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1.1. 어린 시절과 교육
한스 울리히 루델은 1916년 7월 2일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지방의 콘라츠발다우(Konradswaldau독일어)에서 루터교 목사 요하네스 루델의 셋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열렬한 스포츠맨이었던 그는 루반의 인문계 김나지움에 다녔으며, 1933년에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했다. 1936년 아비투어 시험에 합격한 후, 의무적인 제국 노동봉사단에 참여했다.
1.2. 초기 경력 및 군 복무
노동봉사단 복무를 마친 루델은 같은 해 루프트바페에 입대하여 공군 조종사로서의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공중 정찰 조종사로 복무했으며, 1940년에는 빈에 주둔한 제43 항공 훈련 연대의 부관으로 근무했다. 1941년 초에는 슈투카 조종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루델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주로 융커스 Ju 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를 조종하며 동부 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의 뛰어난 조종 실력과 대전차 공격 능력은 독일군 내에서도 전설적인 존재로 평가받았다.
2.1.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 입문
1941년 초, 루델은 슈투카 조종사 훈련을 마쳤고, 제2 급강하 폭격 항공단(StG 2) 제1 비행중대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 즉 소련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점령된 폴란드로 이동했다. 그는 1941년 6월 23일, 슈투카 조종사로서 첫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2.2. 동부 전선 주요 작전
1941년 9월 21일, 루델은 발트 함대의 소련 전함 마라트 공격에 참여했다. 마라트는 1941년 9월 23일, 함수 상부 구조물 근처에 1000 kg 폭탄을 맞고 함수 탄약고가 폭발하여 침몰했다. 이로 인해 326명이 사망했으며, 배는 11 m 수심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마라트의 침몰은 흔히 루델 단독의 전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를 포함한 두 명의 조종사가 투하한 폭탄에 의해 침몰했다. 이후 루델의 부대는 소련의 수도를 점령하려는 중앙 집단군의 태풍 작전에 참여했다.
1942년 말, 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1941년 5월부터 1942년 1월까지 루델은 500회의 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2월에는 1,000번째 전투 임무를 완수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이후 그는 대전차 임무를 위해 Ju 87 G형을 사용하는 실험에 참여했다. 이 대전차 부대는 소련의 케르치-엘티겐 작전에 대항하는 작전에 참여했으며, 기내 건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은 선전성의 뉴스 영화인 디 도이체 보헨샤우에 사용되었다.
1943년 7월 5일,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된 독일 공세 첫날, 루델은 Ju 87G를 조종하며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 기체는 날개 아래에 37 mm 보르트카노네 BK 3,7 기관포 두 문을 장착한 대전차 항공기였다. 이 개념은 루델의 아이디어였으며 매우 성공적임이 입증되었다. 1943년 7월 12일, 그는 하루 만에 소련 전차 12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고위 장군 페르디난트 쇠르너는 "루델 한 명이 사단 전체를 대체한다"고 평했다. 느린 슈투카는 취약하여 높은 사상률을 보였지만, 루델은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2.3. 전차 격파 및 군사적 공적
루델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동부 전선에서 2,530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이 중 대부분은 융커스 Ju 87을 조종하며 이루어졌으며, 430회는 포케불프 Fw 190의 지상 공격형으로 비행했다. 그는 519대의 전차를 파괴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전함 마라트를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순양함(미완성 및 심하게 손상된 페트로파블롭스크), 구축함(민스크) 및 70척의 상륙정을 격침시켰다.
루델은 또한 모든 유형의 차량 800대 이상, 150개 이상의 포병, 대전차 또는 대공 진지, 4대의 장갑열차, 수많은 교량과 보급선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9회의 공중전 승리(전투기 7대, 일류신 Il-2 2대)도 기록했다. 그는 대공포에 의해 30번 격추되거나 불시착했으며, 5번 부상당했고, 적진에 고립된 6명의 승무원을 구출했다.
2.4. 군사적 훈장 및 표창
루델은 전쟁 중 다음과 같은 훈장을 받았다.
- 공군 명예잔: 1941년 10월 20일, 슈투카 전투비행단 상급중위로서 수여.
- 철십자 훈장:
- 2급 철십자 훈장: 1939년 11월 10일.
- 1급 철십자 훈장: 1941년 7월 15일.
- 황금 곡엽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
- 기사 철십자 훈장: 1942년 1월 6일, 제2 슈투카 전투비행단 9중대 상급중위 및 중대장으로서 수여.
- 229번째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 1943년 4월 14일, 제2 슈투카 전투비행단 "임멜만" 1중대 상급중위 및 중대장으로서 수여.
- 42번째 곡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 1943년 11월 25일, 제2 슈투카 전투비행단 "임멜만" 3대대 대위 및 대대장으로서 수여.
- 10번째 곡엽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 1944년 3월 29일, 제2 전투비행단 "임멜만" 3대대 소령 및 대대장으로서 수여.
- 유일한 황금 곡엽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 1944년 12월 29일, 제2 전투비행단 "임멜만" 중령 및 비행단장으로서 수여. 이 훈장은 나치 독일이 패배하기 4개월 전인 1945년 1월 1일,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수여했다.
- 금 다이아몬드 조종사/관측사 배지
- 금 전상장
- 금 독일 십자 훈장
- 금 다이아몬드 공군 전선 비행장 (2,000회 임무 배지 부착)
- 국방군 장기근속상 4급
- 주데텐란트 메달
- 동부 전선 메달
- 군사 용맹 은메달 (이탈리아)
- 8번째 (최초이자 유일한 외국인) 헝가리 용맹 금메달: 1945년 1월 14일.

2.5. 부상 및 복귀
1945년 2월 8일, 루델은 우측 발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의 무전병이 비행 지시를 외치는 가운데 독일군 전선 내부에 착륙했다. 루델의 다리는 무릎 아래로 절단되었다. 그는 1945년 3월 25일에 다시 비행에 복귀했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26대의 전차를 더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2.6. 최종 비행 및 항복
1945년 5월 7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들은 루델은 남은 항공 부대를 이끌고 소련군 포위망을 벗어나 서쪽의 미군 점령지로 향했다. 그는 바이엘른주 키칭겐에 있는 미국 육군 항공대 제405 전투대대 기지에 착륙하여 항복했다. 이는 Ju 87의 마지막 비행으로 알려져 있다. 루델의 최종 비행에 함께한 항공기와 탑승원은 다음과 같다.
기체명 | 기체 번호 | 기체 마킹 | 소속 부대 | 탑승원 |
---|---|---|---|---|
Ju87G-2 | 494 110 | <- + - (흑색) | 제2 지상 공격 항공단 본부 소대 | 한스 울리히 루델 대령 (조종사)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니어만 대위 (후방 기관총 사수) |
Ju87D-5 | 불명 | T6 + VU (색상 불명) | 제2 지상 공격 항공단 제10 비행중대 | 한스 슈비르블라트 중위 (Hans Schwirblat, 조종사) 일명 "루델의 그림자"로 불린 조종사. 왼쪽 다리가 의족이었다. 출격 횟수 831회,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1944년 7월 20일) 불명 (후방 기관총 사수) |
Ju87D-5 | 불명 | T6 + TU (색상 불명) | 제2 지상 공격 항공단 제10 비행중대 | 일등상사 (이름 불명) 이등상사 (이름 불명) 민간인 여성 |
Fw190A-8 | 171 189 | << + - (흑색) | 제2 지상 공격 항공단 제II 비행대대 본부 소대 | 카를 케넬 소령 (Karl Kennel) ※제II 비행대대장, 출격 횟수 957회, 격추 34기,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1944년 11월 25일) |
Fw190A-6 | 550 503 | 2 + - (백색) | 제2 지상 공격 항공단 제4 비행중대 | 불명 |
Fw190F-8 | 585 584 | 9 + - (백색) | 제2 지상 공격 항공단 제4 비행중대 | 불명 |
Fw190F-8 | 583 234 | 12 + - (백색) | 제2 지상 공격 항공단 제4 비행중대 | 불명 |
Fw190A 또는 F | 불명 | 5 + - (흑색) | 제103 지상 공격 항공단 제II 비행대대 | 쿠르트 라우 대위 (Kurt Lau) ※제103 지상 공격 항공단 제II 비행대대장, 출격 횟수 897회, 전차 격파 약 80대, 격추 2기,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1944년 6월 4일) |
이 외에도 Fw 190 중 한 대(아마도 585 584호기)에 한 명이 더 탑승하고 있었다. 총 6명의 장교, 6명의 부사관, 1명의 민간인이 탈출에 동행했다. 루델 일행은 미군이 이 항공기들을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착륙 시 의도적으로 주착륙장치를 부러뜨렸다(Ju87D-5: T6 + TU기는 민간인 여성을 동승시켰기 때문에 정상 착륙했다).
2.7. 군 경력 요약
루델은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에서 총 2,530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이 중 대부분은 융커스 Ju 87을 조종하며 이루어졌으며, 430회는 포케불프 Fw 190의 지상 공격형으로 비행했다. 그는 519대의 전차를 파괴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전함 마라트를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순양함(미완성 및 심하게 손상된 페트로파블롭스크), 구축함(민스크) 및 70척의 상륙정을 격침시켰다. 루델은 또한 모든 유형의 차량 800대 이상, 150개 이상의 포병, 대전차 또는 대공 진지, 4대의 장갑열차, 수많은 교량과 보급선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9회의 공중전 승리(전투기 7대, 일류신 Il-2 2대)도 기록했다. 그는 대공포에 의해 30번 격추되거나 불시착했으며, 5번 부상당했고, 적진에 고립된 6명의 승무원을 구출했다.
1976년, 루델은 A-10 선더볼트 II의 지속적인 개발의 일환으로 미국군 및 국방 산업 관계자들과 함께 미국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루델은 고도로 훈장을 받은 공격기 조종사로서, 특히 공중에서 소련 전차를 파괴한 경험이 NATO와 바르샤바 조약 간의 잠재적 충돌에 관련성이 있다고 여겨졌다.
3. 전후 활동 및 신나치주의
루델은 전쟁 후에도 자신의 나치 이념을 뉘우치지 않았으며, 신나치주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3.1. 남미에서의 활동
루델은 1946년 4월에 풀려난 후 개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1948년, 그는 쥐구멍 라인을 통해 오스트리아 칠레르탈을 거쳐 이탈리아로 이동한 뒤,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다. 로마에서는 남티롤 밀수업자들의 도움과 오스트리아 주교 알로이스 후달의 지원을 받아 "에밀리오 마이어"라는 가명으로 위조 적십자 여권을 구입하고, 1948년 6월 8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후, 루델은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과 파라과이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의 친한 친구이자 측근이 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나치 전범들을 위한 구호 단체인 "카메라덴베르크"(Kameradenwerk독일어, '동지들의 기관'이라는 뜻)를 설립했다. "카메라덴베르크"의 저명한 회원으로는 전쟁 범죄 혐의로 소련이 스웨덴에 인도를 요구했던 친위대 장교 루드비히 리엔하르트, 크라스노다르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로 10년 형을 선고받은 게슈타포 대원 쿠르트 크리스트만, 오스트리아 전쟁 범죄자 프리돌린 구트, 칠레 주재 독일 스파이 아우구스트 지브레히트 등이 있었다. 이 단체는 안테 파벨리치, 카를로 스코르차와 같은 국제적으로 수배된 다른 파시스트들과도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다. 아르헨티나로 도피한 이들 전쟁 범죄자들 외에도, "카메라덴베르크"는 루돌프 헤스와 카를 되니츠를 포함하여 유럽에 수감된 나치 범죄자들에게 아르헨티나에서 식량 소포를 보내거나 때로는 법률 비용을 지불하여 지원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루델은 악명 높은 나치 강제 수용소 의사이자 전쟁 범죄자인 요제프 멩겔레와 친분을 맺었다. 루델은 전 무장친위대 대원이자 국방군 종군 기자였던 빌렘 자센(처음에는 루델의 운전사로 일했다)과 함께 멩겔레를 나치 지지자 볼프강 게르하르트에게 소개하여 브라질로 재배치하는 것을 도왔다. 1957년, 루델과 멩겔레는 이동식 가스실의 발명가인 발터 라우프를 만나기 위해 함께 칠레로 여행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루델은 인구 밀집 도시 코르도바에서 약 36 km 떨어진 비야 카를로스 파스에 거주하며 집을 임대하고 벽돌공장을 운영했다. 그곳에서 루델은 자신의 전쟁 회고록인 트로츠뎀(Trotzdem독일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을 집필했다. 이 책은 1949년 11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뒤러-페를라크에서 출판되었다. 뒤러-페를라크(1947~1958)는 전직 나치와 그 협력자들의 다양한 변명 서적을 발행했다. 루델 외에도 초기 편집자 중에는 괴벨스의 개인 언론 부관이었던 빌프레드 폰 오븐과 나우만 등이 있었다. 자센은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공유하도록 설득했다. 전직 히틀러 청소년단 지도자였던 에버하르트 프리치와 함께 자센은 1956년에 아이히만을 인터뷰하여 그의 견해를 출판할 의도로 작업했다. 뒤러-페를라크는 1958년에 파산했다.
이 책이 서독에서 출판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루델은 이 책에서 나치 정책을 지지했다. 냉전이 심화되면서 이 책은 나중에 미국에서 슈투카 조종사(Stuka Pilot영어)라는 제목으로 재편집되어 출판되었으며, 소련 침공에 대한 독일의 입장을 옹호했다. 프랑스 전투기 조종사 피에르 클로스터만은 루델과 친구가 되어 그의 책 슈투카 조종사 프랑스어판 서문을 썼고, 영국 공군 에이스 더글러스 베이더는 영어판 서문을 썼다. 1951년, 그는 돌히슈토스 오더 레겐데?(Dolchstoß oder Legende?독일어, "배신 또는 전설?")라는 소책자를 출판했는데, 여기서 그는 "소련에 대한 독일의 전쟁은 방어 전쟁이었으며, 나아가 전 세계를 위한 십자군이었다"고 주장했다. 1950년대에 루델은 힌두교와 나치즘의 지지자이자 작가인 사비트리 데비와 친구가 되어 그녀를 스페인과 중동의 여러 나치 도피자들에게 소개했다.
페론의 도움으로 루델은 브라질 군대와 유리한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또한 볼리비아 정권,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파라과이의 스트로에스너를 위한 군사 고문 및 무기상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전 나치 독일 괴벨스 공공계몽선전부의 국무장관이었던 베르너 나우만과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1955년 페론의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끝낸 군사 및 민간 봉기인 리베르타도라 혁명 이후, 루델은 아르헨티나를 떠나 파라과이로 이주해야 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남미에서 루델은 잘츠기터 AG, 도르니에르 항공기 제작소, 포케불프, 메서슈미트, 지멘스 및 독일 컨설팅 엔지니어링 회사인 라하이메르 인터내셔널을 포함한 여러 독일 기업의 해외 대표로 자주 활동했다.
역사가 페터 함머슈미트의 주장에 따르면, 독일 연방정보국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파일에 근거하여, BND는 위장 회사 "메렉스"를 통해 전직 친위대 및 나치당원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1966년, 전직 국방군 소장이자 BND 요원인 발터 드뤼크가 대표로 있는 메렉스는 루델과 자센이 구축한 연락망의 도움을 받아 독일 연방군의 폐기 장비를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독재자들에게 판매했다. 함머슈미트에 따르면, 루델은 메렉스와 전직 국가보안본부 요원이자 베른하르트 작전에 연루된 프리드리히 슈벤드 사이의 연락을 돕기도 했다. 슈벤드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군사 정보 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60년대 초, 루델, 슈벤드, 클라우스 바르비는 "라 에스트레야"(La Estrella스페인어, '별'이라는 뜻)라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라틴 아메리카로 도피한 여러 전직 SS 장교들을 고용했다. 루델은 라 에스트레야를 통해 자신만의 전직 SS 및 국방군 장교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던 오토 스코르체니와도 연락을 취했다.
3.2. 독일 복귀 및 정치 활동
루델은 1953년 서독으로 돌아와 극우 민족주의 정치 정당인 독일 제국당(Deutsche Reichspartei독일어, DRP)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1953년 서독 총선에서 루델은 DRP의 선두 후보였으나 분데스타크에 당선되지 못했다. 디 차이트의 편집장 요제프 뮐러-마라인에 따르면, 루델은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루델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서방 연합군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독일을 지원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뮐러-마라인은 그의 기사를 "루델은 더 이상 비행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1977년, 그는 게르하르트 프라이가 설립한 민족주의 정치 정당인 독일 국민 연합의 대변인이 되었다.
3.3. 주요 스캔들 및 논란
1976년 10월, 루델은 의도치 않게 일련의 사건을 촉발시켰는데, 이는 나중에 루델 스캔들(Rudel-Affäre독일어)로 불리게 되었다. 독일 공군 제51 정찰 비행단(이멜만 비행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을 포함한 부대원들의 재회를 주최했다. 독일 국방부의 국무장관 헤르만 슈미트는 이 행사를 승인했다. 루델이 프라이부르크 근처 브렘가르텐의 독일 공군 기지에서 나치 선전을 퍼뜨릴 것을 우려한 슈미트는 회의가 공군 기지에서 열릴 수 없다고 명령했다. 이 결정 소식은 당시 NATO 제2 연합 전술 공군 사령관이자 전직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조종사였던 발터 크루핀스키 중장에게 전달되었다. 크루핀스키는 게르하르트 림베르크 공군 총감에게 연락하여 회의를 공군 기지에서 허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림베르크는 나중에 크루핀스키의 요청을 확인했고, 회의는 슈미트가 여전히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연방군 부지에서 열렸다. 루델은 회의에 참석하여 자신의 책에 서명하고 몇몇 사인 요청에 응했지만, 어떠한 정치적 발언도 삼갔다.
정기적인 언론 행사에서 슈미트에게 브리핑을 받은 기자들은 크루핀스키와 그의 부관 카를 하인츠 프랑케에게 루델의 참석에 대해 질문했다. 이 인터뷰에서 장군들은 루델의 나치 및 신나치 지지자로서의 과거를 1930년대 독일 공산당 당원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모스크바에서 NKVD 작전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저명한 사회민주당 지도자 헤르베르트 베너의 경력과 비교했다. 베너를 극단주의자라고 부르면서, 그들은 루델을 "가족 은제품이나 다른 어떤 것도 훔치지 않은" 명예로운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발언이 공개되자 사회민주당 소속이었던 게오르크 레버 국방부 장관은 군사법 제50조에 따라 1976년 11월 1일부로 장군들을 조기 퇴역시키도록 명령했다. 레버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기독교 민주연합(CDU) 야당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으며, 이 스캔들은 1978년 초 장관의 후속 퇴임에 기여했다. 1977년 2월 3일, 독일 분데스타크는 이 스캔들과 그 결과에 대해 논의했다. 루델 스캔들은 이후 군사 전통 논의를 촉발시켰고, 한스 아펠 국방부 장관은 1982년 9월 20일 "전통 이해 및 배양 지침"을 도입함으로써 이를 종결시켰다.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1978년 FIFA 월드컵 기간 동안, 루델은 아스코칭가에 있는 독일 국가대표팀 훈련 캠프를 방문했다. 독일 언론은 독일 축구 연맹을 비판했으며, 루델의 방문을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이후 아르헨티나를 통치하던 군사 독재에 대한 동정으로 간주했다. 1958년 FIFA 월드컵 스웨덴 대회 기간 중에도 그는 1958년 6월 8일 말뫼에서 독일 팀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팀 매니저 제프 헤르베르거의 환영을 받았다.
4. 사상 및 이념
루델은 나치즘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였으며,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소련과의 전쟁을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닌, 전 세계를 공산주의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십자군"으로 여겼다. 그의 저서 돌히슈토스 오더 레겐데?(Dolchstoß oder Legende?독일어)에서 그는 히틀러 암살 계획을 비난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생활권을 위한 방어 전쟁이었다고 옹호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은 그의 전후 활동과 신나치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5. 개인적인 삶
루델은 세 번 결혼했다. 1942년 우르술라 베르크만(별명 "하네")과의 첫 결혼에서 한스-울리히와 지그프리트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그들은 1950년에 이혼했다. 데어 슈피겔 뉴스 잡지에 따르면, 이혼 사유 중 하나는 그의 아내가 다이아몬드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포함한 그의 훈장 일부를 미국 수집가에게 팔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녀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기를 거부했다. 1951년 3월 27일, 데어 슈피겔은 우르술라 루델이 자신의 훈장을 팔았다는 것을 부인했으며, 그렇게 할 의도도 없다고 추가로 밝혔다. 루델은 1965년 두 번째 아내인 우르술라 다미슈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 1969년에 셋째 아들 크리스토프가 태어났다. 루델은 1970년 4월 26일 뇌졸중에서 살아남았다. 1977년 두 번째 이혼 후, 그는 우르술라 바스펠트와 결혼했다.
전후 루델은 스포츠 애호가로서 테니스, 수영, 스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알파인 스키에서는 남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또한 등산을 취미로 삼아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 있는 많은 산들을 등반했다. 여기에는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6962 m)도 포함된다(1951년 12월 31일). 또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활화산인 율랴일랴코(6723 m)에도 세 번 등반했다. 첫 등반(1953년 3월 31일)에서는 루델이 활락하여 400 m의 빙벽을 떨어졌지만, 운 좋게도 눈더미에 뛰어들어 경미한 타박상과 멍만 입고 무사했다. 이 첫 등반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후안 페론은 개인적으로 이 업적을 칭송했다. 두 번째 등반에서는 제2 지상 공격 비행단(SG 2)의 전 동료 막스 다인츠(제8 중대 소속, 409회 출격, 루델과 마찬가지로 코르도바 항공 기술 연구소에 근무)와 사진작가 에르빈 노이베르트와 함께 등반했지만, 도중에 노이베르트가 실족사하면서 원정은 중단되었다. 루델은 그로부터 불과 10개월 후에 다시 등반하여 노이베르트의 시신을 수습하여 율랴일랴코 산 정상에 매장했다.
6. 사망 및 장례
루델은 1982년 12월 18일 로젠하임에서 또 다른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1982년 12월 22일 도른하우젠에 묻혔다. 루델의 장례식 중 독일 연방군 F-4 팬텀 두 대가 그의 묘지 위를 저고도 비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른하우젠은 군용기가 정기적으로 비행하는 경로 중간에 위치해 있었고, 독일 연방군 관계자들은 장례식 상공을 의도적으로 비행한 것을 부인했다. 장례식에서 네 명의 조문객이 나치 경례를 하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고, 이들은 나치 상징물 전시를 금지하는 독일 형법 제86a조에 따라 조사를 받았다. 만프레트 뵈르너 국방부 장관은 해당 항공기의 비행이 정상적인 훈련 비행이었다고 발표했다.

7. 평가 및 유산
7.1. 긍정적 평가
루델은 극우 세력과 일부 군사 애호가들 사이에서 그의 군사적 용맹함과 뛰어난 조종 실력으로 인해 높이 평가된다. 페르디난트 쇠르너 원수는 "루델은 혼자서 한 사단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며 루델의 근접항공지원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루델이 자신의 지휘에서 벗어나자 쇠르너는 "(항공 지원 없이) 소총만으로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며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격추왕 피에르 클로스터만은 루델에 대해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그가 우리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전후 루델과 클로스터만은 매우 친한 친구가 되었고, 서로의 집을 자주 방문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클로스터만은 전후 태어난 루델의 아들 크리스토프의 대부가 되었다.
또한 독일 공군의 최고 에이스 에리히 하르트만은 전후 루델의 전적에 대해 "나는 여러 팀에서 싸웠기 때문에 흉내낼 수 있지만, 루델 개인을 흉내낼 수는 없다. 아무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7.2. 비판 및 논란
루델은 그의 나치즘 이념, 전후 활동, 그리고 신나치주의와의 연관성으로 인해 심각한 비판을 받는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존경심을 유지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독일의 '생존권'을 위한 정당한 전쟁으로 옹호했다. 전후에는 요제프 멩겔레와 같은 악명 높은 나치 전범들의 도피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카메라덴베르크와 같은 나치 잔당 구호 조직을 설립하여 이들의 은신과 도피를 지원했다.
서독으로 복귀한 후에도 그는 극우 정당인 독일 제국당과 독일 국민 연합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1976년의 루델 스캔들은 독일군 내부의 전통과 나치 과거 청산 문제에 대한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인정받지만,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나치 이념과 전범 옹호 활동은 그를 역사적으로 비판받는 인물로 만들었다.
8. 영향
루델의 전술적 경험은 군사 항공 전술에 영향을 미쳤다. 1976년, 그는 A-10 선더볼트 II의 개발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열린 대전차 전투 세미나에 참석했다. 루델은 고도로 훈장을 받은 공격기 조종사로서, 특히 공중에서 소련 전차를 파괴한 경험이 NATO와 바르샤바 조약 간의 잠재적 충돌에 관련성이 있다고 여겨졌다.
또한 그는 극우 및 신나치주의 운동에 대한 상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군사적 영웅 이미지는 전후에도 극우 세력에 의해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이는 독일 사회 내에서 과거사 청산과 군사 전통에 대한 논쟁을 지속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9. 저술 및 출판물
루델은 자신의 경험과 이념을 담은 여러 책과 소책자를 저술하거나 공동 저술했다.
- 우리는 재무장에 대한 일선 병사들의 의견: (Wir Frontsoldaten zur Wiederaufrüstung독일어), 뒤러-페를라크, 1951.
- 배신 또는 전설?: (Dolchstoß oder Legende?독일어), 뒤러-페를라크, 1951.
- 제국에 관한 것: (Es geht um das Reich독일어), 뒤러-페를라크, 1952.
- 그럼에도 불구하고: (Trotzdem독일어), 뒤러-페를라크, 1949 (재판본은 1966년 출판). 영어판은 슈투카 조종사(Stuka Pilot영어)라는 제목으로 1958년 발렌타인 북스에서 출판되었다.
- 한스-울리히 루델-슈투카 조종사의 기록-나의 전쟁 일기: (Hans-Ulrich Rudel-Aufzeichnungen eines Stukafliegers-Mein Kriegstagebuch독일어), ARNDT-페를라크, 2001.
- 전쟁과 평화 속 나의 삶: (Mein Leben in Krieg und Frieden독일어), 도이체 페를라크스게젤샤프트, 1994.
10. 주변 인물 및 일화
10.1. 주요 동료 및 상사
루델의 슈투카는 2인승 항공기로, 후방석에는 기관총 사수가 탑승했다. 루델의 저서 급강하 폭격에 따르면, 그의 슈투카에 탑승했던 기관총 사수 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총 5명이다. 이들은 제2 급강하 폭격 항공단에 소속된 이후의 인물들로, 사실상 루델의 '동료'라고 할 수 있다.
- 알프레트 샤르노프스키(Alfred Scharnowski독일어): 1941년 9월 23일 전함 마라트 공격 당시까지 루델의 기관총 사수였다. 루델이 소속된 대대에서 최연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침착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키로프급 순양함 '키로프' 공격 명령이 내려졌을 때, 루델의 대대장기가 고장나 루델의 기체를 대대장에게 양보하면서 대대장기의 후방 기관총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격 중 두 사람이 탑승한 기체는 방향타에 직격탄을 맞아 조종 불능 상태가 되었고, 키로프에 충돌하여 추락, 전사했다. 최종 계급은 하사.
- 에르빈 헨첼(Erwin Hentschel독일어): 샤르노프스키의 후임 기관총 사수. 1917년 10월 29일 독일 페클라브루크군 니더탈하임 출생. 최종 출격 횟수 1,480회로, 지상 공격기 승무원 중 루델 다음으로 많은 출격 횟수를 기록했다. 루델과 가장 오랜 기간 함께했으며, 후방 기관총으로 소련군 전투기를 격추하고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 등 탁월한 실력으로 루델의 깊은 신뢰를 받았다. 1944년 3월 20일, 얀폴 다리 파괴 작전 중 공격을 받아 불시착한 신참 동료 2명을 구출하기 위해 착륙했다. 루델의 기체에 태워 이륙하려 했으나 바퀴가 진흙에 빠져 기체를 버리고 4명이 도주했다. 영하에 가까운 수온의 드네스트르강을 헤엄쳐 건너던 중 체력이 고갈되어 익사했으며, 루델은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향년 26세. 최종 계급은 병장.
- 로트만(Rothmann독일어): 헨첼의 후임 기관총 사수. 성은 불명. 기관총 사수 당시 계급은 상사. 원래 Ju 87 정비병이었으며, 정식 기관총 사수는 아니었다. 헨첼이 전사한 1944년 3월 하순은 소련군이 동부 전선 남익 붕괴를 목표로 북쪽에서 드네스트르강을 넘어 루마니아 영내로 진격하는 대공세 시기였으며, 모든 부대가 출격에 바빠 기관총 사수를 쉽게 선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고육지책으로 로트만을 후방석에 태운 것으로 보인다. 실전에서는 20여 대의 P-39에 포위되자 침착함을 잃어 루델에게 "로트만, 어쨌든 쏴라!"(Rothmann, schießen!독일어)는 질책을 여러 번 받았다. 이후 루델의 후방석에서 실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제2 지상 공격 비행단에 정비병으로 계속 소속되어 1944년 12월 사진에는 루델, 가더만과 함께 있는 로트만의 모습이 확인된다. 최종 계급은 불명.
- 에른스트 가더만(Ernst Gadermann독일어): 로트만의 후임 기관총 사수. 출격 횟수 850회를 넘었으며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13년 12월 25일 독일 부퍼탈 출생. 1941년 10월, 군의관으로 제2 급강하 폭격 항공단 제III 비행대대(III./StG2)에 배속되어 당시 중위였던 루델과 만났다. 둘 다 스포츠를 매우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고, 일반 병사들과 섞여 루델과 훈련하는 가더만의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고 한다. 1941년 겨울부터 후방 기관총 사수로 근무하기 시작했지만, 특정 조종사의 전담 기관총 사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후방석으로서의 확실한 기량과 의사로서 필요한 의료 제공 능력으로 모든 조종사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1944년 5월, 친한 친구인 루델이 전담 기관총 사수를 잃자 루델의 기체에 탑승했다. 루델이 우측 다리를 잃은 1945년 2월 9일까지 출격을 수행했다. 2월 9일 이후에도 가더만이 기관총 사수를 맡을 예정이었지만, 루델이 베를린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가더만은 서독 브라운슈바이크에 있었고, 제공권이 장악되고 교통마저 마비된 상황에서 이동이 어려워 결국 전쟁 중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후 미군 포로가 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부퍼탈의 본가로 귀향했다.
가더만은 순환기내과 전문의로, 격추되어 부상당한 루델에게 응급 처치를 하기도 했다. 1945년 2월 8일 루델이 우측 다리를 잃었을 때, 의식을 잃은 루델을 불타는 기체에서 끌어내리고 지혈을 하여 그의 생명을 구했다. 최종 계급은 소령. 2급 철십자 훈장, 1급 철십자 훈장, 독일 황금 십자 훈장(1943년 10월 17일), 기사 철십자 훈장(1944년 8월 17일)을 수여받았다. 전후에는 의사로 활동했으며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의학 교수진의 총책임자를 맡았다. 1973년 11월 26일 함부르크 강연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59세. 소련군 에이스 파일럿 레프 셰스타코프 대령을 후방 기관총으로 격추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셰스타코프가 실종된 1944년 3월 13일은 가더만 착임(1944년 5월) 2개월 전이었고, 당시에는 헨첼이 착임해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루델의 전기에는 이날 가더만이 탑승했다는 기록이 있어, 어떤 이유로 헨첼과 교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루델과 대화하는 가더만의 사진이 남아있다.
- 에른스트 니어만(Ernst-August Niermann독일어): 가더만의 후임 기관총 사수. 원래 제2 지상 공격 비행단에 종군기자로 파견되었으나, 루델의 후방석에 임명되기 전부터 이미 여러 차례 출격을 거듭했던 베테랑이었다. 최종 출격 횟수 600회를 넘었으며 독일 황금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1943년 2월 23일). 루델은 그를 "유쾌한 남자"라고 불렀으며, 미군기의 공습을 받았을 때 방공호에서 뛰쳐나와 본업 못지않은 영상을 찍는 등 비범한 담력의 소유자였다. 루델의 기체에는 1945년 3월 31일 후방 기관총 사수로 착임했다. 루델의 마지막 출격인 5월 7일에도 후방석에 있었으며, 키칭겐에서 루델 등과 함께 미군에 항복했다. 이후 포로 생활에서도 항상 루델과 함께 있었지만, 일개 군사 보도원이었기 때문에 루델보다 먼저 석방되었다. 전후에는 루델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건너가는 등, 부대 해산 후에도 계속 행동을 함께했다. 최종 계급은 대위.
- 에른스트 슈테인(Ernst-Siegfried Steen독일어): 루델에게 스승과 같은 인물. 1912년 9월 25일 독일 킬 출생. 라팔로 조약에 따라 소련에서 항공 훈련을 받았고, 1935년 재무장과 함께 루프트바페에 입대했다. 프랑스 전역에서는 중위로 제2 급강하 폭격 항공단에 소속되어 전투에 참여했다. 급강하 폭격에 비범한 재능을 보여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는 1.52 만 t의 영국 함선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1941년 8월 1일, 제2 급강하 폭격 항공단 제III 비행대대(III./StG 2) 지휘관으로 착임했다. 이날, 이전에 루델을 눈여겨보던 슈테인은 루델이 제III 비행대대로 전속해 오면서 전투 경험이 적은 루델에게 급강하 폭격의 비결을 가르쳤다. 그러나 9월 23일, 그의 300번째 출격이던 이날, 2번기 루델이 특훈의 성과를 보여주며 마라트를 격침시켰지만, 슈테인은 같은 날 키로프 공격에서 샤르노프스키와 함께 전사했다. 슈테인은 전사 후 동부 전선에 참전한 슈투카 조종사 중 최초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1941년 10월 17일). 향년 28세. 최종 계급은 대위.
슈테인은 경험 많은 동료들에게 뒤처진다고 느끼던 루델에게도 차별 없이 대했으며, 부대에서도 인덕자로 유명했다. 루델은 항상 슈테인을 따랐고, 함께 숲을 산책하는 등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슈테인에 대해 "진정 위대한 인간"이라고 말했으며, "나의 이후 공적은 슈테인에게 빚진 바가 크다"고 존경심을 담아 저서에 기술했다.
- 프리드리히 "프리들린" 베커(Friedrich Becker독일어): 루델의 동료이자, 루델이 제2 급강하 폭격 항공단 제III 비행대대 지휘관이 된 이후부터 항상 참모 역할을 하며 루델을 지지했던 인물이다. 루델은 그를 '제III 대대원의 어머니 같은 인물'이라고 표현했으며,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항상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루델과 베커는 친한 친구였으며, 부대원들 모두에게 "프리들린"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베커는 1943년 5월 1일 대위로 제2 급강하 폭격 항공단 제III 비행대대 부관에 임명되었고, 1944년 4월 1일에는 소령이 되었다. 1945년 4월에는 제2 지상 공격 비행단 본부 소속 참모 장교로 비행단 부관으로 승진하여 부사령관으로서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이후에도 베커는 부대와 행동을 함께하며 루델과 니어만과 함께 종전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패주 중인 지상 부대를 지휘하여 서쪽의 영미군 점령지를 향하던 중, 체코에서 소련군과 현지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최종 계급은 소령.
- 헬무트 피켈(Helmut Fickel독일어): 루델의 부관이자, 전투 시에는 루델의 2번기(僚機)로 출격했던 조종사이다. 1921년 11월 27일 독일 튀링겐주 슈말칼덴-마이닝겐 출생. 1940년 1월 10일 징집되어 항공 학교에 보내진 피켈은 1943년 2월 제2 급강하 폭격 항공단 제III 비행대대 제8중대(8./III./SG2)에 배속되었다. 1943년 3월 10일 폴타바 근교에서 첫 출격을 했다. 그리고 1943년 10월 15일부터 1944년 여름까지 피켈은 루델의 부관이자 윙맨으로서 500회 이상의 임무에 출격했다. 또한 피켈은 루델과 단 두 대의 기체로 대전차 공격에 자주 출격하여 대부분 성공했기 때문에 대대에서 유명한 존재였다. 1943년 말까지 가장 재능 있는 슈투카 조종사 중 한 명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44년 11월 제2 지상 공격 비행단 제III 비행대대 제9중대(9./III./SG2)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종전까지 중대 지휘관으로 전투를 계속했다. 1944년 여름, 그의 기체는 대공포에 피격되어 소련군 전선에 불시착했다. 그러나 피켈과 그의 통신사는 적의 포화를 뚫고 착륙한 루델에 의해 구출되었다. 전쟁 중 피켈은 3번 격추되었지만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또한 그 중 2번은 전장에 강행 착륙한 루델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800회 이상의 출격 횟수를 기록했으며, 1945년 5월 영국군 포로가 되어 종전을 맞았다. 기사 철십자 훈장(1944년 6월 9일, 550회 출격으로)을 수여받았는데, 이때 훈장을 수여한 사람은 루델이었다. 전후에는 행복한 노년을 보내다 2005년 4월 6일 사망했다. 최종 계급은 중위.
10.2. 일화
- 대공포에 의해 우측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을 때 "왼쪽 다리가 남아있으니 아무래도 좋다! 그보다 이 조국의 위기 상황에 출격할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고 한탄한 끝에, 전치 6개월 진단을 받았음에도 의족을 착용하고 6주 만에 병원에서 탈출하여 서류를 위조하고 출격했다. 그러나 파괴자 불명의 전차가 너무 많아 곧 발각되었다.
- 독일의 항복 소식을 들었을 때 "아아, 독일은 졌는가..."라며 의기소침해져 귀환했다. 그 도중 소련 전투기를 발견하자 "어제와 오늘 사이에 그렇게 갑자기 할 일이 바뀔 리가 없다"며 격추했다.
- 시간이 지남에 따라 히틀러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점, 전직 국방군 장교일 뿐만 아니라 강연회에서 아무런 정치적 고려 없이 "제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의 생존권을 위한 전쟁"이라고 옹호하며 당시 이미 독일 사회의 공통 인식이 아니었던 국방군 신화를 전개하는 등, 점차 기피 대상처럼 취급받게 되었다.
- 인터넷 등에서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를 명목상으로 '소련 인민 최대의 적'이라고 평가하며 십만 러시아 루블(10.00 만 RUB)의 현상금을 걸었다는 출처 불명의 도시전설이 퍼져 있다. 이러한 도시전설은 적어도 2003년경에는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1971년 슈투카 앳 워(Stuka at war영어)에서는 저자 피터 C. 스미스가 루델의 활약을 평가하며 "총통이 직접 그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훈장과 소련에서 '인민의 적 1호'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문장이 있는데, 이것이 도시전설의 근원인 것으로 보이나, 스탈린이 그를 명목상으로 그렇게 불렀다는 기록은 없다.
11. 관련 항목
- 융커스 Ju 87
- 루델 스캔들
12. 외부 링크
- [https://portal.dnb.de/opac.htm?method=showFullRecord&id=118603655 독일 국립도서관 카탈로그의 한스 울리히 루델]
- [http://www.foia.cia.gov/sites/default/files/document_conversions/1705143/RUDEL,%20HANS_0118.pdf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한스 루델 문서]
- [http://www.spiegel.de/spiegel/print/d-13682067.html 데어 슈피겔, "달의 어두운 면" (1992년 12호)]
- [https://pm20.zbw.eu/folder/pe/015111 ZBW 20세기 언론 아카이브의 한스 울리히 루델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