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주빈 메타는 인도의 뭄바이(당시 봄베이)에서 파르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키웠다. 그의 가족은 페르시아계 조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모국어는 구자라트어이다.
1.1. 출생 및 가족
주빈 메타는 1936년 4월 29일 영국령 인도 봄베이에서 메흘리 메타(1908년~2002년)와 테흐미나(다루발라) 메타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메흘리 메타는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익힌 음악가이자 봄베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립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메흘리 메타는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33년간 아메리칸 유스 심포니를 지휘했다. 그는 이전에 뉴욕에서 이반 갈라미안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갈라미안은 이츠하크 펄먼과 핀커스 주커만을 가르친 저명한 스승이기도 하다. 주빈 메타는 아버지가 러시아 학파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봄베이에 돌아왔다고 회상하며, 미국에서 지휘할 때마다 사람들이 "당신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를 겁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1.2. 어린 시절과 초기 음악적 경험
메타는 어린 시절 내내 집안이 음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묘사하며, 구자라트어를 말하고 노래하는 것을 거의 동시에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의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후 아버지가 미국에서 돌아온 뒤 매일 아버지의 사중주 연주를 들었다고 한다. 메타는 아버지에게서 처음으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다. 십대 초반에는 아버지가 봄베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파트별 리허설을 지휘하도록 허락했고, 16세에는 전체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의 첫 피아노 교사는 조셉 드 리마였다.
1.3. 교육
메타는 뭄바이의 성 마리아 학교를 졸업한 후, 어머니의 권유로 성 자비에르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어머니는 그가 음악보다 더 '존경할 만한' 직업을 갖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2년 만에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18세에 유럽의 음악 중심지인 빈으로 건너가 빈 국립 음악원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그는 한 달에 75 USD로 생활했으며,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과 동문이었다.
그는 3년 동안 음악원에 머물면서 더블 베이스도 공부하여 빈 실내악단에서 연주했다. 스바로프스키는 일찍이 메타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그를 "모든 것을 갖춘 악마적인 지휘자"라고 묘사했다. 학생 시절이던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그는 7일 만에 학생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빈 외곽의 난민 캠프에서 콘서트를 지휘하기도 했다. 메타는 1957년 21세의 나이로 지휘 디플로마를 받고 졸업했다.
2. 지휘 경력
주빈 메타는 1958년 빈에서 지휘자로서 데뷔한 이래,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에서 음악 감독 및 수석 지휘자를 역임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그의 지휘 경력은 젊은 나이에 시작되어 수십 년간 이어지며 클래식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초기 경력 및 국제 데뷔
1958년, 메타는 100명의 참가자가 경쟁한 리버풀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며 일약 주목받았다. 이 우승으로 그는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서 1년간 계약을 맺고 14회의 콘서트를 지휘했으며, 이 모든 공연은 극찬을 받았다. 이후 그는 매사추세츠주 탱글우드 음악 센터의 여름 아카데미에서 3위 입상하며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던 찰스 먼치의 눈에 띄었고, 먼치는 이후 그의 경력에 도움을 주었다. 1958년, 그는 과감하게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곡으로만 구성된 콘서트를 기획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같은 해 빈에서 만난 캐나다인 성악가 카르멘 라스키와 결혼했다.
1960년과 1961년 동안 메타는 전 세계의 저명한 거장들을 대신하여 지휘를 맡았고, 대부분의 콘서트에서 높은 비평적 찬사를 받았다. 1960년에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일련의 공연을 지휘했고, 같은 해 여름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고 뉴욕에서 지휘 데뷔를 했다. 1961년에는 이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1962년에는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러시아, 파리, 빈으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특히 '서양 음악의 수도'로 여겨지는 빈에서의 콘서트에 대해 가장 염려했지만, 그의 단 한 번의 공연은 20분간의 기립 박수, 14번의 커튼콜, 그리고 2번의 앙코르를 받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2.2.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
1960년, 찰스 먼치의 도움으로 메타는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 겸 음악 감독이 되었으며, 1967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2.3.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1961년, 메타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내정되어 있던 게오르그 솔티는 이 임명에 대해 자문을 받지 못하자 항의의 뜻으로 사임했다. 메타가 지휘를 시작했을 때 오케스트라는 4년 동안 상임 지휘자가 없는 상태였다.
메타는 1962년부터 1978년까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1962년 첫 시즌을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는 26세로, 북미 주요 오케스트라 역사상 최연소 음악 감독이었다. 또한 그는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동시에 지휘했기 때문에, 두 개의 북미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지휘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4년간의 공백 이후 첫 지휘자로서, 메타는 단원들 간의 경쟁을 유도하고, 과제를 조정하고, 승진을 부여하고, 좌석 배치를 변경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오케스트라의 전반적인 사운드를 빈 필하모닉에 더 가깝게, 더 따뜻하고 풍부하게 다듬는 데 성공했다. 그는 또한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당시 21세였던 첼로 연주자 재클린 뒤 프레는 "그는 당신이 떠다닐 수 있는 마법의 양탄자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첼로 연주자 쿠르트 레허는 메타의 오케스트라와의 첫 리허설을 회상하며 "두 박자 만에 우리는 매료되었다. 이 젊은이는 50대나 55세 남자의 능력과 음악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2019년 1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은 메타를 명예 지휘자로 임명했다.
2.4. 뉴욕 필하모닉
1978년, 메타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떠나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 겸 수석 지휘자가 되었으며, 1991년 사임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로써 그는 뉴욕 필하모닉 역사상 최장기 음악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할렘의 애비시니안 침례 교회에서 매년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등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고 싶어 했다. 이츠하크 펄먼, 아이작 스턴, 캐슬린 배틀 등 저명한 음악가들이 메타와 함께 다양한 콘서트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2.5.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메타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매우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는 1961년 이스라엘 필하모닉과의 첫 객원 지휘를 시작으로 1966년에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순회공연을 가졌다. 특히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중에는 이스라엘 국민들과의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급히 이스라엘로 돌아와 여러 특별 콘서트를 지휘했다. 1969년 이스라엘 필하모닉의 음악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1977년에는 음악 감독이 되었으며, 1981년에는 종신 음악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필하모닉과의 50여 년간의 관계 동안 이스라엘 국내외에서 수천 번의 콘서트를 지휘했다. 1982년에는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콘서트를 열었는데, 공연 후 아랍인들이 무대 위로 달려와 음악가들을 포옹하기도 했다. 1991년 걸프 전쟁 중에는 관객들이 방독면을 착용하고 온 가운데서도 지휘를 이어갔으며, 2007년에는 나사렛에서 전원 아랍인으로 구성된 관객들을 위해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이스라엘 음악가들과 유대인들의 정신 및 전통에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이스라엘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것은 "내 마음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아랍인과 유대인들이 서로를 포옹하는 그 모습을 오늘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2016년 12월, 이스라엘 필하모닉은 메타가 2019년 10월을 끝으로 음악 감독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현재 그는 이스라엘 필하모닉의 명예 음악 감독 직함을 가지고 있다.
2.6. 기타 주요 오케스트라 및 오페라
메타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외에도 세계 여러 주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1985년부터 2017년까지 피렌체의 마조 무지칼레 피오렌티노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으며,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를 "나에게 또 다른 파노라마를 제공하고, 오페라 하우스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그를 명예 지휘자로 명명했다. 2005년부터 메타는 스페인 발렌시아의 예술 과학 도시에 새로 개관한 오페라 하우스인 소피아 여왕 예술 궁전의 주요 지휘자로 활동했다. 1997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의 명예 회원으로, 2006년에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2001년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 칭호를 받았고, 2004년에는 뮌헨 필하모닉이, 2006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마조 무지칼레 피오렌티노가 같은 칭호를 수여했다.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와의 임기가 끝날 무렵, 그는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이자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명예 회원으로 지명되었다. 2007년 11월에는 빈 음악협회가 그를 명예 회원으로 위촉했다. 2016년에는 나폴리의 테아트로 산 카를로의 명예 지휘자로 임명되었으며, 2019년 2월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오랜 협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메타를 명예 회원으로 위촉했다.
2.7. 주목할 만한 공연 및 협연
메타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수많은 주목할 만한 공연과 협연을 선보였다. 1965년,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지휘하며 데뷔했는데, 음악 평론가 앨런 리치는 "메타는 최근 어떤 지휘자도 필적할 수 없는 눈부신 지휘를 선보였다... 이는 돌진하고, 들끓고, 숨 가쁜 공연이었지만 여전히 충분한 숨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극찬했다。 이후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카르멘, 토스카, 투란도트 등의 공연을 지휘했다.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 67에서는 몬트리올 오케스트라와 로스앤젤레스 오케스트라를 함께 지휘하여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연주했다. 같은 해, 그는 마빈 데이비드 레비의 슬픔은 엘렉트라의 몫의 세계 초연을 지휘했다. 1970년에는 UCLA 폴리 파빌리온 농구 경기장에서 프랭크 자파의 마더스 오브 인벤션과 함께 자파의 "200 모텔스"와 에드가 바레즈의 "앵테그랄"을 연주했는데, 12,000명의 관객이 운집했다. 이 공연의 공식 녹음은 없지만 일부 부틀렉이 존재한다.
1990년, 그는 로마에서 마조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오케스트라와 로마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역사적인 첫 세 테너 콘서트를 열었다. 1994년에는 로스앤젤레스 다저 스타디움에서 다시 테너들과 합류했다. 이 공연들 사이인 1992년에는 토스카의 획기적인 프로덕션을 지휘했는데, 각 막이 악보에 명시된 실제 장소와 실제 시간에 맞춰 진행되었다. 이 프로덕션에는 캐서린 말피타노가 타이틀 롤을, 플라시도 도밍고가 카바라도시를, 루제로 라이몬디가 스카르피아 남작을 맡았다. 1막은 7월 11일 토요일 정오(중앙 유럽 서머타임)에 로마의 산탄드레아 델라 발레 대성당에서 생중계되었고, 2막은 그날 저녁 9시 40분에 파르네세 궁전에서, 3막은 7월 12일 일요일 오전 7시에 산탄젤로 성에서 생중계되었다.
1994년 6월, 메타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금 모금 콘서트로 사라예보 국립 도서관 폐허에서 사라예보 심포니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과 함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지휘했다. 1999년 8월 29일에는 바이마르의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인근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부활)을 지휘했는데,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나란히 앉아 연주했다.
그는 1984년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인도(뭄바이)를 순회공연했으며, 1994년 11월~12월에는 이츠하크 펄먼과 길 샤함을 솔리스트로 초청하여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다시 순회공연을 가졌다. 1997년과 1998년에는 중국 영화 감독 장이머우와 협력하여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피렌체와 베이징에서 상연되었고, 베이징에서는 자금성의 실제 배경에서 300명 이상의 엑스트라와 300명의 군인이 동원되어 9회의 역사적인 공연을 펼쳤다. 이 프로덕션의 제작 과정은 메타가 내레이션을 맡은 다큐멘터리 투란도트 프로젝트에 기록되었다. 그는 미국 러시아 젊은 예술가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이기도 했다.
2005년 12월 26일, 2004년 인도양 지진 해일 1주년을 맞아 메타와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는 첸나이(구 마드라스)의 마드라스 음악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공연했다. 이 쓰나미 추모 콘서트는 첸나이 주재 독일 영사관과 막스 뮐러 바반/괴테 인스티튜트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2006년은 그가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마지막 해였다.
2011년, 런던 더 프롬스에서 열린 메타의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은 친팔레스타인 시위자들에 의해 피켓 시위와 방해를 받았고, 이로 인해 BBC는 콘서트의 생방송 중계를 중단해야 했다. 이는 프롬스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2013년 9월, 메타는 스리나가르 무굴 정원에서 주인도 독일 대사관이 주최한 특별 콘서트 '에흐사스 에 카슈미르'에서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와 함께 출연했다. 메타와 오케스트라는 이 콘서트의 통상적인 출연료를 받지 않았다.
2015년 10월, 그는 첸나이로 돌아와 마드라스 음악 아카데미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월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 2016년에는 하얼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하얼빈 콘서트홀에서 열린 제33회 하얼빈 여름 음악 축제의 일환으로 메타의 지휘 아래 두 차례 콘서트를 가졌다. 2022년 8월, 메타는 오스트레일리아 월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시드니와 멜버른,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BBC 프롬스 2022에서 공연했다.
2.8. 일본과의 관계
주빈 메타는 1969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함께 처음 일본을 방문한 이래 일본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1969년과 1977년에는 요미우리 일본 교향악단에 객원 지휘자로 출연하여 리하르트 바그너, 아르놀트 쇤베르크, 루트비히 판 베토벤 등의 작품을 지휘했다. 1984년에는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일본을 순회하며 레너드 번스타인, 애런 코플런드, 조지 거슈윈,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곡들을 연주했다.
2003년, 그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일본을 방문하여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6번(비극적)을 지휘했다. 도쿄 문화회관에서의 이 연주는 메타의 뜻에 따라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살해된 두 명의 일본인 외교관에게 헌정되었다. 2009년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2010년에는 다시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일본을 찾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말러,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베토벤 등의 작품을 연주했다.
특히 2011년 3월, 피렌체 오페라 극장을 이끌고 일본에 왔을 때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동일본 대지진)을 겪었다. 3월 13일 요코하마에서 토스카를, 14일 도쿄에서 운명의 힘을 연주했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영향을 우려한 피렌체 시장의 귀국 명령으로 공연 일정이 도중에 취소되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 친구들을 위해 아무것도 연주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슬프다"며 눈물을 흘렸고, "음악의 힘으로 사람들을 격려할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는다"며 위기 상황에서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11년 4월 10일, 지진의 영향으로 외국인 지휘자들의 많은 공연이 취소되는 가운데, 메타는 '도쿄 봄 음악 축제 - 도쿄 오페라의 숲' 공연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합창)을 지휘했다. 혼신의 연주는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불러일으켰다. 이 공연은 자선 콘서트로 수익금 전액이 기부되었다. 교향곡 9번 연주에 앞서 메타의 연설과 지진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이 있었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연주되었다. 이는 NHK 교향악단과의 두 번째 협연이었다. 당시 메타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발표했다.
"이번 달 피렌체 오페라 극장 일본 공연을 부득이하게 도중에 중단해야 했던 이후, 이 위대한 나라 일본을 덮친 전례 없는 비극 후에, 이 나라의 훌륭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어려운 상황에 처한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기회를 주신 NHK 교향악단, 도쿄 봄 음악 축제, 그리고 산토리 홀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피렌체 오페라 극장 일본 공연을 주최한 NBS(일본 무대 예술 진흥회)에도 감사드립니다."
2019년 11월,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일본 순회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3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키호테, 그리고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을 연주했다. 특히 마지막 날 브루크너 8번 공연에서는 종결부 코다에서 앉아서 지휘하던 메타가 일어서서 곡을 마무리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3. 음악 스타일 및 문화적 영향
메타는 초기 경력부터 안톤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프란츠 슈미트와 같은 대규모 교향악 작품에 대한 역동적인 해석으로 찬사를 받았다. 그의 지휘 스타일은 화려하고 열정적이며 강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 평론가 윈스럽 사전트는 1967년 카네기 홀에서의 메타 데뷔에 대해 "메타는 오케스트라가 내는 모든 소리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가장 단순한 제스처로 이를 해낸다. 그의 모든 제스처는 즉각적이고 인지할 수 있는 효과를 낸다. 그는 오케스트라와 청중 모두에게 평온함, 또는 평온한 웅장함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젊은 세대 지휘자들 사이에서는 정말 드문 일이다"라고 평가했다.
메타는 음악을 통한 사회적 조화와 문화 교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깊은 유대감을 통해 음악이 국경을 초월하여 사람들을 연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스라엘 음악가들과 유대 민족의 정신 및 전통에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고 밝히며, 이스라엘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것이 "내 마음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랍인과 유대인들이 서로를 포옹하는 그 모습을 오늘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하며 음악을 통한 평화와 화합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여러 차례 인정받았다. 1999년 유엔으로부터 "평생 공로 평화 및 관용상"을 받았으며, 2013년에는 인도 대통령 프라나브 무케르지로부터 문화적 화합에 대한 뛰어난 공헌으로 타고르상을 수상했다. 2019년 슬로베니아 대통령 보루트 파호르는 그에게 음악에 대한 공헌과 예술을 통해 사람과 국가를 연결하려는 고무적인 노력에 대해 황금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2020년 11월에는 세계 유대인 회의가 그에게 유대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다섯 번째 테디 콜렉상을 수여했다. 2022년 9월에는 데이비드 헐리 호주 총독으로부터 호주-인도 양자 관계 및 인류 전반, 특히 클래식 음악과 자선 분야에서의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아 오스트레일리아 훈장 명예 동반자 칭호를 받았다.
4. 사생활
주빈 메타의 사생활은 그의 음악 경력만큼이나 주목받았다. 그는 두 번 결혼했으며, 자녀를 두었다.
4.1. 결혼 및 자녀
메타의 첫 번째 결혼은 1958년 캐나다인 소프라노 카르멘 라스키와였다. 그들은 아들 머본과 딸 자린을 두었다. 머본은 2009년 4월부터 토론토 왕립 음악원의 공연 예술 전무 이사로 재직 중이다. 메타와 카르멘은 1964년에 이혼했다. 이혼 2년 후, 카르멘은 메타의 형제이자 전 뉴욕 필하모닉 전무 이사였던 자린 메타와 결혼했다.
1969년 7월, 메타는 미국의 전 영화 및 텔레비전 배우인 낸시 코박과 재혼했다. 그의 둘째 딸 알렉산드라는 196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1990년대에는 두 번째 결혼 중 이스라엘에서 혼외 관계를 통해 아들 오리가 태어났다. 메타는 미국의 영주권자이지만, 인도 시민권을 유지하고 있다.
4.2. 가족 및 관계
메타는 형제 자린 메타와 함께 메흘리 메타 재단의 자문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다. 그의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은 라비 샹카르였다. 메타는 1960년대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샹카르를 지휘하며 처음 만났다. 그들의 우정은 두 사람 모두 로스앤젤레스에 살다가 나중에 뉴욕으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샹카르는 "그것은 내 인생에서 멋진 시기였고 주빈과 나는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5. 수상 및 영예
주빈 메타는 그의 뛰어난 음악적 업적과 문화적 공헌을 기리는 수많은 상과 영예를 받았다.
- 1965년: 조지 윌리엄스 경 대학교(이후 콘코디아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91년: 이스라엘상 시상식에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대한 독특한 헌신을 인정받아 특별상을 수상했다.
- 1995년: 울프 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 1999년: 유엔으로부터 "평생 공로 평화 및 관용상"을 받았다.
- 1966년: 인도 정부로부터 파드마 부샨을, 2001년에는 인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민간인 상인 파드마 비부샨을 수여받았다.
- 2006년 9월: 케네디 센터는 메타를 그해 케네디 센터 명예상 수상자 중 한 명으로 발표했으며, 시상식은 2006년 12월 3일에 열렸다.

- 2007년 2월: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교에서 제2회 브릿지빌더 상을 수상했다.
- 메타는 피렌체와 텔아비브의 명예 시민이다. 1997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의 명예 회원으로, 2006년에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 2001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 칭호를 받았고, 2004년에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2006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마조 무지칼레 피오렌티노가 그에게 같은 칭호를 수여했다.
-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와의 임기가 끝날 무렵, 그는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이자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명예 회원으로 지명되었다.
- 2007년 11월: 빈 음악협회가 그를 명예 회원으로 위촉했다.
- 2007년: 권위 있는 단 다비드상을 수상했다. 지휘자 카를 뵘은 메타에게 니키시 링(빈 필하모닉 명예의 링)을 수여했다.
- 2008년 10월: 일본 황실로부터 다카마쓰노미야 전하기념 세계문화상을 받았다.
- 2011년 3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2,434번째 별이 헌액되었다.
- 2011년 10월: 베를린에서 평생 공로를 인정받아 에코 클래식 상을 수상했다.
- 2013년 9월: 인도 대통령 프라나브 무케르지로부터 문화적 화합에 대한 뛰어난 공헌으로 타고르상 2013을 수상했다.
- 2019년 1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메타를 명예 지휘자로 임명했다.
- 2019년 2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오랜 협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메타를 명예 회원으로 위촉했다.
- 2019년 9월: 슬로베니아 대통령 보루트 파호르는 메타에게 음악에 대한 공헌과 예술을 통해 사람과 국가를 연결하려는 고무적인 노력에 대해 황금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 2020년 11월: 세계 유대인 회의가 그에게 유대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다섯 번째 테디 콜렉상을 수여했다.
- 2022년 9월: 데이비드 헐리 호주 총독으로부터 호주-인도 양자 관계 및 인류 전반, 특히 클래식 음악과 자선 분야에서의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아 오스트레일리아 훈장 명예 동반자 칭호를 받았다.
6. 영화 및 미디어
주빈 메타의 삶과 경력은 여러 다큐멘터리와 미디어 작품을 통해 기록되었다.
- 테리 샌더스의 영화 주빈 메타의 초상(1968년)은 메타의 삶을 다루었다.
- 또 다른 다큐멘터리 주빈과 나는 메타가 지휘를 맡기 전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던 이스라엘 하프 연주자의 손자가 제작했다. 이 영화 제작자는 오케스트라의 뭄바이 순회공연에 동행했으며, 인도와 텔아비브에서 메타와 두 차례 인터뷰를 가졌다.
- 크리스토퍼 뉴펀의 1969년 다큐멘터리 송어는 재클린 뒤 프레, 다니엘 바렌보임, 핀커스 주커만, 이츠하크 펄먼 그리고 메타가 런던에서 프란츠 슈베르트의 송어 5중주를 연주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 영화에서 메타는 더블 베이스를 연주한다.
- 메타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은 앨런 밀러의 1973년 영화 볼레로에 출연했다.
- 메타는 시드니 셸던의 1982년 소설 게임의 명수에서도 언급되었다.
- 메타는 1986년 조로아스터교와 예언자 자라투스트라의 역사를 다룬 영화 불의 날개에서 자신 역으로 출연했다.
- 주빈 메타: 리허설 중(1996년)은 메타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을 리허설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 메타와 그의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준비 과정을 다룬 2017년 스페인 다큐멘터리 영화 춤추는 베토벤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제32회 고야상 최우수 다큐멘터리 영화 부문과 제23회 호세 마리아 포르케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 2008년 유니텔 클라시카/메디치 아츠에서 발매된 음반에는 1977년 1월 촬영된 메타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모차르트 바순 협주곡, 벨러 버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그리고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8번을 포함한 세 곡의 연주가 담겨 있다.
- 메타의 이름은 프랭크 자파와 마더스 오브 인벤션의 1972년 앨범 저스트 어나더 밴드 프롬 L.A.에 수록된 곡 "빌리 더 마운틴"에서 언급된다. 메타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지휘할 때 연주했던 첼로 연주자 쿠르트 레허는 마더스 오브 인벤션의 객원 음악가이기도 했다.
7. 교육 프로젝트
메타는 음악 교육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사회에 기여했다.
- 2009년, 메타는 뱅크 레우미와 아랍-이스라엘 은행과의 협력으로 아랍계 이스라엘인을 위한 음악 교육 프로그램인 미프네(מפנה히브리어, '변화'라는 뜻)를 설립했다. 셰파람, 이스르엘 평야, 나사렛에 있는 세 학교가 이 시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 그와 그의 형제 자린은 메흘리 메타 재단의 자문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다.
- 2005년, 메타는 자선사업가 요제프 부흐만과 함께 텔아비브 대학교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파트너십으로 부흐만-메타 음악 학교를 설립했다. 메타는 이 학교의 명예 회장이며 설립 이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8. 유산 및 평가
주빈 메타는 60년이 넘는 지휘 경력을 통해 음악계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음악적 업적과 사회적 기여는 전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8.1. 긍정적 평가
메타는 특히 안톤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와 같은 대규모 교향악 작품에 대한 역동적이고 힘 있는 해석으로 초기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의 지휘는 오케스트라의 모든 소리를 완벽하게 통제하며, 평온함과 웅장함을 동시에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 시절, 그는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를 빈 필하모닉에 버금가는 따뜻하고 풍부한 소리로 다듬는 데 성공했으며, 단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의 아이다 데뷔 공연은 평론가들로부터 "눈부시고 숨 가쁜 연주"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는 세 테너 콘서트와 같은 대규모 야외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 탁월한 기획력과 실행력을 보여주었다. 메타는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깊은 유대감을 통해 음악이 문화적, 정치적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음을 증명했다. 걸프 전쟁 중 이스라엘에서 무료 콘서트를 열어 국민들을 고무시키고, 사라예보의 폐허에서 모차르트 레퀴엠을 지휘하며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한 것은 그의 인도주의적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인근에서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함께 지휘하여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에서 공연을 이어가려 했던 그의 노력과, 재해 희생자들을 위한 말러 교향곡 6번 헌정, 그리고 자선 콘서트 지휘 등은 예술을 통한 위로와 희망 전달에 대한 그의 깊은 신념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유엔 "평생 공로 평화 및 관용상", 인도의 파드마 비부샨, 타고르상, 슬로베니아의 황금 공로 훈장, 세계 유대인 회의의 테디 콜렉상, 오스트레일리아 훈장 명예 동반자 등 수많은 국내외 상을 수상하며 음악을 통한 문화 외교와 사회적 기여를 인정받았다.
8.2. 비판 및 논란
주빈 메타의 경력 전반에 걸쳐 큰 논란은 드물었지만, 그의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긴밀한 관계는 때때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11년 런던 더 프롬스에서 열린 이스라엘 필하모닉 공연은 친팔레스타인 시위자들에 의해 피켓 시위와 방해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BBC는 콘서트의 생방송 중계를 중단해야 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메타의 음악적 활동이 중동 지역의 민감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그의 사생활 중 두 번째 결혼 기간 중 이스라엘에서 혼외 관계를 통해 아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9. 관련 항목
- 지휘자
- 클래식 음악
-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 뉴욕 필하모닉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 마조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 한스 스바로프스키
- 클라우디오 아바도
- 다니엘 바렌보임
- 이츠하크 펄먼
- 라비 샹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