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무함마드 5세는 1927년부터 1953년까지, 그리고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모로코의 술탄이었으며, 1957년부터 1961년 서거할 때까지 초대 국왕으로 재위한 인물이다. 알라위 왕조의 일원으로서,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으로부터 모로코의 독립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모로코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통치 초기에 서명된 베르베르 다히르는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모로코 민족주의의 부흥을 촉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국을 지지하고, 특히 비시 프랑스의 박해로부터 모로코 유대인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인권 보호에 대한 그의 헌신을 보여주었다. 전쟁 후 그는 독립 운동의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 1947년 탕헤르에서 행한 역사적인 연설을 통해 모로코의 독립을 공개적으로 호소하며 아랍 세계와의 유대를 강조했다.
프랑스 식민 당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그는 1953년 폐위되어 코르시카와 마다가스카르로 망명했으나, 모로코 내 강력한 저항 운동으로 인해 1955년 복위하였다. 이후 프랑스 및 스페인과 성공적으로 독립 협상을 이끌어내 1956년 모로코의 독립을 달성했고, 1957년에는 국왕 칭호를 채택하며 국가 통합의 상징이 되었다. 무함마드 5세는 1961년 서거했으며, 그의 통치는 모로코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무함마드 5세는 모로코의 마지막 술탄이자 초대 국왕으로서, 모로코의 독립 투쟁과 현대 국가 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생애는 유년기부터 독립 이후의 통치에 이르기까지 격동적인 사건들로 가득했다.
2.1. 유년기 및 교육

시디 무함마드 벤 유세프는 1909년 8월 10일 페스에서 술탄 유세프 벤 하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12년 3월, 페스 조약이 체결되어 모로코는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고, 수도 페스는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었다.
시디 무함마드는 페스 궁전 내 카스르 알-아마미에서 홈스쿨링을 통해 교육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꾸란의 첫 수업을 들었다. 이후 그의 아버지 유세프 술탄이 라바트를 왕국의 수도로 정하면서 시디 무함마드는 대부분의 형제들과 함께 라바트로 거처를 옮겼다. 라바트에서도 개인 교사들을 통해 홈스쿨링을 이어갔다. 그는 꾸란을 암송하는 하피즈가 될 때까지 교육을 받았으며, 그 후 아카데믹 학습을 시작했다. 그는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는데, 특히 프랑스어 교사였던 무함마드 맘메리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맘메리는 무함마드 5세가 술탄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의전장으로 봉직했다. 시디 무함마드는 라바트의 공립학교에서도 교육을 계속했다.
2.2. 초기 통치와 정책

무함마드 5세는 1927년 11월 18일, 그의 아버지 술탄 유세프가 서거하고 위베르 리오테가 물러난 후 17세의 "젊고 소심한" 나이로 술탄에 즉위했다. 그는 1925년 하니라 빈트 마문과 결혼했으며, 1928년에는 랄라 아블라 빈트 타하르와 결혼했다. 랄라 아블라 빈트 타하르는 1929년 미래의 국왕이 될 하산 2세를 낳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랄라 바히아와 결혼했다.

무함마드의 즉위 당시 프랑스 식민 당국은 "보다 단호한 '원주민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1930년 5월 16일, 술탄 무함마드 5세는 베르베르 다히르에 서명했다. 이 법령은 베르베르어가 주로 사용되는 모로코 일부 지역(블레드 에스-시바)의 법률 시스템을 변경했고, 나머지 지역(정부 통제 지역, 블레드 알-막젠)의 법률 시스템은 프랑스의 모로코 정복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시켰다. 술탄은 강압을 받지 않았으나 당시 20세에 불과했다. 이 '다히르'는 "국가를 격동시켰으며", 모로코 민족주의자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받으며 모로코 민족주의 운동을 촉발시켰다.
2.3. 제2차 세계 대전과 유대인 보호 노력
무함마드 5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카사블랑카에서 열린 카사블랑카 회담에 참여했다. 1943년 1월 22일, 그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비공개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는 술탄에게 "전후 상황은 전전 상황과... 특히 식민 문제와 관련하여 극명하게 다를 것"이라고 확언했다. 당시 14세였던 그의 아들이자 미래 모로코 국왕인 하산 2세도 이 회담에 참석했으며, 훗날 루스벨트가 "10년 후 당신의 나라는 독립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모로코 유대인 공동체를 위해 무함마드 5세가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러나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비시 프랑스 시대 동안 무함마드 5세가 유대인들에게 자비로웠음을 강조한다." 무함마드는 비시 프랑스 관리들이 모로코에 비시 반유대주의 법률을 강요하고 25만 명의 유대인들을 유럽의 나치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로 추방하려던 시도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술탄의 이러한 입장은 "비시의 '독재'가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신민에 대한 그의 주권 주장에 가한 모욕뿐만 아니라 그의 인도주의적 본능에 기반한 것"이었다. 무함마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나치 인종 차별 조치는 모로코에서 시행되었으며, 무함마드는 비시 관리들의 지시에 따라 유대인들을 특정 학교와 직위에서 배제하는 두 가지 법령에 서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는 나치 독일과 비시 프랑스 정부로부터 유대인 공동체를 보호한 공로로 모로코 유대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그의 유대인 신민들을 보호한 역할로 유대인 단체들로부터도 표창을 받았다. 일부 역사가들은 무함마드의 반나치 역할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역사가 미셸 아비톨은 무함마드 5세가 비시 관리들에 의해 반유대주의 다히르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튀니지의 통치자였던 무함마드 7세 알-문시프보다 더 소극적이었고, 어떤 편도 들지 않았으며 비시 정책에 대한 거부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떠한 공개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2.4. 독립 투쟁

술탄 무함마드 5세는 왕과 인민의 혁명(ثورة الملك والشعب사우라트 알말릭 왈샤브아랍어)으로도 알려진 모로코 독립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 모로코 민족주의 운동은 1930년 5월 16일의 베르베르 다히르에 대한 시위로부터 성장했다. 그는 초기에는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 식민 행정의 개혁 운동에 비판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독립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가 모로코 독립 선언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국가지도자로서의 이미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1947년 4월 9일과 10일, 그는 각각 멘두비아와 탕헤르 대모스크에서 탕헤르 연설로 함께 알려진 두 차례의 중요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특정 식민 세력을 명시하지 않고 모로코의 독립을 호소했다. 1947년, 민족주의 운동의 빠른 진전은 시디 무함마드가 탕헤르 연설에서 처음으로 독립을 요구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또한 1945년에 설립된 아랍 연맹에 모로코가 가입하고 아랍 민족의 단합을 촉구하며, 모로코와 다른 아랍 세계 국가들 간의 긴밀한 유대를 강조했다. 역사가 베르나르 큐베르타퐁에 따르면, 군주제와 민족주의 운동 간의 이러한 관계는 "각자가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설명될 수 있다. "민족 운동은 왕의 증가하는 인기와 1912년 조약을 벗어나 직접 통치로 나아간 보호국(프랑스)으로부터의 신중하지만 점진적인 해방을 보았다. 왕은 자신을 불신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자국의 활력과 청년 엘리트를 결집시키는 민족주의 운동으로부터 자신을 단절할 수 없었으며, 프랑스에 변화를 강요하기 위해 이 저항 세력을 필요로 했다."

그때부터 프랑스 당국, 특히 새로운 총독 알퐁스 쥐앵 장군과의 관계는 긴장되었다. 쥐앵 장군은 강경 조치를 적용하고 술탄에게 이스티클랄 당을 부인하고 민족주의적 주장에서 거리를 두도록 압력을 가했다. 프랑스와의 관계는 1951년에 단절되었고, 시디 무함마드는 민족주의자들과 독립을 위한 투쟁을 약속하는 탕헤르 조약을 체결했다. 새로운 총독 오귀스탱 기욤 장군의 임명은 무함마드와 프랑스 간의 불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1952년에는 카사블랑카 등 모로코에서 시위가 폭동으로 변했으며, 시디 무함마드는 유엔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모로코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이끌어냈다.
2.5. 폐위와 망명
1953년 8월 20일 (이드 알-아드하 전날), 프랑스 식민 당국은 성장하는 모로코 독립 운동의 중요한 국가적 상징인 무함마드 5세를 그의 가족과 함께 코르시카로 강제 망명시켰다. 그의 5촌 조카인 무함마드 벤 아라파는 "프랑스의 술탄"이라 불리며 꼭두각시 군주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무함마드 자르크투니는 카사블랑카의 카사블랑카 중앙 시장을 폭파했다.
무함마드와 그의 가족은 1954년 1월 마다가스카르로 이송되었다. 그는 프랑스 보호령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으로 인해 1955년 11월 16일 망명에서 돌아왔고, 다시 술탄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개선은 많은 이들에게 식민지 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신호였다. 상황은 1955년에 리비아 왕국, 알제리 (FLN과 함께), 이집트의 지지를 받는 모로코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프랑스 정부가 협상하고 술탄을 복귀시키도록 강요할 정도로 긴장되었다. 1956년 2월, 그는 프랑스 및 스페인과 성공적으로 협상하여 모로코의 독립을 이루어냈다.
2.6. 복위와 독립 이후 통치

무함마드 5세는 알제리의 독립 투쟁에서 민족해방전선 (FLN)을 지원했으며, 튀니스에서 하비브 부르기바와의 회담에 FLN 지도자들의 참여를 주선하기도 했다. 1956년 10월 22일, 알제리 전쟁이 진행 중이던 당시, 프랑스군은 아흐메드 벤 벨라, 호시네 아이트 아흐메드, 모하메드 부디아프 등 FLN 지도자들을 태운 모로코 항공기를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튀니스로 향하던 중 납치하여 점령된 알제로 회항시켰고, FLN 지도자들은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1957년, 그는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간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단결을 상징하기 위해 국왕 칭호를 채택했다. 국내 정책 면에서, 그는 귀국 후 이스티클랄 당의 첫 회의를 허용했으며, 그의 통치하에 여러 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는 노동조합의 설립을 승인했지만, 불안과 파업이 계속되자 통치 말년에는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해 말 미국 국빈 방문은 "왕국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자로서의 그의 입지를 강화"했다. 이 방문을 통해 그는 국제 무대에서 민족주의 운동의 구성원들을 대체하고 자신의 방문을 큰 홍보 성공으로 만들었다. 이 방문은 모로코와 미국을 긴밀하게 연대시키려는 전략적 노력이었으며, 국제 무대에서 군주제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모로코 인민의 이름으로 민족주의 운동의 이전 지지자들에게 개인적으로 감사를 표하는 등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여 왕실 권위를 투사했다. 무함마드 5세는 또한 베네딕토회 툼릴린 수도원에서 개최되어 전 세계 학자와 지식인들을 끌어모았던 현대 문제 및 종교간 대화에 관한 회의인 '국제 회의'의 후원자 역할도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모로코 해방군은 스페인과 프랑스에 대항하여 이프니 전쟁을 벌였고, 이프니의 대부분과 주비 곶 및 스페인 사하라의 일부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앙그라 데 신트라 조약을 통해 모로코는 주비 곶과 이프니 주변을 합병했으며, 나머지 식민지는 1969년에 스페인에 의해 양도되었다.
2.7. 서거
1961년 2월 26일, 무함마드는 코 중격막의 사소한 수술 합병증으로 51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그의 죽음은 아들이자 왕세자였던 물라이 하산에 의해 국영 라디오를 통해 발표되었고, 그는 하산 2세 국왕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3. 개인 생활
무함마드 5세의 첫 번째 부인은 랄라 하니라 빈트 마문으로, 1925년에 결혼하여 첫 딸 랄라 파티마 조흐라를 낳았다.
두 번째 부인은 그의 5촌 조카인 랄라 아블라 빈트 타하르였다. 그녀는 술탄 하산 1세의 아들인 무함마드 타하르 빈 하산의 딸이었다. 그녀는 1928년 무함마드 5세와 결혼하여 1992년 3월 1일 라바트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미래의 국왕 하산 2세, 랄라 아이샤 공주, 랄라 말리카 공주, 물라이 압달라 왕자, 그리고 랄라 누자 공주 등 다섯 자녀를 낳았다.
세 번째 부인은 랄라 바히아로, 그녀와의 사이에 딸 랄라 아미나 공주를 두었다.
4. 나삽 (가계)
무함마드 5세의 나삽(가계)은 다음과 같다.
무함마드 빈 유세프 빈 하산 빈 무함마드 빈 압드 알-라흐만 빈 히샴 빈 무함마드 빈 압둘라 빈 이스마일 빈 샤리프 빈 알리 빈 무함마드 빈 알리 빈 유세프 빈 알리 빈 알 하산 빈 무함마드 빈 알 하산 빈 카심 빈 무함마드 빈 아비 알 카심 빈 무함마드 빈 알-하산 빈 압둘라 빈 무함마드 빈 아라파 빈 알-하산 빈 아비 바크르 빈 알리 빈 알-하산 빈 아흐메드 빈 이스마일 빈 알-카심 빈 무함마드 알-나프스 알-자키야 빈 압둘라 알-카밀 빈 하산 알-무탄나 빈 하산 빈 알리 빈 아부 탈리브 빈 압드 알-무탈리브 빈 하심.
5. 평가와 유산
무함마드 5세는 모로코의 독립을 이끈 상징적인 인물로서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의 유산은 현대 모로코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의 일부 행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5.1. 긍정적 평가와 기여
무함마드 5세는 모로코 독립 운동의 지도자로서 국가 통합과 민족 해방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고 국민적 단결을 이끌어내며 모로코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모로코 유대인들을 나치 독일과 비시 프랑스의 박해로부터 보호하려 노력한 점은 그의 인도주의적 면모와 인권 보호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그는 유대인 단체들로부터도 표창을 받기도 했다.
독립 후 국왕 칭호를 채택함으로써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을 아우르는 국가적 단결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의 미국 국빈 방문은 모로코를 국제 무대에 부각시키고 미국과의 전략적 연대를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툼릴린 수도원에서 열린 현대 문제 및 종교 간 대화 회의인 '국제 회의'를 후원하며 국제적인 학술 및 종교간 이해 증진에도 기여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왕실 권위를 강화하고 모로코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5.2. 비판 및 논란
무함마드 5세의 모로코 유대인 보호 노력에 대해서는 일부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존재한다. 역사가 미셸 아비톨은 무함마드 5세가 반유대주의 법령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튀니지의 통치자였던 무함마드 7세 알-문시프에 비해 비시 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나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소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적 시각을 제시했다. 또한, 독립 후 통치 말기에 노동조합 활동으로 인한 불안과 파업에 대응하여 전권을 장악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 평가가 존재한다.
5.3. 추모와 기념물
무함마드 5세를 기리기 위해 수많은 건물, 지역, 기관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카사블랑카의 무함마드 5세 국제공항, 무함마드 5세 경기장, 무함마드 5세 광장이 있다. 라바트에는 무함마드 5세 거리, 무함마드 5세 대학교, 모하마디아 공학 학교가 있으며, 탕헤르에는 무함마드 5세 모스크가 있다. 라바트에는 그의 유해가 안치된 무함마드 5세 영묘가 세워져 있다. 모로코의 거의 모든 도시에는 무함마드 5세 거리가 있으며, 튀니지 튀니스와 알제리 알제에도 주요 무함마드 5세 거리가 존재한다. 기니 코나크리에 있는 무함마드 5세 궁전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2007년 12월, 더 제이위시 데일리 포워드는 모로코 정부가 무함마드 5세를 열방의 의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비밀 외교적 노력을 보고한 바 있다.
6. 서훈
무함마드 5세는 생애 동안 국내외에서 다양한 훈장과 명예 학위를 수여받았다.
- 튀니지 공화국 혈액 훈장
- 프랑스 공화국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장 (1927)
- 스페인 왕국 카를로스 3세 훈장 칼라 (1929)
- 프랑스 공화국 해방 훈장 동반자 (1945)
- 미국 공로 훈장 최고 사령관 (1945)
- 프랑코 정권 스페인 멍에와 화살 제국 훈장 대칼라 (1956년 4월 3일)
- 리비아 왕국 이드리스 1세 훈장 칼라 (1956)
- 이라크 왕국 하심 가문 훈장 칼라 (1956)
- 시리아 우마이야 훈장 대수장 (1960)
- 레바논 공로 훈장 특급 대수장 (1960)
- 이집트 공화국 나일 훈장 칼라 (1960)
- 요르단 알-후세인 빈 알리 훈장 칼라 (1960)
- 사우디아라비아 압둘아지즈 국왕 훈장 대수장 (1960)
명예 학위
- 1957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 법학 명예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