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아부 누와스는 혼합된 혈통과 어린 시절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바스라와 쿠파에서 문학과 종교를 깊이 공부하며 시인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1. 출생과 가족
아부 누와스는 750년경에서 762년경 사이에 압바스 칼리파국의 아흐바즈주(오늘날 이란의 후제스탄주)에 있는 아흐바즈 시 또는 인근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하니(Hani)로, 다마스쿠스 출신의 아랍인으로 추정되며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마지막 칼리프인 마르완 2세의 군대에서 복무했다. 어머니는 굴반(Gulban) 또는 굴나즈(Gulnaz)라는 이름의 페르시아인 재봉사로, 하니가 아흐바즈 경찰대에서 복무할 때 만났다. 아부 누와스가 10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이후 어머니를 따라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로 이주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바스라에서 태어나 성장했다고도 전해지지만, 일반적으로는 아흐바즈에서 태어나 2~3세경 바스라로 옮겨왔다고 알려져 있다.
1.2. 교육과 초기 영향
바스라에서 어린 나이에 쿠란 학교에 다니며 하피즈(쿠란 암송자)가 되었다. 그의 젊은 시절의 준수한 외모와 타고난 카리스마는 쿠파 출신 시인 아부 우사마 왈리바 이븐 알-후밥 알-아사디(Abu Usama Walibah ibn al-Hubab al-Asadi)의 주목을 끌었다. 왈리바는 아부 누와스를 젊은 견습생으로 쿠파에 데려갔고, 그의 시적 재능을 인정하여 시인의 길을 격려했다. 왈리바는 또한 젊은 아부 누와스에게 성적으로 끌렸으며, 그와 에로틱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부 누와스가 성인이 된 후 사춘기 소년들과 맺었던 관계는 왈리바와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왈리바가 사망한 후, 그는 시인이자 번역가인 할라프 알-아흐마르(Khalaf al-Ahmar)의 제자가 되었다. 또한 이슬람 경전을 배우고, 당시 저명한 문법학자였던 무안마르 이븐 무산나(아부 우바이다)와 사이드 이븐 아우스 알-안사리(아부 자이드) 밑에서 아랍어 문법을 공부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어휘 지식을 심화하기 위해 사막의 베두인족을 찾아가기도 했다. 할라프 알-아흐마르는 아부 누와스에게 수천 행의 고전 시를 암기한 후에야 시를 쓸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암기한 모든 시를 잊으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이 '망각'을 강요한 일화는 그가 시인으로서 새로운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2. 바그다드에서의 경력
아부 누와스는 바그다드로 이주하여 칼리프의 후원을 받으며 궁정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고전적인 틀을 벗어나 도시 생활과 향락을 주제로 한 새로운 시풍을 개척했다.
2.1. 바그다드로의 이동과 궁정 생활
아부 누와스는 시인이 되자마자 바그다드로 향했다. 이는 칼리프에게 송시를 바쳐 환심을 사려는 의도였다. 그는 하룬 알-라시드 칼리프에게 덕을 찬양하는 송시를 바쳐 그의 마음에 들었고, 알현이 허락되었다. 이때 그는 바르마크가 출신의 궁정 시인 아반 이븐 압둘 하미드 알-라히키와 친분을 맺고 바르마크가에 출입하게 되었다. 이는 라히키가 잠재적 경쟁자인 아부 누와스를 하룬 알-라시드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아부 누와스는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시정으로 곧 바그다드에서 유명해졌다. 그는 하룬 알-라시드의 총신이 되었지만, 하룬 알-라시드에 의한 바르마크가의 숙청이 일어났을 때 이집트로 몸을 숨겼다. 이집트의 세입청장 하티브 이븐 압둘 하미드가 그를 숨겨주었고, 아부 누와스는 그를 찬양하는 송시를 지었다. 이집트 망명은 길지 않았고, 비교적 빨리 바그다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칼리프이자 하룬 알-라시드의 아들인 젊은 알-아민의 나딤(술친구, 어전 광대)이 되었다. 그의 시 대부분은 알-아민의 재위 기간(809년에서 813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알-아민과는 궁합이 잘 맞아 수많은 모험을 함께했다고 전해지지만, 알-아민은 음주를 이유로 그를 감옥에 가둔 적도 있었다.
2.2. 문학적 스타일과 주제
아부 누와스는 사막의 전통을 계승한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 대신 도시 생활을 노래하고, 포도주의 쾌락(Khamriyyat)과 소년애(Mujuniyyat)를 노골적인 유머를 섞어 찬양했다. 그의 시는 종종 익살스럽고 유머러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카시다와 같은 고전적인 아랍 시의 전통에서 벗어나 '무흐다스(muhdath)'라는 새로운 시풍을 도입했다. 그는 고전 카시다 시인들이 버려진 야영지를 한탄하며 시작하는 것과 달리 "나는 그 야영지에서 가장 가까운 술집이 어디냐고 물을 것이다"라고 쓰며 고정관념에서 벗어났다.
그는 베두인 시대의 카시다보다 단순한 어휘와 자유로운 형식으로 시를 지었다. 그의 송시는 하룬 알-라시드 칼리프를 지지하고 바르마크가와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의 비판적인 시각은 특히 종교 기관을 향하기도 했다.
3. 주요 작품과 장르
아부 누와스는 술의 시, 사랑의 시, 풍자시 등 다양한 장르에서 독창적인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무암마'와 같은 새로운 시 형식을 발명하고 기존 장르를 완성하며 문학적 혁신을 이루었다.

3.1. 술의 시 (Khamriyyat)
아부 누와스는 술의 시(Khamriyyat)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술의 시는 주로 바그다드 엘리트층의 유흥을 위해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 시들은 술의 맛, 외관, 향기, 그리고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시에서 페르시아인을 찬양하고 아랍 고전주의를 조롱하는 철학적 사상과 이미지를 많이 사용했다. 예를 들어, 한 술의 시에서는 페르시아 장인이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한 은 주전자에 담긴 술을 묘사하며, 술의 자리는 "튜닉 단추를 잠그는 곳"이고 물의 자리는 "페르시아 모자(qalansuwah)를 쓰는 곳"이라고 대조적으로 표현했다. 이 구절은 당시 페르시아 이미지와 언어의 보편성을 잘 보여준다.
아부 누와스는 시에서 시적이고 정치적인 어조를 모두 사용했다. 다른 압바스 시대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술을 마시고 종교를 무시하는 자신의 개방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술을 변명이자 해방의 수단으로 삼아 이슬람에 대한 풍자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의 술의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은 종교적 금주와 신의 용서를 비교하며 종교에 대한 그의 경박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아부 누와스는 자신의 죄가 종교적 틀 안에서 정당화되는 것처럼 문학을 썼다.
그의 시는 또한 술과 성에 대한 그의 사랑을 반영했다. 이 시들은 이슬람 세계의 시적 규범에 따르지 않고 술을 마시는 육체적, 형이상학적 경험을 찬양하기 위해 쓰였다. 압바스 시대 술의 시의 지속적인 주제는 소년애와의 연관성이었는데, 이는 술집에서 소년들을 시중꾼으로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 시들은 종종 음란하고 반항적이었다. 그의 시집 '디완'의 에로틱한 부분에서는 어린 하녀들이 어린 소년처럼 옷을 입고 술을 마시는 모습을 묘사한다.
아부 누와스는 흥미로운 편견을 탐구했는데, 동성애가 압바스조 이라크에 혁명이 시작된 지역에서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우마이야 칼리파국 시대의 시인들은 오직 여성 연인에게만 탐닉했다고 주장했다. 누와스의 유혹적인 시는 술을 비난과 희생양의 중심 주제로 사용했다. 그의 '알-무하라마(al-Muharramah)'의 한 구절은 이를 잘 보여준다: "잔에 퍼지면 수많은 색깔을 자랑하며 모든 혀를 침묵시키고, 몸을 뽐내며, 재단사의 끈에 걸린 진주처럼 황금빛으로 빛나는, 연인의 요청에 아름답게 응답하는 날씬한 젊은이의 손에 들려 있다. 각 관자놀이에는 곱슬머리가 있고 눈빛은 재앙을 예고한다. 그는 기독교인이며, 호라산 옷을 입고 튜닉은 그의 상체와 목을 드러낸다. 이 우아한 미인에게 말을 걸면, 당신은 높은 산 꼭대기에서 이슬람을 던져버릴 것이다. 만약 내가 모든 죄인을 죄로 이끄는 그분의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의 종교로 개종하여 사랑으로 기꺼이 들어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젊은이를 그렇게 구별하지 않으셨다면 그의 종교가 참된 종교가 아니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시는 아부 누와스의 다양한 죄를 보여준다: 기독교인이 시중을 들고, 소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기독교에서 증거를 찾는 것. 아부 누와스의 글은 이성애적 예의, 동성애 비난, 음주 금지, 그리고 이슬람 자체를 조롱한다. 그는 자신의 문학을 사용하여 압바스 칼리파국 시대의 종교적, 문화적 규범에 반대하는 증언을 했다. 그의 많은 시가 소년들에 대한 애정을 묘사하지만, 술의 맛과 쾌락을 여성과 연결시키는 것은 아부 누와스의 특징적인 기법이다. 아부 누와스의 이러한 성적 취향은 당시 이슬람 신비주의자들 사이에서 동성애적 가사와 시가 인기가 있었던 것을 고려할 때 드문 일이 아니었다.
3.2. 사랑의 시
아부 누와스의 에로틱한 서정시는 대부분 동성애적이며, 500편 이상의 시와 단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는 성, 에로티시즘, 권력, 자제력을 많이 담고 있으며, 꿀이 가득한 음료, 맛있는 음식, 와인으로 가득 찬 사막 바의 섹스 파티를 연상시킨다. 그의 시를 읽으면 나약한 노예와 순종적인 연인들이 동료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무모한 행동을 권유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고전적인 카시다의 도입부인 '나시브(nasīb)'에서 발전한 '가젤(Ghazal)'이라는 새로운 시 장르는 쓰디쓴 사랑을 중심 주제로 다룬다.
3.3. 풍자시와 기타 장르
아부 누와스는 아랍의 풍자시 전통에 참여했으며, 시인들 간의 격렬한 시적 비난과 모욕이 오가는 시적 결투도 포함되었다. 그는 또한 비난의 시를 쓰기도 했다. 그는 '타르디야(Tardiyya)'라고 불리는 사냥시를 발명하거나 완성하여, 이를 시의 한 장르로 격상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냥이라는 주제 자체는 이슬람 이전 시와 임루울 카이스의 무알라카에도 나타난다. 그는 또한 송시(panegyric poems)와 비가(elegies)를 썼으며, 참회(penitence)를 주제로 한 시도 남겼다. 그는 자신의 풍자적 재능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3.4. 문학적 혁신
아부 누와스는 '무암마(mu'ammā)'(문자적으로는 "눈멀게 하거나 가려진 것")라는 문학적 형태를 발명하거나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단어나 이름의 구성 문자를 조합하여 풀리는 수수께끼를 의미한다. 그는 또한 술의 시(Khamriyyat)와 사냥시(Tardiyya)라는 두 가지 아랍 장르를 완성시켰다. 그의 작품은 우마이야 시대에 시작되어 압바스 칼리파국 시대에 완성된 아랍 시의 갱신 운동의 일부이다. 그는 시를 고전적인 패턴의 반복이 아닌 자유롭고 직접적인 표현으로 보았다. 그는 고전 카시다의 형식과 주제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났으며, 베두인 시대의 카시다보다 단순한 어휘와 자유로운 형식을 사용했다。 그의 아랍 시에서의 탁월함은 오래된 시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지만 그 흐름을 끊어낸 혁신적인 형식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스승 할라프 알-아흐마르가 그에게 고전 시를 암기하고 잊으라고 강요했던 유명한 일화는 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한 시인으로서의 형성을 상징한다.
그의 시집 '디완'은 송시, 비가, 비난, 궁정 사랑 시(남성과 여성), 참회, 사냥, 술의 시 등 장르별로 나뉘어 있었다. 그의 시와 전기의 초기 선집은 야흐야 이븐 알-파들, 야쿠브 이븐 알-시킷(800페이지 분량의 주석, 10개 주제 범주), 아부 사이드 알-수카리(1000개 폴리오 중 3분의 2 편집, 주석 및 언어학적 주석), 아부 바크르 이븐 야흐야 알-술리(알파벳 순서, 잘못된 귀속 수정), 함자 이븐 알-하산 알-이스파하니(알파벳 순서, 소문/아흐바르 수록, 술리의 3배 분량, 1500개 작품, 13000행), 유수프 이븐 알-다야, 아부 히판, 이븐 알-와샤 아부 타이이브, 이븐 암마르(누와스의 작품 비평, 표절 의혹 제기), 알-무나짐 가문 등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의 시는 오스트리아 빈(1885년), 독일 그라이프스발트(1861년), 이집트 카이로(1277년 히즈라/1860년), 레바논 베이루트(1301년 히즈라/1884년), 인도 뭄바이(1312년 히즈라/1894년) 등에서 출판되었다. 그의 시 원고 중 일부는 독일 베를린, 오스트리아 빈, 네덜란드 레이던, 이라크 모술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4. 사상과 신념
아부 누와스의 시는 향락과 사랑, 종교적 비판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사상과 가치관을 드러내며, 압바스 왕조 시대의 사회상과 문화적 흐름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을 담고 있다.
4.1. 시의 주제와 철학
아부 누와스의 시는 종교, 쾌락, 그리고 동성애를 탐구했다. 그의 시는 도시의 향락적인 삶, 사랑, 술, 소년, 사냥, 자유를 주제로 다루었지만, 죽음과 노화에 대한 불안감도 표현했다. 투옥 이후 그의 시는 더욱 종교적으로 변모하여 높은 종교적 감정과 회개를 표현했다. 그의 '참회 시'는 신의 권능에 대한 순종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죄가 종교적 틀 안에서 정당화되는 것처럼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이성애적 예의, 동성애 비난, 음주 금지, 그리고 이슬람 자체를 조롱했다. 그는 특히 종교 기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의 시 "용서"는 그의 깊은 종교적 감정과 회개를 반영한다.
4.2. 문화적 논평
아부 누와스의 시는 압바스 왕조로의 왕조 교체 이후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반영했다. 그의 술의 시는 페르시아인들을 찬양하고 아랍 고전주의를 조롱했다. 그는 시를 통해 압바스 이슬람 세계와 관련된 주제들을 반영했다. 그의 글은 압바스 칼리파국 시대의 종교적, 문화적 규범에 도전했다. 그의 작품은 아랍 시를 갱신하려는 운동의 일부이며, 시를 자유롭고 직접적인 표현으로 보았다. 그는 사막 생활이라는 전통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바그다드의 새로운 삶을 열정적으로 찬양했다. 그의 작품은 압바스 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다.
5. 투옥과 죽음
아부 누와스는 자유분방한 생활과 파격적인 시로 인해 투옥을 겪었으며, 그의 죽음은 여러 상반된 설들이 전해지며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5.1. 투옥 경험
아부 누와스는 자주 술에 취해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그는 칼리프 알-아민의 통치 기간 중, 사망하기 직전에 투옥되었다. 투옥 이유는 칼리프를 모욕하는 시를 지었거나(알-아민이 그를 투옥했지만, 하룬 알-라시드를 모욕한 시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슬람을 모독하는 금지된 주제를 시에 담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시 "바니 무다르의 대상(Kafilah Bani Mudhar)"은 칼리프의 분노를 사 투옥으로 이어졌다.
5.2. 죽음과 매장
아부 누와스는 대압바스 내전 중인 814년에서 816년 사이에(히즈라력 199년 또는 200년) 알-마으문이 호라산에서 진격하기 전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 시기는 806년, 813년, 814년, 815년, 810년 등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814년에서 816년 사이가 가장 유력하다.
그의 사망 원인 또한 논란이 많다. 네 가지 주요 설이 전해진다.
- 첫째, 그를 풍자하는 시로 인해 누바흐트 가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다.
- 둘째, 선술집에서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다 사망했다는 설이다.
- 셋째, 누바흐트 가문이 그에게 잘못 귀속된 풍자시 때문에 그를 구타하여 사망했다는 설이다. 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설이 결합된 형태로, 그의 마지막 순간에 술이 감정적인 동요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 넷째,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 설은 그가 사망 직전 병으로 고통받았고 친구들이 그를 방문했다는 많은 일화와 모순된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망 원인은 병사이며, 이는 누바흐트 가문의 집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 인해 그들이 그를 독살했다는 신화가 생겨났을 수 있다. 아부 누와스는 바그다드의 슈니지 공동묘지에 묻혔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는 전통적으로 유대인 묘지였던 언덕에 묻혔다고도 전해진다.
6. 유산과 영향
아부 누와스는 아랍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문학적 혁신은 후대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또한 그는 민담과 대중문화 속에서 익살꾼이자 지혜로운 인물로 자리매김하며 폭넓은 문화적 존재감을 확립했다.

6.1. 문학사적 영향
아부 누와스는 고전 아랍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오마르 하이얌과 하페즈를 포함한 많은 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은 모두 페르시아 시인이다. 12세기 알-안달루스에서 활동한 이븐 쿠즈만은 그를 깊이 존경했으며, 아부 누와스와 비교되기도 했다.
그는 '무암마(mu'ammā)'(수수께끼)라는 문학적 형태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술의 시(Khamriyyat)와 사냥시(Tardiyya)라는 두 가지 아랍 장르를 완성시켰다. 그의 작품은 우마이야 시대에 시작되어 압바스 칼리파국 시대에 완성된 아랍 시의 갱신 운동의 일부이다. 그는 아부 알-아타히야와 함께 아랍 시에 새로운 양식과 내용의 다양성을 가져온 '현대 학파(muhdathun)'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디완'(시집)을 직접 편찬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이집트 망명 중의 많은 작품이 유실되었고, 잘못된 귀속이 많았다. 그의 '디완' 중 중요한 판본으로는 술레이만 이븐 알-술리(진정한 작품에 중점)와 함자 알-이스파하니(알려진 모든 시, 진위 여부 불문, 일화 포함)의 편집본이 있으며, 함자 편집본은 술리의 것보다 세 배나 길어 1500개 작품, 13000행에 달한다.
6.2. 문화적 존재감
아부 누와스는 천일야화의 여러 이야기에 등장하며, 종종 하룬 알-라시드의 충실한 동반자나 익살꾼으로 묘사된다. 이 이야기들에서 그는 때때로 칼리프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무례한 악당이나 재치 있는 동반자로 그려진다.
타예브 살리흐의 수단 소설 북으로 가는 이주 시즌(1966년)에서는 주인공 무스타파 사이드가 런던에서 젊은 영국 여성을 유혹하는 수단으로 아부 누와스의 사랑 시를 광범위하게 인용한다. 탄자니아 예술가 고드프리 음밤펨브와(가도)는 1996년 스와힐리어 만화책 아부누와시를 만들었는데, 이 책은 동아프리카 민담과 천일야화의 가상 인물 아부 누와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세 가지 이야기에서 트릭스터 주인공 아부누와시를 등장시킨다. 스와힐리 문화권에서는 그를 아부누와시 또는 키부누와시라고 부르며, 때로는 토끼로 의인화되기도 한다. 아프리카의 뿔 지역, 특히 에리트레아에서는 1940년대에 수집된 민담에 "아부나와스"로 등장하며, 왕과 상인들을 재치 있게 골탕 먹이는 매우 영리한 인물로 묘사된다. 코모로 제도에서도 "아부누와 이야기"는 가장 자주 전해지는 구전 민담 중 하나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부나와스"가 다양한 민담에 등장하며, 종종 일반인과 상류층 간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는 종종 풍자적인 수피 인물인 나스레딘 호자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이들은 다른 시대에 살았고 주요 역할(아부 누와스는 시인, 나스레딘은 유머리스트)이 달랐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 아라비안 나이츠(1974년)에서 "시움" 이야기는 아부 누와스의 에로틱한 시를 기반으로 하며, 원본 시가 장면 전반에 사용된다. 앤드루 킬린의 소설 자물쇠의 아버지(2009년)와 칼리프의 거울(2012년)에서는 자파르 알-바르마키를 위해 일하는 스파이로 묘사되는 등, 허구화된 아부 누와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6.3. 기념과 평가
바그다드 시에는 시인의 이름을 딴 여러 장소가 존재한다. 아부 누와스 거리는 티그리스강 동쪽 강변을 따라 이어져 있으며, 한때 도시의 명물이었던 지역이다. 아부 누와스 공원은 주무후리야 다리(Jumhouriya Bridge)와 카라다 지역의 7월 14일 다리 근처 강으로 이어지는 공원 사이의 2.5 km 구간에 걸쳐 있다.
1976년에는 수성의 한 크레이터가 아부 누와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007년 알제리에서 설립된 아부 나와스 협회는 알제리 형법 333조와 338조의 폐지를 통해 알제리에서 동성애를 비범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의 작품은 20세기 초까지 자유롭게 유통되었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최초의 현대 검열판은 1932년 카이로에서 출판되었다. 2001년 1월, 이집트 문화부는 아부 누와스의 동성애 시집 약 6,000권을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우디의 글로벌 아랍 백과사전의 아부 누와스 항목에서는 소년애에 대한 모든 언급이 생략되었다. 그의 작품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로 인해 현대에도 여전히 검열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