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배경
이츠하크 라빈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시절인 1922년 3월 1일 예루살렘의 샤아레이 체덱 의료 센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제3차 알리야 시기에 동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이민자 네헤미아 라빈(본명 네헤미아 루비초프, 1886년 ~ 1971년 12월 1일)과 로사 코헨 라빈(1890년 ~ 1937년 11월 12일)이었다.
1.1. 출생과 가족 관계
아버지 네헤미아는 현재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시도로비치의 슈테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일찍부터 가족을 부양했다. 18세에 미국으로 이민하여 포알레 시온당에 가입하고 성을 '라빈'으로 바꾸었다. 1917년에는 유대인 군단 자원병들과 함께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왔다. 이츠하크의 어머니 로사 코헨은 1890년 벨라루스의 모길료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랍비는 시오니즘 운동에 반대했지만, 로사를 고멜의 기독교 여학교에 보내 폭넓은 교육을 받게 했다. 로사는 일찍부터 정치적, 사회적 대의에 관심을 가졌고, 1919년 증기선 루슬란호를 타고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 갈릴리 호수 인근의 키부츠에서 일한 후 예루살렘으로 이주했다.
라빈의 부모는 1920년 네비 무사 폭동 당시 예루살렘에서 만났다. 1923년 가족은 텔아비브의 츨레노프가로 이사했고, 네헤미아는 팔레스타인 전력 회사에서 일했으며, 로사는 회계사이자 지역 활동가로서 텔아비브 시의회 의원이 되었다. 1931년에는 하마기드가의 두 칸짜리 아파트로 다시 이사했다. 라빈 가족의 집은 공공 서비스에 헌신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부모님 모두 평생을 지지 활동가로 보냈다. 이츠하크가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마파이에서 방위 조직에 남아 있었고 텔아비브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이츠하크가 15세 때 사망했다.
1.2. 학창 시절과 교육
라빈은 1세 때 가족이 이주한 텔아비브에서 성장했다. 1928년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학교 하우스에 입학하여 1935년까지 재학했다.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시오니즘과 더불어 농업을 가르쳤다. 라빈은 학교에서 대부분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수줍음이 많아 그가 똑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1935년, 그는 어머니가 설립한 키부츠 기바트 하쉴로샤의 농업 학교에 입학했다. 1936년 14세의 나이로 하가나에 가입하여 권총 사용법과 경계 근무를 배우는 등 첫 군사 훈련을 받았다. 또한 사회주의 시온주의 청년 운동인 하노아르 하오베드 베할로메드에도 가입했다. 1937년에는 2년제 카두리 농업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여러 농업 관련 과목에서 뛰어났지만, 당시 "영국 적군"의 언어였던 영어를 배우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원래 관개 기술자가 되기를 열망했지만, 1936년~1939년 팔레스타인 아랍 반란이 악화되면서 1938년부터 군사 문제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다. 나중에 이스라엘 방위군의 장군이자 저명한 정치가가 된 젊은 하가나 하사 이갈 알론이 카두리에서 라빈과 다른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라빈은 1940년 8월 카두리를 졸업했다. 1939년의 일부 기간 동안 영국이 카두리 학교를 폐쇄하자, 라빈은 학교가 재개할 때까지 키부츠 기노사르에서 알론과 함께 경비원으로 일했다. 졸업 후 라빈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장학금을 받아 관개 공학을 공부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팔레스타인에 남아 싸우기로 결정했다.
2. 개인 생활
2.1. 결혼과 가족
라빈은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중에 레아 슐로스베르크와 결혼했다. 당시 레아 라빈은 팔마흐 신문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두 자녀, 달리아(1950년 3월 19일생)와 유발(1955년 6월 18일생)을 두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엘리트와 마찬가지로 라빈은 세속적-민족적 유대인 정체성을 따랐으며, 종교적이지 않았다. 미국 외교관 데니스 로스는 그를 "이스라엘에서 만난 가장 세속적인 유대인"이라고 묘사했다.
레아 라빈 여사는 1928년 당시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나중에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그녀의 가족은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직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라빈 부부는 독립 전쟁 기간 중 이스라엘 이주 개척자들의 주거지인 사로니 정착촌에서 1948년 8월 결혼식을 올렸다.
레아 라빈은 남편의 군사 경력과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충실한 지지자였다. 그의 암살 이후 그녀는 평화의 불씨를 이어받아 라빈 유산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달리아 라빈-펠로소프는 크네세트에서 활동한 변호사였으며, 1999년 중앙당 소속으로 크네세트에 당선되었다. 2001년에는 이스라엘 국방부 차관을 역임했다. 유발 라빈은 아버지의 암살 이후 평화 기구를 설립했으며, 현재 미국에서 이스라엘 기업들을 대표하고 있다.
3. 군 경력
라빈은 영국 육군의 일부인 하가나 및 유대인 여단과 같은 초기 유대인 방위 조직의 후계자인 이스라엘 방위군(IDF)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군인의 길을 걸었다. IDF는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 선언 이후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 영토 보전, 주권을 방어하고, 이스라엘 주민을 보호하며, 모든 형태의 테러리즘과 싸우는 것을 목표로 창설되었다. 이스라엘 국가 선언 이후 다비드 벤구리온의 첫 명령은 이스라엘 방위군의 창설이었다.
3.1. 팔마흐 활동

1941년, 키부츠 라마트 요하난에서 실습 훈련을 받던 중 라빈은 이갈 알론의 영향으로 새로 창설된 하가나의 전투 부문인 팔마흐에 입대했다. 라빈은 당시 기관총을 다루거나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오토바이를 탈 수 없었지만, 모셰 다얀은 새로운 신병을 받아들였다. 그가 처음 참여한 작전은 1941년 6월부터 7월까지 비시 프랑스군이 장악했던 레바논에 대한 연합군의 침공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다얀은 한쪽 눈을 잃기도 했다.
팔마흐 대원으로서 라빈과 그의 부하들은 영국 행정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숨어 지내야 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농업에 종사하면서 비밀리에 부분적인 훈련을 받았다. 이 시기 그들은 군복을 입지 않았고 대중적인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1943년, 라빈은 크파르 길라디에서 소대 지휘를 맡았고, 부하들에게 현대적인 전술과 전격 공격 수행 방법을 훈련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팔마흐와 영국 당국 간의 관계는 특히 유대인 이민자 처우 문제로 인해 긴장 상태에 놓였다. 1945년 10월, 라빈은 아틀리트 억류 캠프에 대한 팔마흐의 기습 공격을 계획했는데, 이 작전으로 수용되어 있던 208명의 유대인 불법 이민자들이 풀려났다. '블랙 샤바트' 작전 당시 영국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기관 지도부와 팔마흐에 대한 대규모 작전을 펼쳤는데, 라빈은 이 때 체포되어 5개월간 구금되었다. 석방된 후 그는 팔마흐 제2대대 사령관이 되었고, 1947년 10월에는 팔마흐 작전 참모총장으로 승진했다.
3.2. 이스라엘 방위군 복무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동안 라빈은 예루살렘에서의 이스라엘 작전을 지휘하고 네게브에서 이집트군과 싸웠다. 전쟁 초기에는 하렐 여단 사령관으로, 이스라엘 해안 평야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따라 싸웠으며, 이스라엘의 "버마 로드"와 라마트 라헬 키부츠 재탈환을 통해 도시의 남쪽을 확보하는 등 예루살렘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제1차 휴전 기간 동안 라빈은 알탈레나 사건 당시 텔아비브 해변에서 이르군에 맞선 IDF 병력을 지휘했다. 알탈레나호는 독립 전쟁을 위한 약 1,000명의 미국 마할 자원병과 다량의 무기 및 탄약을 싣고 있었다. 이는 이르군의 힐렐 쿡이 조직한 것이었다. 크파르 비트킨에서 많은 물품이 하역된 다음 날, 벤구리온의 명령에 따라 이 배는 텔아비브 해변에서 공격을 받아 불에 탔고, 나중에 바다로 끌려나가 침몰했다. 많은 자원병들이 배 안에서나 바다에 뛰어든 후 사망했다. 라빈은 해안포를 "성스러운 총"이라고 불렀다. "긴장과 유혈 사태에도 불구하고, 메나헴 베긴은 라디오에서 이르군 대원들에게 IDF와 싸우지 말 것을 촉구했다. '형제에게 손을 들지 마라, 오늘만큼은 안 된다. 히브리 무기를 히브리 전사들에게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내전의 가능성을 막았을 것이다.
이어진 시기에는 4개의 IDF 여단이 참여한 당시 최대 규모의 작전인 대니 작전의 부사령관을 맡았다. 이 작전의 일환으로 람라와 로드 시는 물론, 로드의 주요 공항이 점령되었다. 두 도시를 점령한 후 아랍인 주민들의 추방이 있었다. 라빈은 다음과 같은 추방 명령에 서명했다.
"...1. 리다 주민들은 연령에 관계없이 신속하게 추방되어야 한다. ...2. 즉시 시행하라."

이후 라빈은 남부 전선의 작전 참모총장으로 요압 작전과 호렙 작전 등 남부 전투를 종식시킨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1949년 초 그는 로도스섬에서 열린 이집트와의 휴전 협정 회담에 이스라엘 대표단으로 참여했다. 이 협상으로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의 공식적인 적대 행위가 종료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동원 해제되면서 그는 IDF에 남은 팔마흐 출신 인물 중 가장 고위직이었다.
많은 팔마흐 지도자들처럼 라빈은 정치적으로 좌파 친-소련 성향의 아흐두트 하아보다당과 나중에는 마팜당에 속해 있었다. 이들 장교들은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의 불신을 받았고, 장교들의 반란 이후 여러 차례의 대립 끝에 1953년 몇몇은 군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라빈, 하임 바르레브, 다비드 엘라자르와 같이 마팜에 남은 이들은 경력을 재개하기 전에 몇 년간 참모 또는 훈련 직책을 거쳐야 했다.
라빈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이스라엘 북부 사령부를 이끌었다. 1964년, 다비드 벤구리온의 뒤를 이어 총리와 국방부 장관이 된 레비 에슈콜에 의해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에슈콜은 군사 경험이 많지 않아 라빈의 판단을 신뢰했고, 그에게 매우 큰 자유를 주었다. 에슈콜의 군사 비서 회고록에 따르면, 에슈콜은 라빈을 "눈을 감고" 따랐다고 한다.
3.2.1. 제2차 중동 전쟁 (6일 전쟁)

1960년대 초반은 시리아와 이스라엘 북부 국경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들로 인해 중동의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충돌은 1967년 초에 증폭되어, 이스라엘 공군이 영공을 침범한 시리아 전투기 6대를 격추하는 사건도 포함되었다. 곧이어 소련은 아랍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이 시리아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감행할 계획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여, 다마스쿠스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1957년 협정을 위반하고 시나이 반도에 병력을 집결시키며 응답했다. 그는 유엔군을 추방하고 텔아비브를 점령할 것이라는 연설을 했다.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는 공동 방위 조약을 체결하여 이스라엘을 전면 공격의 위험에 홀로 놓이게 했다。라빈은 선제공격을 명령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정부는 특히 티란 해협의 항해 자유를 보장하려는 미국의 약속이 분명해지는 데 의존하기 전에 국제적인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결국 레비 에슈콜 총리가 국가 비상사태 동안 국가를 이끌기에 부적합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대중의 압력으로 인해 국방부 장관으로 모셰 다얀이 포함된 국가 단일 정부가 구성되었다. 이 정부는 라빈의 공격 권고를 받아들였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 거의 전부가 아랍 공군 기지에 대한 대규모 공습에 투입되었다. 기습적으로 공격받은 아랍 전투기 대부분은 아직 지상에 있는 동안 파괴되었다. 공중 우세가 확보되면서 이스라엘의 기갑 부대와 보병 연대는 시나이 반도 침공에서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집트군은 며칠 만에 붕괴하여 수에즈 운하로 후퇴했다.
이스라엘의 불개입 요청에도 불구하고 요르단군은 예루살렘 내부와 주변을 포격했다. 이틀 만에 이스라엘 방위군 낙하산병들은 동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옛 시가지에 있는 서부 통곡의 벽에 도달했다. 라빈은 점령된 옛 시가지를 방문한 첫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히브리 대학교의 스코푸스산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다.
곧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대부분이 침공되어 점령되었다. 이집트와 요르단이 퇴각하자 이스라엘 방위군은 골란 고원의 시리아군을 공격하여 북부 요르단강 계곡으로의 위협을 제거했다. 6일 만에 이스라엘은 세 개의 다른 전선에서 싸우면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세 개 군대를 물리쳤다. 이 승리는 세계 군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간주되며, 이스라엘 방위군 참모총장 라빈의 지휘 아래 달성되었다. 라빈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는 나중에 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6일 전쟁은 이스라엘 국가를 변혁시켰다. 아랍 국가들에 대한 논쟁할 수 없는 군사적 우위에 더해, 이스라엘의 영토는 크기가 3배로 늘어났다. 재통합된 예루살렘을 포함한 이스라엘 영토의 대부분은 이제 이스라엘의 통치 아래 들어왔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을 통치하게 되었다. 독립 전쟁으로 진정된 것으로 여겨졌던 국가 국경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군사적 승리는 이스라엘 정치 및 외교 생활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고, 이 지역의 지정학에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외교관 경력
4.1. 주미 이스라엘 대사

IDF에서 27년간 복무한 후 라빈은 1968년 군에서 퇴역했다. 그는 5년간 주미 이스라엘 대사로 임명되어 1973년까지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이스라엘의 주요 무기 공급자가 되었으며, 특히 라빈은 F-4 팬텀 전투기 금수 조치를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라빈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를 최대한 중요하게 여겼다. 냉전 경쟁이 절정에 달했고, 미국과의 강력한 관계는 아랍 국가들을 위한 소련의 지원에 균형을 맞추는 데 기여했다. 외교적 관점에서 워싱턴 D.C.는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가장 중요하고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주미 대사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아랍 국가들과 평화적 절차를 시작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도 병행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그는 공식적인 직책을 맡지 않았다.
5. 정치 경력
5.1. 노동부 장관
1973년 말 치러진 선거에서 라빈은 연합당 소속으로 크네세트에 선출되었다. 1974년 3월, 그는 단명했던 골다 메이어 총리 주도의 제16대 정부에서 이스라엘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메이어 총리는 군사 대비 부족에 대한 국민적 항의와 아그라나트 위원회의 보고서로 인해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라빈은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고, 이어서 총리직에 올랐다.
5.2. 총리 재임 1기 (1974년~1977년)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가 사임한 후, 라빈은 당 대표로 선출되어 시몬 페레스를 물리쳤다. 이 두 노동당 지도자 간의 경쟁은 치열하게 남아 있었고, 그들은 다음 20년 동안 여러 차례 당 대표직을 놓고 경쟁했으며, 심지어 정부 업적에 대한 공로를 누가 받을 자격이 있는지까지 다투었다. 라빈은 1974년 6월 3일 골다 메이어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었다. 이 정부는 라츠, 독립 자유당, 진보와 개발, 그리고 베두인과 농촌 거주 아랍인 목록을 포함하는 연립 정부였다. 이 협정은 미미한 의회 다수로 몇 달 동안 유지되었으며, 이스라엘 역사상 종교 정당이 연립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시기 중 하나였다. 국민종교당은 1974년 10월 30일에 연립에 참여했고 라츠는 11월 6일에 탈퇴했다.
외교 정책에서는 라빈 임기 초기에 주요 발전이 있었다. 1975년 9월 1일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시나이 중간 협정이 체결되었다. 양국은 자신들과 중동 지역의 분쟁이 군사력이 아닌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협정은 헨리 키신저의 셔틀 외교와 미국의 지역 정책 및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재평가" 위협에 뒤이어 이루어졌다. 라빈은 이를 "미국-이스라엘 관계에서 최악의 시기 중 하나를 예고하는 무해해 보이는 용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1978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체결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으로 향하는 중요한 단계였다.
엔테베 작전은 라빈의 첫 임기 중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IDF는 인민해방전선의 와디 하다드 파벌과 독일 혁명 세포 조직원들이 납치하여 이디 아민의 우간다로 끌고 간 여객기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해 장거리 비밀 특공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은 일반적으로 엄청난 성공으로 평가받았고, 그 극적인 성격 때문에 많은 논평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1976년 말, 그의 종교 정당들과의 연립 정부는 위기를 겪었다. 4대의 F-15 제트기가 미국에서 도착한 안식일에 이스라엘 공군 기지에서 안식일을 위반한 사건으로 아구닷 이스라엘이 불신임 동의를 제출했고, 국민종교당은 기권했다. 라빈은 정부를 해산하고 1977년 5월에 치러질 새로운 선거를 결정했다.
라빈은 1977년 2월 시몬 페레스를 간신히 누르고 당 대표로 재선되었다. 1977년 3월 라빈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회담 이후, 라빈은 미국이 이스라엘의 방어 가능한 국경 개념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으나, 카터는 이후 해명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에 "불화"가 발생했다. 이러한 불화가 1977년 5월 총선에서 이스라엘 노동당의 패배에 기여했다고 여겨진다.
1977년 3월 15일, 하레츠 기자 단 마르갈리트는 라빈이 이스라엘 주미 대사로 재직하던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워싱턴 D.C. 은행에 개설했던 이츠하크와 레아 라빈 명의의 공동 달러 계좌가 이스라엘 법을 위반한 채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폭로했다. 당시 이스라엘 통화 규정에 따르면 시민이 사전 승인 없이 외화 은행 계좌를 유지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마아리브 기자인 S. 아이작 메켈이 라빈 부부가 1만 달러가 들어 있는 계좌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임을 폭로하고, 재무부 행정 처벌 위원회가 그들에게 15.00 만 ILS의 벌금을 부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라빈은 1977년 4월 7일 사임했다. 라빈은 당 대표직과 총리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5.3. 야당 의원 및 국방부 장관 (1977년~1992년)
1977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한 후, 리쿠드당의 메나헴 베긴이 총리가 되었고, 노동당(당시 연합 동맹의 일부)은 야당이 되었다. 1984년까지 라빈은 크네세트 의원으로 외무국방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라빈은 1980년 이스라엘 노동당 당 대표 선거에서 시몬 페레스에게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1990년 당 대표 선거를 추진하려 했으나, 7월 22일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즉각적인 대표 경선을 실시하는 것에 54대 46%로 반대했다. 이로써 다음 크네세트 선거가 1992년 이전에 치러지지 않는 한, 최소한 다음 해까지는 당 대표 선거가 열리지 않게 되었다. 중앙위원회의 이 결정은 예상 밖의 결과로 여겨졌다. 1992년 당 대표 선거에서 라빈은 시몬 페레스를 누르고 노동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84년부터 1990년까지 라빈은 이츠하크 샤미르와 시몬 페레스 총리가 이끄는 여러 국가 통일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라빈이 취임했을 때 이스라엘 군은 여전히 레바논 깊숙이 주둔하고 있었다. 라빈은 국경의 레바논 측 "안전 지대"로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명령했다. 남레바논군은 이 지역에서 IDF와 함께 활동했다.
5.3.1. 제1차 인티파다와 '철권 통치'
제1차 인티파다가 발발하자 라빈은 폭력적인 폭동을 막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했고, 심지어 폭도들에게 "힘, 위력, 구타"를 사용할 것을 허용했다. 이로 인해 그는 국제적으로 비판적인 슬로건인 "뼈를 부수는 자"라는 멸시적인 용어로 불리기도 했다. '철권 통치' 정책의 실패, 이스라엘의 국제적 이미지 악화, 요르단의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의 법적 및 행정적 관계 단절, 그리고 미국의 PLO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자로 인정한 것이 라빈으로 하여금 PLO와의 협상과 대화를 통해 폭력을 종식시키도록 만들었다.
1988년 라빈은 튀니스에서 아부 지하드의 암살을 지시했으며, 2주 후에는 메이둔에서 히즈볼라의 거점을 파괴하는 법과 질서 작전을 직접 감독했다. 이 작전에서 IDF는 40~50명의 히즈볼라 전사를 사살했다고 주장했으며, 이스라엘 군인 3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당했다. 국방부 장관 라빈은 1989년 7월 27일 남부 레바논 지브치트에서 히즈볼라 지도자 압델 카림 오베이드와 그의 보좌관 2명을 납치하는 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히즈볼라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88년 2월 납치되었던 UNIFIL 소속 고위 미국 장교 윌리엄 R. 히긴스 대령을 처형했다고 발표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라빈은 다시 크네세트의 외무국방위원회에서 활동했다.
5.4. 총리 재임 2기 (1992년~1995년)


1992년 총선에서 라빈이 이끄는 노동당은 라빈의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현 총리 이츠하크 샤미르의 리쿠드당에 대해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크네세트의 좌파 블록은 소규모 민족주의 정당들이 선거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전체적으로 겨우 근소한 과반수를 얻는 데 그쳤다. 라빈은 좌파 정당인 메레츠와 미즈라히 초정통파 종교 정당인 샤스와의 연정을 통해 15년 만에 노동당 주도의 정부를 구성했다.
1993년 7월 25일,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북부에 로켓을 발사하자 라빈은 레바논에서의 일주일간의 군사 작전을 승인했다. 라빈은 팔레스타인 자치 기구를 설립하고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일부 지역에 대한 부분적인 통제권을 부여한 오슬로 협정 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협정 체결에 앞서 라빈은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로부터 폭력을 포기하고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서한을 받았으며, 같은 날인 1993년 9월 9일 라빈은 아라파트에게 PLO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틀 전, 라빈은 팔레스타인과 협상하는 주된 동기가 다음과 같다고 설명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우리보다 더 잘할 것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대법원에 항소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이스라엘 시민권 협회가 그 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 그곳의 상황을 비판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통치할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들이 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해방시켜 줄 것이다."
오슬로 협정 발표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협정에 반대하는 많은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시위가 계속되자 라빈은 크네세트에서 과반수를 유지하는 한 시위와 시위자들을 무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그들(시위자들)은 프로펠러처럼 빙빙 돌 수 있다"고 말했지만, 오슬로 협정의 길을 계속 갈 것이라고 말했다. 라빈의 의회 다수는 비연립 아랍 지지층에 의존했다. 라빈은 또한 미국 유대인들이 자신의 평화 계획에 반대할 권리를 부정하며, 그러한 반대를 "후츠파"라고 불렀다. 오슬로 협정은 하마스와 다른 팔레스타인 세력들도 반대했으며, 이들은 이스라엘에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야세르 아라파트와의 역사적인 악수 이후, 라빈은 이스라엘 국민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 팔레스타인인들과 싸웠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피와 눈물은 이제 충분합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이 임기 동안 라빈은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 체결도 감독했다.
5.4.1. 경제 및 사회 개혁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
라빈은 이스라엘의 경제와 교육 및 의료 시스템을 크게 개혁했다. 그의 정부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경제에서 벗어나 기업의 민영화를 크게 확대했다. 이 계획은 모셰 아렌스에 의해 "민영화 광풍"으로 묘사되었다. 1993년 그의 정부는 "요즈마 프로그램"을 설립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에 투자하는 외국 벤처 캐피탈 펀드에 매력적인 세금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정부 자금으로 모든 투자를 두 배로 늘려주기로 약속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결과, 외국 벤처 캐피탈 펀드는 성장하는 이스라엘 하이테크 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이는 이스라엘의 경제 성장과 하이테크 분야 세계 선두주자로서의 위상에 기여했다. 1995년에는 국가 건강보험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전통적으로 히스타드루트가 지배하던 건강보험 시스템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보편적 의료 제도를 만들었다. 의사들의 임금도 50% 인상되었다. 교육비는 70% 인상되었고, 이스라엘 주변 지역에 새로운 대학이 건설되었으며, 교사들의 임금은 20% 인상되었다。그의 정부는 또한 크로스-이스라엘 고속도로와 벤 구리온 국제공항 확장과 같은 새로운 공공 사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5.4.2. 평화 프로세스 주도
라빈 총리는 1992년 7월 13일 두 번째로 총리로 선출된 후,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함께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하면서, 라빈의 꺼려했던 PLO를 평화의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결국 협상을 위해서는 적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스라엘에게는 PLO 외에 다른 협상 파트너가 없었다. 라빈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내 팔레스타인 급진파, 근본주의자, 온건파 사이에서 평화의 성공적인 진전을 위해 뛰어남이 요구된다고 생각했다.


비록 라빈은 야세르 아라파트와 PLO의 신뢰성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PLO 대표들과 비밀 협상에 동의했다. 1993년 봄과 여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이 대화는 오슬로 협정의 기초가 되었다. 협정은 8월 20일에 완성되었고, 9월 13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서명식에서 아라파트가 PLO를 대표하여, 그리고 페레스가 이스라엘 국가를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입회 하에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과 러시아의 안드레이 코지레프 외무장관이 증인이 되었다.
5년간 영토 내 팔레스타인 자치 통치를 보장한 이 협정들은 라빈의 공적 경력에서 주요 성과 중 하나로 간주된다. 그러나 가자 지구, 여리고,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 이스라엘 정부의 점진적 철수에 대한 협정 때문에 평화 프로세스에 반대하는 급진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테러 공격을 시작했다. 라빈은 테러리스트의 침입이 없었다면 평화 프로세스를 계속 추진할 것을 맹세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테러리즘에 대한 자신의 오랜 거부를 반영하여 테러리즘에 맞서 전력을 다해 싸웠다.
가자 지구와 여리고에서의 협정, 즉 팔레스타인 자치권의 첫 단계를 이행하는 가자-여리고 협정은 1994년 5월 4일에 체결되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가자 지구 대부분에서 철수했지만,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유대인 정착촌을 계속 방어했다. 1995년 9월 28일 이스라엘과 PLO는 새로운 팔레스타인 통치 아래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지역들을 확장시킨 오슬로 B 협정에 서명했다.
유대인 반대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라빈의 확고한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추구는 요르단과의 평화 회담 착수를 위한 외교적 돌파구를 열었다. 라빈과 후세인 1세 국왕 간의 협상이 있은 지 몇 달 후인 1994년 10월 26일,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의 완전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두 달 후, 노벨 평화상이 라빈, 페레스, 아라파트에게 공동으로 수여되었다. 그 동안 라빈은 시리아와의 평화를 위한 철저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는 이스라엘 국민의 수용 여부에 따라 그 국가와 평화 협정을 위해 영토를 교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골란 고원으로부터의 어떤 철수 전에는 국민 투표를 승인했다.
그의 평화 정책이 이스라엘 국민 대다수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지만, 이는 PLO와의 영토 양보와 타협에 반대하는 많은 세력을 분노하게 했다. 이들 중에는 라빈이 양보하겠다고 약속한 지역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 골란 고원에 살던 많은 종교적이고 급진적인 우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로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소속의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그들의 일련의 폭탄 테러는 평화 프로세스를 실패로 간주하는 이스라엘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를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5.4.3. 노벨 평화상 수상

오슬로 협정 체결에 기여한 공로로 라빈은 1994년 노벨 평화상을 야세르 아라파트 및 시몬 페레스와 함께 수상했다. 라빈은 1995년 사망 직전 집회에서 "나는 항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고 이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었다"고 선언했다. 또한 1994년 노벨 평화상 수상 강연에서는 "세계 곳곳의 군인 묘지는 국가 지도자들이 인간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지 못했다는 침묵의 증거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과의 평화 조약을 일시적인 조치로만 여겼다.
라빈은 1994년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영부인 낸시 레이건으로부터 로널드 레이건 자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상은 "세계 자유의 대의에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기여를 한" 사람들에게만 수여되며, "한 개인 남성 또는 여성이 진정으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레이건 대통령의 평생 신념을 구현하는" 인물들에게 주어진다.
6. 암살
6.1. 암살 사건의 경위

1995년 11월 4일 토요일 저녁(히브리력으로는 헤슈반월 12일), 라빈 총리는 텔아비브의 이스라엘 왕 광장(현재 라빈 광장)에서 열린 오슬로 협정 지지 대규모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집회가 끝난 후 라빈이 시청 계단을 따라 자신의 차 문 쪽으로 걸어 내려갈 때, 오슬로 협정 서명에 반대하는 극우파 유대인 급진주의자인 법대생 이갈 아미르가 반자동 권총으로 라빈에게 세 발을 발사했다. 두 발은 라빈을 맞췄고, 세 번째 총알은 라빈의 경호원 중 한 명인 요람 루빈에게 경미한 부상을 입혔다. 라빈은 근처의 이칠로프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수술대 위에서 과다 출혈과 두 개의 폐 관통상으로 사망했다. 이갈 아미르는 즉시 라빈의 경호원과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나중에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아미르는 자신이 비극적인 운명에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믿었다.
긴급 내각 회의 후,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가 이스라엘 총리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
6.2. 암살 이후 반응과 장례식

라빈의 암살은 이스라엘 국민과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수십만 명의 이스라엘인들이 라빈이 암살된 광장에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특히 젊은이들이 대거 참석하여 추모 촛불을 밝히고 평화 노래를 불렀다. 1995년 11월 6일, 그는 헤르츨 언덕에 안장되었다. 라빈의 장례식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폴 키팅 호주 총리,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 등 많은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클린턴은 추도사 마지막에 히브리어로 "샬롬, 하베르"(שלום חבר샬롬 하베르히브리어, "안녕, 친구여")라고 외쳤다.
라빈의 장례식에서 후세인 1세 국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용기의 사람이었고, 비전의 사람이었으며, 어떤 사람이라도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덕 중 하나인 겸손을 지녔습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과 공감했고, 책임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그랬듯이, 그리고 해냈듯이, 가치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종종 자신을 상대방의 입장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명예롭고 오래 지속될 평화 말입니다. 그는 용기와 비전, 그리고 평화에 대한 헌신을 가졌으며, 저는 여기에 서서 여러분 앞에서, 요르단의 제 국민 앞에서, 그리고 전 세계 앞에서 맹세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나아가고, 우리 또한 비슷한 유산을 남길 수 있도록 저 자신을 다 바칠 것입니다. 제 때가 올 때, 저는 그것이 제 할아버지와 이츠하크 라빈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암살이 발생한 밤, 라빈은 무대에서 내려오기 직전 이스라엘 가수 미리 알로니와 함께 시르 라샬롬("평화의 노래")을 불렀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주머니에서 피 묻은 가사 종이가 발견되었다.
그가 암살당한 광장인 키카르 말케이 이스라엘(이스라엘 왕 광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라빈 광장으로 개명되었다. 이스라엘의 많은 다른 거리와 공공기관들도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암살 이후, 라빈은 국가적 상징으로 추앙받았으며, 그의 초기 군사 경력과 매파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평화 진영"의 정신을 구현하게 되었다. 2000년 11월, 그의 아내 레아가 사망하여 그와 함께 안장되었다.
암살 이후, 당시 유명한 극우파 급진주의자였던 아비샤이 라비브가 "샴페인"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신베트 요원이자 정보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라비브는 나중에 암살을 막지 못한 혐의로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라비브가 아미르가 라빈을 살해할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라빈 암살 이후, 그의 딸 달리아 라빈-펠로소프는 정치에 입문하여 1999년 중앙당 소속으로 크네세트에 당선되었다. 2001년에는 이스라엘 국방부 차관을 역임했다.
7. 유산과 평가
7.1. 긍정적 평가
라빈은 그의 군사 경력과 초기 매파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평화에 기여한 위대한 인물로 가장 많이 기억되고 있다. 그의 죽음 이후, 라빈은 특히 이스라엘 좌파에게 국가적 상징이 되었고 "이스라엘 평화 캠프"의 정신을 구현하게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본토에서 태어난 최초의 총리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군인에서 평화 운동가로의 전환은 그가 중동 평화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의 두 번째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경제 민영화, 요즈마 프로그램을 통한 하이테크 산업 육성, 보편적 건강보험 도입 등 사회 경제 분야의 개혁은 이스라엘의 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크로스-이스라엘 고속도로와 벤 구리온 국제공항 확장은 국가 인프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업적들은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중요한 부분이다.
7.2. 비판과 논란
라빈의 통치와 결정은 여러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1948년 독립 전쟁 중 로드와 람라에서 아랍인 주민들을 추방하는 명령에 서명한 것은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었다. 또한 제1차 인티파다 당시 국방부 장관으로서 취한 강경 진압 정책인 '철권 통치'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정책은 폭동을 억제하기 위해 "힘, 위력, 구타"를 허용하는 등 가혹한 조치들을 포함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뼈를 부수는 자"라는 비판적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오슬로 협정에 대한 반대파, 특히 극우파 유대인들은 라빈이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상을 통해 이스라엘 땅을 포기하고 유대인들을 테러의 위험에 노출시켰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오슬로 협정 이후 하마스의 자살 폭탄 테러 증가를 라빈의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협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대해 라빈이 "그들은 프로펠러처럼 빙빙 돌 수 있다"고 말하며 시위대를 무시한 태도도 비판받았다. 또한 미국 유대인들이 그의 평화 계획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 "후츠파"라고 일축한 발언은 해외 유대인 사회와의 관계를 해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첫 총리 임기 말에 발생한 금전 스캔들, 즉 아내 레아 라빈이 이스라엘 법을 위반하고 미국에 외화 계좌를 보유했던 사건은 그의 사임으로 이어졌고, 그의 청렴성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다.
8. 기념과 추모
크네세트는 히브리력으로 그의 암살일인 헤슈반월 12일을 라빈의 공식 추모일로 지정했다. 비공식적이지만 널리 지켜지는 그레고리력의 추모일은 11월 4일이다.
1995년 이스라엘 우정청은 라빈 추모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1996년 이스라엘 작곡가 나오미 셰머는 월트 휘트먼의 시 "오, 선장 나의 선장!"을 히브리어로 번역하고 곡을 붙여 라빈 암살 1주기를 기념했다. 이 노래는 이후 이츠하크 라빈 추모식에서 흔히 불리거나 연주된다.
1997년 크네세트의 법률에 의해 "이츠하크 라빈의 기억을 영속화하기 위한 기념 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이츠하크 라빈 센터가 설립되었다. 이 센터는 민주주의와 평화의 방식과 수단을 강조하는 광범위한 추모 및 교육 활동을 수행한다.
1998년에는 IDF 복무 전 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게 리더십을 훈련시키는 이스라엘 군 전 준비 프로그램인 메키낫 라빈이 설립되었다. 2005년 라빈은 특별하고 비폭력적인 인권 헌신을 인정하여 알렉산드라 힐데브란트가 제정한 라이너 힐데브란트 박사 인권상을 수상했다.
이스라엘의 많은 도시와 마을들은 거리, 동네, 학교, 다리, 공원 등을 라빈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이스라엘 최대 발전소인 오로트 라빈, 두 개의 정부 청사(텔아비브의 하키리야와 하이파의 세일 타워), 요르단과의 아라바 국경 통과 지점의 이스라엘 터미널, 그리고 두 개의 유대교 회당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스라엘 밖에서도 본, 베를린, 시카고, 마드리드, 마이애미, 뉴욕, 오데사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있으며, 몬트리올, 파리, 로마, 리마에는 공원이 있다. 오타와의 유대인 고등학교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이스라엘 학회는 이츠하크 라빈을 기리는 연례 학술 강연을 개최한다.
레게 가수 알파 블론디는 이스라엘 총리를 기리기 위해 '이츠하크 라빈'이라는 싱글을 녹음했다.
9. 저술 활동
라빈은 생전에 한 권의 자서전을 출판했다.
- 라빈 회고록(The Rabin Memoirs) (1996)
10. 같이 보기
- 이스라엘의 총리
- 이스라엘 방위군
- 중동 평화 프로세스
- 오슬로 협정
- 야세르 아라파트
- 시몬 페레스
- 노벨 평화상
- 이츠하크 라빈 암살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