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군 복무
알렉세이 레오노프의 어린 시절과 교육 과정, 그리고 공군에 입대하여 조종사로서의 초기 경력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1934년 5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파드노시비리 지방의 리스트뱐카 마을(현재 케메로보주 티술스키 군)에서 러시아인 가족의 아홉 자녀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1905년 러시아 혁명에 연루되어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당한 경력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아르히프 레오노프는 전기 기사이자 광부였고, 어머니는 예브도키야 소트니코바였다.
1936년, 그의 아버지는 "인민의 적"으로 선포되어 체포되었다. 레오노프는 자서전에서 "저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당국이 너무 많은 독립성이나 강한 성격을 보이는 사람들을 뿌리 뽑으려는 양심적인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외딴 굴라크로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의 가족은 케메로보로 이사하여 결혼한 누나 중 한 명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석방된 후 케메로보에서 가족과 재회했으며, 부당한 구금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이 시기에 레오노프는 가족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난로에 꽃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캔버스에 풍경화를 그렸다.
소련 정부가 시민들에게 소련 점령 지역인 프로이센으로 이주할 것을 장려하면서, 1948년 그의 가족은 칼리닌그라드로 이주했다. 레오노프는 1953년에 중학교(제21호)를 졸업했다. 그는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리가 예술 아카데미에 지원했지만, 높은 학비 때문에 입학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크레멘추크의 우크라이나 비행 예비 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했고, 1955년 5월에 첫 단독 비행을 성공시켰다. 리가에서 파트타임으로 예술에 대한 열정을 추구하면서도, 레오노프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추후이브 고등 공군 조종사 학교에서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 위한 2년간의 고급 과정을 시작했다.
1.2. 군 복무 및 조종사 훈련
1957년 10월 30일, 레오노프는 우등으로 졸업하고 키이우의 제69항공군 소속 제10공학항공사단 제113낙하산항공연대의 소위로 임관했다. 1959년 12월 13일, 그는 스베틀라나 파블로브나 도젠코와 결혼했다. 다음 날 그는 동독으로 건너가 제16항공군 소속 제294정찰연대에서 새로운 임무를 시작했다.
2. 소련 우주 프로그램 참여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핵심 인물로서, 인류 최초의 우주 유영을 비롯한 여러 선구적인 임무에 참여하며 우주 탐사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2.1. 우주비행사 선발 및 훈련
레오노프는 1960년에 최초의 우주비행사 훈련 그룹에 포함된 20명의 소련 공군 조종사 중 한 명이었다. 대부분의 우주비행사들과 마찬가지로, 레오노프는 소련 공산당의 일원이었다. 그는 우주 임무를 위해 18개월 동안 혹독한 무중력 훈련을 받았다.
2.2. 최초의 우주 유영 (보스호트 2호)
레오노프의 우주 유영은 원래 보스호트 1호 임무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취소되었고, 대신 1965년 3월 18일 보스호트 2호 비행에서 이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우주선에 4.8 m 길이의 밧줄로 연결된 채 12분 9초 동안 우주선 밖에 머물렀다. 이 동안 그는 궤도 일출을 스케치하여 우주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예술 작품을 남겼다.

우주 유영이 끝날 무렵, 레오노프의 우주복은 우주 진공 상태에서 너무 크게 팽창하여 에어록으로 재진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밸브를 열어 우주복 내부의 압력을 일부 배출시켰고, 간신히 우주선 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이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드라마 《우주로 - 냉전과 두 천재》에서는 이 위기 상황에서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실제로는 레오노프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다. 이 내용은 레오노프가 데이비드 스콧과 함께 쓴 자서전 《아폴로와 소유즈》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2.3. 달 착륙 계획 및 기타 임무
1968년, 레오노프는 소유즈 7K-L1 우주선을 이용한 달 궤도 비행 임무의 사령관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신뢰할 수 있는 달 궤도 비행 기술 확보가 지연되고(이후 존드 7호와 존드 8호만이 성공했다), 미국의 아폴로 8호가 이미 우주 경쟁에서 이 단계를 달성하면서 이 임무는 취소되었다. 그는 또한 소유즈 7K-L3 / N1 우주선을 타고 달에 착륙하는 최초의 소련인으로도 선정되었다. 이 프로젝트 또한 취소되었다. 이 달 착륙 계획은 달 착륙선 간의 우주 유영을 필요로 했으며, 이러한 점이 그의 선정에 기여했다.


1971년, 레오노프는 최초의 유인 우주정거장인 살류트 1호로 향하는 소유즈 11호 임무의 사령관으로 배정되었으나, 승무원 중 한 명인 발레리 쿠바소프가 결핵에 감염된 것으로 의심되면서(다른 한 명은 표트르 콜로딘) 백업 승무원과 교체되었다. 그러나 소유즈 11호는 지구 귀환 시 귀환 모듈에 장착된 밸브의 결함으로 공기 누출 사고가 발생하여 교체된 승무원 3명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레오노프는 해당 밸브가 종종 오작동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재돌입 전 우주선과의 교신에서 자동 대신 수동으로 밸브를 조작하도록 조언했다. 그러나 승무원들은 결국 밸브를 자동으로 작동시켜 사망 사고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이 소유즈 11호에 탑승했더라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감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레오노프는 살류트 1호로 향하는 다음 임무를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소유즈 11호 승무원 사망 후 이 계획은 폐기되었고 우주정거장은 상실되었다. 다음 두 살류트(실제로는 군사용 알마스 우주정거장)는 발사 시 손실되거나 곧 실패했으며, 레오노프의 승무원들은 대기 상태였다. 살류트 4호가 궤도에 진입했을 때, 레오노프는 이미 더 중요한 프로젝트로 전환된 상태였다.
2.4.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
레오노프의 두 번째 우주 비행은 1975년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서 소련 측의 소유즈 19호 사령관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소련과 미국 간의 최초의 합동 우주 임무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레오노프는 미국 측 사령관인 토머스 P. 스태퍼드와 오랜 친구가 되었고, 레오노프는 스태퍼드의 어린 자녀들의 대부가 되었다. 스태퍼드는 2019년 10월 레오노프의 장례식에서 러시아어로 추도사를 낭독했다.

2.5. 우주비행사 훈련 및 지도
1976년부터 1982년까지 레오노프는 우주비행사 팀의 사령관("수석 우주비행사")을 맡았으며, 유리 가가린 우주비행사 훈련 센터의 부소장으로서 승무원 훈련을 감독했다. 그는 또한 우주비행사 소식지 《넵튠》의 편집장을 지냈다. 1992년에 그는 은퇴했다.
3. 예술 활동
레오노프는 탁월한 예술가였으며, 그의 출판된 저서 중에는 자신의 예술 작품집과 친구 안드레이 소콜로프와 협력하여 작업한 작품집이 포함되어 있다. 레오노프는 우주에 색연필과 종이를 가지고 가서 지구를 스케치하며 최초의 우주 예술가가 되었고, 1975년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서 함께 비행한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아서 C. 클라크는 1982년 소설 《2010: 오디세이 2》의 서문에 1968년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사회 후 레오노프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달, 지구, 태양의 배열이 레오노프의 1967년 회화 《달 근처》와 본질적으로 같다고 지적했다고 언급했다. 클라크는 시사회 후 레오노프가 그려준 이 그림의 사인된 스케치를 자신의 사무실 벽에 걸어두었다. 클라크는 《2010: 오디세이 2》를 레오노프와 소련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에게 헌정했으며, 소설 속 가상의 우주선 이름도 '코스모노트 알렉세이 레오노프(Cosmonaut Alexei Leonov)'이다.
레오노프는 발렌틴 셀리바노프와 함께 1980년 SF 영화 《오리온 루프》의 각본을 썼다. 그는 또한 스티븐 호킹을 위한 스티븐 호킹 과학 커뮤니케이션 메달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 메달은 스탈머스 페스티벌에 의해 2015년부터 음악, 예술,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 지식 보급에 기여한 업적에 수여된다. 우주비행사가 그린 호킹의 초상화가 메달 앞면에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는 레오노프의 첫 우주 유영과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가 그려져 축제의 두 가지 주요 요소를 상징한다. 레오노프는 메이와 긴밀히 협력하여 뒷면 디자인을 완성했다.
그는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으며, 1980년 방영된 NHK 교육 텔레비전 스페셜 《인간은 무엇을 만들어왔는가 교통박물관의 세계》의 '로켓' 편에서는 소련 로켓 개발사의 소개자 역할로 출연하기도 했다.
4. 후기 생애 및 활동
레오노프는 은퇴 후에도 사회 및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공공 프로젝트에 기여했다.
4.1. 사회 및 정치 활동
레오노프는 1991년 군에서 은퇴했으며, 1992년 3월부터는 예비역으로 활동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체테크(Chetek)사의 우주 프로그램 이사를 지냈다. 그는 모스크바에 본사를 둔 알파뱅크 이사회 제1부의장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2001년에는 알파뱅크의 부총재를 역임했다. 2002년 12월 18일부터는 통합 러시아당의 당원으로, 당 최고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4년, 레오노프는 전 미국 우주비행사 데이비드 스콧과 함께 미국과 소련 간의 우주 경쟁 역사를 다루는 회고록 《두 달의 양면: 냉전 우주 경쟁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의 작업을 시작했으며, 이 책은 2006년에 출판되었다. 닐 암스트롱과 톰 행크스가 이 책의 서문을 썼다.
1990년부터 사망 시까지 레오노프는 우주 내 평화의 깃발 프로젝트의 책임자를 맡았다. 그는 2007년 콜린 버지스와 프랜시스 프렌치의 저서 《그 조용한 바다 속으로》에서 프랜시스 프렌치와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5. 개인 생활
레오노프는 스베틀라나 파블로브나 도젠코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첫째 딸은 옥사나이며, 다른 딸인 빅토리아는 1996년에 사망했다. 그는 두 명의 손주를 두었다.
6. 사망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오랜 투병 끝에 2019년 10월 11일 모스크바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10월 15일에 거행되었으며, 토머스 P. 스태퍼드가 러시아어로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는 사망 당시 보스호트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5명의 우주비행사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7. 유산 및 영향력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우주 탐사의 선구자로서 그가 남긴 업적과 사상, 활동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기념되고 평가받고 있다.
7.1. 수상 및 영예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그의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아 수많은 국내외 상과 훈장을 받았다.
소련/러시아 상
- 두 차례 소련 영웅 (1965년 3월 23일, 1975년 7월 22일)
- 두 차례 레닌 훈장 (1965년 3월 23일, 1975년 7월 22일)
- 소련 우주비행사-파일럿 (1965년)
- 소련 스포츠 공로 마스터 (1965년)
- 적성 훈장 (1961년)
- 소련 군대 조국 공헌 훈장, 3급 (1975년)
- 1941-1945년 대조국전쟁 승리 20주년 기념 메달
- 소련군 40주년 기념 메달
- 소련군 50주년 기념 메달
- 소련군 60주년 기념 메달
- 소련군 70주년 기념 메달
- 소련군 참전 용사 메달
- 무결점 복무 메달, 1, 2, 3급
- 레닌 콤소몰 상 (1980년)
- 소련 국가상 (1981년)
- 조국 공헌 훈장, 4급 (2000년 3월 2일)
- 우정 훈장 (2011년 4월 12일)
- 조국 공헌 훈장, 3급 (2014년 5월 22일)
- 조국 공헌 훈장, 1급 (2019년 5월 29일)


외국 상
- 사회주의 노동 영웅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1965년)
-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훈장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1965년)
- 아르투르 베커 메달 (동독, 1965년)
- 카를 마르크스 훈장 (동독, 1965년)
- 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 훈장 (1965년)
- 노동 영웅 (베트남 민주 공화국, 1966년)
- 시리아 아랍 공화국 시민 공로 훈장, 1급 (시리아, 1966년)
- 공로 훈장, 3급 (우크라이나, 2011년)
공공 기관 상 및 명예
- 1976년 국제항공연맹 (FAI) 금 우주 메달. FAI는 토머스 P. 스태퍼드도 함께 수상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었다.
- 국제 우주 명예의 전당 (1976년)
- 국제 항공 우주 명예의 전당 (2001년), 발레리 쿠바소프, 밴스 D. 브랜든, 디크 슬레이턴, 토머스 P. 스태퍼드와 함께 헌액.
- 루트비히 노벨상 (2007년)
- 엘머 A. 스페리 상 (미국, 2008년), 콘스탄틴 부슈예프, 토머스 P. 스태퍼드, 글린 룬니와 함께 수상.
-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 기사단 연합의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 기사단 훈장
- '소련 영웅 및 러시아 연방 영웅 재단'의 '황금별' 훈장
- '조국의 자랑 재단'의 '러시아의 자랑' 훈장 (2007년)
- '국제 사회 과학 아카데미 및 국제 후원 아카데미'의 '러시아 영광' 부문 국가 상 '조국의 영광' (2008년)
- '조국의 영광' 훈장, 2급 (2008년)
- 2011년 스탈머스 국제 과학, 우주, 음악 축제의 공동 설립자이자 이사회 멤버. 천체물리학자 가리크 이스라엘랸, 밴드 퀸의 음악가 브라이언 메이, 과학 교육자 스티븐 호킹, 여러 우주비행사와 노벨상 수상자들과 함께 활동했다.


기타 수상 및 칭호
- 러시아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으로부터 성 안나 훈장 3급 사령관 (2008년)
- 러시아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으로부터 성 안나 훈장 2급 사령관 (2011년)
-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 명예 회원
7.2. 문화적 영향
- 레오노프는 시베리아 야생동물, 특히 곰과 늑대에 대한 염려 때문에 착륙 후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조종사들이 소지하는 TP-82 우주비행사 생존 권총 개발에 영감을 주었다. 이 총은 1986년부터 2007년까지 우주비행사 탐사에 정기적으로 휴대되었다.
- 1970년 달의 뒷면 모스크바의 바다 근처에 위치한 레오노프 충돌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981년에 처음 관측된 9533 알렉세이레오노프 소행성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982년 아서 C. 클라크의 저서 《2010: 오디세이 2》에서 소련 우주선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이 우주비행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책은 레오노프와 안드레이 사하로프에게 헌정되었다.
- 2017년 영화 《최초의 시간》(Vremya Pervykh러시아어)은 레오노프의 보스호트 2호 임무에 대한 증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레오노프는 예브게니 미로노프가 연기했다. 그는 이 영화의 기술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감독은 가가린이 등장하는 약 40분 분량의 장면을 모두 잘라내어 레오노프가 영화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 퍼블릭 서비스 브로드캐스팅의 2015년 앨범 《우주 경쟁》에 수록된 노래 "E.V.A."는 우주에서 선외활동을 수행한 최초의 인간이 된 레오노프를 언급한다.
- 2019년 대체 역사 텔레비전 시리즈 《포 올 맨카인드》에서 레오노프는 달에 착륙한 최초의 인물로 묘사된다.
- 블랙웰드(BlackWeald)의 2020년 앨범 《레오노프》는 보스호트 2호 임무를 다크 앰비언트로 해석한 작품이다.
- 존 그린의 에세이 "궤도 일출(Orbital Sunrise)"은 레오노프가 1965년 임무 중에 그린 스케치에 초점을 맞춘다. 이 에세이는 2021년 8월 26일 그린의 팟캐스트 《인류세 리뷰드》의 일부로 공개되었으며, 나중에 브이로그브라더스 유튜브 채널에 별도로 게시되고 《인류세 리뷰드》 책에 포함되었다.
- 2022년 스탈머스 페스티벌에서 알렉세이 레오노프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내면의 우주(Space Inside)》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영화는 우주비행사의 딸 옥사나 레오노바가 소개했으며, 선구자의 마지막 인터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7.3. 과학 커뮤니케이션 및 국제 협력
레오노프는 1985년 러스티 슈와이카트와 함께 우주 탐험가 협회를 설립했다. 이 협회는 지구 궤도를 비행한 모든 사람에게 회원 자격을 부여한다. 그는 또한 스탈머스 페스티벌의 공동 설립자이자 이사회 멤버로서 과학 지식의 대중화와 국제 협력을 통한 평화 증진에 기여했다.
8. 관련 항목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암살 미수 사건 (모스크바, 1969년): 총격범이 레오노프와 다른 우주비행사들을 태운 리무진에 14발의 총격을 가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