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어린 시절 및 초기 경력
엑토르 페드로 스카로네 베레타는 1898년 11월 26일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났다. 그는 또한 나시오날의 또 다른 전설인 축구 선수 카를로스 스카로네의 동생이기도 하다.
스카로네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나시오날 입단을 시도했으나, 당시 1.69 m에 불과한 왜소한 체격과 가냘픈 다리 때문에 입단이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1년 뒤 다시 입단 요청을 받아들여 2군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는 2군 경기에서 단 5경기만을 소화한 뒤 곧바로 1군으로 승격되며 자신의 잠재력을 증명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엑토르 스카로네는 선수 경력 동안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수많은 업적을 달성했으며, 은퇴 후에는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2.1. 클럽 경력
스카로네는 선수 경력의 대부분을 나시오날에서 보냈다. 그는 나시오날에서 총 20년간 활약하며 21개의 공식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나시오날 소속으로 369경기에 출전하여 301골을 기록했으며, 이는 구단 역대 최다 득점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또한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163골을 기록하며 리그 역대 최다 득점 3위에 올랐다. 그는 나시오날에서 8번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경험했다.
1926년에는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18경기에 출전해 17골을 기록하며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본인의 희망에 따라 1년 만에 나시오날로 복귀했다. 이후 1931년에는 이탈리아의 인테르 (당시 AS 암브로시아나-인테르)로 이적하여 14경기에서 7골을 기록했고, 1932년에는 팔레르모로 옮겨 54경기에서 13골을 넣었다. 1934년 시즌 도중 다시 나시오날로 돌아온 그는 복귀 첫해에 팀의 8번째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3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기량을 유지했으며, 41세까지 나시오날에서 뛰면서 마지막 해에도 득점을 기록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2.2. 국가대표팀 경력
스카로네는 1917년부터 1930년까지 우루과이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국가대표팀에서 52경기에 출전하여 31골을 기록했는데, 이 중 21골은 비공식 경기에서 기록되었다. 그의 31골은 디에고 포를란이 2011년에 경신하기 전까지 80년 이상 동안 우루과이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스카로네는 19세의 나이로 참가한 191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우루과이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는 그의 네 번째 국가대표팀 경기였다. 그는 또한 남미 선수권 대회에서 1917년, 1923년, 1924년, 1926년에 걸쳐 총 네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FIFA 월드컵이 창설되기 전 세계 선수권 대회의 권위를 가졌던 올림픽 축구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우루과이의 두 차례 금메달 획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 결승전 재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스카로네는 1930년 FIFA 월드컵에서도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우루과이의 초대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1930년 7월 21일 루마니아를 상대로 득점하며 19세기 출생 선수 중 월드컵 본선에서 마지막으로 득점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2.3. 감독 경력
선수 은퇴 후 스카로네는 축구 감독으로 변신했다. 그는 미요나리오스의 창단 이래 두 번째 감독으로, 아마추어 팀이었던 1947년부터 1948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했다. 1950년대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을 맡아 1951-52 시즌에 팀을 9위에서 3위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보였다. 또한 1954년에는 친정팀인 나시오날의 감독을 역임했으며, 1960년에는 데포르티보 키토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2.4. 선수로서의 특징 및 평가
엑토르 스카로네는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특히 공을 다루는 기술이 매우 뛰어나 '마법사'라는 뜻의 El Mago엘 마고스페인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또한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영향력은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에 비유되어 '축구의 가르델'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의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과 기술적인 능력은 많은 축구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2.5. 통계
엑토르 스카로네의 클럽 및 국가대표팀 통계는 다음과 같다.
연도 | 클럽 | 출전 | 득점 |
---|---|---|---|
1917-1926 | 나시오날 | 115 | 108 |
1926-1927 | 바르셀로나 | 18 | 17 |
1927-1931 | 나시오날 | 45 | 39 |
1931-1932 | 인테르 | 14 | 7 |
1932-1934 | 팔레르모 | 54 | 13 |
1934-1939 | 나시오날 | 31 | 16 |
합계 | 277 | 200 |
# | 날짜 | 경기장 | 상대 | 점수 | 결과 | 대회 |
---|---|---|---|---|---|---|
1. | 1917년 10월 7일 | 파르케 페레이라, 몬테비데오, 우루과이 | 브라질 | 1-0 | 4-0 | 191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2. | 1917년 10월 14일 | 파르케 페레이라, 몬테비데오, 우루과이 | 아르헨티나 | 1-0 | 1-0 | |
3. | 1918년 7월 28일 | 파르케 페레이라, 몬테비데오, 우루과이 | 아르헨티나 | 1-0 | 3-1 | 1918년 코파 프레미오 오노르 우루과요 |
4. | 1919년 5월 13일 | 이스타지우 다스 라랑제이라스,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 | 아르헨티나 | 2-0 | 3-2 | 1919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5. | 1919년 7월 18일 | 파르케 페레이라, 몬테비데오, 우루과이 | 아르헨티나 | 1-0 | 4-1 | 1919년 코파 프레미오 오노르 우루과요 |
6. | 3-0 | |||||
7. | 1919년 9월 17일 | 에스타디오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 아르헨티나 | 1-0 | 2-1 | 1919년 코파 리프톤 |
8. | 2-0 | |||||
9. | 1919년 12월 7일 | 파르케 페레이라, 몬테비데오, 우루과이 | 아르헨티나 | 3-1 | 4-2 | 1919년 트로페오 시르쿨라르 |
10. | 1920년 7월 18일 | 에스타디오 그란 파르케 센트랄, 몬테비데오, 우루과이 | 아르헨티나 | 1-0 | 2-0 | 1920년 코파 프레미오 오노르 우루과요 |
11. | 1923년 11월 4일 | 에스타디오 그란 파르케 센트랄, 몬테비데오, 우루과이 | 파라과이 | 1-0 | 2-0 | 1923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12. | 1924년 5월 26일 | 스타드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 콜롱브, 프랑스 | 유고슬라비아 왕국 축구 국가대표팀 | 2-0 | 7-0 | 1924년 하계 올림픽 축구 |
13. | 1924년 5월 29일 | 스타드 베르제이르, 파리, 프랑스 | 미국 | 2-0 | 3-0 | |
14. | 1924년 6월 1일 | 스타드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 콜롱브, 프랑스 | 프랑스 | 1-0 | 5-1 | |
15. | 2-1 | |||||
16. | 1924년 6월 6일 | 스타드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 콜롱브, 프랑스 | 네덜란드 | 2-1 | 2-1 | |
17. | 1926년 10월 17일 | 에스타디오 캄포스 데 스포르트 데 뉴뇨아, 산티아고, 칠레 | 칠레 | 3-0 | 3-1 | 1926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18. | 1926년 10월 28일 | 에스타디오 캄포스 데 스포르트 데 뉴뇨아, 산티아고, 칠레 | 볼리비아 | 1-0 | 6-0 | |
19. | 2-0 | |||||
20. | 3-0 | |||||
21. | 4-0 | |||||
22. | 6-0 | |||||
23. | 1927년 8월 29일 | 에스타디오 미니스트로 브린 이 셍겔,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 아르헨티나 | 1-0 | 1-0 | 1927년 코파 리프톤 |
24. | 1927년 11월 6일 |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리마, 페루 | 볼리비아 | 9-0 | 9-0 | 192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25. | 1927년 11월 20일 |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리마, 페루 | 아르헨티나 | 1-0 | 2-3 | |
26. | 2-2 | |||||
27. | 1927년 12월 10일 | 비냐델마르, 칠레 | 칠레 | 3-2 | 3-2 | 친선 경기 |
28. | 1928년 5월 30일 | 암스테르담 올림픽 경기장,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 네덜란드 | 1-0 | 2-0 | 1928년 하계 올림픽 축구 |
29. | 1928년 6월 7일 | 암스테르담 올림픽 경기장,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 이탈리아 | 3-1 | 3-2 | |
30. | 1928년 6월 13일 | 암스테르담 올림픽 경기장,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 아르헨티나 | 2-1 | 2-1 | 1928년 하계 올림픽 축구 금메달 결정전 재경기 |
31. | 1930년 7월 21일 |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몬테비데오, 우루과이 | 루마니아 | 2-0 | 4-0 | 1930년 FIFA 월드컵 |
2.6. 수상 경력
엑토르 스카로네는 선수 생활 동안 수많은 클럽 및 국가대표팀 우승을 경험했다.
- 나시오날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1916, 1917, 1919, 1920, 1922, 1923, 1924, 1934
- 코파 오노르: 1916, 1917
- 코파 콤페텐시아: 1919, 1921, 1923
- 코파 알비온: 1919
- 코파 레온 페이로우: 1920
- 토르네오 콤페텐시아: 1934
- 코파 데 오노르 쿠세니에르: 1916, 1917
- 코파 알다오: 1916, 1919, 1920
- 바르셀로나
- 코파 델 레이: 1926
- 우루과이 국가대표팀
- 코파 아메리카: 1917, 1923, 1924, 1926
- 하계 올림픽 금메달: 1924, 1928
- FIFA 월드컵: 1930
- 개인 수상
- IFFHS 우루과이 남자 드림팀 선정
-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IFFHS) 선정 20세기 세계 최우수 선수 40위 (1999년)
3. 개인적인 삶
엑토르 스카로네는 나시오날의 또 다른 전설적인 축구 선수인 카를로스 스카로네의 동생으로, 형제 모두 우루과이 축구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4. 사망
엑토르 스카로네는 1967년 4월 4일, 자신의 나이 68세에 몬테비데오에서 사망했다. 그는 사망 직전까지 나시오날의 경기를 관람하는 등 축구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에서 동료 축구인이자 1930년 FIFA 월드컵 우승팀의 주장이었던 호세 나사시는 "우리는 젊고, 강하고,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불멸이라고 생각했었죠"라고 추모하며 그의 삶과 업적을 기렸다.
5. 평가
엑토르 스카로네는 20세기 초반 세계 축구를 지배했던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올림픽 축구에서 두 차례 금메달을 획득하고 초대 FIFA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우루과이를 세계 축구 강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그의 뛰어난 기술과 볼 컨트롤은 '마법사'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나시오날에서 20년간 활약하며 수많은 우승을 차지했고, 구단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국가대표팀에서도 오랜 기간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며 우루과이 축구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업적과 기록은 후대 축구 선수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그는 여전히 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6. 영향력
엑토르 스카로네의 영향력은 단순히 그의 뛰어난 기록과 수상 경력을 넘어선다. 그는 1930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한 마지막 19세기 출생 선수로, 축구의 초기 황금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의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은 80년 이상 깨지지 않았으며, 이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루과이 축구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마법사'라는 별명은 기술적인 축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후대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스카로네는 우루과이 축구 스타일의 초석을 다진 인물 중 하나로, 그의 플레이는 남미 축구 특유의 창의성과 개인 기술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루과이가 세계 축구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우루과이 축구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