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나프탈리 베네트는 1972년 3월 25일 이스라엘 하이파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스라엘로 알리야한 미국계 유대인 이민자 짐 베네트와 미르나 베네트 부부의 세 아들 중 막내이다. 그의 부모는 원래 비정통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으며 1960년대에는 진보적인 활동가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1964년 반인종주의 연좌농성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이후 그들은 현대 정통 유대교 신자가 되었고 우익 정치를 지지하게 되었다.
베네트의 조상들은 폴란드, 독일, 네덜란드 출신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다. 그의 증조부 율리우스 살로몬손은 폴란드 워브제니차 출신으로 1851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시기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의 외조부모는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나중에 이스라엘로 건너와 하이파의 아후자 지역에 정착하여 베네트 가족과 가까이 살았다. 그의 어머니 가족 중 폴란드에 남아있던 일부는 홀로코스트로 인해 살해되었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하자 1세였던 베네트는 어머니의 권유로 잠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으나, 포병 부대 소속으로 골란 고원 전선에서 복무하던 아버지가 전쟁 후 수개월간 예비군으로 복무하며 가족의 귀환을 요청하자 모두 이스라엘로 돌아와 영구 정착했다.
1976년 베네트가 4세 때 가족은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몬트리올로 2년간 이주했다. 하이파로 돌아온 후 카르멜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2학년 때 다시 아버지의 직장으로 인해 뉴저지주 티넥에서 2년간 거주하며 야브네 아카데미에 다녔다. 베네트는 10세 때 하이파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두 명의 형제가 있다. 형 애셔는 전 이스라엘 해군 잠수함 장교이자 영국에서 활동하는 사업가이며, 동생 다니엘은 짐 통합 해운 서비스의 회계사로 일하고 있다. 베네트는 하이파의 야브네 예시바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종교적 시온주의 청소년 운동인 브네이 아키바에서 지도자("마드리흐")로 활동했다.
1.1. 교육
베네트는 하이파의 야브네 예시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군 복무 후에는 히브리 대학교에서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2. 군 복무
베네트는 1990년 이스라엘 방위군에 징집되었다. 그는 엘리트 특수부대인 사예레트 마트칼에서 복무했으며, 정규 복무를 마친 후 장교 훈련에 선발되었다. 그는 사예레트 마트칼에 일반 병사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마글란 특수부대로 전출하여 지휘관 직책을 맡을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얻었고, 마글란으로 전출을 선택하여 중대장으로 복무했다.
그는 6년간의 현역 복무를 마치고 전역했으나, 예비군으로 계속 복무하며 소령 계급에 도달했다. 미국에 거주하며 소프트웨어 기업가로 활동할 때도 그는 예비군 복무를 위해 이스라엘을 반복적으로 방문했다. 베네트는 제1차 인티파다 기간과 1982년부터 2000년까지의 남레바논 분쟁 중 레바논의 이스라엘 안보 지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여러 작전을 지휘했으며, 특히 분노의 포도 작전에서 장교로 활동했다. 제2차 인티파다 기간에는 방어막 작전에 참여했다. 2006년 제2차 레바논 전쟁 중에는 마글란 특수부대 예비군으로 소집되어 적진 후방에서 헤즈볼라 로켓 발사기를 상대로 수색 및 파괴 임무에 참여했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직후 베네트는 이스라엘 방위군 기술 및 병참 사령부의 비상 저장 부대에 예비군으로 자원입대했다.
베네트가 특수부대 장교로서 수행한 한 가지 행동은 큰 논란이 되었다. 분노의 포도 작전 중 레바논 남부에서 67명의 마글란 병력을 이끌던 베네트의 부대가 박격포 공격을 받자, 그는 무전을 통해 지원을 요청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그의 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포격을 개시했으며, 이 포격은 민간인들이 대피하고 있던 유엔 시설을 강타하여 카나 학살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총 106명의 레바논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국제 사회의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외교적 압력으로 이스라엘은 계획보다 일찍 분노의 포도 작전을 종료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전국 타블로이드 신문 『예디오트 아흐로노트』의 언론인 이갈 사르나는 베네트가 작전 중 "판단력이 부족했다"고 주장했다. 사르나는 "베네트는 67명의 전투 병력을 이끌고 레바논으로 진격했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명령을 무시하고 작전 계획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그가 겁쟁이이고 충분히 확고하지 않다고 생각한 상관들과 조율되지 않은 행동이었다. 카나 마을 근처에서 베네트의 부대는 매복에 걸렸다"고 썼다.
언론인 라비브 드루커는 "고위 군 관계자"를 인용하여, 베네트가 부대 공격을 받은 후 지원을 요청한 무전이 "히스테리적"이었으며 인명 손실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베네트는 "나는 이제 '카나 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영웅주의는 조사되지 않을 것이다. 기록 보관소에서 계속 찾아라. 내 군사 파일은 열람할 수 있으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답했다. 베네트 부대의 전직 대원들은 그를 옹호하는 편지를 써서 "나프탈리는... 적진 깊숙이 헤즈볼라 테러리스트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많은 작전을 이끌었다"고 밝혔다. 카나 사건 당시 베네트의 부관이었던 다른 장교들도 그가 상관과 상의 없이 계획을 변경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1.3. 사업 경력
군 제대 후 베네트는 소프트웨어 기업가로서 경력을 쌓았다. 1999년 그는 사기 방지 소프트웨어 회사인 사이오타를 공동 설립하고 최고경영자(CEO)가 되었다. 그는 2000년 사이오타의 기업 개발을 감독하기 위해 뉴욕시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정착하여 4년간 거주했다. 2005년 사이오타는 RSA 시큐리티에 1.45 억 USD에 매각되어 베네트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이 거래의 조건 중 하나는 사이오타의 이스라엘 지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2013년 기준으로 베르셰바와 헤르츨리야에 위치한 이스라엘 지사에는 400명의 이스라엘인이 고용되어 있었다.
베네트는 2009년 개인용 컴퓨터 및 모바일 기기 원격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 회사 솔루토의 CEO를 맡았다. 당시 그는 동료 리오르 골란과 함께 수많은 이스라엘 기술 스타트업 기업들의 자금 조달에 참여하고 있었다. 솔루토는 기차 벤처 캐피털, 프록시마 벤처스, 베세머 벤처 파트너스, 인덱스 벤처스, 마이클 애링턴의 크런치펀드, 에릭 슈미트의 이노베이션 인데버스, 이니셜 캐피털 등 투자자들로부터 이미 2000.00 만 USD를 유치한 상태였다. 솔루토는 2013년 10월 미국 회사 아수리온에 1.00 억 USD에서 1.30 억 USD 사이의 금액으로 매각이 최종 확정되었다.
2021년 6월, 『포브스 이스라엘』은 베네트가 미국 핀테크 기업 페이오니어 투자로 500.00 만 USD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베네트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 이 회사에 수십만 달러를 투자했다. 페이오니어는 2021년 2월 FTAC 올림푸스 인수 법인과의 SPAC 합병을 통해 33.00 억 USD의 기업 가치로 나스닥 상장을 앞두고 있었다.
2. 정치 경력
베네트는 2006년 리쿠드 당 대표인 베냐민 네타냐후의 수석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2008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그는 예샤 협의회의 이사로 활동했다. 2011년 4월, 그는 아옐렛 샤케드와 함께 비의회 운동인 "나의 이스라엘"을 공동 창립했으며, 이 단체는 94,000명의 이스라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2년 4월, 그는 "이스라엘인들"이라는 이름의 운동을 설립했다. 이 운동의 주요 목표는 중도우파 지지자들 사이에서 시온주의를 강화하고, 종교 공동체와 세속 공동체 간의 대화를 늘리며, "이스라엘 안정화 이니셔티브"를 홍보하는 것을 포함했다.

2.1. 정계 입문 및 초기 활동 (2006-2012)
2012년 베네트는 유대인의 집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2015년과 2017년에도 당 대표로 재선되었다. 크네세트에 당선된 후 의원직을 맡기 전에, 그는 미국인 부모의 아들로서 보유했던 미국 시민권을 포기해야 했다.

2.2. 크네세트 의원 및 장관직 (2013-2021)
2013년 1월 총선에서 베네트가 이끄는 유대인의 집은 크네세트에서 12석을 차지했다. 2013년 3월 그는 경제부 장관과 종교서비스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2013년 4월에는 예루살렘 및 디아스포라 담당 장관으로도 임명되었다.
2015년 크네세트 총선에서 재선된 후 베네트는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디아스포라 담당 장관 직책을 유지했다. 2015년 5월, 네타냐후 총리는 예루살렘 및 디아스포라 담당부를 분리하여 예루살렘 담당 부분을 자신이 직접 맡았다. 그는 나중에 제에브 엘킨을 예루살렘 담당 장관으로 임명했다. 교육부 장관으로서 베네트는 학교 교장들에게 브레이킹 더 사일런스와 같이 이스라엘의 군사적 행동을 비난하는 단체의 구성원들을 초청하는 것을 금지하는 공식 명령을 내렸다.
2015년 10월, 베네트는 슐리 무알렘에게 자신의 의원직을 넘겨주기 위해 크네세트 의원직을 사임했다. 그의 사임은 장관이 재임 중 의원직을 사임할 수 있지만, 정부를 떠나면 다시 크네세트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노르웨이 법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는 12월 6일 아비 보르츠만이 의원직을 사퇴하기로 결정하면서 크네세트로 복귀했다.
아비그도르 리베르만이 2018년 11월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하자, 베네트는 자신이 그 자리를 원한다고 발표했다. 2018년 11월 16일, 리쿠드 당 대변인은 네타냐후가 베네트의 요청을 거절하고 네타냐후 자신이 대신 국방부 장관직을 맡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베네트의 유대인의 집 당은 더 이상 네타냐후 정부와 연관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11월 19일, 베네트는 네타냐후 연립정부에서 탈퇴하겠다는 약속을 철회했다.
2018년 12월, 베네트는 유대인의 집 크네세트 의원들 중 일부와 함께 탈당하여 신우익당을 창당했다. 2019년 4월 총선에서 신우익당은 득표율 기준점을 간신히 넘지 못하여 베네트는 제21대 크네세트 의석을 얻지 못했다. 2019년 6월, 네타냐후 총리가 베네트를 교육부 장관과 디아스포라 담당 장관직에서 해임하자 그는 정부를 떠났다.
크네세트가 해산되고 2019년 9월 두 번째 총선이 소집되자, 신우익당은 유대인의 집과 국민연합-트쿠마와 함께 "통합 우파"라는 선거 연합을 구성했으며, 이는 나중에 야미나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아옐렛 샤케드가 이끌었다. 이 연합은 총선에서 7석을 얻었으며, 베네트는 크네세트 의원직을 되찾았다. 2019년 11월, 베네트는 국방부 장관으로 네타냐후 정부에 다시 합류했다. 잠시 해산되었던 야미나 연합은 2020년 총선을 앞두고 2020년 1월 재통합되었고, 베네트가 샤케드의 뒤를 이어 연합의 새로운 대표가 되었다. 야미나는 이 총선에서 6석을 차지했다.
2020년 5월, 네타냐후와 베니 간츠 (중도 청백당 연합 대표) 간에 새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면서, 야미나는 야당으로 갈 것이라고 발표하며 베네트의 국방부 장관 임기가 종료되었다. 하루 전, 유대인의 집 대표인 라피 페레츠는 연합에서 탈퇴하여 제35대 이스라엘 정부에서 예루살렘 담당 장관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5월 17일, 베네트는 국방부 장관직을 승계한 간츠와 만나 야미나가 이제 "당당한" 야당의 일원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트쿠마는 2021년 1월 7일 종교 시온주의 당으로 재브랜드화되었고, 1월 20일 야미나에서 분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미나는 3월 2021년 총선에서 7석을 차지했다.
2.3. 이스라엘 총리 (2021-2022)

2021년 5월 9일, 베네트와 야당 대표이자 예쉬 아티드 당 대표인 야이르 라피드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축출할 새로운 이스라엘 정부 구성을 위한 연정 협상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보도되었다. 5월 30일, 베네트는 2023년 8월까지 자신이 총리를 맡고, 이후 2025년까지 라피드가 총리직을 맡는 교대 정부 계획을 발표했다. 베네트는 6월 13일에 취임하여 네타냐후의 12년간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키파 착용 총리이다.
2021년 티샤 베아브 단식일, 수백 명의 유대인들이 성전 산에서 기도하는 것이 금지된 상태에서 애도하기 위해 모였을 때, 베네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유대 민족은 이스라엘 땅에 두 번 유대 국가를 세웠지만, 두 번 모두 독립 국가로서 80년을 채우지 못했다. 내부 전쟁과 근거 없는 증오 때문이었다...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 당시, 민족은 분열되었고, 각 집단은 자체적인 위치에 안주했으며, 내부 권력 투쟁의 일환으로 서로의 식량 저장고를 불태웠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훨씬 더 쉬운 임무를 수행했다. 우리는 모두 그 비극적인 결말을 알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매년 이 날에 우리는 조금 더 근거 없는 사랑, 절제, 그리고 경청이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끔찍한 파괴를 애도한다."
2021년 6월 정부가 구성되었을 때, 크네세트에서 61석을 차지했다. 이 의원들은 모두 야미나 소속의 아미하이 치클리를 제외한 연립정당 소속이었다. 2022년 4월 6일, 야미나 소속 이디트 실만이 연립정부에서 사임하여 연립정부는 크네세트에서 과반수를 잃게 되었다. 6월 13일, 야미나 소속 니르 오르바흐가 연립정부를 떠나면서 좌익 연립정부 구성원들이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며칠 뒤인 6월 20일, 베네트와 라피드는 크네세트 해산 법안을 공동으로 발표하며, 라피드가 해산 후 임시 총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크네세트는 6월 30일 밤 해산되었고, 베네트의 총리 임기는 종료되었다.
2.3.1. 국내 정책 및 코로나19 대응
베네트가 취임할 당시, 이스라엘의 코로나19 범유행은 다소 진정되어 전국적인 감염률이 낮았고, 이스라엘 인구의 55%가 두 번 이상의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은 상태였다. 그가 취임한 지 10일 만에 이스라엘은 델타 변이의 확산으로 인해 다시 감염이 급증했다. 이에 대응하여 베네트는 사회적 거리두기 재개를 장려하고, 12세 이상 모든 아동의 백신 접종을 권장했다. 또한 그는 화이자와 협상하여 백신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에 구매한 백신을 예정된 인도일보다 먼저 제공받고, 두 번째 부스터 샷이 필요할 경우 추가 백신을 제공받는 데 합의했다. 변이 바이러스의 지속적인 확산에 따라, 2021년 8월 1일 60세 이상 모든 개인에게 두 번째 부스터 샷이자 전체 세 번째 백신 접종이 승인되었으며, 8월 29일에는 모든 성인으로 확대되었다.
이스라엘은 2021년 11월 말부터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12월에는 오미크론 변이의 첫 사례가 보고되었고, 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항공 여행을 제한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의 백신 접종을 장려했다. 12월 말 추가 급증에 따라 2022년 1월 2일, 세 번째 부스터 샷이자 전체 네 번째 백신 접종이 60세 이상 모든 개인에게 승인되었다. 확진자 수는 1월 내내 꾸준히 증가하다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3월에 다시 안정화되었고, 이후 계속해서 감소했다. 이스라엘은 4월 말 마스크 의무화를 종료했다.
2.3.2. 외교 정책

모로코의 무함마드 6세 국왕은 베네트가 취임하자 특별 축하 서한을 보냈다. 이에 베네트는 "모든 분야에서 이스라엘-모로코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스라엘과 모로코는 2020년 12월 이스라엘-모로코 국교정상화 협정의 일환으로 외교 관계를 복원했는데, 이 협정에는 미국이 동시에 서사하라에 대한 모로코의 주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2021년 8월, 양국은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각각 텔아비브와 마라케시에 대사관을 개설하기로 합의했다.
같은 달 베네트는 미국을 처음 방문하여 국무부 장관 토니 블링컨, 국방부 장관 로이드 오스틴, AIPAC CEO 하워드 코어를 만났다. 이후 2021년 8월 27일에는 조 바이든 대통령을 만났다. 이 회담에서 베네트는 이란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략을 "천 번의 칼질로 죽이는" 방식, 즉 "능지"와 같다고 설명했다.

9월 27일, 베네트는 유엔 총회에서 첫 연설을 했다. 그는 코로나19 범유행과의 싸움과 정치적 양극화 해소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베네트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중동의 많은 국가에도 해를 끼쳤다고 주장하는 이란의 이른바 국가 후원 테러리즘을 비난했다. 그는 이란이 핵무기를 획득하려는 노력을 경고하며 이스라엘은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12월 12일, 그는 이스라엘 총리로는 처음으로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하여 당시 아부다비 에미리트 왕세자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흐얀을 만났다. 2022년 2월 14일, 그는 마나마를 방문하여 이스라엘 총리로는 처음으로 바레인을 공식 방문했다.
2022년 3월 5일, 베네트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과 만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논의했다. 이 회담은 미국, 프랑스, 독일과 조율된 것이었다. 크렘린은 베네트가 푸틴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사이의 중재를 제안했다고 밝혔다. 베네트는 같은 날 독일로 날아가 독일 총리 올라프 숄츠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에게 전화로 최신 정보를 알렸으며, 저녁에 젤렌스키와 두 차례 통화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알 모니터』에 따르면, 이 회담은 3월 3일 이스라엘을 전격 방문하여 긴 일대일 회담을 가졌던 숄츠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중재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한다. 전 유대인 기구 대표 나탄 샤란스키는 베네트가 전쟁 범죄에 대해 푸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스라엘이 우크라이나에 방어용 무기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하며 베네트를 비판했다. 베네트는 이후 푸틴에 대한 국제적 비난 속에서 자신이 중립적인 중재자로 나서면서도 우크라이나의 군사 장비 요청을 거부한 것에 대해 비판에 직면했다.
2.4. 교대 총리 및 은퇴 후 활동 (2022-현재)
총리 임기 종료 후 베네트는 6월 30일 교대 총리가 되었다. 2022년 6월 29일, 베네트는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교대 총리 임기가 끝나면 정계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11월 6일 교대 총리직에서 사임했으며, 이는 이틀 뒤인 11월 8일 발효되었다. 정계 은퇴 후, 베네트는 2023년 5월 이스라엘 기술 회사 콴텀 소스(Quantom Source)의 이사회에 합류했다.
2024년 9월, 하드샷 컴퍼니의 보도에 따르면 그가 정계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달 이스라엘 공영 방송 협회의 보도에서도 그가 정계에 복귀할 계획임을 확인했다.
3. 정치적 입장 및 이념
베네트의 입장은 "초국수주의적"이라고 묘사되어 왔으며, 베네트 자신도 베냐민 네타냐후보다 "더 우익"이라고 자칭하고 또 그렇게 묘사되어 왔다. 그는 또한 "실용주의자"이자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는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에 반대하며, 세금 인하를 지지한다.
3.1.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2012년 2월, 베네트는 "이스라엘 안정화 이니셔티브"라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관리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아디 민츠의 "지구상의 평화"와 빈야민 엘론의 "엘론 평화 계획" 등 이전 이니셔티브의 일부 요소를 기반으로 했다. 이 계획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일방적 합병을 지지하는 네타냐후와 리쿠드당 장관들의 발언에 의존했다. 베네트는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에 반대하며 "그들이 결코 국가를 얻지 못하도록 내 모든 권한을 다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1월, 베네트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3분할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스라엘은 C 지역을 일방적으로 병합하고, 가자 지구에 대한 권한은 이집트로 이전하며, A 지역과 B 지역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남겨두되, 이스라엘 방위군과 신베트의 안보 우산 아래 두어 "안정을 보장하고 팔레스타인 테러를 진압하며 하마스가 영토를 장악하는 것을 막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C 지역은 전체 면적의 62%를 차지하며, 약 36만 5천 명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정착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베네트에 따르면 이 지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약 4만 8천 명에서 다른 조사에 따르면 15만 명)에게는 이스라엘 시민권이나 영주권 지위가 부여될 예정이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검문소 없이 A 지역과 B 지역 사이를 이동할 수 있도록 도로를 건설하고, 인프라와 공동 산업 단지에 투자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p]평화는 사람들,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 아래로부터 성장하기 때문이다." 베네트는 또한 현재 서안 지구 외부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이민이나 하마스가 통제하는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간의 연결에 반대했다. 2011년 그는 서안 지구 산업 지역에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이 함께 일하는 약 50개의 공장이 있다고 언급하며 이를 양측 간의 평화를 찾는 실행 가능한 접근 방식 중 하나로 꼽았다.
2013년 6월, 베네트는 이스라엘이 두 국가로 분리하는 "외과적 조치" 없이 팔레스타인 문제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제 친구 중 한 명은 엉덩이에 파편이 박혀 있는데, 수술로 제거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장애인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그렇게 살기로 결정했다. 완벽함을 고집하는 것이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상황도 있다"고 말했다. 베네트의 "엉덩이에 박힌 파편" 발언은 그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견해를 대표하는 것으로 빠르게 널리 알려졌다.
2013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수감자 석방에 대해 베네트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는 총에 맞아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는 이미 내 삶에서 많은 아랍인들을 죽였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고 알려졌다. 베네트는 이러한 발언으로 널리 비난받았으나, 그는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며, 단지 "테러리스트들이 작전 중 우리 병사들에게 즉각적인 생명 위협을 가할 경우 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2013년 1월, 베네트는 "작은 이스라엘 땅(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의 지역) 내에는 팔레스타인 국가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국가는 향후 200년 동안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4년 12월, 보이콧·투자회수·제재(BDS) 운동에 반대하는 학자 그룹과 노동 시온주의 단체인 "제3의 서사" 구성원들은 미국과 유럽연합에 베네트와 "서안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영구 점령을 보장하고 국제법을 위반하여 서안 지구 전체 또는 일부를 일방적으로 합병하려는 노력을 주도하는" 다른 세 명의 이스라엘인에게 제재를 가할 것을 촉구했다. 자신들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위한 학자들(SIP)이라고 칭하며 "친이스라엘, 친팔레스타인, 친평화"를 표방하는 이 학자들은 미국과 유럽연합에 베네트의 해외 자산을 동결하고 비자 제한을 부과할 것을 요청했다. 베네트는 예샤 협의회 이사로 재직 당시 2010년 정착촌 동결에 반대하고, 서안 지구의 60% 이상을 적극적으로 병합하는 것을 지지하며, "점진적 병합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기 때문에 제재 대상 후보로 선정되었다.
2016년 10월, 베네트는 "이스라엘 땅 문제에 있어, 우리는 보류 조치에서 결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꿈을 분명히 해야 하며, 그 꿈은 유대아 사마리아가 주권적인 이스라엘 국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행동해야 하며, 우리의 생명을 바쳐야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땅을 전술적 목표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전략적 목표로 계속해서 표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16년 11월, 베네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이 자신에게 두 국가 해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고 말하며 "팔레스타인 국가의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언론인 안셀 페퍼에 따르면, 베네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그의 수사 대부분이 선거 운동을 위한 것이며 실제로는 믿음보다 더 온건하다고 사적으로 말해왔다. 팔레스타인 국가에 대한 그의 표명된 우익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2021년 크네세트 총선 후 야이르 라피드 및 다른 당 지도자들과 통일 정부 구성을 위한 연정 협상에 참여하는 동안 총리직을 제안받았을 때, 베네트는 잠재적인 통일 정부에서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서안 지구 내 어떤 영토도 병합하지 않고 새로운 정착촌도 건설하지 않는 정책에 동의했다.
2023년 10월, 가자 전쟁 중에 그는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전면 봉쇄를 지지하며 "내 적들에게 전력을 공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3.2. 경제 및 사회 정책

베네트는 민간 부문에 대한 정부 규제를 줄이고 민간 기업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그는 노인 및 장애인과 같은 취약 계층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지지한다. 베네트는 이스라엘이 독점을 깨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의 의견으로는 주요 노동 조합, 국방부 등이 이스라엘 경제를 옥죄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불평등을 줄이는 핵심은 기회의 평등과 주변 지역의 교육에 대한 투자라고 믿는다. 이를 통해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스라엘 인구가 직업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성공할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베네트는 믿는다. 그는 "합리적인 주택 가격" 문제에 대한 국가적 해결책과 이스라엘 인구의 보다 공평한 분포를 촉진하기 위해 네게브와 갈릴리와 같은 주변 지역의 참전 용사들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것을 지지한다. 그는 또한 이스라엘의 중소기업에 대한 무거운 관료적 장벽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했다.
경제부 장관으로서 베네트는 이스라엘의 무역을 유럽 연합과의 거래를 줄이고 전 세계 신흥 시장과의 무역을 늘려 무역 다변화하는 새로운 전략을 감독했다. 이러한 변화의 두 가지 주요 이유는 신흥 시장의 기회를 활용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인한 유럽 연합의 잠재적 제재 위협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베네트는 이스라엘이 유럽 연합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줄여 유럽 연합의 이스라엘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한다고 인정했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따르면, 베네트는 이러한 경제적 전환의 주요 설계자이다. 그의 지휘 아래 경제부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 새로운 무역 대표부를 개설하기 시작했으며, 유럽의 일부 무역 사무소를 폐쇄하고 다른 사무소는 인접 국가의 사무소와 통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의 일환으로 베네트는 러시아 및 중국과 자유 무역 협정 협상을 시작했으며, 인도와의 자유 무역 협정 협상을 지속적으로 감독하고, 중국과 인도로 경제 사절단을 이끌었다. 2013년 발리 WTO 각료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베네트는 미래 자유 무역 협정 가능성에 대해 일부 미지정 국가들의 대표단과 회담을 가졌다.
베네트는 이스라엘의 높은 식품 가격을 낮추기 위한 개혁을 시행했다. 그의 감독 하에 수입관세와 장벽이 줄어들었으며, 이스라엘 식품 산업의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2014년 4월부터 시작되어 그 해 나머지 기간과 2015년까지 계속된 이스라엘 식품 가격 하락의 원인으로 평가된다. 『하레츠』 사설에 따르면, 전 세계 상품 가격 하락과 많은 이스라엘 소비자들의 심각한 재정난이 이러한 하락을 촉발했으며, 개혁 때문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베네트는 대부분 실업 상태인 하레디 남성들을 노동 시장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주도했다. 베네트에 따르면, 이들을 노동 시장에 통합시키는 것이 경제 성장을 크게 촉진할 것이다. 그의 "바우처 계획"에 따라, 경제부는 수백 개의 직업 학교에 바우처를 발행하여 하레디 남성들이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의무 군 복무를 피하고 직업 학교에 등록하여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베네트는 또한 이스라엘 아랍계 여성들의 고용률을 높이기를 원했다. 2021년 10월, 베네트 행정부는 이스라엘의 아랍계 소수 민족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지출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정통 유대교 신자인 베네트는 동성 결혼 시행에 반대하며, "마치 우리가 코셔로 우유와 고기를 함께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동성 커플에 대한 세금 혜택과 같은 동등한 권리에 대해서는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2015년 예루살렘 성소수자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16세 소녀가 살해된 사건 이후,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베네트는 교육부에 성소수자 공동체에 대한 미래의 공격을 막기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하도록 지시하며, "우리는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이 공격에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네트는 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며 "그들은 모든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지만, 2020년 말에는 성소수자들을 돕기 위한 정책 변화를 추진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4. 개인 생활
베네트의 아내 길라트는 전문 제과사이다. 그녀는 원래 세속주의자였으나, 남편을 따라 지금은 샤바트와 카슈루트를 지킨다.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으며, 텔아비브 북쪽 20 km에 위치한 라아나나 시에 거주한다. 그들의 장남 요나탄은 요나탄 네타냐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막내아들 데이비드 에마누엘은 베네트의 특수부대 전우였던 에마누엘 모레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베네트는 현대 정통 유대교 신자이다.
5. 평가 및 비판
5.1. 긍정적 평가
나프탈리 베네트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교착 상태를 해소하고 교대 정부를 구성하여 베냐민 네타냐후의 오랜 집권을 끝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코로나19 범유행에 대한 정부의 효과적인 대응을 이끌었고, 백신 접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특히 화이자와의 백신 조기 공급 협상은 팬데믹 대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자유 시장 경제를 신봉하며 정부 규제 완화와 민간 부문 활성화를 강조했다. 그는 독점을 철폐하고 중소기업의 관료적 어려움을 해소하려 했으며, 취약 계층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주장했다. 특히 하레디 남성들과 이스라엘 아랍계 여성들의 노동 시장 통합을 추진하여 경제성장을 촉진하려 한 점, 그리고 아랍계 소수 민족의 생활 환경 개선을 위한 대규모 지출 계획을 승인한 점은 사회 통합과 기회의 평등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외교적으로는 아브라함 협정 이후 모로코,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대사관 개설을 추진하며 이스라엘의 외교 지평을 넓혔다.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의 중재를 시도하며 국제 사회에서 이스라엘의 역할을 확대하려 했다.
5.2. 비판 및 논란
나프탈리 베네트는 그의 정치적 경력 전반에 걸쳐 여러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그의 군 복무 시절인 1996년 남레바논 분쟁 중 발생한 카나 학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 당시 특수부대 지휘관이었던 베네트가 지원을 요청한 무전이 "히스테리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민간인들이 대피하고 있던 유엔 시설이 이스라엘군의 포격을 받아 106명이 사망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언론인 이갈 사르나는 베네트가 작전 중 명령을 무시하고 상관과 조율 없이 작전 계획을 변경하여 "판단력이 부족했다"고 주장했다. 비록 베네트는 자신의 행동을 옹호하고 부대원들도 그를 변호했지만, 이 사건은 그의 군사적 판단력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그의 입장은 특히 강경 우익으로 비판받았다. 그는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에 확고히 반대하며,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C 지역을 이스라엘에 일방적으로 병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3년에는 팔레스타인 수감자 석방에 대해 "나는 이미 내 삶에서 많은 아랍인들을 죽였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논란의 발언을 했다가 널리 비난받았다. 이러한 발언은 그가 팔레스타인인에 대해 극단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2014년에는 일부 학자들이 그가 서안 지구 영구 점령을 지지하고 국제법을 위반하는 일방적 병합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그에게 제재를 가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이스라엘이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면서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 명확한 비판을 하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군사 장비 요청을 거부한 점에 대해서도 비판에 직면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국제 사회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가장하며 실제로는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정치적 실용주의는 긍정적 평가와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총리 취임 전에는 강경 우익 입장을 고수했으나, 총리직을 위해 야이르 라피드가 이끄는 중도 및 좌익 정당들과 연합하여 서안 지구 영토 병합 및 신규 정착촌 건설 중단을 약속한 것은 그의 이념적 일관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행보는 일부 지지층으로부터는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그의 연정 붕괴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6. 함께 보기
- 이스라엘의 정치인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