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에르빈 슈타인(Erwin Stein에르빈 슈타인독일어, 1935년 6월 10일 ~ 2024년 7월 26일)은 독일의 프로 축구 선수로, 공격수로 활약했다. 그는 SG 본하임(SG Bornheim에스게 본하임독일어)과 올림피아 07(Olympia 07올림피아 영칠독일어) 등 유소년 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며, 슈필페어아이니궁 그리스하임 02(SpVgg Griesheim 02슈필페어아이니궁 그리스하임 영이독일어)를 거쳐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Eintracht Frankfurt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독일어)에서 선수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슈타인은 독일 아마추어 국가대표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이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 1959-60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두 골을 기록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에는 SV 다름슈타트 98과 고향 클럽인 슈필페어아이니궁 그리스하임 02에서도 활약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담배 가게를 운영하며 여생을 보냈다.
2. 초기 생애 및 유소년 경력
에르빈 슈타인은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며 지역 유소년 클럽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재능은 빠르게 발전하여 경쟁적인 수준의 축구로 이끌었다.
2.1. 초기 생애 및 클럽 시작
슈타인은 열 살이 되던 해인 1945년 SG 본하임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올림피아 07로 옮겼으며, 1954년부터는 슈필페어아이니궁 그리스하임 02에서 활약하며 실력을 다졌다.
2.2. 독일 아마추어 국가대표팀 경력
24세이던 1959년 4월 15일, 슈타인은 제프 헤르베르거(Sepp Herberger제프 헤르베르거독일어) 감독과 그의 보조 게오르크 가블리체크(Georg Gawliczek게오르크 가블리체크독일어)의 부름을 받아 네덜란드 엔스헤데에서 열린 네덜란드와의 경기에 독일 아마추어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출전했다. 그는 이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하며 독일의 2대0 승리에 기여했다. 5월 16일에 독일 챔피언십 결승 라운드가 시작될 예정이었으므로, 헤르베르거 감독은 이 헤센주 아마추어 선수를 함부르크에서 열린 폴란드와의 친선 경기에 다시 발탁했다. 슈타인은 경기 63분에 교체 투입되어 81분에 동점골을 터뜨리며 경기를 최종 무승부로 만들었다. 5월 27일에는 아마추어 국가대표팀 경기에 두 번째로 출전하여 잉글랜드를 상대로 두 골을 모두 기록하며 2대0 승리를 이끌었다. 룩셈부르크의 50주년 기념 경기에서는 벨기에 대표팀과 독일 대표팀 간의 경기가 펼쳐졌는데, 이 경기에서 벨기에가 3대1로 승리했지만 슈타인은 DFB 팀의 유일한 골을 기록했다. 슈타인이 프로 계약을 체결하며 아마추어 국가대표팀 자격을 상실하게 되자, 1959년 11월에 핀란드와 폴란드를 상대로 예정된 1960년 하계 올림픽 예선전을 앞두고 DFB의 올림픽 참가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3. 프로 클럽 경력
에르빈 슈타인은 여러 클럽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공격력을 선보였다. 특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그의 경력은 정점에 달했다.
3.1.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59년 6월 28일, 독일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키커스 오펜바흐를 연장전 끝에 5대3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에이스인 에케하르트 파이겐스판이 TSV 1860 뮌헨으로 이적하면서, 프랑크푸르트 구단은 그리스하임 02의 공격수였던 슈타인과 이적 협상을 진행했고, 슈타인은 1959-60 시즌을 앞두고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다.
슈타인은 1959년 8월 23일, SpVgg 퓌르트와의 1959-60 오베르리가 쉬드 개막전에서 아인트라흐트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하며 팀의 5대3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오베르리가 쉬드에서 꾸준히 득점력을 과시하며 1959-60 시즌에 24골을 기록했다. 또한, 1960년 5월 18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햄든 파크에서 열린 1960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전설적인 호세 산타마리아(José Santamaría호세 산타마리아스페인어)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두 골을 넣었지만, 팀은 3대7로 패했다. 그의 이러한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제프 헤르베르거 감독은 그가 아마추어 국가대표팀을 떠나 프로로 전향한 것을 용서하지 않아 더 이상 국가대표팀에 호출하지 않았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7년간 활약하면서 슈타인은 친선 경기를 포함해 총 342경기에 출전하여 267골을 기록했다.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오베르리가 쉬드에서 107경기에 출전하여 75골을 넣었으며, 1961년부터 1962년까지는 팀의 남부 오베르리가 준우승과 최종 라운드 진출에 기여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분데스리가에서도 두 시즌 동안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는 1965년 9월 4일 하노버 96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아인트라흐트의 선수로서 작별을 고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그는 분데스리가 41경기에서 14골을 기록했다. 또한 1964년 6월 13일 DFB-포칼 결승전에서 1860 뮌헨을 상대했지만, 팀은 0대2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3.2. SV 다름슈타트 98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슈타인은 레기오날리가 쉬드의 SV 다름슈타트 98 소속으로 세 시즌을 뛰었다. 그는 총 83경기에 출전하여 18골을 기록했으며, 주로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3.3. 슈필페어아이니궁 그리스하임 02 복귀 및 은퇴
슈타인은 1969-70 시즌을 끝으로 고향 클럽인 슈필페어아이니궁 그리스하임 02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프로 축구 선수로서 은퇴했다.
4. 주요 업적
에르빈 슈타인은 그의 축구 경력 동안 특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업적을 달성했다.
- 유러피언컵 준우승: 1960
- UEFA 인터토토컵 우승: 1966-67
5. 선수 은퇴 후 삶
프로 축구에서 은퇴한 후, 에르빈 슈타인은 프랑크푸르트의 그리스하임 지역에서 담배 가게를 운영했다. 그의 가게에서는 복권도 함께 판매되었다.
6. 사망
에르빈 슈타인은 2024년 7월 26일에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