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맬컴 퍼셀 매클레인(Malcom Purcell McLean, Malcom Purcell McLean영어, 1913년 11월 14일 ~ 2001년 5월 25일)은 현대 복합운송 컨테이너를 발명하여 20세기 후반 운송 및 국제 무역에 혁명을 일으킨 미국의 사업가이자 발명가이다. 그는 흔히 '컨테이너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컨테이너화는 개별 화물을 반복적으로 처리할 필요성을 없애 운송 비용을 크게 절감했으며, 신뢰성을 향상시키고 화물 도난을 줄이며 운송 시간을 단축하여 재고 비용을 절감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세계화의 주요 동력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매클레인은 노스캐롤라이나주 맥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원래 'Malcolm'으로 철자되었으나, 그는 후에 'Malcom'을 사용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1935년, 매클레인은 윈스턴-세일럼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가족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중고 트럭 한 대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을 마련했다. 대공황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따른 주 공공 사업 계약을 따내 토사 운반 사업을 시작했다. 이 시기 그는 동네 식료품점의 사입 담당자로 일했으며, 이후 레드 스프링스의 주유소 경영자가 되어 가솔린을 직접 운반하기도 했다. 뉴욕으로 야채를 운반할 때 다리 통행료를 내지 못해 렌치를 담보로 맡긴 후, 물건을 팔아 돌아오는 길에 렌치를 되찾았다는 일화도 있다.
2.2. 맥클레인 트럭킹 설립
1935년, 22세의 매클레인은 여동생 클라라와 남동생 짐과 함께 '맥클레인 트럭킹 컴퍼니(McLean Trucking Co.)'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 당시 트럭 2대와 트레일러 1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포함해 9명의 운전자가 일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레드 스프링스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처음에는 빈 담배 통을 운반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뉴저지주로의 드럼통 운송과 뉴잉글랜드로의 면사 대량 계약을 통해 빠르게 성장했다. 1940년에는 트럭 30대를 보유하고 연 매출 23.00 만 USD를 기록했으며, 1946년에는 연 매출 220.00 만 USD로 급성장했다.
1940년대 후반, 철도 화물 수요가 감소하고 도로 정비가 진행되면서 트럭 운송이 급부상했다. 매클레인은 사업 확장을 모색했지만, 당시 미국의 운수법은 신규 노선에 대한 인가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주간통상위원회(ICC)의 인가를 받기 어려웠다. 이에 매클레인은 인가를 받는 대신, 이미 원하는 노선의 인가를 받은 기업들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그는 10개 이상의 회사를 인수하여 1949년에는 보유 트럭이 600대를 넘어섰고, 미국 내 운송 회사 중 규모 8위, 이익률 3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는 창업 초기부터 철저한 비용 절감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가솔린 엔진이 주류였던 시대에 디젤 엔진 차량을 도입하고, 대량 할인 계약을 통해 지정 주유소에서 주유하며, 공기 저항을 줄이는 신기술을 적용한 트레일러를 사용했다. 또한, 보험료를 줄이기 위해 신입과 베테랑 운전자를 팀으로 구성하여 신입이 1년간 무사고일 경우 베테랑에게 1개월치 보너스를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해 사고율을 크게 낮췄다. 은행 대출에서도 비용을 고려하여, 제대 군인이 개인 사업자로 창업할 경우 정부가 저금리로 대출해주는 제도를 활용해 이들을 적극 채용함으로써 저금리 대출과 같은 효과를 얻었다. 1950년대에는 미국 최초로 프로그램 관리를 도입하기 위해 신입 사원들을 연수에 보내기도 했다.
육상 운송 회사로 성공했지만 매클레인은 만족하지 않았다. 모터리제이션의 발전으로 교통 체증이 심해지자 그는 골머리를 앓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과잉 공급된 전시 표준선을 거의 공짜로 얻을 수 있었던 연안 해운 기업들이 언젠가 육상 운송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1953년, 그는 "혼잡한 연안 지역을 주행할 바에는 트레일러째 배에 싣고 운반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그해 겨울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웠다. 이것이 운송업계 문외한이었던 매클레인이 해운 사업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컨테이너화 발명
컨테이너 운송은 현대 국제 운송 및 무역에 혁명을 일으켰다.
3.1. 컨테이너 운송 개념 발전
화물을 '상자'에 넣어 운송하는 아이디어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철도 회사들이 가구를 나무 상자에 넣어 운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트럭이 민간에 보급되면서, 신시내티의 운송 회사가 매클레인이 발명한 방식과 거의 동일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도 했다. 미국에서 최초로 컨테이너를 도입한 것은 1920년 뉴욕 센트럴 철도의 강철 컨테이너였다. 1926년에는 서던 철도 (영국)와 프렌치 노던 철도가 운행하는 런던-파리 간 호화 열차 '골든 애로우 (열차)'에서 승객 수하물 운송에 4개의 컨테이너가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소형 컨테이너는 선박에도 적재되었지만, 이는 부정기선의 벌크 화물과 혼재되는 방식이었다.
매클레인이 1953년에 처음 구상한 해상 운송 방안은 오늘날의 RO-RO선 방식이었다. 당시 법률은 육상 운송과 해상 운송을 완전히 별개로 취급했으며, 선박은 이동 속도가 느려 철도나 트럭보다 저렴한 운임 설정이 허용되었다. 매클레인은 교통 체증 회피뿐만 아니라 저렴한 비용에도 매력을 느꼈고, 이 제도를 통해 경쟁자보다 낮은 운임을 설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해 말 터미널 건설을 위한 부지 매입에 착수했다. 1950년대 연안 해운업은 불황으로 인해 침체되어 있었고, 정부 투자도 거의 없었다. 한때 목재 집산지로 번성했던 뉴어크 항은 활기를 잃었고, 뉴어크 항을 관할하는 뉴욕 뉴저지 항만공사는 항만 사업 활성화에 필사적이었다. 뉴욕 건너편의 뉴어크 항은 매클레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광대한 부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컨테이너 터미널 구상은 항만공사 국장과 부장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인으로서 최초로 지지를 표명했다. 항만공사는 세입 담보 채권을 발행할 권한이 있었기에, 항만공사가 건설을 하고 매클레인에게 임대하는 방식이 가능하여 매클레인이 직접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유리했다.
터미널 건설이 시작되자 매클레인은 해운 기업 인수를 추진했다. 당시 운수법은 육상 운송 기업이 해운 기업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했으므로, ICC의 인가를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해운 기업의 권리를 얻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검토 결과, 뉴욕을 포함한 16개 항구에 기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팬-아틀랜틱 컴퍼니'를 자회사로 둔 앨라배마주 모빌에 본사를 둔 '워터맨 해운'에 주목하여 4200.00 만 USD에 인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ICC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신회사 '매클레인 인더스트리즈'를 설립하고 CEO로 취임했다. 맥클레인 트럭킹 컴퍼니의 주식은 신탁으로 이전하는 형태로 사임하고 워터맨 해운 인수를 시작했으며, 이는 미국 최초의 레버리지드 바이아웃 사례가 되었다. 해운 기업의 권리를 얻으면서 컨테이너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맥클레인 트럭킹 컴퍼니의 모든 주식을 매각하여 막대한 매각 이익을 얻었지만, 자금 운용은 전혀 하지 않고 매클레인 인더스트리즈에 모든 자산을 쏟아부었다.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모든 자산을 해운에 쏟아붓지 않고 일부는 안전하게 운용할 생각은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매클레인은 단호하게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임하려면 퇴로를 차단해야 한다"고 답했다.
당초 계획했던 차량을 통째로 선박에 싣는 '트레일러선' 방식의 RO-RO선은 선박의 잠재적 화물 공간이 낭비되어 비효율적이었다. 이는 '수용 능력의 파괴(broken stowage)'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 초기 계획안에 미국 연방 정부가 관심을 보여 RO-RO선 7척 건조 자금으로 6300.00 만 USD의 정부 융자 보증을 받았지만, 매클레인이 다음 아이디어로 현재의 형태인 섀시(트레일러)가 아닌 컨테이너만 선박에 탑재하는 '컨테이너선' 또는 '박스선' 방식을 떠올리면서 정부 융자는 사용되지 않았다. 바퀴를 없앰으로써 부피가 3분의 1 줄어들고 쌓을 수 있게 되어 이 방식을 채택했으며, 맥주 운송 운임을 시산한 결과 이 컨테이너 방식이 기존의 환적 방식에 비해 약 94%의 절감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매클레인은 은행에서 2200.00 만 USD를 대출받아 1956년 1월,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T2 탱커 2척을 구입했다.
3.2. 이상적인-X호 항해와 씨랜드 서비스

1955년, 매클레인이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당시에는 대형 컨테이너를 제조하는 회사가 없었고 소형 컨테이너가 주류였다. 이에 그는 워싱턴주 스포캔에 위치한 산업 기계를 제조하던 '브라운 인더스트리즈'의 수석 엔지니어 키스 탠틀링거를 찾아 연락을 시도했다. 브라운 인더스트리즈는 1949년에 30피트(약 9 m) 알루미늄 컨테이너를 개발했지만, 견본시나 업계 회의에서 강연을 해도 "모두 관심을 보였지만, 사지는 않았다"고 탠틀링거는 회고했다. 매클레인은 탠틀링거에게 T2 탱커에 탑재할 수 있도록 "선박, 트럭, 철도에서 쉽게 환적할 수 있는" 33피트 컨테이너 개발을 의뢰했다. 이후 탠틀링거는 매클레인의 설득으로 팬-아틀랜틱 컴퍼니의 수석 엔지니어로 채용되었다.
다음으로 매클레인은 T2 탱커의 갑판 위아래에 컨테이너를 탑재할 수 있도록 개조 작업을 진행했다. '메카노 데킹(Mechano decking)'이라 불린 이 방식은 목제 데크(판)를 갑판에 배열하는 방법으로, 매클레인은 이 개조 계획도 직접 감독했다. 메카노 데킹은 항공기 등 대형 화물을 운송할 때 사용되던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선박 갑판 위아래에 컨테이너 탑재용 데크와 이를 지지하는 빔, 거더, 컨테이너를 넣는 프레임을 구축하고, 컨테이너가 탈착 가능한 트레일러 섀시 설계 및 재운항까지 수개월이 소요되었다.
다음 해결해야 할 문제는 '크레인'이었다. 당시 화물선에는 데릭이 기본 장착되어 있었지만, 무거운 컨테이너를 이 데릭으로 들어 올리면 균형을 잃고 전복될 위험이 있어 채택되지 않았다. 대신 부두에 평행하게 설치된 궤도 위를 이동할 수 있는 대형 크레인 안이 채택되었고, 매클레인은 조선소에 방치되어 있던 크레인을 찾아 구입하여 개조한 뒤 뉴어크 항과 휴스턴 항에 설치했다. 컨테이너를 들어 올리는 방식도 현재 사용되는 컨테이너 크기에 맞춘 틀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스프레더 방식'이 탠틀링거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로써 하역 작업자의 수작업이 불필요해졌다.
1956년 4월 26일, 100명의 초청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조된 탱커 '아이데알-X호'(매클레인의 고향 노스캐롤라이나주에 따라 'Maxton'이라고도 불림)가 뉴저지주 포트 뉴어크-엘리자베스 해양 터미널에서 35피트(약 11 m)의 '트레일러 밴(Trailer Vans)'이라 불린 컨테이너 58개와 일반 액체 탱크 화물을 싣고 휴스턴 항을 향해 출항했다. 아이데알-X호가 뉴어크 항을 떠날 때, 국제 항만 노동자 협회의 고위 관계자였던 프레디 필즈는 새로 개조된 컨테이너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받았고, 필즈는 "저 망할 놈의 배를 가라앉히고 싶다"고 답했다. 매클레인은 배가 안전하게 휴스턴에 정박하자마자 그곳으로 날아갔다.
1957년 4월, 최초의 컨테이너선인 '게이트웨이 시티호'가 뉴욕, 플로리다, 텍사스주 간 정기 운항을 시작했다. 1958년 여름, 여전히 팬-아틀랜틱 스팀십 코퍼레이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매클레인 인더스트리즈는 '페어랜드호'로 미국 본토와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간 컨테이너 서비스를 개시했다. 1960년 4월, 회사 이름은 공식적으로 팬-아틀랜틱 스팀십 코퍼레이션에서 '씨랜드 서비스'로 변경되었다. 매클레인의 사업은 1961년까지 흑자 전환에 성공했으며, 그는 계속해서 노선을 추가하고 더 큰 선박을 구매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군수물자 보급의 혼란을 컨테이너 시스템을 통해 개선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1967년, 씨랜드는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남베트남으로의 컨테이너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이 서비스는 1968년과 1969년 회사 수익의 40%를 차지했다. 1968년 말에는 극동에서 미국으로의 상업용 컨테이너선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이 서비스는 1969년 홍콩과 타이완, 1971년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으로 확대되었다.
3.3. 비용 절감 및 효율성 증대
1956년 당시 대부분의 화물은 항만 노동자의 수작업으로 선적 및 하역되었다. 수작업으로 선박에 화물을 싣는 데는 톤당 5.86 USD가 들었다. 그러나 컨테이너를 사용하면 선박에 싣는 데 톤당 겨우 0.16 USD가 들어, 36배의 비용 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컨테이너화는 또한 선박의 선적 및 하역 시간을 크게 단축시켰다. 매클레인은 "배는 바다에 있을 때만 돈을 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러한 효율성을 바탕으로 사업을 운영했다. 컨테이너화는 화물 도난을 줄이고 운송 시간을 단축하여 재고 비용을 절감하는 데도 기여했다. 이는 전 세계적인 물류 시스템을 혁신하고 세계화를 가속화하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4. 사업 확장 및 기업 역사
매클레인의 사업은 컨테이너화의 성공과 함께 급격히 확장되었다.
4.1. 국제 노선 확장
1963년 8월, 매클레인은 더 많은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기 위해 포트 뉴어크-엘리자베스 해양 터미널에 101 acre(약 0.41 km2) 규모의 새로운 항만 시설을 개장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까지 컨테이너 시장의 발전은 더뎠다. 많은 항구에는 컨테이너를 선박에 싣고 내릴 크레인이 없었고, 전통에 젖어 있던 산업에서는 변화가 느렸다. 게다가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아이디어에 저항했다.
1966년 4월, 씨랜드는 뉴욕과 네덜란드 로테르담, 독일 브레멘, 스코틀랜드 그레인지마우스 간 서비스를 시작했다. 1960년대 말까지 씨랜드 인더스트리즈는 프루하우프 트레일러 코퍼레이션이 제조한 27,000개의 트레일러형 컨테이너와 36척의 트레일러 선박, 그리고 30개 이상의 항만 도시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했다.
매클레인의 컨테이너 시스템의 이점이 명백해지자 경쟁사들도 빠르게 적응했다. 그들은 더 큰 선박, 더 큰 갠트리 크레인, 더 정교한 컨테이너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1965년 뉴욕 항의 연간 처리량은 195.00 만 t이었으나, 이듬해 첫 두 달 만에 260.00 만 t를 기록하며 처리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같은 시기 국제 운항을 하던 회사는 3개에 불과했지만, 이듬해에는 60개 회사가 진출했다. 씨랜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현금이 필요했다.
4.2. R.J. 레이놀즈 매각 및 이후 사업
매클레인은 자신의 트럭 회사가 R.J. 레이놀즈 담배 회사의 담배를 미국 전역으로 운송하던 시절부터 이 회사를 알고 있었다. 1969년 1월, 레이놀즈는 씨랜드를 현금과 주식 5.30 억 USD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매클레인은 개인적으로 1.60 억 USD를 벌었으며, 회사 이사회에 합류했다. 인수를 위해 레이놀즈는 지주 회사인 R.J. 레이놀즈 인더스트리즈(RJR)를 설립하고 1969년 5월 씨랜드를 인수했다. 같은 해, 씨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컨테이너선인 SL-7급 선박 5척을 주문했다.
레이놀즈 산하에서 씨랜드의 이익은 불규칙했다. 1974년 말까지 레이놀즈는 씨랜드에 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여 뉴저지주와 홍콩에 거대한 터미널을 건설하고 컨테이너선단을 증강했다. 씨랜드의 가장 큰 지출은 연료비였기 때문에, 1970년 RJR은 '아미노일(Aminoil)'로 알려진 아메리칸 인디펜던트 오일 컴퍼니를 5600.00 만 USD에 인수했다. RJR은 수백만 달러를 석유 탐사에 투자하여 아미노일을 세계 탐사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규모로 키우려 했다.
1974년, RJR은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씨랜드의 수익은 거의 10배 증가하여 1.45 억 USD에 달했고, 아미노일의 수익은 8630.00 만 USD로 급증했다. 금융 평가 기관인 던 앤 브래드스트리트는 RJR을 미국에서 가장 잘 관리되는 5개 기업 중 하나로 선정했다. 그러나 1975년, 씨랜드의 수익은 아미노일과 함께 급격히 감소했다. 매클레인은 레이놀즈 이사회는 관료적이었다며 1977년 레이놀즈와의 관계를 끊고 이사직을 사임했다. 그는 "나는 기업가였고 그들은 경영자였다"고 말했다.
1984년 6월, RJR은 씨랜드 코퍼레이션을 뉴욕 증권 거래소에 상장된 독립적인 공개 회사로 분사시켰다. 이 해 씨랜드는 28년 역사상 가장 높은 매출과 수익을 달성했다。1986년 9월, 씨랜드 코퍼레이션은 CSX 코퍼레이션의 자회사인 CSA 인수 법인과 합병되었다. 씨랜드 코퍼레이션 보통주는 주당 28 USD의 현금으로 교환되었다.
씨랜드의 국제 서비스는 1999년 A.P. 몰러-머스크 그룹에 매각되었고, 합병된 회사는 머스크 라인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전 씨랜드의 국내 서비스는 2015년까지 호라이즌 라인즈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 하와이, 푸에르토리코, 괌 간의 총 미국 해상 컨테이너 운송량의 약 36%를 차지했다. 이 회사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 본사를 두었으며, 2015년 매트슨 내비게이션 컴퍼니에 인수되었다.

컨테이너의 등장은 항만 지형을 쉽게 바꿔놓았다. 대형 자본의 유입으로 선박은 해마다 대형화되었고, 대량 운송으로 인해 운송 비용은 고려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낮아졌다. 이후 공급 과잉이 된 해운업계는 가격 경쟁에 돌입하여 체력을 잃고 매각이나 인수합병 등의 업계 재편이 일어났다. 오일 쇼크로 인한 무역 침체와 분쟁으로 인한 원유 가격 상승은 유류할증료 제도가 생겼음에도 운임에 쉽게 전가할 수 없었고, 씨랜드가 소유한 SL7과 같은 연료 효율이 낮은 선박은 채산성이 악화되어 매각되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 전 세계적인 제조 공장의 해외 이전과 함께 중국, 말레이시아, 태국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대형 컨테이너 항구를 건설했다. 오늘날 컨테이너 전체 물동량의 4분의 1이 중국에서 출하된 것이다. 2010년에는 컨테이너 처리량에서 싱가포르를 제치고 상하이 항이 1위를 차지했다.
4.3. 재정적 어려움과 파산
1978년, 매클레인은 해운 회사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라인즈(USL)를 인수했다. 그는 당시 가장 큰 규모였던 4,400 TEU급 컨테이너선단을 구축했다. 이 선박들은 전 세계 해역을 운항했으며, 1970년대 석유 부족 사태 이후 설계되어 연료 효율은 좋았지만 속도가 느렸다. 따라서 이후 유가가 저렴해진 시대에 경쟁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USL은 1986년에 파산했다. 이 파산으로 인해 매클레인은 관련 기업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82년, 매클레인은 순자산 4.00 억 USD로 포브스 '억만장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몇 년 후 유가 상승에 대한 그의 예측이 실현되지 않으면서 13.00 억 USD의 부채를 안고 미국 연방 파산법 제11장에 따른 파산 신청을 해야 했다.
매클레인은 또한 1968년 미시시피주 웨이벌랜드 (현 다이아몬드헤드, 미시시피)에서 진행된 미국 남부 최대의 리조트형 커뮤니티 개발 프로젝트에 투자했다. 1971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 리조트 부동산을 매클레인 소유의 토지 개발 회사인 '다이아몬드헤드 코퍼레이션'에 매각했다.
1991년, 78세의 나이에 매클레인은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미국 본토와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공화국 간 운송을 담당하는 육해운 회사 '트레일러 브리지(Trailer Bridge Inc.)'를 설립했다. 이 외에도 매클레인은 환자를 들것에서 병원 침대로 옮기는 기술 등 해상 운송 이외의 발명도 했다.
5. 컨테이너 표준화 및 산업 영향
컨테이너 규격 표준화는 산업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5.1. 컨테이너 규격 제정 과정
1950년대 후반, 컨테이너는 운송 관계자들의 화두가 되었지만, 1959년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컨테이너는 8피트(약 2.4 m) 이하였고, 8피트 이상은 씨랜드와 매트슨 두 회사만이 사용하고 있었다. 각 회사가 사용하기 편리한 크기로 컨테이너를 제조했기 때문에 호환성이 없었고, 이는 선박뿐만 아니라 트럭, 철도, 하역 장비, 심지어 화주에게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유사시 물류에 큰 지장을 줄 것이 우려되었다. 이에 1958년, 이러한 무질서한 컨테이너 개발을 종식시키기 위해 미국 해군의 지원을 받은 연방 해사국이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해 2월 전문가 회의가 열렸지만, 컨테이너 제조 보조금을 받지 않던 씨랜드와 매트슨은 참석하지 못했다. 회의는 난항을 겪었고, 유일한 절대 규격을 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여러 크기를 용인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폭'은 표준궤를 기준으로 '8피트'여야 하고, 네 모서리에 스프레더를 부착할 수 있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점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당시 유럽은 7피트(약 2.1 m)까지만 대응 가능했지만, 언젠가 미국의 기준이 채택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높이'는 '8피트'가 많았지만, 육상 운송 업계에서 지게차가 진입할 수 있는 '8피트 6인치(약 2.6 m)' 안이 제시되었고, 최종적으로 이 높이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되었다. '길이'에 대해서는 긴 컨테이너에 짧은 컨테이너를 실을 경우 4점에서 지지할 수 없어 구조상 하중을 견딜 수 없다는 이유로 향후 검토 과제로 미뤄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최대 중량'은 컨테이너, 선박, 트럭, 철도, 하역 장비를 제조하는 기준이 되므로 조사가 필요하다고 하여 보류되었다.
규격 통일은 이미 컨테이너를 제조하던 대기업 두 곳과 정부에게는 기존 투자와 보조금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짧은 컨테이너는 하역 비용이 두 배가 되어 대기업들은 기피했고, 푸에르토리코 항로를 운항하던 불 해운은 변칙 컨테이너도 있어 다른 회사와 연결되지 않으므로 독자 규격 인가를 요청하는 등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1961년 4월 14일 투표가 진행되었고, 해운업자들은 기권했지만, 찬성 다수로 길이가 결정되어 '10, 20, 30, 40피트'의 4가지 종류가 되었다. 여기서 기존에 없던 '30피트'가 새로 추가되었다. 40피트는 유럽의 도로 사정상 운반할 수 없어 유럽의 우려를 반영한 형태였다. 미국 정부는 이 크기를 제조할 경우에만 보조금을 인정하겠다고 즉시 발표했다.
1961년 9월, 뉴욕에서 국제 표준화 기구(ISO) 가맹 11개국 대표와 옵저버 15개국 대표가 모여 표준화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미국에서 3년간 논쟁이 반복되었다. 유럽은 역사적으로 소형 컨테이너가 주류였기 때문에 10피트 이하의 컨테이너도 인정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미국, 영국, 일본이 이 안에 반대했다. 최종적으로 '5피트'와 '6피트 8인치'를 '시리즈 2'로 추가하는 타협안이 채택되었다. 1964년, 폭 8피트, 높이 8피트, 길이 10, 20, 30, 40피트, 그리고 시리즈 2로 5, 6.8피트가 ISO 규격으로 결정되었다.
스프레더와 트위스트록 메커니즘은 씨랜드의 특허 기술이었기 때문에 각 회사는 씨랜드에 사용료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매클레인은 프루하우프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탠틀링거의 조언과 정부 기관의 요청에 따라 특허권을 포기하여 ISO 규격으로 채택되도록 했다. 그러나 이후 강도 부족 등 여러 결함이 발견되었다. ISO에서 승인한 금속 부품이 결함품으로 판명되자, 급히 엔지니어들이 소집되어 문제 해결에 나섰고, 금속 부품의 두께를 늘리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계자들은 안도했다。
세계 통일 규격이 제정되었지만, 30피트 컨테이너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10피트 컨테이너도 소수만이 사용되어 주문이 거의 없었다. 20피트 컨테이너는 만재된 20피트 컨테이너 2개를 트레일러에 실으면 과적재가 되기 때문에 트럭 업계에서 기피되었다. 이에 씨랜드와 매트슨 두 회사는 미국 국가 표준 협회(ASA) 작업반에 만재된 40피트 컨테이너는 트럭으로 과적재가 되므로 35피트 컨테이너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ASA는 높이 8.6피트를 새로 인정했지만, 35피트 컨테이너는 기각되었다.
5.2. 글로벌 무역 및 물류 혁신
컨테이너화는 세계 무역, 물류 시스템, 그리고 세계화에 근본적인 변화와 영향을 미쳤다. 컨테이너화는 화물 운송 비용을 크게 절감하고, 신뢰성을 향상시키며, 화물 도난을 줄이고, 운송 시간을 단축하여 재고 비용을 절감하는 데 기여했다. 운송 비용이 크게 낮아지면서 제조 공장의 위치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이는 전 세계적인 물류 네트워크 발전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매클레인의 사업이 혁명이라기보다는 기존 개념의 응용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운송에서 하역 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는 1950년대 초부터 인식되었고, 컨테이너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초기에 개발된 컨테이너는 소형이 대부분이었고, 경제 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컨테이너를 사용하여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출하 시점에 컨테이너를 가득 채워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한 번도 개봉되지 않고 운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클레인의 뛰어난 점은 해운업이 단순히 선박을 운항하는 산업이 아니라 화물을 운송하는 산업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철저한 비용 의식과 항만, 선박, 크레인, 창고, 트럭, 철도를 아우르는 복합 일관 운송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데 있다.
5.3. 베트남 전쟁 물류 개선 기여
1965년 겨울, 미국 정부는 베트남으로의 긴급 증파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 보급 물자 혼란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은 남북으로 길고, 단 하나의 철도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도로는 포장조차 되어 있지 않고 단절되어 있었다.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수심 깊은 항구는 사이공 항 한 곳뿐이어서, 한 척이 접안하면 다른 대형 선박들은 먼바다에 정박한 채 바지선으로 화물을 옮기는 인력 위주의 전술을 사용했다. 다낭 등 다른 항구들도 수심이 얕아 마찬가지였다. 위탁받은 민간 기업들이 물자 보급을 지원했으며, 23,300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하역 작업에 종사했지만 이미 역부족이었고, 12시간 교대 근무와 휴일 반납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미군은 16가지의 보급 방식을 운영하고 있었고, 현장에서는 창고와 트럭을 서로 차지하려는 혼란이 발생했다. 도착 화물을 관리하는 시스템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이러한 이유로 접안한 대형 선박의 하역은 지연되어 이안하지 못했으며, 총괄하는 해군 군사해상수송사령부(MSTS)는 사무실조차 없는 상태였다.
부두는 바지선으로 넘쳐났고, 선박 한 척을 비우는 데 10일에서 30일 정도가 걸렸으며, 여름에는 태풍이 발생하여 작업이 자주 중단되었다. 대부분의 하역 화물은 야외에 방치되었고, 남베트남군에 의한 조직적인 절도 행위도 만연하여 트럭으로 화물을 이동할 때는 무장한 헌병이 경호해야 했다. 말기에는 하역을 포기하고 선박을 창고 대용으로 정박시키는 바람에 물자 수송을 위한 선박이 부족한 상황에 처했다. 미국 육군은 전황이 급박하다는 이유로 병참에 관여하지 않았고, 미국 공군은 모른 척했다.
합동참모본부가 '푸시(Push)' 방식의 보급 방법을 채택한 것이 악화 요인 중 하나였다. 전선의 요청에 따라 물자를 보내는 방법이 '풀(Pull)'이고, 병력 규모에 따라 필요한 양을 미리 정해 정기적으로 보내는 방식이 '푸시'인데, 초기 단계에서 전선에 빠르게 공급하는 방식으로는 최적이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에는 맞지 않았다. 이로 인해 불필요한 물자가 넘쳐나고 필요한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후 물자 보급 센터를 구축하기 위해 다낭 항을 확장하고 신항을 건설하는 안이 미국 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에 의해 승인되었지만, 전기, 가스, 수도 등 인프라가 전혀 없는 곳이었고, 연약 지반이라 대형 산업 기계를 설치하기에 부적합했기 때문에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선박들은 필리핀에서 대기하는 상황이 되었고, 물자가 넘쳐나는 무질서한 상황이 라이프 (잡지)에 의해 특집 기사로 다뤄지면서 의원들이 시찰하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근본적인 개선 계획이 시작되었다.
"물자 수송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맥나마라를 설득한 민간 기업인 '알래스카 바지사'에 MSTS가 수송을 의뢰하면서 개선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이에 맥나마라는 해운업의 선두 주자인 매클레인을 워싱턴 D.C.로 초청하여 현황 설명을 들었다. 이후 매클레인은 여러 차례 컨테이너를 이용한 수송안을 워싱턴에서 설파했지만, 모두 '필요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분개한 매클레인은 해군 대장 프랭크 베슨에게 직접 호소하는 데 성공했다. 엔지니어 2명과 함께 베트남을 시찰한 매클레인은 컨테이너를 사용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판단하고, 이 결과를 정부에 건의했다. 정부는 군에 민간 기업의 노하우를 도입하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군은 막 시작된 컨테이너화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 당황했고, 상황은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씨랜드의 자회사인 '이큅먼트 렌탈'이 사이공에서 트럭 운송 사업을 수주했다. 컨테이너와는 전혀 관계없었지만, 이곳에서의 사업을 발판 삼아 MSTS에 오클랜드-오키나와 간 운송 계약을 씨랜드와 체결할 것을 건의했다. 그 결과 씨랜드와의 계약이 체결되어 컨테이너를 이용한 운송이 시작되었다. 12일마다 도착하는 476개의 35피트 컨테이너를 씨랜드가 가볍게 처리하자 MSTS는 감탄했고, 베트남과 미국 본토 간 운송 의뢰를 간청했다. 이 사업에 여러 회사가 나섰지만, 최종적으로 씨랜드가 지명되었다.
미국 본토에서 컨테이너 운송이 시작되었지만, 베트남에는 크레인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필리핀 수빅만까지의 운송으로 제한되었다. MSTS는 오키나와에서 씨랜드의 뛰어난 수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의 하역을 총괄하는 제1병참사령부에 크레인을 도입하라고 강하게 지시했지만, 제1병참사령부는 컨테이너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실제로는 크레인 설치 계획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하역 혼란은 한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1966년 중반에 다시 화물량이 전년보다 55%나 증가하면서 재발했다. 맥나마라의 지시로 긴급 공사가 시작되면서 캄란만은 컨테이너 항구로 탈바꿈했다. 이로써 대형 컨테이너선 오클랜드호가 접안할 수 있게 되었고, 한 번에 기존 10척 분량의 화물 하역이 시작되었다. 항만 작업 및 운송 등 컨테이너와 관련된 모든 사업을 씨랜드가 수주하면서 하역이 정돈되었을 뿐만 아니라, 파손 및 도난도 크게 줄고 운송 비용까지 절감되자 군은 경악하며 1967년 군 기록에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고 자랑스럽게 기술했다. 미군은 이후 조사에서 컨테이너화가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니라 물류 시스템이라고 결론 내렸고, 군이 개발한 '코넥스 박스'는 폐지되고 민간용 20피트 컨테이너를 사용한 병참 시스템 구축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으로의 운송은 1968년과 1969년 씨랜드 수익의 40%를 차지했다.
국방부와의 계약으로 대형 선박 3척과 소형 선박 3척을 이용한 베트남 운항을 맡았는데, 갈 때는 군수 물자로 가득 찼지만, 돌아올 때는 빈 컨테이너가 대부분이었다. 왕복 운임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돌아오는 화물은 모두 이익이 되므로 어떤 대책이 없을까 고민하던 매클레인은 한 나라를 떠올렸다. 바로 일본이었다. 1960년대 일본은 고도 경제 성장기였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미국과의 무역액은 2위를 차지했다. 1968년 9월, 씨랜드는 요코하마와 미국 서해안 간 정기 항로를 개설했고, 컨테이너에는 일본에서 제조된 가전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일본은 수출 호황을 맞았다. 또한, 이 서비스는 1969년 홍콩과 타이완으로, 1971년에는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으로 확대되었다. 컨테이너 처리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아시아 각지에서도 앞다퉈 항만 건설이 시작되었고, 이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곳이 싱가포르였다. 아낌없는 확장과 작업 내용 재검토를 통한 하역 팀 인원 감축 등 효율성을 추구한 결과, 2005년에는 세계 1위의 컨테이너 처리량을 기록하며 싱가포르의 싱가포르 항 '이스트 라군 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허브 항으로 자리매김했다.
6. 개인적인 삶
매클레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공개된 정보는 많지 않다. 그는 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와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쳤다.
7. 사망
매클레인은 2001년 5월 25일, 87세의 나이로 뉴욕 시 이스트사이드 자택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노먼 미네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맬컴은 20세기 해운 산업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3,000년 전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하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선박의 선적 및 하역 작업을 현대화하려는 그의 아이디어는 훨씬 더 안전하고 저렴한 상품 운송, 더 빠른 배송, 그리고 더 나은 서비스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컨테이너화의 아버지' 맬컴 P. 매클레인이라는 비전 있는 인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가 사망한 직후, 볼티모어 선은 사설에서 "그는 로버트 풀턴 다음으로 해상 무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가로 평가된다"고 언급했다. 포브스 (잡지)는 매클레인을 "세계를 바꾼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라고 불렀다. 매클레인 장례식 날 아침,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전 세계의 컨테이너선들이 동시에 기적을 울리며 추모했다.
8. 유산 및 평가
매클레인의 업적과 활동은 현대 물류 및 세계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8.1. 수상 및 기념
매클레인은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여러 상과 기념의 대상이 되었다.
- 1982년: 포춘 (잡지) '비즈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같은 해 주니어 어치브먼트 '미국 비즈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1995년: 아메리칸 헤리티지 (잡지)는 그를 지난 40년간의 10대 뛰어난 혁신가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 2000년: 국제 해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세기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또한 미국 상선사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 2006년: 노스캐롤라이나주 교통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매클레인은 뉴욕 증권 거래소에 상장된 3개 회사(및 나스닥에 상장된 2개 회사)를 설립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1991년에 설립한 트레일러 브리지 사는 매년 '맬컴 P. 매클레인 혁신 정신상'을 수여한다. 또한 조지 메이슨 대학교에서는 교수진이 선정한 우수 졸업생에게 매년 '매클레인 상'을 수여한다.
8.2. 비판 및 논란
매클레인의 사업 운영 중 겪었던 재정적 어려움과 파산 신청 등 비판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1986년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라인즈(USL)의 파산 이후, 그는 자신에게 쏟아진 비판과 USL에 의존하던 많은 일자리 손실에 대해 매우 개인적으로 받아들였다. 1982년에는 순자산 4.00 억 USD로 포브스 '억만장자 명단'에 올랐지만, 몇 년 후 유가 상승에 대한 예측이 빗나가면서 13.00 억 USD의 부채를 안고 미국 연방 파산법 제11장에 따른 파산 신청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