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호세 카레라스(José Carreras스페인어, 본명: 주젭 마리아 카레라스 이 콜(Josep Maria Carreras i Coll카탈루냐어), 1946년 12월 5일 ~ )는 스페인 카탈루냐인 출신의 세계적인 오페라 테너 가수이자 저명한 인도주의자이다. 주세페 베르디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작품에서 특히 뛰어난 활약을 보인 그는 1990년부터 2003년까지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삼대 테너'로 활동하며 클래식 음악을 전 세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카레라스는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11세에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이래 60개 이상의 역할로 세계 유수의 오페라 극장과 수많은 음반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다. 특히 1987년 급성 림프모구 백혈병 진단을 받고 생존 확률이 희박하다는 선고를 받았으나, 힘든 투병 끝에 기적적으로 완치되어 무대에 복귀하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었다.
자신의 투병 경험을 바탕으로 1988년 '호세 카레라스 국제 백혈병 재단'을 설립하여 백혈병 연구 지원, 골수 및 제대혈 기증 캠페인, 환자 및 가족 지원 등 광범위한 자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매년 자선 갈라 콘서트를 개최하고 수많은 자선 공연에 참여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은빛 테너"로 불리며 깊은 호소력과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찬사를 받았으며, 음악적 업적과 인도주의적 기여를 통해 전 세계에 깊은 문화적, 사회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2.1. 어린 시절과 교육
호세 카레라스는 1946년 12월 5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노동 계급 지역인 산츠에서 안토니아 콜 이 사이기(Antònia Coll i Saigi)와 주젭 카레라스 이 솔레르(Josep Carreras i Soler) 사이에서 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프랑스어 교사였으나,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로 싸운 경력 때문에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부가 집권한 1939년 이후 교사직을 박탈당해 교통경찰로 일했다. 어머니는 작은 미용실을 운영했는데, 어린 카레라스는 종종 손님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용돈을 받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와 매우 가까웠으며, 어머니는 그가 언젠가 위대한 가수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카레라스는 18세에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지금도 무대에 오를 때마다 항상, 항상 어머니를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1951년, 그의 가족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아르헨티나로 이주했으나, 1년 만에 다시 산츠로 돌아와 어린 시절과 십대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 특히 노래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6세 때 마리오 란차가 출연한 영화 위대한 카루소를 보고 그 재능이 더욱 깊어졌다. 자서전과 여러 인터뷰에서 그는 영화를 본 후 가족들에게 "여자의 마음"을 포함한 아리아들을 끊임없이 불렀고, 때로는 즉흥 콘서트에 지친 가족들을 피해 화장실에 자신을 가두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부모는 아마추어 바리톤이었던 외할아버지 살바도르 콜(Salvador Coll)의 격려를 받아 그에게 음악 레슨 비용을 마련해주었다. 처음에는 어린 시절 친구의 어머니인 막다 프루네라(Magda Prunera)에게 피아노와 성악을 배웠고, 8세부터는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원에서도 음악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8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스페인 국립 라디오에서 막다 프루네라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여자의 마음"을 부르며 첫 공개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의 녹음은 현재도 남아있으며, 비디오 전기 호세 카레라스 - 한 인생 이야기에서 들을 수 있다. 1958년 1월 3일, 11세의 나이로 그는 바르셀로나의 위대한 오페라 극장인 리세우 대극장에서 마누엘 데 파야의 페드로 친방의 인형극에서 소년 소프라노 트루하만(Trujamán) 역으로 데뷔했다. 몇 달 후, 그는 라 보엠 2막에서 소년 소프라노로서 리세우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노래했다. 십대 내내 그는 리세우 고등 음악원에서 음악을 계속 공부했으며, 처음에는 프란시스코 푸이그(Francisco Puig)에게, 나중에는 카레라스가 "예술적 아버지"라고 묘사한 후안 루악스(Juan Ruax)에게 개인 성악 레슨을 받았다. "예비" 직업이 필요하다고 느낀 아버지와 형의 조언에 따라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2년 후 노래에 집중하기 위해 대학을 떠났다.

2.2. 초기 경력 발전
후안 루악스는 카레라스에게 1970년 1월 8일 개막한 리세우 대극장의 노르마에서 플라비오 역으로 오디션을 볼 것을 권유했고, 이는 그의 첫 테너 역할이 되었다. 비록 작은 역할이었지만, 그가 부른 몇몇 구절은 이 작품의 주연이었던 저명한 소프라노이자 동향인 몬세라트 카바예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1970년 12월 19일 개막한 도니체티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에서 자신과 함께 젠나로(Gennaro) 역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이 역할은 그의 첫 성인 주역이었으며, 그가 진정한 테너로서의 데뷔라고 여기는 작품이다. 1971년, 그는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카바예가 타이틀 롤을 부른 마리아 스투아르다 콘서트 공연으로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카바예는 수년 동안 그의 경력을 홍보하고 격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와 함께 15개 이상의 다른 오페라에 출연했다. 그녀의 오빠이자 매니저인 카를로스 카바예(Carlos Caballé)는 1990년대 중반까지 카레라스의 매니저이기도 했다.
3. 음악 경력
3.1. 오페라 활동
1970년대 동안 카레라스의 경력은 빠르게 발전했다. 1971년 말, 그는 파르마의 권위 있는 베르디안 보치(Voci Verdiane)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했으며, 이는 1972년 1월 12일 파르마 레조 극장에서 라 보엠의 로돌포(Rodolfo) 역으로 이탈리아 데뷔를 이끌었다. 같은 해 말 그는 뉴욕 시티 오페라에서 나비 부인의 핑커톤(Pinkerton) 역으로 미국 데뷔를 했다. 이어서 주요 오페라 극장 데뷔가 이어졌다. 1973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로돌포 역, 1973년 필라델피아 리릭 오페라 컴퍼니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Alfredo) 역, 1974년 빈 국립 오페라에서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Duke of Mantua) 역, 1974년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알프레도 역, 1974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토스카의 카바라도시(Cavaradossi) 역, 그리고 1975년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가면 무도회의 리카르도(Riccardo) 역으로 데뷔했다. 28세가 되기 전 그는 이미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24개의 다른 오페라에서 테너 주역을 불렀으며, 필립스 레코드(Philips Records)와 독점적인 녹음 계약을 맺어 일 코르사로, 두 명의 포스카리, 레냐노 전투, 하루 동안의 왕, 스티펠리오 등 자주 공연되지 않는 여러 베르디 오페라의 귀중한 녹음을 남겼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동안 카레라스의 상대역 소프라노 및 메조소프라노로는 당대 가장 유명한 가수들이 포함되었다. 몬세라트 카바예, 비르기트 닐손, 비오리카 코르테즈(Viorica Cortez), 레나타 스코토, 일레아나 코트루바스(Ileana Cotrubaş), 실비아 사스(Sylvia Sass), 테레사 스트라타스(Teresa Stratas), 키리 테 카나와, 프레데리카 폰 슈타데, 아그네스 발차, 테레사 베르간자(Teresa Berganza), 카티아 리치아렐리 등이 그들이다. 리치아렐리와의 예술적 파트너십은 1972년 파르마의 라 보엠에서 함께 노래하면서 시작되어 13년 동안 녹음 스튜디오와 무대에서 이어졌다. 그들은 나중에 필립스 클래식(Philips Classics)을 위해 라 보엠 스튜디오 녹음을 했으며, 주로 필립스와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에서 12개 이상의 오페라 및 리사이틀 상업 녹음에서 함께 들을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그가 함께 작업한 많은 지휘자들 중 카레라스가 가장 긴밀한 예술적 관계를 맺었고 그의 경력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 그는 1976년 4월 10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베르디 레퀴엠을 통해 카라얀의 지휘 아래 처음 노래했으며, 그들의 마지막 협력은 1986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카르멘 프로덕션이었다. 카라얀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아이다, 돈 카를로, 카르멘과 같은 더 무거운 스핀토 역할을 점점 더 많이 불렀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이러한 역할이 그의 타고난 목소리에는 너무 무거웠고 그의 전성기를 단축시켰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에도 카레라스는 카르멘과 페도라에서 오페라 무대에 계속 섰으며, 1990년 페랄라다에서 삼손과 데릴라, 1993년 런던에서 베르디의 스티펠리오, 1998년 취리히에서 에르만노 볼프페라리의 슬라이에서 역할 데뷔를 했다. 그러나 콘서트와 리사이틀에 점점 더 전념하면서 그의 오페라 공연은 줄어들었다. 그의 경력이 시작된 오페라 극장인 리세우 대극장에서의 마지막 오페라 공연은 2001년 3월 삼손과 데릴라였다. 그는 2002년 도쿄에서 슬라이의 타이틀 롤을 다시 불렀고, 2004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에서 카르멘의 마지막 막과 슬라이 3막의 완전한 무대 공연을 가졌다. 2014년 4월, 카레라스는 10년 만에 오페라 무대로 돌아와 빌바오의 아리아가 극장에서 초연된 크리스티안 콜로노비츠(Christian Kolonovits)의 오페라 엘 후에스(El Juez, 판사)의 타이틀 롤을 불렀다. 그는 2014년 8월 오스트리아의 에를 페스티벌(Festival Erl)과 2015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이 역할을 다시 맡았다.

3.2. 삼대 테너 활동
1990년, 1990년 FIFA 월드컵 결승전 전야에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에서 첫 '삼대 테너' 콘서트가 열렸다. 이 콘서트는 원래 카레라스의 백혈병 재단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그의 동료인 플라시도 도밍고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작은 형제"인 카레라스를 오페라 세계로 다시 환영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이 콘서트와 이후의 삼대 테너 콘서트들은 카레라스에게 오페라 극장을 훨씬 넘어서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199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삼대 테너 콘서트의 텔레비전 방송은 전 세계적으로 10억 명 이상이 시청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9년까지 로마에서 열린 첫 삼대 테너 콘서트의 음반은 약 1,300만 장이 팔려 역대 가장 많이 팔린 클래식 음반이 되었다.
한편, 카탈루냐 출신인 호세 카레라스와 카스티야 출신인 플라시도 도밍고는 한때 라이벌 관계이자 지역 감정, 그리고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러나 카레라스가 백혈병 투병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때, 그는 마드리드에 위치한 에르모사 백혈병 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완치 판정을 받은 카레라스가 에르모사 재단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후원 회원이 되기 위한 절차를 밟았을 때, 그는 이 재단이 플라시도 도밍고가 설립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도밍고는 라이벌인 카레라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익명으로 도움을 주려 했던 것이다. 카레라스는 도밍고의 우정에 깊이 감동했고, 그 이후로 둘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카레라스가 자신의 백혈병 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계기 때문이었다.
3.3. 크로스오버 및 기타 음악 활동
1980년대에 카레라스는 녹음 스튜디오에서 엄격한 오페라 레퍼토리를 벗어나 사르수엘라, 뮤지컬, 오페레타 노래 리사이틀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두 편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85)와 남태평양(1986)의 전체 길이 녹음에 참여했으며, 두 작품 모두 키리 테 카나와가 공동 주연을 맡았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녹음은 두 가지 면에서 이례적이었다. 카레라스는 레너드 번스타인에 의해 선택되어 지휘를 받았는데, 번스타인은 이 음악을 작곡한 지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지휘를 맡았다. 녹음 세션에 대한 전체 길이의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었다. 현재 널리 알려진 영상에서 카레라스는 "Something's Coming" 솔로에서 당김음 리듬과 발음에 어려움을 겪었고, 번스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교정을 받았다.
1987년 필립스에서 발매된 작곡가 아리엘 라미레스가 지휘한 아르헨티나 포크 미사곡 미사 크리올라 녹음은 이 작품을 전 세계 청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카레라스의 많은 무대 공연이 영상으로 남아있지만, 그는 영화에도 진출했다. 1986년에는 영화 로만차 피날(Romanza Final, 최후의 로맨스)에서 19세기 스페인 테너 훌리안 가야레를 연기했으며, 1987년에는 루이지 코멘치니가 감독한 라 보엠 영화 버전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식 및 폐막식의 음악 감독을 맡았으며, 그의 첫 번째 노래 영웅인 마리오 란차를 기리는 전 세계 콘서트 투어를 진행했다. 특히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식에서는 영국의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과 듀엣으로 올림픽 주제가 "아미고스 파라 시엠프레"(Amigos Para Siempre)를 멋지게 불렀고,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카레라스에게 고향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백혈병 극복의 "쾌유 축하"와도 같았다. 이때 그의 이름은 카탈루냐어 표기인 "Josep Carreras"로 사용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카레라스의 녹음 및 라이브 콘서트 레퍼토리는 주로 예술가곡, 나폴리 가곡, 라이트 클래식 장르, 그리고 '이지 리스닝' 음악으로 옮겨갔다. 그는 또한 다이애나 로스, 에디타 고르니아크, 류이스 야치, 페터 마파이, 우도 위르겐스, 클라우스 마이네, 샤를 아즈나부르, 킴 스타일스, 사라 브라이트만, 비키 레안드로스, 재키 에반초, 시셀 쉬르셰뵈, 데비 해리, 마지다 엘 루미, 조르자 푸만티와 같은 클래식 음악계 외부의 예술가들과도 점점 더 많이 공연하고 녹음했다. 2002년부터 카레라스는 라이브 공연을 리사이틀과 오케스트라 콘서트로 축소했다. 2009년 5월 8일 더 타임스에 실린 인터뷰에서 카레라스는 더 이상 주요 오페라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것이지만, 리사이틀에는 여전히 열려 있다고 발표했다.


4. 건강 문제와 극복

오페라 가수로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7년, 호세 카레라스는 파리에서 라 보엠을 촬영하던 중 급성 림프모구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생존 확률이 10분의 1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화학요법, 방사선 치료, 그리고 시애틀의 프레드 허친슨 암 연구 센터에서 자가골수이식을 포함한 힘든 치료 과정을 거쳐 기적적으로 병에서 회복되었다.
회복 후 그는 1988년과 1989년에 복귀 리사이틀 투어를 시작하며 점진적으로 오페라 및 콘서트 무대로 돌아왔다. 1989년 스페인 메리다에서 몬세라트 카바예와 함께 메데이아에 출연했으며, 같은 해 바르셀로나에서 레오나르도 발라다의 크리스토발 콜론 세계 초연 무대에 섰다.
5. 인도주의 활동
백혈병에서 회복된 후 카레라스는 의학 과학에 대한 빚을 갚고 다른 백혈병 환자들의 삶과 치료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1988년 7월 14일, 그는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국제 백혈병 재단'(Fundació Internacional Josep Carreras per a la Lluita contra la Leucèmia카탈루냐어)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활동에 대한 3개월마다 발행되는 잡지 아미고스 데 라 푼다시온(Amigos de la Fundación)을 발행하며, 네 가지 주요 분야에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첫째, 장학금 및 연구 보조금을 통해 백혈병 치료 및 연구를 위한 임상 연구 개발에 힘쓴다. 둘째, 이식을 필요로 하는 백혈병 환자를 위한 골수 및 제대혈 기증을 늘리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스페인 국립 골수 기증자 등록소인 REDMO를 운영한다. 셋째, 주요 국제 기관과 개발도상국의 병원 및 연구소 모두에서 연구 및 임상 인프라를 강화한다. 넷째, 이식 센터 근처의 무료 숙박을 포함하여 백혈병 환자와 그 가족에게 사회 서비스를 제공한다.
호세 카레라스 국제 백혈병 재단은 미국, 스위스, 독일에도 지부를 두고 있으며, 이 중 독일 지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다. 1995년부터 카레라스는 독일에서 재단의 활동을 위한 기금 모금을 위해 라이프치히에서 매년 라이브 텔레비전 자선 갈라 콘서트를 주최해왔다. 이 갈라 콘서트만으로도 설립 이래 총 7100.00 만 EUR 이상을 모금했다. 카레라스는 또한 자신의 재단과 기타 의료 관련 자선 단체를 위해 매년 최소 20회의 자선 콘서트를 개최한다. 그는 유럽 의학회(European Society for Medicine)와 유럽 혈액학회(European Haematology Association)의 명예 회원이며, 유럽 의료 종양학회(European Society for Medical Oncology)의 명예 후원자이자 유네스코 선한 의지 대사이다. 그는 전 세계 병원을 방문하여 백혈병과 싸우는 환자들을 격려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소녀 환자에게 '루치아노'라는 이름의 곰 인형을 선물하며 병 극복을 응원하기도 했다.
6. 수상 및 영예
카레라스는 예술적 활동과 인도주의적 활동 모두에 대해 수많은 상과 영예를 받았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 태국의 백상훈장 기사대십자장 (1등) (2019년)
- 프랑스의 예술문화훈장 사령관 및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기사대십자장 및 대장 (각각 1996년 5월 20일, 1991년 4월 3일)
- 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 대훈장 (1999년)
- 스페인 소피아 왕비로부터 사회 연대 시민 훈장 금십자장
- 아스투리아스 공상 예술 부문 (1991년 공동 수상)
- 독일 연방 공로 훈장 대십자장
- 카탈루냐 자치정부 금메달 (1984년 6월)
- 바이에른 공로 훈장
- 슈타이거 상 (2006년)
- 젬퍼오퍼의 성 조지 훈장 (2010년 드레스덴)
- 2009년 백혈병 기금 모금 행사에서 라이프치히 시장으로부터 라이프치히 시 명예 메달 (2009년 12월 17일, 라이프치히 시의회 만장일치 결정)
- 1993년 러프버러 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학위
- 2004년 2월 23일, 오스트리아 우정국은 빈 국립 오페라 데뷔 30주년을 기념하여 1 EUR짜리 우표를 발행했다.
- 2004년 미국 성취 아카데미의 골든 플레이트 상
- 2009년 브릿 어워드 공로상
그는 또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대학교와 미겔 에르난데스 대학교, 영국의 네이피어 대학교, 러프버러 대학교, 셰필드 대학교, 러시아의 멘델레예프 러시아 화학 기술 대학교, 이탈리아의 카메리노 대학교, 미국의 럿거스 대학교, 포르투갈의 코임브라 대학교와 포르투 대학교,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 국립 음악 대학교, 독일의 필립스 마르부르크 대학교 (2006년 5월 3일) 및 자르란트 대학교 (2012년), 헝가리의 페치 대학교, 그리고 대한민국의 경희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페인 산트 호안 달라칸트의 중앙 광장과 두 개의 극장(빌라세카 근처의 아우디토리 주젭 카레라스, 푸엔라브라다의 테아트로 주젭 카레라스)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7. 음악적 특징 및 평가
전성기 시절 카레라스의 목소리는 당대 가장 아름다운 테너 목소리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스페인의 비평가 페르난도 프라가(Fernando Fraga)는 그의 목소리를 "고귀한 음색과 풍부한 색채, 호화로운 공명"을 지닌 서정 테너에 스핀토의 풍성함을 더한 것이라고 묘사했다. 이는 특히 그의 목소리 중음역에서 두드러졌다. 프라가는 카레라스 자신도 인정했듯이, 젊은 시절에도 테너 고음역은 그에게 다소 어려웠으며 경력이 진행될수록 더욱 그러했다고 지적했다.
그의 우상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처럼, 카레라스는 또한 아름답고 표현력이 풍부한 프레이징과 열정적인 전달력으로도 유명했다. 이러한 특성은 아마도 1976년 몬세라트 카바예가 타이틀 롤을 맡고 콜린 데이비스 경이 지휘한 토스카 녹음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여러 비평가들은 안드레아 셰니에, 카르멘의 돈 호세, 돈 카를로, 운명의 힘의 알바로와 같은 더 무거운 스핀토 역할을 맡으면서 그의 본래 서정적인 성악기에 무리가 가해졌고, 이로 인해 목소리가 조기에 어두워지고 일부 광채를 잃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역할들에서 최고의 연주를 선보였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1984년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그의 안드레아 셰니에 공연에 대해 "몇 주 전 라 보엠의 서정 시인 로돌포에서 영웅 시인 셰니에로 effortlessly하게 전환하며, 스페인 테너의 성악 예술성은 공연 내내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었다"고 평했다. 1985년 라 스칼라에서 열린 안드레아 셰니에 공연(DVD로 보존됨)에 대해 칼 바탈리아(Carl Battaglia)는 오페라 뉴스에서 카레라스가 "놀라운 집중력과 교묘하게 다듬어진 성악 악센트로 이 스핀토 역할에 본질적으로 서정적인 테너에게 부족했던 강렬함을 부여하며 오페라를 지배했다"고 썼다. 그러나 칼 H. 힐러(Carl H. Hiller)는 오페라 잡지에서 라 스칼라 공연에 대한 리뷰에서, 악보의 조용한 구절에서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테너 목소리가 지닌 모든 음색의 부드러움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언급했지만, 높고 큰 소리에서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소리가 긴장되고 불안정하게 들렸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는 그를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 "은빛 테너"라고 평가한다. 그는 플라시도 도밍고와 마찬가지로 발성이나 기교보다는 호소력 짙은 노래와 연기로 유명하다. 또, 이러한 점이 카레라스의 매력이라는 평가가 많다. 백혈병 치료 이후 성량이 줄면서 기량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가를 적시게 했다. 카레라스의 진가는 피아니시모(pp)에서 드러난다. 포르티시모(ff)에서 부드럽게 피아니시모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는 그의 미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섬세한 감정 연기에서 빛을 발한다.
8. 개인적인 삶
카레라스는 1971년 메르세데스 페레스(Mercedes Pérez)와 결혼하여 1972년에 아들 알베르트(Albert)와 1978년에 딸 줄리아(Julia) 두 자녀를 두었다. 이 결혼은 1992년에 이혼으로 끝났다. 2006년에는 유타 예거(Jutta Jäger)와 결혼했으나 2011년에 헤어졌다. 그의 조카인 다비드 히메네스 카레라스(David Giménez Carreras)는 지휘자이자 바예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카레라스의 많은 콘서트를 지휘했으며, 2000년 6월 리세우 대극장에서 열린 슬라이 오페라 공연도 지휘했다.
카레라스는 카탈루냐인이지만, 그가 태어날 당시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철권통치 기간이었고, 카탈루냐와 바스크 등 분리주의 운동이 거셌던 지역을 억압했다. 이 때문에 카탈루냐어 본명인 주젭 카레라스(Josep Carreras카탈루냐어)보다 스페인어(카스티야어)로 된 호세 카레라스(José Carreras스페인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그는 외국 성악가로는 드물게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이라 자주 내한하여 콘서트를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애견 이름은 오페라 투란도트의 유명한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의 가사에서 따온 "빈체로"(Vincero)이다. 일본의 유명 토크쇼인 테츠코의 방에 출연했을 당시, 현지 신문의 TV 프로그램 안내란에 그의 이름이 "호세 카레라스"가 아닌 "호세 카레라이스"로 오기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9. 유산 및 영향
호세 카레라스는 음악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남겼다. 특히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개막식과 폐막식의 음악 감독을 맡아 고향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행사에 기여하며 백혈병 극복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의 이름을 딴 스페인 산트 호안 달라칸트의 중앙 광장과 두 개의 극장(빌라세카 근처의 아우디토리 주젭 카레라스, 푸엔라브라다의 테아트로 주젭 카레라스)은 그의 예술적, 인도주의적 유산을 기리고 있다.
스위스의 고급 보석상 쇼파르는 "호세 카레라스 모델" 손목시계를 출시했으며, 판매 수익금의 일부는 '호세 카레라스 국제 백혈병 재단'에 기부되어 그의 인도주의적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의 작가 키리노 나츠오의 소설 혼모에(魂萌え)에는 "호세 님"을 열렬히 추종하는 등장인물이 있어, 그의 대중적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는 마리오 란차를 자신의 음악적 영웅으로 여기며, 1994년에는 란차에게 헌정하는 공연을 가졌다. 그는 "만약 내가 오페라 가수라면, 오페라는 마리오 란차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란차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강조했다. 2006년 12월 9일 도하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서는 레바논의 가수이자 유엔 대사인 마지다 엘 루미와 듀엣으로 "Light the way"를 불렀다.
카레라스는 베르디와 푸치니 등 주요 작곡가들의 오페라 작품에서 보여준 열정적인 연기로 많은 팬들에게 존경받고 있으며, 그의 목소리는 "은빛 테너"라는 별명처럼 아름다움과 호소력을 겸비한 것으로 평가된다. 백혈병 극복 이후에도 그는 끊임없이 자선 활동을 펼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기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