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배경
우에무라 나오미는 농업에 종사하는 가정의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1. 출생 및 유년기
우에무라는 1941년 2월 12일 효고현 기노사키군 고후촌(현 도요오카시 히다카정) 가미노고에서 아버지 우에무라 토지시로와 어머니 우메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4명의 형과 2명의 누나가 있었고, 바로 위 형은 2세에 사망했다. 그의 본가는 농업과 짚으로 엮은 밧줄 제조를 겸했다. '나오미'라는 이름은 할아버지의 3대 전 조상인 '우에무라 나오스케'로부터 '나오(直)' 자를 따고, 십이지의 '사(巳)'를 합쳐 '나오미(直巳)'로 지어졌다. 그러나 면사무소의 호적 담당 직원이 호적부에 실수로 '나오이(直已)'라고 기재하면서 호적명은 '나오이'로 등록되었다. 후에 그는 '사(巳)'나 '이(已)'보다 '오노레(己, 자기)'가 더 멋있다고 생각하여 대학 시절부터 '나오미(直己)'로 스스로를 칭했다. 1947년 4월 고후촌립 후추소학교(현 도요오카시립 후추소학교)에 입학했으며, 1953년 4월 고후촌립 후추중학교(현 도요오카시립 히다카히가시중학교)에 입학했다. 1956년 4월에는 효고현립 도요오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봄 소풍으로 소부다케산(표고 1074 m)에 등반했으나, 이때는 산에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959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4월 도요오카시의 신일본운수(현 폐업)에 취직했다. 그는 스스로 도쿄 료고쿠 지점으로의 전근을 희망했고, 취직 한 달 만에 도쿄로 이동했다. 1960년 2월 신일본운사를 퇴직했다.
1.2. 교육 및 산악부 활동
1960년 4월, 우에무라는 메이지 대학 농학부 농산제조학과에 입학했으며, 동시에 산악부에 입부했다.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등산을 통해 자신감을 키우고 싶다는 바람으로 산악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등산 경험이나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5월 신입생 환영 합숙으로 떠난 일본 알프스 하쿠바다케 산행에서 가장 먼저 지쳐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큰 굴욕감을 느꼈다. 그는 이 경험을 "그렇게 비참한 적은 없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후 우에무라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약 9 km의 산길을 조깅하는 등 독자적인 훈련을 거듭하며 등산에 몰두했고, 한 해에 120~130일 동안 산행을 했다. 또한 가스통 레뷔파의 저서 『별과 폭풍』과 같은 효고현 출신의 가토 분타로의 저서 『단독행』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대학 3학년 겨울에는 구로베 댐에서 출발하여 구로베 협곡의 아소하라 고개 - 북센닌 오네 - 쓰루기다케 북쪽의 이케노타이라 - 겐자와 - 마사고 오네 - 마사고다케 - 지고쿠다니 - 미다가하라 - 센주가하라에 이르는 5일간의 단독 산행을 감행했다. 그는 이 산행을 부리더로서 리더십을 시험하는 과정으로 여겼지만, 이는 산악부에 무단으로 진행된 것이어서 질책을 받기도 했다. 대학 4학년 때는 부리더가 되었다. 산악부 동기이자 친구인 고바야시 마사나오로부터 알래스카 매킨리산의 빙하를 걸었던 이야기를 듣고 해외 산에 대한 동경을 키워나갔다. 학비는 그의 큰형인 우에무라 오사무가 지원해 주었다.
졸업 후에는 대만의 신타카야마(현 위산) 등반을 꿈꿨으나, 비자가 발급되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1964년 3월 메이지 대학 농학부를 졸업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 재입학했다. 이는 해외여행 시 학생 신분인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초기 모험 및 5대륙 최고봉 등정
우에무라는 일본을 떠나 세계 각지에서 독특한 모험을 시작했으며, 특히 5대륙 최고봉 등정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달성했다.
2.1. 해외 방랑의 시작 및 유럽 알프스 등반
1964년, 23세의 우에무라는 유럽 알프스의 빙하를 보기로 결심했으나 자금이 부족했다. 이에 생활수준이 높은 미국에서 먼저 자금을 모은 뒤 유럽으로 가기로 계획했다. 그는 가족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5월 2일 요코하마항에서 이민선 '아르헨티나 마루'에 몸을 싣고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편도 선박 비용은 큰형 우에무라 오사무가 지원했고,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은 막노동 등의 아르바이트로 모은 110 USD(당시 약 4.00 만 JPY)와 일본 돈 3500 JPY이었다.
로스앤젤레스 도착 후,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 근처의 파레아 농장에서 포도 따는 일을 했으나, 관광 비자만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해 9월 말 불법 취업으로 이민국에 붙잡혔다. 그는 영어로 본심을 전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름 외에는 일본어만 반복해서 말했다. 통역으로 온 일본계 미국인에게 등산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일하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 결과, 심사관의 '온정' 조치로 강제 송환은 면했지만, 국외 퇴거 처분을 받았다. 이에 따라 10월 22일 뉴욕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 르아브르로 향했다.
같은 해 10월 말, 샤모니에 도착한 그는 11월 10일 유럽 최고봉인 몽블랑(표고 4807 m) 단독 등정에 도전했다. 3일째 되는 날, 보송 빙하의 숨겨진 크레바스에 떨어졌지만, 아이젠의 발톱이 빙벽에 걸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 경험에 겁을 먹고 그는 등정을 포기했다. 같은 해 말, 스위스 국경 근처의 모르진에 있는 장 뷔아르네가 운영하는 아보리아스 스키장에 취직했다. 그는 스키를 잘 타지 못했지만, 면접 시 "스키를 잘 탄다"고 말하며 스키 타는 흉내를 내어 뷔아르네의 '거짓말'을 간파당했음에도 채용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금을 벌며 등산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1965년, 그는 일시적으로 스키장 일을 중단하고 메이지 대학 산악부의 고준바 캉(초오유 2봉) 등반대(등반대장 타카하시 스스무)에 합류하기 위해 2월 19일 네팔의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3월 31일 베이스캠프를 설치했고, 4월 23일 셰르파 펨바 텐진과 함께 고준바 캉의 세계 초등을 달성했다. 그러나 원정 계획이나 준비 단계에서 고생하지 않은 자신이 등정에 성공하고 일본 신문에 자신만 크게 보도되는 것을 보고 다른 대원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대장 타카하시가 함께 일본으로 귀국하자고 권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 인도 뭄바이에서 프랑스 마르세유행 화물선에 올라 다시 모르진으로 돌아왔으나, 황달에 걸려 한 달간 입원 생활을 했다. 이때 장 뷔아르네가 우에무라를 대신해 입원비를 지불해주었다.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 유료 숙소 대신 로프웨이 종점 근처의 기계실에서 생활했고, 주식은 감자튀김과 빵, 수프였다.
1966년 7월, 몽블랑 단독 등정에 성공했으며, 크레바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키 폴을 허리에 달고 등반했다. 이어서 7월 25일에는 마터호른(표고 4478 m) 단독 등정(이탈리아 쪽 서릉 루트)에도 성공했다. 같은 해 9월 23일, 마르세유에서 케냐 몸바사행 배를 타고 아프리카 등반을 떠났다. 그는 4등 선실에서 생활했는데, "방이라기보다는 감옥에 가깝다"고 기록했다.
10월 16일 케냐산 레나나봉(표고 4985 m)에 등정했으며, 표고 4700 m 이상의 산장까지는 가이드 한 명이 동반했다. 10월 24일에는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인 킬리만자로(표고 5895 m)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 그는 르웬조리산에도 오르고 싶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포기했다. 10월 29일 몸바사에서 배를 타고 모르진으로 돌아왔다.
1967년 8월, 그린란드 단독 횡단을 꿈꾸며 야코브스하운 빙하를 보름간 시찰했다. 그는 에스키모와 함께 생활하고 싶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소카토푼 마을 외곽에서 텐트 생활을 했다. 하지만 1968년 일본 대학대가 그린란드 횡단을 달성하면서 그의 꿈은 좌절되었다. 같은 해 12월 모르진을 떠나 12월 22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남아메리카행 배에 올랐다. 1968년 1월 1일, 배 위에서 맞이한 새해 일기에 그는 "모험이란 내 인생의 한 가지 놀이에 불과하다"며 "정식 직업을 갖는 것이 진정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기록했다.
2.2. 남미 탐험 및 아마존강 단독 뗏목 하강
1968년 1월 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같은 해 1월 19일, 안데스산맥의 엘 플라타(표고 6503 m)에 등정했다. 그는 당초 등반 예정은 없었으나, 아르헨티나군의 아콩카과 등반 허가가 늦어지자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등반했다고 기록했다. 2월 5일, 남아메리카 대륙 최고봉인 아콩카과(표고 6960 m)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 그는 표고 4200 m 산장을 출발한 지 15시간 15분 만에 정상에 도달했다. 2월 15일에는 무명봉(표고 5700 m)에 처음 등정하고, 모교인 메이지 대학의 이름을 따 '메이지봉'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볼리비아를 거쳐 페루 리마로 이동했다. 그는 안데스 산에 오르고 싶었으나, 우기여서 포기했다. 이어서 버스와 배를 갈아타고 1968년 4월 이키토스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북아메리카행 배가 나가는 강구까지 아마존강을 발원지에서부터 자력으로 하강하기로 결심했다. 같은 해 4월 20일 페루의 유리마구아스에서 출발하여 단독으로 6000 km를 뗏목으로 내려갔다. 그가 사용한 뗏목은 가축 운송에 쓰던 중고로, 발사나무 통나무를 엮어 만든 길이 4 m, 폭 2.5 m 크기였다. 그는 이 뗏목을 15 JPY에 구매하고 '아나 마리아'라고 이름 붙였다. 이는 남미행 배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청했던 수도녀의 이름이었다. 식사는 주로 바나나, 타로토, 피라냐였다. 6월 20일 브라질 마카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메이지 대학 산악부 동기이자 친구인 고바야시 마사나오의 교통사고 사망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고바야시는 등산 동료의 결혼식에 가던 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북아메리카 최고봉인 매킨리산(표고 6194 m) 등정을 목표로 미국 캘리포니아의 농장에서 2개월간 일하며 산행 자금을 벌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한 달 일했다"고 기록했다. 알래스카에 들어섰으나, 단독 등정 허가가 내려지지 않아 포기했다. 당시 현지 국립공원법에 따르면 4인 이하의 등산대 등반은 허용되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14일 샌퍼드산(표고 4940 m)에 등정했다. 같은 해 10월 1일, 4년 5개월 만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값은 큰형 우에무라 오사무가 부담했다. 당시 우에무라는 27세였다.
2.3. 에베레스트 및 매킨리(데날리) 등정
일본 귀국 후, 우에무라는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일하며 자금을 모았다. 한때는 분말 우유 봉투 포장 작업도 했다. 당시 그의 꿈은 아콩카과 동계 단독 등정과 뗏목으로 하강했던 아마존강을 모터가 달린 고무보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1969년, 일본산악회가 창립 65주년 기념 사업으로 에베레스트산(표고 8848 m) 등반대 파견을 결정했고, 같은 해 4월 메이지 대학 산악부 선배인 오쓰카 히로미의 권유로 이에 참가했다. 그는 1차 정찰대(대장 후지타 요시히로, 우에무라 포함 4명)에 참여하여 4월 23일 일본을 출발했다. 5월에는 표고 6300 m의 남벽 기부까지 시도 등반을 했고, 6월 21일 귀국했다. 이어서 2차 정찰대(대장 미야시타 히데키, 우에무라 포함 8명)에도 참가하여 8월 20일 일본을 떠났다. 9월 13일 베이스캠프를 설치했으며, 10월 31일 고니시 마사쓰구와 함께 남벽 표고 8000 m 지점까지 도달했다. 이후 정찰대가 11월 7일 베이스캠프를 철수하고 귀국한 뒤에도 그는 네팔의 쿰중(표고 3800 m)에 머물렀다. 그는 1965년 고준바 캉에 함께 초등정했던 셰르파 펨바 텐진의 집에 기숙하며, 다음 해 본대를 위한 물자 조달과 셰르파 예약, 그리고 고도 순화 및 고소 훈련을 병행했다. 매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등산화를 신고 산길을 6~7 km 마라톤했다.
1970년 2월, 일본산악회 에베레스트 등반대 본대(총대장 마쓰카타 사부로, 등반대장 오쓰카 히로미, 총 39명)를 카트만두에서 맞이했다. 3월 23일 베이스캠프에 입성했다. 우에무라는 자비분담금(30.00 만 JPY)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자 운반 및 루트 개척 요원으로 참가했으나, 뛰어난 체력 등이 인정되어 5월 3일 마쓰우라 테루오와 함께 동남릉 루트 1차 공격대에 지명되었다. 5월 11일 오전 9시 10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이는 일본인 최초의 등정이었다.
같은 해 7월 30일 일본을 출발하여 알래스카로 향했다. 에베레스트 등정의 기세를 빌려 매킨리산(데날리산)에 다시 도전했다. 에베레스트 등정자라는 이점을 이용해 입산을 허가받을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있었고, 에베레스트 등정 직후여서 몸이 고도에 순화되어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정식 허가는 나지 않았으나, 공원장의 호의로 서류상으로는 별도로 입산한 미국 팀의 일원으로 입산하는 형태로 '허가'를 받았다. 8월 17일 경비행기로 카힐트나 빙하에 내렸고, 8월 19일 베이스캠프(표고 2135 m)를 출발했다. 8월 26일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 이로써 우에무라는 당시 세계 최초의 5대륙 최고봉 등정자가 되었다. (당시 냉전 종식 이전에는 유럽 대륙 최고봉을 몽블랑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우에무라는 29세였다.
1971년 3월, 첫 저서인 『청춘을 산에 걸다』(마이니치 신문사)를 출판했다. 같은 해 12월 30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부 우수아이아로 들어갔다. 1972년 1월 5일 쇄빙선 '산마르틴호'를 타고 출항하여 1월 14일 아르헨티나가 남극에 보유한 헤네랄 벨그라노 기지에 도착했다. 군용 헬리콥터로 수십 킬로미터 내륙까지 비행하는 등 정찰 활동을 펼쳤다. 1월 18일 해당 기지를 떠났으며, 몇 군데의 아르헨티나 남극 기지에 들른 뒤 2월 2일 우수아이아로 귀항하여 하선했다.
한편, 남극 대륙 횡단 계획의 다른 한쪽인 맥머도 기지를 관할하는 미국 국립과학재단은 '남극 조약에 따라 개인적 탐험은 인정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우에무라가 구상했던 노선은 남극의 로스해에 면한 미국 설치 맥머도 기지에서 출발하여 남극점을 거쳐 로스해 반대편 웨들해의 헤네랄 벨그라노 기지(아르헨티나)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1971년 8월 30일, 그는 홋카이도 왓카나이시에서 가고시마까지 일본 열도 3,000 km를 52일 만에 도보로 종단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는 남극 횡단 거리 3,000 km를 몸으로 체험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는 신발 3켤레를 닳아 없앴고, 체중은 5 kg 감소했다. 소지품은 팬티 한 장, 수첩, 비닐 우비, 수건 한 장, 그리고 3.50 만 JPY에 불과했다. 그는 소야곶을 출발하여 일본해 쪽을 따라 걸었고, 10월 20일 국철(당시) 니시카고시마역(현 가고시마 중앙역)에 도착했다.
3. 극지 탐험 및 남극 횡단 준비
우에무라는 북극점과 그린란드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극지 탐험에 대한 노하우를 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장기적인 남극 횡단 계획을 준비했다.
3.1. 그린란드 에스키모 공동 생활 및 개썰매 단독행
1971년 12월 30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부 우수아이아로 이동했다. 1972년 1월 5일 쇄빙선 '산마르틴호'를 타고 출항하여 1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남극 기지에 도착했다. 그는 군용 헬리콥터로 수십 킬로미터 내륙까지 비행하는 등 정찰 활동을 벌였다. 1월 18일 해당 기지를 떠났으며, 몇 군데의 아르헨티나 남극 기지에 들른 뒤 2월 2일 우수아이아로 귀항하여 하선했다.
한편, 남극 대륙 횡단 계획의 다른 한쪽인 맥머도 기지를 관할하는 미국 국립과학재단은 '남극 조약에 따라 개인적 탐험은 인정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우에무라가 구상했던 노선은 남극의 로스해에 면한 미국 설치 맥머도 기지에서 출발하여 남극점을 거쳐 로스해 반대편 웨들해의 헤네랄 벨그라노 기지(아르헨티나)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2월, 아콩카과의 미등정 루트였던 남벽에 도전했으나, 낙석이 많아 포기했다. 그는 자서전에 "만족스러운 장비도 없이 포장용 비닐 끈을 자일 대신 사용했다"고 기록했다.
같은 해 4월 11일, 그린란드의 에스키모 마을에서 개썰매 조종법을 배우고, 극지 기후에 몸을 순화시키기 위해 일본을 떠났다. 같은 해 5월, 그린란드 동해안의 암마살릭을 시찰했다. 같은 해 9월 11일, 그린란드 최북단 마을인 시오라팔루크에서 이누이트들과 공동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누이트의 집에서 기숙하다가, 후에 폐가이긴 했지만 자신만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당시 우에무라는 31세였다.
1973년 2월 4일, 개썰매로 그린란드 3000 km 단독행(시오라팔루크에서 우파나빅까지 왕복)을 시작했다. 이 3000 km의 거리는 남극의 로스해에서 남극점을 거쳐 웨들해까지의 최단 코스와 같았다. 그는 같은 해 4월 30일 성공적으로 완주했다.
같은 해 6월 26일 시오라팔루크를 떠나 7월에 귀국했다. 이 무렵 그는 도쿄도 이타바시구 집 근처에서 노자키 기미코를 만났다. 그들의 만남은 우에무라의 단골 돈가스집 '얏코'에서 이루어졌다. 우에무라는 노자키 기미코에게 자신의 저서 『청춘을 산에 걸다』에 "삼가 노자키 기미코님께"라고 쓰고 사인하여 선물했다.
1974년 3월 6일, 큰형 우에무라 오사무, 셋째 형 타케오와 함께 노자키 집안에 약혼 선물을 가지고 갔다. 같은 해 3월 8일, 메이지 대학 산악부 OB 조직 '로바타카이'의 히말라야 원정 정찰대(우에무라, 니시무라 카즈오, 하세가와 료스케 3인) 대장으로서 네팔의 다울라기리산 5봉 정찰에 나섰으며, 5월 12일 귀국했다.
같은 해 5월 18일, 33세의 나이로 노자키 기미코와 결혼했다. 주례는 메이지 대학 산악부 선배이자 우에무라가 일본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에 등정했을 때 등반대장이었던 오쓰카 히로미 부부였다. 우에무라는 처음에는 결혼식을 꺼렸으나, 산악부 동기 히로에 켄이 밤새 설득하여 진행되었다. 결혼식은 이타바시구의 히카와 신사에서, 피로연은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신혼여행은 미나카미 온천으로 떠났다.
이 무렵 그는 그린란드 일주 개썰매 여행을 계획했으나, 기대했던 스폰서로부터 '탐험 가치가 약하다'는 평가를 듣고 포기했다. 같은 해 11월 22일 일본을 출발하여 12월 11일 그린란드 야코브스하운에 도착했다. 같은 해 12월 29일, 북극권 1.20 만 km 개썰매 단독행을 목표로 그린란드 서부 마을 케케타를 출발했다. 그는 썰매에 '오로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1975년 6월 12일 캐나다 캠브리지 베이에 도착하여 앤더슨 베이에서 여름을 보냈다. 같은 해 12월 15일 그곳을 출발하여 1976년 5월 8일 목표 지점인 알래스카 코체부에 도착했다. 1년 반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우에무라는 당시 35세였다.
이후 그는 베링해협을 건너 시베리아의 북극해 연안에서 유럽까지 개썰매로 달리는 북극해 일주를 꿈꿨으나, 소련의 허가를 얻기 어려워 포기했다. 1976년 7월 31일 소련의 엘브루스산(표고 5642 m)에 등정했다.
3.2. 북극점 도달 및 그린란드 종단
1977년 3월 21일, 북극점 개썰매 단독행을 위한 시찰을 위해 캐나다 레졸루트를 방문하여 20일간 머물렀다. 같은 해 9월에도 7일간의 여행으로 레졸루트를 다시 방문했다.
북극점 및 그린란드 개썰매 단독행에 필요한 자금이 스폰서 3개사(분게이슌주, 마이니치 신문, 마이니치 방송)만으로는 부족하여 광고 대행사(덴쓰)가 추가되었고, 전국적으로 '천 엔 모금' 홍보도 진행되었다. 이러한 대중의 관심은 우에무라의 이름과 그의 모험을 일본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 1월 30일, 세계 최초의 개썰매 단독 북극점 도달에 도전하기 위해 일본을 출발했다. 그는 북극점 도달에 성공하면 극지 탐험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아 남극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해 2월 22일 캐나다 엘즈미어섬의 앨러트에 도착했다. 3월 5일 캐나다 최북단의 컬럼비아곶에서 썰매를 끌고 출발했다. 약 800 km의 개썰매 단독행 끝에 4월 29일 북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이는 무보급이 아니었고, 트윈 오터 비행기로 4차례 보급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이어지는 그린란드 종단을 포함하여 지원 팀의 무선 및 인공위성 위치 확인 등 최신 과학 기술의 지원을 받았으며,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러한 '모험' 방식에 비판적인 의견도 있었고, '세숫대야 안에 보트를 띄운 것 같다'는 비난도 있었다.
우에무라의 북극점 도달은 기상 위성 '님버스 6호'가 우에무라가 발신하는 전파를 수신하여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거쳐 스미스소니언 협회에 의해 확인되었다. 위치 정보뿐만 아니라 기온, 기압 데이터도 포함되었다. 우에무라가 북극점에 도달하기 전날인 4월 28일, 일본 대학 북극점 원정대(대장 이케다 긴쥬) 대원 5명이 개썰매로 일본인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바 있었다. 우에무라와 일본 대학이 동시에 같은 개썰매로 북극점 도달을 목표로 하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우에무라의 '모험'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기도 했으며, 그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를 장식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1978년 9월호 표지 제목은 'SOLO TO THE NORTH POLE'였다.) 당시 우에무라는 37세였다.

같은 해, 개썰매 단독으로 그린란드 종단에도 성공했다. 북극점 도달뿐만 아니라 그린란드 종단을 한 이유는 그 내륙 빙상이 남극 대륙의 빙모와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 거리는 3000 km였다. 그는 5월 12일 모리스 제섭 곶을 출발하여 7월 12일 내륙 빙상의 최고 지점(표고 3240 m)을 거쳐 8월 22일 그린란드 남단의 누나타크(암봉)에 도착했다. 그린란드 최남단은 아니었지만, 표고 61도 39분, 서경 44도 15분 지점으로, 이보다 남쪽의 빙하는 숨겨진 크레바스가 많아 위험했기 때문에 이곳을 여정의 최종 지점으로 삼았다. 이 그린란드 종단에서는 썰매에 요트와 같은 돛을 달아 개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효과를 보았다. 이 아이디어는 우에무라가 고안했으며, 오키나와 국제 해양 박람회 기념 태평양 횡단 요트 레이스(1975년)를 완주한 고바야시 노리코에게 자문을 구해 실현했다. 돛의 높이는 6 m였다.
같은 해 8월 30일, 미국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개선' 기자 회견이 열렸다. 이곳에서 기자 회견을 개최한 것은 '세계의 우에무라'를 홍보하기 위해 덴쓰가 마련한 것이었다.
귀국 후 10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반년 동안, 북극점과 그린란드 모험에 소요된 약 2.00 억 KRW의 지출 중 약 7000.00 만 KRW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강연(강연 1회당 50.00 만 JPY)과 행사 참석(사인회 1회당 30.00 만 JPY)을 했다. 강연 일정은 덴쓰가 짰다.
같은 해 10월 9일, 제26회 기쿠치칸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수상 이유는 "개썰매를 이용한 단독 북극점 도달과 그린란드 종단... 일본 청년의 성과를 국내외에 드높인 두 가지 대모험"이었다. 1979년 2월 22일, 영국 왕실의 빅토리아 스포츠 클럽으로부터 스포츠 분야에서 가장 용기를 발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배럴 인 스포츠상'을 수상했다. 수상 이유는 "북극의 황량한 땅에서의 단독 행동에서 보여준 유례없는 용기"였으며, "항상 첫발을 내딛는 자이자 고독한 길의 발견자"였기 때문이었다. 시상식은 같은 날 영국 길드홀에서 열렸으며, 5.50 만 GBP 상당의 황금 월계관을 머리에 썼다. 기모노 차림의 아내 기미코가 동석하여 함께 기념 촬영에 응했다. 당시 우에무라는 38세였다.
3.3. 남극 횡단 계획의 좌절
1979년 6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초청으로 티베트 라싸에 입성했다. 같은 해 8월, 미국 국립과학재단으로부터 "우에무라의 남극 계획에 미국은 협력할 수 없다"는 최종 답변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네팔의 칼라 파타르(표고 5400 m)에 들어가 약 한 달간 동계 에베레스트를 정찰했다. 1980년,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을 구상했으나, 단독 등정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메이지 대학 산악부 OB를 주축으로 '일본 동계 에베레스트대'를 편성하고 우에무라가 대장이 되었다. 같은 해 2월 18일, 에베레스트 동계 초등정에 폴란드 팀이 성공하여 우에무라는 먼저 기회를 빼앗겼다. (우에무라는 에베레스트의 동계는 공식적으로 12월과 1월을 의미하므로, 폴란드 팀은 동계 등정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4월 하순부터 약 3주간, 동계 에베레스트 산행 준비를 위해 네팔에 머물렀다. 이는 동계 에베레스트 산행에 필요한 셰르파 예약과 동계 초등정에 '성공'한 폴란드 팀으로부터 등정 상황을 듣고 장비를 보기 위함이었다.
동계 에베레스트 훈련의 일환으로, 동계 아콩카과(남아메리카 최고봉)에 도전하기 위해 같은 해 7월 11일 일본을 출발했다. 원정대는 총 8명이었다. 8월 5일 베이스캠프에 들어갔고, 8월 13일 마쓰다 켄이치, 아쿠쓰 에쓰오와 함께 2차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계획했던 정상에서의 비박 훈련은 포기했다. 당시 우에무라는 39세였다.
같은 해 10월 30일,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을 목표로 일본을 출발했다. 폴란드 팀에게 동계 등정을 먼저 빼앗기면서, 우에무라의 팀은 등반 외에 학술적 성격도 겸하게 되었다. (등반 대원 6명, 학술 5명, 보도 6명) 이는 메이지 대학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같은 대학 산악부가 1981년 봄 에베레스트 원정을 결정한 것도 팀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대학 산악부의 2년 선배인 나카지마 요시카즈는 "원래라면 모교와 합동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을 목표로 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하나로 통합하기에는 '장애물'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북극점 및 그린란드 개썰매 단독행을 지원했던 '그룹'과의 관계 등 다양한 속박과 모든 방면의 의무감, 그리고 거절하기 어려운 딜레마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2월 1일, 베이스캠프에서 등반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해 1981년 1월 12일, 표고 7100 m 지점에서 등반 대원인 타케나카 노보루가 사망했고, 또한 악천후에 가로막혀 (강풍으로 인해 4캠프를 설치할 수 없었다) 같은 해 1월 27일 등정을 포기했다. 타케나카 노보루는 일본 내에서는 '추락사'로 보도되었으나, 타케나카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우에무라에 따르면 활락은 했지만 그 거리는 5 m 이내였다. 베이스캠프로 옮겨진 시신은 얼어 있었고, 명확한 사인은 불분명했다. 당시 타케나카는 27세의 와세다 대학 학생이었다. 같은 해 2월 14일 귀국했다。 우에무라는 40세였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1981년, 남극 대륙 3000 km 개썰매 단독행과 남극 대륙 최고봉인 빈슨 매시프(표고 5140 m) 단독 등정 계획에 대해 아르헨티나군의 협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3000 km 개썰매 단독행의 경우, 미국의 협력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남극 대륙 횡단은 불가능해졌고, 대신 빈슨 매시프까지의 왕복으로 3000 km를 주행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같은 해 12월, 텔레비전과 잡지 취재를 위해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여 남극의 말람비 기지에 7일간 머물렀다.
1982년 1월 24일, 남극 3000 km 개썰매 단독행과 빈슨 매시프 단독 등정에 도전하기 위해 일본을 출발했다. 같은 해 2월 10일, 아르헨티나 최남단 항구인 우수아이아에서 쇄빙선 '이리사르'를 타고 출항하여 2월 13일 남극반도에 있는 아르헨티나군의 산마르틴 기지에 도착했다. 해당 기지에서 출발을 기다렸으나, 3월 19일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하여 같은 해 12월 22일 아르헨티나군이 협력을 철회하면서 계획은 좌절되었다. 포클랜드 전쟁 자체는 1982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결되었으나, 그 전쟁 책임으로 인해 우에무라에게 협력적이었던 아르헨티나군 간부들이 교체된 영향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남극 대륙의 기후가 불안정하여 물자 보급용 비행기의 이착륙에 큰 위험이 따른다는 이유였다. 우에무라는 당시 "할 수 있다면 혼자서라도 걸어가고 싶다. 그렇게라도 끝낼 수 있다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83년 3월 16일, 약 1년간의 남극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당시 우에무라는 42세였다.
4. 매킨리(데날리) 동계 단독 등반 및 실종
우에무라는 마지막 탐험인 매킨리산 동계 단독 등반을 철저히 준비했으나, 이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4.1. 등반 준비 및 과정
이 무렵 우에무라는 남극 대륙 횡단 이후의 꿈으로 야외학교 설립 구상을 밝히기 시작했다. 1983년 8월, 야외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적지를 찾아 홋카이도 오비히로시를 시찰했다. 같은 해 10월 20일 일본을 출발했으며, 나리타 국제공항에서의 배웅은 아내 기미코와 도이 마사키(메이지 대학 산악부 선배이자 동계 에베레스트 등정 등을 함께 한 동료) 두 명뿐이었다. 이는 우에무라가 이번 여행에 대해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알렸기 때문이다. 본가에도 미국으로 간다는 사실조차 연락하지 않았다. 10월 24일, 그는 공부를 겸해 미네소타주에 있는 야외 학교 '아웃워드 바운드 스쿨'에 참여했다. 우에무라는 학생으로 참여하고 싶어했지만, 학교 측에서 '세계의 우에무라'라는 이유로 준지도원(무보수)으로 받아들였다. 1984년 1월 16일 미네소타를 떠났다.
같은 해 1월 18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미국 기업 듀폰의 직원과 회담했다. 이는 우에무라의 남극 계획(우에무라는 민간기 C-130 수송기로 보급 물자를 공중 투하받는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에 대한 지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그는 매킨리산 동계 단독 등정을 목표로 같은 해 1월 21일 알래스카 앵커리지에 입성했으며, 1월 24일 탈키트나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우에무라가 묵었던 곳은 '라티튜드 62'라는 이름의 롯지풍 호텔이었다. 호텔 이름 '62'는 호텔이 북위 62도에 위치한 것을 기념한다. 1월 26일 경비행기로 매킨리산 카힐트나 빙하에 내렸다. 2월 1일 베이스캠프(표고 2200 m)에서 등반을 시작했다. 일부 기자들만이 그의 모습을 취재했다. 아사히 TV의 취재팀(디렉터 오타니 에이호 등 4명)이 동행했다.
그는 크레바스 추락 방지를 위해 허리에 대나무 막대를 매다는 '자가 구조' 장치를 개발했다. 이 막대는 그가 크레바스에 빠졌을 때 몸이 걸리게 하여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그는 최소한의 장비로 가볍게 등반할 계획이었으며, 눈동굴에서 잠을 자고 텐트를 휴대하지 않았다. 또한 연료를 아끼기 위해 차가운 음식을 먹을 계획이었다.
4.2. 정상 도달 및 실종
1984년 2월 12일 오후 6시 50분, 우에무라는 세계 최초로 매킨리산 동계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 이날은 마침 그의 43번째 생일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2월 13일 오전 11시에 경비행기(아사히 TV 취재 전세 비행기)와의 무선 교신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두절되어 실종되었다. 경비행기는 우에무라와 교신한 카메라 조수였다. 교신에서 우에무라는 등정에 성공했으며 현재 위치가 0.6 만 m (2.00 만 ft)(6096 m)라고 전했다. 이 '0.6 만 m (2.00 만 ft)'라는 말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사실 그는 "0.6 만 m (1.90 만 ft)" (5791 m)라고 말하려 했으나, 교신 상태가 좋지 않아 "0.6 만 m (2.00 만 ft)"라고 바꿔 말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당시 이미 전파 상태가 악화되어 이후 교신이 끊겼다.
당시 정상 부근에는 강풍이 불고 있었고, 기온은 -45.55555555555556 °C (-50 °F) (-46 °C) 가량이었다. 비행기들이 산 위를 날았지만, 그날은 우에무라를 보지 못했다. 다음 날 그는 0.5 만 m (1.66 만 ft) (5060 m) 지점(아마도 헤드월 바로 위 능선)에서 목격되었으나, 악천후로 인해 추가 수색이 어려웠다.
이 시점에서 우에무라의 연료가 바닥났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의 명성 때문에 아무도 그를 불쾌하게 할까 봐 구조대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부터 "우에무라를 관찰"했던 부시 파일럿 중 한 명인 더그 기팅은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구조대를 보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2월 20일, 날씨가 맑아졌을 때 우에무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이전에 있었던 0.5 만 m (1.66 만 ft) 지점의 야영지 흔적도 없었고, 근처에 다른 등반가들이 남긴 보급품이 건드려진 흔적도 없었다.
4.3. 수색 활동 및 마지막 기록
2월 15일, 경비행기가 표고 2900 m의 빙하 위에서 우에무라가 크레바스 추락 방지를 위해 사용했던 대나무 막대를 발견했다. 그러나 베이스캠프나 등산 루트에서는 우에무라의 모습이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 교신 3일 후인 2월 16일, 경비행기 조종사(우에무라가 귀환 픽업을 요청했던 비행기)가 표고 4900 m 지점의 설동에서 우에무라로 보이는 인물이 손을 흔드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설동에서 상반신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그는 손을 흔드는 것이 건강하다는 신호이고, 가만히 있는 것이 구조를 요청하는 신호라고 등반 전 우에무라와 사인 약속을 했었다. 비행기는 몇 차례 선회하며 확인했으나, 날씨와 시야가 좋지 않아 시야에서 놓쳤다. 하지만 이후 수색 결과, 최종 캠프로 사용했던 표고 5200 m 지점의 설동에 많은 장비가 남아 있었고, 5200 m 설동이 루트상에서 간과될 만한 곳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에무라는 정상에서 5200 m 설동까지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데날리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는 경비행기 2대, 고도 5000 m까지 비행할 수 있는 헬리콥터 1대를 동원하여 광범위한 수색을 펼쳤다. 2월 20일,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의 수색 활동에 참여하던 두 명의 등산가(아사히 TV 디렉터 오타니 에이호와 미국인 등산가 제임스 위크와이어)가 표고 4200 m 지점의 설동에서 우에무라의 일기, 카메라, 필름 등을 발견했다. 또한 2월 25일, 표고 4900 m 지점의 설동(우에무라로 보이는 인물이 비행기에서 손을 흔드는 것이 확인된 곳)에서도 우에무라의 소지품을 발견했으나, 우에무라 본인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 명의 등산가는 표고 5000 m까지 올라가 수색했다. 2월 26일, 데날리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는 "우에무라의 생존 가능성은 100% 없다"며 수색을 중단했다.
그 후 메이지 대학 산악부 OB '로바타카이'에 의해 수색이 진행되었으나, 우에무라는 발견되지 않았고, 3월 6일 표고 5200 m 지점의 설동에 남아 있던 우에무라의 장비만 발견되었다. (5200 m 지점에서 정상까지의 구간은 수색할 수 없었다.) 3월 8일, 로바타카이의 수색도 중단되었다.
우에무라와 마지막으로 무선 교신이 이루어진 2월 13일이 그의 기일이 되었다. 그의 고향인 효고현 도요오카시에 있는 우에무라의 묘비에는 "쇼와 59년 2월 16일 적(寂)"(1984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적'은 불교 용어로 사망을 의미한다.
4월 하순부터 5월에 걸쳐 메이지 대학 산악부 OB '로바타카이'에 의해 매킨리산 수색이 다시 진행되었다. 이번 수색은 지난번 수색하지 못했던 표고 5200 m에서 정상까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우에무라가 정상에 세웠던 일장기와 성조기 조각을 회수했다. 우에무라의 깃발은 훗날 그의 아내 기미코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의 등반 전에 깃발을 일본에서 보낸 사람은 기미코였다. 이전에 등정한 외국인 등반가 여러 명과 정상 부근을 비행한 경비행기에 의해 일장기가 정상에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파란색 모자도 회수되었지만, 이는 우에무라와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우에무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고해상도 항공 사진 촬영도 이루어졌으나, 우에무라의 모습으로 보이는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우에무라의 실종 소식이 보도되자, 메이지 대학 산악부 OB '로바타카이'에는 우에무라의 수색 비용에 써달라는 의연금 요청이 쇄도했다. 이에 따라 1984년 3월 1일 '우에무라 나오미의 모임'이 설립되었고, 메이지 대학 체육과가 접수 창구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25일까지 3,116건, 약 2950.00 만 JPY의 의연금이 모였다.
2011년 5월, 공원 관리인에게 매킨리산에서 시신을 발견했다는 통보가 있었으나, 주변 일대 수색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았다. 통보자는 등반가 콘래드 앵커였다.
5. 인물 및 모험 철학
우에무라 나오미는 소극적인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험에 대한 강한 의지와 독자적인 스타일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5.1. 개인적인 특성
우에무라 가문은 대대로 농가였으며, 우에무라 나오미의 조부는 손익이나 금전 계산 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성품이었다. 우에무라도 이러한 조부의 피를 이어받아, 등반대에 참가할 때는 선두에 서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도, 자신이 주역이 되기보다는 항상 멤버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입장에 섰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와 함께 학교 연못의 잉어를 구워 먹는 등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어린이 대장 같은 면모는 없었고, 성적도 평범하며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존재였다. 우에무라의 얼굴을 기억하는 동급생도 적을 정도였다.
메이지 대학 산악부에 입부했을 당시에는 등산 경험이나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주 넘어지는 모습 때문에 동요 '도토리 굴러간다'에서 연상되어 '도토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정채동의 만화 '정채동의 모험'의 주인공이 쓰고 있던 모자를 쓰고 시무룩해 있는 모습이 도토리와 닮아서 '도토리'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입부 초에는 무시당하기도 했으나, 동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어 남몰래 산행을 거듭했고, 이러한 숨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대학 4학년 때 부리더가 되었다. (주리더는 동기이자 친구인 고바야시 마사나오였다.)
1965년, 미등정 고준바 캉(초오유 2봉)에 초등정했을 때의 대장 타카하시 스스무는 우에무라에 대해, 세계를 무대로 무전여행 등을 대담하게 해낼 뿐만 아니라, 선배에게 한마디라도 꾸중을 들으면 움츠러들어 대답도 못하는 순진함과 나약함을 누구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수많은 모험의 성공으로 대담하고 겁 없는 면모가 부각되지만, 실제로는 남들보다 배로 겁이 많은 성격으로, 충분한 계획과 준비를 통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계산 없이는 결코 실행하지 않았다. 체력 외에는 특별히 뛰어난 점이 없었던 자신에게 항상 열등감을 품고 있었고, 기자 회견 등에서 자신이 칭찬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나 아내 기미코와 많은 지인들이 지적했듯이, 오히려 그 열등감이 원동력이 되어 수많은 모험을 성공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극히 싫어했으며, 자금 마련을 위한 강연회나 기자 회견에서 많은 청중 앞에서 이야기할 때는 첫마디를 내뱉기 전까지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러나 말솜씨는 서툴렀지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강연은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주었다.
5.2. 모험 스타일과 원칙
단독행에 몰두한 이후 우에무라는 아마존강 단독 뗏목 하강, 개썰매를 이용한 북극점 단독행, 개썰매를 이용한 그린란드 종단 단독행 등 수많은 유명한 모험을 달성했다.
단독행 시의 특징으로는, 예를 들어 등산에서 고도 순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모험하는 현지에서 생활하며 현지인들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기술을 습득하는 '생활 순화' 방식을 중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개썰매 여행에 앞서 약 5개월간 혼자서 그린란드 에스키모와 공동 생활하며 의식주와 사냥, 낚시, 개썰매 기술 등을 극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직접 배우는 데 힘썼다. 이러한 경험은 개썰매 여행 중 북극곰의 습격을 받았을 때 다음 날 같은 북극곰으로 보이는 개체를 사냥으로 잡고 해체하여 생고기를 먹으며 극지에서 귀중한 단백질을 섭취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키비아크는 독특한 제법과 강렬한 악취로 알려져 있지만, 우에무라는 이를 매우 좋아했다.
겨울 산 단독행에서는 1964년 11월 몽블랑에서 크레바스에 떨어졌을 때 아이젠과 짐이 걸려 구사일생했던 경험에서, 여러 개의 대나무 막대를 스토퍼로 몸에 묶어 다녔다. 이 막대는 도중에 데포 (짐을 등반 도중에 일시적으로 놓아두는 것) 하기도 했다. 우에무라가 실종된 마지막 매킨리산 산행에서도 허리에 대나무 막대를 묶고 등반하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6. 유산 및 평가
우에무라 나오미는 그의 모험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로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되고 평가받고 있다.
6.1. 사후 수상 및 영예
우에무라는 1984년 4월 19일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공적명은 "세계 5대륙 최고봉 등정 등의 공적"이었다. 표창장에는 "당신은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세계 5대륙의 최고봉 등정, 개썰매를 이용한 단독 북극점 도달 및 그린란드 종단 등 수많은 전인미답의 위업을 달성하여 청소년을 비롯한 많은 국민에게 꿈과 용기를 주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같은 해 6월 11일, 메이지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2월 22일, 그는 영국 왕실의 빅토리아 스포츠 클럽으로부터 스포츠 분야에서 가장 용기를 발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용맹 스포츠상'을 수상했다. 이는 "북극의 황량한 땅에서의 단독 행동에서 보여준 유례없는 용기"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항상 첫발을 내딛는 자이며, 고독한 길의 발견자"로 평가받았다.
그의 이름을 딴 '나오미 우에무라 상'이 일본에서 제정되어 뛰어난 모험가들을 기리고 있다.
6.2. 기념 시설 및 추모 활동

도쿄와 효고현 도요오카시에는 그를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도쿄 이타바시구에는 그가 매킨리산에서 실종되기 전까지 약 15년간 거주했던 곳에 '우에무라 모험관'이 개관했다. 이곳에서 그는 아내 기미코와도 10년 가까이 살았다. 1992년 도쿄 이타바시구에 '우에무라 기념 재단'(사업 주체: 이타바시구)이 설립되어 '우에무라 모험관'이 개관했다.

1994년 4월 10일, 그의 고향인 효고현 도요오카시 히다카정에는 '우에무라 나오미 모험관'이 개관했다. 1996년에는 도요오카시 주최로 '우에무라 나오미 모험상'이 제정되었다.
그린란드 나르사수아크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린란드의 누나타크 우에무라 산은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우에무라는 1978년 섬을 횡단하며 이 봉우리를 종착점으로 선택했다.
1984년 6월 16일, 도쿄 아오야마 사이조에서 '우에무라 나오미에게 작별을 고하는 모임'이 열렸다. 제단에는 미소 짓는 우에무라의 사진과 매킨리산 정상에서 회수된 일장기, 그리고 그가 아끼던 피켈 등이 전시되었다. 유족은 어떤 공물도 받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제단에 바쳐진 것은 히타치노미야 가문(상궁)의 공물이었다. 우에무라는 화코 비와 함께 후지산이나 호타카산에 등반한 바 있다.
같은 날, 덴마크 정부는 1978년 그린란드 종단 시 도착점이었던 누나타크봉(표고 2540 m)을 우에무라의 사상 첫 그린란드 종단 업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누나타크 우에무라봉'으로 개칭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우에무라 나오미에게 작별을 고하는 모임' 자리에서 덴마크 주일대사에 의해 발표되었다. 1996년 6월 26일, 오타니 에이호(매킨리산에서 우에무라를 마지막으로 취재한 인물), 안도 미키히사(분게이슌주 사진기자), 모리타 히로시(산악 저널리스트) 등 8명이 이 산을 초등정했다.
같은 해 8월, 고향인 히다카정(현 도요오카시)으로부터 명예 읍민 칭호가 증정되었다. 우에무라가 명예 읍민 1호였다.
1985년 8월, 우에무라가 구상했던 야외학교가 유자들에 의해 '우에무라 나오미 오비히로 야외학교'(홋카이도 오비히로시)로 개교했다. 우에무라의 아내 기미코가 명예 교장이 되었다.
6.3. 대중적 인식과 영향
우에무라는 그의 여행에 대해 자주 공개 강연을 했고, 글을 썼다. 어린이들을 위한 그의 모험 이야기는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는 재능 있는 등반가이자 추진력 있는 모험가일 뿐만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는 온화하고 겸손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작가 조너선 워터먼의 말처럼, "그의 단독 업적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그의 진심 어린 겸손함과 소박한 성품이었다. 그의 위대함의 또 다른 부분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 있었다."
6.4.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반응
그는 생전에 "모험에서 죽으면 안 된다.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절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전제다"라는 말을 남겼지만, 마지막은 모험 하산 중 실종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1984년 3월 8일 수색 중단 소식을 접한 다음 날 3월 9일, 아내 기미코가 메이지 대학에서 기자회견에 응했다.
기자: "만약 살아 있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습니까?"
기미코: "항상 '모험이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라고 거창하게 말했으니, 좀 칠칠치 못하지 않냐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자: "소중한 사람이라면 막았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기미코: "어떤 여행이든 모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나에겐 이것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반대해도 떠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종 후 표고 4200 m 설동에서 발견된 일기에는 등정 공격 전 마지막 날인 2월 6일 자로 "무슨 일이 있어도 매킨리산에 오를 거야"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대해 노구치 켄은 "무슨 일이 있어도"라는 말은 아마추어가 쓰는 말이며, 이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실행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평했다. 그는 이어 "자연을 상대로, 우에무라 씨라면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을 텐데. 그래서 그가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라고 덧붙였다.
묘비와 관련하여, 효고현 도요오카시의 라이코지(頼光寺)는 우에무라 가문의 보리사이며, 그 뒷산에 우에무라 나오미의 묘비가 있다. 이 묘비는 우에무라 나오미의 큰형인 우에무라 오사무가 1986년 10월에 건립했다. 묘비 뒷면에는 "쇼와 61년 10월 길일 형 우에무라 오사무 건립"이라고 새겨져 있다. 묘비 정면의 "우에무라 나오미의 묘"라는 글씨는 니시보리 에이자부로의 글이다. 뒷면에는 우에무라의 계명인 '곤콘인 직심불요거사'와 "쇼와 59년 2월 16일 적"이라는 입적 날짜가 새겨져 있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으로부터 받은 "A BRAVE MAN AND GREAT ADVENTURER"라는 글귀가 새겨진 부비도 있다.
도쿄도 이타바시구의 조렌지(乗蓮寺) 경내에도 묘비가 있다. 이 묘비는 1985년 6월 1일 우에무라의 1주기 법요에 맞춰 세워졌다. 묘비명의 추모 시는 구사노 신페이의 작품이다. 뒷면에 새겨진 우에무라의 계명 '곤콘인 직예미심불요거사'라는 글씨는 아내 기미코의 글이다.
7. 저서 및 미디어
우에무라 나오미는 직접 모험기를 집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모험은 수많은 서적, 방송,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로 제작되어 대중에게 알려졌다.
7.1. 주요 저서
우에무라가 직접 집필하고 출간한 주요 모험기 및 에세이는 다음과 같다.
- 『청춘을 산에 걸다』(青春を山に賭けて세이슌오 야마니 카케테일본어) (마이니치 신문사, 1971년 3월): 그의 유년기부터 1971년 1월 그랑드 조라스 완등까지를 기록했다.
- 『극북으로 달리다』(極北に駆ける쿄쿠호쿠니 카케루일본어) (분게이슌주, 1974년 7월 5일)
- 『북극권 12,000 km』(北極圏一万二千キロ호쿠쿄쿠켄 이만니센키로일본어) (분게이슌주, 1976년 9월 1일)
- 『북극점 그린란드 단독행』(北極点グリーンランド単独行호쿠쿄쿠텐 그린란드 탄도코일본어) (분게이슌주, 1978년 10월 15일)
- 『모험과 인생』(冒険と人生보켄토 진세이일본어) (세이쿄 신문사, 1980년 2월): 1979년 11월 23일 도쿄 산케이 홀에서 열린 강연을 녹취한 책이다.
- 『모험』(冒険보켄일본어) (마이니치 신문사, 1980년 12월 30일)
- 『남성에게 모험이란 무엇인가: 우에무라 나오미 대담·에세이집』(男にとって冒険とは何か오토코니 톳테 보켄토와 나니카일본어) (시오 출판사, 1981년 1월 15일): 이노우에 야스시, 사오토메 지로, 이쓰키 히로유키, 오 사다하루, 미우라 유이치로, 닛타 지로 등 11명과의 대담을 담았다.
- 『에베레스트를 넘어서』(エベレストを越えて에베레스토오 코에테일본어) (분게이슌주, 1982년 7월 15일)
- 『우에무라 나오미의 모험 학교』(植村直己の冒険学校우에무라 나오미노 보켄갓코일본어) (분게이슌주, 1986년 8월 30일): 1983년 8월부터 9월까지 50시간 동안 녹음된 우에무라의 이야기를 녹취한 책이다.
- 『우에무라 나오미와 산에서 하룻밤: 등산화를 벗은 모험가, 마지막 세상 이야기』(植村直己と山で一泊우에무라 나오미토 야마데 잇파쿠일본어) (쇼가쿠칸, 1993년 8월 20일): 1983년 5월 8일에서 9일 사이 쇼가쿠칸의 야외 잡지 『BE-PAL』 취재진과의 캠핑 인터뷰를 녹취한 책이다.
- 『우에무라 나오미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植村直己 妻への手紙우에무라 나오미 쓰마에노 테가미일본어) (분게이슌주, 2002년 10월 20일): 우에무라가 아내 기미코에게 보낸 서간집이다.
- 『우에무라 나오미, 도전을 말하다』(植村直己、挑戦を語る우에무라 나오미, 초센오 카타루일본어) (분게이슌주, 2004년 7월 19일): 우에무라의 대담집으로, 가토 요시로, 이시하라 신타로, 이쓰키 히로유키, 왕정치, 미우라 유이치로, 호리에 켄이치, 이케다 긴쥬, 엔도 슈사쿠, 가이코 켄, 이타미 주조, 고니시 마사쓰구, 후지이 야스오, 이노우에 야스시, 하루나 유리, 하야카와 타네조, 오누키 에이코, 니시보리 에이자부로, 타다 유코 등과의 대담을 담았다.
7.2. 관련 서적 및 출판물
우에무라 나오미와 그의 모험에 대한 수많은 서적이 출간되었다. 다음은 그의 경력과 인품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유용한 주요 서적들이다.
- 『등정 고준바 캉: 메이지 대학 히말라야 등반대 기록』(다카하시 스스무 편, 1967년 9월): 우에무라의 수기 '등정의 감격'이 수록되어 있다.
- 『에베레스트 남벽: 1971년 국제대의 비극』(피터 스틸 저, 1972년 7월 10일): 우에무라가 참가했던 에베레스트 국제대(1971년 국제 히말라야 원정대)에 대한 기록이다.
- 『북극점을 향한 사나이들』(요미우리 신문 사회부 편, 1978년 9월 12일): 1978년 일본인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일본 대학 원정대를 중심으로, 동 시기 북극점에 도전한 우에무라 나오미와 호리에 켄이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 『극지에 불타다: 인간 우에무라 나오미』(아이자와 히로후미, 마쓰모토 테루오 공저, 1979년 2월)
- 『우에무라 나오미 모험의 궤적: 도토리가 지구를 달리다』(야마토케이코쿠샤 편, 1979년 6월 25일)
- 『머나먼 매킨리: 우에무라 나오미의 사랑과 모험』(나카지마 요시카즈 저, 1984년 6월 20일)
- 『극북에 사라지다: 우에무라 나오미 수색 보고·추모집』(메이지 대학 산악부 로바타카이 편, 1985년 3월 10일)
- 『매킨리에서 죽다: 우에무라 나오미의 영광과 수라』(나가오 사부로 저, 1986년 2월 12일): 제8회 고단샤 논픽션상 수상작이다.
- 『나의 친구 우에무라 나오미』(히로에 켄 저, 1986년 5월 16일): 우에무라의 소중한 친구였던 히로에 켄이 쓴 추모집이다.
- 『우에무라 나오미의 세계』(분게이슌주 편, 1986년 6월 10일): 우에무라의 아내 기미코의 수기와 영화 '우에무라 나오미 이야기' 제작 비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 『현대의 모험 상: 산·극지·강』(크리스 보니ントン 저, 1987년 12월): '홀로 북극으로: 우에무라 나오미의 꿈'이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 『이누이트가 된 일본인』(오시마 이쿠오 저, 1989년 8월): 저자가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마을에서 우에무라와 접촉했던 경험을 담고 있다.
- 『주간 아사히의 쇼와사: 사건·인물·세태 제5권 (쇼와 50~60년대)』(주간 아사히 편집부 편, 1990년 7월 10일): '우에무라 나오미 매킨리에 사라지다'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 『플레이보이 인터뷰 셀렉티드』(플레이보이 일본판 편집부 편, 1990년 10월 24일): 1978년 12월호에 실렸던 우에무라 나오미와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 『우에무라 나오미 기념관: HOMAGE TO NAOMI UEMURA』(분게이슌주 편, 1991년 2월 20일): 우에무라의 독창적인 5대륙 최고봉 등정, 극지에 걸었던 꿈의 모든 것을 컬러로 재현한 결정판이다.
- 『동생 우에무라 나오미』(우에무라 오사무 저, 1999년 4월 10일): 우에무라 나오미의 큰형이 쓴 책이다.
- 『남겨진 등산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8인의 등산가의 최후』(사세 미노루 저, 1999년 6월 10일)
- 『일본의 탐험가들: 미지를 향했던 사람들의 탐험사』(헤이본샤, 2003년 10월)
- 『우에무라 나오미: 꿈·모험·로망: 서거 20주년 기념 특집』(가와데 쇼보 신샤, 2004년 9월 30일): 권말 특별 부록으로 다큐멘터리 CD '북극권 1만 2천 km 개썰매 여행: 세기의 대모험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 『모험·탐험의 세계: 내셔널 지오그래픽』(닛케이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 2005년 3월): '일본인 모험가 우에무라 나오미, 단독으로 북극점 도달에 성공'이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 『미완의 순례: 모험가들에게 바치는 오마주』(진초 간유 저, 2018년 3월 15일): '우에무라 나오미: 시대를 초월한 모험가'라는 장이 수록되어 있다。
7.3. 영상물 및 방송 프로그램
우에무라의 모험은 다양한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상물로 제작되었다.
- 『다큐멘터리 청춘: 내 이름은 애니멀』(마이니치 방송, 1970년 12월 5일)
- 『완전 기록! 우에무라 나오미 북극점에 서다』(마이니치 방송, 1978년 6월 4일)
- 『우에무라 나오미 북극점을 넘어 4000 km: 고독의 165일』(마이니치 방송, 1978년 10월 10일)
- 『에베레스트로의 서곡: 우에무라 나오미 모험의 궤적』(마이니치 방송, 1980년 6월 7일)
- 『안데스의 하얀 공포: 우에무라 나오미 6960 m 아콩카과에 서다』(마이니치 방송, 1980년 10월 10일)
- 『머나먼 엄동의 에베레스트: 우에무라 나오미 장렬한 58일』(마이니치 방송, 1981년 2월 22일)
- 『우에무라 나오미 남극에 도전하다: 꿈의 대륙 혼자서』(마이니치 방송, 1982년 4월 24일)
- 『남극·꿈의 대륙 370일: 우에무라 나오미의 월동 일기』(마이니치 방송, 1983년 5월 5일)
- 『남자의 로망 끝없이: 우에무라 나오미 극한과의 싸움』(마이니치 방송, 1983년 11월 23일)
- 『이 미소 영원히: 우에무라 나오미 얼음과 눈 속에 사라지다』(마이니치 방송, 1984년 3월 21일)
- 『위대한 모험가 우에무라 나오미에게 바치다: 1984년 2월 20일 매킨리 맑고 바람 없어, 안녕 나오미』(아사히 TV, 1984년 7월 2일)
- 『대단한 발자취: 우에무라 나오미 다큐멘터리 어게인』(마이니치 방송, 1986년 5월, 5일 연속)
- 『스페이스 J: 살아남다: 모험왕 우에무라 나오미 실종 10년』(마이니치 방송/TBS 텔레비전, 1994년 5월 11일)
- 『경악! 나무늘보 20세기: 우에무라 나오미 비극의 산의 수수께끼』(아사히 방송, 1996년 2월 2일)
- 『모험왕 우에무라 나오미: 꿈 이루고, 꿈 깨지다: 극한에 도전한 남자의 전 행동 기록』(마이니치 방송, 2004년 1월 3일)
- 『라스트 메시지 제4집: 꿈 끝없이 모험가 우에무라 나오미』(NHK 종합, 2007년 3월 18일)
- 『히타치 세계 불가사의 발견!: 알래스카 매킨리에 사라진 모험가 우에무라 나오미』(TBS 텔레비전, 2007년 10월 27일)
- 『역사 비화 히스토리아: 우에무라 나오미 북극권 1만 2천 km 대모험』(NHK 종합, 2014년 4월 16일)
다음은 우에무라를 모델로 한 영상 작품이다.
- 텔레비전 드라마 『그 사람은 바람이었다: 우에무라 나오미와 그의 아내』: 아사오 켄쇼 연출. 하시모토 시노부, 하시모토 신고 극본. 1985년 6월 22일(전편)과 6월 29일(후편)에 TBS 계열 '히타치 텔레비전 시티'에서 방영되었다. 우에무라 나오미 역은 니시카와 키요시가, 아내 기미코 역은 주아케 유키요가 연기했다.
- 영화 『우에무라 나오미 이야기』: 사토 준야 감독. 1986년. 덴쓰·마이니치 방송 제작, 도호 배급. 상영 시간 140분. 우에무라 나오미 역은 니시다 도시유키가, 아내 기미코 역은 바이쇼 치에코가 연기했다. 우에무라 나오미의 후반생을 그린 전기 영화이다。
7.4. 음악 및 기타 매체
우에무라의 모험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음악 작품들도 있다.
- 『바람을 가르며』(하시모토 쇼지 작곡, 도이 타케시 작사, 1987년): 우에무라의 공적을 기리는 노래가 포함된 합주곡. 교육 예술사 출판 초등학교 5학년 음악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 『별의 클라이머』(레이미 작곡, 마쓰토야 유미 작사, 1984년): 우에무라를 모델로 만들어진 곡. 레이미의 앨범 『"R"』(1984년), 마쓰토야 유미의 앨범 『Yuming Compositions: FACES』(2003년)에 수록되었다.
8. 주요 등반 및 탐험 연표
연도 | 월일 | 활동 내용 | 비고 |
---|---|---|---|
1965 | 4월 23일 | 고준바 캉(초오유 II봉) 등정 | 메이지 대학 산악부 원정대 일원으로, 셰르파 1인과 함께 등정. 세계 최초 |
1966 | 7월 | 몽블랑 단독 등정 | 유럽 대륙 최고봉 (당시 일반적 견해) |
10월 24일 | 킬리만자로 단독 등정 |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 | |
1968 | 2월 5일 | 아콩카과 단독 등정 | 남아메리카 대륙 최고봉 |
4월 20일 - 6월 20일 | 아마존강 6000 km 단독 뗏목 하강 | ||
1970 | 5월 11일 | 에베레스트산 등정 | 일본산악회 원정대 일원으로, 마쓰우라 테루오와 함께 일본인 최초 등정. 세계 최고봉. |
8월 26일 | 매킨리산 (현 데날리산) 단독 초등정 | 북아메리카 대륙 최고봉. 세계 최초 5대륙 최고봉 등정 달성 | |
1971 | 1월 1일 | 그랑드 조라스 동계 북벽 완등 | 공동 등반 |
8월 30일 - 10월 20일 | 일본 열도 3000 km 도보 종단 | ||
1972 | 9월 11일 - 1973년 6월 26일 | 그린란드 북단 시오라팔루크에서 이누이트와 공동 생활 | |
1973 | 2월 4일 - 4월 30일 | 그린란드 3000 km 개썰매 단독행 | |
1974 | 12월 29일 - 1976년 5월 8일 | 북극권 1.20 만 km 개썰매 단독행 | |
1976 | 7월 | 엘브루스산 등정 | 유럽 대륙 최고봉 (다른 견해) |
1978 | 4월 29일 | 개썰매 단독행으로 북극점 도달 | 세계 최초 |
8월 22일 | 개썰매 단독행으로 그린란드 종단 | ||
1980 | 8월 13일 | 아콩카과 동계 2차 등정 | 공동 등반 |
1984 | 2월 12일 | 매킨리산 (현 데날리산) 동계 단독 등정 | 세계 최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