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서양 고전 음악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고전주의 음악에서 낭만주의 음악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고전 음악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인 베토벤은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과 스승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21세에 빈으로 이주하여 요제프 하이든에게서 작곡을 배우며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었고,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다.
20대 후반부터 시작된 난청은 그의 삶과 창작 활동에 큰 고통을 주었지만, 그는 이를 예술적 승화의 계기로 삼아 '영웅적' 양식의 대규모 작품들을 창작했다. 특히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 담긴 고뇌와 예술을 향한 의지는 그의 삶과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는 청력이 거의 완전히 상실되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고, 조카 카를 판 베토벤의 양육권 문제로 고통받으면서도 교향곡 9번, 장엄미사 등 혁신적이고 깊이 있는 작품들을 남겼다.
베토벤은 음악을 단순한 오락이 아닌 인류애와 자유를 표현하는 고귀한 예술로 보았으며, 당대 프랑스 혁명 사상과 자유주의적 정치관에 깊이 공감했다. 그의 외형은 평범했으나 강렬한 눈빛을 가졌고, 성격은 변덕스럽고 괴팍했으나 친절한 면모도 있었다. 끊임없는 질병과 난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아노를 개조하는 등 음악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베토벤은 후대 음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악성'으로 불리며 현재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기념되고 추모되고 있다.
2. 초기 생애
베토벤은 라인 강변의 도시 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유년기와 교육, 그리고 본에서의 초기 활동은 그의 음악적, 개인적 성장에 중요한 기반을 다졌다.
2.1. 출생과 가족 배경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Ludwig van Beethoven루트비히 판 베토벤독일어으로, 1770년 12월 17일에 세례를 받았다. 당시 지역 관습에 따라 출생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했으므로, 그의 실제 생일은 12월 16일로 추정되며 베토벤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쾰른 선제후국의 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의 메헬렌 출신이었다. 조부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1712-1773)은 21세에 본으로 이주하여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쾰른 대주교의 궁정에서 베이스 가수로 고용되었고, 1761년에는 카펠마이스터(음악 감독)에 올라 본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가 되었다. 그가 죽기 전 주문 제작한 초상화는 베토벤의 방에 걸려 그의 음악적 유산을 상징하는 부적처럼 존재했다.
조부 루트비히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자 베토벤의 아버지인 요한 판 베토벤(1740-1792)은 같은 궁정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며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건반악기 및 바이올린 레슨을 했다. 1767년 요한은 트리어 대주교령의 수석 요리사 딸인 마리아 마그달레나 케베리히(1746-1787)와 결혼했다. 요한 판 베토벤의 일곱 자녀 중 유아기를 넘겨 성인이 된 자녀는 두 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와 두 남동생뿐이었다. 남동생 카스파 안톤 카를(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막내 동생인 니콜라우스 요한(1776-1848)은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되어 재산을 모았다. 이 두 동생은 베토벤의 삶에 여러 복잡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카스파는 형의 작품을 무단으로 팔아넘겨 형을 괴롭혔고, 카스파의 아들 카를은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고뇌를 안겨주었다. 요한 역시 형의 돈을 빌리고는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등 형을 힘들게 했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이 심했고 수입이 불안정했으며, 1787년 베토벤이 16세이던 해 어머니가 결핵으로 43세에 사망하자, 요한의 알코올 중독은 더욱 심해져 궁정에서 강제 퇴위당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베토벤은 어린 나이에 두 남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책임을 지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연금 절반을 직접 받을 수 있도록 청원하는 등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노력했다.
2.2. 유년기와 교육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이었다. 요한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성공 사례를 보며 아들을 신동으로 키우려 했고, 베토벤을 건반악기 앞에 세워놓고 혹독하게 가르쳐 어린 베토벤이 종종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요한은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유능한 교사들에게 맡겼다.
베토벤은 5세부터 아버지 외의 다른 스승들에게 음악을 배웠다. 궁정 오르간 연주자 질 판 덴 에덴과 가족 친구이자 건반악기를 가르친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가르친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 궁정 악장 프란츠 안톤 리스 등 여러 교사에게 사사했다. 특히 불면증 환자였던 파이퍼는 어린 베토벤을 한밤중에 침대에서 끌어내 건반 앞으로 데려가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1778년 3월, 7세 3개월이던 베토벤은 쾰른에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아버지는 그가 6세라고 속여 신동임을 과장했다. 베토벤은 피아노 연주 신동으로 불리며 이후 많은 소규모 공연을 가졌다.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그는 음악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
1780년 또는 1781년부터 베토벤은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게 작곡을 배웠다. 네페는 베토벤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예: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즉흥 연주법을 가르쳤다. 1783년 3월에는 베토벤의 첫 출판작인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이 출판되었다. 같은 해, "Magazin der Musik" ("음악잡지")에 11세의 베토벤을 "가장 유망한 재능"을 가진 소년으로 묘사하는 기사가 실렸다. 네페는 베토벤이 "두 번째 모차르트"가 될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베토벤의 어린 시절 가정 환경은 불안정했지만, 폰 브로이닝von Breuning 가문과의 인연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고, 폰 브로이닝 부인으로부터 어머니 같은 보살핌을 받으며 정신적인 안정을 찾았다.
2.3. 본에서의 활동


본에서의 베토벤은 1782년부터 스승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무급으로 일하다가 1784년부터 궁정 예배당의 유급 직원으로 일했다. 1783년 출판된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는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 선제후에게 헌정되어 "선제후"라는 부제로 불리기도 했다.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프란츠 선제후는 1784년 베토벤을 두 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정식 임명하며 급료를 지불했고, 1792년 빈으로의 이주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베토벤은 궁정 예배당에서 하프시코디스트와 비올리스트로도 활동하며 모차르트,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조반니 파이시엘로 등 당대 유명 오페라를 접하며 음악적 경험을 쌓았다.
이 시기 베토벤은 후에 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여러 인연을 맺었다. 폰 브로이닝 가문과의 깊은 유대는 그에게 불행한 가정으로부터의 도피처가 되어주었으며, 그는 이 집안의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폰 브로이닝 가문의 약혼자였던 젊은 의대생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는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 또한 친구이자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다. 발트슈타인은 1791년 베토벤의 첫 무대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하기도 했다.
1785년부터 1790년까지는 베토벤의 작곡 활동 기록이 거의 없다. 이는 그의 초기 출판물에 대한 미지근한 반응과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 악화로 인한 가정 문제 때문으로 추정된다. 1787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베토벤은 가계를 부양하기 위해 교습과 궁정 악단에서의 비올라 연주 등 여러 일을 겸했다.
1790년부터 1792년까지 베토벤은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성장 범위와 성숙도를 보여주는 여러 작품을 작곡했다. 그의 《교향곡 3번》과 유사한 주제가 1791년에 쓴 변주곡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네페의 추천으로 그는 요제프 2세의 사망을 기념하는 칸타타 《황제 요제프 2세의 죽음에 대한 칸타타, WoO 87》와 레오폴드 2세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칸타타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즉위에 대한 칸타타, WoO 88》를 위임받았다. 이 두 "황제 칸타타"는 브람스가 "하나부터 열까지 베토벤"이라고 칭찬할 때까지 1880년대까지 실종된 상태였다.
베토벤은 1790년 말 요제프 하이든이 런던으로 가는 길에 본에 잠시 들렀을 때 처음 만났고, 1792년 7월 하이든이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났다. 이때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자신의 칸타타 악보를 보여주었고, 하이든은 베토벤의 재능에 감명받아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다. 발트슈타인 백작은 베토벤에게 "맹렬한 노력으로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게 될 것"이라며 빈으로의 이주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냈다.
3. 빈에서의 활동
베토벤은 1792년 본을 떠나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한 후, 그의 음악적 경력과 개인적인 삶에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이 시기는 그가 거장으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고, 난청이라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영웅적' 양식을 확립하며 후기 대작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3.1. 빈 초기 활동


베토벤은 1792년 11월, 프랑스 혁명 전쟁의 소문이 퍼지는 가운데 본을 떠나 빈으로 향했다. 빈에 도착 직후 그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최근 사망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후계자라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모차르트의 작품을 깊이 연구하고 그 풍미가 짙은 작품들을 창작했다.
그는 즉시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기보다는 연구와 연주에 몰두했다. 요제프 하이든의 지도 아래 대위법을 마스터하려 했고, 이그나츠 슈판치히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또한 안토니오 살리에리로부터 주로 이탈리아 성악 작곡 스타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 관계는 적어도 1802년, 어쩌면 1809년까지 지속되었다.
1794년 하이든이 두 번째 영국 여행을 떠나자, 베토벤은 선제후의 예상과는 달리 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빈에 남았다. 이때쯤 본은 프랑스에 점령되어 베토벤은 사실상 급료나 귀향의 필요성 없이 빈에 남게 되었지만, 요제프 프란츠 로브코비츠 공작,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작,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여러 빈 귀족들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하이든과 발트슈타인 백작과의 인맥을 통해 베토벤은 빈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자와 즉흥 연주자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카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의 테마에 의한 피아노 변주곡 WoO 66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1793년까지 그는 빈에서 피아노 거장으로 확고한 명성을 얻었으나, 작품의 최종 출판이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일부러 출판을 미루기도 했다.
1795년 3월, 베토벤은 부르크 극장에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연주하며 빈에서 공식 데뷔했다. 이 공연 직후, 그가 처음으로 작품 번호(Opus)를 부여한 《피아노 삼중주 Op. 1》(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됨)이 출판되어 재정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799년에는 라이문트 베츨라어 남작의 집에서 요제프 뵐플과의 피아노 '결투'에서 승리했고, 이듬해에는 모리츠 폰 프리스 백작의 살롱에서 다니엘 슈타이벨트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8번째 피아노 소나타인 《비창 소나타》(Op. 13, 1799년 출판)는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 동기와 음조 조작의 기발함 면에서 이전 작품들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에 베토벤은 요제프 프란츠 로브코비츠 공작의 의뢰로 첫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 《Op. 18》을 작곡하여 1801년에 출판했다. 그는 또한 1799년에 그의 생애 동안 매우 인기가 많았던 《칠중주》(Op. 20)를 완성했다. 1800년과 1803년에 각각 초연된 그의 《교향곡 1번》과 《교향곡 2번》으로 인해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젊은 작곡가 세대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그의 멜로디, 음악적 전개, 변조 및 짜임새 사용, 감정 묘사는 선배 작곡가들과 차별화되며 초기 작품들의 영향력을 높였다. 1800년 4월 2일, 그는 부르크 극장을 빌려 자신의 교향곡 1번, 칠중주, 피아노 협주곡(모두 미발표) 및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을 포함한 대규모 연주회를 열었다. 이 연주회는 "오랜만에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는 평을 들었으며, 1800년 말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후원자와 출판사로부터 많은 수요를 얻었다.
1799년 5월, 베토벤은 헝가리 귀족 안나 브룬스비크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작은 딸 요제피네 브룬스비크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1801년에서 1805년까지 페르디난트 리스를, 1801년에서 1803년까지 카를 체르니를 가르쳤다. 체르니는 1801년 베토벤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텁수룩한 짙은 회색 재킷과 바지를 입고 있었고, 엉성하게 곤두선 새까만 머리카락이 얼굴 주변에 덥수룩했으며, 면도하지 않은 수염 때문에 검은 얼굴 아래쪽이 더욱 어두워 보였다"고 묘사했다. 1801년 말에는 줄리에타 귀차르디 백작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신분 차이로 이어지지 않았고, 그녀에게 1802년 《월광 소나타》(Op. 27 No. 2)를 헌정했다.
1801년 봄, 베토벤은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Op. 43)을 완성했으며, 이 작품은 1801년과 1802년에 여러 차례 공연되어 인기를 얻었다. 1802년에는 교향곡 2번을 완성했으나 초연이 취소되었고, 이듬해인 1803년 4월에 안 데르 빈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공연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도 함께 연주되었는데, 비평가들의 반응은 엇갈렸으나 재정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02년부터 베토벤의 동생 카스파는 형의 비서 역할을 하며 작품 출판 업무를 도왔고, 미발표 작품 판매 및 대중적인 작품의 편곡을 권유하여 베토벤의 사업적 성공에 기여했다.
3.2. 난청의 시작과 영웅적 시기


베토벤의 삶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난청의 시작이었다. 1815년 베토벤은 영국 피아니스트 찰스 네이트에게 1798년경 한 가수와의 격렬한 다툼으로 청력 상실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점진적인 청력 저하와 더불어 심각한 이명 증세가 나타나 그의 청력을 더욱 방해했다. 이미 1801년, 그는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와 카를 아멘다에게 편지를 써 자신의 증상과 이로 인한 직업적, 사회적 어려움을 상세히 설명했다. 난청의 원인으로는 귀경화증과 청각 신경의 퇴화가 가장 유력하며, 베토벤이 즐겨 마시던 와인에 함유된 납으로 인한 납 중독이나 1796년의 발진열 합병증 등 다양한 가설들이 제기되어 왔다. 2024년 연구에서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에서 매우 높은 납 농도가 발견되어 납 중독설에 힘을 실었다.
주치의의 권유에 따라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베토벤은 빈 외곽의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주하여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려 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문서인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했다. 이 유서에는 청력 상실로 인한 자살 충동과 예술을 통해 삶을 계속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편지는 결국 보내지지 않았고, 그의 사후에 발견되었다. 그는 베겔러에게 "운명의 멱살을 잡고, 결코 나를 완전히 짓밟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예술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1806년에는 자신의 음악 스케치에 "당신의 귀먹음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예술에서조차."라고 적었다. 난청은 작곡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지만,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연주회 활동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고, 사회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지는 않았으며, 말년에도 낮은 음과 갑작스러운 큰 소리는 구별할 수 있었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빈으로 돌아온 베토벤의 음악 양식은 크게 변화하여, 그의 중기 또는 '영웅적'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웅장하고 영웅적인 스케일이 특징이다. 카를 체르니에 따르면, 베토벤은 "지금까지 해 온 작업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새로운 양식의 초기 대표작은 1803년-1804년에 작곡된 교향곡 3번 《영웅》이다. 이 교향곡은 원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될 예정이었으나, 1804년 나폴레옹이 자신을 황제로 선언하자 베토벤은 실망하여 악보 제목 페이지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긁어내고 "위대한 사람의 기억을 기리기 위해 작곡된"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영웅 교향곡》은 이전 교향곡들보다 길고 웅장했으며, 1805년 초연 당시에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으나, 많은 이들이 걸작으로 인정했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들 또한 베토벤이 계승한 음악 언어를 극적으로 확장시켰다.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와 《발트슈타인》, 《열정》 피아노 소나타는 《교향곡 3번》의 영웅적인 정신을 공유한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교향곡 4번부터 교향곡 8번까지의 교향곡,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오페라 《피델리오》,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이 있다. 1810년, 작곡가 E. T. A. 호프만은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에 실린 영향력 있는 평론에서 베토벤을 세 명의 위대한 낭만주의 작곡가(하이든과 모차르트보다 위)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하며, 그의 《교향곡 5번》이 "공포, 두려움, 고통을 움직이고 낭만주의의 본질인 무한한 갈망을 일깨운다"고 썼다.
이 시기 베토벤의 수입은 작품 출판, 공연, 그리고 후원자들에게 위임받은 작품의 개인 연주 및 독점 기간 동안의 사본 제공을 통해 이루어졌다. 요제프 프란츠 로브코비츠 공작과 카를 리히노프스키 공작을 포함한 초기 후원자들은 작품 의뢰 및 구매 외에도 연간 급여를 제공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레오폴드 2세 황제의 막내아들이자 1803년 또는 1804년부터 베토벤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운 루돌프 대공이었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고, 만남은 1824년까지 이어졌다. 베토벤은 《대공 삼중주》(Op. 97, 1811)와 《장엄미사》(Op. 123, 1823) 등 14개의 작품을 루돌프에게 헌정했다.
1804년 초, 안 데르 빈 극장의 경영이 바뀌면서 베토벤의 지위는 종료되었고, 그는 친구 스테판 폰 브로이닝과 함께 일시적으로 빈 교외로 이주해야 했다. 이로 인해 그의 오페라 《레오노레》(원제) 작업이 잠시 지연되었다. 오스트리아 검열관에 의해 다시 연기된 이 작품은 1805년 11월 프랑스 군의 도시 점령으로 거의 빈 극장에서 《피델리오》라는 현재 제목으로 초연되었으나, 재정적, 비평적으로 실패하여 베토벤은 개정 작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계속해서 인정을 받았다. 1807년 음악가이자 출판인 무치오 클레멘티는 영국에서 그의 작품을 출판할 권리를 확보했고, 하이든의 전 후원자 에스테르하지 왕자는 그의 아내의 영명축일을 위해 《미사곡 다장조》(Op. 86)를 의뢰했다. 1808년 12월 베토벤이 조직한 대규모 자선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5번과 교향곡 6번 《전원》, 피아노 협주곡 4번, 《미사곡 다장조》 발췌곡, 아리아 《아! 못 믿을 이여》(Op. 65), 《합창환상곡》(Op. 80) 등이 초연되었다. 많은 청중이 모였으나 연습 부족과 여러 중단으로 베토벤이 연주자들에게 소리치는 일까지 있었다. 재정적 결과는 명확하지 않다.
1808년 가을, 왕립극장에서의 자리를 거절당한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가 통치하던 베스트팔렌 왕국의 카셀 궁정에서 연간 4,000 플로린의 좋은 급료를 받는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제의받았다.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기 위해 루돌프 대공, 킨스키 공작, 로브코비츠 공작은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루돌프 대공만이 약속된 날짜에 연금을 꾸준히 지불했다. 킨스키 공작은 군 복무로 소환되어 기여하지 못하고 1812년 11월 말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로브코비츠 공작은 1811년 파산하여 연금 지급을 중단했다. 베토벤은 결국 1815년에 법적 절차를 통해 일부 보상을 받았다.
1809년 초, 빈에 전쟁이 임박해 오면서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Op. 73)를 완성했다.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이 곡을 베토벤 음악에서 "군사적 개념의 최고점"이라고 평했다. 5월 초 루돌프 대공이 황실 가족과 함께 수도를 떠나자,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고별 소나타》(Op. 81a)를 작곡했다. 베토벤 자신이 독일어로 "작별(Das Lebewohl)"이라고 명명했으며, 마지막 악장 "재회(Das Wiedersehen)"는 1810년 1월 30일 루돌프의 귀향일에 맞춰 악보에 날짜가 기입되었다. 5월 프랑스군의 빈 포격 당시 베토벤은 동생 카스파의 집 지하실에 피신했다. 빈 점령과 문화생활 및 출판업자들의 혼란, 그리고 1809년 말 베토벤의 건강 악화로 이 시기 그의 작품 생산량은 현저히 줄었다. 그러나 이 해의 주목할 만한 다른 작품으로는 《현악 사중주 10번》(Op. 74, "하프")과 요제피네의 언니 테레제 브룬스비크에게 헌정된 《피아노 소나타 24번》(Op. 78)이 있다.
1809년 말, 베토벤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희곡 《에그몬트》의 부수 음악을 의뢰받았다. 1810년에 발표된 결과물(Op. 84, 서곡과 9개의 악곡)은 베토벤의 영웅적 양식과 잘 어울렸고, 그는 괴테에게 관심을 갖게 되어 그의 시 세 편을 가곡으로 만들었다(Op. 83). 상호 지인인 베티나 폰 아르님으로부터 괴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이 시기의 다른 유사한 작품으로는 "사중주 세리오소"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F단조의 《현악 사중주 11번》(Op. 95)과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되어 "대공 삼중주"로 알려진 B♭장조의 《피아노 삼중주 7번》(Op. 97)이 있다.
1811년 봄, 베토벤은 극심한 두통과 고열로 중병을 앓았다. 주치의 요한 말파티는 그에게 테플리츠 온천에서 요양할 것을 권했고, 그곳에서 베토벤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의 희곡을 위한 두 개의 서곡과 부수 음악인 《슈테판왕》(Op. 117)과 《아테네의 폐허》(Op. 113)를 작곡했다. 1812년 다시 테플리츠를 방문하라는 조언을 받고 그곳에서 괴테를 만났다. 괴테는 "그의 재능에 놀랐지만, 불행히도 그는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이다. 그가 세상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한 그의 태도가 자신이나 타인을 더 즐겁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평했다. 베토벤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 "괴테는 시인으로서 어울리는 것보다 훨씬 더 궁정 분위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편지를 썼다. 하지만 이 만남 이후 베토벤은 괴테의 시를 바탕으로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Op. 112)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1815년에 완성했다. 1822년 이 작품이 괴테에게 헌정되며 출판된 후, 베토벤은 그에게 "내가 젊었을 때부터 유일하고 불멸의 괴테를 향해 품어왔던 감탄, 사랑, 존경이 지속되었다"고 편지를 썼다.
1812년 베토벤이 테플리츠에 있는 동안, 그는 "불멸의 연인"에게 10페이지 분량의 연애편지를 썼지만, 이 편지는 발송되지 않았다. 편지의 수신자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으나, 음악학자 메이너드 솔로몬은 그 주인공이 안토니 브렌타노(1780-1869)라고 주장했다. 다른 후보로는 줄리에타 귀차르디, 테레제 말파티, 요제피네 브룬스비크 등이 거론되었다. 이들 모두는 베토벤이 빈에서의 첫 10년간 가능한 영혼의 동반자로 여겼던 인물들이다. 귀차르디는 1803년 결혼하여 베토벤에게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요제피네는 남편의 사망 후 베토벤과 열정적인 서신을 주고받았으나, 가족의 반대로 관계가 이어지지 못했다. 말파티는 베토벤의 주치의 조카딸로, 1810년 베토벤의 청혼을 거절했다. 안토니 브렌타노는 베토벤보다 10살 어린 기혼 여성으로, 1811년-1812년 베토벤과 짧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1812년 말 빈을 떠난 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1812년 이후로는 베토벤의 로맨틱한 관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의 서신과 필담장을 통해 그가 가끔 매춘부를 만났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3.3. 말년의 활동


1813년 초, 베토벤은 심리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작곡 활동이 줄어들었다. 외모와 공공장소에서의 예절, 특히 식사 태도까지 흐트러졌다. 이는 가족 문제가 일부 영향을 미 미쳤을 수 있다. 그는 1812년 10월 말 동생 요한을 방문하여 그의 동거녀 테레제 오버마이어와의 관계를 끝내기를 바랐지만, 요한과 테레제는 11월 8일에 결혼했다.
동생 카스파의 결핵으로 인한 투병과 죽음은 베토벤의 큰 관심사였다. 카스파는 오랜 기간 병을 앓았고, 1813년 베토벤은 그에게 1500 플로린을 빌려주었는데, 이 상환 문제로 복잡한 법적 다툼이 발생했다. 1815년 11월 15일 카스파가 사망하자, 베토벤은 즉시 아홉 살 조카 카를 판 베토벤의 양육권을 놓고 카스파의 미망인 요한나 판 베토벤과 기나긴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베토벤은 카스파가 자신을 아들의 유일한 후견인으로 지정해 달라는 요청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카스파의 유언장 부칙에는 요한나와 베토벤의 공동 양육권이 명시되어 있었다. 베토벤은 1816년 1월 조카를 요한나의 양육권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립학교로 보냈지만, 1818년 다시 카를 주변의 법적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귀족 법원에 증거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베토벤은 자신이 귀족 혈통임을 증명하지 못했고, 그 결과 1818년 12월 18일 사건은 빈의 민사법원으로 이관되어 단독 후견인 자격을 잃었다. 그는 1820년에 격렬한 법적 투쟁 끝에 양육권을 되찾았다. 이후 몇 년 동안 베토벤은 조카의 삶에 자주 간섭했으며, 카를은 이를 과도하다고 여겼다.
1813년 6월,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연합군이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베토벤은 마침내 다시 작곡을 시작할 의욕을 얻었다. 발명가 요한 네포묵 멜젤은 그의 기계 악기인 판하르모니콘을 위한 기념 작품을 쓰도록 베토벤을 설득했고, 베토벤은 이를 오케스트라를 위한 《웰링턴의 승전》(Op. 91, "전쟁 교향곡"이라고도 함)으로 편곡했다. 이 곡은 12월 8일 그의 《교향곡 7번》(Op. 92)과 함께 전쟁 피해자를 위한 자선 연주회에서 초연되었고, 큰 성공을 거두어 12월 12일에 재연되었다. 이 연주회는 베토벤의 경력에서 가장 큰 수익을 안겨주었으며, 그가 사망 당시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이었던 은행 주식을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베토벤의 되찾은 인기는 《피델리오》의 부활로 이어졌다. 세 번째 개정판은 7월 빈에서 호평을 받았고, 이후 몇 년간 자주 공연되었다. 베토벤의 출판사인 아르타리아는 20세의 이그나츠 모셸레스에게 오페라의 피아노 악보를 준비하도록 의뢰했는데, 모셸레스가 악보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끝났습니다!"라고 새기자 베토벤은 "오 인간이여, 그대 스스로를 도우라"고 덧붙였다. 그해 여름, 베토벤은 5년 만에 처음으로 피아노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27번》(Op. 90)을 작곡했다. 그는 또한 1814년 11월 시작된 빈 회의에 참석한 여러 국가 원수와 외교관들을 위한 애국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작곡한 많은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칸타타 《영광의 순간》(Op. 136)과 유사한 합창곡들은 베토벤의 인기를 높였지만, "진지한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이는 데는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1814년 4월과 5월, 베토벤은 《대공 삼중주》를 연주하며 독주자로서 마지막 공개 출연을 했다. 작곡가 루이스 슈포어는 "피아노는 음정이 좋지 않았고, 베토벤은 그것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예술가의 기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깊이 슬펐다"고 기록했다. 1814년부터 베토벤은 요한 네포묵 멜젤이 고안한 나팔형 보청기(이 중 일부는 본의 베토벤 하우스에 전시되어 있다)를 사용했다.
1815년 그의 작품에는 시 《희망에 부쳐》(Op. 94)의 두 번째 표현력 있는 악곡이 포함되어 있다. 1805년 첫 번째 악곡(요제피네 브룬스비크를 위한 선물)과 비교하면 "훨씬 더 극적이며... 전체 정신은 오페라의 한 장면과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에너지는 떨어지는 듯했다. 이 작품들 외에도 그는 두 개의 첼로 소나타(Op. 102 No. 1, 2)와 몇몇 작은 작품을 작곡했지만, 여섯 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시작했지만 포기했다.
1815년과 1819년 사이에 베토벤의 작품 생산량은 그의 성숙기 삶에서 유례없이 낮은 수준으로 다시 떨어졌다. 그는 그 원인 중 하나로 1816년 10월부터 1년 이상 앓았던 "염증열"이라는 긴 병을 들었다. 메이너드 솔로몬은 이것이 조카 카를과 관련된 지속적인 법적 문제와 베토벤이 당시의 음악적 경향과 점점 더 대립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결과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초자연적인 독일 낭만주의(슈포어, 하인리히 마르슈너,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에서처럼)의 발전에 공감하지 않았고, 고전주의 시대의 순환 형식에 대한 임박한 낭만주의적 파편화를 작은 형식과 서정적인 소품으로 만들고자 저항했으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및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연구로 방향을 틀었다. 1817년, 멜젤이 새로 개발한 메트로놈에 대한 베토벤의 지지를 얻으면서 옛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그가 완성한 몇 가지 주요 작품으로는 1818년의 《하머클라비어 소나타》(Op. 106)와 알로이스 야이텔레스의 시를 가곡으로 설정하여 고전주의 레퍼토리에 연가곡을 도입한 1816년의 《멀리 있는 연인에게》(Op. 98)가 포함된다. 1818년에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교향곡 9번》의 일부가 될 음악 스케치를 시작했다.
1818년 초 베토벤의 건강이 호전되었고, 11세 조카 카를은 1월에 그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비록 1년 안에 카를의 어머니가 법적으로 그를 되찾았지만). 이때쯤 베토벤의 청력은 다시 심각하게 악화되어, 그와 대화하는 상대방은 필담장에 글을 써야 했다. 이 '필담장'은 이 시기 이후 그의 삶에 대한 풍부한 기록 자료이다. 여기에는 음악, 사업, 개인 생활에 대한 토론이 담겨 있으며, 그의 대인 관계, 음악 연주 의도, 음악 예술에 대한 견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의 비서 안톤 쉰들러는 베토벤의 사후 필담장 400여 권 중 264권을 파기하거나 변경하여 베토벤의 이상화된 전기만을 남기려 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쉰들러가 소유했던 필담장 수가 그만큼 많지 않았고, 파기율도 과장되었으며, 쉰들러가 자신의 프로필과 편견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 허위 기재를 삽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1819년에서 1827년까지의 필담장 136권이 베를린 국립도서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2권은 본의 베토벤 하우스에 있다. 그의 가계 관리도 스타인 피아노 공방 주인이자 친구인 나네테 슈트라이허의 도움으로 다소 개선되었다. 슈트라이허는 베토벤이 병을 앓는 동안 그를 도왔고, 숙련된 요리사도 구해 주었다. 같은 해, 토머스 브로드우드가 소유주인 브로드우드 피아노를 베토벤에게 선물로 증정했고, 베토벤은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는 그해 필하모닉 협회가 제안한 런던 방문을 실행할 만큼 건강하지 못했다.

조카 카를을 둘러싼 법적 다툼으로 많은 시간과 서신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1819년에 두 가지 사건이 베토벤의 주요 작곡 프로젝트를 촉발시켰다. 첫 번째는 올로모우츠 대주교로서 루돌프 대공이 추기경-대주교로 승진했다는 발표였다. 이는 1820년 3월 루돌프의 올로모우츠 취임식에 맞춰 《장엄미사》(Op. 123)를 작곡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출판인 안토니오 디아벨리가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카를 체르니, 8세의 프란츠 리스트 등 빈 작곡가 50명에게 자신이 제공한 주제에 대한 변주곡을 작곡하도록 초대한 일이었다. 베토벤은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박차를 가했고, 1819년 중반까지 이미 33개의 《디아벨리 변주곡》(Op. 120) 중 20개의 변주곡을 완성했다. 이 두 작품 모두 몇 년 동안 완성되지 않았다. 1819년의 중요한 헌사는 루돌프 대공이 베토벤을 위해 작곡한 40개의 피아노 변주곡 세트(WoO 200)였다. 이 해에 페르디난트 시몬이 그린 베토벤의 초상화는 다음 세기 동안 가장 친숙한 그의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쉰들러는 이 그림이 "그 특별한 표정, 장엄한 이마... 굳게 닫힌 입과 조개 모양의 턱... 다른 어떤 그림보다 자연에 가깝다"고 묘사했다.
루돌프를 위한 미사곡을 작곡하려는 베토벤의 다음 해 결심은 독실한 가톨릭 신앙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가톨릭 신자로 태어났지만, 그가 성장한 본 궁정의 종교 형태는 솔로몬의 말에 따르면 "교회와 합리주의 사이에 비교적 평화로운 공존을 허용한 타협 이데올로기"였다. 베토벤의 일기(1812년과 1818년 사이에 간헐적으로 작성)는 인도, 이집트, 동양의 종교 철학 및 리그베다의 저술을 포함한 다양한 종교 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1821년 7월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은 개인적인 신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다. 그는 《장엄미사》의 스케치 중 하나에 "내면과 외면의 평화를 위한 간청"이라고 적었다.
1819년/1820년 및 1820년/1821년 시즌에 지휘자 프란츠 시버 게바우어가 빈에서 열린 일련의 콘서트 스피리투엘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8곡과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미사곡 다장조》가 모두 연주되면서 그의 위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1819년, 출판인 모리츠 슐레진저가 베토벤을 처음 찾아왔고, 슐레진저는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세 곡과 마지막 사중주를 확보했다. 베토벤에게 슐레진저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독일과 프랑스에 출판 시설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과의 연계를 통해 저작권 침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20년 슐레진저와 계약한 세 소나타 중 첫 번째(소나타 한 곡당 30 두카트의 값으로, 미사곡 완성 지연)는 그해 말 출판사에 발송되었다 (막시밀리안에게 헌정된 《피아노 소나타 30번》(Op. 109)).
1821년 초 베토벤은 류머티즘과 황달로 다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슐레진저에게 약속한 나머지 피아노 소나타(《31번》(Op. 110)은 12월에 출판됨)와 미사곡 작업을 계속했다. 1822년 초 베토벤은 1812년 결혼에 반대했던 동생 요한과 화해하려 했고, 요한은 (필담장에 기록된 대로)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형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으며, 일부 작품의 소유권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베토벤은 조카 카를의 어머니와도 화해하려 했고 그녀의 수입을 지원했지만, 카를은 이를 탐탁지 않아 했다. 1822년 말 두 건의 의뢰로 베토벤의 재정 상황이 개선되었다. 11월 런던 필하모닉 협회는 교향곡 위임을 제안했고, 베토벤은 자신이 작업 중이던 《교향곡 9번》에 적합한 기회라며 기쁘게 받아들였다. 또한 1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이 갈리친 공작은 세 개의 현악 사중주에 대한 베토벤의 요구 가격(조카 카를에게 구술한 편지에 따르면 각 사중주당 50 두카트의 높은 가격)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1822년, 쉰들러는 베토벤의 무보수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1840년 베토벤의 초기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하지만 항상 신뢰할 수 없는) 전기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쿠퍼는 "베토벤은 그의 도움을 크게 고맙게 생각했지만 그를 인간적으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1823년에는 몇 년 동안 베토벤을 사로잡았던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작품, 즉 《장엄미사》, 《교향곡 9번》, 《디아벨리 변주곡》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베토벤은 완성된 《장엄미사》 악보를 3월 19일 루돌프 대공에게 제출했다(대공이 대주교로 즉위한 지 1년 이상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을 서둘러 출판하거나 공연하지 않았다. 그는 작품의 원고를 독일과 유럽의 여러 궁정에 각각 50 두카트에 수익성 있게 판매할 수 있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은 프랑스의 루이 18세였고, 그는 베토벤에게 무거운 금메달을 보냈다. 교향곡과 변주곡은 베토벤의 그해 작업 시간 대부분을 차지했다. 디아벨리는 두 작품 모두 출판하기를 바랐으나, 미사곡의 잠재적 가치에 이끌린 슐레진저와 카를 프리드리히 페터스를 포함한 많은 출판사들이 베토벤에게 로비를 했다. 결국 이 작품은 쇼트 뮤직에서 출판되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빈의 수용 태도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는 1822년 방문한 요한 프리드리히 로흘리츠에게 "여기서는 내 음악을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 '피델리오'? 그들은 그것을 연주할 수도 없고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교향곡들은?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다. 내 협주곡들은? 모두가 자신이 만든 것만 연주한다. 독주곡들은? 그것들은 오래전에 유행에서 벗어났고, 여기서는 유행이 전부다. 기껏해야 슈판치히가 가끔 사중주를 연주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베를린에서 미사곡과 《교향곡 9번》을 초연하는 것을 문의했다. 빈의 추종자들이 이를 알게 되자, 그들은 지역 공연을 준비해 달라고 간청했다. 베토벤은 설득되었고, 1824년 5월 7일 캐른트너토르테아트르에서 《장엄미사》 일부와 함께 교향곡 9번이 초연되어 큰 찬사를 받았다. 베토벤은 연주회 내내 지휘자 미카엘 움라우프 옆에 서서 박자를 맞췄다(움라우프는 가수들과 오케스트라에게 그를 무시하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청각 장애 때문에 공연 후의 박수 소리를 듣지 못했고, 카롤리네 웅거가 그를 돌려세워 청중의 환호를 직접 보게 할 때까지 알지 못했다.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은 "지치지 않는 천재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고 극찬했고, 카를 체르니는 교향곡이 "너무 신선하고, 활기차고, 진정 젊은 정신을 들이마셨다... 이 독창적인 인물의 머리에서 언제나처럼 많은 힘과 혁신,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왔다"고 기록했다. 이 공연은 연출 비용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베토벤에게 많은 수익을 안겨주지 못했다. 5월 24일, 프로듀서가 최소 보증금을 약속한 두 번째 공연은 관객이 적었다. 조카 카를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시골로 갔다"고 언급했다. 이는 베토벤의 마지막 공개 연주회였다. 베토벤은 쉰들러가 자신을 속이거나 티켓 수입을 잘못 관리했다고 비난했고, 이로 인해 쉰들러는 베토벤의 비서 자리에서 슈판치히 사중주단의 두 번째 바이올리니스트 카를 홀츠로 교체되었으나, 1826년 베토벤과 쉰들러는 화해했다.
베토벤은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갈리친을 위한 현악 사중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 중 첫 번째 작품인 《현악 사중주 12번》(Op. 127)은 1825년 3월 슈판치히 사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다음 작품인 《현악 사중주 15번》(Op. 132)을 작곡하던 1825년 4월, 그는 갑작스러운 병에 걸렸다. 바덴에서 회복하면서 그는 사중주에 "회복한 자가 신에게 감사하는 신성한 노래, 리디안 선법을 따름"이라는 느린 악장을 포함시켰다. 다음으로 완성된 사중주는 《현악 사중주 13번》(Op. 130)이었다. 6개 악장 중 마지막 악장은 1826년 3월 초연 당시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매우 어렵다고 판명되었다. 베토벤은 출판사 아르타리아의 설득에 따라 추가 요금을 받고 새로운 피날레를 작곡하고, 마지막 악장은 별도의 작품인 《대푸가》(Op. 133)로 출판하도록 했다. 베토벤이 가장 좋아한 작품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 사중주 14번》(Op. 131)이었으며, 그는 이를 자신의 가장 완벽한 단일 작품으로 평가했다.
베토벤과 조카 카를의 관계는 계속해서 험악했다. 베토벤이 카를에게 보낸 편지들은 요구가 지나쳤고 질책하는 투였다. 8월, 베토벤의 뜻에 반하여 다시 어머니를 만났던 카를은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살아남아 병원에서 퇴원한 후 베토벤과 삼촌 요한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 마을에서 요양했다. 그나이젠도르프에서 베토벤은 추가로 사중주 《현악 사중주 16번》(Op. 135)을 완성하여 슐레진저에게 보냈다. 마지막 악장의 도입부 느린 화음 아래에 베토벤은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라고 적었고, 더 빠른 주선율 위에는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이라고 답했다. 악장 전체의 제목은 "어려운 결정"(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이다. 이어서 11월에 베토벤은 그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 사중주 13번》(Op. 130)의 대체 피날레를 완성했다. 이 시기 베토벤은 이미 병에 들어 우울해 있었다. 그는 동생 요한과 다투기 시작했고, 요한에게 아내보다 카를을 상속자로 삼으라고 주장했다.
4. 건강 문제와 죽음
베토벤은 평생 동안 여러 가지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으며, 이는 그의 삶과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죽음 또한 오랜 투병 끝에 찾아왔다.
4.1. 난청의 원인과 진행

베토벤의 난청은 1798년경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심각한 이명 증세를 동반했다. 청력 상실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존재하며, 명확한 정설은 없다.
가장 유력한 설 중 하나는 귀경화증(Otosclerosis)이다. 이는 중이의 이소골 중 등자뼈가 경화되어 진동을 전달하지 못해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병이다. 귀경화증은 전음성(傳音性) 난청이므로, 낮은 음역의 소리나 큰 소리는 비교적 들을 수 있고, 진동을 통해 소리를 인지할 수 있다. 베토벤이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듣지 못했으면서도 피아노의 고음부 진동을 느끼고 조카 카를의 연주 실수를 알아챘다는 일화, 그리고 피아노 건반과 치아를 스틱으로 연결해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는 이 설을 뒷받침한다. 현대 의학적으로 귀경화증은 수술로 개선 가능하며, 중증 난청이나 전농(全聾)까지 이르는 경우는 드물다.
또 다른 주요 가설은 납 중독이다. 최근 연구에서 베토벤의 모발에서 정상인의 100배 이상에 달하는 높은 납 농도가 검출되어 주목받았다. 납은 청각 신경과 정신 상태에 악영향을 미치는 중금속이다. 납 중독의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당시 와인의 감미료로 사용되던 아세트산 납. 베토벤은 저렴한 토커이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
- 1826년 1월부터 간경화로 인한 복수 치료를 담당했던 안드레아스 바브루흐 의사가 복부에 천자(穿刺) 시술을 할 때, 상처 소독에 사용된 납 성분 약물. 모발 분석 결과 천자 시술 후 납 농도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외에도 1796년의 발진열 합병증, 매독 (선천성 매독설은 수은 불검출 및 현기증 증상 부재로 설득력이 낮음), 자기 면역 질환 등이 난청의 원인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또한 "메테르니히 정부 대책 설"은 베토벤이 자유주의적 사상 때문에 메테르니히 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물로 여겨졌으므로, 도청을 막기 위해 난청이 심하지 않았음에도 '필담장'을 사용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베토벤은 난청으로 인해 연주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완전히 귀머거리가 아니었으며, 말년에도 낮은 음과 갑작스러운 큰 소리는 구별할 수 있었다.
4.2. 기타 질병과 건강 상태
난청 외에도 베토벤은 만성적인 복통, 설사, 산통, 열병, 황달 등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다. 그의 사후 부검 결과, 간, 신장, 비장 등 여러 내장에 심각한 손상이 발견되었으며, 청각 신경과 다른 관련 신경의 상당한 확장도 확인되었다. 이러한 질병의 원인 역시 논란의 여지가 많으며, 알코올성 간경변, 매독, 감염성 간염, 납 중독, 사르코이드증, 위플병 등이 거론되었다. 202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중심의 국제 연구팀은 베토벤의 모발을 게놈 분석하여 그가 사망 한 달 전 B형 간염에 감염되었고, 유전적으로 간질환에 취약한 체질이었음을 밝혀냈다.
나이가 들면서 질병의 빈도와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1821년 여름, 심한 황달은 간경변의 징후로 나타났다. 1826년 12월, 조카 카를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노천 마차를 타고 이동하며 추운 날씨에 노출되어 폐렴에 걸렸다. 이후 그는 다리와 복부에 수분이 고이고 황달 증세가 심해지는 중증 간경변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다.
4.3. 사망과 장례


1826년 12월, 그나이젠도르프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토벤은 다시 병마에 시달렸다. 그는 12월 내내 열, 황달, 수종 (몸이 붓고 기침과 호흡 곤란을 동반) 증상을 보였고, 복부의 과도한 체액을 빼내기 위해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다.
조카 카를은 12월 내내 베토벤의 병상을 지켰지만, 1월 초 이흘라바에 입대하기 위해 떠났고 다시는 삼촌을 보지 못했다. 카를은 짧은 편지를 통해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만족스럽게 살고 있으며, 오직 당신과 헤어진 것만 후회합니다"라고 전했다. 카를이 떠난 직후 베토벤은 조카를 유일한 상속자로 지정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1월 말, 말파티 박사가 베토벤을 진찰했으며, 그의 치료는 주로 알코올에 집중되었다(환자의 심각한 상태를 인지했기 때문). 베토벤의 위독한 상태가 알려지자 디아벨리, 이그나츠 슈판치히, 리히노프스키, 안톤 쉰들러, 작곡가 요한 네포무크 훔멜과 그의 제자 페르디난트 힐러 등 많은 오랜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런던 필하모닉 협회에서 보낸 100 GBP와 쇼트 뮤직에서 보낸 고가 와인 등 많은 조공과 선물도 도착했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은 가끔 몸을 일으키려 노력했으나, 거의 완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3월 24일, 그는 쉰들러와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라고 말했다. 그날 늦게 쇼트에서 온 와인이 도착하자, 그는 "애석하군, 너무 늦었네"라고 속삭였다.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임종 시에는 친구 안젤름 휘텐브렌너와 "프라우 판 베토벤"(아마도 옛 적이었던 요한나 판 베토벤)만이 있었다. 휘텐브렌너에 따르면, 오후 5시경 번개와 천둥이 쳤고, "베토벤은 눈을 뜨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몇 초 동안 위를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심장박동도 없었다." 많은 문상객들이 임종을 지켰고, 휘텐브렌너와 힐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죽은 이의 머리카락 일부를 보관했다. 부검 결과 베토벤은 과도한 알코올 섭취로 인한 심각한 간 손상과 청각 및 기타 관련 신경의 상당한 확장이 확인되었다. 그의 실제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알코올성 간경변, 매독, 감염성 간염, 납 중독, 사르코이드증, 위플병 등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그의 머리카락과 1863년 발굴 당시 수습된 두개골 조각에 대한 추가 분석도 이루어졌다. 일부 분석에서는 주치의의 지시로 투여된 납 기반 치료제 과다 복용으로 우발적으로 중독되었을 수 있다는 논란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베토벤의 장례 행렬은 1827년 3월 29일 빈에서 약 1만 명의 인파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프란츠 슈베르트와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마이세더가 횃불을 든 조문객 중 한 명이었다. 시인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장례 연설은 배우 하인리히 안쉬츠가 낭독했다. 베토벤은 알제르슈트라세의 삼위일체교회(Dreifaltigkeitskirche)에서 진혼 미사 후 빈 북서쪽의 배링 묘지에 안장되었다. 베토벤의 유해는 1863년에 연구 목적으로 발굴되었고, 1888년에 빈 중앙묘지로 옮겨져 슈베르트 묘지 옆에 재안장되었다.
5. 음악
베토벤의 음악은 그가 활동한 시기인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작곡 양식은 초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뉘며, 각 시기마다 독특한 특징과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5.1. 시대별 작품 세계
역사학자 윌리엄 드랩킨은 1818년 이미 한 작가가 베토벤 작품을 세 시기로 나누는 것을 제안했으며, 이러한 구분(비록 시기 변화를 나타내는 날짜나 작품은 다르더라도)이 쉰들러, F.-J. 페티스, 빌헬름 폰 렌츠를 시작으로 모든 베토벤 전기 작가들이 채택하는 관습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후대의 작가들은 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구조 내에서 세부 시기를 식별하려 했다. 이러한 구분법의 단점으로는, 일반적으로 본에서의 초기 작품들이 덜 고려되는 네 번째 시기를 생략하고, 다양한 범주의 작품에 걸쳐 베토벤의 작곡 스타일이 다르게 발전한 것을 무시한다는 점이 있다. 예를 들어, 피아노 소나타는 베토벤 생애 내내 연속적인 발전 과정을 보여주며 작곡되었고, 교향곡들은 모두 선형적인 진보를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작곡 유형 중, 현악 사중주만이 세 시기(1801-1802년의 Op. 18, 1806-1814년의 Op. 59, 74, 95, 그리고 1824년 이후의 '후기' 사중주)로 가장 깔끔하게 분류될 수 있다. 드랩킨은 "이제 우리가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니... 프로그램 노트, 녹음과 함께 쓰인 에세이, 베토벤 전곡 리사이틀이 있는 한, 우리가 별개의 양식적 시기라는 개념을 포기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린다.
5.1.1. 초기 작품 세계

베토벤이 본에서 살았던 시기의 작품 중 약 40곡이 남아 있으며, 그중 1785년까지 작곡된 10개의 매우 초기 작품도 포함된다. 베토벤은 1785년에서 1790년 사이에 작곡을 거의 포기했다고 추정되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첫 출판작에 대한 부정적인 비평 반응 때문일 것이다.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의 영향력 있는 Musikalischer Almanack (음악적 연감)에 실린 1784년 평론은 베토벤의 노력을 "초보자의 노력"과 비교했다. 1785년의 초기 피아노 사중주 세 곡(WoO 36)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면밀히 모방하여 당시 음악에 대한 그의 의존성을 보여준다. 베토벤 자신은 본 시기의 어떤 작품에도 작품 번호를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나중에 경력에 활용하기 위해 재작업한 작품들, 예를 들어 Op. 52 가곡집(1805)의 일부 곡이나 1793년 빈에서 재작업되어 《현악 오중주, Op. 4》가 된 《관악 팔중주》 등은 예외이다. 찰스 로젠은 본이 빈에 비해 시골이었으므로, 베토벤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성숙한 작품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며, 그의 초기 스타일이 요한 네포무크 훔멜이나 무치오 클레멘티에 더 가까웠다고 지적한다. 조지프 커먼은 이 단계에서 베토벤이 소나타 스타일의 작품보다는 성악곡으로 더 유명했으며, 1792년 빈으로 이주하면서 그가 잘 알려지게 된 장르의 음악을 발전시키는 길을 걷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베토벤의 전통적인 첫 번째 시기는 1792년 11월 그가 빈에 도착한 후 시작되었다. 처음 몇 년 동안 그는 본에서보다 작곡을 덜 한 것처럼 보였고, 그의 《피아노 삼중주》(Op. 1)는 1795년에야 출판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빈 양식'(오늘날 하이든과 모차르트로 가장 잘 알려진)을 숙달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1795년부터 1800년까지 그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규모가 크다(예를 들어, 세 악장이 아닌 네 악장으로 소나타를 작곡). 또한, 그는 일반적으로 미뉴에트와 트리오 대신 스케르초를 사용했으며, 그의 음악은 종종 극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된 극도의 다이내믹, 템포, 반음계적 화성 사용을 포함한다. 이것이 하이든이 Op. 1의 세 번째 삼중주가 청중들이 감상하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믿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새로운 방향을 탐구하고 점차적으로 작품의 범위와 야심을 확장했다. 초기 시기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교향곡 1번》과 《교향곡 2번》(2번부터는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가 도입됨),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 《Op. 18》, 첫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그리고 유명한 《비창 소나타》(Op. 13)를 포함한 첫 열네 개의 피아노 소나타가 있다.
5.1.2. 중기 작품 세계
베토벤의 중기(또는 '영웅적' 시기)는 그의 난청이 심화되는 것을 인지하면서 겪은 개인적인 위기 직후에 시작되었다. 베토벤은 이 위기를 빈 고전주의 음악 형식을 재발견함으로써 극복했다. 그는 두 선배 작곡가보다 소재로서의 동기 발전과 전개 및 변용을 철저히 중시하며, 형식적, 구성적인 면을 추구했다. 이후 코다의 확장 등 고전주의 형식의 확장에 성공했다. 중기에는 영웅주의와 투쟁을 표현하는 대규모 작품들이 포함된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여섯 개의 교향곡(3번에서 8번까지), 마지막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4번에서 5번까지), 삼중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다섯 개의 현악 사중주(7번부터 11번까지), 여러 피아노 소나타(발트슈타인 및 열정 소나타 포함), 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 그리고 그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가 있다.
교향곡 부문에서는 기존 소나타 형식의 비약적 확대(3번), 선율의 바탕이 되는 동기와 리듬의 철저한 조작(5번, 7번), 표제 음악의 시도(6번 "전원"), 악장 간 연결 시도(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5악장 형식 시도(교향곡 6번) 등 혁신적인 기법이 창조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고전주의의 양식미와 낭만주의를 지극히 높은 차원에서 양립시키며, 음악의 이상적인 존재로서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교향곡 5번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어둠에서 밝음으로"(고뇌를 뚫고 환희에 이른다)라는 도식은 극성 구성의 규범이 되어, 이후 낭만주의 음악의 많은 작품이 이를 추종했다. 이러한 베토벤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연주 인원의 증가로 이어졌고, 그 인원수로 만들어진, 삶을 고무하는 듯한 강음이나 흐느끼는 듯한 약음은 많은 음악가들을 자극했다.
'중기'는 때때로 '영웅적' 작곡 방식과 관련이 있지만, '영웅적'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베토벤 학문에서 점점 더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용어는 중기의 대체 이름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 중기 전체를 설명하는 '영웅적'이라는 용어의 적절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교향곡 3번》과 《5번》과 같은 일부 작품은 '영웅적'으로 설명하기 쉽지만, 그의 《교향곡 6번》(전원)이나 《피아노 소나타 24번》과 같은 다른 작품은 그렇지 않다.
5.1.3. 후기 작품 세계
베토벤의 후기는 1810년에서 1819년 사이에 시작되었다. 그는 청력 저하로 인한 의기소침, 동생 카스파의 사망, 조카 카를의 양육권 문제로 인한 법적 투쟁과 갈등 등으로 인해 슬럼프에 빠지며 두 번째 위기를 겪었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작품을 포함한 오래된 음악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특히 호모포니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 바흐의 유산인 대위법 (다성음악)을 깊이 연구하여 그의 중기에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던 대위법을 대대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다. 이후의 작품에서 푸가 요소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연구의 결과이다. 서곡 《헌당식》(1822)은 이러한 영향을 통합하려는 초기 시도였다.
'후기'라고 불리는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는 이 시기에 베토벤은 거의 10년 만에 처음으로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기 위해 건반으로 돌아왔다. 후기 작품에는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28번에서 32번까지), 《디아벨리 변주곡》,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마지막 두 개의 소나타(4번에서 5번까지), 후기 현악 사중주(대푸가와 12번에서 16번까지), 그리고 매우 큰 규모의 두 작품인 《장엄미사》와 《교향곡 9번》이 포함된다. 이 시기의 작품은 지적인 깊이, 형식적인 혁신, 강렬하고 매우 개인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현악 사중주 14번》(Op. 131)은 일곱 개의 연결된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향곡 9번》은 2악장에서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를 사용하고, 3악장에서는 일반 교향곡의 악장 구성에서 완서악장으로의 교체를 이루며, 4악장에서는 독창 및 합창을 포함한 성악을 사용함으로써 전례 없는 획기적인 교향곡을 완성했다.
5.2. 주요 작품
- 교향곡: 총 9곡
- 제3번 내림마장조 《영웅》 Op. 55
- 제5번 다단조 《운명》 Op. 67
- 제6번 바장조 《전원》 Op. 68
- 제9번 라단조 《합창》 Op. 125
-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제5번 내림마장조 《황제》 Op. 73
-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Op. 61
- 삼중 협주곡 다장조 Op. 56
- 피아노 소나타: 총 32곡
- 제8번 다단조 《비창》 Op. 13
- 제14번 올림다단조 《월광》 Op. 27 No. 2
- 제21번 다장조 《발트슈타인》 Op. 53
- 제23번 바단조 《열정》 Op. 57
- 제29번 내림나장조 《하머클라비어》 Op. 106
- 바가텔 가단조 《엘리제를 위하여》 WoO 59
- 디아벨리의 왈츠에 의한 33개의 변주곡 다장조 Op. 120
- 실내악:
- 현악 사중주 Op. 18
- 현악 사중주 Op. 59 《라주모프스키》
- 현악 사중주 14번 올림다단조 Op. 131
- 대푸가 내림나장조 Op. 133
- 오페라:
- 피델리오 Op. 72
- 종교 음악:
- 미사곡 다장조 Op. 86
- 장엄미사 라장조 Op. 123
6. 사상과 예술관
베토벤은 그의 시대를 관통하는 철학적, 정치적 사상과 음악에 대한 독자적인 예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작곡가를 넘어, 음악을 통해 인류애와 자유의 이상을 표현하고자 한 예술가였다.
6.1. 철학적 배경과 종교관
베토벤은 가톨릭 교도였지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나 안톤 브루크너와 같은 전형적인 종교적 작곡가들과는 달리 제도적인 기독교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성장한 본 궁정에서의 종교 형태는 "교회와 합리주의 사이의 비교적 평화로운 공존을 허용한 타협 이데올로기"였다. 그의 일기(1812-1818)는 인도, 이집트, 동양의 종교 철학 및 리그베다의 저술을 포함한 다양한 종교 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호메로스와 플라톤 등 고대 그리스 사상에 깊이 공감했으며, 요한 볼프강 폰 괴테나 프리드리히 실러와 같은 당대 지성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범신론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1821년 7월 루돌프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은 개인적인 신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다. 그는 《장엄미사》의 스케치 중 하나에 "내면과 외면의 평화를 위한 간청"이라고 적었다. 그의 미완성 작품인 《교향곡 10번》은 기독교적 세계와 그리스 세계의 융합을 목표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괴테가 《파우스트》 2부에서 시도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종교관은 결국 《교향곡 9번》과 《장엄미사》 등의 후기 작품에서 궁극적 보편성과의 우주적 합일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그는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칸트의 강의에 출석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789년에는 본 대학교 철학부의 청강생으로 등록하기도 했다. 정규 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에 대한 서적을 깊이 읽는 등 당시 상당한 교양인이었다고 평가된다.
6.2. 정치적 견해와 자유주의
베토벤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였으며, 자유롭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 사상에 깊이 공감했으며, 음악을 통해 자유와 인간 해방의 이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견해는 당시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 하에서 그를 반체제 인물로 보이게 했다.
그는 음악가들이 궁정이나 유력 귀족에게 예속되어 '기회 음악'을 작곡하는 전통적인 후원 체제에 저항했다. 베토벤은 음악가란 단순히 귀족의 주문을 따르는 장인이 아니라, 독립적인 '예술가'로서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공언했다. 이는 음악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귀족 계급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얻은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1812년 카를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공작이 지금 있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지금 있는 것은 나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지금까지 공작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앞으로도 더 많이 태어날 것이지만, 베토벤은 나 하나뿐이다!"라고 쓰며 자신의 자율성과 예술적 독립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는" 발언들은 메테르니히 정권 하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대규모 작품의 위촉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테플리츠에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산책하던 중 오스트리아 황후 일행을 만났을 때, 괴테가 모자를 벗고 최경례를 표한 반면 베토벤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행렬을 가로질러가 대공들의 인사를 받았다는 일화는 그의 자유주의적이고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을 잘 보여준다. 괴테는 그를 "재능은 놀랍지만, 유감스럽게도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평했다.
6.3. 음악적 예술관
베토벤은 음악을 단순한 오락이나 귀족들의 유흥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음악을 통해 인류애와 자유, 그리고 고통을 극복하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는 고귀한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동시대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 E. T. A. 호프만은 베토벤의 예술을 칭송하며 그를 낭만주의 진영에 포함시키려 했지만, 베토벤은 당시 낭만주의의 형식적 통일감을 무시한 감상적이고 감정 표현 위주의 예술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괴테와 실러의 문학, 그리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다. 음악적으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등 선배 대가들의 영향을 깊이 연구하며 자신의 예술관을 확립했다.
베토벤이 '전위(前衛)'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음악학자들의 견해가 갈린다. 작곡가 하라 히로시는 "베토벤은 전위가 아니다"라고 단언하며, 그가 당시의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변주곡' 등 기존의 구조 모델을 준수했으며 새로운 장르를 발명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토벤이 후대 작곡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그는 메트로놈의 적극적인 활용, 모국어로의 빠르기말 도입(잠시 동안), 피아노의 구조 강화와 음역 확장, 악곡의 대규모화, 대담한 관현악법, 연주 불가능에 도전하는 시도, 그리고 '전쟁 교향곡'과 같은 작품에서 '소음'의 도입 등 형식적, 기술적 혁신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이러한 혁신들은 이후 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 개인 생활과 성격
베토벤의 사적인 측면은 그의 독특한 외양, 복잡한 성격, 그리고 다양한 대인 관계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의 삶은 예술적 천재성과 함께 개인적인 고뇌와 난해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7.1. 외양과 생활 습관
안톤 쉰들러의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베토벤의 키는 168 cm로 당시 서양 남성으로서는 평균 이상이었으며, 신체는 근육질에 건장한 편이었다. 순수 백인 치고는 피부가 검은 편이었고, 천연두 흉터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초상화, 동상, 그리고 그의 복잡한 여성 관계 등을 볼 때 미남이라 할 수는 없어도 그리 나쁘지 않은 외모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표정은 풍부했고, 생기 넘치는 눈빛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어 많은 숭배자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옷을 차려 입는 등 외모에 신경을 썼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복장에 전혀 무관심해졌다. 제자 카를 체르니는 베토벤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로빈슨 크루소 같았다"며,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주변에서 텁수룩하게 곤두서 있었다"고 회상했다. 작곡에 몰두한 나머지 모자도 쓰지 않고 거리를 걷다가 부랑자로 오해받아 경찰에 체포되어 빈 시장이 사과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의 방은 매우 어수선하고 난잡했지만, 목욕과 빨래를 좋아하며 결벽증처럼 손을 집요하게 씻는 버릇이 있었다는 점에서 깨끗함을 추구하는 양면적인 면모를 보였다. 또한 그는 평생 동안 최소 60번 이상 거주지를 옮겨 다니며 정착하지 못하는 생활을 했다. 식성으로는 빵과 날달걀을 넣고 끓인 수프, 생선 요리, 고기 요리, 갓 삶은 마카로니를 즐겨 먹었다. 와인을 좋아했고, 값싼 토커이 포도주를 즐겨 마시는 등 아버지와 같이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커피는 한 잔을 끓일 때마다 직접 원두 60알을 세어 넣어 만들었다고 한다.
7.2. 성격과 대인 관계
베토벤의 성격은 모순적일 정도로 양면적이었다. 때로는 친절하고 순진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엄격하고 냉혹하며 심지어 무도한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등 감정 기복이 심했다. 친해지면 지나친 농담이나 무례한 행동을 자주 보여 '자기중심적이고 야만적이며 비사교적'이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불분명하다. 당시 빈에서는 그가 괴짜로 소문났지만, 그럼에도 다른 어떤 작곡가보다 존경받았으며, 그의 성대한 장례식과 수많은 참석자들은 이를 증명한다. '베토벤 괴짜설'이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정권에 의한 유언비어라는 견해도 있다.
그는 결벽증처럼 손을 자주 씻는 버릇이 있었고, 때로는 하녀에게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스승 요제프 하이든이 악보에 "하이든의 제자"라고 쓰도록 명했을 때, 그는 "나는 분명히 당신의 제자였지만,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일축하며 자신의 자존심과 독립성을 드러냈다.
후원자인 카를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1812년 "공작이 지금 있는 것은 우연히 태어났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지금 있는 것은 나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지금까지 공작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앞으로도 더 많이 태어날 것이지만, 베토벤은 나 하나뿐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는' 발언들은 메테르니히 정권 수립 후 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 미쳤다.
테플리츠에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산책 중 황실 일행을 만났을 때, 괴테가 모자를 벗고 최경례를 표한 반면 베토벤은 당당히 고개를 들고 행렬을 가로질러가 인사를 받았다는 일화는 그의 고결한 자의식을 보여준다. 괴테는 그를 "재능은 놀랍지만, 유감스럽게도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이라고 평했다.
《교향곡 5번》 서두에 대해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고 말한 것이나, 《피아노 소나타 17번》이 '템페스트'로 불리게 된 일화 등 베토벤의 전기에서 전해지는 많은 일화들은 자칭 "베토벤의 무급 비서"인 안톤 쉰들러의 저작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그러나 쉰들러는 베토벤 사후 그의 자료를 파기하거나 위조한 사실이 밝혀져 현재는 그의 일화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
청력을 상실하고도 음악가로서 최고의 성과를 냈다는 점에서 로맹 롤랑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를 영웅시하고 신격화했다.
7.3. 연애와 '불멸의 연인'
베토벤의 사후 발견된, 미스터리한 "불멸의 연인"에게 쓴 1812년의 편지 세 통은 그의 연애사에 대한 오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테레제 브룬스비크, 그 여동생 요제피네 브룬스비크, 줄리에타 귀차르디, 테레제 말파티 등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메이너드 솔로몬은 안토니 브렌타노(당시 기혼 상태로 네 자녀의 어머니였다) 설을 유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베토벤이 20-30대 시절에는 여러 여성과 교제하며 '플레이보이'적인 면모를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 여성 모두는 베토벤이 빈에서의 첫 10년 동안 영혼의 동반자로 여겼던 인물들이었다. 줄리에타 귀차르디는 베토벤과 교류했지만 그에게 진지한 관심은 없었고 1803년 11월에 다른 백작과 결혼했다. 베토벤은 그녀가 자신을 찾아와 울었지만 자신이 그녀를 경멸했다고 후대의 비서 안톤 쉰들러에게 주장했다. 요제피네는 남편의 사망 후 베토벤과 열정적인 서신 교환을 시작했지만, 브룬스비크 가문의 압력으로 관계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말파티는 베토벤의 주치의 조카딸로 1810년 베토벤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녀는 현재 피아노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의 수신자로 기억된다. 안토니 브렌타노는 베토벤보다 10살 어린 기혼 여성으로, 1811년-1812년 베토벤과 짧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1812년 말 남편과 함께 빈을 떠난 후 베토벤을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베토벤이 안토니의 아들 카를 요제프의 아버지일 수 있다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둘은 만난 적이 없다. 1812년 이후 베토벤의 로맨틱한 관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의 서신과 필담장을 통해 그가 가끔 매춘부를 만났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8. 사용 악기
베토벤은 평생 동안 다양한 피아노를 사용하고 작곡에 활용했으며, 그의 청력 악화는 그가 악기에 변화를 추구하고 개조를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8.1. 피아노 선호와 개조
베토벤이 초기에 선호했던 피아노 중 하나는 요한 안드레아스 슈타인이 제작한 것으로,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이 그에게 선물한 것으로 추정된다. 1786년부터는 슈타인의 사위인 요한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와의 협력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슈트라이허는 1803년 슈타인의 사업에서 나와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고, 베토벤은 그의 제품을 계속해서 높이 평가하며 1817년 슈트라이허에게 "특별한 선호"를 보인다는 글을 남겼다.
베토벤이 소유했던 다른 피아노로는 칼 체르니의 회상처럼 1801년에 가지고 있던 발터 피아노가 있다. 1802년에는 친구 니콜라우스 즈메스칼에게 발터에게 una corda우나 코르다이탈리아어 페달(왼쪽 페달)이 달린 피아노포르테를 주문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803년에는 제작사로부터 세바스티앵 에라르의 그랜드 피아노를 선물받았다. 이 에라르 피아노는 특별한 공명성이 특징이었고, 베토벤은 이를 받은 직후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그의 피아노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러나 처음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1810년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언급하며 이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1824년 동생 요한에게 주었다. 이 피아노는 현재 오버외스터라이히 주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18년에는 존 브로드우드 앤 선즈의 그랜드 피아노를 토머스 브로드우드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베토벤은 이 선물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음색에 불만을 가졌는데(이는 그의 청력 악화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더 큰 소리를 내기 위해 피아노를 개조할 방법을 찾기도 했다. 이 피아노는 현재 헝가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91년 연주 가능한 상태로 복원되었다.
1825년 베토벤은 콘라트 그라프에게 피아노를 주문했다. 이 피아노는 네 개의 현과 특별한 공명 장치가 장착되어 있어 그가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나, 이 임무에는 실패했다. 이 피아노는 현재 본의 베토벤 하우스에 소장되어 있다.
9. 유산과 영향
베토벤은 서양 고전 음악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음악적 유산과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를 초월하여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9.1. 후대 음악가에 대한 영향
베토벤의 음악계에 대한 기여는 실로 막대하여, 그 이후의 모든 음악가는 크든 작든 그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 이전의 음악가들은 대부분 궁정이나 유력 귀족에게 고용되어 공식 및 사적 행사를 위한 '기회 음악'을 작곡했다. 베토벤은 이러한 후원자와의 주종 관계 및 그에 따른 음악을 거부하고, 대중을 향한 작품을 발표하는 '음악가-예술가'의 시초가 되었다. 음악가를 단순한 장인이 아닌 독립적인 '예술가'로 공언한 그의 태도 표명과, 각 작품이 예술 작품으로서 깊은 의미를 가지는 창작 행위는 음악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자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에서 나타난 "시와 음악의 융합"이라는 이념에 자극받아, 낭만주의 음악의 선봉으로서 그 이념을 더욱 발전시켜 악극을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그 표현을 위해 풍부한 관현악법으로 음향 효과를 증대시키고, 베토벤이 사용한 고전적 화성법을 해체하며, 트리스탄 화음으로 대표되는 혁신적인 화성으로 조성을 확장했다.
한편, 요하네스 브람스는 낭만주의 시대에 살면서도 바그너파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베토벤의 견고한 구성과 극적인 전개를 통한 고전적 음악 형식 구축의 측면을 계승하여, 낭만주의 시대 속에서도 음악 형식적으로는 고전주의적 작풍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선율과 화성 자체에 넘치는 서정성은 낭만주의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이처럼 고전적 형식 속에서의 극적인 전개와 구성이라는 측면은 브람스뿐만 아니라 안토닌 드보르자크, 표트르 차이콥스키, 그리고 20세기에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벨러 버르토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헬무트 라헨만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9.2. 역사적, 사회적 평가
베토벤은 '음악의 성인' 즉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서양 고전 음악사에서 신격화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음악은 고뇌와 투쟁을 뚫고 환희에 이르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담아내며 인류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체제 하에서는 그의 자유주의적 정치 견해와 괴팍한 성격 등으로 인해 반체제적 인물로 인식되기도 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베토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다.
9.3. 비판 및 논란
베토벤은 생애 동안 그에게 제기되었던 비판적인 시각이나 논란이 되는 사건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조카 카를 판 베토벤의 양육권을 둘러싼 법적 분쟁과 그로 인한 개인적인 고뇌였다. 그는 조카 카를의 비행과 자살 시도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카를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들은 요구가 지나치고 질책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또한, 그의 괴팍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은 종종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하녀에게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의 사후 그의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가 베토벤의 필담장을 파기하거나 조작하여 그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를 만들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에게 전해지는 많은 일화들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청력을 상실한 상태에서도 위대한 작품들을 남긴 그의 예술적 업적은 변함없이 존경받고 있다.
9.4. 기념과 추모
베토벤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추모되고 있다. 그의 탄생지인 본에는 베토벤 하우스라는 박물관이 세워져 그의 삶과 작품을 기리고 있으며, 1845년부터는 매년 베토벤페스트라는 음악 축제가 열리고 있다. 미국 샌호세 주립 대학교 캠퍼스 내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도서관에는 이라 F. 브릴리언트 베토벤 연구센터가 있어 베토벤의 삶과 작품만을 다루는 박물관, 연구 센터, 강연 및 공연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를 기리는 조각상과 기념비도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1845년 8월, 본의 뮌스터광장에 베토벤 탄생 75주년을 기념하는 베토벤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이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작곡가 동상이었으며, 제막과 함께 열린 음악 축제는 본 베토벤할레의 건설을 촉진시켰다. 빈에서는 1880년 5월 베토벤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카스파 폰 춤부슈가 제작한 베토벤 동상이 베토벤광장에 세워졌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퍼싱 스퀘어 역에도 1932년 아놀트 푀르스터가 제작한 베토벤의 7피트 청동상이 설치되었다.
우주 공간에서도 베토벤의 이름이 기려지고 있다. 수성에서 세 번째로 큰 분화구는 '베토벤'으로 명명되었으며, 소행성대의 1815 베토벤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또한, 보이저 탐사선에 실려 우주 공간으로 보내진 보이저 금제 음반에는 지구의 이미지, 소리, 언어, 음악 샘플이 담겨 있는데, 베토벤의 음악은 이 음반에 두 번 수록되어 있다.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위치한 베토벤 음악원은 작곡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처럼 베토벤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끊임없이 기념되고 추모되며 후대에 영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