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인도에서의 활동
친모이는 인도 동벵골 치타공구 샤크푸라 마을(현 방글라데시)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적인 탐구에 몰두했으며, 이후 인도 남부의 한 아쉬람에서 20년간 영적 수행에 전념했다.
1.1. 인도에서의 어린 시절과 교육
친모이 쿠마르 고쉬는 1931년 8월 27일 영국령 인도 동벵골 치타공구 샤크푸라 마을(현재의 방글라데시 보알칼리 우파질라)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샤시 쿠마르 고쉬(Shashi Kumar Ghose영어)는 전직 철도 검표원 출신의 은행가였고, 어머니 요가마야 고쉬(Yogamaya Ghose영어)는 독실한 주부였다. 친모이는 11세 때부터 명상을 시작했다. 1943년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고 몇 달 뒤 어머니마저 잃어 고아가 되었다. 1944년 12세가 되던 해, 그는 이미 그곳에 정착해 있던 형 흐리다이(Hriday영어)와 치타(Chitta영어)를 따라 형제자매들과 함께 폰디체리에 있는 스리 오로빈도 아쉬람에 합류했다. 그의 이름 '친모이'는 '신성한 의식으로 가득 찬'이라는 뜻으로, 형 치타가 지어준 이름이다.
1.2. 스리 오로빈도 아쉬람에서의 수행
아쉬람에서 친모이는 다음 20년을 영적 수행에 전념했다. 여기에는 명상, 벵골 문학과 영문학 연구, 육상 경기, 그리고 아쉬람의 가내 수공업장에서의 노동이 포함되었다. 10대와 20대에는 단거리 선수이자 십종경기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친모이는 약 8년간 아쉬람의 총무인 놀리니 칸타 굽타의 개인 비서로 일하며, 그의 벵골어 저술을 영어로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인도의 영적 스승들에 대한 글을 발표하고, 자신의 노트에 시와 노래, 아쉬람 생활에 대한 감상을 꾸준히 기록했다.
2. 서구로의 이주 및 활동 확장
1964년, 친모이는 서구 사회에 영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뉴욕에 정착하여 강연 활동을 시작했고, 전 세계적으로 명상 센터를 설립하며 자신의 가르침을 확장해 나갔다.
2.1. 미국 이주 및 초기 활동
1964년 4월 13일, 33세의 친모이는 "내면의 메시지"에 따라 영적 성취를 찾는 서구인들을 돕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라는 영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스리 오로빈도 아쉬람과 연계된 샘 스패니어, 에릭 휴즈 등 미국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뉴욕시로 건너왔다. 정규 교육은 부족했지만, 그는 인도 영사관의 하급 서기직에 지원하여 LL 메헤로트라(LL Mehrotra영어)의 지도를 받으며 여권 및 비자 발급 부서의 보조원으로 일했다. 그는 동료와 상사들의 지지와 격려를 받았고, 힌두교에 대한 강연을 요청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여러 대학에서 강연을 시작했고, 이후 유엔에서도 강연을 이어갔다.
1965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에 초청되어 아시아 협회의 후원 아래 세 곡을 연주했다. 같은 해 후반에는 월간지 'AUM'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966년 7월 22일, 그는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 첫 번째 '스리 친모이 센터'를 설립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스리 친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걸쳐 스리 친모이는 미국 전역의 대학에서 영적 주제에 대한 강연을 계속했다. 1974년에는 50개 주 50개 대학에서 강연을 진행했으며, 이 강연들은 '하나의 황금 해안으로 가는 50척의 자유의 배'라는 제목의 6부작 책으로 출판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유럽, 아시아, 호주를 여행하며 대학에서 강연을 했고, 이는 '동양의 심장과 서양의 정신의 일체성'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또한 책, 에세이, 영적 시, 희곡, 베다 주석 등을 출판했다.
2.2. 국제적 확장 및 센터 설립
1970년대 후반까지 스리 친모이의 주요 연구 센터는 뉴욕, 플로리다, 서인도 제도에 있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미국, 유럽, 호주, 남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전 세계 여러 도시에 스리 친모이 센터가 설립되어 총 350개에 달하는 센터를 운영하게 되었다. 1973년 뉴욕 타임스는 스리 친모이가 "최고의 의식 수준인 니르비칼파 사마디에 도달한 몇 안 되는 성인 중 한 명으로 인도에서 존경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1970년대 동안 친모이는 플루트와 에스라지를 연주하고 작곡하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전 세계에서 무료 '평화 콘서트'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첫 콘서트는 몬트리올에서 1만 9천 명의 관객을 대상으로 열렸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스리 친모이는 카를로스 산타나, 존 매클러플린, 나라다 마이클 월든, 로버타 플랙, 클래런스 클레먼스,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와 같은 음악가들을 추종자로 끌어들였다. 스리 친모이는 이 음악가들에게 알코올을 포함한 기분전환용 약물 사용을 금지하고, 음악과 시를 신성한 존재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장려하는 규율 있는 영적 길을 제시했다.
산타나와 매클러플린은 스리 친모이와 수년간 함께했다. 1973년, 그들은 스리 친모이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앨범 '사랑 헌신 항복'을 발표했다. 매클러플린은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스리 친모이의 추종자였으며, 스리 친모이가 지어준 영적 이름인 '마하비슈누'를 따서 마하비슈누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다. 매클러플린은 산타나를 스승에게 소개했고, 산타나와 그의 아내 데보라는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친모이의 추종자였다. 산타나는 "스승 없이는 오직 나의 허영심만을 섬기지만, 스승과 함께라면 당신과 모두에게 봉사할 수 있다. 나는 현(弦)이지만, 그는 음악가이다. 스승은 의식의 하버드를 졸업하고 신의 발치에 앉아 있다"고 말했다. 친모이가 그에게 '데바딥'(Devadip영어, '신의 등불', '신의 눈', '신의 빛'을 의미)이라는 영적 이름을 부여한 후, 산타나는 '일루미네이션스'(1974), '일체성'(1979), '환희의 스윙'(1980) 세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2000년, 그는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1980년대에 친모이와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밝혔다. 산타나는 스승과 함께한 세월에서 많은 좋은 것을 얻었지만, 떠날 때 스리 친모이가 "잠시 동안 복수심에 불타, 내가 그를 떠났으니 친구들에게 다시는 나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2017년 산타나는 롤링 스톤에 "그 영적 스승과 함께 보낸 10년에 정말 감사한다"고 말했다.
영적 스승 프레더릭 렌츠는 1972년경 친모이의 추종자가 되었으나, 1981년 스리 친모이와 결별하고 스스로 스승이 되었다. 영적 작가 렉스 힉슨도 1970년대 스리 친모이 센터의 회원이었다.
스리 친모이는 마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식을 확장함으로써 '자기 초월'을 옹호했으며, 이는 운동 능력에도 적용되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육상 선수 칼 루이스는 스리 친모이의 조언을 받았다. 그는 스리 친모이에게서 명상을 배웠고, 그 기술을 꾸준히 실천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루이스는 스리 친모이와의 관계가 자신의 기독교 신념을 강화하는 영적 성취의 한 단계였다고 말했다. 2011년 루이스는 친모이가 시연한 힘의 위업을 다룬 단편 다큐멘터리 '불가능에 도전하다'에 출연했다.
스리 친모이 마라톤 팀 웹사이트에 따르면, 팀원들은 영국 해협을 40회 이상 횡단했다. 친모이가 후원하는 다른 운동 행사로는 울트라마라톤 (예: 자기 초월 3100마일 레이스), 등산, 장거리 사이클링 등이 있다. 150개 이상의 기네스 세계 기록을 보유한 아슈리타 퍼먼은 2010년에 "스리 친모이에게 배운 명상이 자신의 기대를 뛰어넘는 성과를 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1987년 스리 친모이는 '스리 친모이 일체성 가정 평화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는 세계 여러 나라를 거쳐 평화를 위한 릴레이 달리기이며, 주자들이 조화를 상징하는 불타는 횃불을 들고 달린다. 스리 친모이는 이 개념을 "평화를 위한 풀뿌리 노력"이라고 묘사했다. 평화 달리기의 '일체성 가정' 주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행성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시민이라는 것이다.
1991년 스리 친모이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보내는 '일체성 심장 눈물과 미소' 인도주의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7년 기준으로 136개국에 봉사한 이 조직은 스리 친모이 센터 회원들이 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와 성인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배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조직은 NGO 또는 정부와 협력하며, 수혜국에 보건, 의료, 교육 용품을 제공한다. 5개 대륙의 보건 전문가와 민간 자원봉사자들이 재난 구호, 지역 개발, 보건 및 의료 용품 제공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아이들을 위한 아이들' 프로그램은 학교 어린이들이 다른 지역의 소외된 어린이들을 위해 학용품과 장난감 꾸러미를 준비하도록 장려한다.

친모이는 평화를 위해 많은 활동과 자신이 설립한 행사에 헌신하며 여행했다. 그는 세계적인 인물들과 만났고, 평화의 대사로 묘사되었다. 친모이는 테레사 수녀를 다섯 번 만났다. 1994년 10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두 번째 만남에서 스리 친모이는 테레사 수녀에게 상을 수여했다. 시상식에서 테레사 수녀는 스리 친모이에게 "세계 평화와 많은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좋은 일에 매우 기쁩니다. 우리가 계속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며 모든 것을 신의 영광과 인류의 선을 위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친모이는 1997년 5월 21일 켄싱턴 궁전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영적 지도나 음악 공연에 대해 수수료를 받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종교와 종교 지도자들을 존중했다. 그는 평생 동안 약 7,000명의 제자를 끌어모았다. 그의 길은 요가의 현대적인 영적 체계로, 구루 또는 영적 스승의 지도 아래 수행되었다. 친모이는 결혼한 신도와 미혼 신도 모두에게 브라흐마차리야 (금욕)를 옹호했으며, 쾌락보다는 내면의 영적 기쁨을 경험하는 데 집중할 것을 권장했다. 1987년 '힌두교 투데이' 기사에 따르면, 친모이는 요가 영적 스승으로서 미혼의 금욕주의자였다. 다른 오래된 전통과는 달리, 친모이는 영적 발전을 위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점진적이고 완전한 삶의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3. 철학 및 가르침
스리 친모이는 사랑, 헌신, 항복의 길을 따름으로써 영적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신성한 사랑을 자기 희생과 자기 확대로 묘사했다.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실천하는 이러한 길은 박티 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길은 세속적인 포기나 금욕주의가 아니라, 구도자가 신성한 존재와의 합일에 방해가 되는 부정적인 특성들을 포기하거나 변화시킬 기회를 갖는 중도였다. 친모이는 마음에 대한 명상이 영혼의 빛을 앞으로 이끌어 가능한 한 빨리 가장 높은 현실에 도달하게 한다고 가르쳤다.
친모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구도자이며, 우리의 목표는 동일하다. 내면의 평화, 빛, 기쁨을 얻고, 우리의 근원과 불가분하게 하나가 되어, 진정한 만족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이다."
3.1. 자기 초월
스리 친모이 가르침의 핵심 요소는 '자기 초월'의 이해이다. 자기 초월은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우리의 이전 능력과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는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자기 초월은 다른 세상과 경쟁하기보다는 더 나은 인간이 됨으로써 삶에서 진보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친모이는 우리가 영적으로 무한하다고 믿었다.
스리 친모이는 자신의 철학이 삶의 수용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의와 영감을 나누고 인류에게 봉사함으로써 세상은 변화하고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채식주의 식단을 채택하고, 알코올 음료를 포함한 기분전환용 약물을 삼가며, 순수하고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따르도록 요청했다. 비록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길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국제적인 구도자 공동체에 맞춰져 있었다.
3.2. 명상과 영적 수행
스리 친모이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침묵하게 하며, 마음의 생각을 정화하고 영적인 심장에 명상하는 등 다양한 명상 기법을 가르쳤다. 친모이는 마음을 10분에서 15분 동안 고요하고 조용하게 유지함으로써 새로운 경험이 내면에서 나타나기 시작할 수 있으며,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이 수행이 모든 영적 진보의 뿌리라고 설명한다.
스리 친모이는 매일 활동을 시작하기 전, 이른 아침의 고요한 분위기에서 명상할 것을 권장했다. 전통적인 신의 시간인 오전 3시에서 4시 사이, 즉 '브라흐마 무후르타'가 서구 생활 방식에 맞지 않을 수 있으므로, 명상 초보자들에게는 이상적으로 오전 7시 이전에 명상할 것을 권했다. 스리 친모이는 기도와 명상 모두 중요하지만, 그 결과에는 차이가 있다고 가르쳤다. 기도는 신에게 나아가 그분께 말하는 과정이며, 명상은 신의 존재가 우리를 감싸고 우리와 소통할 수 있도록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수행이다. 그는 또한 명상을 준비하거나 명상 후 명상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영적인 글을 읽거나 심오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유용하다고 가르쳤다. 친모이는 달리기와 신체 단련이 내면의 영적 삶뿐만 아니라 외적인 활동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으며, 추종자들에게 매일 달리기를 권장했다. 스리 친모이는 달리기의 이점을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마음을 맑게 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는 또한 외적인 명상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느꼈다.
3.2.1. 유엔에서의 평화 명상
1970년, 스리 친모이는 유엔 대표단, 직원, NGO 대표들을 위해 주 2회 유엔에서 초교파적인 평화 명상을 시작했다. 1976년 그는 "유엔의 사상은 보편적인 평화와 보편적인 형제애이며, 유엔의 이상은 하나의 세계 가족과 하나의 심장이다"라고 말했다.
유엔 직원과 외교관들이 많이 참석했던 평화 명상을 37년간 이끈 후, 2007년 그의 사망 후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서 700명 이상의 유엔 관계자, 대사, 미국 의회 의원, 다양한 종교 대표들이 친모이에게 경의를 표했다. 유엔 행사에서 전 유엔 사무총장 우 딴의 딸인 도 에이 에이 딴(Daw Aye Aye Thant영어)은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72년 4월 스리 친모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희 아버지는 '당신은 이곳의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우리 둘 다 소중히 여기는 도덕적, 영적 가치를 진정으로 심어주셨습니다. 저는 유엔에서 당신과 만났던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항상 소중히 간직할 것입니다.' ... 저는 스리 친모이를 알고 여러 번 그의 곁에 있었으며, 그 그룹의 많은 구성원들을 알게 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3.3. 신앙과 종교관
스리 친모이 가르침의 핵심적인 부분은 다른 길과 종교에 대한 존중이다. 스리 친모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진정한 종교는 보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종교의 흠을 찾지 않는다. ... 용서, 연민, 관용, 형제애, 그리고 일체감은 진정한 종교의 표징이다.
스리 친모이의 종교 간 화합 증진 노력은 그가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종교 의회(1993년)와 바르셀로나(2004년)에서 침묵 명상으로 개회사를 맡도록 이끌었다. 2004년 개회 명상에서 그는 "나의 개회 명상 동안 나는 모든 종교의 일체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리 친모이는 자신이 힌두교 전통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종교는 "신의 사랑"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4. 주요 활동 및 기여
스리 친모이는 평화 증진, 예술 활동, 스포츠 및 육체 단련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사회와 문화에 크게 기여했다.
4.1. 평화 증진 활동
1987년 스리 친모이는 '스리 친모이 일체성 가정 평화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는 여러 나라를 거쳐 평화를 위한 릴레이 방식으로 진행되는 달리기이며, 주자들이 조화를 상징하는 불타는 횃불을 들고 달린다. 스리 친모이는 이 개념을 "평화를 위한 풀뿌리 노력"이라고 묘사했다. '일체성 가정'이라는 평화 달리기의 주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행성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시민이라는 것이다. 평화 달리기는 일반적으로 2년마다 개최되며, 첫 번째는 1987년 4월 뉴욕시 세계 무역 센터 (1973년-2001년)에서 시작되었다. 이 평화 달리기의 전신은 1976년 '자유의 횃불 달리기'였다. 이 릴레이 경주에서는 33명의 주자가 7주 동안 50개 주를 거쳐 1.42 만 km를 달리며 미국의 건국 200주년을 기념했다. 릴레이의 마지막 주자는 뉴욕시에서 당시 에이브러햄 빔 시장의 영접을 받았다. 빔 시장은 1976년 8월 16일을 "자유의 횃불의 날"로 선포했다. 친모이의 모든 평화 선도 활동은 어떤 항의나 정치적 운동을 포함하지 않았다. 단지 "평화는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평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류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만 주력했다。
1991년 스리 친모이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보내는 '일체성 심장 눈물과 미소' 인도주의 서비스를 시작했다。2007년 기준으로 136개국에 봉사한 이 조직은 스리 친모이 센터 회원들이 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와 성인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배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이 조직은 NGO 또는 정부와 협력하며, 수혜국에 보건, 의료, 교육 용품을 제공한다。5개 대륙의 보건 전문가와 민간 자원봉사자들이 재난 구호, 지역 개발, 보건 및 의료 용품 제공 프로그램에 참여한다。'아이들을 위한 아이들' 프로그램은 학교 어린이들이 다른 지역의 소외된 어린이들을 위해 학용품과 장난감 꾸러미를 준비하도록 장려한다。

친모이는 평화를 위해 많은 활동과 자신이 설립한 행사에 헌신하며 여행했다。그는 세계적인 인물들과 만났고, 평화의 대사로 묘사되었다。친모이는 테레사 수녀를 다섯 번 만났다。1994년 10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두 번째 만남에서 스리 친모이는 테레사 수녀에게 상을 수여했다。시상식에서 테레사 수녀는 스리 친모이에게 "세계 평화와 많은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좋은 일에 매우 기쁩니다。우리가 계속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며 모든 것을 신의 영광과 인류의 선을 위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친모이는 1997년 5월 21일 켄싱턴 궁전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영적 지도나 음악 공연에 대해 수수료를 받지 않았다。그는 세상의 모든 종교와 종교 지도자들을 존중했다。그는 평생 동안 약 7,000명의 제자를 끌어모았다。그의 길은 요가의 현대적인 영적 체계로, 구루 또는 영적 스승의 지도 아래 수행되었다。친모이는 결혼한 신도와 미혼 신도 모두에게 브라흐마차리야 (금욕)를 옹호했으며, 쾌락보다는 내면의 영적 기쁨을 경험하는 데 집중할 것을 권장했다。1987년 '힌두교 투데이' 기사에 따르면, 친모이는 요가 영적 스승으로서 미혼의 금욕주의자였다。다른 오래된 전통과는 달리, 친모이는 영적 발전을 위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점진적이고 완전한 삶의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4.2. 예술 활동

스리 친모이는 1974년 캐나다 오타와를 방문하던 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그는 자신의 작품을 벵골어로 "분수 예술"을 의미하는 "자르나 칼라"(Jharna Kala벵골어)라고 불렀다。친모이의 작품은 보편적인 일체성과 보편적인 평화라는 주제에서 영감을 받았다。그의 추상화는 아크릴과 펜 드로잉이 혼합된 형태이다。스리 친모이는 다양한 스펀지, 붓, 색상을 사용하여 활력, 강한 움직임, 리듬이 있는 신비로운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다。스리 친모이는 그림을 그릴 때 명상의 고요함 속에서 창의성의 흐름을 발견하며, 내면의 영감 또는 '빛의 줄기'를 따라간다고 말했다。
1991년 12월, 친모이는 "꿈-자유-평화-새" 또는 '영혼의 새'라는 제목의 새로운 예술 작품 시리즈를 시작했다。새 그림은 종종 단순한 선과 같은 스케치로, 한 마리의 새 또는 일부 그림에서는 하나의 큰 그림 안에 수백 마리의 새가 그려져 있다。스리 친모이는 영혼의 새 그림이 자유를 향한 인류의 마음의 외침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파리 유네스코 사무실,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몰 갤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 미술 박물관,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유엔 본부에 전시되었다。

추종자들에 따르면, 스리 친모이는 주로 벵골어와 영어 가사로 수천 곡의 짧은 음악 작품을 작곡했다。이 중 많은 곡들이 스리 친모이 송즈(가사 및 악보)와 라디오 스리 친모이(오디오)에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아래 온라인으로 공개되었다。그는 자메이카의 스튜디오 원의 자회사 레이블인 포트-오-잼에서 두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1976년, 스리 친모이는 포크웨이즈 레코드에서 '명상을 위한 음악'이라는 명상 앨범을 발매했다。
스리 친모이는 또한 수백 차례의 평화 콘서트를 열었으며, 그 중 다수는 무료였다。그는 런던 로열 앨버트 홀, 뉴욕 링컨 센터와 카네기 홀, 도쿄 일본무도관, 파리 에펠탑,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등 전 세계 여러 장소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스리 친모이는 콘서트에서 플루트, 에스라지, 피아노, 첼로 등 다양한 동서양 악기를 연주했다。
스리 친모이 센터에 따르면, 스리 친모이는 12만 편의 시를 포함하여 1,300권 이상의 책을 출판했다。이 시들 중 다수는 "우리가 감히 시도하고 믿음을 가질 용기만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무한하다"와 같은 짧지만 완전한 영적 격언이다。친모이는 또한 더 길고 고전적인 스타일의 시집을 여러 권 출판했다。2001년, 친모이는 유엔이 후원하는 "시를 통한 문명 간 대화" 행사의 일환으로 유엔에서 자신의 시를 낭송했다。
스리 친모이의 글은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투투 대주교는 "나의 친애하는 친구 스리 친모이가 쓴 이 달콤한 지혜의 보석들은 격려, 사랑, 선함으로 가득 찬 시대를 초월한 진리이다。이 장들은 우리에게 굴하지 않는 희망과 삶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어 준다"고 썼다。
4.3. 스포츠 및 육체 단련
1977년 스리 친모이 마라톤 팀이 창설되었다。이 팀은 전 세계적으로 펀 런부터 울트라마라톤에 이르는 달리기, 수영, 사이클링 행사를 개최한다。1985년 스리 친모이는 당시 옥스퍼드 시장과 함께 첫 번째 "스리 친모이 평화 마일"을 개설했다。이는 컷슬로우 공원, 옥스퍼드에 있는 측정된 마일 코스로, 조깅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진행 상황을 측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현재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평화 마일"이 존재한다。
스리 친모이의 많은 추종자들은 건강과 신체 단련을 위해 매일 달린다。스리 친모이 자신도 60대까지 경주에 참가했으나 무릎 부상으로 달리기가 어려워진 후에는 테니스와 역도로 관심을 돌렸다。스리 친모이는 또한 매년 4월 퀸스에서 동시에 열리는 자기 초월 6일 및 10일 레이스와 뉴욕 타임스가 "울트라마라톤의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묘사한 자기 초월 3100마일 레이스를 설립했다。자기 초월 마라톤은 뉴욕시 북쪽 콩거스, 뉴욕에 위치한 록랜드 호수 주립공원 주변에서 열리는 마라톤이다。2002년에 시작된 이 행사는 약 900명의 국제 주자들을 끌어모으며, 8월 마지막 주에 개최된다。

스리 친모이는 1985년 54세의 나이에 역도를 시작했다。그의 역도에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고안된 다양한 물체와 기계가 포함되었다。그의 역도 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마음의 한계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이었다。전 미스터 유니버스 빌 펄은 친모이의 많은 역도 시연에서 사회를 맡았다。1999년 친모이의 역도 시연을 소개하며 빌 펄은 다음과 같이 썼다。"오늘 여러분은 저 자신도 55년간 이 업계에 있었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을 놀라운 힘의 위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친모이는 역도를 하는 동기가 다른 사람들, 특히 노년층에게 영감을 주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1998년에 시작된 '일체성 심장으로 세상을 들어 올리기'라는 프로그램에서 스리 친모이는 머리 위 플랫폼에 서 있는 유명 인사들을 들어 올렸다。스리 친모이는 "그들의 업적에 대한 나의 감사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을 들어 올린다"고 말했다。그가 들어 올린 약 7,000명 중에는 넬슨 만델라, 데즈먼드 투투, 무하마드 알리, 스팅, 에디 머피, 수전 서랜던, 로버타 플랙, 오노 요코, 제프 골드블룸, 리처드 기어, 헬렌 헌트 등이 포함되었다。20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스모 선수 팀도 들어 올려졌다。
2011년 4월, 스리 친모이의 역도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불가능에 도전하다'가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텍사스 대학교 운동학 교수인 테리 토드는 스리 친모이가 자신이 완료했다고 주장한 일부 역도의 종류와 무게를 잘못 표현했다고 결론 내렸다。
5. 개인적인 삶
스리 친모이는 결혼한 신도와 미혼 신도 모두에게 브라흐마차리야 (금욕)를 옹호했으며, 쾌락보다는 내면의 영적 기쁨을 경험하는 데 집중할 것을 권장했다. 1987년 '힌두교 투데이' 기사에 따르면, 친모이는 요가 영적 스승으로서 미혼의 금욕주의자였다.
전 추종자인 자얀티 탐의 회고록에 따르면, 친모이는 성관계를 금지했으며, 대부분의 제자들은 독신으로 지내도록 지시받았다.
6. 비판 및 논란
스리 친모이의 활동과 사상에 대해 일부 비판과 논란이 제기되었다. 특히 전직 추종자들과 언론은 그의 단체를 컬트로 지목하고 특정 주장을 제기했다.
6.1. 컬트 의혹 및 비난
친모이 그룹은 일부 전직 회원들을 포함한 이들에게 '컬트'라는 비난을 받았다. 1994년 출판된 책 '종파의 기쁨'에는 "일부 추종자들이 친모이가 제자들의 아내에게 성적인 접근을 했다는 비난 속에서 떠났다"고 기술되어 있다. 2005년과 2014년에는 '샌디에이고 시티비트'와 '살롱닷컴'이 각각 부적절한 성적 행위를 주장하는 다른 여성 전직 제자들의 프로필을 게재했다. 2016년 2월 뉴욕의 PIX 11 뉴스는 친모이에 대한 두 개의 보도에서 한 전직 추종자가 성적 부적절성을 주장한 반면, 다른 이들은 친모이를 칭찬했고 스리 친모이 센터 대변인은 서면 답변을 통해 "우리 설립자이자 스승인 스리 친모이는 최고의 순수성과 청렴한 삶을 살았다"고 밝혔다. 스리 친모이는 어떤 범죄로도 기소되거나 고발된 적이 없으며, 그의 변호사는 2004년 당시의 주장을 부인했다.
2009년 자얀티 탐(Jayanti Tamm영어)은 친모이의 제자로 성장한 삶에 대한 회고록 '사리 속의 수레바퀴: 컬트에서 자란 회고록'을 출판했다. 친모이의 조직에서 태어난 탐은 친모이가 자신이 그의 완벽한 제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25세에 그룹에서 추방되었다. 이 책은 구루의 핵심 측근에서 보낸 그녀의 삶과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묘사한다. 책에 따르면, 친모이는 성관계를 금지했고, 대부분의 제자들은 독신으로 지내도록 지시받았다. 이 책은 또한 구루가 세속 교육을 경시했으며, 그의 금지 사항에는 알코올, 카페인, 육류 섭취, 춤, 데이트, 외부인과의 교류, 반려동물 소유 등이 포함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친모이는 퀸스 지하에 이국적인 반려동물 컬렉션을 소유하고 있었다. 탐은 그러나 전 세계의 다른 7,000명의 추종자들과 친모이를 만났던 다른 사람들은 다른 경험과 인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한다.
6.2. 자기 홍보 및 기타 비판
일부 언론인과 전직 추종자들은 스리 친모이의 '강박적이거나 공격적인 자기 홍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텍사스 대학교 운동학 교수인 테리 토드는 스리 친모이가 자신이 완료했다고 주장한 일부 역도의 종류와 무게를 잘못 표현했다고 결론 내렸다.
7. 수상 및 인정
스리 친모이는 평화 증진, 인도주의적 활동, 예술 및 영적 지도력에 대한 공로로 수많은 상과 명예를 받았다.
- 비슈바 사마 두타(Visva Sama Duta영어): 1990년 아스기리야 불교 승려단이 수여한 "보편적 평화의 대사"라는 칭호로, 스리랑카 역사상 비불교인으로는 처음으로 이러한 명예 학위를 받았다.
- 마하트마 간디 보편적 화합상: 1994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미망인 코레타 스콧 킹과 공동으로 인도 문화 연구소 바라티야 비디아 바반의 미국 지부로부터 수상했다.
- 프레드 레보 상: 1996년 뉴욕시 마라톤 창립자의 이름을 딴 상으로, 뉴욕시 마라톤 감독 알란 스타인펠드와 로마 마라톤 회장 움베르토 실베스트리가 수여했다.
- 올해의 힌두인 (1997) 및 힌두 르네상스 상: 1997년 국제 잡지 '힌두교 투데이'가 수여했으며, 고대 힌두교의 측면을 현대적인 환경에서 결합한 요가를 가르친 공로를 인정했다.
- 평화 순례자상: 1998년 '아시시 국제 평화 센터'로부터 수상했다.
- 테레사 수녀 상: 2001년 마케도니아 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가 수여했다.
- 국가 간 평화와 우호 증진을 위한 명예 훈장: 2004년 베트남 유엔 대사 레 르엉 민이 수여했다.
- 평화학 명예 박사 학위: 2005년 캄보디아 국제대학교 과학 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수여했다.
- 2012년 명예의 전당 헌액자: 국제 마라톤 수영 명예의 전당에 스리 친모이 마라톤 팀이 영국 해협을 38회 횡단한 공로를 인정받아 헌액되었다.
8. 사망 및 유산
스리 친모이는 2007년 사망할 때까지 전 세계 수천 명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에게 영적 지도자였다. 그의 사망은 세계적인 애도의 물결을 일으켰으며, 그의 사상과 활동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8.1. 사망
친모이는 2007년 10월 11일 뉴욕 퀸스 자메이카에 있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76세였다.
8.2. 영향력 및 평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그의 죽음이 전 세계의 손실이며, 그는 평생을 평화에 헌신한 인물로 남을 것이라고 썼다. 2007년 11월 1일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사후 추모 행사에는 700명 이상의 유엔 관계자, 대사, 미국 의회 의원, 다양한 종교 대표들이 참석하여 친모이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 행사에서 전 유엔 사무총장 우 딴의 딸인 도 에이 에이 딴은 연설에서 "1972년 4월 스리 친모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희 아버지는 '당신은 이곳의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우리 둘 다 소중히 여기는 도덕적, 영적 가치를 진정으로 심어주셨습니다. 저는 유엔에서 당신과 만났던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항상 소중히 간직할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라고 말했다.
9. 저작 및 작품
스리 친모이는 방대한 양의 저술, 시, 음악, 미술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그의 영적 철학과 세계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
9.1. 저서 및 시
스리 친모이 센터에 따르면, 스리 친모이는 12만 편의 시를 포함하여 1,300권 이상의 책을 출판했다. 이 시들 중 다수는 "우리가 감히 시도하고 믿음을 가질 용기만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무한하다"와 같은 짧지만 완전한 영적 격언이다. 친모이는 또한 더 길고 고전적인 스타일의 시집을 여러 권 출판했다. 2001년, 친모이는 유엔이 후원하는 "시를 통한 문명 간 대화" 행사의 일환으로 유엔에서 자신의 시를 낭송했다.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1972) 일어나라! 깨어나라! 요가의 생각들
- (1974) 요가와 영적 삶
- (1974) 내면의 약속: 자기 완성의 길
- (1974) 사마디와 싯디 - 신의 삶의 정점
- (1974) 삶의 춤 - 1-20권
- (1975) 점성술, 초자연, 그리고 그 너머
- (1977) 에베레스트 열망
- (1977) 영혼의 진화
- (1984) 내면과 외면의 평화
- (1985) 스승과 제자 - 구루-제자 관계에 대한 통찰
- (1986) 아이의 심장과 아이의 꿈
- (1988) 내면 너머
- (1989) 명상: 신의 만족 속 인간 완성
- (1990) 은빛 꿈의 날개 위에
- (1992) 쿤달리니: 어머니의 힘
- (1994) 영혼의 정원
- (1994) 내 삶의 영혼 여행
- (1997) 신은...
- (1997) 환희의 날개: 내면의 평화로 가는 길 찾기
- (1998) 대학 세계로부터의 축복받은 초대
- (2000) 스리 친모이의 지혜
- (2007) 내면의 힘: 영성과 오컬트의 비밀
- (2007) 마음의 정원
- (2009) 스리 친모이가 작곡한 노래 모음집, 1권
- (2010) 행복의 보석들
- (2013) 스포츠와 명상
주요 시집 시리즈는 다음과 같다.
- (1979-1983) 만 개의 꽃-불꽃 (100권)
- (1983-1998) 2만 7천 개의 열망-식물 (270권)
- (1998-2007) 7만 7천 그루의 봉사-나무 (50권... 미완성)
- (1973) 삶의 춤
- (1974) 빛의 날개
- (2000-2007) 나의 크리스마스-새해-휴가-열망-기도 (51권)
그는 또한 여러 희곡을 집필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73) 스리 라마찬드라 - 나의 라마는 나의 전부 - 라마찬드라의 삶에 대한 희곡
- (1973) 영원 너머의 가수 - 크리슈나의 삶에 대한 희곡
- (1973) 싯다르타가 붓다가 되다 - 붓다의 삶에 대한 희곡
- (1973) 아들 -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희곡
- (1973) 가우랑가 경: 사랑의 화신 - 차이타냐의 삶에 대한 희곡
- (1973) 마셔라, 마셔라, 나의 어머니의 감로를 - 라마크리슈나의 삶에 대한 희곡
- (1973) 성인의 심장 - 영적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희곡
- (1973) 최고의 희생 - 영적 희곡 모음집
- (1974) 푸른색의 강림 - 스리 오로빈도의 삶에 대한 희곡
10. 외부 링크
- [http://www.srichinmoy.org/ SriChinmoy.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