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히라타 가쓰오는 선수와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통해 일본 야구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생애는 어린 시절의 성장과 교육, 프로 선수로서의 빛나는 활약, 그리고 은퇴 후 지도자 및 해설가로서의 다양한 활동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그의 유머러스한 성격과 관련된 일화들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그의 대중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1.1. 어린 시절 및 교육
히라타 가쓰오는 1959년 7월 31일 나가사키현 마쓰우라시 이마후쿠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가사키시의 가이세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2학년 때부터 유격수 주전으로 활약했다. 1년 선배인 투수 사카이 게이이치와 함께 제58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으나, 준결승에서 PL가쿠엔 고등학교에 연장전 끝에 패배했다. 이듬해 제49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도 출전하여 개회식에서 선수 선서를 맡았으나, 2회전(첫 경기)에서 고치현립 나카무라 고등학교의 야마오키 유히코 투수에게 막혀 패퇴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메이지 대학에 진학하여 당시 야구부 감독이던 시마오카 요시로島岡吉郎시마오카 요시로일본어의 지도를 받았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 재학 중 4회 우승을 차지했으며, 전일본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3회, 메이지 진구 야구대회에서도 1979년에 우승을 경험했다. 리그 통산 83경기에서 307타수 96안타, 타율 0.313, 2홈런, 39타점을 기록했으며, 베스트 나인에 4회 선정되었다. 대학 시절부터 희생 번트 기술이 뛰어나 1980년부터 2년 연속 출전한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해설자들로부터 "히라타의 번트는 백발백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학 동기 중에는 에이스 모리오카 신이치 등이 있다. 히라타가 4학년 때 대학 선수권에서 우승한 이후 메이지 대학은 2019년까지 이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으나, 2019년 우승 당시 1학년이었던 젠바 다쓰야 메이지 대학 감독은 우승 인터뷰에서 히라타를 포함한 당시 멤버 9명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들의 업적을 기렸다.
1.2. 선수 경력
히라타는 1981년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와 한신 타이거스의 중복 지명 결과, 추첨을 통해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당시 히라타는 타격 능력이 약하여 메이지 대학의 시마오카 요시로 감독은 그가 프로에서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라타 자신도 시마오카 감독의 뜻에 따라 사회인 야구로 진출할 계획이었고, 입단 협상 시에도 별실에서 대기하며 시마오카 감독에게 협상을 맡겼다. 시마오카 감독은 한신 측에 "히라타는 프로에 보내지 않겠다"고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한신의 안도 노리오 신임 감독이 "도쿄 6대학 시절 시마오카 감독님께 많이 당했습니다"라며 시마오카 감독을 치켜세우자, 기분이 좋아진 시마오카 감독은 별실에 대기 중이던 히라타를 불러 "너, 한신에 가라"고 그 자리에서 명령했다고 히라타 본인이 훗날 회고했다. 시마오카 감독은 특히 와세다와 게이오 대학에 강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한신 타이거스의 유격수 주전은 마유미 아키노부였으나, 1983년 5월 그가 부상당하면서 히라타가 유격수로 정착하게 되었다. 마유미는 복귀 후 오카다 아키노부의 부상으로 비어있던 2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히라타는 1983년에 83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1984년에는 규정 타석에 도달하여 타율 0.268을 기록했으며, 같은 해부터 1987년까지 4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며 수비의 명수로 활약했다. 한신 타이거스가 21년 만에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구단 역사상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1985년에는 타격도 호조를 유지하여 7번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50타점 이상을 기록했다. 또한, 같은 해 10월 10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프로 데뷔 후 첫, 그리고 야구 인생 첫 만루 홈런을 터뜨렸다. 같은 해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서 3안타를 기록하고, 통산 22타수 7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1988년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이 취임하면서 유격수 주전은 와다 유타카가 되었고, 히라타는 주로 백업 선수로 활동했다. 이후 출장 경기 수는 100경기 미만으로 줄었지만, 뛰어난 수비력과 번트 기술로 귀중한 백업 선수로서 팀에 공헌했다. 1990년은 8경기 선발 출장에 그쳤지만, 타격은 호조를 보여 주로 대타로 출장하여 타율 0.347의 좋은 성적을 남겼다.
1994년 현역 은퇴했다. 10월 1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한신 고시엔 구장)가 그의 은퇴 경기가 되었고, 2번 유격수로 선발 출장했다.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는 나카무라 가쓰히로 감독이 "휘둘러라"고 지시했지만, 히라타는 자신의 판단으로 희생 번트를 시도했다. 현역 시절 그는 나카니시 기요오키中西清起나카니시 기요오키일본어, 히라타, 기토 가쓰히코木戸克彦기토 가쓰히코일본어 세 명과 함께 'NHK 트리오NHKトリオNHK 트리오일본어'라고 불렸다.
1.3. 지도자 및 해설가 경력
현역 은퇴 후 히라타는 마이니치 방송 해설자 및 스포츠 닛폰 평론가(1995년 ~ 1996년)로 활동하다가, 1997년 1군 내야 수비 코치로 한신 타이거스에 복귀했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1군 수비 코치, 2001년에는 1군 수비 주루 코치를 맡았다. 코치 시절에도 항상 큰 소리로 팀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으며, 그의 지도 철학은 '엄격하지만 즐겁게厳しく楽しく엄격하지만 즐겁게일본어'였다.
2002년, 메이지 대학 선배인 호시노 센이치가 감독으로 취임하자 감독 전속 홍보 및 전속 운전수로 취임했다. 이때 그는 운전 차량의 번호판 숫자를 '1001'(센이치) 등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가 '731'로 정했는데, 호시노 감독이 "왜 731이냐?"고 묻자 "제 생일입니다"라고 답하여 호시노 감독에게 혼날 뻔한 일화가 있다.
호시노 감독이 용퇴한 2004년부터는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 아래서 1군 헤드코치로 현장에 복귀했다. 2007년부터는 2군 감독을 맡아 2010년에는 4년 만에 우에스턴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시즌 종료 후 퇴단했다.
2011년 시즌부터 다시 마이니치 방송 해설자 및 스포츠 닛폰 평론가로 복귀했다. 복귀 후 첫 업무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한 호시노 센이치와의 인터뷰였다. 2012년에는 야구 해설 및 평론 활동과 병행하며 '아시야 학원 스포츠 모더니즘 프로젝트' 멤버로 초빙되어, 같은 해 4월부터 아시야 대학의 객원 교수로 취임했다.
2013년부터는 2군 감독으로 2년 만에 현장에 복귀했으며, 2014년에도 같은 직책을 맡았다. 2015년에는 1군 헤드코치, 2016년부터는 1군 치프 겸 수비 주루 코치를 역임했다. 2019년부터는 다시 2군 감독을 맡았다.
2019년 6월 14일, 6월 13일 오릭스 버펄로스 2군과의 경기에서 선수 교체 통보를 소홀히 한 이유로 사이토 아쓰시 커미셔너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았다.
2021년에는 그가 지휘하는 2군 팀이 7월 30일 오릭스 버펄로스 2군과의 경기(한신 나루오하마 구장)부터 9월 15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군과의 경기(한신 고시엔 구장)까지 무승부를 포함한 18연승을 달성하여, 199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이 달성한 15연승을 뛰어넘는 파머스 일본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군과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였으나, 9월 24일 오릭스 버펄로스 2군과의 경기(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승리하며 팀을 3년 만의 우에스턴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팀의 최종 성적은 106경기 65승 34패 7무, 승률 0.657이었다. 이어서 10월 9일 히나타 선 마린 스타디움 미야자키에서 열린 파머스 일본 선수권에서 이스턴 리그 우승팀인 지바 롯데 마린스 2군을 꺾고 파머스 일본 제일을 달성했다.
오카다 아키노부가 1군 감독으로 복귀한 2023년부터는 1군 헤드코치로 복귀했다. 그 해 현역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스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오타케 고타로를 지명했는데, 이는 2군 감독이었던 히라타가 2군 경기에서 오타케의 기량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2023년에는 현역 시절인 1985년 일본 시리즈 우승 이후 38년 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2025년부터는 다시 2군 감독을 맡을 예정이다.
1.4. 미디어 활동 및 대중적 이미지
히라타 가쓰오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서 마이니치 방송과 스포츠 닛폰에서 활동했다. 2011년과 2012년에는 MBS 텔레비전의 '사무라이 프로 야구', '맹호 파일→with 타이거스'12'에 출연하여 한신 선수들의 경기력과 전술을 평가하는 코너를 담당했다. 또한 '세야넨!', '치친푸이푸이' 등 MBS 텔레비전의 여러 프로그램에 비정기적으로 출연했으며, MBS 라디오의 'MBS 타이거스 라이브', 'MBS 토라구미 타이거스 라이브!' 등 프로 야구 중계 및 관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해설을 맡았다. 2016년 10월 19일에는 아사히 방송 라디오의 '호리에 마사오의 호리×나비'에 스튜디오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미키 마우스를 닮은 외모와 밝고 외향적인 성격 때문에 한신 타이거스 현역 선수 시절부터 '미키ミッキー미키일본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팬들에게 사랑받았다. MBS 라디오 해설자로 복귀했던 시기에는 동 방송국의 프로 야구 중계에서 한신 경기 해설을 맡을 때 '돌아온 축제 남자'(2012년 이후는 '호랑이 축제 남자')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붙기도 했다.
1군 코치의 재임 중에 팀이 센트럴 리그 우승이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을 때의 축승회 '맥주 파티'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 2005년 센트럴 리그 우승 당시 축승회에서는 당시 주력 선수였던 가네모토 도모아키의 권유로 단상에 올라 인사를 시작한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와세다 대학 야구부 출신으로 도쿄 6대학 야구 리그 선배)에게 "여! 오카다!"라고 기세 좋게 이름을 불렀다. 이어서 "일본 제일이 되면 나를 헹가래 쳐줘!"라고 크게 외쳤다. 그러나 팀은 이후 일본 시리즈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에게 1차전부터 4연패를 당하면서 헹가래는 불발되었다.
-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 아래 2023년 일본 시리즈를 (자신의 현역 시절인 1985년 이후) 38년 만에 제패했을 때의 축승회(11월 6일 새벽 오사카부에서 개최)에서는 '중간 마무리' 인사로 단상에 올라 "잔치宴우타게일본어도 다케나카 나오토竹中直人다케나카 나오토일본어이지만, 해도 푹 저물었으니 나카지마 미유키中島みゆき나카지마 미유키일본어 (중간 마무리)하겠습니다"라는 아재 개그를 갑자기 선보였다. 자리에 있던 선수들을 향해 "38년 만에, 오카다 감독과 히라타 헤드코치 선수 시절에 겨우 너희들이 따라잡았다. 이제부터는 앞질러 봐라!"고 격려한 후, 아사히 맥주가 맥주 파티용으로 제공한 '아사히 슈퍼 드라이' 중병을 손에 들고 대표 취재용 TV 카메라를 향해 "전국의 야구 팬 여러분, おつかれ生です오쓰카레 나마데스일본어. 슈퍼 드라이! 광고 기다립니다!"라고 외치며 축승회를 마무리했다.
- 이 일련의 인사가 TV·라디오 프로그램과 유튜브 등을 통해 큰 화제가 되면서, 아사히 맥주는 히라타에게 '광고' 출연을 제안했다. 그가 등장하는 유튜브용 '광고'와 간사이 지방용 포스터가 실제로 제작되었으며, 히라타가 맥주잔을 들고 건배하는 사진과 'おつかれ生です오쓰카레 나마데스일본어.'라는 문구를 넣은 페이스 타월을 한신 타이거스가 '기간 한정 공식 상품'으로 발매하기에 이르렀다.
- 아사히 맥주는 한신 타이거스의 공식 스폰서이며, '일본의 여러분! おつかれ生です오쓰카레 나마데스일본어.'라는 문구를 '아사히 생맥주〈마루에프〉アサヒ生ビール〈マルエフ〉아사히 생맥주〈마루에프〉일본어'의 광고와 포스터에 사용한다. 히라타는 '아사히 생맥주' TV 광고를 매우 좋아해서 이 문구를 축승회 '중간 마무리'에 차용했다고 밝혔다. 한편, 앞서 언급한 아재 개그에 대해서는 (1985년 일본 제일을 달성했을 때의 팀 동료였던) 나카니시 기요오키가 현역 시절 자주 사용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 '아사히 생맥주' 이미지 캐릭터 중 한 명으로 당시 광고에 출연했던 마쓰시타 고헤이는 축승회 다음 주(2023년 11월 14일) '아사히 생맥주' 관련 행사에 출연하여 "나 대신 히라타 코치가 광고에 나오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있다", "(히라타가 중간 마무리 때) 들고 있던 병이 (같은 아사히 맥주 제품이라도) '슈퍼 드라이'였으니, 꼭 '마루에프' 병을 들고 싶었다"고 언급했다. 반면 히라타는 아사히 맥주로부터 광고 출연 제안이 한신 타이거스 구단에 도착하자마자 "아니 아니 아니, 말도 안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이 건방지죠. 기세에 취해 마무리 인사로 '그것'(문구를 차용)했을 뿐인데, 그런 이야기(출연 제안)를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사실 광고(출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축승회에서 기분이 고조되어) 분위기에 휩쓸려 말해버린 것이라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 실제로 히라타가 출연하게 된 '광고'는 '야구 팬 여러분, おつかれ生です오쓰카레 나마데스일본어.'라는 제목의 아사히 맥주 홍보 영상(56초)으로, 2023년 11월 24일부터 유튜브의 아사히 맥주 그룹 공식 채널에서 공개되었다. 영상 제작에는 그가 "전국의 야구 팬 여러분! おつかれ生です오쓰카레 나마데스일본어. 슈퍼 드라이! 광고 기다립니다!"라고 외친 장면의 영상(아사히 방송 텔레비전이 촬영한 축승회 영상의 일부)과 광고의 테마곡인 '겡키오 다시테元気を出して겡키오 다시테일본어'(다케우치 마리야)의 음원을 사용했다. 또한, 히라타가 한신 타이거스 유니폼 차림으로 '아사히 생맥주' 중병을 들고 건배하는 영상과 "'마루에프'는 틀림없이 '슈퍼 드라이'와 함께, '야구'에만 '히트ヒット히트일본어' 상품"이라고 말하는 영상이 새로 촬영되었다. 여기에 "'おつかれ生です오쓰카레 나마데스일본어.'는 슈퍼 드라이가 아니라 마루에프입니다."라고 크게 쓰인 자막이 추가되었다. 2023년 12월부터는 이 '광고'가 간사이 지방의 영화관 등에서도 상영되었다.
- 또한, 팀의 우승 기념 여행으로 하와이(미국)에 머물던 2023년 12월 13일(현지 시간. 일본 시간 14일)에도 호놀룰루의 호텔에서 열린 우승 기념 파티에서 "광고가 쇄도하고 있으니"라고 말하며 '중간 마무리' 인사로 단상에 올랐다. 스태프가 준비한 아사히 슈퍼 드라이 중병을 손에 들고 "여러분. 1년 동안 お疲れ生でした오쓰카레 나마데시타일본어"라는 문구로 참가자들을 격려한 후, '나카지마 미유키中島みゆき나카지마 미유키일본어의 인사'라고 칭하며 "(잔치도 다케나카 나오토竹中直人일본어라고 말하려다) 엔화도요, (하와이로 간사이 국제공항을 출발한 13일 기준으로 1달러당 145 JPY였습니다. 하와이에서의 쇼핑이 꽤 힘든 세상이 되었지만, 여러분 하와이를 즐깁시다. 엔조이! 하와이! 해산!"이라는 연설로 장내를 뜨겁게 달구었다.
2. 주요 업적 및 특징
히라타 가쓰오는 선수와 지도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선수 시절에는 독특한 기술과 강점을 바탕으로 팀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통산 기록과 수상 내역은 그가 일본 프로 야구에서 이룬 성과를 명확히 보여준다.
2.1. 선수로서의 특징
히라타 가쓰오는 비록 타격 파워는 약했지만, 희생 번트 등의 정교한 기술과 승부 강한 타격을 겸비했으며, 견고한 수비가 강점이었다. 1987년까지 유격수 주전으로 4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며 수비의 명수로 활약했고, 이후에는 귀중한 백업 선수로서 팀을 지탱했다. 야마모토 가즈유키山本和行야마모토 가즈유키일본어는 "자신이 잡을 수 있는 타구는 절대로 실책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투수로서는 계산이 되고, 안심하고 던질 수 있었다"고 히라타의 수비를 높이 평가했다. 깊은 수비 위치에서 화살 같은 송구로 타자 주자를 아웃시키는 강견의 소유자로, 1985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여러 차례 호수비를 선보였다.
2.2. 통산 기록 및 수상
- 통산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82 | 한신 | 23 | 22 | 17 | 3 | 4 | 0 | 0 | 0 | 4 | 1 | 1 | 0 | 2 | 0 | 2 | 0 | 1 | 2 | 0 | .235 | .350 | .235 | .585 |
1983 | 100 | 340 | 292 | 33 | 73 | 12 | 1 | 2 | 93 | 28 | 1 | 2 | 22 | 1 | 20 | 1 | 5 | 25 | 8 | .250 | .308 | .318 | .627 | |
1984 | 128 | 493 | 437 | 42 | 117 | 24 | 1 | 6 | 161 | 41 | 2 | 0 | 24 | 2 | 28 | 0 | 2 | 26 | 9 | .268 | .313 | .368 | .682 | |
1985 | 125 | 455 | 402 | 47 | 105 | 15 | 2 | 7 | 145 | 53 | 6 | 2 | 25 | 1 | 23 | 0 | 4 | 35 | 12 | .261 | .307 | .361 | .668 | |
1986 | 124 | 448 | 405 | 47 | 108 | 15 | 1 | 5 | 140 | 33 | 1 | 2 | 22 | 0 | 16 | 0 | 5 | 41 | 7 | .267 | .303 | .346 | .648 | |
1987 | 126 | 454 | 418 | 30 | 109 | 15 | 0 | 3 | 133 | 21 | 3 | 2 | 13 | 0 | 21 | 0 | 2 | 42 | 16 | .261 | .299 | .318 | .618 | |
1988 | 90 | 200 | 180 | 12 | 51 | 9 | 1 | 0 | 62 | 16 | 0 | 3 | 7 | 1 | 10 | 1 | 2 | 24 | 3 | .283 | .326 | .344 | .671 | |
1989 | 89 | 119 | 102 | 7 | 14 | 3 | 1 | 0 | 19 | 6 | 1 | 0 | 9 | 1 | 6 | 2 | 1 | 9 | 3 | .137 | .191 | .186 | .377 | |
1990 | 60 | 84 | 72 | 6 | 25 | 3 | 0 | 0 | 28 | 10 | 0 | 2 | 6 | 1 | 5 | 0 | 0 | 6 | 4 | .347 | .385 | .389 | .774 | |
1991 | 44 | 54 | 49 | 5 | 13 | 1 | 0 | 0 | 14 | 2 | 0 | 1 | 2 | 0 | 2 | 0 | 1 | 8 | 1 | .265 | .308 | .286 | .593 | |
1992 | 40 | 55 | 48 | 2 | 8 | 2 | 0 | 0 | 10 | 6 | 3 | 0 | 5 | 0 | 0 | 0 | 2 | 8 | 2 | .167 | .200 | .208 | .408 | |
1993 | 29 | 29 | 28 | 1 | 6 | 1 | 0 | 0 | 7 | 3 | 1 | 0 | 0 | 1 | 0 | 0 | 0 | 3 | 0 | .214 | .207 | .250 | .457 | |
1994 | 1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 | 0 | 0 | 0 | 0 | 0 | 0 | ---- | ---- | ---- | ---- | |
통산 : 13년 | 979 | 2754 | 2450 | 235 | 633 | 100 | 7 | 23 | 816 | 220 | 19 | 14 | 138 | 8 | 133 | 4 | 25 | 229 | 65 | .258 | .302 | .333 | .635 |
- 주요 수상 및 기록**
- 첫 기록**
- 등번호**
2.3. 지도자로서의 주요 성과
히라타 가쓰오는 한신 타이거스의 지도자로서 여러 중요한 성과를 달성했다.
- 2010년: 2군 감독으로서 우에스턴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 2021년: 2군 감독 재임 중, 7월 30일 오릭스 버펄로스 2군과의 경기부터 9월 15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군과의 경기까지 무승부를 포함한 18연승을 기록하며 파머스 일본 신기록을 수립했다. 같은 해 9월 24일 우에스턴 리그 우승을 확정 짓고, 10월 9일 파머스 일본 선수권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 2군을 꺾고 파머스 일본 제일을 달성했다.
- 2023년: 1군 헤드코치로서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과 함께 한신 타이거스의 38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3. 평가 및 영향
히라타 가쓰오는 선수와 지도자로서 한신 타이거스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그의 행동과 발언은 야구계와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일부 논란이 된 행동들도 객관적으로 다루어진다.
3.1. 긍정적 평가
히라타 가쓰오는 선수 시절 뛰어난 수비력과 번트 기술로 한신 타이거스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으며, 특히 1985년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동료였던 야마모토 가즈유키山本和行야마모토 가즈유키일본어는 히라타의 수비에 대해 "자신이 잡을 수 있는 타구는 절대로 실책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투수로서는 계산이 되고, 안심하고 던질 수 있었다"고 극찬하며 그의 견고한 수비가 투수들에게 큰 신뢰를 주었음을 강조했다.
지도자로서도 그는 '엄격하지만 즐겁게厳しく楽しく엄격하지만 즐겁게일본어'라는 모토 아래 선수들을 지도하며 팀 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 특히 2군 감독 시절인 2019년, 뇌종양으로 인해 시각 문제를 겪고 있던 요코타 신타로 외야수의 은퇴 경기에서, 평소 외야 수비에 항상 전력 질주하는 요코타의 모습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며 예정보다 일찍 그를 중견수 수비에 투입시켰다. 이 결정은 요코타가 '기적의 백홈'이라 불리는 멋진 보살 플레이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는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이는 히라타가 선수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마지막 순간까지 배려하는 지도자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의 유머러스하고 외향적인 성격은 팬들에게 '미키ミッキー미키일본어'라는 애칭으로 사랑받았으며, 축승회에서의 재치 있는 발언들은 팀과 팬들 사이의 유대감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특히 2023년 일본 시리즈 우승 축승회에서의 'おつかれ生です오쓰카레 나마데스일본어' 발언은 큰 화제가 되어 아사히 맥주 광고 출연으로 이어지는 등 대중적 인기를 입증했다.
3.2. 비판 및 논란
히라타 가쓰오는 지도자 경력 중 일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2005년 9월 7일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경기(나고야 돔)에서는 9회말 홈에서의 크로스 플레이에 대한 애매한 판정에 불만을 품고 주심 다치바나 준橘高淳다치바나 준일본어을 밀쳐 퇴장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행동은 심판에 대한 불필요한 신체 접촉으로 비판을 받았다.
또한, 2019년 6월 14일에는 6월 13일 오릭스 버펄로스 2군과의 경기에서 선수 교체 통보를 소홀히 한 이유로 사이토 아쓰시 커미셔너로부터 엄중 경고를 받았다. 이는 경기 운영에 대한 책임 소홀로 지적되었다.
4. 관련 항목
- 한신 타이거스
- 나가사키현 출신 인물 목록
- 메이지 대학 출신 인물 목록
- 골든 글러브상
-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
- 오카다 아키노부
- 호시노 센이치
- 요코타 신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