루의 문해율은 96%이다. 6세부터 16세까지 의무 교육이며, 추가로 2년(11학년, 12학년)의 비의무 교육 과정이 제공된다. 섬에는 3개의 초등학교와 2개의 중등학교(나우루 중등학교, 나우루 칼리지)가 있다. 남태평양 대학교(USP)의 나우루 캠퍼스가 있으며, 1987년 이 캠퍼스가 건설되기 전에는 학생들이 원격 교육을 받거나 해외 유학을 했다. 2011년부터 오스트레일리아의 뉴잉글랜드 대학교가 섬에 진출하여 약 30명의 나우루 교사들이 교육학 준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있으며, 이들은 학위 과정을 계속 이수할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는 펩 세로 부교수가 주도하며 오스트레일리아 외교통상부의 지원을 받는다.
이전의 지역 공공 도서관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1999년 현재 새로운 도서관은 아직 건설되지 않았으며, 해당 연도에는 이동 도서관 서비스도 없었다. 도서관이 있는 곳으로는 남태평양 대학교 캠퍼스, 나우루 중등학교, 카이저 칼리지, 아이워 초등학교 등이 있다. 나우루 커뮤니티 도서관은 2018년 5월 공식 개관한 새로운 남태평양 대학교 나우루 캠퍼스 건물 내에 있다.
9.5. 보건

나우루는 태평양 도서 국가 및 영토(PICTs) 지역에서 아동 사망률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로, 2020년 유니세프 연구에 따르면 2.9%에 달했다.
2009년 나우루의 기대수명은 남성 60.6세, 여성 68.0세였다.
9.5.1. 비만과 주요 질병
평균 체질량 지수(BMI) 기준으로 나우루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과체중인 사람들이다. 남성의 97%, 여성의 93%가 과체중 또는 비만이다. 2012년 비만율은 71.7%였다. 태평양 지역의 비만 문제는 흔한 현상이다.
나우루는 세계에서 제2형 당뇨병 발병률이 가장 높아, 인구의 40% 이상이 영향을 받고 있다. 나우루의 다른 중요한 식이 관련 문제로는 신부전과 심혈관계 질환이 있다.
나우루는 세계에서 담배 흡연율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로, 2022년 기준 48.3%에 달한다. 이러한 높은 비만율과 질병 유병률은 서구화된 식습관 도입, 전통적인 신체 활동 감소, 그리고 인광석 채굴로 인한 농경지 파괴로 인한 수입 식품 의존도 증가 등 복합적인 요인에 기인한다. 이는 개인의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 의료 시스템에 큰 부담을 주고 사회경제적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9.6. 식생활과 농업

역사적으로 원주민 나우루인들은 자급자족 농업을 통해 필요한 식량의 대부분을 공급하는 가정 정원을 가꾸었으며, 가장 흔한 식용 작물로는 코코넛, 빵나무 열매, 바나나, 판다누스, 파파야, 구아바 등이 있었다. 인광석 광산에서 일하게 될 이민자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해당 국가들에서도 주식이었던 다양한 종류의 과일과 채소가 재배되었다. 나우루의 토양은 시민들이 "톱사이드"라고 부르는, 인광석이 채굴되는 융기된 인광석 고원에서 매우 비옥하여 작물 재배에 매우 적합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나우루인들이 거주하는, 채굴되지 않은 섬의 해안 고리 지역의 토양 질은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수준으로, 얕고 알칼리성이며 주변 산호와 같은 거친 질감을 가지고 있다. 2011년에는 단 13%의 가구만이 정원을 유지하거나 작물 재배에 참여했다. 나우루의 토양 대부분은 인광석 채굴 활동으로 인해 사라져, 사람들은 필요한 토양을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다. 민족식물학 연구에 따르면, 인광석 채굴로 인해 재배 가능한 식물 종류가 감소하면서 원주민 나우루인들이 땅에 대해 느끼는 유대감이 크게 손상되었는데, 이는 식물이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기 때문이며, 각 식물은 태평양 섬 문화 내에서 평균 7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오늘날 나우루 주민들에게 모든 식량은 인광석 채굴로 인한 경작지의 90% 손실 때문에 수입해야 하며, 이로 인해 주민들은 주로 쌀과 설탕과 같은 가공식품 위주의 식단을 섭취하게 되었다. 주민들이 가능한 한 토양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채굴이 중단된 후에도 토양 재생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가공 및 수입 식품에 대한 국가의 의존도와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요인"은 시민들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든 식량을 수입함에도 불구하고, 2012-2013년 가계 소득 지출 조사(HIES)에 따르면 나우루인들의 식량 빈곤 발생률은 0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성인 1인당 하루 2,100칼로리 섭취를 포함하는" 식량 빈곤선(FPL)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HIES 조사 결과 나우루는 식량 빈곤 측면에서는 양호한 상태이지만, 인구의 24%와 가구의 16.8%가 기본적 필요(의류, 주거, 교육, 교통, 통신, 물, 위생 및 보건 서비스) 빈곤선 이하에 있다. 이는 모든 태평양 국가 중 가장 열악한 빈곤 지수이다. 2017년, 나우루인 절반이 연간 9000 USD(약 1.17 만 AUD)으로 생활했다. 수자원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으며, 섬은 1인당 하루 32리터의 담수만을 공급하는데, 이는 세계보건기구(WHO)의 1인당 하루 50리터 권장량에 미치지 못한다. 지하수 대부분은 광산 유출수, 화장실, 기타 상업 및 가정 폐기물 투기로 오염되어, 나우루인들은 수입 물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물 가격은 운송 연료 가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변동될 수 있고, 빗물 저장에도 의존한다. 위생 시설 접근은 제한적이어서 주민의 66%만이 신뢰할 수 있는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으며, 인구의 3%는 여전히 노상 배변을 한다. 학교는 신뢰할 수 있는 화장실이나 학생들을 위한 식수가 없어 자주 문을 닫아야 한다. 장기적인 무단결석 문제가 있으며, 난민 및 망명 신청 아동, 장애 아동의 교육 접근성은 나우루 교육 부문의 우려 사항으로 남아 있다.
10. 교통
나우루의 교통 시스템은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항공과 해상 운송에 크게 의존하며, 섬 내부에는 제한적인 도로망이 있다.
10.1. 항공

나우루는 나우루 국제공항이 유일한 공항이다. 여객 서비스는 국영 항공사인 나우루 항공(과거 아워 항공)이 제공한다. 항공편은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으로 주 4회 운항하며, 피지의 나디 및 키리바시의 본리키 등 다른 목적지로는 제한적으로 운항한다. 과거 인광석 고갈로 인한 경제난으로 나우루 항공이 운항을 중단했던 시기도 있었으나, 이후 운항을 재개했다.
10.2. 해상 및 육상
나우루는 나우루 국제항을 통해 해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전 아이워 보트 하버의 현대화 및 확장 프로젝트는 2021년에 완료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한 기술 및 물류 문제로 지연되었다. 주요 항만 시설은 아이워구에 집중되어 있으며, 주로 화물 운송에 이용된다.
섬 내부에는 약 30 km의 도로망이 있으며, 이 중 해안을 따라 섬을 일주하는 도로가 주요 교통로이다. 1세기 전에 광산용으로 건설된 약 4 km의 철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대중교통 시스템은 발달하지 않았으며, 개인 차량이나 오토바이가 주요 이동 수단이다.
11. 문화
나우루의 문화는 전통적인 미크로네시아 및 폴리네시아 유산과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독특하게 형성되었다. 스포츠, 특히 오지 풋볼은 국민적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미디어 환경은 제한적이다.
11.1. 전통 문화와 현대적 변화

나우루의 전통 문화는 12개 부족을 기반으로 한 씨족 구조, 고유한 관습, 음악, 춤 등이 특징이다. 전통 음악에는 '레겐'reigen레겐나우루어과 같은 노래 형식이 있으며, 춤은 의식이나 축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서구 문화의 유입과 인광석 산업으로 인한 급격한 사회 변화는 전통 생활양식을 상당 부분 변화시켰다. 현재는 오래된 관습 중 일부만이 보존되고 있으며, 전통 음악, 예술, 공예, 낚시 기술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앙감 데이(Angam Day)는 매년 10월 26일에 열리는 나우루의 중요한 기념일로,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1920년 스페인 독감 유행 이후 나우루 인구가 민족 존속에 필요한 최소 인원인 1,500명으로 회복된 것을 기념한다. 이는 나우루 민족의 생존과 회복력을 상징하는 날이다.
나우루 민요는 1970년대까지 존재했으며, '오 브위오 에벤 브위오'Oh Bwio Eben Bwio오 브위오 에벤 브위오나우루어는 주목할 만한 민요이다. 전통 문화가 현대 문화에 빠르게 자리를 내주고 있지만, 미크로네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음악과 춤은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예술 형식 중 하나이다. 리듬감 있는 노래와 전통적인 '레이겐'은 특히 축하 행사에서 공연된다. 적어도 영어로 '피시 댄스'라고 불리는 나우루 춤의 역사적 형태가 사진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알려진 현대 춤으로는 군함조 춤과 도고로파가 있다. 나우루의 국가는 '나우루의 노래'Nauru Bwiema나우루 브위에마나우루어이며, 마거릿 헨드리가 작사하고 로런스 헨리 힉스가 작곡했다.
11.2. 스포츠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은 나우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며, 국가 대표팀 스포츠로 간주된다. 8개 팀으로 구성된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가 있다. 나우루는 여러 국가대표 오스트레일리안 룰 팀을 보유하고 있으며, 꾸준히 세계 상위 8개 팀에 속한다.
나우루에서 인기 있는 다른 스포츠로는 역도(국민적 취미로 간주됨), 배구, 넷볼, 낚시, 테니스 등이 있다. 나우루는 코먼웰스 게임에 참가하며, 역도와 유도 종목으로 하계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나우루 농구 국가대표팀은 1969년 남태평양 게임에 출전하여 솔로몬 제도와 피지를 꺾었다.
나우루 럭비 유니언은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 나우루 7인제 럭비 국가대표팀은 2015년 퍼시픽 게임에서 국제 데뷔를 했다. 나우루는 뉴질랜드에서 열린 2015년 오세아니아 세븐스 챔피언십에 참가했다.
나우루 축구는 오스트레일리안 룰과 럭비의 인기로 인해 오랫동안 활동이 없었던 소수 스포츠였으나, 2024년 현재 나우루 축구 국가대표팀이 구성 중이다.
11.3. 미디어
나우루에는 일간 뉴스 간행물이 없지만, 격주간지 음위넨 코Mwinen Ko음위넨 코나우루어가 있다.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인 나우루 텔레비전(NTV)은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프로그램을 방송하며, 국영 비상업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나우루는 라디오 오스트레일리아와 BBC 프로그램을 송출한다. 정보 접근성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며, 인터넷 보급률도 높은 편은 아니다.
11.4. 공휴일
나우루의 주요 국경일 및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 1월 1일: 새해 첫날 (New Year's Day)
- 1월 31일: 독립기념일 (Independence Day) - 1968년 독립을 기념한다.
- 부활절 관련 공휴일: 성금요일 (Good Friday), 부활절 월요일 (Easter Monday) (날짜 변동)
- 5월 17일: 헌법의 날 (Constitution Day) - 1968년 헌법 제정을 기념한다.
- 10월 26일: 앙감 데이 (Angam Day) - 나우루 인구가 제1차 세계 대전과 질병 등으로 감소했다가 다시 1,500명에 도달하여 민족의 생존을 확보한 것을 기념하는 중요한 날이다.
- 12월 25일: 크리스마스 (Christmas Day)
- 12월 26일: 박싱 데이 (Boxing Day)
그 외에 부족의 날(Day of the Tribes, 8월 21일, 공무원 휴무), 국제 청소년의 날(National Youth Day, 9월 25일, 국민 건강 증진 목적) 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