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스티븐 호킹의 삶은 어린 시절의 지적 호기심과 학업 성취, 그리고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라는 치명적인 질병과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혁신적인 과학 연구를 지속하며 인류의 우주 이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1.1.1. 가족 배경
스티븐 윌리엄 호킹은 1942년 1월 8일 옥스퍼드에서 프랭크와 이소벨 아일린 호킹(결혼 전 성은 워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의사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부유했던 친할아버지(요크셔 출신)는 20세기 초 영국의 대농업 불황기에 농지를 과도하게 매입하여 파산했다. 하지만 그의 친할머니가 집에서 학교를 열어 가족을 재정적 파멸에서 구했다. 가족의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모님은 모두 옥스퍼드 대학교에 다녔는데, 아버지는 의학을, 어머니는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소벨은 의학 연구소의 비서로 일했고, 프랭크는 열대병을 전문으로 하는 의학 연구원이었다.
호킹은 아버지에 대해 "나는 아버지를 본받았다. 아버지가 과학 연구자였기 때문에, 나는 과학 연구가 성장했을 때 자연스럽게 해야 할 일이라고 느꼈다. 유일한 차이점은 의학이나 생물학에 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너무 부정확하고 기술적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더 근본적인 것을 원했고, 그것을 물리학에서 찾았다"고 말했다.
1950년, 호킹의 아버지가 국립 의학 연구소의 기생충학 부서장이 되면서 가족은 하트퍼드셔의 세인트 올번스로 이사했다. 세인트 올번스에서 그의 가족은 매우 지적이고 다소 괴짜로 여겨졌다. 식사 시간에도 각자 조용히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크고 어수선하며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집에서 검소하게 살았고, 개조된 런던 택시를 타고 다녔다. 호킹의 아버지가 아프리카에서 자주 자리를 비울 때, 나머지 가족은 어머니의 친구 베릴과 그녀의 남편인 시인 로버트 그레이브스를 방문하기 위해 4개월 동안 마요르카에서 지냈다.
1.1.2. 학창 시절
호킹은 런던 하이게이트의 바이런 하우스 스쿨에서 학교 교육을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학교의 "진보적인 교육 방식"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동안 글을 배우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세인트 올번스에서는 8세의 호킹이 몇 달 동안 세인트 올번스 여학교에 다녔다. 당시에는 어린 남자아이들도 그곳의 기숙사 중 한 곳에 다닐 수 있었다.
호킹은 래들렛 스쿨과 1952년 9월부터 세인트 올번스 스쿨에 다녔는데, 이는 그가 11세 시험을 1년 일찍 통과한 후였다. 그의 가족은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호킹의 아버지는 아들이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다니기를 원했지만, 13세의 호킹은 장학금 시험 당일에 아팠다. 그의 가족은 장학금 없이 학교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호킹은 세인트 올번스에 남았다. 긍정적인 결과는 호킹이 보드 게임, 불꽃놀이 제조, 모형 비행기와 보트, 그리고 기독교와 초감각적 지각에 대한 긴 토론을 즐겼던 친구들과 계속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1958년부터 수학 교사 디크란 타흐타의 도움을 받아 그들은 시계 부품, 오래된 전화 교환대 및 기타 재활용 부품으로 컴퓨터를 만들었다. 1959년에는 예비 부품으로 턴테이블을 만들었다. 그는 "아버지는 턴테이블을 사는 것을 무모한 자기 탐닉으로 여겼을 테지만, 나는 싸게 부품을 사서 조립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게 요크셔 사람인 아버지의 마음에 들었다"고 회상했다.
학교에서 "아인슈타인"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호킹은 처음에는 학업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과학 과목에 상당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타흐타의 영감을 받아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호킹의 아버지는 수학 졸업생에게 일자리가 거의 없다는 점을 우려하여 의학을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또한 아들이 자신의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다니기를 원했다. 당시 그곳에서는 수학을 전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호킹은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교장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호킹은 1959년 3월 시험을 치른 후 장학금을 받았다.
1.1.3. 대학원 및 초기 연구
호킹은 1959년 10월 17세의 나이로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대학 교육을 시작했다. 처음 18개월 동안 그는 지루하고 외로웠는데, 학업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물리학 지도교수인 로버트 버먼은 나중에 "그는 무언가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지 않고도 그것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학년과 3학년 동안 변화가 일어났는데, 버먼에 따르면 호킹은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클래식 음악과 과학 소설에 관심이 많은 인기 있고 활기차며 재치 있는 대학생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변화의 일부는 그가 대학 보트 클럽인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보트 클럽에 가입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노 젓는 팀의 콕스를 맡았다. 당시 조정 코치는 호킹이 위험한 코스로 팀을 조종하여 보트가 손상되는 등 대담한 이미지를 구축했다고 언급했다. 호킹은 옥스퍼드에서 3년 동안 약 1,000시간을 공부했다고 추정했다. 이러한 인상적이지 않은 학습 습관은 최종 시험을 어렵게 만들었고, 그는 사실적 지식이 필요한 문제보다는 이론물리학 문제에만 답하기로 결정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우주론 대학원 연구를 계획했던 그는 최우등 학위를 받는 것이 입학 조건이었다. 불안했던 그는 시험 전날 밤 잠을 잘 이루지 못했고, 그 결과는 최우등과 차우등 사이의 경계선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옥스퍼드 시험관들과의 구술 시험({{lang|en|viva|}})이 필요했다.
호킹은 자신이 게으르고 까다로운 학생으로 비춰질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구술 시험에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만약 저에게 1등을 주신다면 케임브리지로 갈 것입니다. 2등을 받으면 옥스퍼드에 남을 테니, 1등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버먼이 언급했듯이, 시험관들은 "자신들 대부분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충분히 똑똑했다." 물리학에서 최우등 학사 학위를 받고 친구와 이란 여행을 마친 후, 그는 1962년 10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홀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호킹의 박사 과정 첫 해는 어려웠다. 그는 처음에는 저명한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 대신 현대 우주론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데니스 윌리엄 시아마가 지도교수로 배정된 것을 실망스러워했고, 일반 상대성 이론과 우주론 연구에 필요한 수학 훈련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 진단을 받은 후, 호킹은 우울증에 빠졌다. 의사들은 학업을 계속하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별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그의 병은 의사들이 예측했던 것보다 더디게 진행되었다. 호킹은 지지 없이 걷기 어려웠고 말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2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초기 진단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시아마의 격려로 그는 연구로 돌아갔다. 호킹은 1964년 6월 강연에서 호일과 그의 제자 자얀트 나를리카르의 연구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면서 천재적이고 건방지다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호킹은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에 걸리기 전에는 삶이 지루했다. 하지만 일찍 죽을 것이라는 전망은 삶이 정말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회상했다.
호킹이 박사 과정을 시작했을 때, 빅뱅 이론과 정상 우주론이라는 우주 창조에 대한 지배적인 이론들에 대해 물리학계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로저 펜로즈의 블랙홀 중심에 있는 시공간 특이점 정리에 영감을 받아, 호킹은 같은 생각을 전체 우주에 적용했고, 1965년 동안 이 주제에 대한 논문을 썼다. 호킹의 논문은 1966년에 승인되었다. 다른 긍정적인 발전도 있었다. 호킹은 케임브리지의 곤빌 앤 카이우스 칼리지에서 연구원 자격을 받았고, 1966년 3월에는 일반 상대성 이론과 우주론을 전문으로 하는 응용 수학 및 이론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그의 에세이 "특이점과 시공간의 기하학"은 펜로즈의 에세이와 함께 그 해의 권위 있는 애덤스상을 공동 수상했다.
1.2. 주요 연구 및 경력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의 본질과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해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킨 선구적인 연구로 유명하다. 그의 경력은 획기적인 이론적 기여와 대중 과학에 대한 헌신으로 특징지어진다.
1.2.1. 블랙홀 연구
호킹은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처음 탐구했던 특이점 정리 개념을 로저 펜로즈와 협력하여 확장했다. 여기에는 특이점의 존재뿐만 아니라 우주가 특이점으로 시작했을 수 있다는 이론도 포함되었다. 그들의 공동 에세이는 1968년 중력 연구 재단 대회에서 2위를 차지했다. 1970년, 그들은 만약 우주가 일반 상대성 이론을 따르고 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이 개발한 물리 우주론 모델 중 하나에 부합한다면, 그것은 특이점으로 시작했음에 틀림없다는 증명을 발표했다. 1969년, 호킹은 카이우스에 남기 위해 특별히 신설된 과학 우수 펠로우십을 수락했다.
1970년, 호킹은 블랙홀 역학 제2법칙으로 알려진,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이 결코 작아질 수 없다는 가설을 세웠다. 제임스 M. 바딘과 브랜든 카터와 함께 그는 열역학과 유사성을 가지는 블랙홀 역학 4법칙을 제안했다. 호킹에게는 짜증스러운 일이었지만, 존 아치볼드 휠러의 대학원생인 제이콥 베켄슈타인은 열역학적 개념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여 더 나아갔고, 결국 옳았음이 밝혀졌다.
1970년대 초, 카터, 베르너 이스라엘, 데이비드 C. 로빈슨과의 호킹의 연구는 휠러의 블랙홀 무모 정리를 강력히 지지했다. 이 정리는 블랙홀이 어떤 원래 물질로 만들어졌든 상관없이 질량, 전하, 회전이라는 세 가지 속성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명시한다. 그의 에세이 "블랙홀"은 1971년 1월 중력 연구 재단 상을 수상했다. 호킹의 첫 번째 책인 《시공간의 거대 구조》는 조지 프랜시스 레이너 엘리스와 함께 1973년에 출판되었다。
1973년부터 호킹은 양자 중력과 양자 역학 연구로 옮겨갔다. 이 분야에서의 그의 연구는 모스크바 방문과 야코프 보리소비치 젤도비치 및 알렉세이 스타로빈스키와의 토론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들의 연구는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회전하는 블랙홀이 입자를 방출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호킹에게는 짜증스러운 일이었지만, 그의 여러 번 확인된 계산은 그의 제2법칙(블랙홀은 결코 작아질 수 없다고 주장)과 모순되는 결과를 낳았고, 블랙홀의 엔트로피에 대한 베켄슈타인의 추론을 지지했다.
그의 결과는 1974년부터 호킹이 발표했는데, 블랙홀이 오늘날 호킹 복사로 알려진 복사를 방출하며, 에너지를 소진하고 증발할 때까지 계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호킹 복사가 논란이 많았다. 1970년대 후반과 추가 연구 발표 이후, 이 발견은 이론 물리학의 중요한 돌파구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호킹은 호킹 복사 발표 몇 주 후인 1974년에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가장 젊은 회원 중 한 명이었다.
호킹은 1974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셔먼 페어차일드 석좌 초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수진의 친구인 킵 손과 함께 일했고, 백조자리 X-1이 블랙홀인지 여부에 대해 과학적 내기를 했다. 이 내기는 블랙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보험 정책"이었다. 호킹은 1990년에 내기에서 졌음을 인정했는데, 이는 그가 손과 다른 사람들과 하게 될 여러 내기 중 첫 번째였다. 호킹은 첫 방문 이후 거의 매년 한 달씩 그곳에서 지내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와 관계를 유지했다.
1.2.2. 우주론 및 양자 중력
1975년 호킹은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중력 물리학 분야의 강사라는 더 높은 학술 직위를 맡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후반은 블랙홀과 이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지던 시기였다. 호킹은 인쇄 매체와 텔레비전에서 정기적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연구에 대한 학술적 인정을 점점 더 많이 받았다. 1975년에는 에딩턴 메달과 피우스 11세 금메달을, 1976년에는 대니 하이네만 수리물리학상, 맥스웰 메달 및 상, 휴즈 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1977년에 중력 물리학 분야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메달과 옥스퍼드 대학교의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호킹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로 선출되었다. 이 역할에서의 그의 취임 강연은 "이론 물리학의 끝이 보이는가?"라는 제목이었고, 물리학자들이 연구하던 많은 미해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선도적인 이론으로 N=8 초중력을 제안했다. 그의 승진은 건강 위기와 동시에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그는 마지못해 집에서 간호 서비스를 받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물리학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전환을 겪고 있었는데, 수학적 증명을 고집하기보다는 더 직관적이고 사변적인 접근을 하게 되었다. 그는 킵 손에게 "나는 엄밀하기보다는 옳고 싶다"고 말했다. 1981년, 그는 블랙홀이 증발할 때 블랙홀 안의 정보가 돌이킬 수 없이 손실된다고 제안했다. 이 블랙홀 정보 역설은 양자 역학의 근본 원칙을 위반하며, 레너드 서스킨드와 헤라르트 엇호프트와의 "블랙홀 전쟁"을 포함한 수년간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우주론적 급팽창 이론은 빅뱅 이후 우주가 처음에는 엄청나게 빠르게 팽창하다가 더 느린 팽창으로 안정화되었다는 이론으로, 앨런 구스가 제안하고 안드레이 린데도 발전시켰다. 198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 후, 호킹과 게리 기븐스는 1982년 여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초기 우주"에 대한 3주간의 너필드 워크숍을 조직했는데, 이 워크숍은 주로 급팽창 이론에 초점을 맞췄다. 호킹은 또한 우주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양자 이론 연구를 시작했다. 1981년 바티칸 회의에서 그는 우주에 경계, 즉 시작이나 끝이 없을 수 있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호킹은 이후 제임스 하틀과 협력하여 연구를 발전시켰고, 1983년에는 하틀-호킹 상태로 알려진 모델을 발표했다. 이 모델은 플랑크 시대 이전에 우주가 시공간에 경계가 없었으며, 빅뱅 이전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우주의 시작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고 제안했다. 고전적인 빅뱅 모델의 초기 특이점은 북극과 유사한 영역으로 대체되었다. 북극의 북쪽으로 갈 수는 없지만, 그곳에는 경계가 없다. 단지 모든 북쪽으로 향하는 선이 만나고 끝나는 지점일 뿐이다. 처음에는 무경계 제안이 닫힌 우주를 예측했는데, 이는 신의 존재에 대한 함의를 가졌다. 호킹이 설명했듯이, "만약 우주가 경계가 없고 스스로 포함되어 있다면... 신은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선택할 자유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의 화살 분야에서 호킹의 추가 연구는 1985년 논문 발표로 이어졌는데, 이 논문은 무경계 가설이 옳다면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결국 붕괴할 때 시간은 거꾸로 흐를 것이라고 이론화했다. 돈 페이지의 논문과 레이몬드 라플람의 독립적인 계산으로 인해 호킹은 이 개념을 철회했다. 수상은 계속되었는데, 1981년에는 미국 프랭클린 메달을 수상했고, 1982년 신년 훈장에서는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상들은 호킹의 재정 상태를 크게 바꾸지 않았고, 자녀 교육비와 가계 지출을 충당해야 할 필요성에 동기 부여를 받아 그는 1982년에 일반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우주에 대한 대중 과학 서적을 쓰기로 결정했다. 학술 출판사 대신, 그는 대중 시장 출판사인 밴텀 북스와 계약을 맺고 책에 대한 큰 선인세를 받았다. 《시간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의 초고는 1984년에 완성되었다.
호킹이 음성 합성 장치로 처음 만든 메시지 중 하나는 그의 조수에게 《시간의 역사》를 완성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밴텀의 편집자인 피터 구차르디는 그에게 비전문적인 언어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명확하게 설명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이 과정은 점점 더 짜증을 내는 호킹으로부터 많은 수정을 요구했다. 이 책은 1988년 4월 미국에서, 6월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양국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위에 빠르게 올랐고 몇 달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이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2009년 기준으로 약 9백만 부가 팔렸다.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고, 뉴스위크 잡지 표지와 텔레비전 특집 방송은 그를 "우주의 지배자"로 묘사했다. 성공은 상당한 재정적 보상으로 이어졌지만, 유명인으로서의 어려움도 따랐다. 호킹은 자신의 연구를 홍보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여행했고, 늦은 시간까지 파티를 즐겼다. 초청과 방문객을 거절하기 어려워 그는 연구와 학생들을 위한 시간이 제한되었다. 일부 동료들은 호킹이 받는 관심이 그의 장애 때문이라고 느끼며 분개했다.
그는 5개의 명예 학위를 포함하여 더 많은 학술적 인정을 받았다. 1985년 왕립천문학회 금메달, 1987년 폴 디랙 메달, 그리고 1988년에는 펜로즈와 공동으로 권위 있는 울프상을 수상했다. 1989년 생일 훈장에서는 컴패니언 오브 아너({{lang|en|CH|}})에 임명되었다. 그는 1990년대 후반에 영국의 과학 연구 자금 정책에 반대하여 기사 작위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킹은 물리학 연구를 계속했다. 1993년에는 게리 기븐스와 함께 유클리드 양자 중력에 관한 책을 공동 편집했고, 블랙홀과 빅뱅에 관한 자신의 논문 모음집을 출판했다。 1994년, 케임브리지의 뉴턴 연구소에서 호킹과 펜로즈는 6부작 강연을 진행했으며, 이 강연은 1996년 《시공간의 본질》로 출판되었다. 1997년, 그는 1991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킵 손과 존 프레스킬과 했던 공개 과학적 내기에서 패배를 인정했다. 호킹은 펜로즈의 "우주 검열 가설", 즉 지평선 안에 가려지지 않은 "벌거벗은 특이점"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이 옳다고 내기를 걸었다.
그가 자신의 패배 인정이 성급했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새롭고 더 정교한 내기가 이루어졌다. 이 내기는 그러한 특이점들이 추가 조건 없이 발생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같은 해, 손, 호킹, 프레스킬은 또 다른 내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블랙홀 정보 역설에 관한 것이었다. 손과 호킹은 일반 상대성 이론이 블랙홀이 복사를 방출하고 정보를 잃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호킹 복사에 의해 운반되는 질량-에너지와 정보는 "새로운" 것이어야 하며, 블랙홀 사건의 지평선 내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미시적 인과성의 양자 역학과 모순되기 때문에, 양자 역학 이론을 다시 써야 할 것이라고 했다. 프레스킬은 반대로, 양자 역학이 블랙홀에서 방출되는 정보가 이전에 들어온 정보와 관련이 있다고 제안하기 때문에, 일반 상대성 이론이 제시하는 블랙홀 개념이 어떤 식으로든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킹은 또한 대중에게 과학을 알리는 것을 포함하여 대중적 인지도를 유지했다. 에롤 모리스가 감독하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시간의 역사》는 1991년에 개봉했다. 이 영화는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호킹, 그의 친구, 가족, 동료들과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호킹은 영화가 전기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기를 원했지만, 설득되어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널리 개봉되지는 않았다. 1993년에는 대중적인 에세이, 인터뷰, 강연 모음집인 《블랙홀과 아기 우주 그리고 다른 에세이들》이 출판되었고, 1997년에는 6부작 텔레비전 시리즈 《스티븐 호킹의 우주》와 동반 서적이 나왔다. 호킹이 주장했듯이, 이번에는 초점이 전적으로 과학에 맞춰졌다.
1.2.3. 저술 활동
호킹은 대중을 위한 글쓰기를 계속하여 2001년 《호두껍질 속의 우주》를 출판했고, 2005년에는 레너드 믈로디노프와 함께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를 집필하여 이전 작품들을 더 넓은 독자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업데이트했으며, 2006년에는 《신은 정수를 창조했다》를 출판했다. CERN의 토머스 헤르토그와 제임스 하틀과 함께, 2006년부터 호킹은 하향식 우주론을 개발했는데, 이는 우주가 하나의 고유한 초기 상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상태를 가졌으며, 따라서 특정 초기 상태로부터 우주의 현재 구성을 예측하는 이론을 공식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하향식 우주론은 현재가 많은 가능한 역사들의 중첩으로부터 과거를 "선택한다"고 가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이론은 미세 조정 우주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호킹은 칠레, 이스터섬,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페인(2008년 폰세카상 수상), 캐나다, 그리고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하는 등 광범위하게 여행을 계속했다. 그의 장애와 관련된 실용적인 이유로, 호킹은 점점 더 전용기를 타고 여행했으며, 2011년에는 그것이 그의 유일한 국제 여행 방식이 되었다.
2003년까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블랙홀의 정보 손실에 대한 호킹의 주장이 틀렸다는 합의가 커지고 있었다. 2004년 더블린 강연에서 그는 1997년 프레스킬과의 내기에서 패배를 인정했지만, 블랙홀이 하나 이상의 위상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는, 정보 역설 문제에 대한 자신만의 다소 논란이 있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가 이 주제에 대해 200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는 정보 역설이 우주의 모든 대체 역사를 검토함으로써 설명되었으며, 블랙홀이 있는 우주에서의 정보 손실이 그러한 손실이 없는 우주에 의해 상쇄된다고 주장했다. 2014년 1월, 그는 블랙홀에서의 정보 손실 주장을 자신의 "가장 큰 실수"라고 불렀다.
또 다른 오랜 과학적 논쟁의 일환으로, 호킹은 힉스 보손이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내기를 걸었다. 이 입자는 1964년 피터 힉스에 의해 힉스장 이론의 일부로 존재한다고 제안되었다. 호킹과 힉스는 2002년과 2008년에 이 문제에 대해 격렬하고 공개적인 논쟁을 벌였는데, 힉스는 호킹의 연구를 비판하고 호킹의 "유명인 지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즉각적인 신뢰를 준다"고 불평했다. 이 입자는 대형 강입자 충돌기 건설 후 2012년 7월 CERN에서 발견되었다. 호킹은 자신이 내기에서 졌음을 빠르게 인정했고, 힉스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으며, 힉스는 2013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2007년, 호킹과 그의 딸 루시 호킹은 《조지의 우주를 여는 비밀 열쇠》를 출판했다. 이 책은 이론 물리학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아동 도서로, 호킹 가족과 유사한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이 책은 2009년, 2011년, 2014년, 2016년에 속편이 나왔다.
2002년, 영국 전역의 투표에 따라 BBC는 호킹을 '위대한 영국인 100인' 목록에 포함시켰다. 그는 2006년 왕립학회로부터 코플리 메달을, 2009년에는 미국 최고 민간인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2013년에는 러시아 기초 물리학 특별상을 수상했다.
1.2.4. 수상 및 영예

여러 건물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에 있는 스티븐 W. 호킹 과학 박물관, 케임브리지의 스티븐 호킹 빌딩, 캐나다 페리미터 이론 물리학 연구소의 스티븐 호킹 센터 등이 있다. 호킹의 시간과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그는 2008년 9월 케임브리지 대학교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서 기계식 "크로노파지"(시간을 먹는) 코퍼스 클락을 공개했다.
그의 경력 동안 호킹은 39명의 성공적인 박사 학위 학생들을 지도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정책에 따라, 호킹은 2009년에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직에서 은퇴했다. 기초 과학 연구에 대한 공공 자금 삭감에 대한 항의로 영국을 떠날 수도 있다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호킹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응용 수학 및 이론 물리학과의 연구 책임자로 일했다.
2009년 6월 28일,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자신의 1992년 추측을 농담 삼아 시험하기 위해, 호킹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파티를 열었지만, 파티가 끝난 후에야 이를 공개하여 시간 여행자들만이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예상대로 아무도 파티에 나타나지 않았다.
2015년 7월 20일, 호킹은 외계 생명체를 찾는 노력인 브레이크스루 이니셔티브의 출범을 도왔다. 호킹은 우주 식민지화에 대한 다큐멘터리 《스티븐 호킹: 새로운 지구 원정대》를 2017년 《내일의 세계》 에피소드로 제작했다.
2015년 8월, 호킹은 블랙홀에 무언가가 들어갈 때 모든 정보가 손실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이론에 따르면 블랙홀에서 정보를 검색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17년 7월, 호킹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으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호킹의 마지막 논문인 "영원한 급팽창으로부터의 부드러운 탈출?"은 2018년 4월 27일 《고에너지 물리학 저널》에 사후 출판되었다.
2. 개인적인 삶
스티븐 호킹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과학적 업적만큼이나 복잡하고 도전적이었다. 그의 결혼 생활, 질병과의 싸움, 그리고 사회적 역할은 그를 단순한 과학자를 넘어선 인물로 만들었다.
2.1. 결혼과 가족
호킹은 1962년 파티에서 미래의 아내인 제인 와일드를 만났다. 이듬해 호킹은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1964년 10월,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는데, 호킹의 짧은 기대 수명과 신체적 제약으로 인해 앞으로 닥칠 잠재적 어려움을 인지하고 있었다. 호킹은 나중에 약혼이 자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주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65년 7월 14일 고향인 세인트 올번스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케임브리지에 거주했으며, 호킹의 직장인 응용 수학 및 이론 물리학부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결혼 초기 몇 년 동안 제인은 웨스트필드 칼리지에서 학위를 마치는 동안 주중에는 런던에 살았다. 그들은 회의와 물리학 관련 방문을 위해 여러 차례 미국을 여행했다. 제인은 중세 스페인 문학 분야에서 웨스트필드 칼리지를 통해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1981년 완료). 부부는 세 자녀를 두었다. 로버트는 1967년 5월, 루시 호킹은 1970년 11월, 티모시는 1979년 4월에 태어났다.
호킹은 자신의 질병과 신체적 어려움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연애 시절부터 정해진 전례에 따라 제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장애는 가정과 가족의 책임이 아내의 어깨에 굳건히 놓여 있음을 의미했으며, 이는 그에게 물리학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더 많이 주었다. 1974년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1년 임기직에 임명되자, 제인은 대학원생이나 박사 후 연구원이 그들과 함께 살며 그의 간호를 돕는 것을 제안했다. 호킹은 이를 수락했고, 버나드 카는 이 역할을 수행한 많은 학생들 중 첫 번째로 그들과 함께 여행했다. 가족은 패서디나에서 대체로 행복하고 자극적인 한 해를 보냈다.
호킹은 1975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새로운 집과 중력 물리학 강사라는 새로운 직책을 맡았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호킹과 친한 친구가 된 돈 페이지가 동거하는 대학원생 조교로 일하기 위해 왔다. 페이지와 비서의 도움으로 제인의 책임은 줄어들었고, 그녀는 박사 학위 논문과 노래에 대한 새로운 관심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77년 12월경, 제인은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오르간 연주자 조나단 헬리어 존스를 만났다. 헬리어 존스는 호킹 가족과 가까워졌고, 1980년대 중반에는 그와 제인 사이에 연애 감정이 싹텄다. 제인에 따르면, 남편은 상황을 받아들였으며, "내가 계속 자신을 사랑하는 한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인과 헬리어 존스는 가족을 해체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들의 관계는 오랫동안 플라토닉하게 유지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호킹의 결혼 생활은 여러 해 동안 긴장 상태에 있었다. 제인은 필요한 간호사와 조수들이 가족 생활에 침범하는 것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유명인 지위의 영향은 동료들과 가족들에게도 어려움을 주었으며, 전 세계적인 동화 같은 이미지에 부응해야 한다는 전망은 부부에게 부담스러웠다. 그의 종교에 대한 견해도 그녀의 강한 기독교 신앙과 대조되어 긴장을 초래했다. 1985년 기관 절개술 후, 호킹은 24시간 간호가 필요했고, 간호는 하루 세 교대로 나뉘어 제공되었다. 1980년대 후반, 호킹은 그의 간호사 중 한 명인 일레인 메이슨과 가까워졌는데, 이는 일부 동료, 간병인, 가족 구성원들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그들은 그녀의 강한 성격과 보호적인 태도에 불편함을 느꼈다. 1990년 2월, 호킹은 제인에게 메이슨을 위해 떠나겠다고 말했고, 가족의 집을 떠났다. 1995년 제인과의 이혼 후, 호킹은 9월에 메이슨과 결혼하며 "정말 멋지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다"고 선언했다.
1999년, 제인 호킹은 호킹과의 결혼과 그 파탄을 묘사한 회고록 《별들을 움직이는 음악》을 출판했다. 그 책의 폭로는 언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호킹은 개인적인 삶에 대한 그의 평소 관행대로 자신에 대한 전기를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공개적인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의 두 번째 결혼 후, 호킹의 가족은 그의 삶에서 배제되고 소외감을 느꼈다. 2000년대 초반 약 5년 동안, 그의 가족과 직원들은 그가 신체적으로 학대당하고 있다는 우려를 점점 더 많이 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었지만, 호킹이 고소를 거부하여 종결되었다.
2006년, 호킹과 메이슨은 조용히 이혼했고, 호킹은 제인, 자녀, 손주들과 더 가까운 관계를 재개했다. 이 더 행복했던 시기를 회상하며, 제인의 책의 개정판이 2007년에 《무한을 향한 여행: 스티븐과의 나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재출판되었고, 2014년에는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제작되었다.
2.2. 건강과 장애
호킹은 희귀한 조기 발병, 느리게 진행되는 형태의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lang|en|ALS|}}; 운동 신경 세포병 또는 루게릭병으로도 알려짐)을 앓았다. 이 질병은 뇌와 척수의 운동 신경 세포에 영향을 미치는 치명적인 신경 퇴행성 질환으로, 수십 년에 걸쳐 그를 점진적으로 마비시켰다.
호킹은 옥스퍼드에서의 마지막 해 동안 점점 더 서투른 움직임을 보였는데, 계단에서 넘어지거나 조정 시 어려움을 겪는 등의 일이 있었다. 문제는 악화되었고, 그의 말은 약간 어눌해졌다. 가족들은 그가 크리스마스에 집에 돌아왔을 때 이러한 변화를 알아차렸고, 의학적 조사가 시작되었다. MND 진단은 호킹이 21세이던 1963년에 내려졌다. 당시 의사들은 그에게 2년의 기대 수명을 주었다.
1960년대 후반, 호킹의 신체 능력은 저하되었다. 그는 목발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정기적으로 강의를 할 수 없었다. 글을 쓰는 능력을 점차 잃어가면서, 그는 기하학적 관점에서 방정식을 보는 것을 포함한 보상적인 시각적 방법을 개발했다. 물리학자 베르너 이스라엘은 나중에 이러한 업적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머릿속으로 교향곡 전체를 작곡한 것에 비유했다. 호킹은 몹시 독립적이었고, 자신의 장애에 대한 도움이나 양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과학자 먼저, 대중 과학 작가 다음, 그리고 모든 중요한 면에서 다른 사람과 같은 욕망, 추진력, 꿈, 야망을 가진 평범한 인간"으로 여겨지기를 선호했다. 그의 아내 제인은 나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결단력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고집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때때로 둘 다라고 불렀다"고 언급했다. 그는 1960년대 말에 휠체어 사용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설득이 필요했지만, 결국 그의 휠체어 운전의 과격함으로 악명을 떨쳤다. 호킹은 인기 있고 재치 있는 동료였지만, 그의 질병과 건방지다는 평판은 그를 일부 사람들과 멀어지게 했다.
호킹이 처음 휠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표준 전동 모델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의자들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예시는 BEC 모빌리티가 제작했으며 2018년 11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29.68 만 GBP에 팔렸다. 호킹은 1990년대 초반까지 이러한 유형의 의자를 계속 사용했으며, 이때 휠체어를 운전하기 위해 손을 사용하는 능력이 저하되었다. 호킹은 그 이후로 다양한 의자를 사용했는데, 2007년부터 드래곤모빌리티 드래곤 엘리베이팅 전동 휠체어를 사용했으며, 2008년 4월 호킹이 NASA 5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사진에서 볼 수 있다. 2014년부터는 Permobil C350을, 그리고 2016년부터는 Permobil F3를 사용했다.
호킹의 말은 점점 더 나빠졌고, 1970년대 후반에는 그의 가족과 가장 가까운 친구들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그를 잘 아는 사람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통역해주었다.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경사로 비용을 누가 지불할 것인지에 대한 대학과의 분쟁에 자극받아, 호킹과 그의 아내는 케임브리지에서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 개선과 지원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는데, 여기에는 대학의 개조된 학생 주택도 포함되었다. 일반적으로 호킹은 장애인 권익 옹호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질병과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 분야에서의 그의 참여 부족은 일부 비판을 초래했다.
1985년 중반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의 CERN 방문 중, 호킹은 폐렴에 걸렸는데, 그의 상태에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너무 아파서 제인에게 생명 유지 장치를 중단해야 하는지 질문을 받았다. 그녀는 거부했지만, 그 결과는 기관 절개술이었고, 이는 24시간 간호가 필요했으며 그의 남아있던 말하는 능력을 완전히 잃게 만들었다. 국민 보건 서비스는 요양원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제인은 그가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간호 비용은 미국 재단에서 지원했다. 그에게 필요한 24시간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세 교대로 간호사들이 고용되었다. 고용된 간호사 중 한 명은 일레인 메이슨이었는데, 그녀는 호킹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의사소통을 위해 호킹은 처음에는 철자 카드의 글자를 선택하기 위해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1986년에는 월터 볼토스가 개발한 "이퀄라이저"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받았다. 볼토스는 루게릭병으로 말하고 쓰는 능력을 잃은 장모를 돕기 위해 이 소프트웨어의 초기 버전을 개발했었다. 호킹은 남은 생애 동안 사용한 방법으로, 이제 스캔되는 약 2,500~3,000개의 구문, 단어, 글자 중에서 스위치를 눌러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원래 데스크톱 컴퓨터에서 실행되었다. 일레인 메이슨의 남편인 데이비드(컴퓨터 엔지니어)는 작은 컴퓨터를 개조하여 휠체어에 부착했다.
말을 통역해 줄 사람이 필요 없게 되자, 호킹은 "이제 목소리를 잃기 전보다 더 잘 소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사용한 목소리는 미국식 억양이었고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나중에 다른 목소리를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킹은 이 원래의 목소리를 유지했는데, 자신이 그것을 선호하고 동일시한다고 말했다. 원래 호킹은 손으로 스위치를 작동하여 분당 최대 15단어를 생산할 수 있었다. 강의는 미리 준비되었고, 짧은 섹션으로 음성 합성기로 전송되어 전달되었다.
호킹은 점차 손을 사용하는 능력을 잃었고, 2005년에는 볼 근육의 움직임으로 통신 장치를 제어하기 시작했으며, 분당 약 1단어의 속도였다. 이러한 저하로 인해 감금 증후군이 발생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호킹은 인텔 연구원들과 협력하여 그의 뇌파 또는 얼굴 표정을 스위치 활성화로 변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계획대로 작동하지 않는 여러 프로토타입을 거쳐, 그들은 런던 기반 스타트업 스위프트키가 만든 적응형 단어 예측기에 정착했다. 이 시스템은 그의 원래 기술과 유사한 시스템을 사용했으며, 호킹의 많은 논문과 다른 저술 자료를 입력한 후 더욱 발전되었고, 다른 스마트폰 키보드와 유사한 예측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
2009년까지 그는 더 이상 휠체어를 독립적으로 운전할 수 없었지만, 그의 새로운 타이핑 방식을 만든 사람들이 턱 움직임을 사용하여 휠체어를 운전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호킹은 목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어려웠고, 시험 결과 그가 휠체어를 운전할 수 있었지만 움직임이 불규칙하고 튀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의 마지막 무렵, 호킹은 호흡 곤란을 겪는 일이 잦아졌고, 종종 인공호흡기를 사용해야 했으며, 정기적으로 입원했다.
2.3. 사회 활동 및 대중적 역할
1990년대부터 호킹은 장애인을 위한 롤 모델 역할을 받아들여 강연하고 모금 활동에 참여했다. 2000년대 초반, 그와 11명의 다른 인도주의자들은 정부가 장애를 예방하고 장애인의 권리를 보호할 것을 촉구하는 '제3천년기 장애인 헌장'에 서명했다. 1999년, 호킹은 미국 물리학회의 줄리어스 에드거 릴리엔펠트상을 수상했다.
2012년 8월, 호킹은 런던에서 열린 2012년 하계 패럴림픽 개막식의 "계몽" 부분을 내레이션했다. 2013년에는 호킹 자신이 출연한 전기 다큐멘터리 영화 《호킹》이 개봉했다. 2013년 9월, 그는 말기 환자를 위한 조력 자살의 합법화를 지지했다. 2014년 8월, 호킹은 루게릭병 인식 증진과 연구 기부금 모금을 위한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수락했다. 그는 2013년에 폐렴을 앓았기 때문에 얼음을 뒤집어쓰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고, 그의 자녀들이 대신 챌린지를 받아들였다.

2006년 말, 호킹은 BBC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장 큰 미달성 소원 중 하나가 우주 여행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리처드 브랜슨은 버진 갤럭틱을 통한 무료 우주 비행을 제안했고, 호킹은 즉시 수락했다. 개인적인 야망 외에도, 그는 우주 비행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고 장애인의 잠재력을 보여주고자 하는 열망에 동기 부여를 받았다. 2007년 4월 26일, 호킹은 제로-G 코퍼레이션이 운영하는 특별 개조된 보잉 727-200 제트기를 타고 플로리다 해안에서 무중력을 경험했다. 기동이 그에게 과도한 불편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는 틀렸고, 비행은 8개의 포물선 아크로 연장되었다. 이는 우주 비행에 수반되는 중력 가속도를 견딜 수 있는지 확인하는 성공적인 테스트로 묘사되었다. 당시 호킹의 우주 여행 날짜는 2009년 초로 예상되었지만, 그의 사망 전까지 민간 우주 비행은 시작되지 않았다.
3. 개인적 견해
스티븐 호킹은 과학적 탐구 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철학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확고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의 발언은 종종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지적 영향력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3.1. 철학과 종교관
2011년 구글의 자이트가이스트 컨퍼런스에서 스티븐 호킹은 "철학은 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철학자들이 "현대 과학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믿었으며, "과학을 충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은 더 이상 지식 주장에 관련성이 없다", "그들의 예술은 죽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지식 탐구에서 발견의 횃불을 든 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철학적 문제들이 과학, 특히 "우주와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새롭고 매우 다른 그림을 제시하는" 새로운 과학 이론들에 의해 답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견해는 칭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그는 "사랑, 믿음, 도덕은 물리학과는 다른 범주에 속한다. 물리학 법칙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추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물리학과 수학이 포함하는 논리적 사고가 도덕적 행동에서도 우리를 인도하기를 바랄 수 있다"고 말했다.
호킹은 창조주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았으며, 《시간의 역사》에서 "통일 이론이 그 자체의 존재를 가져올 만큼 설득력이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또한 "만약 우리가 완전한 이론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성의 궁극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초기 연구에서 호킹은 신을 비유적인 의미로 언급했다. 같은 책에서 그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신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고 제안했다. 닐 투록과의 나중 토론을 통해 신의 존재가 열린 우주와도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나의 모든 연구가 보여준 것은 우주가 시작된 방식이 신의 개인적인 변덕이었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왜 우주가 굳이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원한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호킹은 무신론자였다. 《가디언》에 실린 인터뷰에서 호킹은 "뇌를 부품이 고장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로 간주한다"고 말했고, 사후 세계의 개념을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라고 여겼다. 2011년 디스커버리 채널의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큐리오시티》의 첫 에피소드를 내레이션하면서, 호킹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각자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으며, 나의 견해로는 가장 간단한 설명은 신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고 아무도 우리의 운명을 지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에게 심오한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아마도 천국도 없고, 사후 세계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웅장한 설계를 감사할 수 있는 이 한 번의 삶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해 나는 매우 감사한다."
호킹의 무신론 및 자유 사상과의 연관성은 그가 옥스퍼드 대학교의 세속적 인본주의 그룹의 일원이었던 대학 시절부터 분명했다. 그는 나중에 2017년 영국 인본주의자 협회 회의의 기조 연설자로 예정되어 있었다. 《엘 문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과학을 이해하기 전에는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제 과학은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내가 '우리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알 모든 것을 우리가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신은 없다. 나는 무신론자이다."
또한 호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한다면 과학 법칙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당신이 만나서 질문할 수 있는 인격적인 신은 아닐 것이다."
3.2. 인류의 미래
2006년, 호킹은 인터넷에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인류는 어떻게 100년을 더 지속할 수 있을까?"라는 공개 질문을 던졌고, 나중에 "나는 답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지금 직면한 위험을 인식시키기 위해 질문했다"고 설명했다.
호킹은 지구상의 생명체가 갑작스러운 핵전쟁, 유전 공학으로 만들어진 바이러스, 지구 온난화, 소행성 충돌, 또는 인류가 아직 생각하지 못한 다른 위험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호킹은 "핵 대결이나 환경 재앙이 향후 1,000년 안에 지구를 마비시킬 것이 거의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행성 규모의 재앙은 인류가 재앙이 닥치기 전에 다른 행성들을 식민지화할 수 있다면 인류 멸종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호킹은 우주 비행과 우주 식민지화를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호킹은 우주의 광대함을 고려할 때 외계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들과의 접촉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외계인들이 자원을 위해 지구를 약탈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10년에 그는 "만약 외계인이 우리를 방문한다면, 그 결과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상륙했을 때와 매우 비슷할 것이며,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호킹은 초지능 인공지능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잠재적 이점은 엄청나다... AI를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위험을 피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마지막 사건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극도로 지능적인 미래의 AI는 아마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단계로 생존하고 더 많은 자원을 획득하려는 동기를 개발할 것"이며, "AI의 진짜 위험은 악의가 아니라 능력이다. 초지능 AI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매우 능숙할 것이며, 그 목표가 우리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곤경에 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또한 기계가 창출하는 막대한 부가 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재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킹은 자신의 진화 과정을 설계할 수 있는 "초인류"의 미래 출현에 대해 우려했으며, 오늘날의 컴퓨터 바이러스는 새로운 형태의 생명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마도 그것은 인간 본성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창조한 유일한 생명 형태는 순전히 파괴적이다. 우리 자신의 형상대로 생명을 창조하는 것에 대해 말이다"라고 말했다.
3.3. 정치적 견해
호킹은 오랜 노동당 지지자였다. 그는 200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앨 고어를 위한 추모사를 녹음했고,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전쟁 범죄"라고 불렀다. 그는 핵 군축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고, 줄기세포 연구, 보편적 의료, 기후 변화 대응을 지지했다. 2014년 8월, 호킹은 가디언에 실린 편지에 서명한 200명의 공인 중 한 명으로, 9월의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에서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남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표명했다. 호킹은 브렉시트가 영국의 과학 기여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믿었는데, 현대 연구는 국제 협력을 필요로 하며, 유럽 내 인구의 자유로운 이동이 아이디어의 확산을 장려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호킹은 테레사 메이에게 "저는 매일 어려운 수학 문제들을 다루지만, 브렉시트를 도와달라고는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호킹은 브렉시트에 실망했고, 시기와 고립주의에 대해 경고했다.
호킹은 의료에 대해 크게 우려했으며, 영국의 국민 보건 서비스 없이는 70대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호킹은 특히 민영화를 두려워했다. 그는 "시스템에서 더 많은 이익이 추출될수록, 사적 독점이 더 많이 성장하고 의료비는 더 비싸진다. NHS는 상업적 이익으로부터 보존되어야 하며, 이를 민영화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호킹은 보수당이 NHS에 대한 자금을 삭감하고, 민영화를 통해 약화시키고, 임금을 억제하여 직원 사기를 저하시키고, 사회 복지를 축소했다고 비난했다. 호킹은 제레미 헌트가 증거를 "체리 피킹"하여 과학을 훼손했다고 비난했다. 호킹은 또한 "NHS 자금과 의사 및 간호사 수가 부적절하며,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압도적인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2017년 6월, 호킹은 2017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을 지지했는데, 보수당의 NHS 예산 삭감 제안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당 대표 제레미 코빈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으며, 그가 이끄는 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호킹은 도널드 트럼프의 지구 온난화 정책이 지구를 위험에 빠뜨리고 지구 온난화를 되돌릴 수 없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기후 변화는 우리가 직면한 큰 위험 중 하나이며, 지금 행동하면 막을 수 있는 것이다. 기후 변화에 대한 증거를 부정하고 파리 협정에서 탈퇴함으로써, 도널드 트럼프는 우리의 아름다운 행성에 피할 수 있는 환경 피해를 초래할 것이며, 우리와 우리 아이들을 위해 자연계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호킹은 또한 이것이 지구를 "250도의 기온과 황산 비가 내리는 금성처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호킹은 또한 기본 소득의 지지자였다. 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입장을 비판하며, 그들의 정책이 "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4. 죽음
스티븐 호킹의 죽음은 전 세계적으로 애도와 추모를 불러일으켰으며, 그의 유산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영원히 안치되었다.
4.1. 사망 및 장례
호킹은 2018년 3월 14일 76세의 나이로 케임브리지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가족은 그가 "평화롭게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는 과학, 연예, 정치 및 기타 분야의 인사들로부터 추모를 받았다. 곤빌 앤 카이우스 칼리지의 깃발은 조기로 게양되었고, 학생들과 방문객들이 조문록에 서명했다.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 폐막식에서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 위원장 앤드루 파슨스의 폐회 연설에서 호킹에게 추모사가 바쳐졌다.
그의 개인 장례식은 2018년 3월 31일 케임브리지의 그레이트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열렸다. 장례식에는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배우 에디 레드메인과 펠리시티 존스, 퀸의 기타리스트이자 천체 물리학자인 브라이언 메이, 모델 릴리 콜 등이 참석했다. 또한, 영화 《호킹》에서 스티븐 호킹을 연기한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우주비행사 팀 피크, 왕실 천문학자 마틴 리스, 물리학자 킵 손이 추모 예배에서 낭독을 했다. 호킹은 무신론자였지만, 장례식은 전통적인 성공회 의식으로 진행되었다.
4.2. 유해 안치
2018년 6월 15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추모 예배가 열렸고, 이후 그의 유해는 사원의 본당에 아이작 뉴턴 경과 찰스 다윈의 묘 사이에 안치되었다.
그의 기념비에는 "여기에 스티븐 호킹의 필멸의 존재가 잠들다 1942-2018"이라는 문구와 그의 가장 유명한 방정식이 새겨져 있다. 그는 사망하기 최소 15년 전에 베켄슈타인-호킹 엔트로피 방정식을 자신의 묘비명으로 해달라고 지시했다. 이 방정식은 일반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열역학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의 개념들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암시하며, 이들 이론의 통일을 예고할 수 있다. 제이콥 베켄슈타인은 비례 관계를 추측했고, 호킹은 이를 확인하고 비례 상수를 1/4로 확립했다. 1995년에 처음 수행된 끈 이론에 기반한 계산들도 동일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관계는 블랙홀뿐만 아니라 (엔트로피가 정보에 비례하므로) 모든 공간 부피에 포함될 수 있는 정보량의 상한으로서도 유효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다시 현실의 본질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낳았다. 2018년 6월, 그리스 작곡가 반젤리스가 작곡한 호킹의 말이 스페인의 유럽 우주국 위성 접시에서 우주로 발사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는데, 이는 가장 가까운 블랙홀인 1A 0620-00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호킹의 마지막 방송 인터뷰는 2017년 10월에 있었던 두 중성자별의 충돌로 인한 중력파 탐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2018년 4월 스미스소니언 채널 다큐멘터리 《지구를 떠나다: 행성을 식민지화하는 방법》의 형태로 사후에 공개되었다. 그의 마지막 연구 중 하나인 "영원한 급팽창으로부터의 부드러운 탈출?"은 2018년 5월 《고에너지 물리학 저널》에 출판되었고, 또 다른 마지막 연구인 "블랙홀 엔트로피와 소프트 헤어"는 2018년 10월에 출판되었으며, "물체가 블랙홀로 사라진 후 정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미스터리"를 다루었다. 또한 2018년 10월에는 호킹의 마지막 책인 《빅 퀘스천에 대한 간략한 답변》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인류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그의 최종 견해를 담은 대중 과학 서적이다.
2018년 11월 8일, 호킹의 박사 학위 논문({{lang|en|Properties of Expanding Universes|}}, 케임브리지 대학교, 1965)과 휠체어를 포함한 그의 개인 소지품 22점의 경매가 열렸고, 약 180.00 만 GBP의 수익을 올렸다. 휠체어 판매 수익은 운동 신경 세포병 협회와 스티븐 호킹 재단이라는 두 자선 단체에 기부되었고, 다른 품목들의 수익은 그의 유산으로 돌아갔다.
2019년 3월, 영국 왕립 조폐국이 호킹을 기리기 위해 기념 주화인 50펜스 주화를 발행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같은 달, 호킹의 간호사 패트리샤 다우디는 "간호 및 재정적 부정행위"로 인해 간호사 등록에서 취소되었다.
2021년 5월, HMRC, 문화 미디어 스포츠부, 케임브리지 대학교 도서관, 과학 박물관 그룹, 호킹 재단 간의 수락-대체 협정에 따라 호킹의 과학 및 기타 논문 약 10,000페이지는 케임브리지에 보관되고, 그의 휠체어, 음성 합성기, 이전 케임브리지 사무실의 개인 기념품을 포함한 물품들은 과학 박물관에 보관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2022년 2월, "스티븐 호킹의 작업" 전시가 런던 과학 박물관에서 2년간의 전국 순회 전시의 시작으로 개막했다.
5. 유산과 영향력
스티븐 호킹은 그의 획기적인 과학적 기여와 대중문화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으로 인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의 삶과 업적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계속해서 기념되고 있다.
5.1. 과학적 유산
호킹은 일반 상대성 이론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펜로즈-호킹 특이점 정리를 통해 우주가 특이점으로 시작되었음을 입증했다. 또한, 그는 블랙홀의 법칙들을 정립하고, 호킹 복사 이론을 통해 블랙홀이 에너지를 방출하며 증발할 수 있음을 밝혀내 물리학에 중대한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는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통합하여 우주론을 설명한 최초의 과학자였다. 호킹은 다세계 해석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미니 블랙홀의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는 39명의 박사 학위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지도했다. 2009년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직에서 은퇴했지만, 케임브리지 대학교 응용 수학 및 이론 물리학부의 연구 책임자로 남아 연구 활동을 지속했다.
5.2. 대중문화 속 영향력
호킹은 《시간의 역사》와 같은 대중 과학 서적을 통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유명세는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우주의 지배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유명인 지위는 도전 과제이기도 했다.
에롤 모리스가 감독하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시간의 역사》는 1991년에 개봉했다. 1993년에는 《블랙홀과 아기 우주 그리고 다른 에세이들》이 출판되었고, 1997년에는 6부작 텔레비전 시리즈 《스티븐 호킹의 우주》가 방영되었다. 2001년에는 《호두껍질 속의 우주》, 2005년에는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 2006년에는 《신은 정수를 창조했다》가 출판되었다. 그는 딸 루시 호킹과 함께 아동 도서 시리즈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다큐멘터리 《진짜 스티븐 호킹》(2001), 《스티븐 호킹: 프로필》(2002), 《호킹》(2013), 《스티븐 호킹, 우주의 지배자》(2008) 등에 출연했다. 또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퓨처라마》에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빅뱅 이론》에서는 반복적으로 출연했다. 그의 음성 합성기 목소리는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 "킵 토킹"(1994)과 《심슨 가족》(1999)에 사용되었다.

그는 2014년 개봉한 전기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자신의 저작권이 있는 목소리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이 영화에서 그를 연기한 에디 레드메인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2014년에는 《몬티 파이튼 라이브 (대부분)》 쇼에 출연하여 사전 녹화된 비디오에서 휠체어로 브라이언 콕스를 치고 "갤럭시 송"의 확장 버전을 불렀다.
호킹은 자신의 명성을 활용하여 휠체어, 내셔널 세이빙스, 브리티시 텔레콤, 스펙세이버스, 에그 뱅킹, 고 컴페어 등 다양한 제품을 광고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이름에 대한 상표 등록을 신청했다. 2018년 3월, 그의 사망 직전, 그는 라디오 시리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북 마크 II'의 목소리를 맡았고, 닐 디그래스 타이슨의 《스타토크》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2017년 앨범 《젬므》에 수록된 프랑스 싱어송라이터 놀웬 르루아의 노래 "스티븐"에 영감을 주었다. 2021년 애니메이션 시트콤 《프릭 브라더스》에는 스티븐 호킹을 모델로 한 캐릭터인 핌코 시장이 등장한다. 2022년 1월 8일, 구글은 그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구글 두들에 그를 등장시켰다.
BBC 라디오 4의 프로그램 《무인도 디스크》에서 호킹은 프랜시스 풀랑의 글로리아, 요하네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 15번, 리하르트 바그너의 《발퀴레》 1막, 비틀즈의 "플리즈 플리즈 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레퀴엠, 자코모 푸치니의 "오 프린치페, 체 아 룽게 카라바네"(O Principe, che a lunghe carovane),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를 선택했다. 그의 책으로는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를 선택했는데, "누군가, 아마 버지니아 울프였을 텐데, 이 책이 어른들을 위한 책이라고 말했다. 내가 아직 어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시도해 볼 것이다"라고 말했다.
5.3. 기념 및 추모

호킹은 수많은 상과 영예를 받았다. 이미 1974년에 그는 왕립학회 회원(FRS)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그의 추천서는 다음과 같았다.
"호킹은 일반 상대성 이론 분야에 큰 공헌을 했다. 이는 물리학과 천문학에 관련 있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와 특히 완전히 새로운 수학적 기법에 대한 숙달에서 비롯된다. 펜로즈의 선구적인 연구에 이어 그는 부분적으로는 혼자, 부분적으로는 펜로즈와 협력하여 모든 현실적인 우주론 모델이 특이점을 가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결과를 확립하는 일련의 점진적으로 강력한 정리들을 확립했다. 유사한 기법을 사용하여 호킹은 블랙홀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기본 정리들을 증명했다. 매끄러운 사건의 지평선을 가진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정지 해는 반드시 축대칭이어야 하며, 블랙홀의 진화와 상호 작용에서 사건의 지평선의 총 표면적은 증가해야 한다. G. 엘리스와 협력하여 호킹은 '시공간의 거대 구조'에 대한 인상적이고 독창적인 논문을 저술했다."
추천서는 "호킹의 다른 중요한 연구는 우주론적 관측의 해석과 중력파 탐지기 설계와 관련이 있다"고 이어진다.
호킹은 또한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1984), 미국 철학회(1984), 미국 국립 과학원(1992)의 회원이었다.
호킹은 2015년 BBVA 재단 지식의 최전선상 기초 과학 부문을 뱌체슬라프 무하노프와 공동 수상했는데, 이는 초기 우주의 양자 요동으로부터 은하가 형성되었음을 발견한 공로였다. 2016년 프라이드 오브 브리튼 어워즈에서 호킹은 "과학과 영국 문화에 대한 기여"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테레사 메이 총리로부터 상을 받은 후, 호킹은 농담 삼아 브렉시트에 대한 자신의 도움을 구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케임브리지 유니언 소사이어티는 2017년 호킹과 협력하여 스티븐 호킹 펠로우십을 설립했다. 이 펠로우십은 STEM 분야와 사회적 담론에 탁월한 기여를 한 개인에게 매년 수여되며, 특히 젊은 세대에 미치는 영향에 중점을 둔다. 각 펠로우는 '호킹 강연'으로 알려진 자신이 선택한 주제에 대해 강연을 한다.
호킹 자신도 초대 펠로우십을 수락했으며, 사망 전 마지막 공개 석상에서 첫 번째 호킹 강연을 했다.
호킹은 스타머스 페스티벌 자문 위원회 위원이었으며,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인정하고 홍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티븐 호킹 과학 커뮤니케이션 메달은 2016년에 시작된 연례 상으로, 과학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한 예술계 인사들을 기린다. 수상자들은 알렉세이 레오노프가 그린 호킹의 초상화가 새겨진 메달을 받으며, 메달의 뒷면에는 알렉세이 레오노프 자신이 최초의 우주 유영을 하는 모습과 퀸의 음악가이자 천체 물리학자인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레드 스페셜"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음악은 스타머스 페스티벌의 또 다른 주요 구성 요소이다).
2016년 스타머스 III 페스티벌은 스티븐 호킹을 기리는 행사였으며, 모든 스타머스 III 강연을 담은 책 "지평선 너머"도 그에게 헌정되었다. 메달의 첫 수상자들은 호킹 자신이 직접 선정했다. 그들은 작곡가 한스 짐머, 물리학자 짐 알-칼릴리, 그리고 과학 다큐멘터리 《파티클 피버》였다.
6. 저서 목록
스티븐 호킹은 대중과 학계 모두를 위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우주론과 물리학의 복잡한 개념들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 대중 과학 서적
- 《시간의 역사》(1988)
- 《블랙홀과 아기 우주 그리고 다른 에세이들》(1993)
- 《호두껍질 속의 우주》(2001)
-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서서》(2002)
- 《신은 정수를 창조했다: 역사를 바꾼 수학적 돌파구》(2005)
- 《물질을 이루는 꿈: 양자 물리학의 가장 놀라운 논문들과 그것들이 과학계를 뒤흔든 방법》(2011)
- 《나의 간략한 역사》(2013) - 호킹의 회고록
- 《빅 퀘스천에 대한 간략한 답변》(2018)
- 공동 저술
- 《시공간의 본질》(로저 펜로즈와 공저)(1996)
- 《거대함, 미세함, 그리고 인간의 마음》(로저 펜로즈, 압너 시모니, 낸시 카트라이트와 공저)(1997)
- 《시공간의 미래》(킵 손, 이고르 드미트리예비치 노비코프, 티모시 페리스 공저, 앨런 라이트먼, 리처드 H. 프라이스 서문)(2002)
-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레너드 믈로디노프와 공저)(2005)
- 《위대한 설계》(레너드 믈로디노프와 공저)(2010)
- 서문
- 《블랙홀과 시간 왜곡: 아인슈타인의 터무니없는 유산》(킵 손 저, 프레더릭 자이츠 서문)(1994)
- 《스타트렉의 물리학》(로렌스 크라우스 저)(1995)
- 아동 문학
- 딸 루시 호킹과 공동 집필
- 《조지의 우주를 여는 비밀 열쇠》(2007)
- 《조지의 우주 보물찾기》(2009)
- 《조지와 빅뱅》(2011)
- 《조지와 깨지지 않는 암호》(2014)
- 《조지와 푸른 달》(2016)
- 영화 및 텔레비전 시리즈
- 《시간의 역사》(1992)
- 《스티븐 호킹의 우주》(1997)
- 《호킹》 - BBC 텔레비전 영화(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2004)
- 《호라이즌: 호킹의 역설》(2005)
- 《마스터스 오브 사이언스 픽션》(2007)
- 《스티븐 호킹과 모든 것의 이론》(2007)
- 《스티븐 호킹: 우주의 지배자》(2008)
- 《스티븐 호킹과 함께하는 우주로의 여행》(2010)
- 《스티븐 호킹과 함께하는 용감한 신세계》(2011)
- 《스티븐 호킹의 위대한 설계》(2012)
- 《빅뱅 이론》(2012, 2014-2015, 2017)
- 《스티븐 호킹: 나의 간략한 역사》(2013)
- 《사랑에 대한 모든 것》 - 장편 영화(에디 레드메인 주연)(2014)
- 《스티븐 호킹의 천재성》(2016)
- 선정 학술 저서
- "중력 붕괴와 우주론의 특이점"(The Singularities of Gravitational Collapse and Cosmology, 1970)
- "충돌하는 블랙홀로부터의 중력 복사"(Gravitational Radiation from Colliding Black Holes, 1971)
- "일반 상대성 이론의 블랙홀"(Black holes in general relativity, 1972)
- "블랙홀 폭발?"(Black hole explosions?, 1974)
- "단일 거품 급팽창 우주에서 불규칙성의 발전"(The development of irregularities in a single bubble inflationary universe, 1982)
- "우주의 파동 함수"(Wave function of the Universe, 1983)
- "블랙홀에서의 정보 손실"(Information loss in black holes, 2005)
- "영원한 급팽창으로부터의 부드러운 탈출?"(A smooth exit from eternal inflation?, 2018)
- "블랙홀 엔트로피와 소프트 헤어"(Black Hole Entropy and Soft Hair, 2018)
7. 함께 보기
- 이론물리학자
- 우주론
- 양자 역학
- 로저 펜로즈
- 왕립학회
-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
-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
- 사랑에 대한 모든 것 (2014년 영화)
- 스티븐 호킹의 이름을 딴 것들의 목록
- 시간의 기원에 대하여 (토머스 헤르토그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