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오카다 아키노부는 오사카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학창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야구 선수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1.1. 어린 시절과 성장
오카다 아키노부는 오사카시 주오구 다마쓰쿠리에서 '오사카 지공소'라는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한신 타이거스의 유력한 후원자로, 무라야마 미노루, 후지모토 가쓰미 등 당시 한신 선수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오카다는 어린 시절부터 한신 타이거스와 깊은 인연을 맺고 성장했다. 유치원 시절에는 당시 한신의 주전 3루수였던 미야케 히데시와 캐치볼을 하며 그를 동경하게 되었다. 훗날 오카다가 한신에 입단하여 등번호 16번을 희망했던 것도 과거 미야케가 착용했던 번호였기 때문이다. 1962년 한신의 우승 퍼레이드에서는 선수들과 함께 차에 탑승하여 거리를 오가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
오사카 시립 아이지쓰 초등학교 5학년 때 난카이 호크스가 운영하던 소년 야구팀 '리틀 호크스'에 입단하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이는 당시 한신이 소년 야구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였다. 아버지의 공장에서도 동네 야구팀을 결성했는데, 오카다 본인도 투수로서 무라야마의 등번호 11번을 달고 마운드에 올랐다. 오카다는 어린 시절부터 한신 고시엔 구장에 한신 경기를 자주 보러 갔지만, 관전 장소는 한신 팬이 많은 1루 측이나 백넷 뒤편이 아닌 상대 팀 벤치가 있는 3루 측이었다. 그 이유는 한신의 라이벌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시게오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곳에서 야유를 보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2. 학창 시절
1972년, 메이세이 중학교 3학년 때 중학교 야구 오사카부 대회에서 우승했다. 1973년 3월, 무라야마 미노루의 은퇴 경기 전에는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오르는 무라야마와 캐치볼 상대를 맡기도 했다. 같은 해 4월, 호쿠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학년 위에는 아리타 후미오 (이후 긴테쓰 입단)와 게이모토 히데아키 (훗날 긴키 대학 ~ 크라운라이터 / 세이부 ~ 긴테쓰)가 있었다.
1973년 여름 여름 고시엔에 좌익수 겸 7번 또는 2번 타자로 출전했다. 3회전에서는 아리타가 미야자키현립 다카나베 고등학교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준준결승에서는 에히메현립 이마바리니시 고등학교에 2대 6으로 패했지만, 이 대회에서 오카다는 3경기 9타수 3안타, 타율 0.333을 기록했다. 3학년 때인 1975년에는 에이스 겸 4번 타자로서 오사카부 예선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고코쿠 고등학교에 0대 2로 패하며 고시엔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 이 무렵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드래프트 지명 제안을 받기도 했다.
오카다는 프로 대신 일반 전형으로 와세다 대학에 합격한 후 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선발 시험에 응시했다. 그는 15타수 14안타 14홈런이라는 경이적인 타격 실력을 선보이며 합격했는데, 본인의 저서에서는 10번의 스윙 중 7번이 펜스를 넘겼다고 회고했다. 와세다 대학 교우회가 발행한 1985년판 회원 명부에도 오카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3학년 선배로는 마쓰모토 마사노리, 요시자와 도시유키, 야기 시게루가 있었고, 2학년 선배로는 사토 기요시, 난바 히데야, 야마쿠라 가즈히로 배터리가, 1학년 선배로는 가네모리 에이지가 있었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1976년 추계 리그부터 7번 타자 겸 좌익수로 주전 자리를 꿰찼고, 호세이 대학의 에가와 스구루를 상대로 3안타를 기록하며 주목받았다. 2학년부터는 과거 동경했던 미야케와 같은 3루수로서 5번 타자를 맡았고, 1978년 추계 리그에서는 3관왕에 오르며 4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같은 해 제7회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3루수 겸 4번 타자로 출전했다. 1979년 춘계 리그에서는 주장을 맡아 리그 2연패에 기여했고, 같은 해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결승에 진출했으나, 고사카 히데노리와 다카기 유타카가 이끄는 주오 대학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그는 제7회와 제8회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하여 전일본 대표팀의 4번 타자로 모든 경기에 나섰다. 이 전일본 대표팀에서는 하라 다쓰노리 (도카이 대학 소속)와 포지션이 겹쳐 오카다가 유격수로 뛰기도 했다. 대학 동기로는 에이스 무카이다 요시모토, 포수 아리가 요시히로, 외야수 시마누키 쇼이치 등이 있다.
오카다의 도쿄 6대학 리그 통산 성적은 88경기 309타수 117안타, 타율 .379, 20홈런, 81타점으로, 타율과 타점은 2023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리그 기록이다. 또한 1977년 추계 리그부터 5시즌 연속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1978년 춘계 리그 도쿄 대학과의 2차전에서는 역대 두 번째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는 등 대학 야구의 스타 선수로 성장했다. 그는 '나의 타격 이론'이라는 주제로 졸업 논문을 썼지만, 실제로는 학점 부족으로 졸업하지 못했다.
2. 선수 경력
오카다 아키노부는 한신 타이거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프로 선수로 활약하며 뛰어난 타격과 수비 능력을 선보였다.
2.1. 프로 입단
도쿄 6대학 야구 역사에 남을 기록들을 연달아 세운 오카다를 영입하려는 프로 구단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그는 1979년 드래프트 회의의 최대어로 주목받았다. 10월 29일 프로 입단 기자회견에서 희망 구단을 묻는 질문에 "(고향인) 한신이라면 최고겠지만, 한큐 (브레이브스) 등 오사카 연고지 구단을 희망한다. 다른 구단이라면 지명될 때 생각해 보겠지만, 프런트가 탄탄하고 우승을 다툴 수 있는 구단이라면 가고 싶다"고 답했다. 또한 "요미우리, 세이부도 우승을 노릴 수 있고 좋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훗날 인터뷰에서는 "내가 외아들이라 어머니가 '간사이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셔서, 실제로는 한신뿐만 아니라 한큐, 긴테쓰, 난카이 등 간사이 연고지 구단이라면 어디든 좋았다"고 밝혔다. 드래프트에서는 당시 역대 최다인 6개 구단(세이부, 야쿠르트, 난카이, 한신, 한큐, 긴테쓰)이 오카다를 1순위로 지명했으나, 추첨 결과 한신이 교섭권을 획득하며 오카다의 한신 입단이 결정되었다. 계약금은 6000.00 만 JPY, 연봉은 480.00 만 JPY였다.
2.2. 한신 타이거스 시절
입단 첫 해인 1980년, 돈 블레이저 감독은 "오카다는 아직 신인이다. 천천히 키우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1루나 외야 연습을 시켰다. 오카다는 블레이저 감독과의 첫 만남에서 통역 겸 코치인 이치하라 미노루를 통해 "아무리 힘 있는 신인이라도 메이저 리그에서는 처음부터 경기에 투입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런 건 상관없다"는 반발심이 생겼다고 저서에 밝혔다. 당시 야수진에는 3루수 가케후 마사유키, 유격수 마유미 아키노부, 2루수 나카무라 가쓰히로와 사카키바라 요시유키, 그리고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영입한 데이브 힐튼이 있어 오카다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게다가 힐튼은 애리조나 스프링 캠프 도중에 팀에 합류했기에, 2루수 전향 계획을 듣고 있던 오카다는 "왜 2루수인 힐튼을 영입하는가"라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고, 곧 블레이저 감독으로부터 외야 훈련을 지시받았다.
시범 경기에서 2개의 홈런을 치는 활약을 보였지만, 1980년 시즌 선발 내야진은 1루수 힐튼, 2루수 가토 히로카즈, 3루수 가케후 마사유키, 유격수 마유미 아키노부로 시작되었다. 힐튼은 시범 경기에서 대형 홈런을 쳤으나 시즌 개막 직후부터 타격 부진에 시달렸고, 수비가 좋다는 이유로 계속 기용되었다. 이후 가케후가 부상으로 이탈한 4월 19일, 20일에도 오카다의 기용이 미뤄지자(이때 오카다도 부상 중이었다는 설도 있음) 팬들 사이에서는 "왜 오카다를 내보내지 않는가"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일부 팬들은 힐튼과 블레이저를 비난했고, 심지어 임신 중인 아내가 동승한 힐튼의 차를 에워싸고 욕설을 퍼붓거나 차를 발로 차는 등의 괴롭힘이 심해졌다. 4월 22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 직전 오즈 쇼지로 구단 사장이 블레이저 감독과 2시간 동안 면담하여 설득했고, 그날 이후 오카다는 3루수로 기용되었다. 힐튼은 18경기 출전, 타율 .197, 0홈런의 부진을 벗어나지 못하고 5월 10일 해고되었다. 한신 구단은 새로 브루스 보우클레어 외야수를 영입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블레이저와 구단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5월 15일, 구단은 불명확한 형태로 블레이저를 해임하고 코치였던 나카니시 후토시를 감독으로 교체했다. 가케후가 복귀한 5월 17일 이후에는 2루수로 기용되어 신인왕을 차지했지만, 오카다는 자신의 힘으로 기회를 잡고 싶었기에 당시 힐튼이 출전할 때마다 "오카다, 오카다"라는 콜이 터져 나온 것에 대해 훗날 인터뷰에서 "그런 외침은 싫었다"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또한 훗날 블레이저의 측근으로부터 블레이저가 "미워서 기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대를 받고 입단한 루키이기에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는 편안한 상태에서 기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기가 미뤄진 것이다"라는 말을 전해 듣고 "지금이라면 이 메시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블레이저도 상당히 고민했을 것이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감독이 되어보니 그 점을 잘 알았다"고 저서에 밝혔다.
이 해 1980년 올스타전 1차전에서 22세 7개월의 나이로 대타 홈런을 쳤는데, 이는 2015년 모리 도모야가 19세 11개월로 대타 홈런을 치기 전까지 올스타전 대타 홈런 최연소 기록이었다. 블레이저 감독과 힐튼 퇴단의 원인이 된 이 해 오카다의 포지션은 가케후 마사유키의 부상으로 3루수가 가장 많았고, 유격수, 2루수, 1루수로도 출전했다. 타순은 전반기 7, 8번에서 점차 올라가 종반에는 5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이 해 그는 규정 타석 (13위, 타율 .290)에도 도달하며 18홈런을 기록했다.
1981년에는 처음으로 전 130경기에 출전하여 20홈런을 기록했으며, 포지션은 2루수로 고정되었다. 전년도 루키 시즌부터 2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훗날 사토 데루아키가 2021년, 2022년에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다부치 고이치만이 달성했던 기록이었다. 1982년에는 안도 모토오 감독이 취임했고, 그는 타율 .300 (리그 9위)을 기록했다. 이 시즌에도 두 자릿수 홈런을 치며 신인 이후 3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한신에서는 이전에 다부치, 이후 사토만이 기록한 바 있다.
1983년에도 개막 후 79경기에서 18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 경쟁에 가담했으나, 7월 10일 히로시마전에서 오른쪽 대퇴이두근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어 남은 시즌을 뛰지 못했다. 이후 다리 부상에 시달리게 된다. 오카다가 이탈한 2루수 자리에는 유격수였던 마유미 아키노부가 들어갔고, 비어있는 유격수 자리에는 히라타 가쓰오가 들어갔다.
1984년에는 스프링 캠프에 참가했으나, 실전 복귀는 늦어져 5월 19일 히로시마전부터 선발로 복귀했다. 처음에는 2루수를 중심으로 랜디 바스가 귀국했을 때 간간이 1루수도 맡았으나, 후반기에는 주로 우익수로 기용되었다. 타격은 타율 .297, 15홈런, 51타점으로, 부상 복귀 후에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남겼다.
1985년, 요시다 요시오 감독이 취임하면서 마유미와 교체되어 다시 2루수로 돌아왔다. 시즌 내내 5번 타자로 활약했다. 4월 17일, 고시엔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 바스, 가케후에 이어 이른바 백 스크린 3연발 홈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때 바스, 가케후에 이은 오카다의 타석에 걸리는 압박은 매우 컸는데, 그는 훗날 "안타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홈런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슬라이더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또한 백 스크린 3연발 전날 요미우리전에서도 1대 2로 뒤진 4회말 2사, 볼넷으로 출루한 오카다는 사노 노리요시가 친 평범한 플라이를 유격수 고노 가즈마사가 놓치는 사이에 1루에서 단숨에 홈으로 쇄도하여 대량 7점의 맹공으로 연결시키는 활약을 보였다. 요시다 감독도 "그 오카다의 전력 질주가 매우 컸다"고 평가했다.
같은 해 8월 12일, 당시 구단 사장이었던 나카노 하지무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특히 한신 선수들 중에서도 나카노의 총애를 받아 스스로 '비행기파'라고 칭했던 오카다가 받은 충격은 컸다고 한다. 8월에는 타율 .429, 10홈런, 31타점을 기록하며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다. 또한 9월 15일 고시엔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는 끝내기 2점 홈런을, 다음 날 16일에도 끝내기 중전 안타를 치며 2경기 연속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는 선수회장 겸 5번 타자로서 바스에 이어 리그 2위 타율 .342, 리그 4위 35홈런, 리그 5위 101타점이라는 개인 최고 성적을 남기며 마유미, 바스, 가케후 등과 함께 구단 최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86년에는 전년과 마찬가지로 5번 타자 겸 2루수로 개막전에 선발 출전했고, 4월 후반 가케후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4번 타자로 발탁되었다. 5월 중순 가케후가 복귀하자 5번으로 돌아왔으나, 이 해 가케후는 부상으로 인한 이탈을 반복했기에 8월 말 이후 시즌 종료까지 4번 타자를 맡았다. 9월 3일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다음 날 9월 4일 다이요전에 출전하여 홈런을 쳤다. 전년보다는 성적이 떨어졌지만, 타율 .268, 26홈런, 70타점으로 주축 타자에 걸맞은 성적을 남겼다.
1987년에는 타율 2할 5푼대, 14홈런으로 팀의 부진을 대변하는 성적을 기록했으나, 이후 3년 연속 20홈런을 기록했다. 1988년에는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이 취임했고, 개막 시에는 5번 2루수, 5월 이후에는 4번 2루수로 기용되었다. 타율 .267, 23홈런, 72타점으로 타격 성적이 회복되었다.
1989년, 가케후의 은퇴에 따라 대학 시절 주 포지션이었던 3루수로 다시 변경되었다. 6월 25일 고시엔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는 1대 4로 뒤진 8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빌 걸릭슨으로부터 좌익수 폴대 근처로 극적인 역전 만루 홈런을 터뜨렸다. 공교롭게도 30년 전 천황 참관 경기와 같은 날이었고, 스코어도 5대 4로 뒤집히며 천황 참관 경기 승리 투수였던 요미우리 감독 후지타 모토시 앞에서 패전 투수였던 무라야마 미노루의 설욕을 갚았다. 그는 이닝 초에 전광판을 보고 "2아웃 만루라면 나에게까지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기회가 왔다고 훗날 회고했으며, 히어로 인터뷰에서도 "3점 차였으니 만루에서 돌아오면 홈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이 홈런을 포함해 월간 8홈런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같은 달 9홈런을 기록한 팀 동료 세실 필더를 제치고 프로 데뷔 후 두 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
1990년부터 나카무라 가쓰히로 감독이 취임하면서 야기 히로시가 유격수에서 3루수로 전환되었고, 오카다는 2루수로 돌아갔다. 1991년에는 규정 타석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율, 안타, 타점 모두 개인 최저 성적을 기록했다.
1992년,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회장으로서 FA 제도 도입에 힘썼다. 선수로서는 이 해부터 2루수 자리를 와다 유타카에게 내주고 1루수로 전환되었으나, 신조 쓰요시와 가메야마 쓰토무 등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밀려 타율이 1할대로 떨어지는 심각한 타격 부진에 빠지며 선발 출전 기회가 급감했다. 4월 25일 경기에서는 대타로 가메야마가 기용되기도 했다. 그날 밤 원정 숙소에서 식사 중 가메야마가 사과하러 오자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라고 답했지만, 다른 젊은 선수들이 이를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을 깨닫고 주위에서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 해 오프 시즌에는 다음 시즌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어 트레이드를 희망한다는 소식이 나왔고, 한때 다이에 이적 가능성이 높게 보도되기도 했으나, 구단의 만류로 잔류에 합의했다.
1993년, 다시 외야수로 기용되었으나 출전 기회는 전년보다 더욱 줄어들었고, '체력 저하' 등의 이유로 한신에서 자유 계약 선수로 공시되며 팀을 떠났다.
2.3.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이듬해 1994년 스프링 캠프 직전 오기 아키라 감독이 이끄는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입단했다. 기자회견에서는 "앞으로도 한신 팬으로 계속 있을 것이다"라며 눈물을 흘리는 등 신인 시절부터 몸담았던 한신과의 결별을 아쉬워했다. 입단 직전 주간지에서 불륜 스캔들이 폭로되어 현역 은퇴 위기에 몰렸으나, 경찰 조사 결과 스캔들 자체가 자칭 '애인'이라는 여성이 금전 목적으로 꾸민 자작극으로 판명되었고, 오히려 오카다가 공갈 협박을 당해 200.00 만 JPY를 빼앗긴 사실이 밝혀져 경찰의 강제 수사가 진행되었다. 최종적으로 그 여성은 공갈 혐의로 긴급 체포되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풍부한 기술과 경험을 가진 오카다를 포기할 수 없었던 오릭스가 리스 회사를 본업으로 하기에 사내에 조사 전문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를 동원하여 진실의 단서를 잡은 것이 공갈 사건 수사로 이어졌다.
1994년 봄 캠프 중, 오릭스에 1989년 1순위로 입단했으나 부진했던 펀치 사토가 후지 TV '프로 야구 뉴스' 카메라 앞에서 "올해 부활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그 해 한신에서 이적한 오카다를 발견하고 "오카다 씨, 같이 사진 찍읍시다. 저와 함께 카메라 앞에서 '올해 부활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말합시다!"라며 강력히 권유했다. 그러나 오카다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노골적으로 싫어했고 "부활이라니, 나는 그렇다 쳐도 너는 잘 나갈 때가 있었나"라고 되받아쳤다. 펀치 사토는 "아니, 저도 주목받은 적도 있습니다. 올해는 반드시 잘해보려고 합니다. 같이 찍읍시다!"라며 끈질기게 매달렸지만, 일류 선수로서의 자존심이 높기로 유명한 오카다는 기가 막힌 듯한 표정으로 "부활이라니, 너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라"며 끝까지 거부했다. 이는 펀치 사토에게 길조라고 할 수 없는 현역 마지막 시즌의 시작이었다. 시범 경기에서는 타석에 섰을 때 한신 팬들로부터 응원을 받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1995년에는 출전 기회가 더욱 줄어들었지만, 오릭스에서 10년 만의 우승을 경험했다. 그는 1985년 한신 시절 이후 10년 만에 우승을 맛본 것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1995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출전 기회가 없었다. 1996년 3월 26일, 친정팀 한신과의 시범 경기가 은퇴 경기로 치러졌고, 오카다는 경기 종료 후 한신과 오릭스 양 팀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은 후 그라운드를 떠났다. 현역 시절에는 스포츠 용품 제조업체인 SSK의 어드바이저리 스태프를 맡기도 했다.
2.4. 선수로서의 특징
오카다 아키노부는 뛰어난 타격 기술과 안정적인 수비력을 겸비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2.4.1. 타격
그의 타격은 인코스 공을 잘 처리하고 낮은 공에 강점을 보였다. 그는 상대 투수의 배합을 읽고 타격하는 스타일로, 현역 시절 대부분 초구 타격을 하지 않았다. 이는 "초구는 무엇이 올지 알 수 없다. 2스트라이크 이후에는 직구나 결정구가 올 것이다. 노림수를 잡기 쉽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2스트라이크에 몰린 후 타격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그는 선구안이 뛰어나 삼진이 적고 볼넷이 많은 타자였다.
오랫동안 한신의 주축 타자로 클린업을 담당하며 프로 데뷔 후 12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는 등 슬러거로 활약했지만, 의외로 시즌 30홈런 이상을 기록한 것은 우승했던 1985년 시즌 단 한 번뿐이었다. 타율 3할 달성도 통산 2회에 불과하여 타격 타이틀을 획득하지는 못했다(신인왕은 수상). 1985년 우승 시즌에는 타율 .342, 35홈런, 101타점으로 모두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하며 트리플 크라운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쳤으나, 팀 동료 랜디 바스가 그 이상의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에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했다(타율은 바스에 이어 2위였다). 1990년 시즌에도 개막부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양 리그 통틀어 10호 홈런을 가장 먼저 달성했으나, 이후 성적을 더 이상 끌어올리지 못하고 20홈런으로 시즌을 마쳤다. 그는 개인 타격 타이틀보다는 팀 성적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으며, 팀 상황에 맞는 타격을 지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말했다는 "안타 1개, 볼넷 1개로 수위 타자"라는 말을 타격의 격려로 삼았다고 한다.
2.4.2. 수비
대학 시절 주로 3루수를 맡았지만, 프로 입단 후에는 3루에 가케후가 있었기 때문에 2루수로 정착했다. 그러나 1983년 시즌 도중 오른쪽 대퇴이두근 파열이라는 중상을 입자, 당시 안도 모토오 감독이 부상당한 하체 부담을 고려하여 복귀 후에는 외야수(우익수)로 기용했다. 이후 요시다 요시오 감독이 취임하자 다시 2루수로 전환되었고, 가케후 은퇴 후에는 한때 외야수를 맡기도 했지만, 3루수나 1루수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야 수비의 명수로 평가받았으며,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1985년에는 2루수 부문에서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또한 유격수 히라타 가쓰오와의 섬세한 연계를 보여주었다. 2003년 호시노 센이치 감독 밑에서는 내야 수비 코치로서 3루 베이스 코치도 겸임했는데, 타격이 주특기인 선수였지만 수비 경험과 실적도 풍부한 선수였다.
3. 지도자 경력
오카다 아키노부는 선수 은퇴 후 코치와 감독으로서 일본 프로 야구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3.1. 코치 시절
1996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2군 조감독 겸 타격 코치로 부임했다. 2년 후인 1998년에는 2군 조감독 겸 타격 코치로서 한신 타이거스에 다시 복귀했으며, 이 무렵 자동차 운전 면허를 취득했다.
1999년에는 2군 감독 겸 타격 코치로 부임했고, 이때 육성했던 선수들이 훗날 주력 선수로 성장하게 되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는 2군 감독(전임)을 역임했는데, 1999년과 2002년에는 팜 일본 선수권에서 우승하며 두 차례 일본 2군 우승을 이끌었다. 훗날 1군 감독 퇴임 시 추억에 대해 "2군에서 젊은 선수들이 성장해 나가는 것이 즐거웠고, 그것이 (1군 감독 때보다) 더 추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2003년에는 1군 내야 수비 주루 코치로 배치 전환되어 3루 베이스 코치를 담당했다. 3루 베이스 코치로서의 상황 판단은 정확무비했다. 오니시 다카유키는 현역 시절 '잘한다고 생각한 3루 코치'로 오카다의 이름을 꼽았다.
3.2. 제1기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03년 시즌 종료 후, 건강 문제로 물러난 호시노 센이치의 후임으로 제30대 1군 감독에 취임했다. 오사카부 출신 감독은 구단 창단 69년 만에 처음이었다. 등번호는 코치 시절부터 이어 '80'번을 사용했다. 취임 당시 "기대해도 좋습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감독 첫 해인 2004년에는 이가와 게이 등 우승에 기여했던 선수들의 부진과 이라부 히데키의 세트 포지션 약점, 조지 아리아스의 기복 심함, 마이크 킨케이드의 잦은 사구로 인한 부상, 그리고 제로드 리건의 부상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로 출전한 제프 윌리엄스와 안도 유야의 부재로 인한 전력 약화가 겹쳐 결국 4위로 시즌을 마쳤다.
2005년에는 제프 윌리엄스, 후지카와 규지, 구보타 도모유키로 구성된 'JFK'를 승리 방정식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9월 7일 나고야 돔에서 주니치와의 2경기 차 선두 다툼 경기에서, 9회초 미묘한 홈 크로스 플레이 아웃 판정이 빌미가 되어(홈에서 아웃된 주자는 공교롭게도 11회에 결승타를 친 나카무라 유타카였다), 직후 9회말 같은 홈 크로스 플레이 세이프 판정을 놓고 심판진에게 격렬히 항의하며 선수 전원을 일시적으로 벤치로 철수시키기도 했다. 이후 프런트의 설득으로 몰수 경기는 피했지만, 아카호시 노리히로의 낙구로 인해 끝내기 패배 위기에 몰렸다. 이때 감독 취임 후 처음으로 마운드로 향하여 마무리 투수 구보타에게 "이제는 맞아라! 맞아도 네 잘못 아니다. 내가 책임질 테니 마음껏 던져라!"라고 말했다. 구보타는 후속 타자 와타나베 히로유키와 타이론 우즈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냈고, 11회초 나카무라 유타카의 홈런이 결승점이 되어 사투를 승리했다. 이 한편 무책임하게 들릴 수 있는 말 속에는 "설령 이 경기에 지고 우승을 놓친다 해도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강한 각오가 담겨 있었다. 경기 종료 후 오치아이 히로미쓰 주니치 감독은 "오늘은 감독의 차이로 졌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이 경기를 기점으로 한신은 연승을 거듭했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일인 9월 29일,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2005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지바 롯데 마린스에 4전 전패로 무릎을 꿇었다. 시리즈 내내 4경기 중 3경기가 큰 점수 차로 뒤지고 있었기에, 근소한 차이였던 4차전을 제외하고는 'JFK'(후지카와만 3차전에도 등판)를 기용하지 않았다. 11월 19일,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팬 감사 데이 이벤트 '꿈의 OB 교류전' 백청전에서 오카다는 백팀의 플레잉 매니저로 출전했다. 경기 마지막에 '대타, 나'로 타석에 들어서 끝내기 2점 홈런을 치며 MVP에 선정되었다.
2006년 3월 6일,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호랑이를 보호하기 위해 호랑이 보호 기금으로 2006년 시즌 공식 승리 수와 같은 수의 호랑이 보호 레인저용 장비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2006년 승리 수와 같은 84개 분의 장비 대금 75.60 만 JPY (1세트 약 9000 JPY)를 기부했다. 이러한 활동이 평가되어 12월 12일 인도 정부로부터 "한신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세에 용기를 얻었다. 지원에 매우 감사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2007년 6월 8일 오릭스전(고시엔 구장) 8회말, 타자 도리타니 다카시의 수비 방해를 놓고 구심 다니 히로시에게 항의하던 중 심판의 가슴을 밀쳐 현역, 코치, 감독 생활 통틀어 첫 퇴장 처분을 받았다. 8월 16일 주니치전(교세라 돔 오사카)에서는 8회말 1루 주자가 2루에서 아웃된 것을 두고 2루심 이노 오사무에게 항의하며 가슴을 밀쳐 두 번째 퇴장을 당했다. 같은 시즌에 두 차례 퇴장당한 감독은 여럿 있지만, 한신에서는 오카다가 처음이었고, 센트럴 리그 일본인 감독 중에서도 최초였다.
2008년, 팀은 개막부터 순조롭게 선두를 질주했으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에 주력 선수인 아라이 다카히로, 야노 아키히로, 후지카와 규지를 파견한 이후 팀 분위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타격진의 부진과 부상자 속출 등으로 한때 13경기 차이로 앞서던 요미우리에게 종반에 역전을 허용하며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놓쳤다. 이 책임을 지고 이 시즌을 끝으로 사임을 발표했다. 2008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1스테이지 최종전에서 패배하며 이 시리즈가 그의 마지막 지휘가 되었다. 경기 종료 후 선수회장 아카호시 노리히로의 제안으로 선수들과 코치들로부터 감독을 맡았던 햇수와 같은 5번의 헹가래를 받았다.
3.3. 오릭스 버펄로스 감독

2009년 10월 13일, 다음 시즌부터 오릭스 버펄로스 감독으로 취임한다고 발표되었다. 계약 내용은 3년 계약에 1.00 억 JPY, 등번호는 한신 감독 시절과 같은 '80'번이었다. 팀 편성, 홍보 등 전권을 위임받아 실질적으로 단장을 겸임하는 형태였다. 오카다 본인은 10월 14일 취임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로써 오카다는 옛 블루웨이브 시절의 구단 OB로서 최초로 오릭스 버펄로스 감독이 되었다. 한큐·오릭스 구단에서 OB 감독은 1980년 시즌의 가지모토 다카오 이래 30년 만이었다.
2010년 3월 31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도쿄 돔)에서 T-오카다가 결승 홈런을 터뜨리며 승리, 한신 감독 시절을 포함한 통산 400승을 달성했다. 6월 8일 투수 코치 호시노 노부유키가 휴양에 들어가고 후임으로 고바야시 히로시가 취임했으나, 고바야시의 경험 부족으로 투수 기용에 대해서는 자신이 결정하겠다고 밝히며 투수 코치도 겸임하게 되었다. 이 시즌 교류전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T-오카다와 투수 가네코 지히로의 약진이 있었으나, 후반기에 패전이 늘어나며 최종적으로 5위로 마쳤다.
2011년 시즌 초반에는 팀 타율이 2할을 밑도는 극심한 타격 부진으로 한때 최하위로 떨어졌다. 교류전에 들어서며 컨디션을 회복하여 15승 7패 2무로 2위를 기록하며 약진했으나, 이후 대량 연승과 연패를 반복하며 기복이 심했다. 7월 2일과 3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이틀 연속 끝내기 승리를 거두고, 5일에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도 끝내기 승리를 거두며, 한신 감독 시절인 2008년 9월 9일~11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상대로 3경기 연속 끝내기 승리를 거둔 이래 두 번째로 3경기 연속 끝내기 승리를 달성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한 감독이 되었다. 8월 7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감독 통산 500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무승부만 기록해도 2011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이 확정되었던 최종전에서 패하며 1모 차이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 3위를 내주어, 팀으로서는 3년 만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및 A클래스 진입에 실패했다. 또한 이 해에는 부진에 시달리던 주장 고토 미쓰타카와 아롬 발디리스, 그리고 중반에는 4번 타자 T-오카다 등 주력 선수들을 연달아 2군으로 강등시키는 등, 한신 감독 시절에는 보기 드물었던 1군과 2군 간의 잦은 선수 교체 지휘를 보여주었다.
2012년에는 전년도 오프 시즌에 대규모 보강을 단행하며 '우승'을 입에 올릴 정도였다. 그러나 시즌 중 주력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 이탈로 개막 초부터 부진에 빠졌다. 4월에 한 차례 승률 5할을 회복한 적은 있었으나, 이후 단 한 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하며 퍼시픽 리그에서 가장 먼저 B클래스가 확정되었다. 3년 계약 기간 만료를 앞두고 9월 22일 구단으로부터 계약 갱신 불가 통보를 받아 시즌 종료 후 정식 퇴임이 발표되었다. 구단 측은 시즌 종료까지 지휘를 맡길 방침이었으나, 시즌 최하위가 확정된 다음 날인 9월 25일, "다음 시즌을 위한 시작을 빨리 하고 싶다"는 이유로 방침을 변경했다. 헤드 코치 다카시로 노부히로와 함께 휴양에 들어간다고 발표하며 사실상 경질되었다.
3.4. 제2기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22년 시즌 중반부터 같은 해를 끝으로 퇴임을 표명한 야노 아키히로의 후임 후보로 이름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9월 하순 한신 구단이 LINE을 통해 언론사에 '보도 규제'를 요청했다는 보도도 있었으나, 9월 27일 산케이스포츠는 '오카다가 차기 감독으로 내정'되었다고 보도했다. 시즌 종료 후인 같은 해 10월 15일, 오카다의 감독 취임이 공식 발표되었다. 등번호는 제1기 감독 시절 및 오릭스 감독 시절과 동일한 '80'번이 되었다.
2023년 시즌, 그는 그동안 타순이나 포지션이 유동적이었던 오야마 유스케를 '4번 1루수', 사토 데루아키를 '5번 3루수'로 고정했다. 또한 나카노 다쿠무를 2루수로 전환하고, 비어있는 유격수 자리에는 기나미 세이야를 기용했다. 투수진에서는 3년차 무라카미 쇼키와 소프트뱅크에서 현역 드래프트로 영입한 오타케 고타로를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시키고, 시즌 초반 부진했던 유아사 아쓰키 대신 이와사키 유를 마무리로 전환했다. 타순은 시즌 내내 거의 고정하는 등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며 순조롭게 시즌을 이끌었다. 그리고 9월 14일, 한신 구단으로서는 18년 만이자 통산 6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공교롭게도 이전 우승(2005년)과 동일하게 '목요일 고시엔 구장에서의 요미우리전 나이트 게임'에서 우승을 확정 지었다. 또한 이날이 감독 취임 발표 후 334일째 되는 날이라는 점도 화제가 되었다. 66세가 되는 시즌에 우승한 감독은 퍼시픽 리그를 포함해도 2013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호시노 센이치 (당시 66세 9개월)와 동률로 최고령 타이 기록이며, 리그 우승 확정 시점의 나이(65세 9개월)로는 2000년 나가시마 시게오 (당시 64세 7개월)가 가지고 있던 센트럴 리그 최고령 기록을 경신했다. 한신 감독으로서 두 차례 리그 우승을 달성한 것은 1962년, 1964년에 우승한 후지모토 데이기 이래 59년 만에 두 번째였다.
히로시마와 맞붙은 2023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4승 0패(리그 우승 어드밴티지 1승 포함)로 승리하며, 오카다에게는 18년 만의 일본 시리즈 출전이 결정되었다. 과거 선수와 감독으로 몸담았던 오릭스와의 2023년 일본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승 3패로 승리하며, 구단으로서는 1985년 이래 38년 만이자 통산 두 번째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오카다는 1985년 선수로서, 2023년 감독으로서 한신 타이거스의 두 차례 일본 시리즈 우승을 모두 경험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선수와 감독 양쪽에서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구단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또한 65세 11개월의 나이로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은 2013년 호시노 센이치(당시 66세 9개월)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최고령 기록이었다.
2024년 7월 6일 DeNA전 승리로 한신 감독으로서 통산 515승에 도달하며 후지모토 데이기의 514승을 넘어 구단 역대 단독 1위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3일 시즌을 끝으로 퇴임한다는 보도가 나왔고, 10월 6일 정식으로 퇴임을 표명했다. 이 해는 끝까지 우승 경쟁에 참여했으나, 최종적으로 리그 우승팀인 요미우리에 3.5게임 차이로 2위에 그쳤다. 마지막 지휘는 10월 13일 2024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2차전(DeNA전)으로, 3대 10으로 대패하며 제1기 정권 및 오릭스 시절을 포함한 통산 10년간의 감독 생활을 마쳤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개막 직전 감기에 걸린 영향으로 경기 후 팬들에게 인사는 하지 않았으며, 구단주에게 시즌 종료 보고나 감독 퇴임 기자회견도 열리지 않았다. 이후 같은 달에는 건강이 회복되어 10월 28일 니시노미야시 구단 시설을 건강한 모습으로 방문한 것이 보도되었다.
3.5. 감독으로서의 철학과 전술
오카다 아키노부는 감독으로서 견실함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야구에 관해서는 마이너스부터 생각한다. 항상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고 경기를 진행한다. 이것이 나의 감독론이다"라고 밝혔다. 후지타 다이라도 그를 인정하며 "팀을 이끄는 능력, 소질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메이저 리그에서 개발된 확률론을 근간으로 하는 세이버메트릭스에 가까운 팀 만들기를 이상으로 한다. 오카다는 저서에서 세이버메트릭스 관련 책을 읽은 적이 없고, 관련 문헌이나 이론의 존재를 나중에 알았다고 밝혔다. 자신이 실천한 야구가 "조금 세이버메트릭스를 활용한 야구와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고 말하며, "세이버메트릭스 전략을 사용한다"는 세간의 소문은 "정확히 말하면 틀린 말이다"라고 했다.
한신 감독 취임 당시 적었던 번트가 2008년에는 리그 1위를 기록했다. 이에 대해 그는 "생각이 바뀐 것이 아니라, 팀의 진용이 바뀌었기에 팀의 강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확률을 추구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번트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왜 아웃을 하나 내주는가"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하면서도, 상황에 따른 필요성은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스퀴즈 플레이에 대해서는 타자에게 주는 부담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사인을 내지 않는다. 2011년 8월 12일 세이부전에서의 스퀴즈가 한신 시절을 포함해 감독 취임 953경기 만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례였다.
선수의 컨디션이나 상대 팀과의 상성에 따라 타순을 바꾸거나 선발 로테이션을 무너뜨리는 것을 기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다. 벤치워크가 필요 없는 스타일이 확립된 팀이야말로 최강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오카다는 "벤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도 하지 않다가 문득 정신 차려보면 1대 0으로 이기고 있더라. 그런 경기가 가능한 팀의 감독이 이상적이다"라고 저서에 밝혔다. 2004년 가네모토 도모아키를 4번 타자로 고정시킨 이후 컨디션과 무관하게 5년간 단 한 번도 타순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대해 가네모토가 "쉬지 않고 경기에 나오는 팀의 기둥"이라는 오카다가 생각하는 4번 타자에 적합한 선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투수 분업인 JFK의 확립 등도 오카다의 승리 방정식을 중시하는 사상이 짙게 반영된 결과이다.
위기에 빠진 투수 등에게 다른 감독들은 직접 마운드로 가는 모습을 자주 보이지만, 오카다의 경우 한신 감독 시절 2005년 9월 7일 주니치전과 2006년 6월 1일 라쿠텐전의 구보타, 2006년 8월 31일 주니치전과 2008년 7월 18일 주니치전의 후지카와, 오릭스 감독 시절 2010년 8월 22일 롯데전과 2011년 6월 15일 요코하마전, 2012년 7월 10일 라쿠텐전의 기시다 마모루에 대해 총 7차례뿐이었다. 이 중 팀이 끝내기 패배를 당한 것은 7번째 경기뿐이다(6번째는 연장 규정으로 무승부). 오카다는 저서 《완고력》에서 "마운드로 가서 투수나 배터리에게 조언을 하는 것은 감독이 아닌 피칭 코치의 일이다. '맡긴다'는 키워드가 감독과 코치의 신뢰로 이어진다"고 밝혔다. 자신이 마운드에 갔던 사례 중 2005년과 2008년 주니치전은 모두 페넌트레이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경기였다고 밝히며, "본래 이런 마운드 퍼포먼스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고, 결코 좋아하는 행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카다 자신은 2군에서의 경험이 거의 없지만, 2군 젊은 선수들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한신 감독 시절에는 경기가 없는 날에도 2군 구장인 한신 나루오하마 구장을 자주 찾았다. 그는 "팜에서도 젊은 선수들을 제대로 키워 야구를 가르친다. 그리고 감독이 여러모로 노력하여 팀의 결과를 쌓아나가는 감독업이야말로 재미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현역 시절 수위 타자를 아쉽게 놓친 경험이 있기에 선수 기용에서 개인 기록을 중시하며, "팀의 승리가 최우선이라는 것이 대원칙"이라는 조건 하에 "감독으로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대한 힘을 빌려줄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가네모토 도모아키의 연속 경기 풀이닝 출전, 도리타니 다카시의 연속 경기 출전 기록 경신, 사카구치 도모타카의 수위 타자 경쟁 등에도 전폭적으로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한신 1군 감독 시절인 2008년 종반 'JFK를 혹사했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감독 퇴임 후 저서 《완고력》 등을 통해 "항상 그들의 피로도를 살피면서 기용했다"고 반박했다. "그들에게는 그 한 구, 한 이닝이 자신의 연봉과 평가를 높이는 생활의 양식이다"라고 주장했다. JFK와 같은 구원 투수들에 대해서는 한신 1군 감독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3연투를 최대한 피하는 등의 배려를 했다.
일본 시리즈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등 단기 결전으로 치러지는 포스트시즌 경기에서는, 그의 제1기 한신 감독 시절에는 당시 선수들의 컨디션보다는 시즌 초부터의 팀 이상형을 고집하는 스타일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한신 감독으로 복귀한 2023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1차전과 2차전에서 정규 시즌의 '볼넷 기다리기' 대신 초구부터 적극적인 히팅을 지시했고, '매치 포인트'였던 3차전에서는 히로시마가 스트라이크를 잡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다시 기다리는 작전으로 전환하는 등, 선발 라인업 자체는 정규 시즌과 동일하게 유지하면서도 "상대가 수를 두면, 그보다 더 나은 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방식으로 4승 0패(리그 우승 어드밴티지 1승 포함)로 승리했다.
팀의 목표는 '우승'을 향한 팀 만들기였지만, 시즌 중에 '우승'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피하는 경향이 있다. 2009년 오릭스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도 "우승한다고는 말 못합니다. 무섭습니다. 그렇게 쉽게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 예를 들어, 2010년 오릭스 감독 시절 팀은 교류전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오카다는 선수들에게 우승을 의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우승'이라는 단어를 봉인하고, 보도진에게는 '그것'(アレ아레일본어)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그러자 팀은 교류전 선두에 올랐고, 구단주 미야우치 요시히코조차 "저도 '그것'이라고밖에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팀이 교류전 우승을 달성하자, 팀은 기념 상품으로 '그것 해버렸다'(アレしてもうた일본어)는 문구가 새겨진 셔츠와 수건 등을 판매했다.
- 2022년 10월 한신 감독 복귀 취임 기자회견에서도 "'우승하겠습니다' 같은 말은 잘 못하지만, 계속 우승은 '그것'이라고만 말해왔습니다. 분명히 '우승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진 않지만, 시즌이 끝날 때쯤 기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발언했고, 같은 달 추계 연습 시에는 선수들에게도 '그것'이라는 단어 사용이 "침투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그 결과, 2023년 팀 슬로건이 'A.R.E. (Aim! Respect! Empower!)'(읽을 때는 '에이 아르 이')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일종의 배크로님이다.
- 한신은 오카다 감독 복귀 전까지 17년간 우승 경쟁을 펼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약해 근소한 차이로 우승을 놓치는 시즌이 이어졌기에, 과도하게 우승을 의식하지 않도록 하는 이 표현은 한신 팬들로부터도 지지를 얻었다. 리그 우승이 임박했던 2023년 시즌 종반에는 오사카 지역 언론을 중심으로 언론계에도 빠르게 퍼져 '우승' 대신 '그것'이라고 바꿔 말하며 우승의 순간을 고대하는 사례가 많았다.
- 2023년 시즌 한신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면서, 이 슬로건은 '그것 (A.R.E.)'으로 2023년 신어·유행어 대상의 대상을 수상했다. 오카다는 유행어 대상 시상대에서 '그것'인 이유에 대해 "'이것'은 바로 손이 닿는다. '저것'은 멀다. '그것'은 조금만 더 가면 닿을 수 있다"고 설명하며, 취임 전 2, 3위가 많았던 한신에게 "딱 좋았다"고 말했다. 참고로 'A.R.E.'에 이어지는 각 단어는 오카다의 아내가 고안했다.
2010년 교류전에서는 지명 타자제를 사용할 수 없는 원정 12경기 중 11경기에서 투수를 8번 타자로 기용했다.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지금까지 지명 중복 시 추첨운이 좋지 않았다. 2008년까지의 한신 감독 시절에는 다카하마 다쿠야를 뽑았을 뿐 통산 1승 3패로 실패가 많았다. 오릭스 감독 시절에도 2010년 1순위 지명 추첨에서 실패하여, 사상 처음으로 한 번의 드래프트 회의 1순위 지명 추첨 3연패를 기록했고, 이듬해 2011년에도 1순위 지명 경합이었던 다카하시 슈헤이의 추첨에서 실패했다. 한신 감독으로 복귀하여 참가한 2022년에도 통산 1승 11패로 오카다와 마찬가지로 추첨운이 좋지 않았던 요미우리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과의 직접 대결 끝에 아사노 쇼고를 놓쳤다.
오릭스 감독 시절에는 팀의 주전 포수였던 히다카 다케시의 리드에 대해 여러 차례 비판했다. 스프링 캠프 단계부터 히다카의 포수 리드에 의문이 있었고, 시즌이 시작되자 대량 실점을 반복하는 일도 있어 2010년에는 타율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세 차례나 2군으로 내려갔다. 2011년 이후에는 히다카를 포수로 거의 기용하지 않았지만, 2012년 종반에는 이토 히카루, 사이토 도시히코 등 두 명의 포수를 징벌적 차원에서 말소했기 때문에 자신이 휴양에 들어갈 때까지 히다카를 포수로 기용했다. 히다카는 알렉산드로 마에스트리의 일본 무대 첫 완투승과 마에다 유지의 첫 선발승을 돕는 등 좋은 리드로 기용에 부응했다.
3.5.1. 야구 관계자로부터의 평가
2004년 투수 코치를 맡았던 사토 요시노리는 한신 투수 코치직에서 물러날 당시 "너무 완고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2005년 일본 시리즈에서 한신과 맞붙었던 지바 롯데 마린스의 바비 밸런타인 감독은 시리즈 종료 후 당시 오카다를 평가하며 "10년 전의 나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무라 가쓰야는 2006년 시즌 전 "(주니치 감독인) 오치아이의 야구가 상식적인 야구이지, 오카다의 야구는 훨씬 특이한 지휘 방식이다"라고 평가했다. 노무라는 2008년 개막 전 출간한 저서 《아아, 한신 타이거스 - 패한 이유, 이긴 이유》(가도카와 쇼텐)에서 오카다가 사인을 내지 않고 선수들에게 맡긴다는 소리를 가네모토 도모아키에게서 들었다며 "감독의 일을 포기하고 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비판했다. 한편, JFK 구원진을 구축한 것에 대해서는 "새로운 방정식을 만들었다"며 "이 점은 순수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6회까지는 선수 주도로 경기를 하게 하는" JFK나 "선수에게 일임하기"는 선수 개개인의 문제의식을 높이는 사고방식에 기반할 가능성이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명감독이 될 재목일 수도 있으나, 이는 향후 한신의 성적에 따라 밝혀질 문제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에 대해 오카다는 한신 감독 퇴임 후 출간한 저서 《완고력》에서 노무라가 자신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나 스스로는 나름대로 야구에 대한 생각이 있다. ... 사인이나 작전에 관해서도 상황에 맞게 작전을 세운다. 당연한 일이다. ... 굳이 따지자면 노무라 씨와 나의 생각은 정반대일지도 모르겠다."
3.6. 감독 퇴임 이후 경력
오카다 아키노부는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야구계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했다.
2008년 11월, 데일리 스포츠 신문사와 객원 야구 평론가로 계약을 맺고 연말까지 자서전 칼럼을 집필했다. 2009년 2월 1일 아사히 방송의 '도라반'에서 해설자로 데뷔했으며, 닛폰 TV·요미우리 TV·아사히 방송·선 TV·스카이 에이를 중심으로 오사카 지역 방송국에서 프로 야구 해설자로 출연했다. 평론 활동과는 별도로 2009년 시즌 개막 전 일본 야구 기구로부터 '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통상 임기는 2년이었으나, 훗날 오릭스 감독 취임으로 인해 1년 임기를 남기고 퇴임했다.
2013년부터는 데일리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 복귀했다. 이 신문에서는 1월부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야구계의 시의성 있는 화제 등을 독특한 견해로 정의하는 '오카다 사전'이라는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또한 '그야 그렇지'(そらそうよ소라소요일본어)('그건 그래요'라는 의미의 간사이 방언)를 자주 사용하는 점을 바탕으로, '한신 전 감독 OKADA류 야구론 오카다 아키노부의 그야 그렇지'라는 연재 칼럼을 《슈칸 베이스볼》에서 담당했다. 아사히 방송·요미우리 TV·Tigers-ai 등을 중심으로 프로 야구 중계 해설도 재개했다(라디오는 아사히 방송의 사실상 전속 출연이었다). 2017년부터는 와세다 대학 후배인 에지리 신타로와 함께 히가시닛폰 방송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공식전 중계나 스포츠 프로그램에서 해설을 맡았다.
2024년 10월 3일 시즌 종료 후 퇴임이 보도되었고, 10월 6일 정식으로 퇴임을 표명했다. 한신 감독 후임은 구단 본부 부속 스페셜 어시스턴트(SA) 후지카와 규지에게 인계되었으며, 2024년 11월 1일부로 '오너 부속 고문'으로서 3년간 계약 기간으로 구단 프런트에 합류했다.
4. 개인 생활 및 인간 관계
오카다 아키노부는 야구 외적으로도 독특한 별명, 좌우명, 취미,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애칭은 '오카'(オカ오카일본어)와 '돈덴'(どんでん돈덴일본어)이다. '돈덴'은 과거 아지노모도가 판매했던 '혼다시 간사이 명물 우동 오뎅 육수'(통칭 '돈덴')의 광고에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사카타 도시유키와 함께 출연했을 때, 사카타의 "우동 육수는 뭐냐?"는 질문에 오카다가 "돈덴이요", "육수는 돈덴"이라고 답한 유려한 대화가 큰 화제가 되면서 이후 '돈덴'이 오카다의 애칭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지시어나 생략이 많은 오카다의 말을 애칭 '돈덴'에 빗대어 '돈어'(どん語돈고일본어), 그의 코멘트를 '돈코메'(どんコメ돈코메일본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좌우명은 '도이치스지'(道一筋미치히토스지일본어, '이 한 길'이라는 의미)로, 주변의 불이해나 반대가 있더라도 자신이 믿는 길을 밀고 나간다는 뜻이다. 이는 오카다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무라야마 미노루의 좌우명 '구도일관'(球道一筋큐도잇스지일본어)에서 따온 것이다. 색지에 사인을 할 때도 이 말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다. 현역 시절에는 자신의 기록이 남기에 '유언실행'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2004년 1군 감독 취임 시 무라야마의 글자를 따오려 했으나, 감독 1년차에 모든 글자를 따오는 것은 실례라고 여겨 '구'자를 빼고 '도이치스지'로 시작했다. 2023년 일본 시리즈 우승을 계기로 2024년 1월 1일부터 좌우명을 '구도일관'으로 변경했다. 한때 제3자가 이 말을 상표 등록하여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그의 입버릇은 '소라소요'(そらそうよ소라소요일본어, '그야 그렇지' 또는 '그건 그래요'라는 의미의 간사이 방언)이다. 이 말에서 유래한 '소라소요'라는 소주도 발매되었고, 자신의 저서 제목으로도 사용되었다. 2023년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복귀했을 때는 구단 공식 굿즈로 '소라소요 타월'(시크릿 20종)도 출시되었는데, 운이 좋으면 오카다 본인의 얼굴 사진이 들어있기도 했다. 또한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기 어려운 '그것'(アレ아레일본어)을 자주 사용하는 버릇이 있는데(앞서 언급된 '우승'을 대신하는 표현처럼 일부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한신 감독 시절에는 무엇을 지적하는지 알 수 없었던 젊은 선수들을 위해 당시 주전이었던 아카호시 노리히로가 이를 '번역'해주기도 했다. 장남은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고, 어머니는 "그 아이는 말의 중간을 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2023년 한신 감독 재임 시에는 추임새처럼 사용하는 '오-응'(おーん오-응일본어)이라는 감탄사도 오카다의 입버릇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오카다의 화법이 널리 알려진 것에 대해 히로오 아키라는 간사이 출신(또는 간사이 문화에 능통한) '오카다 담당' 기자들이 그의 발언을 크게 바꾸지 않고 지면에 실었고, 오카다 또한 옛 오사카의 '단나슈'(旦那衆, 상인 계층의 어른)처럼 이를 문제 삼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언급했다. 또한 영어 교육학자 오카다 게이코는 주어 생략이나 지시어 남용 등 오카다 아키노부의 화법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비언어'적인 어조를 포함한 독자적인 소통 방식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고 분석했다.
현역 시절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회장으로서 일관되게 1리그 8구단제를 주장했다. 야구 규칙, 일정, 드래프트에 관해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1리그제로 구성하고, 독립 리그에 미래 전망이 없으므로 독립 리그를 없애고 3군제를 도입하며, 3군은 지역성을 중시하여 모든 도도부현에 프로 구단을 두는 구상을 가지고 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대해서는 "거기서 패배하여 일본 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면 144경기라는 긴 시즌을 싸운 노력과 과정, 평가의 가치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또한 여러 구단을 전전하는 외국인 선수가 연봉을 끌어올려 구단 경영을 압박하고 젊은 일본인 선수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며, 외국인 출전 선수枠을 줄여야 한다(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0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프로 야구 개혁 시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웅변가는 아니지만 생각한 것을 짧은 말로 표현하는 직언이 많아 인물에 대한 평가가 종종 독설적이라는 평도 있다. 자신의 저서에서는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음주(현재는 소주 애호가), 노래방, 마술이나 닌텐도 DS의 두뇌 트레이닝을 꼽았다. 또한 담배를 즐겨 피우는 애연가이다. 요시모토 흥업 계열의 코미디 프로그램도 휴식 시 자주 시청하며, 아내가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거실에 두기도 했다. 니시무라 교타로 트래블 미스터리 등 추리 드라마나 스도쿠도 즐긴다고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쇼기를 취미로 삼아 2008년 1월 24일 일본 쇼기 연맹으로부터 아마 3단 면허를 받았다. 쇼기를 배운 랜디 바스와는 가와토 고조와 함께 쇼기 상대를 해주었다. 오카다가 호쿠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당시에는 교내 폭력이 매우 심했던 시기로, 교사의 창문 대부분이 깨져 있었는데, "절반은 불량 학생들이, 나머지 절반은 오카다 씨가 홈런으로 깼다"는 전설이 남아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1년 후배로는 마에다 아키라가 있다. 참고로 간사이에서는 "마에다와 아카이 히데카즈가 전철 안에서 싸우는데, 이를 보다 못한 오카다가 중재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퍼져있으나, 마에다는 "아카이 군과는 사는 곳이 달랐고, 당시에는 만난 적도 없었다"고 부인했다.
루키 시절 프로레슬러 압둘라 더 부처가 "이 녀석은 분명 대성할 것이다"라며 오카다를 칭찬한 이후, 부처와는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오카다는 지금도 은혜를 느끼고 있으며, 2005년 한신의 리그 우승 시에는 축승회에 부처를 초대할 계획도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싱어송라이터 요시다 다쿠로가 오카다의 팬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카다 본인은 포크송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한다. 전 축구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 오카다 다케시와는 같은 오사카시 출신, 동성, 와세다 대학 동창생, 프로 스포츠 감독이라는 공통점이 많다. 또한 둘 다 한신 팬이다. 다케시가 1살 위지만, 1년 재수하여 아키노부와 동급생이 되었고, 같은 시기에 야구부와 축구부의 주장을 각각 맡았다. 두 사람의 직접적인 접점은 없었지만, 2009년 잡지 《Sports Graphic Number》의 '와세다의 힘' 특집에서 두 사람의 첫 대담이 진행되었고, 이후 친분을 이어갔다. 또한 전 축구 선수이자 현재 축구 해설가인 하세가와 하루히사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현재까지도 친분이 있다. 2009년 5월 27일 일본 대 칠레전에서는 아키노부가 경기장인 나가이 육상 경기장을 방문하여 하세가와와 함께 다케시가 지휘하는 일본 대표팀을 응원했다.
1982년 12월 11일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 해 그의 어머니가 닛스이의 어묵 CM에 출연하기도 했다. 1986년에는 아내가 라이온의 주방 세제 CM에 갓 태어난 장남과 함께 출연했다.
2023년 현재 니시노미야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2023년 11월 27일 니시노미야시 로쿠탄지 공원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 일본 시리즈 우승 니시노미야 시민 보고회'에서 "(시청에) 얼마 전에도 사전 투표하러 왔습니다. 제대로 합니다. 마이넘버(카드)도 받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23년 한신 감독 재취임 후 자주 파인아메를 먹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제조사인 파인 주식회사는 한신 타이거스와 협업하여 2023년 한신 팀 슬로건인 'ARE'에 착안한 '파인아레'(パインアレ일본어)라고 쓰인 타월과 파인아메 24개입 파우치 등의 굿즈를 판매했다.
5. 수상 및 기록
오카다 아키노부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다수의 수상 경력과 개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5.1. 표창
- 신인왕 (1980년)
- 베스트 나인: 1회 (2루수 부문: 1985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1회 (2루수 부문: 1985년)
- 쇼리키 마쓰타로상: 1회 (2023년)
- 월간 MVP: 2회 (1985년 8월, 야수 부문: 1989년 6월)
- 올스타전 MVP: 2회 (1980년 제1차전, 1988년 제2차전)
- 센트럴 리그 특별 표창: 2회 (최우수 감독상: 2005년, 2023년)
- 미키하우스·산케이스포츠 MVP 특별 표창 (2024년)
- 베스트 프라우드 파더상 in 간사이 (2013년)
- 유캔 신어·유행어 대상 연간 대상 (2023년, '그것(A.R.E.)')
- Yahoo! 검색 대상 2023 스페셜 부문 (2023년)
5.2. 개인 기록
5.2.1. 첫 기록
- 첫 출장: 1980년 4월 11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9회말 후카자와 요시오의 대타로 출장
- 첫 타석: 상동, 9회말 히라마쓰 마사지에게 삼진
- 첫 선발 출장: 1980년 4월 22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3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8번 3루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첫 타점: 상동, 8회초 가토 히데미로부터 좌전 적시타
- 첫 홈런: 1980년 5월 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5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2회말 니우라 히사오로부터 좌중간 3점 홈런
5.2.2. 이정표 기록
- 통산 100홈런: 1985년 7월 13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5차전(고라쿠엔 구장), 9회초 기도 가쓰히코의 대타로 출장, 니시모토 다카시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139번째)
- 통산 150홈런: 1987년 6월 2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6회말 나가토미 히로시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83번째)
- 통산 1000안타: 1988년 5월 26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7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10회초 이토 아키미쓰로부터 좌전 적시타 (역대 150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1988년 6월 22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0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4번 2루수로 선발 출장 (역대 277번째)
- 통산 200홈런: 1989년 8월 3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5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1회말 엔도 가즈히코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58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1992년 8월 9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8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12회초 유미나가 다쓰히로의 대타로 출장 (역대 102번째)
- 통산 1500안타: 1994년 6월 29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12차전(닛폰 생명 구장), 2회초 에사카 마사아키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68번째)
5.2.3. 기타 기록
- 올스타전 출장: 8회 (1980년, 1981년, 1982년, 1985년, 1986년, 1988년, 1989년, 1990년)
5.2.4. 감독으로서의 이정표 기록
- 첫 승리: 2004년 4월 2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차전(도쿄 돔), 8-3 승리
- 100승: 2005년 6월 11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5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11-6 승리
- 200승: 2006년 7월 14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5차전(교세라 돔 오사카), 7-2 승리
- 300승: 2007년 9월 5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8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3-2 승리
- 400승: 2010년 3월 31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차전(도쿄 돔), 3-2 승리
- 500승: 2011년 8월 7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4차전(QVC 마린필드), 7-2 승리 (역대 28번째)
- 600승: 2023년 5월 13일, 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7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2 승리 (역대 25번째)
- 700승: 2024년 6월 27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8-1 승리 (역대 20번째)
- 동일 구단(한신)에서 500승: 2024년 5월 19일,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9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2 승리 (한신 구단 역사상 2번째)
- 동일 구단(한신)에서 515승: 2024년 7월 6일, 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1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2-1 승리 (한신 구단 감독 최다 승수 경신)
5.3. 등번호
- 16 (1980년~1993년)
- 10 (1994년~1995년)
- 85 (1996년~1997년)
- 80 (1998년~2008년, 2010년~2012년, 2023년~2024년)
5.4.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 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80 | 한신 | 108 | 403 | 376 | 44 | 109 | 19 | 0 | 18 | 182 | 54 | 4 | 2 | 1 | 0 | 23 | 6 | 3 | 45 | 6 | .290 | .336 | .484 | .820 |
1981 | 130 | 524 | 485 | 70 | 140 | 23 | 3 | 20 | 229 | 76 | 1 | 0 | 2 | 4 | 28 | 3 | 5 | 43 | 13 | .289 | .331 | .472 | .804 | |
1982 | 129 | 521 | 466 | 57 | 140 | 22 | 1 | 14 | 206 | 69 | 10 | 5 | 2 | 5 | 44 | 12 | 4 | 30 | 13 | .300 | .362 | .442 | .804 | |
1983 | 79 | 289 | 246 | 44 | 71 | 9 | 0 | 18 | 134 | 44 | 7 | 3 | 1 | 5 | 36 | 5 | 1 | 23 | 3 | .289 | .375 | .545 | .920 | |
1984 | 115 | 366 | 323 | 38 | 96 | 14 | 2 | 15 | 159 | 51 | 3 | 1 | 0 | 7 | 33 | 4 | 3 | 41 | 13 | .297 | .361 | .492 | .853 | |
1985 | 127 | 532 | 459 | 80 | 157 | 24 | 3 | 35 | 292 | 101 | 7 | 3 | 0 | 6 | 64 | 3 | 3 | 41 | 11 | .342 | .421 | .636 | 1.057 | |
1986 | 129 | 551 | 474 | 67 | 127 | 21 | 0 | 26 | 226 | 70 | 11 | 3 | 0 | 4 | 70 | 5 | 3 | 57 | 14 | .268 | .363 | .477 | .840 | |
1987 | 130 | 518 | 474 | 54 | 121 | 24 | 3 | 14 | 193 | 58 | 5 | 2 | 0 | 2 | 40 | 2 | 2 | 75 | 12 | .255 | .315 | .407 | .722 | |
1988 | 127 | 524 | 454 | 65 | 121 | 22 | 1 | 23 | 214 | 72 | 10 | 5 | 0 | 5 | 63 | 6 | 2 | 75 | 16 | .267 | .355 | .471 | .826 | |
1989 | 130 | 557 | 492 | 66 | 138 | 20 | 1 | 24 | 232 | 76 | 8 | 3 | 0 | 7 | 57 | 3 | 1 | 81 | 15 | .280 | .352 | .472 | .823 | |
1990 | 130 | 571 | 486 | 75 | 129 | 27 | 0 | 20 | 216 | 75 | 7 | 2 | 0 | 4 | 74 | 5 | 7 | 87 | 12 | .265 | .368 | .444 | .812 | |
1991 | 108 | 428 | 383 | 45 | 92 | 11 | 0 | 15 | 148 | 50 | 1 | 3 | 0 | 3 | 40 | 3 | 2 | 68 | 9 | .240 | .313 | .386 | .700 | |
1992 | 70 | 212 | 185 | 9 | 35 | 11 | 0 | 2 | 52 | 19 | 1 | 0 | 0 | 3 | 22 | 1 | 2 | 48 | 3 | .189 | .278 | .281 | .559 | |
1993 | 42 | 62 | 53 | 2 | 9 | 1 | 0 | 1 | 13 | 7 | 0 | 0 | 0 | 0 | 9 | 1 | 0 | 24 | 0 | .170 | .290 | .245 | .536 | |
1994 | 오릭스 | 53 | 117 | 101 | 10 | 28 | 3 | 0 | 2 | 37 | 12 | 1 | 1 | 0 | 1 | 14 | 0 | 1 | 20 | 3 | .277 | .368 | .366 | .734 |
1995 | 32 | 46 | 39 | 3 | 7 | 0 | 0 | 0 | 7 | 2 | 0 | 0 | 0 | 0 | 7 | 0 | 0 | 9 | 1 | .179 | .304 | .179 | .484 | |
통산 : 16년 | 1639 | 6221 | 5496 | 729 | 1520 | 251 | 14 | 247 | 2540 | 836 | 76 | 33 | 6 | 56 | 624 | 59 | 39 | 767 | 144 | .277 | .351 | .462 | .813 |
5.5. 연도별 감독 성적
5.5.1. 정규 시즌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2004 | 한신 | 4위 | 138 | 66 | 70 | 2 | .485 | 13.5 | 142 | .273 | 4.08 | 47세 |
2005 | 1위 | 146 | 87 | 54 | 5 | .617 | - | 140 | .274 | 3.24 | 48세 | |
2006 | 2위 | 146 | 84 | 58 | 4 | .592 | 3.5 | 133 | .267 | 3.13 | 49세 | |
2007 | 3위 | 144 | 74 | 66 | 4 | .529 | 4.5 | 111 | .255 | 3.56 | 50세 | |
2008 | 2위 | 144 | 82 | 59 | 3 | .582 | 2.0 | 83 | .268 | 3.29 | 51세 | |
2010 | 오릭스 | 5위 | 144 | 69 | 71 | 4 | .493 | 7.5 | 146 | .271 | 3.97 | 53세 |
2011 | 4위 | 144 | 69 | 68 | 7 | .504 | 20.5 | 76 | .248 | 3.33 | 54세 | |
2012 | 6위 | 144 | 57 | 77 | 10 | .425 | 17.5 | 73 | .241 | 3.34 | 55세 | |
2023 | 한신 | 1위 | 143 | 85 | 53 | 5 | .616 | - | 84 | .247 | 2.66 | 66세 |
2024 | 2위 | 143 | 74 | 63 | 6 | .540 | 3.5 | 67 | .242 | 2.50 | 67세 | |
통산: 10년 | 1427 | 740 | 637 | 50 | .537 | A클래스: 6회, B클래스: 4회 |
2012년 시즌에는 9월 25일부터 휴양에 들어갔으며, 감독 대행은 모리와키 히로시가 맡았다.
2012년 시즌에 결장한 9경기(7승 2패)는 감독 성적에 포함되지 않는다.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의미한다.
5.5.2. 포스트 시즌
연도 | 소속 | 경기명 | 상대팀 | 성적 |
---|---|---|---|---|
2005 | 한신 | 일본 시리즈 | 지바 롯데 마린스 | 0승 4패 = 패퇴 |
2007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1스테이지 | 주니치 드래건스(센트럴 리그 2위) | 0승 2패 = 패퇴 | |
2008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1스테이지 | 주니치 드래건스(센트럴 리그 3위) | 1승 2패 = 패퇴 | |
2023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센트럴 리그 2위) | 3승 0패 = 일본 시리즈 진출 | |
일본 시리즈 | 오릭스 버펄로스(퍼시픽 리그 1위) | 4승 3패 = 일본 시리즈 우승 | ||
2024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센트럴 리그 3위) | 0승 2패 = 패퇴 |
6. 저서
오카다 아키노부는 자신의 야구 철학과 경험을 담은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 頑固力 ~ブレないリーダー哲学완고력 ~흔들림 없는 리더 철학일본어 (가도카와 SSC 신서, 2008년)
- なぜ阪神は勝てないのか? ~タイガース再建への提言왜 한신은 이길 수 없는 것인가? ~타이거스 재건에의 제언일본어 (에나쓰 유타카 공저, 가도카와 ONE 테마 21, 2009년)
- オリの中の虎 ~愛するタイガースへ最後に吼える우리 안의 호랑이 ~사랑하는 타이거스에게 마지막으로 짖는다일본어 (베이스볼 매거진 신서, 2009년)
- 動くが負け ~0勝144敗から考える監督論움직이긴 해도 패한다 ~0승 144패로부터 생각하게 되는 감독론일본어 (겐토샤 신서, 2010년)
- なぜ阪神はV字回復したのか?왜 한신은 V자 회복했는가?일본어 (가도카와 ONE 테마 21, 2013년)
- そら、そうよ 勝つ理由、負ける理由그야 그렇지 이기는 이유, 지는 이유일본어 (다카라지마샤, 2014년)
- プロ野球構造改革論프로 야구 구조 개혁론일본어 (다카라지마샤, 2014년)
- 金本・阪神 猛虎復活の処方箋가네모토 한신 맹호 부활의 처방전일본어 (다카라지마샤, 2017년)
- プロ野球史上最高の選手は誰だ? レジェンドOBが選ぶ「実力ナンバーワン」決定戦프로 야구 사상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 레전드 OB가 뽑는 '실력 넘버원' 결정전일본어 (공저, 다카라지마샤, 2019년)
- 幸せな虎、そらそうよ행복한 호랑이, 그야 그렇지일본어 (베이스볼 매거진사, 2023년)
7. 영향 및 평가
오카다 아키노부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일본 야구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독특한 소통 방식과 야구 철학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의 감독 철학은 '마이너스부터 생각하는 견실함'으로 요약된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경기를 운영하며, 벤치워크 없이도 팀이 승리할 수 있는 '확립된 스타일'을 이상적인 팀의 모습으로 보았다. 이러한 철학은 가네모토 도모아키를 4번 타자로 고정하거나, JFK와 같은 투수 분업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반영되었다. 그는 마운드 방문을 최소화하고 코치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을 신뢰의 증표로 여겼다. 또한, 2군 선수 육성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으며, 선수 개인 기록을 중시하면서도 팀 승리를 최우선으로 삼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졌다.
특히 2023년 한신 타이거스 감독 재임 시, '우승'이라는 단어 대신 '그것'(アレ아레일본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팀의 부담을 덜고 팬들의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독특한 문화를 창조했다. 이 '그것'은 단순한 유행어를 넘어 팀의 슬로건 'A.R.E.'로 발전했고, 결국 한신의 38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과 함께 2023년 신어·유행어 대상을 수상하며 일본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것'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닿을 수 있는 목표'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한신의 오랜 염원을 이룬 상징적인 표현이 되었다.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2004년 투수 코치였던 사토 요시노리는 그를 "너무 완고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반면 2005년 일본 시리즈에서 맞붙었던 지바 롯데 마린스의 바비 밸런타인 감독은 오카다를 "10년 전의 나를 보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노무라 가쓰야는 오카다의 지휘 방식을 "상당히 별나다"고 평하면서도, JFK와 같은 '새로운 방정식'을 만든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보았다. 노무라는 오카다의 '선수 주도' 방식이 선수 개개인의 문제의식을 높이는 '아메리칸 스타일'일 가능성을 언급하며, 그가 명감독이 될 재목일 수도 있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오카다 본인은 노무라의 평가에 대해 "나름대로의 야구에 대한 생각이 있고, 상황에 맞게 작전을 세운다"며 자신의 철학을 옹호했다.
그의 드래프트 추첨운은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2023년 한신 감독으로서의 성공은 그의 고유한 전술과 선수단 운영 방식이 결실을 맺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상대팀의 전략에 맞춰 타격 방식을 유연하게 조절하는 모습은 그의 전술적 깊이를 드러냈다.
8. 관련 항목
- 오사카시 출신 인물 목록
- 와세다 대학 출신 인물 목록
- 한신 타이거스 선수 목록
- 오릭스 버펄로스 선수 목록
- 컴뱃 마치 - 한신 현역 시절 오카다 아키노부의 응원가 원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