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카타르는 서아시아에 위치한 국가로, 중동 아라비아 반도 북동부의 카타르 반도를 영토로 한다.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나머지 삼면은 페르시아만과 접하고 있다. 페르시아만의 일부인 바레인만은 카타르와 인접국 바레인을 분리한다. 수도는 도하로,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거주하고 있으며, 국토 대부분은 평탄한 저지대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1868년 무함마드 빈 타니가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받은 이래, 카타르는 타니 가문에 의한 세습 군주제로 통치되어 왔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거쳐 20세기 초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1971년 독립을 이루었다. 현재 국왕은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로, 카타르 헌법에 따라 행정, 입법, 사법 전반에 걸쳐 거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국왕은 총리와 내각을 임명하며, 일부 선출직 의원으로 구성된 자문회의는 입법을 저지하거나 장관을 해임할 수 있는 제한적인 권한을 가진다.
2017년 초 기준 카타르의 총인구는 약 260만 명이었으나, 이 중 카타르 국적자는 31만 3천 명에 불과했고, 230만 명은 외국인 거주자 및 이주 노동자였다. 국교는 이슬람교이다. 카타르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천연가스 및 석유 매장량을 바탕으로 높은 소득 수준을 자랑하며, 1인당 국내총생산(PPP)은 세계 최상위권에 속한다. 인간 개발 지수(HDI)는 아랍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
21세기에 들어 카타르는 풍부한 자원과 알자지라 미디어 네트워크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며 아랍 세계의 중견국으로 부상했다. 아랍의 봄 당시에는 일부 반정부 세력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타르는 걸프 협력 회의(GCC) 회원국이다. 한편, 카타르의 인권 상황은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시민적 자유에 대한 제한과 이주 노동자 처우 문제 등으로 인해 국제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카타르는 2022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하였으며, 이는 아랍 국가 및 중동 국가 최초의 월드컵 개최였다. 또한 2030년 아시안 게임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2017년에는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외교 단절 사태를 겪기도 했으나, 2021년 관계가 회복되었다.
2. 국명
카타르의 공식 국명은 아랍어로 دولة قطر다울라트 카타르아랍어이며, 일반적으로는 قطر카타르아랍어라고 불린다. 현지 구어체 발음은 '기타르'([ˈɡɪtˤɑr])에 가깝다. '카타르'라는 국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고대 로마의 작가 대 플리니우스는 서기 1세기 중반 이 지역 주민들을 '카타레이(Catharrei)'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현지 주요 정착지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1세기 후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반도를 '카타라(Catara)'라고 표기한 최초의 지도를 제작했으며, 이 지도에는 반도 동쪽에 '카다라(Cadara)'라는 도시도 언급되어 있다. '카타라(Catara)'라는 용어는 18세기까지 사용되다가 '카타라(Katara)'가 가장 일반적인 표기가 되었다. 이후 '카트르(Katr)', '카타르(Kattar)', '구투르(Guttur)' 등 여러 변형을 거쳐 현대의 국명인 '카타르(Qatar)'로 정착되었다.
영어 국명의 공식 표기는 State of Qatar영어이며, 통칭은 Qatar영어이다. 영어 발음은 Qatar카타르영어 (/ˈkɑːtɑːr/) 또는 Qatar캐터영어 (/ˈkætɑːr/) 등으로 다양하다. 한국에서는 '카타르'로 표기한다.
3. 역사
카타르 지역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하여 고대 문명의 교류, 이슬람 제국의 통치, 유럽 열강의 영향, 그리고 현대 국가로의 발전 과정을 거쳐왔다. 각 시대별 주요 사건과 변화는 다음과 같다.
3.1. 고대

카타르 지역에서의 인간 거주 역사는 약 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기 시대의 정착지와 도구들이 반도 곳곳에서 발굴되었다. 기원전 6500년에서 3800년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우바이드 시기 유물들이 해안가 버려진 정착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카타르 서부 해안에 위치한 알 다아사(Al Da'asa)는 카타르에서 가장 중요한 우바이드 유적지로, 작은 계절적 야영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000년대부터 기록에 등장하는 딜문 문명은 카타르, 바레인, 쿠웨이트,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지역을 포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수메르 문명의 기원이 이 지역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기원전 2000년대 카사이트 바빌로니아 시대의 유물이 알 코르 섬에서 발견되어, 당시 카타르 주민들과 현재 바레인 지역의 카사이트인들 사이에 교역 관계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발견된 유물 중에는 조개껍데기 부스러기와 카사이트 토기 조각 등이 있다. 카타르는 해안가에 존재했던 카사이트의 티리언 퍼플 염료 생산 산업 덕분에 가장 오래된 조개 염료 생산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서기 224년, 사산 제국이 페르시아만 주변 영토를 장악했다. 카타르는 사산 제국의 상업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귀중한 진주와 보라색 염료를 공급했다. 사산 제국 통치하에 동부 아라비아의 많은 주민이 메소포타미아 기독교인들에 의해 동쪽으로 전파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수도원이 건설되고 새로운 정착지들이 생겨났다. 기독교 시대 후반기에 카타르는 '베스 카트라예(Beth Qatraye)' (시리아어로 "카타르인의 집"이라는 뜻)로 알려진 지역을 이루었다. 이 지역은 카타르뿐만 아니라 바레인, 타루트 섬, 알 카트, 알 하사 오아시스까지 포함했다.
628년,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는 동부 아라비아의 통치자 문지르 이븐 사와 알 타미미에게 사절을 보내 그와 그의 백성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다. 문지르는 이를 수락했고, 이에 따라 이 지역의 대부분 아랍 부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세기 중반, 무슬림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사산 제국은 멸망했다.
3.2. 이슬람 시대

우마이야 왕조(661년~750년) 시기 카타르는 말과 낙타 사육 중심지로 유명했다. 8세기에는 페르시아만에서의 전략적 상업적 위치를 활용하여 진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아바스 왕조(750년~1258년) 시대에는 카타르 반도 주변의 진주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바스라에서 인도와 중국으로 향하는 배들이 이 시기 카타르의 항구에 정박했다. 중국 도자기, 서아프리카 동전, 태국 유물 등이 카타르에서 발견되었다. 9세기의 고고학적 유적들은 카타르 주민들이 늘어난 부를 이용해 더 높은 수준의 주택과 공공 건물을 지었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 무르왑(Murwab)에는 100채 이상의 석조 주택, 두 개의 모스크, 아바스 왕조 시대의 요새가 건설되었다. 이라크에서 아바스 왕조의 번영이 쇠퇴하자 카타르 역시 쇠퇴했다.
13세기 무슬림 학자 야쿠트 알 하마위의 저서 『무잠 알 불단』에는 카타르가 언급되는데, 카타르인들의 정교한 줄무늬 직조 망토와 창 제작 및 개량 기술을 암시하고 있다.
1253년 동부 아라비아 대부분은 우스푸르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1320년 호르무즈 왕국의 왕자가 이 지역을 장악했다. 카타르의 진주는 이 왕국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1515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는 호르무즈 왕국을 속국으로 삼았다. 1521년 포르투갈은 동부 아라비아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1550년, 알 하사 주민들은 포르투갈인보다 오스만 제국을 선호하여 자발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3.3. 포르투갈 시대
자브리드 왕조가 포르투갈에 의해 바레인을 정복당하면서 멸망한 후, 알 하사까지의 아라비아 해안은 포르투갈 제국의 지배와 영향력 하에 놓였다.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1551년 타루트 성 또는 알 카티프 공성전에서의 재정복으로 좌절되었다.
루와이다(Ruwayda)와 같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한 기지로 사용되었던 포르투갈 요새 중 하나의 유적은 여전히 발굴 중이다. 카타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도는 1563년 루이스 라자로(Luis Lázaro)가 제작한 포르투갈 지도로, "카타르 시"를 요새로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루와이다 요새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 미미한 군사력을 유지하던 오스만 제국은 1670년 바니 칼리드 부족과 그들의 토후국에 의해 축출되었다.
3.4. 바레인 및 사우디아라비아 통치 시대

1766년, 우툽 부족 연맹의 알 칼리파 가문 일원들이 쿠웨이트에서 카타르의 주바라로 이주했다. 그들이 도착할 당시, 바니 칼리드 부족은 이 반도에 대해 미약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가장 큰 마을은 그들의 먼 친척이 다스리고 있었다. 1783년, 카타르에 기반을 둔 바니 우트바 부족과 동맹 아랍 부족들이 페르시아로부터 바레인을 침공하여 합병했다. 알 칼리파 가문은 바레인에 대한 권위를 확립하고 주바라에 대한 관할권을 유지했다.
1788년 와하비파의 왕세자로 즉위한 사우드 이븐 압둘아지즈는 와하비 영토를 동쪽 페르시아만과 카타르로 확장하려 했다. 1795년 바니 칼리드 부족을 물리친 후, 와하비 세력은 두 개의 전선에서 공격을 받았다.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가 서쪽 전선을 공격했고, 바레인의 알 칼리파 가문과 오만 세력이 동쪽 전선을 공격했다. 1811년 이집트 군대가 서쪽 국경으로 진격하는 것을 알게 된 와하비 아미르는 바레인과 주바라의 수비대를 줄여 병력을 재배치했다. 무스카트의 통치자 사이드 빈 술탄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해안의 와하비 수비대를 습격하고 주바라의 요새에 불을 질렀다. 이후 알 칼리파 가문은 사실상 권력을 되찾았다.
해적 행위에 대한 처벌로, 1821년 동인도 회사 선박이 도하를 포격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수백 명의 주민이 피난했다. 1825년, 셰이크 무함마드 빈 타니를 초대 지도자로 하여 타니 가문이 세워졌다.
카타르는 바레인의 속국으로 간주되었지만, 알 칼리파 가문은 현지 부족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1867년, 알 칼리파 가문은 아부다비 통치자와 함께 카타르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알 와크라에 대규모 해군을 파견했다. 이로 인해 1867-1868년 카타르-바레인 해상 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에서 바레인과 아부다비 군대가 도하와 알 와크라를 약탈했다. 바레인의 적대 행위는 1861년 영구 평화 우호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이 공동 침공과 카타르의 반격은 1868년 영국 정치 대표 루이스 펠리 대령으로 하여금 합의를 강요하게 만들었다. 그의 바레인과 카타르 방문 및 그 결과로 체결된 평화 조약은 카타르가 바레인과 구별되는 존재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무함마드 빈 타니의 지위를 명시적으로 인정한 이정표였다. 바레인의 협정 위반을 비난하는 것 외에도, 펠리는 무함마드 빈 타니가 대표하는 카타르 셰이크들과 협상했다. 이 협상은 카타르가 토후국으로 발전하는 첫 단계였다.
3.5. 오스만 제국 시대

오스만 제국 바그다드 총독 미드하트 파샤의 군사적, 정치적 압력 하에, 지배 가문인 알 타니 가문은 1871년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복속했다. 오스만 정부는 이 지역들을 제국에 완전히 통합하기 위해 조세 및 토지 등록에 관한 탄지마트 개혁 조치를 시행했다. 현지 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 타니 가문은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카타르-오스만 관계는 정체되었고, 1882년 오스만 제국이 아부다비가 점령한 코르 알 아다이드 원정에 대한 알 타니 가문의 지원 요청을 거부하고 카타르-아부다비 전쟁에서 주로 아부다비 측에 대한 영국의 개입을 우려하여 제한적인 지원만을 제공하면서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1888년 카타르의 카이마캄(군수)으로서 알 타니 가문을 대신하려 했던 오스만 제국의 신하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을 지지했다. 이는 결국 알 타니 가문으로 하여금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오스만 제국이 반도의 통제권을 찬탈하려 한다고 믿었다. 그는 1892년 8월 카이마캄 직을 사임하고 세금 납부를 중단했다.

1893년 2월, 메흐메드 하피즈 파샤는 미납 세금을 징수하고 자심 빈 무함마드 알 타니의 오스만 행정 개혁안 반대에 대응하기 위해 카타르에 도착했다. 죽음이나 투옥을 두려워한 자심은 알 와즈바(도하에서 서쪽으로 약 16 km 떨어진 곳)로 후퇴했으며, 여러 부족원들이 동행했다. 메흐메드는 자심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를 했으나 거절당했다. 3월, 메흐메드는 자심의 불복종에 대한 처벌로 그의 형제와 13명의 저명한 카타르 부족 지도자들을 오스만 코르벳함 '메리크'에 투옥했다. 메흐메드가 1만 터키 리라의 몸값을 받고 포로를 석방하라는 제안을 거절한 후, 그는 유수프 에펜디의 지휘하에 약 200명의 군대를 자심의 알 와즈바 요새로 진격하도록 명령했고, 이는 알 와즈바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에펜디의 군대는 알 와즈바에 도착하자마자 상당한 규모의 카타르 보병과 기병으로부터 강력한 포격을 받았다. 그들은 셰바카 요새로 후퇴했으나 다시 카타르군의 공격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들이 알 비다 요새로 철수한 후, 자심의 진격 부대는 요새를 포위했고,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은 패배를 인정하고 메흐메드 파샤의 기병대가 육로를 통해 호푸프로 안전하게 이동하는 대가로 포로들을 석방하기로 합의했다. 카타르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 전투의 결과는 이후 카타르가 제국 내 자치 국가로 부상하는 기초가 된 조약을 강요했다.
3.6. 영국 보호령 시대


1913년 영국-오스만 협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카타르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도하에서 수비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이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병력은 줄었지만 도하 요새에는 수비대가 계속 주둔했다. 1915년, 항구에 영국 군함이 나타나자 친영 성향이었던 압둘라 빈 자심 알 타니는 나머지 병사들을 설득하여 요새를 버리도록 했고, 다음 날 아침 영국군이 접근했을 때 요새는 비어 있었다.
카타르는 1916년 11월 3일 영국이 셰이크 압둘라 빈 자심 알 타니와 조약을 체결하여 카타르를 영국령 보호국으로 편입하면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 조약은 외교 및 국방을 영국에 맡기고 내부 자치권을 허용했다. 압둘라는 영국 정부의 사전 동의 없이 다른 어떤 세력과도 관계를 맺지 않기로 동의한 반면, 영국은 해상 공격으로부터 카타르를 보호하고 육상 공격 시 '선의의 중재'를 제공할 것을 보장했다. 이 후자의 약속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졌다.
1935년 5월 5일, 압둘라는 영국-페르시아 석유 회사와 석유 채굴권 계약을 체결하면서 영국 정부와 또 다른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은 카타르에 내부 및 외부 위협으로부터의 보호를 부여했다. 석유 매장량은 1939년에 처음 발견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개발 및 착취가 지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도의 독립, 1947년 파키스탄의 건국, 카타르의 석유 개발과 함께 카타르에 대한 영국의 관심은 변화했다. 1949년, 도하에 최초의 영국 정치 담당관 존 윌튼이 임명된 것은 영국-카타르 관계 강화를 의미했다. 석유 수출은 1949년에 시작되었고, 석유 수입은 국가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으며, 진주 무역은 쇠퇴했다. 이 수입은 카타르의 기반 시설 확장 및 현대화에 사용되었다.
1968년 영국이 3년 안에 페르시아만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자, 카타르는 바레인 및 다른 7개 휴전 오만과 연방 창설을 위한 회담에 참여했다. 그러나 지역 분쟁으로 인해 카타르와 바레인은 회담에서 탈퇴하고 아랍에미리트가 된 보호국들과는 별개의 독립 국가가 되었다.
3.7. 독립 이후
독립 이후 카타르는 국가 기반을 다지고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는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한 발전과 정치 체제 확립에 주력했으며, 21세기에 들어서는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 증대와 함께 다양한 현대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3.7.1. 20세기 후반

1971년 9월 3일, 영국과의 협정에 따라 "주권 독립 국가로서의 완전한 국제적 책임과 양립할 수 없는" "특별 조약 협정"이 종료되었다. 이로써 카타르는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되었다. 독립 초기 카타르는 국가 기반을 다지고 정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1972년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가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여 국왕이 되었다. 그의 통치하에 카타르는 석유 수입을 바탕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경향을 유지했다. 1988년에는 소련 및 중화인민공화국과 각각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991년 발발한 걸프 전쟁에서 카타르는 반이라크 입장을 취하며 다국적군을 지원했다. 특히 카フジ 전투에서는 카타르 탱크가 사우디아라비아 국가 방위군을 지원하여 이라크군과 교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캐나다, 미국, 프랑스 공군이 자국 영토를 군사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1995년,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 왕세자가 아버지 칼리파 국왕이 해외 순방 중일 때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하마드 국왕은 석유 및 천연가스 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광 산업 육성 등 경제 다각화를 추진했다. 그의 통치하에 알자지라 방송국이 설립(1996년)되었고, 여성의 지방선거 참정권이 인정(1999년)되었으며, 최초의 성문 헌법이 제정(2005년)되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설(2008년)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점진적인 개방과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3.7.2. 21세기
21세기에 들어 카타르의 경제와 지역 강국으로서의 위상은 급격히 성장했다. 1990년대 북부 유전(North Field)에서의 천연가스 개발은 이러한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이었다. 막대한 에너지 자원을 바탕으로 카타르는 세계 최고 수준의 1인당 국민소득을 기록했으며, 인구 또한 외국인 노동자의 대규모 유입으로 2001년에서 2011년 사이에 세 배로 증가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카타르는 미국 중부사령부의 본부 역할을 했으며, 주요 발진 기지 중 하나로 활용되었다. 2005년에는 수도 도하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영국인 교사가 사망하는 등 이전에는 없었던 테러 위협에 직면하기도 했다. 아랍의 봄 당시 카타르는 일부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며 중동 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 주변국과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2010년 카타르는 2022년 FIFA 월드컵 개최권을 획득하며 중동 국가 최초로 월드컵을 유치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를 계기로 국가 기반 시설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졌으며, 도시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2013년 6월,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가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계승받았다. 타밈 국왕은 국민 복지 향상, 교육 및 의료 시스템 선진화, 2022년 월드컵 준비를 위한 인프라 확충 등을 국정 운영의 우선 과제로 삼았다. 2022년 11월 21일부터 12월 18일까지 성공적으로 FIFA 월드컵을 개최하였으며, 이는 아랍 국가 및 이슬람 다수 국가 최초의 월드컵 개최이자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세 번째 아시아 국가 개최였다. 그러나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집트 등 주변 아랍 4개국으로부터 테러 지원 의혹 등으로 외교 및 경제 봉쇄를 당하는 등 심각한 외교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
4. 지리

카타르 반도는 사우디아라비아 북쪽으로 페르시아만으로 약 160 km 돌출되어 있다. 북위 24도에서 27도, 동경 50도에서 52도 사이에 위치한다. 국토 대부분은 모래로 덮인 낮고 불모의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약 1.16 만 km2로 대한민국의 경기도와 비슷한 크기이다.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나머지 삼면은 페르시아만에 둘러싸여 있다. 남동쪽에는 페르시아만의 작은 만을 둘러싼 구불구불한 모래 언덕 지역인 코르 알 아다이드("내해")가 있다.
가장 높은 지점은 서쪽 제벨 두칸에 있는 쿠라인 아부 알 바울로 해발 103 m이다. 제벨 두칸은 지크리트에서 움밥을 거쳐 남쪽 국경까지 남북으로 뻗어 있는 낮은 석회암 노두 산맥이다. 제벨 두칸 지역에는 카타르의 주요 육상 유전이 있으며, 천연가스전은 반도 북서쪽 해상에 위치한다. 카타르는 평평하고 건조한 사막 지형과 연중 계속되는 햇볕이 특징이다.
4.1. 기후
연중 덥고 건조한 사막 기후를 나타낸다. 여름(5월~9월)에는 평균 기온이 35 °C를 넘고, 50 °C에 육박하는 날도 많다. 겨울(12월~2월)은 비교적 온화하여 평균 기온이 17 °C 정도이며, 간헐적으로 비가 내린다. 연평균 강수량은 70mm 미만으로 매우 적다. 해안 지역은 페르시아만의 영향으로 습도가 높은 편이다. 봄과 가을에는 모래바람(샤말)이 불기도 한다.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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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최고 기온 (°C) | 22 | 23 | 27 | 33 | 39 | 42 | 42 | 42 | 39 | 35 | 30 | 25 | 33.2 |
평균 최저 기온 (°C) | 14 | 15 | 17 | 21 | 27 | 29 | 31 | 31 | 29 | 25 | 21 | 16 | 23 |
평균 강수량 (mm) | 12.7 | 17.8 | 15.2 | 7.6 | 2.5 | 0 | 0 | 0 | 0 | 0 | 2.5 | 12.7 | 71 |
도하의 해양 기후 데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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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간 |
평균 해수 온도 °C (°F) | 21.0 | 19.4 | 20.9 | 23.3 | 27.8 | 30.5 | 32.4 | 33.6 | 32.8 | 30.8 | 27.5 | 23.5 | 26.9 |
4.2. 생물 다양성

카타르는 1996년 리우 생물다양성협약에 가입했으며, 2005년 국가 생물다양성 전략 및 행동 계획을 수립했다. 카타르에서는 총 142종의 균류가 기록되었다. 최근 환경부가 발간한 책에는 국제 과학자팀 및 기타 협력자들이 수행한 조사를 바탕으로 카타르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지거나 추정되는 도마뱀 종들이 기록되어 있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의 다른 회원국들과 마찬가지로 카타르는 온실가스 배출량 발생 2년 후 세부 정보를 공개해야 하지만, 2024년 현재 최신 공식 세부 정보는 2007년 배출량에 대한 것이다. 지구 대기 연구 배출 데이터베이스(Emissions Database for Global Atmospheric Research)에 따르면,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평균 30톤 이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 중 하나이다.
5. 정치

카타르는 공식적으로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국왕이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어 사실상 전제군주제에 가깝다. 타니 가문이 1825년 가문 창립 이래 카타르를 통치해오고 있다. 2003년, 카타르는 45명으로 구성된 의회 의원 중 30명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내용을 담은 헌법을 채택했다. 이 헌법은 국민투표에서 거의 98%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V-Dem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카타르는 2023년 중동에서 두 번째로 비민주적인 선거 국가이다. 카타르 법은 정치 단체나 노동조합 설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치 체제는 민주주의 발전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신속한 정책 결정과 경제 발전은 긍정적인 측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5.1. 정부 구조


카타르의 국왕(에미르)은 국가 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으로, 국정 전반에 걸쳐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현재 국왕은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이다. 국왕은 총리와 각료를 임명하며, 이들로 구성된 각료회의는 국가의 최고 행정기관으로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
입법부는 자문회의(슈라 위원회)로, 총 45석 중 30석은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되고 15석은 국왕이 임명한다. 자문회의는 법안 심의, 예산안 승인, 정부 정책에 대한 질의 등의 권한을 가지나, 국왕의 최종 승인이 필요하며 해산될 수도 있다. 2021년 10월 첫 총선이 실시되었으나, 정당 활동은 금지되어 있다.
사법부는 국왕으로부터 독립되어 운영되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국왕이 판사를 임명하고 법률 해석에 대한 최종 권한을 가지는 등 국왕의 영향력 하에 있다. 사법 체계는 민법과 샤리아(이슬람법)이 혼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5.2. 법
카타르의 법 체계는 민법과 샤리아법(이슬람법)이 혼합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샤리아는 특히 가족법, 상속법 및 일부 형사 범죄에 적용됩니다.
5.2.1. 샤리아
이슬람법(샤리아)은 카타르 헌법의 주요 법원으로서, 특히 가족법(결혼, 이혼, 자녀 양육권), 상속법, 일부 형사 범죄(절도, 간통, 음주 등)에 적용된다. 샤리아 법원은 이러한 사건들을 다루며,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상법, 민법 등 다른 법률 분야에서는 성문법이 주로 적용되며, 국제적인 기준과 관행도 고려된다. 샤리아는 카타르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규범에도 영향을 미치며, 공공장소에서의 복장 규정이나 주류 판매 제한 등에도 그 원칙이 반영된다. 샤리아의 적용 범위와 해석은 현대 사회의 변화와 국제적 인권 기준과의 조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법적 체벌은 카타르에서 형벌의 일종이다. 의학적으로 건강하다고 간주되는 무슬림만이 이러한 형을 받을 수 있다. 태형은 음주 또는 불법적인 성관계에 대한 처벌로 사용된다. 형법 제88조는 간통죄에 대한 처벌을 100대의 태형으로 규정하고 있다. 투석형은 카타르에서 합법적인 처벌이며, 배교와 동성애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이지만, 두 범죄 모두 사형이 집행된 적은 없다. 신성모독은 최대 7년의 징역형을, 개종 권유는 10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음주는 부분적으로 합법이며, 일부 5성급 고급 호텔은 비무슬림 고객에게 주류를 판매할 수 있다. 무슬림은 음주가 허용되지 않으며, 음주하다 적발될 경우 태형이나 추방에 처해질 수 있다. 비무슬림 외국인은 개인 소비를 위한 주류 구매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카타르 유통 회사(카타르 항공의 자회사)는 주류와 돼지고기 수입이 허용되며, 국내 유일의 주류 판매점을 운영하며 주류 면허 소지자에게 돼지고기도 판매한다. 카타르 관리들은 2022년 FIFA 월드컵 기간 동안 "팬 존"에서 주류를 허용할 의향을 밝혔으나, 대회 시작 이틀 전인 11월 18일, 경기장 내 주류 반입이 금지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4년에는 관광객들에게 국가의 제한적인 복장 규정을 상기시키기 위한 복장 단속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여성 관광객은 공공장소에서 레깅스, 미니스커트, 민소매 드레스, 짧거나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지 않도록 권고받았다. 남성들은 반바지와 민소매 셔츠 착용을 삼가하도록 경고받았다.
5.3. 인권

카타르의 인권 상황은 학계와 비정부 기구로부터 일반적으로 열악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자유에 대한 제한과 함께 국내 프로젝트를 위한 강제 노동에 해당하는 수천 명의 이주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문제로 지적된다. 카타르의 민주주의, 인권, 사회 발전에 미친 긍정적 및 부정적 영향으로는, 경제 발전으로 인한 생활 수준 향상과 교육 및 의료 서비스 확대는 긍정적이지만, 권위주의적 통치와 표현의 자유 제한, 이주 노동자 인권 문제는 민주주의와 인권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2년 5월, 카타르 관리들은 독립적인 노동조합 설립을 허용할 의사를 밝혔다. 2014년 카타르는 국제 로펌 DLA 파이퍼에 이민 노동자 제도 조사를 의뢰했다. 2014년 5월 DLA 파이퍼는 출국 비자 폐지 및 최저 임금 도입 등 카팔라 제도 개혁을 위한 60개 이상의 권고안을 발표했으며, 카타르는 이를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카타르는 또한 모든 외국인 노동자가 현지 고용주의 후원을 받아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 후원 제도를 폐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엔 고문방지위원회는 카타르 형법 내 태형 및 투석형 규정이 유엔 고문방지협약에 따른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동성애 행위는 불법이며 사형에 처해질 수 있으나, 동성 관계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진 증거는 없다.
카타르의 후견인 제도(카팔라 제도) 하에서는 후견인이 일방적으로 노동자의 거주 허가를 취소하거나, 노동자의 직장 변경을 거부하거나, 노동자를 경찰 당국에 "도주"로 신고하거나, 출국 허가를 거부할 권한을 가졌다. 그 결과 후견인은 노동자의 이동을 제한할 수 있었고, 노동자들은 학대를 신고하거나 권리를 주장하기를 두려워할 수 있었다.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에 따르면, 비자 후견인 제도는 학대적인 고용주를 떠나거나 허가 없이 해외로 여행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강제 노동을 가능하게 했다. 카타르는 또한 이주 노동자들의 임금 기준을 유지하지 않았다. 노동법 개정에는 모든 노동자의 급여가 은행 계좌로 직접 지급되도록 보장하는 조항과 여름철 가장 더운 시간대 야외 작업을 새로 제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2016년에는 임금 체불 기업의 신규 채용을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법이 개정되었다. 국제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는 이러한 변화가 일부 노동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2021년에는 최저임금제가 시행되었다. 카타르는 1999년 중앙지방자치평의회 선거와 관련하여 남성과 동시에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이 선거는 카타르 최초의 선거였으며, 의도적으로 1999년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에 치러졌다.
2024년 기준 카타르는 부패인식지수에서 180개국 중 40위를 기록하고 있다.
5.3.1.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
카타르에서 표현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권리는 제한적으로 보장된다. 헌법은 이러한 권리들을 명시하고 있지만, 국가 안보, 공공질서, 도덕, 타인의 권리 존중 등을 이유로 법률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 정부, 국왕, 지배 가문에 대한 비판은 엄격히 통제되며, 언론은 자가 검열을 하는 경향이 있다. 2014년에 통과된 사이버 범죄 예방법은 허위 뉴스 유포나 지역 평화 위협과 같은 광범위한 이유로 언론의 자유를 더욱 제약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치 참여는 주로 자문회의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자문회의의 권한은 제한적이며 국왕이 최종 결정권을 가진다. 정당 설립은 허용되지 않는다. 카타르의 민주주의 수준은 국제적으로 낮게 평가되며, 시민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에 실질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5.3.2. 노동권
카타르의 노동 시장은 외국인 노동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조이며, 이들의 노동 조건과 권리 보호는 주요 인권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과거 카팔라 제도(후견인 제도)는 고용주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여 노동 착취의 원인이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카타르 정부는 카팔라 제도 폐지, 최저임금제 도입(2021년), 임금 지급 지연 방지 조치 등 노동권 개선을 위한 개혁을 추진해왔다. 이러한 개혁은 카타르 국가 비전 2030의 일환이며, 국제 사회의 긍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임금 체불, 이동의 자유 제한 등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특히 건설 부문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는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2022년 FIFA 월드컵 준비 과정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사망 및 인권 침해 사례가 다수 보고되어 국제적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카타르 정부는 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률 강화와 감독 시스템 개선을 약속했으나, 실제적인 이행과 효과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감시와 평가가 요구된다.
5.3.3. 테러 자금 지원 논란
카타르 정부는 과거 일부 테러 단체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으로 국제 사회의 강한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의혹은 주로 2017년 카타르 외교 위기 당시 주변 아랍 국가들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정보기관 보고서 및 언론 보도를 통해 확산되었다. 비판의 핵심은 카타르가 하마스, 무슬림 형제단 등 일부 이슬람주의 단체들을 지원하거나 이들의 활동을 묵인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카타르 정부는 테러 자금 지원 의혹을 강력히 부인하며, 자국의 지원은 인도주의적 목적이거나 정치적 중재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해왔다. 또한, 테러 자금 조달 방지를 위한 국내법을 강화하고 국제 사회의 테러 방지 노력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04년 테러방지법을 제정하고 이후 여러 차례 개정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으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의 의구심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으며, 카타르의 대외 정책 및 자금 흐름에 대한 투명성 요구는 지속되고 있다. 이 논란은 카타르의 국제적 이미지와 외교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6. 행정 구역
카타르는 2014년 행정 구역 개편 이후 8개의 지방 자치체(아랍어: 발라디야)로 구성된다. 각 지방 자치체는 해당 지역의 행정 및 공공 서비스를 담당한다.
# 알샤말 (الشمال아랍어)
# 알코르 (الخور아랍어)
# 알샤하니야 (الشحانية아랍어)
# 움살랄 (أم صلال아랍어)
# 알다옌 (الضعاين아랍어)
# 도하 (الدوحة아랍어)
# 알라이얀 (الريان아랍어)
# 알와크라 (الوكرة아랍어)
통계 및 행정 편의를 위해 각 지방 자치체는 다시 여러 개의 구역(zone)으로 세분화되며, 이 구역들은 다시 더 작은 단위인 블록(block)으로 나뉜다. 2015년 기준 총 98개의 구역이 있다.
6.1. 이전의 지방 자치체
과거 카타르의 행정 구역에 포함되었으나 현재는 다른 지방 자치체에 통합되거나 폐지된 단위는 다음과 같다.
- 알주말리야 (2004년까지 알라이얀에 통합)
- 알구와리야 (2004년까지 알코르에 통합)
- 자리얀알바트나 (2004년까지 알라이얀 및 알와크라에 분할 통합)
- 메사이드 (움사이드) (2006년 알와크라에 통합)
7. 대외 관계
카타르의 국제적 위상과 국제 문제에서의 적극적인 역할로 인해 일부 분석가들은 카타르를 중견국으로 평가한다. 2022년부터 카타르는 미국의 주요 비NATO 동맹국이다. 카타르는 특히 프랑스, 중국, 이란, 터키 및 중동의 여러 이슬람 운동(예: 무슬림 형제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카타르는 OPEC의 초기 회원국이자 걸프 협력 회의(GCC)의 창립 회원국이며, 아랍 연맹의 회원국이다. 카타르 주재 외교 공관은 수도 도하에 있다.
카타르의 지역 관계 및 외교 정책은 지역 및 강대국 간의 균형과 동맹 구축 전략으로 특징지어진다. 카타르는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유지하며 전략적 우선순위를 확보하고 지역 및 국제적 차원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지역 균형에 참여한다. 비교적 작은 걸프 국가인 카타르는 모든 당사자 및 지역 행위자와 관계를 유지하는 "개방형" 외교 정책을 수립했다.
2011년 카타르는 리비아에서의 NATO 작전에 참여했으며 리비아 반군 단체를 무장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시리아 내전에서 반군 단체의 주요 무기 자금 지원국이기도 했다. 카타르는 예멘 내전에서 후티 반군과 전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에게 충성하는 세력에 대항하여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개입에 참여했다. 2000년대 이후 카타르는 특히 중동 분쟁의 중재자로서 더 넓은 외교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예를 들어, 카타르는 2006년 팔레스타인 경쟁 파벌인 파타와 하마스 사이를 중재했으며, 2008년 레바논 위기 당시 레바논 지도자들을 통합하여 정치적 합의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카타르는 또한 아프리카 및 아시아 문제에서도 중재자로 부상했으며, 특히 다르푸르 분쟁 속에서 수단을 위한 평화 과정을 개최하고 아프가니스탄 평화를 위한 탈레반 정치 사무소를 설치하여 회담을 촉진했다.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최초의 휴전과 초기 인질 교환을 중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으로 카타르는 "까다로운 스위스"라는 평판을 얻었다.
2017년 6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집트, 예멘은 카타르가 테러를 지원한다고 비난하며 카타르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이 위기는 일부 아랍 국가에서 테러 조직으로 간주하는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카타르의 지원을 둘러싼 분쟁을 격화시켰다. 이 외교 위기는 2021년 1월 알울라 선언 서명으로 종료되었다.
2020년 10월 2일, 카타르 당국은 하마드 국제공항에서 조산아가 화장실에서 발견된 사건과 관련하여 호주 여성 13명을 알몸 수색하여 호주와의 국제적 사건을 야기했다. 2023년 9월, 카타르는 미국-이란 수감자 교환 협상을 중재했다. 이란은 미국에 억류된 이란인 5명과 한국에 동결된 이란 자금 60억 달러를 카타르로 이전하는 대가로 미국인 5명을 석방했다. 2023년 10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란과의 획기적인 수감자 교환 협상 중재에 도움을 준 카타르 국왕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에게 감사를 표했다.
2024년 9월 24일, 카타르는 걸프 국가 최초로 미국 비자 면제 프로그램(VWP)에 지정되어, 카타르 시민들은 사업 또는 관광 목적으로 비자 없이 최대 90일간 미국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양국 간 안보 협력을 강화하고 카타르 시민들의 여행을 용이하게 한다. 미국 시민들도 이전의 30일 제한에서 늘어나 최대 90일간 비자 없이 카타르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7.1. 주요 국가와의 관계
카타르는 미국, 프랑스, 중국, 터키 등 주요 국가들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는 주요 비NATO 동맹국 관계를 맺고 있으며, 알 우데이드 공군 기지를 미군에 제공하는 등 군사적 협력이 중요하다. 프랑스와는 전통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경제 및 문화 교류가 활발하다. 중국과는 에너지, 투자, 인프라 건설 분야에서 협력이 증대되고 있으며, 일대일로 구상에도 참여하고 있다. 터키와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특히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으며, 2017년 외교 위기 당시 터키는 카타르를 적극 지원했다. 이들 국가 외에도 영국 등 유럽 국가들과도 경제, 안보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다각적인 외교 관계는 카타르가 국제 사회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국익을 추구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7.2. 중동 지역 내 관계
카타르는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복잡하고 역동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다. 이란과는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전을 공유하고 있어 경제적으로는 협력 관계를 유지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걸프 협력 회의(GCC) 회원국으로서 다른 아랍 국가들과 공동보조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사우디아라비아와는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심각한 외교 단절을 겪었으나, 이후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 단절 사태는 카타르의 무슬림 형제단 지원, 알자지라 방송의 보도, 이란과의 관계 등을 문제 삼은 사우디, UAE, 바레인, 이집트 등 4개국이 주도했으며, 육해공 봉쇄 조치까지 단행되어 카타르에 큰 경제적, 사회적 타격을 주었다. 카타르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터키, 이란 등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자급자족 경제를 모색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GCC 및 아랍 연맹 회원국으로서 카타르는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자적인 외교 노선으로 인해 주변국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특히 무슬림 형제단 지원 문제와 알자지라 방송의 보도 내용은 주변국과의 긴장 요인이 되어왔다. 2017년 단교 사태는 이러한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로, 관련 당사국들의 입장과 인도주의적 문제 등을 포함하여 균형 있는 시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는 관계가 정상화되었지만, 잠재적인 갈등 요인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7.3.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과 카타르는 1974년 4월 19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1년 9월 카타르가 독립하자마자 카타르를 승인했다. 1976년부터 한국 건설업체가 카타르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양국은 경제, 기술, 무역, 투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해왔다. 주요 협력 분야는 에너지(LNG 장기 공급 계약), 건설(인프라 프로젝트 참여), 조선 등이다. 카타르는 대한민국의 주요 LNG 공급국 중 하나이며, 한국 기업들은 카타르의 월드컵 경기장, 도로, 항만 등 주요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에 다수 참여했다.
최근에는 보건, 교육, 정보통신기술(ICT), 문화 교류 등으로 협력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양국 간 고위급 교류도 활발하며, 카타르 항공이 인천국제공항-도하 직항 노선을 운항하여 인적 교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카타르에는 약 900~1000명의 한국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2015년 기준). 1988년 하계 올림픽에는 카타르가 12명의 선수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8. 군사


카타르군은 육군, 해군, 공군, 내부 보안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병력은 약 2만 명 수준이다. 육군은 약 12,000명, 해군은 약 2,500명, 공군은 약 2,000명, 내부 보안군은 약 5,000명이다. 2008년 카타르의 군사비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2%에 해당하는 26.00 억 USD였으나, 2022년에는 74.90 억 USD로 대폭 증가했다. 이러한 군비 증강은 2011년 아랍의 봄과 2014년 및 2017년 주변 걸프 국가들과의 외교적 갈등 이후 본격화되었다.
2013년에는 걸프 국가 중 최근 몇 년간 처음으로 징병제를 도입했다. 카타르 남성 시민은 최대 4개월(2018년 1년으로 연장)간 의무 복무해야 하며, 매년 약 2,000명의 징집병이 군 복무를 한다. 최근 주변국과의 긴장으로 인해 군 복무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2017년 이후 카타르는 유럽 국가들과 미국으로부터 대규모의 최신 무기 체계를 도입하여 공군력을 걸프 국가 중 최상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주요 도입 무기로는 다소 라팔, F-15QA, AH-64 아파치 공격헬기 등이 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10-2014년 카타르는 세계 46위의 무기 수입국이었으나, 2015년에는 16위, 2016년에는 11위로 급상승했다. 카타르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국방 협정을 체결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 중부사령부의 전방 사령부인 알 우데이드 공군 기지가 카타르에 위치하여 약 10,000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는 카타르 안보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카타르군은 2011년 리비아 군사 개입 당시 미라주 2000 전투기 6대를 파견하여 NATO 공습 작전을 지원했고, 리비아 반군 훈련을 위한 특수부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2015년 9월 예멘 내전에서 사우디 주도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 1,000명, 장갑차 200대, 아파치 헬리콥터 30대를 파견했으나, 2017년 외교 위기로 인해 예멘에서 철수했다. 2024년 세계평화지수에 따르면 카타르는 세계에서 29번째로 평화로운 국가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2024년 11월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카타르의 군사력 증강 과정에서 뇌물 수수 등 부패한 무기 거래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9. 경제

석유 발견 이전 카타르 경제는 어업과 진주 채취에 집중되었다. 1892년 오스만 제국 지방 총독들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892년 진주 채취 수입은 245만 크란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의 양식 진주가 세계 시장에 등장하면서 카타르의 진주 산업은 붕괴했다. 1940년 두칸 유전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국가 경제가 변모했다. 현재 카타르는 합법적인 시민들에게 높은 생활 수준을 제공한다. 소득세가 없는 카타르는 바레인과 함께 세계에서 세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이다. 2013년 6월 실업률은 0.1%였다. 회사법은 카타르 국적자가 에미리트 내 모든 사업체의 51%를 소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무역 및 산업은 상공부가 감독한다. 국토는 작지만 풍부한 천연가스를 보유하고 있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2015년 국제통화기금(IMF) 통계 기준으로 8.63 만 USD를 넘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 카타르는 대학을 졸업한 국민에게 집을 무료로 임대해주고 10년 후 소유권을 이전해주며, 수도 요금, 전기 요금, 의료비, 교육비 등이 무료이고 소득세도 면제된다.
2016년 기준, 국제 통화 기금(IMF)에 따르면 카타르는 세계에서 1인당 GDP가 네 번째로 높다. 경제 성장을 위해 외국인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여, 이주 노동자가 인구의 86%, 노동력의 94%를 차지한다. 경제 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1940년에 시작된 석유 및 천연가스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카타르는 액화천연가스(LNG)의 주요 수출국이다. 2012년, 카타르는 향후 10년 동안 에너지 부문에 1200.00 억 USD 이상을 투자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카타르는 1961년에 가입한 석유 수출국 기구(OPEC) 회원국이었으나 2019년 1월에 탈퇴했다.

2012년, 카타르는 1인당 소득 기준으로 3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라는 타이틀을 유지했으며, 2010년에 처음으로 룩셈부르크를 추월했다.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국제 금융 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Finance)가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2012년 카타르의 구매력 평가(PPP) 기준 1인당 GDP는 10.60 만 USD (387,000 카타르 리얄)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순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룩셈부르크는 약 8.00 만 USD로 2위를 차지했고, 싱가포르는 약 6.10 만 USD의 1인당 소득으로 3위를 차지했다. 이 연구는 2012년 카타르의 GDP를 1820.00 억 USD로 평가했으며, 가스 수출 급증과 높은 유가로 인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2012년 카타르의 인구는 180만 명이었다.

2005년에 설립된 카타르 투자청(Qatar Investment Authority, QIA)은 해외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국가의 국부펀드이다. 2012년 기준 자산 1150.00 억 USD로, QIA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부펀드 중 12위를 차지했다. 석유 및 가스 산업에서 수십억 달러의 흑자를 바탕으로 카타르 정부는 미국, 유럽 및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투자를 지시해왔다. 카타르 홀딩(Qatar Holding)은 QIA의 국제 투자 부문이다. 2009년부터 카타르 홀딩은 국가로부터 매년 300.00 억 USD에서 400.00 억 USD를 지원받았다. 2014년 기준, 발렌티노, 지멘스, 프렝탕, 해러즈, 더 샤드, 바클레이즈 은행, 히스로 공항, 파리 생제르맹 F.C., 폭스바겐 그룹, 로열 더치 쉘, 뱅크 오브 아메리카, 티파니, 중국농업은행, 세인즈버리스, 블랙베리, 산탄데르 브라질 등 전 세계에 투자하고 있다.
카타르는 비법인에 대한 세금이 없지만, 당국은 정크 푸드와 사치품에 세금을 부과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 세금은 패스트푸드, 담배 제품, 청량음료와 같이 인체에 해로운 상품에 시행될 것이다. 이러한 초기 세금의 시행은 유가 하락과 2016년 국가가 직면한 적자의 결과로 여겨진다. 또한, 2016년에는 석유 회사 및 정부의 다른 부문에서 일자리 감축이 있었다.
카타르 국가 비전 2030의 일환으로, 국가는 산업 범위를 확장하여 석유 및 가스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학교 교육, 관광, 친환경 에너지 관련 프로젝트에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카타르는 친환경 에너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2030년까지 에너지의 20%를 태양광 발전으로 충당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경제 변혁의 일환으로 관광 산업이 성장하고 있으며, 이는 GDP 성장에 기여하고 국가의 석유 수출 의존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9.1. 에너지

2012년 기준 카타르는 150억 배럴의 확인된 석유 매장량과 전 세계 자원의 13% 이상을 차지하는 가스전을 보유하고 있다. 경제는 1982년부터 1989년까지 침체기였다. OPEC의 원유 생산 할당량, 유가 하락, 국제 시장의 전반적으로 불투명한 전망으로 인해 석유 수입이 감소했다. 그 결과 카타르 정부의 지출 계획은 낮은 수입에 맞춰 축소되어야 했다. 이로 인한 지역 사업 환경의 침체로 많은 기업이 외국인 직원을 해고했다. 1990년대 경제가 회복되면서 이집트와 남아시아 출신을 중심으로 외국인 인구가 다시 증가했다.
카타르의 확인된 가스 매장량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며, 250조 입방피트(7000 km3)를 초과한다. 경제는 1991년 15.00 억 USD 규모의 노스 필드 가스 개발 1단계 완료로 활성화되었다. 1996년 카타르가스 프로젝트는 일본에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카타르는 세계 최대 LNG 수출국 중 하나이다.
움 사이드에 기반을 둔 카타르의 중공업 프로젝트에는 하루 50,000 배럴(8000 m3) 생산 능력의 정유 공장, 요소 및 암모니아 비료 공장, 제철소, 석유화학 공장이 포함된다. 이러한 모든 산업은 가스를 연료로 사용한다. 대부분은 유럽 및 일본 기업과 국영 카타르에너지 간의 합작 투자이다. 미국은 카타르 석유 및 가스 산업의 주요 장비 공급업체이며, 미국 기업들은 노스 필드 가스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08년 카타르는 향후 20년간 카타르의 4대 주요 목표 중 하나로 환경 개발을 강조하는 카타르 국가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이 국가 비전은 지역 및 지구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석유 기반 에너지에 대한 지속 가능한 대안을 개발할 것을 약속한다. 카타르는 재생 가능 자원에 대한 투자를 향후 20년간 국가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2030년까지 카타르는 에너지의 20%를 태양광 발전으로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카타르는 연간 약 2,140 kWh/m²의 전 세계 수평 일사량 값을 가지고 있어 태양광 발전 시스템을 활용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 또한 직접 일사량 매개변수는 연간 약 2,008 kWh/m²로, 집광형 태양광 발전(CSP)의 혜택도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카타르 재단은 태양광 발전 목표 달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카타르 개발 은행 및 독일 회사 솔라월드와 함께 합작 투자를 통해 카타르 솔라 테크놀로지스(QSTec)를 설립했다. 2017년 QSTec는 라스 라판에 폴리실리콘 공장을 가동했으며, 이 공장은 1.1 MW의 태양광 발전 용량을 갖추고 있다.
카타르는 모든 합작 산업과 정부 부처가 카타르 국민을 더 높은 권한을 가진 직위로 이동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카타르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해외에서 교육받은 카타르인들이 귀국하여 이전에는 외국인이 차지했던 주요 직책을 맡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유입을 통제하기 위해 카타르는 지난 몇 년간 외국인 인력 프로그램 관리를 강화했다. 안보는 카타르의 엄격한 입국 및 이민 규정의 주요 근거이다.
9.2. 관광


카타르는 관광 분야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 중 하나이다. 세계 관광 순위에 따르면 2017년에 230만 명 이상의 국제 관광객이 방문했다. 카타르는 최근 88개국 국민에게 비자 면제 및 무료 입국을 허용하는 등 비자 간소화 개선으로 중동에서 가장 개방적인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카타르는 최근 세계 경제 포럼의 여행 및 관광 경쟁력 조사 2019에서 중동 시장 환경 부문 상위 8위 안에 들었다.
도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호텔 및 환대 시장 중 하나이다. 2010년 월드컵 유치 성공 이후 인프라에 2200.00 억 USD를 지출한 것이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호텔은 또한 국가의 지리적 위치 덕분에 도움을 받았다. 관광 부문은 2022년 상반기에 729,000명 이상의 국제 방문객을 기록하며 강력한 회복세를 보였으며, 이는 2021년 전체에 비해 19% 증가한 수치이며, 2030년까지 관광 산업이 GDP의 12%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도하의 관광 산업은 매우 빠르게 성장하여 전 세계 여행객들의 허브가 되었다. 이슬람 예술 박물관, 수크 와키프, 카타라 문화 마을은 가장 인기 있는 방문 장소 중 일부이다. 새로운 규정 덕분에 88개국 국민이 이제 비자 없이 카타르에 입국할 수 있게 되어 중동에서 가장 방문하기 쉬운 곳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2022년 FIFA 월드컵과 다가오는 2030년 아시안 게임과 같은 행사를 개최하여 2030년까지 관광 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12%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카타르는 2030년 아시안 게임 및 2022년 FIFA 월드컵과 같은 세계적인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운동 및 기업 관광 분야에서 큰 도약을 경험할 것으로 예상된다. 카타르 국영 항공사인 카타르 항공과 하마드 국제공항은 여행객들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며, 이는 카타르 관광 산업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카타르의 연구 센터인 걸프 뉴스는 최근 몇 년간의 통계와 다가오는 행사들을 분석하여, 2020년까지 외국인 여행객 유치를 통해 119.00 억 USD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측했다. 이러한 상승 추세의 원인은 카타르의 환대 산업 증가와 국가 문화에 대한 관심 증대 때문이다.
9.3. 교통



2008년 인프라 개발을 감독하는 기관 중 하나인 공공사업청(Ashghal)은 가까운 미래에 모든 부문에서 주요 프로젝트 확장을 준비하기 위해 기관을 간소화하고 현대화하기 위한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Ashghal은 2006년 3월에 제정되어 2025년까지 시행되는 교통 마스터 플랜을 설계한 도시 계획 개발청과 협력하여 운영된다.
도로망은 이 계획의 주요 초점이다. 이 부문의 주요 프로젝트에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도하 고속도로와 카타르-바레인 해상 교량이 포함된다. 도하 메트로, 경전철 시스템, 보다 광범위한 버스 네트워크와 같은 대중교통 옵션도 도로 혼잡을 완화하기 위해 개발 중이다. 또한 철도 시스템이 대폭 확장되고 있으며, 결국 모든 페르시아만 아랍 국가를 연결하는 GCC 전체 네트워크의 필수적인 부분이 될 수 있다.
하마드 국제공항은 도하에 위치해 있다. 2014년, 이전의 도하 국제공항을 대체하여 카타르의 주요 공항이 되었다. 2016년, 이 공항은 승객 수송량 기준으로 세계에서 50번째로 분주한 공항으로 선정되었으며, 37,283,987명의 승객을 처리하여 2015년보다 20.2% 증가했다. 카타르 항공은 6개 대륙에 걸쳐 매일 160개 이상의 목적지를 연결하는 세계 최대 항공사 중 하나이다. 2011년, 2012년, 2015년, 2017년, 2019년에 올해의 항공사로 선정되었으며, 46,0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카타르는 유럽과 중국 또는 아프리카 간의 무역에 참여하기 위해 물류 및 항만 기능을 점점 더 활성화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하마드 항과 같은 항만은 빠르게 확장되고 기술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국가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 중국 해안에서 인도 남단을 거쳐 몸바사까지, 거기서 홍해를 통해 수에즈 운하를 거쳐 지중해로, 그리고 아드리아해 상부 지역을 거쳐 중앙 유럽, 동유럽 및 북해와 철도로 연결되는 이탈리아 북부 허브 트리에스테까지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의 일부이다. 하마드 항은 도하 남쪽 움 알 홀 지역에 위치한 카타르의 주요 항구이다. 항만 건설은 2010년에 시작되었으며, 2016년 12월에 운영을 시작했다. 연간 최대 780만 톤의 제품을 처리할 수 있으며, 항구를 통과하는 무역의 대부분은 식품과 건축 자재로 구성된다. 북부 해안의 라스 라판 항은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액화천연가스(LNG) 수출 시설 역할을 한다.
카타르는 대중교통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으며, 도하 메트로는 이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이 지하철 시스템은 하마드 국제공항과 주요 비즈니스 허브 등 수도의 중요한 지역을 연결한다. 이는 주민과 관광객이 이동할 수 있는 현대적이고 빠른 방법이다. 더 많은 확장이 계획되어 있으며, 이는 지역 전체의 연결성을 향상시킬 것이다. 카타르 철도(Qatar Rail)는 티켓, 계획 및 향후 개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9.4. 농업 및 산업
카타르는 연간 강수량이 40mm 내외로 매우 건조하여 강우에 의존하는 농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개 시설을 이용하여 제한적인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경작지 면적은 국토의 0.7%(1994년 기준 약 80 km2)에 이른다. 목초지는 국토의 4.5%(약 500 km2)를 차지한다. 농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0.5%에 불과하다.
주요 곡물로는 보리(2002년 기준 5,000톤)와 옥수수(1,000톤)가 재배된다. 채소 중에서는 토마토(11,000톤) 생산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양배추(2,000톤) 순이다. 축산업에서는 닭(400만 마리)과 양(20만 마리) 사육이 가장 활발하며, 염소(18만 마리), 낙타(5만 마리) 등도 사육된다. 어업은 활발하지 않으나 약 7,000톤의 어획량을 기록하고 있다.
카타르의 산업은 주로 석유 및 천연가스에 기반한 에너지 산업과 그 파생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주요 산업 단지인 움 사이드(Umm Said)에는 정유 공장, 요소 및 암모니아 비료 공장, 제철소, 석유화학 공장 등이 있으며, 모두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한다. 이러한 산업들은 대부분 유럽 및 일본 기업과 국영 기업인 카타르에너지(QatarEnergy) 간의 합작 투자 형태로 운영된다. 제조업 부문에서는 석유 제품, 플라스틱, 철강 등이 주요 수출품목이다. 정부는 '카타르화(Qatarization)' 정책을 통해 자국민의 산업 참여를 확대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카타르 국가 비전 2030의 일환으로 지식 기반 경제로의 전환을 목표로 산업 다각화를 추진 중이다.
9.5. 정보통신

카타르는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중동 지역 선두 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세계 경제 포럼(WEF)의 네트워크 준비 지수(NRI)에서 꾸준히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전체 23위를 차지했다. 이는 국가의 ICT 개발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인터넷 보급률이 매우 높으며, 주요 통신 사업자로는 우레두(Ooredoo)와 보다폰 카타르(Vodafone Qatar)가 있다. 이들은 유무선 통신 서비스와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디어 환경에서는 알자지라 방송 네트워크가 국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알자지라는 도하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아랍어 및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뉴스 및 프로그램을 전 세계에 송출한다. 이 외에도 여러 신문과 방송사가 운영되고 있으나, 언론의 자유는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는 ICT 인프라 투자와 스마트 시티 프로젝트 등을 통해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10. 사회
카타르 사회는 급격한 경제 성장과 함께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전통적인 이슬람 문화와 가치관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지만, 외국인 인구의 대규모 유입으로 다문화적인 요소도 공존한다. 정부는 교육, 보건,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통해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이주 노동자 문제, 여성 인권, 표현의 자유 제한 등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도 안고 있다.
10.1. 인구

카타르의 인구는 이주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 상당한 변동을 보인다. 2017년 초 기준 총인구는 260만 명이었으며, 외국인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카타르 국적자는 313,000명(12%)에 불과했고, 나머지 230만 명은 외국인 거주자였다. 카타르의 인구는 2020년 기준 2,881,053명이다.
연도 | 인구 |
---|---|
1950 | 25,000 |
1960 | 47,000 |
1970 | 110,000 |
1980 | 224,000 |
1990 | 476,000 |
2000 | 592,000 |
2010 | 1,856,000 |
2019 | 2,832,000 |

스리랑카를 포함한 인도 아대륙 국가 출신의 남아시아인 총인구는 150만 명(60%) 이상이다. 이 중 인도인이 가장 큰 공동체로 2017년 기준 65만 명이며, 네팔인 35만 명, 방글라데시인 28만 명, 필리핀인 26만 명, 이집트인 20만 명, 스리랑카인 14만 5천 명, 파키스탄인 12만 5천 명 순이다. 남아시아 출신이 아닌 외국인 거주자는 카타르 인구의 약 28%를 차지하며, 그 외 다수 국적(다른 아랍 국가, 유럽 국가 등)의 사람들이 있다.
카타르 최초의 인구 기록은 1892년 이 지역의 오스만 총독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만을 포함한 이 인구 조사에 따르면 1892년 인구는 9,830명이었다. 1970년에 실시된 첫 번째 인구 조사 당시 인구는 111,133명이었다. 2010년 인구 조사에서는 인구가 1,699,435명으로 기록되었다. 2013년 1월, 카타르 통계청은 인구를 1,903,447명으로 추산했으며, 이 중 남성은 1,405,164명, 여성은 498,283명이었다. 남성 노동자 유입으로 성비 불균형이 심화되어 현재 여성은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10.1.1. 민족 구성
카타르의 인구는 카타르 국적자와 비국적자로 나뉘며, 민족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카타르 국적자는 주로 아라비아 반도 원주민의 후손인 베두인계, 이란·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이주해 온 하다르계, 그리고 동아프리카에서 온 노예의 후손인 압드계 등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대다수(약 88%)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로, 이들의 민족적 배경은 더욱 다양하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룹은 남아시아 출신(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이며, 이들이 전체 인구의 약 60%를 차지한다. 그 외에도 동남아시아(필리핀 등), 다른 아랍 국가(이집트 등),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카타르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민족 구성은 카타르 사회의 다문화적 특징을 형성하지만, 동시에 사회 통합과 문화적 차이로 인한 과제도 안고 있다.
10.2. 종교

이슬람교가 카타르의 지배적인 종교이자 국교이지만, 국내에서 행해지는 유일한 종교는 아니다. 헌법은 "도덕적" 테두리 내에서 모든 신앙을 실천할 자유를 보장한다. 대부분의 시민은 와하브파의 살라피파 무슬림 운동에 속하며, 무슬림의 5~15%는 시아파를 따르고 다른 이슬람 종파는 극소수이다. 2010년 기준 카타르 인구는 무슬림 67.7%, 기독교인 13.8%, 힌두교인 13.8%, 불교인 3.1%였으며, 나머지 1.6%는 기타 종교 및 종교적으로 무소속인 사람들이 차지했다. 헌법에 따르면 샤리아가 입법의 주요 원천이다. 카타르의 샤리아 해석은 이웃 사우디아라비아만큼 "엄격"하지는 않지만, 두바이만큼 "자유주의적"이지는 않다고 알려져 있다. 카타르 종교부(Ministry of Awqaf and Islamic Affairs)의 비전은 "샤리아와 문화유산을 육성하면서 현대적인 이슬람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카타르는 아랍에미리트, 오만과 함께 아라비아 반도 국가 중 교회가 허용된 소수 국가 중 하나이다.
비무슬림 인구는 거의 전적으로 외국인 이주자로 구성된다. 2008년부터 기독교인들은 정부가 기증한 땅에 교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카타르 역사상 최초로 15만 명의 기독교계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천주교회 예배당이 건립되었다. 활동 중인 교회로는 말랑카라 마르 토마 시리아 교회, 말랑카라 정교회 시리아 교회, 로마 가톨릭의 우리들의 장미 성모 교회, 성공회의 주현절 교회가 있다. 또한 두 개의 몰몬교 와드와 바하이교 공동체가 있다.
10.3. 언어
아랍어가 공식 언어이며, 카타르 아랍어가 현지 방언이다. 카타르 수화는 청각 장애인 공동체의 언어이다. 영어는 제2언어로 널리 사용되며, 특히 상업 분야에서 점차 공용어(링구아 프랑카)로 부상하고 있어 영어의 잠식으로부터 아랍어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어는 카타르의 대규모 외국인 공동체와의 의사소통에 특히 유용하다. 의료계와 카타르에서 일할 간호사 훈련과 같은 상황에서는 영어가 공용어 역할을 한다. 국가의 다문화적 구성을 반영하여 말라얄람어, 페르시아어, 발루치어, 브라후이어, 힌디어, 우르두어, 파슈토어, 칸나다어, 타밀어, 텔루구어, 네팔어, 신할라어, 벵골어, 타갈로그어, 툴루어, 인도네시아어 등 다른 많은 언어도 사용된다.
10.4. 보건
카타르는 높은 수준의 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카타르 국민은 국가 건강 보험 제도에 따라 의료 혜택을 받으며, 외국인 거주자는 고용주를 통해 건강 보험에 가입하거나 자영업자의 경우 직접 보험을 구매해야 한다. 정부의 의료비 지출은 중동 지역에서 가장 높은 수준 중 하나로, 2014년에는 47.00 억 USD가 투자되었다. 이는 2010년에 비해 21.00 억 USD 증가한 수치이다. 주요 의료 서비스 제공 기관은 정부가 비영리 의료 기관으로 설립한 하마드 의료 공사(Hamad Medical Corporation)로, 병원 네트워크, 구급차 서비스, 가정 건강 관리 서비스를 운영하며 이 모든 서비스는 합동위원회(Joint Commission)의 인증을 받았다.
2010년 의료비 지출은 국가 GDP의 2.2%를 차지하여 중동 지역에서 가장 높았다. 2006년에는 인구 1만 명당 의사 23.12명, 간호사 61.81명이었다. 2014년 출생 시 기대 수명은 82.08세(남성 83.27세, 여성 77.95세)로 중동 지역에서 가장 높았다. 카타르의 영아 사망률은 10만 명당 7명으로 낮다.
2006년에는 인구 1만 명당 병상 수가 25개, 의사 27.6명, 간호사 73.8명이었다. 2011년에는 병상 수가 인구 1만 명당 12개로 감소한 반면, 의사 수는 1만 명당 28명으로 증가했다. 카타르는 이 지역에서 병상 비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이지만, 의사 수는 GCC 국가 중 가장 높다.
11. 문화
카타르의 문화는 동부 아라비아의 다른 국가들과 유사하며, 이슬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매년 12월 18일에 열리는 카타르 국경일은 국가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 날은 자심 빈 무함마드 알 타니의 왕위 계승과 그에 따른 국가 내 여러 부족의 통합을 기념한다. 도하 문화 축제는 카타르 문화예술유산부가 매년 주최하는 문화 활동 중 하나로, 2002년에 시작되어 카타르 문화를 국내외에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카타르는 풍부한 석유 및 천연가스 수입 덕분에 의료 및 교육이 무상으로 제공되며 사회 보장 제도도 잘 갖추어져 있다.
11.1. 예술


카타르 관리들, 특히 알 타니 가문과 국왕의 여동생인 알 마야사 빈트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는 예술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알 마야사는 카타르 박물관청을 이끌고 있다. 2008년에 개관한 도하 이슬람 예술 박물관은 이 지역 최고의 박물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박물관과 마타프: 아랍 현대 미술관 등 여러 다른 카타르 박물관은 카타르 박물관청 산하에 있으며, 이 기관은 베르사유궁에서의 무라카미 다카시 대규모 전시회(2010년)와 런던에서의 데미안 허스트 전시회(2012년) 등 해외 예술 행사도 후원한다.
카타르는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세계 최대의 미술 시장 구매자이다. 카타르의 문화 부문은 국가가 주로 가스 산업에서 얻는 자원에서 비롯된 발전에 기여하고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개발되고 있다.
11.2. 문학
카타르 문학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는 문자로 기록된 시가 가장 일반적인 표현 형태였다. 19세기 초의 두 시인 압둘 잘릴 알 타바타바이와 무함마드 빈 압둘라 빈 우타이민은 카타르 최초의 기록된 시 모음집을 형성했다. 20세기 중반 카타르가 석유 수출로 이익을 얻기 시작하고 많은 카타르인들이 도시 생활을 선호하여 베두인 전통을 버리면서 시는 나중에 인기를 잃었다.
1950년대 동안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한 카타르인들의 수가 증가하고 다른 중요한 사회적 변화로 인해 1970년에는 최초의 단편 소설 선집이 소개되었고, 1993년에는 최초의 현지 작가 소설이 출판되었다. 시, 특히 지배적인 나바티 형식은 어느 정도 중요성을 유지했지만 곧 다른 문학 유형에 의해 가려졌다. 카타르 사회의 다른 대부분의 예술 형태와 달리, 여성들은 남성들과 비슷한 정도로 현대 문학 운동에 참여해왔다.
11.3. 대중 매체

카타르의 미디어는 2014년 프리덤 하우스의 언론 자유 보고서에서 "자유롭지 않음"으로 분류되었다. TV 방송은 1970년에 시작되었다. 알자지라 미디어 네트워크는 도하에 본사를 둔 주요 텔레비전 네트워크이다. 알자지라는 처음에 1996년 아랍어 뉴스 및 시사 위성 TV 채널로 시작하여 이후 여러 전문 TV 채널로 구성된 글로벌 네트워크로 확장되었다.
언론인들은 특히 정부와 카타르 지배 가문인 알 타니 가문에 대해 자가 검열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 국왕, 지배 가문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불법이다. 언론법 제46조에 따르면 "카타르 국왕은 비판받아서는 안 되며, 그의 사무실 관리자의 서면 허가 없이는 어떠한 진술도 그에게 귀속될 수 없다." 언론인들은 또한 이슬람을 모욕한 혐의로 기소될 수 있다.
2014년 사이버 범죄 예방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지역 평화를 위태롭게 하거나 허위 뉴스를 게시하는 등 광범위한 이유로 징역형과 벌금형을 부과한다고 알려져 있다. 걸프 인권 센터는 이 법이 언론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고 밝혔으며 법의 특정 조항을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언론 매체가 확장되었다. 현재 카타르에는 7개의 신문이 유통되고 있으며, 4개는 아랍어로, 3개는 영어로 발행된다. 인도, 네팔, 스리랑카의 신문들도 카타르에서 인쇄된 판이 있다.
통신 인프라와 관련하여 카타르는 세계 경제 포럼의 네트워크 준비 지수(NRI)에서 중동 국가 중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국가의 정보 통신 기술 발전 수준을 결정하는 지표이다. 카타르는 2014년 NRI 순위에서 전체 23위를 차지하여 2013년과 변동이 없었다.
11.4. 음악
카타르 음악은 베두인 시, 노래, 춤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도하의 전통 춤은 금요일 오후에 공연되며, 그중 하나는 아르다(Ardah)로, 알-라스(al-ras, 불에 달군 가죽을 씌운 큰 북), 탬버린, 심벌즈와 작은 북 등 다양한 타악기 반주에 맞춰 두 줄의 무용수들이 추는 양식화된 무술 춤이다. 민속 음악에 사용되는 다른 타악기로는 갈라스(galahs, 큰 토기 항아리)와 투스(tus) 또는 타사트(tasat)로 알려진 주석 술잔이 있으며, 보통 막대기로 치는 긴 북인 타블(tabl)과 함께 사용된다. 우드와 레바바와 같은 현악기도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11.5. 스포츠


축구는 선수와 관중 모두에게 카타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1963년에 창설되어 2008년에 프로화된 카타르 스타스 리그는 오일 머니로 수많은 유명 선수를 영입하여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00년대에는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펩 과르디올라, 페르난도 이에로 등이, 2010년대에는 라울 곤살레스, 차비 에르난데스, 베슬리 스네이더르, 사뮈엘 에토 등이, 2020년대에는 하메스 로드리게스, 마이클 올룽가 등이 카타르 클럽으로 이적했다. 일본 선수로는 2019년 나카지마 쇼야가 알두하일 SC로 이적할 당시 이적료가 약 43억 7500만 엔으로, 2001년 나카타 히데토시가 세리에 A의 파르마로 이적할 당시의 약 32억 엔을 크게 웃도는 일본 선수 역대 최고액을 기록했다. 2020년에는 고바야시 유키가 알코르 SC로, 2022년에는 다니구치 쇼고가 알라이얀 SC로 이적했다.
카타르는 국제 대회 유치에도 힘쓰고 있으며, AFC 아시안컵은 1988년, 2011년, 2023년 대회가 카타르에서 개최되었다. FIFA 아랍컵도 2021년 대회가 열렸으며, 2025년과 2027년 대회도 카타르 개최가 예정되어 있다. FIFA 월드컵은 2022년 대회가 열렸고, 카타르 대표팀은 본선에 처음 출전했다. 카타르 축구 국가대표팀은 아랍에미리트에서 개최된 2019년 AFC 아시안컵에서 결승전에서 일본을 3-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대회 기간 동안 단 한 골만 실점하며 7전 전승을 거두었다. 다음 2023년 대회에서 개최국이자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카타르는 결승전에서 요르단을 꺾고 성공적으로 타이틀을 방어했다.
크리켓은 카타르의 남아시아 디아스포라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 캐주얼 길거리 크리켓이 가장 인기 있는 경기 형식이지만, 카타르 크리켓 협회는 1999년부터 국제 크리켓 평의회(ICC) 회원이며 남자 국가대표팀과 여자 국가대표팀 모두 ICC 대회에 정기적으로 참가한다. 카타르의 주요 크리켓 경기장은 웨스트 엔드 파크 국제 크리켓 경기장이다.
농구는 카타르의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발전된 스포츠이다. 카타르는 2005년 FIBA 아시아 선수권 대회, 2013년 FIBA 아시아 3x3 선수권 대회, 2014년 FIBA 아시아 U-18 선수권 대회, 2022년 FIBA U-16 아시아 선수권 대회를 개최했다. 카타르는 2027년 FIBA 농구 월드컵을 개최하여 아랍 국가 최초로 FIBA 농구 월드컵을 개최하게 된다.
도하의 칼리파 국제 테니스 및 스쿼시 단지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여자 테니스 WTA 투어 챔피언십을 개최했다. 도하는 매년 WTA 프리미어 토너먼트인 카타르 레이디스 오픈을 개최한다. 2002년부터 카타르는 6개 스테이지로 구성된 사이클링 대회인 투어 오브 카타르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매년 2월, 선수들은 6일 동안 카타르의 평지를 가로지르는 도로에서 경주를 펼친다. 각 스테이지는 100 km 이상의 거리를 달리지만, 타임 트라이얼은 일반적으로 더 짧은 거리이다. 투어 오브 카타르는 엘리트 남자 부문의 프로 선수들을 위해 카타르 사이클링 연맹이 주최한다.
카타르 육군 스카이다이빙 팀은 여러 다른 스카이다이빙 종목에서 세계 상위권에 속한다. 카타르 국립 낙하산 팀은 매년 카타르 국경일과 2015년 세계 핸드볼 선수권 대회와 같은 기타 대규모 행사에서 공연한다.
도하는 공식 FIVB 배구 남자 클럽 세계 선수권 대회를 네 차례, FIVB 배구 여자 클럽 세계 선수권 대회를 세 차례 개최했다. 도하는 또한 아시아 남자 배구 선수권 대회를 한 차례 개최했다.
카타르의 스포츠는 구기 종목 외에도 육상 경기, 경마, 수영 등 폭넓게 발전하고 있다. 전통 스포츠로는 낙타 경주(경타, 캐멀 레이싱)가 있으며, 샤하니야 시에는 전용 경기장이 마련되어 있다.
11.5.1. 2022년 FIFA 월드컵



2010년 12월 2일, 카타르는 2022년 FIFA 월드컵 개최권을 획득하여 중동 국가 최초이자 이슬람권 국가 최초로 월드컵을 유치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카타르는 7개의 신규 경기장을 건설하고 1개의 기존 경기장을 확장하는 등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진행했다. 월드컵 유치는 카타르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경제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유치 과정에서의 뇌물 스캔들 의혹, 경기장 건설 과정에서의 이주 노동자 인권 문제 등 여러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특히 영국 가디언지는 2022년 월드컵 준비 과정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학대와 착취를 당하고 있으며, 2021년 2월까지 약 6,500명의 이주 건설 노동자가 사망했다고 보도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해 카타르 조직위원회는 월드컵 개최가 지역 사회 변화의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타르는 월드컵 기간 동안 약 160만 명의 축구 팬을 유치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2021년 말까지 가용 호텔 객실은 37,000개에서 70,000개로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되었다. 이에 따라 카타르 월드컵 관계자들은 영국의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과 미국의 코첼라 페스티벌 조직위원회에 접근하여 수천 명의 축구 팬을 위한 대규모 사막 캠프장을 계획했다. 외곽의 월드컵 캠프장에는 허가된 바, 레스토랑, 엔터테인먼트 및 세탁 시설이 마련되었으며, 약 4만 명을 위한 임시 수상 숙소로 두 척의 유람선도 예약되었다.
대회 자체는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이 투입되었으며, 경기장 냉방 시스템, 반자동 오프사이드 판독 기술 등 최첨단 기술이 적용되어 많은 이들로부터 성공적인 대회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주 노동자 인권 문제와 관련된 비판은 대회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카타르 정부의 후속 조치와 개선 노력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11.6. 음식
카타르 전통 음식은 주변 중동 국가들과 유사하게 향신료를 풍부하게 사용하며, 양고기, 닭고기, 생선, 쌀, 채소 등이 주요 식재료이다. 대표적인 전통 음식으로는 마크부스(Machboos, 향신료와 함께 밥과 고기 또는 생선을 찐 요리), 하리스(Harees, 밀과 고기를 빻아 만든 죽과 비슷한 요리), 타리드(Thareed, 빵 조각을 고기 및 채소 스튜에 넣어 먹는 요리) 등이 있다. 대추야자는 중요한 간식이며, 커피(가흐와, Gahwa)는 환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현대에는 서양 음식 및 다양한 국가의 음식이 유입되어 식문화가 다채로워졌으며, 특히 수도 도하에는 고급 레스토랑과 세계 각국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이 많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와 주류는 엄격히 제한되지만, 특정 호텔이나 허가받은 상점에서는 비무슬림을 대상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11.7. 세계유산
카타르에는 현재 1건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등재되어 있다.
- 알 주바라 고고 유적 (Al Zubarah Archaeological Site): 2013년에 등재된 문화유산으로, 18세기에서 19세기 초 페르시아만 지역의 주요 진주 채취 및 교역 중심지였던 알 주바라 마을의 유적이다. 잘 보존된 도시 유적, 항구, 요새 등은 당시 걸프 지역의 경제와 사회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받는다. 이 유적은 전통적인 도시 계획과 건축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사막 환경에 적응한 인간 정주 역사를 보여준다.
11.8. 공휴일
카타르의 주요 공휴일은 국경일과 이슬람 종교 휴일로 나뉜다.
날짜 | 한국어 명칭 | 아랍어 명칭 | 비고 |
---|---|---|---|
2월 둘째 주 화요일 | 국립 스포츠의 날 | اليوم الرياضي للدولة아랍어 | 2012년부터 지정 |
12월 18일 | 국경일 (건국 기념일) | اليوم الوطني لدولة قطر아랍어 | 1878년 자심 빈 무함마드 알 타니의 즉위를 기념. 2007년부터 9월 3일에서 변경됨. |
샤왈월 1일~3일 | 이드 알 피트르 (라마단 종료 축제) | عيد الفطر المبارك아랍어 | 이슬람력에 따름 (매년 날짜 변동) |
둘 히자월 10일~13일 | 이드 알 아드하 (희생제) | عيد الأضحى المبارك아랍어 | 이슬람력에 따름 (매년 날짜 변동) |
이 외에도 이슬람력에 따른 다른 종교적 기념일이나 국왕의 즉위일 등 특별한 날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될 수 있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주말이다. 카타르는 이슬람 국가여서 휴일이 금요일과 토요일이다.
12. 교육

카타르는 교육 시스템 개혁을 위해 미국의 랜드 연구소(RAND Corporation)를 고용했다. 카타르 재단(Qatar Foundation)을 통해 웨일 코넬 의과대학, 카네기 멜런 컴퓨터 과학 대학, 조지타운 대학교 외교 대학, 노스웨스턴 대학교 저널리즘 대학, 텍사스 A&M 대학교 공과대학,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교 예술 대학 등 서구 유수 대학들의 분교를 유치한 에듀케이션 시티를 건설했다.
2012년 기준 카타르의 문맹률은 남성 3.1%, 여성 4.2%로 아랍어권 국가 중 가장 낮았으며 세계 86위였다. 카타르 국민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정부가 제공하는 의무 교육을 받는다. 1973년에 설립된 카타르 대학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고등 교육 기관이다.
2002년 11월,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 국왕은 최고 교육 위원회(The Supreme Education Council)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유아 교육부터 대학 교육까지 모든 연령대의 교육을 지휘하고 통제하며, 카타르를 교육 개혁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교육(Education for a New Era)" 구상을 포함한다. 세계 대학 웹 순위(Webometrics Ranking of World Universities)에 따르면, 카타르 내 상위권 대학은 카타르 대학교(세계 1,881위), 텍사스 A&M 대학교 카타르 캠퍼스(3,905위), 웨일 코넬 의과대학 카타르 캠퍼스(6,855위)이다.
2009년 카타르는 이들 대학과 산업계를 연결하기 위해 교육 도시에 카타르 과학 기술 단지(Qatar Science & Technology Park, QSTP)를 설립했다. 교육 도시에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학교인 카타르 아카데미도 있다. 또한 캐나다의 두 교육기관인 북대서양 대학(College of the North Atlantic)과 캘거리 대학교(University of Calgary)가 도하에 캠퍼스를 개설했다. 다른 영리 목적의 대학들도 도시에 캠퍼스를 설립했다.
2012년 PISA(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 수학, 읽기, 기술 영역에서 카타르는 OECD 65개 참여국 중 하위 3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1인당 소득이 가장 높았다. 2024년 세계 혁신 지수(Global Innovation Index)에서 카타르는 49위를 차지하여 2019년 65위에서 상승했다.
국가 발전 전략의 일환으로 카타르는 교육 수준 향상을 위한 10개년 전략 계획을 수립했다. 정부는 알-바이라크(AL-Bairaq)와 같은 교육 지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알-바이라크는 2010년에 시작되어 고등학생들에게 카타르 대학교 첨단 소재 센터(Center for Advanced Materials)의 연구 환경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STEM 분야와 언어를 포함한다.
2006년 카타르 재단의 구상으로 설립된 카타르 국립 연구 기금(Qatar National Research Fund, QNRF)은 과학 연구를 위한 공공 자금 확보를 목표로 한다. 이 기금은 주로 석유 및 가스 기반 경제에서 지식 기반 경제로 경제를 다각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QSTP는 카타르 재단에 의해 2009년 3월 카타르의 지식 경제로의 전환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8.00 억 USD의 초기 자본으로 시작하여 처음에 21개 기관을 유치한 QSTP는 카타르 최초의 자유무역지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