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윌리엄 댐피어(William Dampier영어, 1651년 ~ 1715년)는 영국의 복합적인 인물로, 탐험가이자 해적, 사략선 선장, 항해가, 박물학자, 그리고 작가였다. 그는 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로 알려진 지역과 뉴기니섬의 일부를 탐험한 최초의 영국인이며, 또한 세계 일주를 세 번 완수한 최초의 인물이다. 댐피어는 16세기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과 18세기 제임스 쿡 선장 사이의 탐험가 시대를 잇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전자의 해적 같은 과감함과 후자의 과학적 탐구 정신을 겸비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호주의 첫 자연사학자로도 불린다.
댐피어의 탐험은 여러 식물, 동물, 음식, 조리법을 유럽 대중에게 처음으로 알리고 이름을 붙이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아보카도', '바비큐', '젓가락' 같은 단어를 영어로 처음 사용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아보카도를 이용한 과카몰리 제조법을 최초로 묘사했으며, 빵나무 식물에 이름을 붙이고, 홍학이나 매너티와 같이 당시 유럽인에게 생소했던 많은 음식의 맛을 기록했다. 그의 저서 《새로운 세계 일주 항해》가 영국 해군성의 주목을 받으면서, 댐피어는 영국 해군 함선 지휘를 맡아 서호주에서 중요한 발견을 했으나, 부하 학대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항해에서는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 동료 알렉산더 셀커크를 구출하기도 했다. 그의 영향은 조지 앤슨, 제임스 쿡, 호레이쇼 넬슨, 찰스 다윈,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등 여러 저명한 인물들에게 미쳤다.
2. 생애 초기
윌리엄 댐피어는 1651년 서머싯주 이스트 코커의 하이머퍼드 하우스에서 태어나 그해 9월 5일 세례를 받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학업을 중단했으며, 브루턴 킹스 스쿨에서 교육받았다. 16세에 선원이 되어, 뉴펀들랜드와 자바섬으로 향하는 두 번의 상선 항해에 참여했다. 1673년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같은 해 6월에 벌어진 두 차례의 스쿠네벨트 해전에 참전했다.
이후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군 복무를 중단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몇 달간 요양했다. 회복 후에는 자메이카의 농장 관리인과 멕시코 캄페체만에서의 벌목꾼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이 시기 그는 캄페체 지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서 《캄페체 항해》를 집필하기도 했다. 1676년에는 폭풍으로 인해 무일푼이 된 후 해적 무리에 합류했는데, 이 폭풍 경험은 훗날 그의 저서 《바람에 대한 담론》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다. 1678년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1679년경 주디스와 결혼했지만 몇 달 후 다시 바다로 떠났다.
3. 제1차 세계 일주 (1679년-1691년)
댐피어의 첫 번째 세계 일주는 주로 해적 및 사략 활동에 참여하며 이루어졌다.

1679년, 댐피어는 바솔로뮤 샤프 선장의 버캐니어 선원(해적)이 되어 중앙아메리카의 스패니시 메인을 따라 항해하며, 멕시코 북부 해안의 캄페체만을 두 차례 방문했다. 이 항해가 그의 첫 번째 세계 일주로 이어졌다. 그는 파나마의 다리엔 지협을 가로지르는 습격에 참여하여 태평양 연안에서 스페인 선박을 나포했다. 해적들은 이후 페루의 스페인 정착촌을 약탈했지만, 스페인 측이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점차 수익이 감소했다. 아리카 시에 대한 습격이 실패한 후, 댐피어를 포함한 버캐니어 무리의 일부는 1681년 4월에 그룹을 떠나 다시 다리엔 지협을 건넜다. 나머지 일행은 같은 해 11월 혼곶을 돌아 항해를 계속했다.
댐피어는 버지니아 식민지로 가서 1683년 사략선 선장 존 쿡에게 고용되었다. 쿡은 혼곶을 통해 태평양으로 진입하여 1년 동안 페루, 갈라파고스 제도, 멕시코 등 스페인 영지를 약탈했다. 이 원정은 항해를 지속하면서 버캐니어들과 선박들을 계속 합류시켜 한때 10척의 함대를 이루기도 했다. 훗날 자신도 세계 일주 기록을 남긴 버캐니어 중 한 명인 앰브로즈 카울리는 이 시기에 갈라파고스 제도의 첫 지도를 제작했다. 쿡이 멕시코에서 사망하자, 선원들은 에드워드 데이비스를 새 선장으로 선출하여 '배첼러스 딜라이트(Batchelor's Delight)' 호를 이끌었으며, 미래의 선장 조지 레이너도 선원으로 참여했다.

댐피어는 사략선 선장 찰스 스완의 배 '시그넷(Cygnet)' 호로 옮겨 탔고, 1686년 3월 31일, 그들은 동인도 제도를 습격하기 위해 태평양을 가로질러 괌과 필리핀의 민다나오섬에 기항했다. 스페인 목격자들은 대부분 영국인으로 구성된 이 선원들을 해적이자 이단자이며 심지어 식인종으로 여겼다. 민다나오에 스완과 36명의 다른 선원들을 남겨둔 채, 존 리드 신임 선장 지휘하의 나머지 사략선원들은 마닐라, 현대 베트남의 콘손 제도, 중국, 향료 제도, 그리고 뉴홀랜드 (오스트레일리아)로 항해를 계속했다. 댐피어는 이 항해 중 실제 해적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훗날 주장했지만, 사실 그는 1687년 마닐라 앞바다에서 '시그넷' 호 선원들에게 나포된 스페인 선박 중 한 척의 지휘를 맡기도 했다.
1688년 1월 5일, '시그넷' 호는 호주 북서부 해안 킹 사운드 근처 '29패덤 깊이에서 해안에서 2마일 떨어진 곳'에 정박했다. 댐피어와 그의 배는 3월 12일까지 그곳에 머물렀고, 배가 수리되는 동안 댐피어는 그곳에서 발견한 동물상과 식물상, 그리고 원주민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댐피어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을 자신이 본 "가장 비참한(miserablest)" 사람들이며 "야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기록했다. 그의 동료 중에는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출신의 알론소 라미레즈를 비롯한 상당수의 스페인 선원들이 있었는데, 라미레즈는 훗날 또 다른 해적인 던컨 매킨토시에게 투옥된 후 풀려났다. 그해 말, 합의에 따라 댐피어와 두 명의 선원들은 니코바르 제도 중 한 곳에 버려졌다. 그들은 작은 카누를 얻어 처음에는 뒤집어졌으나 개조하여 사용했고, 이후 바다에서 큰 폭풍우를 견뎌낸 뒤 수마트라의 아체에 도착했다.

댐피어는 1691년 희망봉을 경유하여 영국으로 귀환했는데, 무일푼이었고 소지품은 자신의 일지와 문신을 한 노예 지올리(Jeoly)뿐이었다. 원래 미앙가스섬 출신인 지올리와 그의 어머니는 노예 상인들에게 붙잡혀 민다나오로 끌려갔다. 그들은 무디라는 사람에게 60 USD에 팔렸고, 이후 소유권이 댐피어에게 넘어갔다. 지올리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지올리는 슬픔을 금치 못하고 죽은 어머니의 옷에 몸을 감쌌다. 댐피어는 일기에서 자신이 지올리와 가까워졌다고 주장했지만, 바다에서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지올리를 플리트 스트리트의 '블루 보어 인'에 팔았다. 지올리는 대중에게 "왕자"로 전시되었으나, 세 달 뒤 천연두로 사망했다. 이후 문신을 한 외국인에 대한 수많은 거짓 이야기들이 쓰였고, 그중에는 그가 '지올리 왕자'라는 칭호도 포함되었다.
4. 로벅 호 원정 (1699년-1701년)
로벅 호 원정은 윌리엄 댐피어가 영국 해군성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공식적인 탐험이었다.

1697년 윌리엄 댐피어의 저서 《새로운 세계 일주 항해》가 출판되자 엄청난 인기를 끌며 영국 해군성의 관심을 받았다. 1699년 댐피어는 윌리엄 3세 국왕으로부터 26문 전함 HMS 로벅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그의 임무는 네덜란드인들이 현재의 오스트레일리아를 지칭했던 뉴홀랜드의 동부 해안을 탐험하는 것이었으며, 댐피어는 혼곶을 통해 그곳으로 항해할 계획이었다.
원정대는 1699년 1월 14일 출항했지만, 혼곶을 시도하기에는 너무 늦은 계절이어서 대신 희망봉을 경유하여 뉴홀랜드로 향했다. 동인도 제도로 향하는 네덜란드의 항로를 따라 댐피어는 더크 하토그섬과 서호주 본토 사이를 지나 1699년 8월 6일 자신이 샤크만이라고 명명한 곳에 도착했다. 그는 상륙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동식물에 대한 최초의 상세한 기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식물 그림들은 그의 서기인 제임스 브랜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댐피어는 이후 해안을 북동쪽으로 따라 항해하며 댐피어 군도와 현재 로벅만 남쪽에 위치한 라그랑주만에 도달했고, 이 모든 과정에서 많은 조개를 포함한 표본들을 기록하고 수집했다. 그곳에서 그는 티모르섬으로 북쪽으로 항해했다.

이어 동쪽으로 항해하여 1699년 12월 3일 뉴기니섬을 돌아 북쪽으로 통과했다. 그는 뉴하노버섬, 뉴아일랜드섬, 뉴브리튼섬의 남동부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이 섬들(현 비스마르크 제도)과 뉴기니섬 사이의 댐피어 해협을 해도에 기록했다. 도중에 그는 대왕조개와 같은 표본을 채집하기 위해 잠시 멈추기도 했다.
이때쯤 로벅 호는 상태가 너무 나빠져 댐피어는 뉴홀랜드 동부 해안을 탐사하려던 계획을 그곳에서 100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침몰 위험에 처하자 그는 영국으로 귀환 항해를 시도했지만, 1701년 2월 21일 어센션섬에서 배가 침몰했다. 해안에 정박해 있던 배는 계속해서 물이 들어왔고, 목수는 선박충이 먹은 판자를 고칠 수 없었다. 결국 배는 좌초될 수밖에 없었다. 댐피어의 선원들은 5주 동안 그곳에 고립되어 있다가 4월 3일 동인도회사 상선에 의해 구조되어 1701년 8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로벅 호와 함께 많은 서류가 유실되었지만, 댐피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 주변 해역의 무역풍과 해류 기록뿐만 아니라 몇몇 새로운 해안선 해도도 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몇몇 표본도 보존할 수 있었다. 많은 식물 표본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필딩-드루스 식물표본관에 기증되었고, 1999년 9월에는 3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서호주로 대여되었다.
2001년, 로벅 호의 난파선은 서호주 해양 박물관 팀에 의해 어센션섬 클래런스만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광범위한 영향력과 현재 그와 연관될 수 있는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어센션섬 현장에 남아 있는 그의 배의 잔해와 유물들이 영국 소유이자 섬 정부의 관리 대상이지만, 사실상 그가 처음 방문했거나 묘사한 세계 여러 지역의 공동 해양 유산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 원정에 대한 그의 기록은 1703년 《뉴홀랜드 항해》로 출판되었다.
5. 군사재판
로벅 호 원정 후 윌리엄 댐피어는 부하 학대 혐의로 기소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다.
로벅 호 원정에서 돌아온 후, 댐피어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학대 혐의로 기소되었다. 원정 항해 도중 댐피어는 그의 일등 항해사 조지 피셔를 선박에서 하선시켜 브라질에 투옥시킨 바 있었다. 피셔는 영국으로 돌아와 영국 해군성에 자신의 대우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댐피어는 자신의 행동을 강력하게 변호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해당 항해의 급여가 삭감되었고, 영국 해군에서 해고되었다.
영국 국립 문서보관소의 기록에 따르면, 1702년 6월 8일 열린 군사재판에는 다음 세 가지 혐의가 포함되었다.
혐의 대상 | 혐의 내용 | 판결 | 선고 |
---|---|---|---|
HMS 로벅 선장 윌리엄 댐피어 | 보조항해사 존 노우드(John Norwood)의 사망 | 무죄 | 없음 |
HMS 로벅 선장 윌리엄 댐피어 | 부하인 항해사에게 가혹하고 잔인한 대우 | 유죄 |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급여 몰수 및 국왕 폐하의 어떤 함선도 지휘할 자격이 없다고 판결됨 |
HMS 로벅 항해사 조지 피셔 | 선장과 항해사 간의 분쟁 | 무죄 | 없음 |
6. 제2차 세계 일주 (1703년-1707년)
군사재판 이후 댐피어는 다시 사략선 활동으로 복귀하여 두 번째 세계 일주를 시도했다.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사략선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이권에 맞서기 위해 준비되었다. 댐피어는 120명의 선원이 탑승한 26문 함선 '세인트 조지 호'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63명의 선원이 탑승한 16문 함선 '싱크포츠 호'와 합류하여 1703년 9월 11일 아일랜드 킨세일을 출항했다. 두 선박은 폭풍우 속에서 혼곶을 돌아 1704년 2월 칠레 해안의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물과 보급품을 싣는 동안, 그들은 중무장한 프랑스 상선을 발견하여 7시간 동안 교전했으나 격퇴당했다.
댐피어는 페루 해안을 따라 여러 척의 작은 스페인 선박을 나포하는 데 성공했지만, "더 큰 계획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화물 중 일부만 가져간 후 풀어주었다. 그가 염두에 둔 더 큰 계획은 인근 광산에서 나온 금을 비축하고 있다고 소문난 파나마만의 산타 마리아 마을 습격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끌고 마을로 향한 해병대가 예상외로 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그는 철수했다. 1704년 5월, 싱크포츠 호는 세인트 조지 호와 분리되었다. 싱크포츠 호의 선장 토마스 스트래들링은 배의 항해 적합성에 대해 불평하던 알렉산더 셀커크를 한 섬에 홀로 남겨두었고, 이후 싱크포츠 호는 오늘날 콜롬비아 해안에서 침몰했다. 일부 선원들은 난파에서 살아남았지만 스페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이제 원정의 주요 목표였던 마닐라 갈레온 선 나포는 세인트 조지 호에게 맡겨졌다. 1704년 12월 6일, 마닐라 갈레온 선(아마도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로사리오' 호)이 포착되었다. 갈레온 선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고 포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댐피어와 그의 장교들이 공격 방법에 대해 논쟁하는 동안, 갈레온 선은 대포를 장전했고 전투가 벌어졌다. 세인트 조지 호는 곧 갈레온 선의 18파운드 및 24파운드 대포에 비해 열세에 처했고, 심각한 피해를 입어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갈레온 선 나포 실패로 원정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댐피어는 약 30명의 선원들과 함께 세인트 조지 호에 남았고, 나머지 선원들은 나포한 바르크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의 암보이나로 향했다. 인력이 부족하고 선박충에 의해 손상된 세인트 조지 호는 페루 해안에 버려져야 했다. 댐피어와 남아있는 선원들은 스페인 나포선에 탑승하여 동인도 제도로 향했으나, 그들을 동맹으로 여겼던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해적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풀려났다. 이제 배가 없어진 댐피어는 1707년 말 영국으로 돌아왔다.
7. 제3차 세계 일주 및 사망 (1708년-1715년)
댐피어의 마지막 세계 일주는 성공적인 사략 활동과 동료 알렉산더 셀커크의 구출로 기억되며, 이 항해 후 그의 생애는 알려진 바 없이 마무리된다.
1708년, 댐피어는 선장이 아닌 항해사로서 사략선 '듀크 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듀크 호'는 또 다른 선박 '더치스 호'와 함께 혼곶을 돌아 남태평양으로 나아갔다. 우즈 로저스가 지휘한 이 항해는 이전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1709년 2월 2일, 알렉산더 셀커크가 구출되었고, 원정대는 14.80 만 GBP 상당의 약탈품을 축적했으며, 이는 당시 약 20.00 만 GBP에 달하는 큰 이득이었다. 이 수익의 대부분은 1709년 12월 멕시코 해안에서 스페인 갈레온선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엔카르나시온 이 데센가뇨 호'를 나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1710년 1월, 댐피어는 '듀크 호'를 타고 '더치스 호'와 두 척의 나포선과 함께 태평양을 횡단했다. 그들은 괌에 들렀다가 자카르타의 옛 이름인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바타비아 근처 혼섬에서 수리를 마치고 나포선 중 한 척을 매각한 후, 그들은 희망봉으로 항해하여 3개월 이상을 선단 호위를 기다리며 보냈다. 그들은 영국 선박들과 함께 희망봉을 떠났고, 댐피어는 이제 나포선인 '엔카르나시온' 호의 항해사로 복무했다. 텍셀에서의 추가 지연 후, 그들은 1711년 10월 14일 런던의 템스강에 닻을 내렸다.
댐피어는 원정으로 얻은 이익 중 자신의 몫을 전부 받지 못하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1715년 3월 런던 성 스티븐 콜먼 스트리트 교구에서 사망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날짜와 정황, 그리고 최종 매장지는 모두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성 스티븐 교회에 묻혔을 수도 있지만, 이 건물은 1940년 폭격으로 파괴된 후 재건되지 않았다. 댐피어의 유언장은 1715년 3월 23일에 유효함이 증명되었으므로, 일반적으로 그 달 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의 유산은 거의 2000 GBP의 빚을 지고 있었다.
8. 저작 활동
윌리엄 댐피어는 여러 권의 중요한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글은 당시의 지리, 자연사, 인류학 지식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주요 저작물은 다음과 같다.
- 《새로운 세계 일주 항해》 (A New Voyage Round the World영어, 1697년)
- 이 책은 댐피어의 첫 번째 세계 일주 경험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출간 당시 대중적인 큰 인기를 얻었으며 영국 해군성의 주목을 받았다. 평노 경일 역으로 이와나미 쇼텐에서 발행된 일본어판과 이와나미 문고판으로도 출판되었다.
- 《항해와 기록》 (Voyages and Descriptions영어, 1699년)
- 이 책은 여러 짧은 작품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 《세계 일주 항해 보충본》 (A Supplement of the Voyage Round the World영어, 1705년)
- 《캄페체 항해》 (The Campeachy Voyages영어, 1705년)
- 《바람에 대한 담론》 (A Discourse of Winds영어, 1705년)
- 이 책은 그의 초기 해적 생활 경험과 폭풍우를 견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기상학적 관찰 기록이다.
- 이 책은 여러 짧은 작품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 《뉴홀랜드 항해》 (A Voyage to New Holland영어, 1703년 파트 1, 1709년 파트 2)
- 이 책은 댐피어의 로벅 호 원정 동안 뉴홀랜드(호주)와 뉴기니를 탐험하며 기록한 과학적 관찰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글은 문학, 지도 제작, 자연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9. 유산과 영향
윌리엄 댐피어는 항해술, 자연과학, 문학, 언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속적인 유산과 긍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 항해술 및 지도 제작**: 그는 전 세계 해양의 해류, 바람, 조수에 대한 데이터를 최초로 수집했으며, 이는 제임스 쿡과 조지프 뱅크스 같은 후대 항해사들에게 귀중하게 활용되었다.
- 자연과학**: 댐피어의 동식물에 대한 관찰과 분석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찰스 다윈이 자신들의 과학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호주 북서부 지역의 동식물에 대한 그의 기록은 박물학자 조지프 뱅크스에 의해 연구되었고, 이는 쿡의 첫 항해 중 추가 연구로 이어져 보타니 베이의 명명 및 식민지화, 그리고 현대 오스트레일리아의 건국에 기여했다. 그의 관찰은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의 저서 《말레이 군도》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며, 19세기 월리스 자신의 관찰과 비교되기도 했다. 빵나무 식물에 이름을 붙인 것도 그의 업적 중 하나이다.
- 문학**:
- 조나단 스위프트는 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서 댐피어를 레뮤얼 걸리버에 비견할 만한 선원으로 언급하며, 소설 자체는 댐피어의 여행기와 다른 탐험 이야기들을 때때로 패러디하기도 한다.
-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댐피어의 전 동료 알렉산더 셀커크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 댐피어의 빵나무 보고서는 윌리엄 블라이와 바운티 호의 불운한 항해로 이어지기도 했다.
- 댐피어의 《새로운 세계 일주 항해》를 읽었던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그를 "거친 선원이지만, 탁월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렀다. 댐피어의 해양 생물에 대한 관찰은 콜리지가 시 《늙은 뱃사람의 노래》를 쓰는 동안 영감을 얻은 많은 자료 중 하나였다.
-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의 소설 《총독의 가을》에서 댐피어를 언급한다.
- 그의 삶은 1954년 루스 파크의 호주 라디오 연극 《걸리버의 사촌》에서 각색되었으며, 로드 테일러가 댐피어 역을 맡았다.
- 토마토스프의 만화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2019-2023년 연재)과 후지사와 후미오 원작/각본/연출의 음악 낭독극 《엘 갈레온》 (2020년 초연, 댐피어 역 우메하라 유이치로) 등 현대 작품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 언어**: 댐피어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80회 이상 인용되었는데, 특히 '바비큐', '아보카도', '젓가락', '아종'과 같은 단어들에서 두드러진다. 그가 이 단어들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저작물에서 이 단어들이 사용된 것이 영어에서 알려진 첫 번째 사례이다. 그는 또한 과카몰리와 망고 처트니에 대한 최초의 영어 레시피를 기록했다.
- 사회적 영향**: 댐피어의 항해 기록에 나타난 파나마에 대한 묘사는 스코틀랜드의 다리엔 계획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1707년 합동법으로 이어지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10. 비판과 논란
윌리엄 댐피어는 탐험가이자 과학자로서의 중요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과 관련하여 여러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 부하 학대 및 군사재판**: 그는 로벅 호 원정에서 돌아온 후, 자신의 부하인 일등 항해사 조지 피셔를 브라질에 감금한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해군에서 해고되고 급여를 몰수당하는 등 경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는 그의 리더십과 부하에 대한 대우 방식에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 원주민 납치 및 착취**: 댐피어는 미앙가스섬 출신의 지올리(Jeoly)와 그의 어머니를 포함한 원주민을 노예로 사들였고, 이들을 유럽에서 '전시품'이나 '인간 오락물'로 활용하여 이득을 취했다. 특히 문신을 한 지올리 '왕자'를 런던에서 대중에게 전시하다가 그가 천연두로 사망하게 한 사건은 당시에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비인도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로 남아 있다.
- 인종차별적 시각**: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을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 가장 비참한(miserablest)" 사람들이며 "야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기록하는 등, 당시 서구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비롯된 인종차별적이고 우월주의적인 관점을 드러냈다. 이는 그의 과학적 관찰의 가치와는 별개로, 인류학적 관점에서 비판받는 부분이다.
- 해적 활동**: 댐피어는 '해적'이자 '사략선' 선장으로서 활동하며 스페인 선박과 정착촌을 습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해적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나포한 선박의 지휘를 맡는 등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그의 탐험과 과학적 성과와는 상반되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비판점들은 댐피어를 단순히 위대한 탐험가로만 평가하기보다, 당대 시대의 복잡한 도덕적, 윤리적 맥락 속에서 그의 행동을 다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한다.
11. 추모와 명칭
윌리엄 댐피어를 기려 많은 지리적 장소, 천체, 심지어 해군 함선과 우표까지 그의 이름이 명명되었다.
- 지리적 장소**:
- 댐피어: 서호주 필바라 지역의 주요 산업 항구 도시.
- 댐피어 크릭: 서호주 브룸의 로벅만에 위치.
- 댐피어 군도: 서호주에 위치한 군도.
- 댐피어 카운티: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측량구역.
- 댐피어 섬: 댐피어 군도의 일부였으나 1960년대 둑길로 본토와 연결되면서 버럽 반도로 개명.
- 댐피어 랜드 디스트릭트: 서호주의 측량구역.
- 댐피어 반도: 서호주에 위치한 반도.
- 댐피어 해령: 수중 대륙 질랜디아의 일부.
- 댐피어 산: 뉴질랜드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
- 댐피어 해저산: 세인트헬레나섬 연안에 위치.
- 댐피어 해협 (인도네시아).
- 댐피어 해협 (파푸아뉴기니).
- 정치 지명**:
- 댐피어 선거구: 1913년부터 1922년까지 호주 하원의 선거구.
- 천체**:
- 소행성 (14876) 댐피어.
- 선박**:
- HMS 댐피어: 1948년부터 1968년까지 영국 해군에서 복무한 프리깃/측량선.
- 우표**:
- 오스트레일리아 우체국은 1966년과 1985년에 그의 초상화가 새겨진 우표를 발행했다.
- 생물**:
- 호주 자생 꽃 식물 속인 '담피에라속' (Dampiera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