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Zita von Bourbon-Parma독일어 (1892년 5월 9일 ~ 1989년 3월 14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군주인 카를 1세의 배우자이자 오스트리아의 황후 및 헝가리 왕비였다. 그녀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되었다.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와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의 17번째 자녀로 태어난 치타는 1911년 당시 대공이었던 카를과 결혼했다. 카를은 1914년 삼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 사건 이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추정상속인이 되었고, 1916년 노황제의 서거 후 즉위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합스부르크가는 폐위되었고, 제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국가로 해체되었으며, 다른 지역은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베니아인 왕국, 이탈리아, 루마니아, 재건된 폴란드에 합병되거나 편입되었다. 카를과 치타는 스위스로 망명했으며, 헝가리에서 왕정 복고 시도가 실패한 후 연합국에 의해 마데이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카를은 1922년 사망했다. 29세에 미망인이 된 치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재혼하지 않고 대가족을 양육했으며, 망명한 왕조의 단결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았다.
2. 어린 시절과 배경
치타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서,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2.1. 출생과 가족
Zita Maria delle Grazie Adelgonda Micaela Raffaela Gabriella Giuseppina Antonia Luisa Agnese di Borbone-Parma지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아델곤다 미켈라 라파엘라 가브리엘라 주세피나 안토니아 루이사 아그네제 디 보르보네파르마이탈리아어는 1892년 5월 9일 이탈리아 루카 근교의 Villa Pianore빌라 피아노레이탈리아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 '치타'는 13세기 토스카나에 살았던 인기 있는 이탈리아 성인 루카의 치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이름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폐위된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였고, 어머니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로, 미겔 1세 포르투갈 국왕과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아델라이데 공주의 딸이었다. 로베르토 1세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결과로 1859년 어린 시절에 이미 공작위를 잃은 상태였다. 그는 첫 번째 부인인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피아 공주와의 결혼에서 12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중 6명은 정신적 장애를 겪었고 3명은 일찍 사망했다. 1882년 로베르토 공작이 사별한 후, 2년 뒤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와 재혼하여 추가로 12명의 자녀를 낳았다. 치타는 로베르토 공작의 24명의 자녀 중 17번째였다.
로베르토 공작은 대가족을 피에트라산타와 비아레조 사이에 위치한 대규모 영지인 Villa Pianore빌라 피아노레이탈리아어와 니더외스터라이히의 Schloss Schwarzau슈바르차우 성독일어 사이를 오가며 지냈다. 치타는 주로 이 두 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가족은 대부분의 시간을 오스트리아에서 보냈고, 겨울에는 피아노레로, 여름에는 다시 돌아왔다. 이들 거주지 사이를 이동할 때는 가족과 소지품을 수용하기 위해 16량의 특별 열차를 이용했다.

2.2. 교육
치타와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영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녀는 "우리는 국제적으로 성장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무엇보다 프랑스인으로 생각하셨고, 매년 몇 주를 루아르강변에 있는 그의 주요 영지인 샹보르 성에서 나이 많은 자녀들과 함께 보내셨다. 나는 한번 아버지께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물었다. 아버지는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통치했던 프랑스 왕자들이다'라고 답하셨다. 실제로 24명의 자녀 중 나를 포함해 단 세 명만이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고 회고했다.
10세 때 치타는 오버바이에른의 Zanberg잔베르크독일어에 있는 기숙 학교에 보내졌는데, 그곳에서는 엄격한 학업 및 종교 교육을 받았다. 당시 교사에 따르면 그녀는 "작은 아이였지만, 목적의식이 뚜렷했다"고 한다. 1907년 가을, 아버지의 서거로 집으로 소환되었다. 그녀의 외할머니 아델라이데는 치타와 그녀의 언니 프란체스카를 와이트섬의 한 수녀원으로 보내 교육을 마치게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양육된 파르마 공작가의 자녀들은 정기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행을 베풀었다. 슈바르차우에서는 가족들이 남는 천으로 옷을 만들었다. 치타와 프란체스카는 피아노레의 궁핍한 이들에게 직접 음식, 의류, 약품을 배포했다. 치타의 세 자매는 수녀가 되었고, 한동안 그녀도 같은 길을 걷는 것을 고려했다. 치타는 한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2년 동안 유럽의 한 온천에서 전통적인 요양 치료를 받았다.
3. 결혼과 황실 생활
치타의 결혼은 단순한 개인적인 결합을 넘어, 격변하는 유럽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3.1. 약혼과 결혼
슈바르차우 성 근처에는 치타의 외숙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의 거처인 Villa Wartholz빌라 바르트홀츠독일어가 있었다. 그녀는 1906년 사망한 오토 대공의 계모이자, 당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카를 대공의 의붓할머니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의 두 딸은 치타의 사촌이자 카를의 이모였다. 치타와 카를은 어린 시절에 만난 적이 있었지만, 각자의 교육을 받느라 거의 10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1909년, 카를의 용기병 연대가 Brandýs nad Labem브란디스 나트 라벰체코어에 주둔하게 되면서, 그는 프란티슈코비 라즈네에 있는 이모를 방문했다. 이 방문 중 카를과 치타는 다시 만나 친분을 쌓게 되었다. 카를은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었는데, 그의 삼촌이자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귀천상혼을 하여 그의 자녀들은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치타는 왕실 혈통으로 적합한 신부감이었다.
치타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어 물론 기뻤고,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내 쪽에서는 감정이 다음 2년 동안 점차 발전했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빨리 마음을 정한 것 같았고, 1910년 가을에 내가 먼 스페인 친척인 돈 하이메 마드리드 공작과 약혼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더욱 적극적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공은 브란디스에 있는 그의 연대에서 급히 내려와 그의 할머니이자 나의 이모이며 그러한 문제에 대한 자연스러운 조언자인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를 찾아갔다. 그는 소문이 사실인지 물었고, 사실이 아니라는 말을 듣자 '그럼 어쨌든 서둘러야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다른 사람과 약혼할 테니까요'라고 답했다."

카를 대공은 Villa Pianore빌라 피아노레이탈리아어로 가서 치타에게 청혼했고, 1911년 6월 13일, 두 사람의 약혼이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발표되었다. 치타는 훗날 약혼 후 카를에게 오스트리아 제국의 운명과 군주제의 도전에 대한 자신의 걱정을 표현했다고 회고했다. 카를과 치타는 1911년 10월 21일 Schloss Schwarzau슈바르차우 성독일어에서 결혼했다. 카를의 증조부인 81세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는 후계자가 적절한 결혼을 하는 것을 보고 안도했으며, 기분이 좋아서 결혼 축하연에서 건배를 주도하기도 했다.


대공비 치타는 곧 임신하여 1912년 11월 20일 아들 오토를 낳았다. 이후 10년 동안 7명의 자녀가 더 태어났다.
3.2. 황태자비 시절
이 시기 카를 대공은 20대였고, 특히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건강한 상태였기에 당분간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4년 6월 28일, 황위 계승자와 그의 아내 조피가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 세르브인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카를과 치타는 그날 전보로 소식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 "아름다운 날이었지만, 햇살 아래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어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카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의 장군으로 진급하여 티롤주에서의 공세를 위해 제20군단을 지휘했다. 전쟁은 치타에게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그녀의 여러 형제들이 전쟁에서 서로 반대편에서 싸웠기 때문이다. 펠릭스 공자와 르네 공자는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했지만, 식스투스 공자와 사비에르 공작은 전쟁 전 프랑스에 살다가 벨기에 육군에 입대했다. 또한 그녀의 고향인 이탈리아가 1915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전하면서, '이탈리아인' 치타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1917년까지도 빈 주재 독일 대사 보토 폰 베델-야를스베르크 백작은 베를린에 "황후는 이탈리아 공작 가문 출신이며... 사람들은 이탈리아인과 그녀의 친척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편지를 썼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요청으로 치타와 그녀의 자녀들은 헤첸도르프 궁전의 거처를 떠나 쇤브룬 궁전의 한 스위트룸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치타는 공식적,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노황제와 많은 시간을 보냈고, 프란츠 요제프는 그녀에게 미래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1916년 11월 21일 86세의 나이로 기관지염과 폐렴으로 서거했다. 치타는 나중에 "사랑스러운 통통한 로프코비츠 공작이 남편에게 다가가 눈물을 글썽이며 카를의 이마에 십자성호를 긋는 것을 기억한다. 그러면서 그는 '폐하께 신의 축복이 있기를'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황제 칭호를 우리에게 사용한 것을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3.3. 황후 및 왕비 시절
카를과 치타는 1916년 12월 30일 부다페스트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대관식 후 만찬이 있었지만, 전쟁 중에는 장기적인 축하 행사를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황제와 황후가 생각하여 축제는 곧 끝났다. 통치 초기 카를은 빈을 떠나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의 군사 본부가 있던 바덴에서 호프부르크 궁전까지 전화선이 설치되었다. 그는 떨어져 있을 때마다 하루에 여러 번 치타에게 전화했다. 치타는 남편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총리나 군사 브리핑에 조용히 참석하기도 했고, 특히 사회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군사 문제는 오직 카를의 영역이었다. 활기차고 강인한 의지를 가진 치타는 남편과 함께 지방과 전선을 방문했으며, 자선 활동과 전쟁 부상자들을 위한 병원 방문에도 힘썼다.


3.3.1. 제1차 세계 대전과 정치적 역할
치타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황후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남편 카를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인도주의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제국 내외의 정치적 사건에도 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특히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고 자선 활동을 조직하는 데 헌신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전선을 시찰하며 병사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3.3.2. 식스투스 사건
1917년 봄, 전쟁이 4년째로 접어들면서 치타의 오빠인 식스투스 공자는 벨기에군 장교로 복무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프랑스와 단독 평화를 맺으려는 계획의 주요 추진자였다. 카를은 중립국 스위스의 연락망을 통해 식스투스와 접촉을 시작했고, 치타는 그를 빈으로 초대하는 편지를 썼다. 치타의 어머니 마리아 안토니아가 직접 편지를 전달했다.
식스투스는 프랑스와 합의된 회담 조건을 가지고 도착했다. 조건은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고(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독일에 합병됨), 벨기에의 독립을 회복하며, 세르비아 왕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콘스탄티노플을 러시아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카를은 원칙적으로 처음 세 가지 조건에 동의했으며, 1917년 3월 25일 식스투스에게 "나는 모든 수단과 나의 모든 개인적 영향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비밀스럽고 비공식적인 메시지"를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러한 왕조 외교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독일은 알자스-로렌에 대한 협상을 거부했고, 러시아의 붕괴가 임박한 것을 보고 전쟁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식스투스는 계속해서 노력을 기울였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를 런던에서 만나 1915년 런던 조약에 따른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영토 요구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지만, 영국 총리는 자신의 장군들을 설득하여 영국이 오스트리아와 평화를 맺도록 할 수 없었다. 치타는 이 시기에 벨기에 국왕과 왕비의 명절에 독일이 비행기를 보내 그들의 집에 폭탄을 투하하려는 계획을 막는 개인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18년 4월, 독일-러시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오토카르 체르닌 백작은 새로 취임한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를 중앙 동맹국에 유리한 평화의 주요 장애물이라고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클레망소는 격분하여 카를 황제의 1917년 3월 24일자 편지를 보고 그것을 공개했다. 한동안 식스투스의 생명이 위태로워 보였고, 심지어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있었다. 체르닌은 카를에게 식스투스가 프랑스 정부에 편지를 보여줄 권한이 없었고, 벨기에가 언급되지 않았으며, 클레망소가 알자스 언급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명예의 말씀'을 오스트리아 동맹국들에게 보내도록 설득했다. 체르닌은 사실 이 위기 내내 독일 대사관과 접촉하고 있었으며, 이 사건 때문에 황제가 퇴위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실패하자 체르닌은 외무장관직을 사임했다.
4. 제국의 종말과 망명 생활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고, 치타는 남편 카를 1세와 함께 기나긴 망명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4.1. 제국의 붕괴와 망명
이때쯤 전쟁은 궁지에 몰린 황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체코 대표 연합은 이미 1918년 4월 13일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새로운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에 대한 맹세를 했고, 독일 육군의 위신은 아미앵 전투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1918년 9월 25일, 치타의 시동생인 불가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 국왕은 중앙 동맹국 동맹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평화를 요청했다. 치타는 카를이 불가리아의 붕괴를 알리는 전보를 받았을 때 그와 함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아직 이야기할 것이 남아 있을 때 서방 연합국과 평화 회담을 시작하는 것을 더욱 시급하게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10월 16일, 황제는 제국을 각 민족이 자체 국가를 얻는 연방 형태로 재편할 것을 제안하는 "국민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신 각 민족은 분리되었고 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자녀들을 괴될뢰에 남겨둔 채 카를과 치타는 쇤브룬 궁전으로 향했다. 이때쯤 이미 새로운 "독일-오스트리아" 국가에 의해 장관들이 임명되었고, 11월 11일까지 황제의 대변인들과 함께 카를이 서명할 선언문을 준비했다. 치타는 처음에는 그것을 퇴위로 오해하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발언을 했다:
"군주는 결코 퇴위할 수 없다. 그는 폐위될 수 있을 뿐이다... 좋다. 그것은 강제다. 그러나 퇴위는 절대, 절대, 절대 안 된다! 차라리 여기서 당신 옆에서 쓰러지겠다. 그러면 오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여기서 죽임을 당한다 해도, 여전히 다른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카를은 문서가 출판되는 것을 허락했고,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남아있는 궁정의 잔존 세력은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국경 근처에 있는 에카르차우의 왕실 사냥 숙소로 떠났다. 다음 날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4.2. 스위스, 마데이라에서의 망명
에카르차우에서 몇 달간의 어려운 시간을 보낸 후, 황실 가족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을 받았다. 식스투스 공자는 조지 5세 국왕을 만나 합스부르크 가문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조지 5세는 러시아에 있는 그의 황실 친척들이 혁명가들에게 처형된 지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 요청에 감동받았다고 전해지며, "우리는 즉시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여러 영국군 장교들이 카를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특히 벨퍼 남작의 손자이자 인스브루크 대학교의 전 학생이었던 에드워드 리슬 스트럿 중령이 두드러졌다. 1919년 3월 19일, 전쟁성으로부터 "지체 없이 황제를 오스트리아에서 내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스트럿은 여러 어려움 끝에 스위스로 가는 기차를 마련하여 황제가 퇴위하지 않고도 품위 있게 나라를 떠날 수 있도록 했다. 카를, 치타, 그들의 자녀들, 그리고 그들의 가신들은 3월 24일 스트럿의 지휘 아래 명예 포병대 소속 영국군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에카르차우를 떠났다.

가족의 첫 망명지는 스위스 로르샤흐의 Wartegg Castle바르테크 성독일어으로, 부르봉-파르마 가문 소유의 영지였다. 그러나 스위스 당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에 거주하는 것에 대한 함의를 우려하여 그들에게 서부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강요했다. 따라서 다음 달 그들은 제네바 호수 근처의 Prangins프랑쟁프랑스어 빌라로 이사하여 조용한 가족 생활을 재개했다.
이러한 평온은 1920년 3월 헝가리의 불안정한 시기 이후 미클로시 호르티가 섭정으로 선출되면서 갑자기 끝났다. 카를은 여전히 기술적으로는 국왕(카를 4세로서)이었지만, 호르티는 프랑쟁으로 사절을 보내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헝가리로 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트리아농 조약 이후 호르티의 야망은 곧 커졌다. 카를은 걱정되어 스트럿 대령에게 헝가리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카를은 1921년 3월과 1921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통제권을 되찾으려 시도했다. 치타의 확고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두 시도 모두 실패했다(그녀는 부다페스트로 가는 마지막 극적인 기차 여행에 그와 동행하겠다고 주장했다).
카를과 치타는 적절한 영구 망명지를 찾을 때까지 에스테르하지 백작의 집인 타타성에 임시로 거주했다. 몰타가 가능성으로 거론되었지만, 커즌 경에 의해 거부되었고, 치타의 형제들이 카를을 위해 음모를 꾸밀 가능성 때문에 프랑스 영토는 배제되었다. 결국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이 선택되었다. 1921년 10월 31일, 전 황실 부부는 티하니에서 바하까지 철도로 이동했으며, 그곳에서 영국 해군의 HMS 글로우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11월 19일 푼샬에 도착했다. 자녀들은 카를의 의붓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스위스 바르테크 성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었지만, 치타는 아들 로베르트가 맹장염 수술을 받아야 했을 때 취리히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녀들은 1922년 2월 마데이라에서 부모와 합류했다.
4.3. 남편 카를 1세의 죽음
카를은 한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다. 푼샬의 쌀쌀한 날에 카를 루트비히를 위한 장난감을 사러 쇼핑을 나간 후, 그는 기관지염에 걸렸다. 이는 불충분한 의료 서비스로 인해 빠르게 폐렴으로 악화되었다. 자녀들과 직원 중 여러 명도 병에 걸렸고, 치타(당시 임신 8개월)는 그들 모두를 간호했다. 카를은 쇠약해져 4월 1일 사망했으며,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합니다"였다. 카를은 34세였다. 그의 장례식 후, 한 목격자는 치타에 대해 "이 여성은 정말 존경받아야 한다.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사방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장례식을 도운 사람들과 대화했다. 그들 모두 그녀의 매력에 빠졌다"고 말했다. 치타는 남편 카를의 죽음을 기억하며 67년의 과부 생활 동안 상복을 입었다.
4.4. 벨기에, 북미 및 기타 망명
카를의 사망 후, 전 오스트리아 황실 가족은 곧 다시 이사해야 했다. 스페인의 알폰소 13세는 런던 주재 대사를 통해 영국 외무부에 접촉했고, 그들은 치타와 그녀의 일곱(곧 여덟이 될) 자녀들이 스페인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락했다. 알폰소는 인판타 이사벨 전함을 푼샬로 보내 그들을 카디스로 데려왔다. 그들은 마드리드의 파르도 궁전으로 호송되었고, 도착 직후 치타는 엘리자베트 대공비를 낳았다. 알폰소 13세는 망명한 합스부르크 친척들에게 비스케이만의 레케이티오에 있는 팔라시오 우리바렌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했다. 이는 치타에게 매력적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국가에 큰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6년 동안 치타는 레케이티오에 정착하여 자녀들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들은 궁핍한 재정으로 생활했는데, 주로 오스트리아의 개인 재산 수입, 라인강 계곡의 요하니스베르크에 있는 포도원 수입, 그리고 자발적인 모금에 의존했다. 그러나 망명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다른 구성원들이 이 돈의 상당 부분을 요구했고, 전 황실 관리들로부터도 정기적으로 도움 요청이 있었다.

1929년, 자녀들 중 몇몇이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면서 가족은 브뤼셀 근처 벨기에 마을 스테녹케르제엘에 있는 성으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여러 가족 구성원들과 더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치타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한 정치적 로비를 계속했으며, 심지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도 관계를 모색했다. 오스트리아 총리 엥겔베르트 돌푸스와 쿠르트 슈슈니크 하에서 합스부르크 왕정 복고의 가능성도 있었고, 오토 황태자는 오스트리아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갑자기 중단되었다. 망명자로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에서 나치에 저항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군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반목으로 인해 실패했다.
1940년 5월 10일 나치의 벨기에 침공으로 치타와 그녀의 가족은 전쟁 난민이 되었다. 그들은 독일 폭격기의 성에 대한 직격탄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프랑스 보스츠에 있는 사비에르 공자의 성으로 피신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5월 18일 스페인 국경으로 도피했다. 6월 12일 포르투갈의 통치자 안토니우 살라자르는 프랑스 주재 포르투갈 영사관에 파르마 공작부인 마리아 안토니아 인판타에게 포르투갈 여권을 발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포르투갈 여권으로 가족들은 포르투갈 정부의 중립성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마리아 안토니아의 딸인 부르봉-파르마의 치타와 그녀의 아들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포르투갈 시민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포르투갈로 이동하여 카스카이스에 거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공은 살라자르로부터 히틀러가 그의 송환을 요구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포르투갈 통치자는 이 요구를 거부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안전이 위태롭다는 점을 암시했다. 7월 9일 미국 정부는 가족에게 비자를 발급했다. 위험한 여정 끝에 그들은 7월 27일 뉴욕에 도착하여 롱아일랜드와 뉴어크에 가족이 있었다. 한때 치타와 그녀의 자녀들 중 몇몇은 턱시도 파크에서 장기 투숙객으로 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황실 난민들은 결국 퀘벡에 정착했는데, 이곳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는 장점(어린 자녀들은 아직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다)이 있었고 라발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로 학업을 계속했다. 모든 유럽 자금이 끊기면서 재정은 그 어느 때보다 빠듯했다. 한때 치타는 민들레 잎으로 샐러드와 시금치 요리를 만들어 먹어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아들들은 전쟁 노력에 적극적이었다. 오토는 전후 유럽에서 왕조의 역할을 홍보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정기적으로 만났다. 로베르트는 런던의 합스부르크 대표였다. 카를 루트비히와 펠릭스는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여러 미국에서 자란 마우어러 가문의 친척들과 함께 복무했다. 루돌프는 전쟁 막바지에 오스트리아로 밀입국하여 저항 운동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45년 5월 9일, 치타 황후는 평화가 시작된 첫날 자신의 생일을 기념했다. 그녀는 다음 2년 동안 전쟁으로 황폐해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했다.
5. 개인적인 삶과 신념
치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깊은 신앙심을 지녔으며, 가족에 대한 헌신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자선 활동에 평생을 바쳤다.
5.1. 신앙과 가족
치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기 때문에, 합스부르크가에 태어난 남편보다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존속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죽을 때까지 언젠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다시 군주의 자리가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녀는 남편 카를 1세가 서거한 직후 황태자 오토에게 "당신은 이제 황제이자 왕(Kaiser und Könige독일어)이 되었다"고 말하며, 오토가 오스트리아 황제로 즉위했다고 간주했다. 1961년 오토가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 될 것을 선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1962년부터 오스트리아 국경과 가까운 스위스 Zizers치처스독일어의 성 요하네스 수도원에서 거주하며 서거할 때까지 약 27년간 기도의 나날을 보냈다. 그녀는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삶을 살았으며, 가족과의 유대감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여덟 명의 자녀를 엄격하면서도 사랑으로 양육하며, 그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과 가톨릭 신앙을 지키도록 가르쳤다.
5.2. 사회 활동 및 자선 활동
치타는 황후 시절부터 사회 활동과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부상병들을 위문하고 전쟁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전선을 방문하여 병사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병원에서 부상자들을 직접 간호하기도 했다. 망명 생활 중에도 그녀는 가난한 이웃을 위한 봉사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도 남는 천으로 옷을 만들어 나누어 주거나, 음식, 의류, 약품 등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직접 배포하는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녀의 깊은 신앙심과 타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6. 말년과 죽음
치타는 망명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한 신념을 지키며 오랜 세월을 살았다. 그녀의 말년은 가족과의 재회와 고향 오스트리아로의 귀환으로 의미 깊었다.
6.1. 귀국과 마지막 해
휴식과 회복 기간을 거친 후, 치타는 자녀들의 결혼식을 위해 정기적으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녀는 1952년 노모를 돌보기 위해 룩셈부르크로 완전히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안토니아가 1959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쿠어의 주교는 치타에게 스위스 그라우뷘덴주 Zizers치처스독일어에 있는 자신이 관리하는 거처(이전에는 잘리스 백작의 성)로 이사할 것을 제안했다. 이 성은 대가족의 방문을 위한 충분한 공간과 근처에 예배당(독실한 가톨릭 신자 치타에게 필수적인 요소)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쉽게 수락했다.
치타는 말년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입국 제한이 해제되었지만, 이는 1919년 4월 10일 이후 출생자에게만 해당되었다. 이 때문에 치타는 1972년 딸 아델하이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고, 이는 그녀에게 큰 고통이었다. 그녀는 또한 서거한 남편, 즉 "평화 황제"의 시성을 위한 노력에도 참여했다. 1982년, 제한이 완화되면서 그녀는 60년 만에 오스트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몇 년 동안 황후는 옛 오스트리아 고향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오스트리아 텔레비전에도 출연했다. 빈의 크로넨 자이퉁 신문과의 일련의 인터뷰에서 치타는 1889년 마이어링에서 루돌프 폰 외스터라이히 황태자와 그의 정부 마리 폰 베체라 남작부인의 죽음이 동반 자살이 아니라 프랑스 또는 오스트리아 요원에 의한 살인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6.2. 죽음과 장례
기억에 남는 90세 생일을 보낸 후, 그녀의 거대한 가족들이 그녀를 둘러쌌을 때, 치타의 평소 튼튼했던 건강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양쪽 눈에 수술 불가능한 백내장이 생겼다. 그녀의 마지막 주요 가족 모임은 1987년 치처스에서 열렸는데, 자녀들과 손주들이 그녀의 95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1988년 여름 딸을 방문하던 중 폐렴에 걸려 가을과 겨울 대부분을 병상에 누워 보냈다. 마침내 그녀는 1989년 3월 초 오토를 불러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와 다른 가족들은 그녀의 병상으로 와서 1989년 3월 14일 새벽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번갈아 가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96세였으며, 로베르토 파르마 공작의 두 결혼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자녀였다.
그녀의 장례식은 4월 1일 빈에서 거행되었다. 정부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 땅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허락했다. 치타의 시신은 1916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장례식 때 그녀가 뒤따라 걸었던 바로 그 장례 마차에 실려 카푸치너 교회 아래 황실 납골당으로 운구되었다. 장례식에는 200명 이상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부르봉-파르마 가문 구성원들이 참석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대표를 포함한 주요 정치인, 국가 공무원 및 국제 대표자 등 6,000명이 참석했다. 고대 관습에 따라 황후는 자신의 심장을 담은 항아리를 남편의 심장이 수십 년 동안 안치되어 있던 스위스 무리 수도원에 남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타는 죽어서도 남편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했다.
조문객 행렬이 황실 납골당 문에 도착했을 때, 전통적인 "입장 의식" 동안 문을 두드린 전령은 그녀를 "치타, 폐하 황후이자 왕비"로 소개했다.
7. 평가와 유산
치타의 삶은 제국의 붕괴와 망명이라는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그녀의 신앙심과 가족에 대한 헌신, 그리고 역사적 역할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남겼다.
7.1. 성성(聖性) 추구
치타는 그 깊은 신앙심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평생 동안 남편 카를 1세의 퇴위를 부정했던 것도 왕권신수설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1962년부터 오스트리아 국경과 가까운 스위스 Zizers치처스독일어에 있는 성 요하네스 수도원에서 살게 되었고, 서거할 때까지 약 27년간 기도의 나날을 보냈다.
서거 20년이 지난 2009년 12월 10일, 프랑스 르망 교구의 이브 르 소 주교는 치타의 시복을 위한 교구 절차를 시작했다. 치타는 세 명의 자매가 수녀로 있던 솔렘 성 세실리아 수도원에서 매년 몇 달을 보내는 습관이 있었다. 이로써 치타는 "하느님의 종"으로 명명되었다.
그녀의 남편 카를 1세는 이미 복자로 선포되었으며, 그의 기념일은 그의 기일이 아닌 치타와의 결혼 기념일인 10월 21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치타 또한 언젠가 카를 1세와 나란히 가톨릭 제단에 오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7.2. 역사적 평가
치타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에 태어난 남편 이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존속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죽을 때까지 언젠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다시 군주의 자리가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신념은 그녀가 카를 1세의 퇴위를 끝까지 반대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카를 1세가 서거한 직후 그녀는 황태자 오토에게 "당신은 이제 황제이자 왕(Kaiser und Könige독일어)이 되었다"고 말하며, 오토가 오스트리아 황제로 즉위했다고 간주했다. 오토가 1961년 오스트리아 공화국에 충실한 시민이 될 것을 선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의 자녀들은 결혼을 통해 스페인, 벨기에, 룩셈부르크의 군주위 계승권을 보유하고 있어, 왕정 복고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미래에 합스부르크 일족이 군주 자리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오스트리아 귀국이 1982년에 허용되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치타에게 가졌던 반감은 사라졌고, 오히려 국민의 절반 이상이 그녀의 귀향을 환영했다. 이후 치타는 종종 오스트리아에 입국했으며, 그때마다 1만 명 이상의 군중이 "마지막 황후"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는 그녀가 격변의 시대를 살아낸 인물로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보여준다.
8. 자녀
치타는 카를 1세와의 사이에서 5남 3녀, 총 8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33명의 손주를 보았다. 이는 다산이라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을 지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오토 황태자 | 1912년 11월 20일 | 2011년 7월 4일 | 1951년 작센마이닝겐의 레기나 공주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 22명의 손주, 10명의 증손주를 두었다. |
아델하이트 대공비 | 1914년 1월 3일 | 1971년 10월 2일 | 미혼이며 자녀가 없었다. |
로베르트 대공 | 1915년 2월 8일 | 1996년 2월 7일 | 1953년 사보이아-아오스타의 마르게리타 공주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 19명의 손주, 3명의 증손주를 두었다. |
펠릭스 대공 | 1916년 5월 31일 | 2011년 9월 6일 | 1952년 아렌베르크의 안나 오이게니 공주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 22명의 손주를 두었다. |
카를 루트비히 대공 | 1918년 3월 10일 | 2007년 12월 11일 | 1950년 리뉴의 욜란데 공주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 19명의 손주, 10명의 증손주를 두었다. |
루돌프 대공 | 1919년 9월 5일 | 2010년 5월 15일 | 1953년 크세니야 체르니셰프-베소브라소프 백작부인과 결혼하여 4명의 자녀, 13명의 손주, 3명의 증손주를 두었다. 1971년 브레데의 안나 가브리엘레 공주와 재혼하여 1명의 딸과 3명의 손주를 두었다. |
샤를로테 대공비 | 1921년 3월 1일 | 1989년 7월 23일 | 1956년 메클렌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과 결혼하였다. 자녀가 없었다. |
엘리자베트 대공비 | 1922년 5월 31일 | 1993년 1월 6일 | 1949년 리히텐슈타인 후자 하인리히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 7명의 손주, 6명의 증손주를 두었다. |

9. 계보
치타는 복잡한 유럽 왕실과의 혈연 관계를 통해 여러 왕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1. 치타 폰 부르봉-파르마 | 2. 아버지: 로베르토 1세 파르마 공작 | 4. 친할아버지: 카를로 3세 파르마 공작 | 8. 증조할아버지: 카를로 2세 파르마 공작 |
9. 증조할머니: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 |||
5. 친할머니: 아르투아의 루이즈 공주 | 10. 증조할아버지: 샤를 페르디낭 베리 공작 | ||
11. 증조할머니: 양시칠리아의 마리 카롤린 공주 | |||
3. 어머니: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 | 6. 외할아버지: 미겔 1세 포르투갈 국왕 | 12. 증조할아버지: 주앙 6세 포르투갈 국왕 | |
13. 증조할머니: 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 |||
7. 외할머니: 아델라이데 폰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 | 14. 증조할아버지: 콘스탄틴 폰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 세습공 | ||
15. 증조할머니: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아그네스 공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