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이치카와 후사에는 1893년 5월 15일 아이치현 나카시마군 아케치촌 요시후지(현 이치노미야시 아케치)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난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농업에 종사했으며, 당시 약 7~8단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후지쿠로는 1848년에 태어나 한때 상업에 종사하기도 했으나 평생을 농부로 살았으며, 어머니 타츠는 1859년에 태어나 19세에 후지쿠로와 결혼했다. 이치카와 후사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신체적 학대를 가하는 것을 목격하며 성장했으며, 이는 그녀가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교육열이 높았던 아버지는 장남 후지이치를 초등학교 교사에서 도쿄의 정치학교 학생, 그리고 미국 유학생으로 성장시켰고, 장녀는 나라현의 여자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여동생 역시 나고야시의 슈쿠토쿠 여학교에 진학한 후 도미하여 미국인과 결혼했다.
이치카와는 아케치촌립 아케치심상소학교를 졸업한 후 1903년 4월 오코시정 외 3개촌 학교조합립 서북부고등소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2학기가 끝날 무렵 마을에 아사히심상고등소학교가 생겨 전학했다. 졸업 후 미국에 있던 오빠 후지이치의 도움으로 상경하여 미와다 고등여학교에 편입 시험을 치렀으나 불합격했다. 1908년 4월 여자학원에 입학했으나 7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 후 곧바로 하기와라정립 하기와라심상소학교(현 이치노미야시립 하기와라 소학교)의 대용교원 자리를 얻어 9월부터 근무했다.
1909년 1월 27일, 심상소학교 준교원 면허를 취득한 그녀는 누나가 다니던 누카타군 오카자키정(현 오카자키시 롯코정)의 아이치 제2사범학교 여자부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사범학교는 학비와 기숙사비가 무료였고, 1년에 한 벌의 하카마와 여름/겨울 기모노가 지급되었다. 졸업 후 5년간 현내 초등학교에서 근무할 권리와 의무가 부여되어 많은 소녀들이 입학을 희망했으며, 시험 경쟁률도 2~3배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이치카와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여 같은 해 4월 본과 1학년에 입학했고, 오카자키에서 3년간 수학했다. 그녀는 테니스에 몰두하여 같은 롯코정에 있던 오카자키정립 고등여학교(현 아이치현립 오카자키키타 고등학교)와의 대항전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1912년 4월, 니시카스가이군 가네시로촌(현 나고야시 니시구 텐진야마초)에 신설된 아이치 여자사범학교로 전학했다. 같은 해 7월, 새 교장의 현모양처 교육 방침에 반발하여 동급생 28명과 함께 수업 파업을 단행하고 28개조의 요구서를 제출했다. 이치카와는 1913년에 아이치 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며 이 학교의 첫 졸업생이 되었다. 같은 해 4월, 모교인 아사히심상고등소학교의 훈도(교사)로 임명되었고, 1914년 4월에는 나고야시의 제2고등소학교로 전임했다.
2. 초기 활동 및 여성 단체 결성
이치카와 후사에는 1910년대 도쿄로 이주하면서 일본의 여성 운동에 깊이 노출되었다. 이후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17년 3월, 그녀는 건강상의 이유로 교직을 그만두었다. 이후 지인이었던 문화인 그룹의 고바야시 킷카와의 소개로 같은 해 7월 10일 나고야 신문사에 입사하며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나고야 신문사에는 십여 명의 기자가 있었는데, 이치카와는 유일한 여성 기자였다. 그녀는 1918년 8월 나고야 신문사를 퇴직하고 도쿄로 상경했다.
도쿄로 온 이치카와 후사에는 1919년 일본의 선구적인 페미니스트 히라쓰카 라이초 등과 함께 일본 최초의 여성 단체인 신부인협회(新婦人協会신후진교카이일본어)를 공동 설립했다. 신부인협회는 여성의 지위와 복지 향상을 위해 일본에서 조직된 최초의 단체였다. 이 단체는 이치카와의 리더십 아래, 여성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일본의 법률 개정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당시 여성들은 이러한 유형의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신부인협회는 캠페인을 추진하기 위해 "강연회"를 개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마침내 1922년 제국의회에서 해당 법률이 개정된 후 신부인협회는 해산되었다.
1921년 7월, 이치카와는 요미우리 신문 특파원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시카고와 뉴욕 등지에서 활동하며 미국의 여성 운동과 노동 운동을 시찰했고, 미국의 주요 여성 참정권 운동 지도자들인 앨리스 폴 및 캐리 채프먼 채트와도 만남을 가졌다.
2.1. 여성 참정권 운동

1924년 1월, 이치카와는 일본으로 귀국했다. 같은 해 12월 13일, 그녀는 부인 참정권 획득 기성 동맹회(婦人参政権獲得期成同盟会후진산세이켄카쿠토쿠키세이도메이카이일본어)를 결성했다. 1925년 남자 보통 선거가 성립된 이후 이 동맹회는 부선 획득 동맹(婦選獲得同盟후센카쿠토쿠도메이일본어)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정부와 의회에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운동을 지속했다. 1924년에는 국제노동기구의 직원으로 근무하며 여성의 야간 노동 실태를 조사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1927년 퇴직).
1930년에는 "제1회 부선 대회"를 개최했다. 같은 해 여성 참정권(공민권) 부여 법안이 중의원에서 가결되었으나, 귀족원의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이치카와 후사에는 참의원으로 선출된 야마타카 시게리와 긴밀히 협력하며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 점령기 동안, 이치카와는 일본의 전후 헌법에 여성 참정권이 명시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여성의 정치적 권한이 일본이 파괴적인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성 참정권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인 신일본부인동맹(新日本婦人同盟신니혼후진도메이일본어)이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치카와는 이 단체의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11월, 이치카와의 끊임없는 노력과 포츠담 선언의 요구 사항이 맞물리면서 일본 여성들은 완전한 참정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여성 참정권이 실현되자 이치카와 후사에는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계몽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1946년 12월, 시부야구 요요기에 부선회관(婦選会館후센카이칸일본어)을 설립하여 여성의 정치 교육을 위한 거점으로 삼았다.
2.2. 기타 사회 및 정치 활동
이치카와 후사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 외에도 다양한 사회 개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가 참여한 다른 운동으로는 선거 부패를 억제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이는 1933년 도쿄정계청산여성회 활동으로 이어졌고, 공식 정부 기관인 선거청산중앙회가 설립되어 이치카와는 다섯 명의 여성 이사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치카와는 일본 정부가 전쟁 노력을 위한 대중적 지지를 높일 목적으로 설립한 민족정신동원중앙회(国民精神総動員中央会코쿠민세이신소도인츄오카이일본어)의 총무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또한 민간 지원 단체의 노력을 조율하는 대일본부인협회(大日本婦人会다이닛폰후진카이일본어)의 이사로도 재직했다. 이 시기, 이치카와는 국책(전쟁 수행)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여성의 정치적 권리 획득을 목표로 삼았으며, 이러한 방침 아래 평론 활동을 펼쳤다. 1940년에는 부선획득동맹을 해소하고 부인시국연구회(婦人時局研究会후진지쿄쿠켄큐카이일본어)로 통합시켰으며, 1942년에는 부인 단체들이 대일본부인회로 통합되었다. 이치카와는 대정익찬회를 중심으로 한 익찬 체제에 편입되어 대일본언론보국회(大日本言論報国会다이닛폰겐론호코쿠카이일본어)의 이사로 취임하기도 했다. 1943년 12월에는 도쿄도 미나미타마군 가와구치촌(현 하치오지시)에서 강연을 진행했으며, 1944년 6월에는 도쿄에서 가와구치촌으로 소개(疏開)하여 지내기도 했다. 이 시기 그녀는 양녀 마시타 미사오와 함께 살면서 직접 밭을 일구는 등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
전후에도 그녀는 사회 개혁 노력을 이어갔다. 히라쓰카 라이초와 야마타카 시게리 등 동료들과 함께 "전후대책부인위원회"를 조직하여 정부와 각 정당에 여성 참정권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1951년 11월 2일에는 공창제도 부활 반대 협의회(公娼制度復活反対協議会코쇼세이도후카쓰한타이쿄기가이일본어)를 결성하여 매춘 금지 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12월 19일, 히라쓰카 라이초, 카미다이 타노 등과 함께 재무장 반대 부인 위원회(再軍備反対婦人委員会사이군비한타이후진이인카이일본어)를 결성하며 평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성 문제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옹호자였던 그녀는 일본 국내 및 국제적으로 여성 회의를 조직하고 참여했으며, 1980년에는 일본 정부가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을 비준할 것을 촉구하는 선두적인 목소리를 냈다. 1975년 11월 22일, 일본의 여성 단체 41개 단체가 공립 강당에 모여 "국제 부인년 일본 대회"를 개최했는데, 이치카와 후사에는 이 대회의 실행위원장을 맡았다. 같은 해 12월 1일에는 "국제 부인년 일본 대회 결의 실현을 위한 연락회"(현 국제부인년연락회)가 결성되었으며, 이치카와가 이 단체의 위원장도 맡았다. 또한 1978년에는 사회 문제로 떠오른 구 통일교회에 대한 반대 운동에도 협력하여 "원리 운동을 우려하는 모임"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3. 정치 경력
이치카와 후사에는 여성 참정권 획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후, 일본 정치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3.1. 공직 추방과 복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치카와는 점령 당국에 의해 공직 추방(公職追放코쇼쿠츠이호일본어)되어 정치 또는 정부 직책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그녀가 전시 중 대일본언론보국회(大日本言論報国会다이닛폰겐론호코쿠카이일본어)의 이사로 활동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공직 추방을 당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1950년 10월 13일, 공직 추방이 해제되면서 이치카와는 즉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같은 해 11월 9일, 신일본부인동맹의 임시 총회에서 단체의 명칭을 일본부인유권자동맹(日本婦人有権者同盟니혼후진유켄샤도메이일본어)으로 변경하고, 이치카와는 다시 회장으로 복귀했다.
3.2. 참의원 활동

1953년 3월 23일, 이치카와 후사에는 일본부인유권자동맹 회장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24일 치러진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도쿄도 선거구 (개선수 4)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첫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그녀는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적인 지지자들이 자비를 들여 선거 운동을 하는 방식을 평생 유지했으며, 이를 "이상적인 선거"라고 불렀다. 이치카와는 자신의 선거 방식을 다른 후보자들에게도 확산시키려 노력하며 다양한 선거 정화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하시즈메 다이사부로와 같은 일부 비평가들은 이치카와의 "돈 들지 않는 선거"는 그녀와 아오시마 유키오가 유명인이었기에 가능했던 환상이며, 일반인이 모방할 수 없는 방법론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녀는 국회 내에서 특정 정당에 소속되지 않고, 무소속 의원들의 모임인 제2원클럽(第二院クラブ다이니인쿠라부일본어)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이치카와는 이시하라 간지를 "고결한 인격자", "훌륭한 군인"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1963년에 결성된 "마약 추방 국토 정화 동맹"에 가입하여, 다나카 세이겐, 야마구치구미 조장 다오카 가즈오와 같은 우익 인사 및 야마오카 소하치와 같은 올드 라이트 소설가와 협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녀의 폭넓은 사회 개혁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이념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과의 협력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54년 7월 1일, 부인문제연구소에서 전문지 『부인계전망』을 발간했으며, 1962년 10월 2일, 시부야구 요요기에 건립된 부선회관은 "재단법인 부선회관"이 되어 부인문제연구소와 통합되었다. 『부인계전망』도 편집 방침을 일부 변경하여 1963년 1월호부터 잡지명을 『부인전망』으로 바꾸었다.
1964년 11월 30일, 도쿠시마 라디오 상인 살해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후지 시게코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이치카와는 이케다 미치코, 오하라 토미에, 가미치 이치코, 기타바야시 타니에, 사요 후쿠코, 세토우치 쟈쿠초, 나라오카 토모코, 미야케 츠야코, 유키 시게코 등 9명의 여성과 함께 "도쿠시마 사건의 공정 재판을 요청하는 호소"를 발표했다. 또한 같은 날, 가석방 탄원서도 제출했다.


1965년 7월, 제7회 참의원 선거에서 3선에 성공했다. 같은 해 10월 15일, 일본무도관에서 개최된 "국민 참정 75주년·보통 선거 40주년·부인 참정 20주년 기념식"에 천황과 황후가 참석했으며, 약 6천 명이 참가했다. 이 식전에서 10명에게 특별 표창이 있었는데, 여성 참정에 공헌한 자로서 이치카와, 구부시로 오치미, 오쿠 무메오가 표창을 받았다(산카와 키쿠에이도 선정되었으나 사퇴했다). 같은 날 저녁, 총리부 상훈국에서 이치카와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싶으니 받아줄 수 있겠는가"라는 문의가 있었다. 이치카와는 1963년의 각의 결정에 따른 훈장 제도 부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민주주의인 오늘날 인간에게 등급을 매기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즉시 사퇴한다고 답했다. 이후 신문 기자를 통해 상훈국이 말했던 훈장은 훈이등 서보장이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1967년 2월 25일,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사공연합 후보인 미노베 료키치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부인유권자동맹 회장 사의를 표명했다. 2월 28일자로 사임했으며, 미노베 진영의 "밝은 혁신 도정회를 만드는 모임"의 대표위원을 맡았다.
1968년, "국제연합에 일본인 여성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당시 국제 기독교 대학 강사로 재직 중이던 국제정치학자 오가타 사다코에게 손을 내밀어 그 해 유엔 총회 일본 대표단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는 오가타가 국제연합 업무에 관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71년 7월 제9회 참의원 선거의 도쿄도 선거구(개선수 4)에서 자유민주당은 전 경시총감 하라마 도쿠시로 한 명으로 후보를 압축했다. 민주사회당은 뉴스 캐스터로 높은 인지도를 가졌던 키지마 노리오를 옹립했다. 그 결과, 이치카와는 6번째 득표수로 낙선했다.
1972년 오키나와 반환 밀약 문제에 대해서는 "정을 통했다"는 발표만을 중시하며 일본사회당의 도이 다카코, 사사키 시즈코, 다나카 스미코 등과 함께 "하스미 씨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1974년 2월, "이상 선거 추진 시민회"가 참의원 선거 도쿄도 선거구 후보로 옹립한 키히라 테이코의 추천회가 결성되었고, 이치카와는 오와타 준지와 함께 이 추천회의 대표자로 취임했다. 청년 조직 "풀뿌리 운동으로 이상 선거를 싸우는 그룹"은 이에 3월 9일, 이치카와를 전국구에서 입후보시키기 위한 파티를 개최했다. 3월 16일에는 5개 그룹의 청년 대표 13명의 서명이 담긴 신청서가 이치카와에게 제출되었다. 3월 말, 이치카와는 고령(당시 81세)을 이유로 사퇴하며 청년들에게 키히라의 운동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못한 일부 청년들은 밤에만 사용할 수 있는 사무실을 시부야에 마련하고 각 방면에 호소하는 엽서를 보냈다. 그들의 열의에 감동한 오와타는 청년들의 동료로 합류하여 오기야 쇼조, 마루오카 히데코, 아키야마 치에코 등과 "이치카와 후사에 씨를 멋대로 추천하는 청년 그룹"을 결성하고,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전국구 입후보에 필요한 공탁금 60 KRW을 모으기 위한 취지서를 약 850통 발송했다. 5월 28일 밤, 이치카와는 결국 전국구 입후보를 수락했고, 다음 날인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적으로 출마를 표명했다. 즉시 참의원 선거를 위한 조직인 "이치카와 후사에 씨를 추천하는 모임"이 결성되었고, 대표자로는 간 나오토, 타노우에 히토시, 아사쿠라 고이치 등 3명이 취임했다. 간 나오토는 선거 사무장도 겸임했다.
같은 해 7월 7일, 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가 실시되어 이치카와는 통산 4선에 성공했다. 이 선거에서 그녀는 전국구에서 2위를 차지하며 5선 중 두 차례(제3회, 제5회)는 도쿄 지방구에서 2위, 한 차례(제7회)는 4위를, 전국구에서는 두 차례(제10회)는 2위, 한 차례(제12회)는 1위를 기록했다. 도쿄도 선거구에서 출마했던 키히라는 7번째 득표수로 낙선했다.
같은 해 미야케 잇세이는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이치카와에게 선물했다. 베이지색, 갈색, 검은색이 섞인 긴 기장의 니트 재킷과 검은 셔츠를 입은 이치카와의 모습은 『아사히 그래프』 10월 11일호 표지를 장식하여 화제가 되었다(촬영은 시노야마 키신).
1978년 봄 훈장 수여식에서 훈이등 보관장 수여를 타진받았으나 사퇴했다.
1979년, 이치카와는 잡지 『크루아상』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자의 얼굴" 1위로 선정되어 7월 10일 발매호 표지를 장식했다(86세의 사진과 다이쇼 시대의 사진 두 장). 2위인 야마구치 모모에의 두 배 이상의 득표를 얻어 1위를 차지한 이치카와는 "화장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네요. 목욕 후 피부가 푸석푸석해서 크림을 바르는 정도가 화장이라면 화장일까요"라고 말했다.
1980년 6월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중참 동시 선거)에서 8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전국구에서 최다 득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녀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참의원 최연장 의원으로 활동했다.
4. 철학과 사상
이치카와 후사에는 평생에 걸쳐 민주주의, 인권, 성 평등을 핵심 가치로 삼아왔다. 그녀의 정치 철학은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모든 활동과 의정 활동에 일관되게 반영되었다.
그녀는 여성의 참정권이 단순한 투표권을 넘어 사회 전반의 민주화와 개혁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라고 믿었다. 특히, 여성의 정치 참여가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과 같은 파괴적인 전쟁에 돌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의 정치적 역량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여성의 권리만을 옹호하는 것을 넘어, 국가의 큰 방향을 제시하는 데 여성의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했음을 보여준다.
이치카와는 선거 정화 운동을 통해 부패 없는 깨끗한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녀가 고수했던 "이상적인 선거" 방식, 즉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적인 지지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선거를 치르는 방식은 돈과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정치의 이상을 추구한 결과였다. 이러한 원칙을 바탕으로 그녀는 국가 훈장 수여를 여러 차례 거부했는데,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에게 등급을 매기는 것을 반대하며, 사회적 인정은 지위나 명예가 아닌 순수한 공로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녀의 사상적 독립성은 제2원클럽에 소속되면서도 특정 정당에 얽매이지 않고 무소속으로 활동한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당파적 이익보다는 국민 전체, 특히 소외된 여성과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이치카와는 매춘 반대, 재무장 반대,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 비준 촉구, 국제 부인년 대회 개최 등 다양한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인권과 평화를 위한 폭넓은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녀가 추구했던 성 평등이 단순히 법적 지위를 넘어 사회 전반의 인권 개선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녀가 선거 정화 운동 과정에서 다나카 세이겐이나 다오카 가즈오와 같은 우익 인사들과 협력한 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는 그녀가 오직 정치적 부패 척결이라는 특정 목표를 위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협력할 수 있다는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이치카와 후사에는 일관되게 자유주의, 인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며 사회 전반의 정의와 평등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된다.
5. 수상 및 인정
이치카와 후사에는 사회적 평등과 여성의 권리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국내외에서 많은 인정과 상을 받았다.
- 막사이사이상 : 1974년, 이치카와는 사회적 평등을 위한 노력과 공동체 리더십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필리핀의 라마온 막사이사이 대통령을 기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며 높은 권위를 자랑한다.
- 일본 정부 훈장 거부 : 이치카와는 일본 정부로부터 두 차례 훈장을 제안받았으나 모두 거부했다. 1965년에는 여성 참정권 실현에 기여한 공로로 훈이등 서보장을, 1978년 봄에는 훈이등 보관장을 제안받았다. 그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에게 등급을 매기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며 훈장 수여에 반대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사퇴 의사를 밝혔다.
- 명예 시민 : 그녀의 고향인 아이치현 비사이시 (현 이치노미야시)에서는 이치카와 후사에의 공로를 기려 그녀를 명예 시민으로 추대했다.
- 크루아상지 '좋아하는 여성의 얼굴' 1위 : 1979년, 86세의 나이로 잡지 『크루아상』 독자들의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성의 얼굴' 1위에 선정되었다. 이는 그녀의 강인하고 흔들림 없는 이미지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음을 보여준다.
- 아사히 신문 '가장 좋아하는 정치 지도자' 9위 : 2000년 아사히 신문사가 실시한 서기 1000년부터 1999년까지의 일본사 인물을 대상으로 한 "가장 좋아하는 정치 지도자" 독자 투표에서 230표를 얻어 9위에 올랐다. 이는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톱 10에 진입한 사례로, 그녀의 지속적인 영향력과 대중적 존경을 증명한다.
6. 개인 생활
이치카와 후사에는 공식적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며, 가족 관계로는 양녀 마시타 미사오가 있다. 마시타 미사오는 16세이던 1942년 6월부터 이치카와 후사에의 집에서 거주하며 그녀의 일을 도왔고, 1949년 8월 20일 이치카와의 양녀가 되어 성을 이치카와로 바꾸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양녀와 함께 하치오지시 가와구치촌으로 소개(疏開)하여 지냈는데, 이때 둘이서 직접 밭을 일구며 채소를 재배하기도 했다.
이치카와 후사에는 대중 앞에서 항상 꾸밈없는 모습을 보였다. 1979년 『크루아상』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화장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목욕 후 피부가 푸석푸석해서 크림을 바르는 정도가 화장이라면 화장일까"라고 답하며 소박한 개인 생활을 공개했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당시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그녀의 강인하고 진실된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은 여성 운동가로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신체적 학대를 가하는 것을 목격한 기억은 그녀가 여성의 권리와 존엄성을 옹호하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7. 사망 및 유산
7.1. 사망

이치카와 후사에는 1981년 1월 16일, 가슴 통증을 호소하여 도쿄도 시부야구에 위치한 일본 적십자사 의료 센터에 입원하여 요양 중이었다. 그 후 1981년 2월 11일 오전 7시 13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87세였다. 그녀의 묘소는 후지 영원에 안치되어 있다. 그녀가 사망한 지 이틀 뒤인 2월 13일, 참의원 본회의에서는 이치카와 후사에에게 의장으로부터 조사가 전달되었으며, 영년재직 의원 표창이 수여되었다. 이후 2월 27일에는 참의원 본회의에서 이시모토 시게루 의원에 의해 추도 연설이 진행되었다. 같은 해 그녀의 고향인 아이치현 비사이시의 명예 시민이 되었으며, 비사이시가 이치노미야시와 합병된 후에는 이치노미야시의 명예 시민으로 기려지고 있다.
7.2. 사후 영향 및 기념물
이치카와 후사에의 사망 이후에도 그녀의 유산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1981년, 다큐멘터리 영화 『87세의 청춘 -이치카와 후사에 생애를 말하다-』(八十七歳の青春 -市川房枝生涯を語る-하치주나나사이노 세이슌 -이치카와 후사에 쇼가이오 카타루-일본어)가 공개되었다. 이 영화는 무라야마 에이지가 감독과 각본을 맡았으며, 요네쿠라 마사카네가 내레이션을 담당했다.
1983년 11월 15일, 이치카와가 설립한 부선회관의 증개축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건물 2층에는 이치카와 후사에 기념 전시실(市川房枝記念展示室이치카와 후사에 키넨텐지시츠일본어)이 설치되어 그녀의 활동과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또한 같은 날, 재단법인 부선회관은 재단법인 이치카와 후사에 기념회(財団法人市川房枝記念会자이단호진 이치카와 후사에 키넨카이일본어)로 명칭을 변경했다. 2009년에는 이 단체가 재단법인 이치카와 후사에 기념회 여성과 정치 센터(財団法人市川房枝記念会女性と政治センター자이단호진 이치카와 후사에 키넨카이 조세이토 세이지센터일본어)로 개칭되었으며, 2013년 4월 1일에는 [https://www.ichikawa-fusae.or.jp/ 공익재단법인 이치카와 후사에 기념회 여성과 정치 센터]로 전환되었다.
2000년, 아사히 신문사가 실시한 '가장 좋아하는 정치 지도자' 독자 투표에서 이치카와 후사에는 230표를 얻어 9위에 랭크되었고,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이는 그녀가 일본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지속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치카와가 평생을 바쳐 활동했던 일본부인유권자동맹은 그녀의 비서 출신으로 참의원 의원이 된 키히라 테이코에게 그 활동이 계승되었으나, 회원들의 고령화와 감소로 인해 2016년 4월에 해산했다.
현재 국립 국회 도서관에는 이치카와가 1978년에 남긴 7시간에 달하는 "정치 담화 녹음"이 보존되어 있다. 이 녹음은 본래 30년 후인 2008년에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이치카와 후사에 기념회 등의 요청으로 기한 이전에 공개되었다. 현재 국립국회도서관에서 해당 녹음 테이프의 청취와 문자화된 "담화 속기록"의 열람 및 복사가 가능하다.
그녀의 생애와 활동은 현대 일본 여성 운동 및 정치 개혁의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녀의 학창 시절 파업 사건은 극작가 나가이 아이의 1997년 희곡 『見よ、飛行機の高く飛べるを』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8. 저작
이치카와 후사에는 활발한 사회 및 정치 활동 외에도 다양한 저술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운동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다음은 그녀의 주요 단독 저서들이다.
- 『전시부인독본』 (쇼와서방, 1943년)
- 『부인계의 동향』 (문송당출판, 1944년)
- 개제 『전후 부인계의 동향: 부인의 민주화를 중심으로』 (부선회관출판부, 1969년)
- 『부인공민교육문제』 (인쇄국, 1946년)
- 『새로운 정치와 부인의 과제』 (인쇄국, 1946년)
- 『부선운동회고』 (부인문제연구소, 1955년)
- 『전일본부인의원대회의사록: 부인참정십주년기념』 (부인참정십주년기념행사실행위원회 잔무정리위원회, 1956년)
- 『부인참정십주년기념행사실행위원회 기록: 부록 부인참정관계자료』 (부인참정십주년기념행사실행위원회 잔무정리위원회, 1959년)
- 『37·7·1 참의원 선거의 비용과 37년 정당 등의 정치자금과 회사의 정치헌금: 이치카와 후사에 조사』 (이상선거보급회, 1965년)
- 『나의 부인운동』 (아키모토서방, 1972년)
- 『나의 정치소론』 (아키모토서방, 1972년)
- 『이치카와 후사에 자서전 전전편(메이지 26년 5월-쇼와 20년 8월)』 (신주쿠서방, 1974년)
- 『내가 말하고 싶은 것: 정치와 삶을 생각하다』 (포플러사, 1976년)
- 『정치』 (도메스출판, 1977년)
- 『인권』 (도메스출판, 1978년)
- 『무청의 꽃』 (신주쿠서방, 1979년)
- 『스톱·더·오직의원!: 시민 운동의 기록』 (신주쿠서방, 1980년)
- 『들판의 외로운 삼나무』 (신주쿠서방, 1981년)
- 『이치카와 후사에의 국회 전 발언집: 참의원 회의록에서 발췌』 (이치카와 후사에 기념회 출판부, 1992년)
- 『나의 국회보고』 (이치카와 후사에 기념회 출판부, 1992년)
- 『부선: 부선획득동맹 기관지』 (후지출판, 1992년)
- 『이치카와 후사에 나의 이력서 외』 (일본도서센터, 1999년 2월)
- 『이치카와 후사에집』 (일본도서센터, 1994년)
그녀는 또한 다른 저자들과의 공저로도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녀의 저술들은 일본의 여성 운동, 사회 개혁, 그리고 정치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9. 관련 인물
이치카와 후사에의 생애와 활동은 수많은 동료, 정치적 동맹자, 그리고 참모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녀와 밀접하게 연관되거나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히라쓰카 라이초: 일본의 선구적인 페미니스트이자 작가로, 이치카와 후사에와 함께 1919년 일본 최초의 여성 단체인 신부인협회를 공동 설립했다.
- 앨리스 폴: 미국의 주요 여성 참정권 운동가로, 이치카와는 1921년 미국 유학 중 그녀를 만나 미국의 여성 운동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 캐리 채프먼 채트: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의 주요 인물로, 이치카와는 미국 방문 중 그녀와도 교류했다.
- 야마타카 시게리: 이치카와와 긴밀히 협력하여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끌었으며, 이후 참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 구부시로 오치미: 이치카와와 함께 "전후대책부인위원회"를 조직하여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다.
- 오쿠 무메오: 이치카와와 함께 여성 참정권 실현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의 특별 표창을 받았다.
- 나가이 아이: 극작가로, 이치카와 후사에의 학창 시절 수업 파업 사건을 소재로 1997년 희곡 『見よ、飛行機の高く飛べるを』를 발표했다.
- 오가타 사다코: 국제정치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이치카와 후사에의 설득으로 1968년 일본 유엔 대표단에 참여하며 국제연합에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 간 나오토: 1974년 참의원 선거에서 고령의 이치카와 후사에가 전국구에 출마했을 때 그녀의 선거 사무장을 맡아 활약했다. 이후 사회민주연합을 거쳐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 키히라 테이코: 이치카와 후사에의 비서 출신으로, 1974년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이후 1989년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이치카와의 활동을 계승했다.
- 미야케 잇세이: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로, 1974년 이치카와 후사에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옷을 선물하고 그녀의 모습을 『아사히 그래프』 표지에 싣기도 했다.
- 시노야마 키신: 유명 사진작가로, 1974년 미야케 잇세이의 옷을 입은 이치카와 후사에의 모습을 『아사히 그래프』 표지로 촬영했다.
- 마시타 미사오: 이치카와 후사에의 양녀이자 동반자로, 오랜 기간 그녀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활동을 도왔다.
- 이시하라 간지: 일본의 군인이자 사상가로, 이치카와는 그를 "고결한 인격자"이자 "훌륭한 군인"으로 높이 평가했다.
- 다나카 세이겐, 다오카 가즈오, 야마오카 소하치: 이치카와 후사에는 1963년 결성된 "마약 추방 국토 정화 동맹" 활동에서 이들과 협력하기도 했다.
- 미노베 료키치: 1967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이치카와 후사에가 일본부인유권자동맹 회장직을 사임하고 지원했던 후보로, 이후 도쿄도지사로 당선되었다.
- 도이 다카코, 사사키 시즈코, 다나카 스미코: 1972년 오키나와 반환 밀약 문제와 관련하여 이치카와와 함께 "하스미 씨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