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에리히 라인스도르프의 초기 생애와 음악 교육은 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유럽에서의 전문적인 경력을 쌓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1. 어린 시절 및 음악 교육
라인스도르프는 1912년 2월 4일 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5세부터 지역 학교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첼로와 작곡을 공부했다. 십 대 시절에는 성악가들의 피아노 반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지휘를 배웠고, 이후 빈 대학교와 빈 국립음악대학에서 첼로와 피아노를 전공했다.
1.2. 유럽에서의 초기 경력
1934년부터 1937년까지 라인스도르프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저명한 지휘자인 브루노 발터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조수로 일하며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1936년에는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오페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1937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를 지휘하며 미국 무대에 데뷔했고,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2. 미국 이주 및 시민권 취득
라인스도르프는 나치 독일의 위협 속에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의 삶과 경력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2.1.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 및 초기 미국 활동
1937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라인스도르프는 미국인 신문사 소유주이자 투자자인 찰스 에드워드 마시를 만났다. 유대계 음악가들의 미국 망명을 돕던 마시의 주선으로, 라인스도르프는 같은 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부지휘자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의 오스트리아 출국은 조국이 나치 독일에 합병되기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마시의 지인이자 당시 텍사스주 출신의 신인 미국 하원 의원이었던 훗날의 대통령 린든 B. 존슨의 도움을 받아, 라인스도르프는 미국에 머무를 수 있었고 1942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귀화했다. 그의 미국 정착 과정과 린든 B. 존슨의 도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린든 B. 존슨 도서관의 [https://web.archive.org/web/20020602225553/http://www.lbjlib.utexas.edu/johnson/archives.hom/oralhistory.hom/Leinsdorf-E/Leinsdorf.asp 구술 역사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38년부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며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 작품 해석으로 명성을 얻었다. 1939년 아르투르 보단츠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라인스도르프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독일 레퍼토리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3. 주요 지휘 경력
에리히 라인스도르프는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로체스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미국 유수의 오케스트라에서 음악 감독 및 수석 지휘자를 역임하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3.1.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1943년 라인스도르프는 3년 계약으로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미국군 징집으로 인해 매우 짧았다. 클리블랜드에서의 첫해 동안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오케스트라가 콘서트를 미리 홍보하고 더 넓은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전체 시즌 일정을 미리 계획하려는 그의 의지였다. 또한 그는 오케스트라가 연중 내내 공연하기를 원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그 가능성은 복잡해졌다. 마침내 그는 일요일 저녁 주간 라디오 방송을 성공적으로 협상하여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연주가 미국 전역, 멕시코 일부 지역, 그리고 단파 방송을 통해 유럽, 남아메리카, 남태평양까지 들릴 수 있게 했다. 더 중요하게는, 전쟁에 미국이 참전하면서 콘서트가 녹음되어 해외 미군 주둔 지역으로 방송되었다.
그러나 라인스도르프의 음악 감독 재임 기간은 짧았다. 1943년 10월, 그는 징집 대상자 신분이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받았고, 비록 여러 건강 문제로 인해 징집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달 말에 징집 통지서를 받았다. 그는 언론에 "나는 정부의 명령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라인스도르프의 임박한 이탈은 음악 예술 협회에 큰 문제를 안겨주었다.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은 새로운 음악 감독이 필요했다.
라인스도르프의 군 복무 기간은 짧았지만(1944년 9월 명예 전역), 오케스트라는 이미 그의 후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1944년 11월, 라인스도르프와 함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있었던 조지 셀이 세버런스 홀에서 데뷔하여 극찬을 받았다. 라인스도르프는 여전히 계약 상태였지만, 음악 감독으로서의 권한을 많이 잃었으며, 공연 내용부터 녹음 권한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제에서 타협해야 했다. 그는 시즌 마지막 프로그램에서 세버런스 홀의 지휘대에 다시 섰다. 대중의 여론이 셀에게로 기울자 라인스도르프는 사임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1970년 셀이 사망한 후, 라인스도르프는 1980년대까지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에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자로 돌아왔다. 특히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로린 마젤에서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로 음악 감독이 교체되던 시기에 그는 "정권 교체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스스로 언급했다.
3.2. 로체스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인스도르프는 1947년부터 1955년까지 로체스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로체스터의 폐쇄적인 음악 문화에 절망하게 되었고, "로체스터는 세상에서 가장 잘 위장된 막다른 골목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3.3.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1962년 라인스도르프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다. 보스턴 재임 기간 동안 그는 RCA 레코드와 많은 음반을 녹음했지만, 때때로 연주자 및 행정가들과 마찰을 빚으며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라인스도르프의 지휘는 역사적 사건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63년 11월 22일,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도중 라인스도르프는 연주를 중단하고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발생한 케네디 대통령 암살 소식을 충격에 빠진 청중에게 알렸다. 그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분노와 대통령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영웅'의 장송 행진곡을 연주했다. 케네디 추모 미사에서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했으며, 이 실황은 현재도 음반으로 발매되어 있다.
1967년에는 제3차 중동 전쟁 발발로 인해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객원 지휘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기도 했다. 연주회 자체는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빈 메타가 대신 지휘하여 개최되었다.
3.4. 기타 주요 지휘 활동
로체스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떠난 후, 라인스도르프는 잠시 뉴욕 시티 오페라의 음악 감독(1956년~1957년)을 맡았으며, 이후 다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협력 관계를 이어갔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는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현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
1974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객원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경영 악화로 인해 가수들의 출연 취소 등이 잇따랐다. 이에 대해 그는 당시 음악 감독인 라파엘 쿠벨릭과 수석 지휘자인 제임스 레바인이 무기력하다고 비판하며 뉴욕 타임스지에 불만을 표명했다. 이 사건이 쿠벨릭의 음악 감독 사임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도 있다. 이후에도 라인스도르프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객원 지휘를 맡았지만, 그의 엄격한 요구로 인해 종종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4. 객원 지휘 및 후기 경력
1969년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직을 사임하고 모든 상임 지휘자 직책에서 물러난 후에도, 라인스도르프는 이후 20여 년간 전 세계의 오페라단과 오케스트라에 광범위하게 객원 지휘자로 초청받았다. 그는 특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 필하모닉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에도 1980년대까지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자로 돌아왔다.

5. 음악적 스타일 및 평판
라인스도르프는 지휘에 있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이는 그의 신랄한 성격과 함께 그의 평판을 형성했다. 그는 연주자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했으며, 악보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충실한 해석을 강조했다. 이러한 엄격함은 때때로 오케스트라 단원이나 행정가들과의 마찰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연주에 대한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보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의 지휘는 오페라와 심포니 양쪽에서 폭넓은 적응성을 보였으며, 특히 미국 무대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미국화된' 지휘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라인스도르프는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의 지크프리트, 베토벤의 교향곡 9번,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지휘할 가치가 있는 세 작품으로 꼽기도 했다.
6. 음반 및 미디어 활동
에리히 라인스도르프는 방대한 양의 음반을 남겼으며, 그의 공연은 텔레비전과 DVD를 통해서도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6.1. 음반 주요 내용
라인스도르프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활발하게 녹음 활동을 펼쳤다. 초기에는 클리블랜드 관현악단과 함께 RCA 빅터 및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78rpm 음반을 녹음했다. 1950년대 초에는 웨스트민스터 레코드에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차르트의 모든 교향곡을 녹음했으며, 컬럼비아 레코드에서는 로체스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을 녹음하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연주에 필적하는 강렬함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에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그리고 콘서트 아츠 오케스트라와 함께 캐피틀 레코드에서 여러 스테레오 녹음을 진행했다. 또한 RCA 빅터에서는 아니아 도르프만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음반에서는 로빈 후드 델 오케스트라로 표기)와 함께 브람스 교향곡 1번, 프랑크의 교향곡 라단조, 멘델스존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했다.
1957년부터 라인스도르프는 RCA 빅터를 위해 로마에서 진행된 일련의 스테레오 오페라 전곡 녹음 지휘를 시작했으며, 푸치니의 토스카를 시작으로 진카 밀라노브, 유시 비욜링, 레너드 워렌 등 당대 최고의 성악가들과 함께 작업했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도 그는 RCA 빅터를 위해 계속 녹음했으며, 말러와 바르토크의 작품,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 전곡, 그리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추모하는 모차르트 레퀴엠 실황 음반 등이 주목할 만하다. 이후 그는 코른골트의 죽음의 도시 최초 스테레오 전곡 녹음(RCA, 캐럴 네블렛과 르네 콜로 참여)을 포함한 추가 오페라 녹음을 진행했다.
라인스도르프는 아르투르 루빈슈타인과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루빈슈타인의 두 번째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녹음,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녹음했다. 또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로엔그린 전곡을 녹음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주요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된 최초의 바그너 오페라로, 방대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프로젝트였다. 라인스도르프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부임할 당시 프로코피예프의 주요 작품들을 모두 녹음할 것이라고 발표되었지만, 그의 재임 기간이 끝날 때까지 교향곡 2번, 3번, 5번, 6번, 바이올린 협주곡,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 로미오와 줄리엣 음악, 스키타이 모음곡, 첼로를 위한 교향곡-협주곡만이 녹음되어 발매되었다. 그의 많은 RCA 빅터 녹음들은 당시 논란이 많았던 다이나그루브 공정으로 인해 결함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데카/런던 레코드를 위해 라인스도르프는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 등 여러 모차르트 오페라와 함께 바그너의 발퀴레의 높은 평가를 받는 녹음을 진행했다. 1970년대 보스턴을 떠난 후, 라인스도르프는 데카/런던으로 돌아와 그들의 호평받는 페이즈 4 스테레오 프로젝트의 여러 음반을 녹음했으며,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페트루슈카가 주목할 만하다. 1980년대에는 셰필드 랩스를 위해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세 장의 다이렉트-투-디스크 녹음을 진행했다.
1946년 클리블랜드 관현악단과 함께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6번 라장조 Op. 60을 지휘한 녹음이 아카이브 오르그(archive.org)에서 공개되어 있다. 또한 1946년 클리블랜드 관현악단과 녹음한 로베르트 슈만의 교향곡 1번 내림나장조 Op. 38 '봄'도 아카이브 오르그를 통해 접할 수 있다. 1957년 로체스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교향곡 41번 다장조 '주피터'와 교향곡 35번 라장조 '하프너'를 지휘한 녹음도 아카이브 오르그에서 들을 수 있다. 로체스터 필하모닉과의 작업 중에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로자문데 서곡 및 발레 음악 Op. 26과 펠릭스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가장조 Op. 90 '이탈리아' 녹음도 아카이브 오르그에 공개되어 있다.
6.2. 수상 및 영예
라인스도르프는 그의 경력 동안 총 7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으며, 12번의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
- 1961년 - 최우수 오페라 녹음 (투란도트)
- 1964년 - 최우수 오페라 녹음 (나비 부인)
- 1964년 - 최우수 관현악 연주 (바르토크: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 1965년 - 최우수 관현악 연주 (말러: 교향곡 5번 / 베르크: 보체크 발췌곡)
- 1967년 - 최우수 관현악 연주 (말러: 교향곡 6번)
- 1969년 - 최우수 오페라 녹음 (코지 판 투테)
- 1972년 - 최우수 오페라 녹음 (아이다)
6.3. 시각 매체
라인스도르프는 비디오 매체를 통해서도 그의 예술을 선보였다. 그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요한 슈트라우스: 유명 작품들 DVD를 실버라인 클래식스에서 2003년에 돌비 디지털 사운드로 발매했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여러 텔레비전 공연은 VAI와 ICA 클래식스를 통해 DVD로 출시되었다. 특히 ICA 클래식스에서는 1969년 4월에 컬러로 녹화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공연이 여러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라인스도르프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WGBH-TV의 지역 방송과 PBS의 이브닝 앳 심포니 방송에 정기적으로 출연했다. 1967년 8월 17일, 라인스도르프는 NBC에서 2시간짜리 황금 시간대 특별 컬러 텔레비전 방송인 탱글우드에서의 저녁에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이츠하크 펄먼이 게스트 솔리스트로 출연했다. 이는 상업 방송국이 정기적으로 전곡 클래식 콘서트를 방송하던 시절의 모습을 보여준다.
7. 저술 활동
라인스도르프는 음악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여러 저서를 남겼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1976년에 출판된 회고록인 Cadenza: A Musical Career영어가 있다. 이 책은 그의 음악적 경력에 대한 개인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1981년에는 The Composer's Advocate: A Radical Orthodoxy for Musicians영어를 저술하여 음악가들을 위한 급진적인 정통주의를 제안하며 작곡가와 연주자의 관계에 대한 그의 철학을 피력했다. 1997년에는 Erich Leinsdorf on Music영어이 출판되었다. 그는 또한 브루스 더피와의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견해와 경력에 대한 깊은 통찰을 공유하기도 했다.
8. 개인사
에리히 라인스도르프는 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사생활에 대한 공개된 정보는 제한적이지만, 그의 유대인 혈통과 나치즘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경험은 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 미쳤다.

9. 사망
에리히 라인스도르프는 1993년 9월 11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81세였다. 그의 유해는 뉴욕주호손의 마운트 플레전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10. 유산 및 평가
에리히 라인스도르프는 클래식 음악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으며, 그의 예술적 성취와 개인적 면모는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10.1. 클래식 음악에 미친 영향
라인스도르프는 오케스트라 연주 수준 향상과 레퍼토리 확장에 기여했다. 그는 클로드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리하르트 바그너의 파르지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여인 등 주요 오페라 음악을 오케스트라 콘서트 모음곡으로 편곡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방대한 음반 녹음과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 출연은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소식을 청중에게 알린 후 베토벤의 장송 행진곡을 연주하는 등 역사적인 순간에 지휘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0.2. 비평적 평가 및 논란
라인스도르프는 엄격한 기준과 신랄한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이는 그의 음악적 해석과 리더십에 대한 비평적 평가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연주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완벽함을 요구했으며, 악보에 대한 철저한 충실도를 강조했다. 이러한 엄격함은 때때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재임 시절 연주자 및 행정가들과의 마찰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는 그의 엄격한 요구로 인해 여러 차례 문제가 발생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휘는 명확하고 정교하며, 뛰어난 음악적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음반 중 일부는 RCA 빅터의 다이나그루브 공정으로 인해 음질 논란이 있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그의 녹음들은 클래식 음악사에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