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교육
모리스 비숍의 초기 생애와 교육 과정은 그의 정치적 의식과 혁명적 신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린 시절 그레나다로 이주하여 학업을 이어갔고, 영국에서의 법률 교육과 사회 운동 참여를 통해 정치적 사상과 리더십을 발전시켰다.
1.1. 출생과 유년기
모리스 루퍼트 비숍은 1944년 5월 29일 당시 네덜란드령 퀴라소 및 속령 식민지의 일부였던 아루바 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루퍼트 비숍과 알리멘타 비숍은 그레나다 북동부 출신으로, 아루바에서 루퍼트가 일일 5 영국 페니를 벌며 생활하는 등 어려운 형편이었다. 1930년대 후반 재정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루퍼트는 아내 알리멘타와 함께 아루바로 이주하여 석유 정제소에서 일했다.
모리스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두 명의 누나 앤과 모린과 함께 아루바에서 성장했다. 1950년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그레나다로 데려왔고, 수도인 세인트조지스에 작은 소매점을 열었다. 모리스는 감리교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1년 뒤 로마 가톨릭 세인트 조지 초등학교 및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아홉 살 때부터 키가 컸던 모리스는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인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외아들이었던 모리스는 아버지 루퍼트로부터 뛰어난 성적을 받도록 강하게 압박받았다. 루퍼트는 아들에게 95점이 아닌 100점 만점을 요구하기도 했다. 가족이 자동차를 구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걸어가기를 기대했다.
1.2. 교육 및 초기 활동
그레나다와 영국에서의 정식 교육 과정은 비숍의 지적 성장과 정치적 각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법률 학업과 사회 운동 참여는 그의 혁명적 이념을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1.2.1. 그레나다에서의 교육
중등 교육을 위해 비숍은 로마 가톨릭 프레젠테이션 브라더스 칼리지의 4개 정부 장학금 중 하나를 받았다. 그는 학생회장, 토론 클럽 회장, 역사 연구 그룹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학교 신문 학생의 목소리를 편집했으며 스포츠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는 정치, 역사, 사회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언급했다. 그는 자신의 학교와 경쟁 관계에 있던 성공회 그레나다 남자 고등학교 학생들과도 교류를 시작했다. 그는 1958년 설립된 서인도 제도 연방과 카리브해 국가주의 이념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또한 1959년 쿠바 혁명이 자신에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고 회상했다: "라디오에서 듣거나 식민지 언론에서 읽은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용기와 전설적인 영웅주의가 중요했다. ...그 어떤 것도 쿠바 혁명의 이러한 측면을 가릴 수 없었다."
그는 같은 시기에 줄리어스 니에레레와 프란츠 파농의 저작을 읽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졸업 직전인 1962년 초, 비숍은 그레나다 남자 고등학교의 청년 지도자 버나드 코어드와 함께 '진실을 위한 그레나다 청년 의회'를 창설했다. 이 단체는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통해 섬의 청년들 사이에서 정치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회원들은 금요일마다 세인트 조지스 중앙 광장에 모여 사람들 사이에서 공개적인 정치 토론을 벌였다. 비숍의 친구와 적 모두 그의 카리스마와 웅변술, 특히 주장을 펼칠 때 유머를 재치 있게 사용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1962년, 비숍은 "뛰어난 학업 능력과 전반적인 재능"으로 교장 금메달을 수상하며 졸업했다.
1.2.2. 영국에서의 학업 및 활동
이듬해 비숍과 다른 청년 의회 지도자들이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그레나다 청년 의회의 활동은 끝났다. 1963년 12월, 19세의 비숍은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한편 코어드는 브랜다이스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66년, 비숍은 런던의 그레이스 인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종종 우체부나 채소 포장원 등으로 일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그는 홀본 칼리지 학생회장을 지냈고, 1967년에는 왕립 칼리지 학생회를 이끌었다.
그레나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비숍은 특히 대영 제국에 반대하는 연설과 1795년 페돈의 반란을 이끈 줄리앙 페돈과 같은 노예 반란 지도자들의 삶에 집중했다. 1964년, 비숍은 영국의 서인도 제도 상설 회의(WISC)와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CARD)에 참여했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저작들을 탐구했다. 비숍은 특히 줄리어스 니에레레의 1968년 저서 우자마(Ujamaa): 사회주의 에세이와 1967년 아루샤 선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비숍은 "그레나다의 헌법 발전"이라는 논문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레나다의 1951년 소요 및 총파업에 대한 그의 논문 지도교수와의 평가 불일치로 인해 논문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 1969년 그는 법학 학위를 취득했으며, 런던 노팅힐 게이트에 있는 서인도 제도 공동체를 위한 법률 구조 사무소 설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사무소는 자원봉사 활동이었으며, 그의 주 수입원은 공무원으로서 부과세 검사원 직책에서 나왔다. 영국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비숍은 그레나다 친구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귀국 후 실행할 2개년 행동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섬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조직을 공동으로 만들기 위해 일시적으로 변호사 업무에서 물러나는 것을 포함했다.
2. 정치 이념 형성 및 초기 경력
비숍이 그레나다로 돌아온 후의 초기 정치 활동은 그의 혁명적 이상을 구체화하고 대중적 지지를 결집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신보석운동(NJM)의 창설은 그의 정치적 여정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1. 그레나다 귀국 및 초기 활동
1970년 12월 그레나다로 돌아온 비숍은 환자들을 위한 환경 개선을 희망하며 파업 중이던 세인트조지스 종합병원 간호사들의 법률 변호를 맡았다. 그는 다른 30명의 파업 지지자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7개월간의 재판 끝에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1972년, 비숍은 마르티니크에서 해방 운동의 행동을 전략화하는 회의를 조직하는 데 기여했다. 줄리어스 니에레레의 철학과 그의 탄자니아 사회주의는 비숍이 1972년 선거 이후 조직을 도운 인민 의회 운동(MAP)의 핵심 지침이 되었다. 비숍과 공동 설립자 켄릭 래딕스, 재클린 크레프트는 MAP를 마을 중심의 대중 기관 건설 방향으로 이끌어 국가의 일에 광범위한 참여를 촉진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2.2. 신보석운동 창설 및 발전
1973년 1월, 인민 의회 운동(MAP)은 복지, 교육, 해방을 위한 공동 노력(JEWEL) 및 혁명 교육 및 해방 조직(OREL)과 합병하여 신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 NJM)을 결성했다. 비숍과 JEWEL의 설립자인 유니슨 휘트먼은 NJM의 공동 조정 비서로 선출되었다. 이 마르크스주의적 정당은 사회경제적 발전과 흑인 해방을 목표로 삼았다.
2.3. 게이리 정부와의 대립
비숍과 NJM은 에릭 게이리 정부의 부정부패와 권위주의에 맞서면서 정치적 갈등의 중심에 섰다. 게이리 정부는 갱단을 정치 깡패로 활용하여 노동 운동과 사회 운동가들을 탄압했다.
1973년 11월 18일, 비숍과 신보석운동의 다른 지도자들은 세인트 조지스에서 그렌빌의 사업가들과 만남을 위해 두 대의 차량으로 이동 중이었다. 경찰 부서장 이노센트 벨마르 휘하의 경찰관들이 비숍의 차량 행렬을 따라잡았다. 비숍을 포함한 아홉 명이 벨마르의 경찰 보조원들과 준군사조직인 '몽구스 갱'에 의해 체포되어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구타당했다. 감옥에서 체포된 이들이 수염을 깎았을 때 비숍의 부러진 턱이 드러났다. 1973년 11월 18일은 그레나다에서 "피의 일요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74년 1월 21일, 비숍은 게이리 총리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다. 비숍 일행이 오트웨이 하우스로 돌아오는 길에, 게이리의 보안군이 최루탄을 사용하고 돌과 병을 던지며 공격했다. 이때 모리스의 아버지 루퍼트 비숍이 여러 여성과 아이들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던 중 오트웨이 하우스 문 앞에서 등 뒤에 총을 맞고 살해당했다. 이 가해자들은 게이리의 명령을 받아 "신보석운동과 특히 비숍 가족에 대한 테러 캠페인을 수행"했던 몽구스 갱 단원이었다. 1974년 1월 21일은 그레나다에서 "피의 월요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 이후 비숍은 "우리 [NJM]는 노동 계급을 이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는데, 이는 당이 도시 노동자 조합이나 게이리에게 충성하는 농민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숍은 동료들과 함께 선전과 반정부 시위 동원에서 당 조직과 세포 조직 구성으로 초점을 바꾸는 새로운 전략을 개발했다.
2.4. 야당 대표 시절
1974년 2월 6일, 그레나다 독립 국가 선포 하루 전, 비숍은 무장 반정부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어 포트 조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경찰은 그의 집을 수색하던 중 무기, 탄약, 장비, 군복과 함께 나이트클럽에서 에릭 게이리를 암살하려는 계획, 게릴라 캠프를 설치하려는 계획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틀 후, 비숍은 125 USD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고, 잠시 북아메리카로 도피했다. 1974년 3월 29일, 그는 가이아나에서 범아프리카 회의 지역 운영 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또한 변호사 업무를 계속했다. 1974년 10월, 그는 미국인 관광객 살해 혐의로 기소된 데스몬드 "라스 카빈다" 트로터와 로이 메이슨을 변호했다.
1976년, 비숍은 의회에서 세인트 조지스 남동부 지역 대표로 선출되었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그는 그레나다 하원에서 그레나다 야당 대표직을 역임했다. 그는 위협과 협박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부정선거를 저지른 게이리 총리와 그의 그레나다 연합 노동당 정부에 맞섰다. 1977년 5월, 비숍은 NJM의 지도자이자 쿠바 인민 우호 연구소(ICAP)의 손님 자격으로 유니슨 휘트먼과 함께 쿠바를 처음 방문했다.
3. 인민혁명정부 수반 재임
1979년 혁명 이후 모리스 비숍은 그레나다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인민혁명정부를 이끌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그레나다는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3.1. 1979년 혁명과 집권
1979년, 비숍의 당은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국제 연합 연설을 위해 해외에 있던 에릭 게이리를 축출했다. 비숍은 그레나다의 총리가 되었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비숍의 쿠데타는 대중적 지지를 얻었으며, 많은 그레나다인들과 해외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게이리의 통치는 부패와 권위주의가 증가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인민혁명정부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3.2. 국내 정책 및 성과
집권 후, 비숍은 그레나다에서 여러 중요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의 핵심 원칙은 노동자 권리, 여성 권리, 그리고 인종차별 및 아파르트헤이트와의 투쟁이었다. 비숍의 지도 아래 국립 여성 기구가 결성되었고, 이는 다른 사회 단체들과 함께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여성들은 남녀동일임금과 유급 출산 휴가를 보장받았다. 성차별은 불법화되었다. 교육(대중 교육 센터), 보건 의료, 청소년 문제(국립 청소년 기구)를 위한 조직들도 설립되었다.

비숍 정부는 무상 공공 의료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시기 문맹률은 35%에서 5%로, 실업률은 50%에서 14%로 크게 감소했다. 교육비와 의료비 전액을 국가가 부담하는 공공 의료법과 교육법이 제정되었으며, 각 지역에는 진료소와 국영 탁아소가 건설되었다.
3.3. 경제 정책
비숍 정부는 경제적 개혁에도 나섰다. 다양한 산업 부문의 국유화를 단행하고 집단 농장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개혁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경제 성장은 정체 상태를 유지했다. 한편, 섬의 관광 산업 진흥은 비숍 정부의 약점 중 하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그레나다 최초의 적절한 국제공항" 건설 프로젝트를 재개하고 친구인 피델 카스트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3.4. 대외 관계
총리로서 비숍은 그레나다 혁명을 세계에 알리고 외교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해외를 순방했다. 그는 특히 쿠바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섬 남단에 새로운 국제공항을 건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는데, 공항 건설 자금과 노동력은 쿠바에서 지원받았다. 공항의 대부분의 기반 시설은 유럽과 북미 컨설턴트들에 의해 설계되었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그레나다가 새로운 공항의 긴 활주로를 소련 군용기의 경유지로 사용하려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비숍 정부는 쿠바뿐만 아니라 소련 및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983년 8월, 비숍은 뉴욕 브루클린의 헌터 칼리지에서 열광적인 청중 앞에서 연설했다. 그는 자신의 국가 혁명을 미국 독립 혁명과 노예 해방 선언에 비유하며 옹호했고, 개발도상국의 지속적인 경제적 종속, 1973년 칠레 쿠데타로 인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의 전복, 그리고 콘트라 전쟁에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잔혹한 콘트라 개입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미국 국무부 보고서는 비숍과 NJM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레나다 혁명은 어떤 면에서는 25년 전 이 지역을 뒤흔들었던 쿠바 혁명보다 더 나빴다. 그레나다인의 대다수가 흑인이었기에 그들의 투쟁은 3천만 명의 미국 흑인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그레나다 혁명 지도자들은 영어를 구사하여 그들의 메시지를 미국 청중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었다."
3.5. 통치 및 민주주의 접근 방식
비숍 정부는 혁명 이후 의회를 해산하고 통치 기간 동안 선거를 실시하지 않았다. 비숍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살인을 방관하는 제도"라고 규정하며, 쿠바식 혁명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그는 선거를 무기한 정지시켰는데, 이는 언론과 야당 탄압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인민혁명군은 비숍 행정부 기간 동안 조직되었으며, 비판자들은 군대가 자원 낭비이며, 정치적 반대자들의 구금과 같은 인권 침해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혁명정부는 풀뿌리 민주주의와 노동자 회의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여성, 농민, 청년, 노동자, 민병대 등 자발적인 대중 조직의 설립이 선거를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고 여겨졌다. 또한 선거는 외국 세력의 막대한 자금 유입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고 믿었다. 비숍은 민주주의의 역동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매 5년마다 사람들이 특정 후보 이름 옆에 'X'를 표시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그들은 정부에 아무 말도 할 권리 없이, 국가 운영에 참여할 권리 없이 비(非)인간으로 돌아간다. ...선거가 중요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시기의 문제다. ...우리는 경제가 더 안정되고, 혁명이 더 공고해지며,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선거가 이루어지는 것을 더 선호한다. ...표현의 자유는 사람들이 너무 배고프거나 너무 피곤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없을 때만 의미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인민에게 뿌리내린 적절한 풀뿌리 메커니즘이 존재할 때만 의미가 있다. ...우리는 대다수가 결코 누리지 못했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자리, 괜찮은 주거, 좋은 식사. ...이러한 인권은 지난 수년간 카리브해의 소수에게만 허락된 인권이었으며, 이제 대다수 인민이 처음으로 그러한 인권을 누리기 시작할 때가 왔다."
4. 내부 갈등 및 처형
인민혁명정부 내에서 비숍의 몰락과 죽음을 초래한 내부 권력 투쟁은 그레나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4.1. 심화되는 내부 갈등
1983년 9월, 인민혁명정부 지도부 내의 긴장이 극에 달했다. 부총리 버나드 코어드가 이끄는 당내 파벌은 비숍에게 총리직에서 물러나거나 권력 분담 협정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비숍은 몇 주 동안 이 문제를 고려했지만, 궁극적으로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코어드 파벌은 인민혁명군(PRA)과 연계하여 10월 13일 비숍을 가택 연금시켰다. 이 사건으로 혁명 운동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4.2. 체포 및 대규모 시위
비숍의 가택 연금 소식이 알려지자, 그의 석방과 복권을 요구하는 대규모 대중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인구 10만 명의 섬에서 시위 참가자는 최대 3만 명에 달했으며, 심지어 비숍의 경호원 일부도 시위에 가담했다. 이처럼 상당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비숍은 코어드 파벌의 결의를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언론인에게 "나는 죽은 사람이다"라고 털어놓았다.
4.3. 처형 및 즉각적인 여파
1983년 10월 19일, 시위대들이 비숍을 가택 연금에서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트럭을 타고, 이어서 자동차를 타고 육군 본부가 있는 포트 루퍼트(현재의 포트 조지)로 향했고,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그곳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때 코어드는 포트 프레더릭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포트 루퍼트를 탈환하도록 했다. 비숍과 그의 내각 각료, 보좌관을 포함한 7명이 체포되었다. 네 명으로 구성된 인민혁명군 총살형 집행대는 포트 루퍼트 안마당에서 비숍과 다른 사람들을 기관총으로 총살형에 처했다. 그가 사망한 후, 한 총격범은 그의 목을 긋고 반지를 훔치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 시신들은 칼리비니 반도의 한 군사 캠프로 옮겨져 구덩이에서 부분적으로 불태워졌다. 그들의 유해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총살형 이후 허드슨 오스틴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 군사 평의회가 실권을 장악했다.
비숍의 살해는 부분적으로 동카리브 국가기구(OECS)와 바베이도스, 자메이카가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당시 그레나다 총독이었던 폴 스쿤 경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내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인민혁명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을 감행했다. 미국은 "그레나다에 거주하는 미국 시민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 침공으로 혁명 정부의 사회 변혁 정책은 모두 폐지되었다. 비숍 살해에 연루된 코어드와 오스틴 등은 체포되어 영국에서 재판을 받았다. 1986년에 이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2007년 재심을 통해 형기가 추가로 감형되었다. 오스틴은 2008년에, 코어드는 2009년에 출소했다.
5. 개인 생활
모리스 비숍은 1966년 간호사 안젤라 레드헤드와 결혼했다. 그들은 존(1967년생)과 나디아(1969년생) 두 자녀를 두었다. 모리스가 총리로 재직 중이던 1981년, 안젤라는 두 자녀와 함께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비숍은 또한 오랜 파트너이자 그레나다 교육부 장관이었던 재클린 크레프트와의 사이에서 아들 블라디미르 레닌 크레프트-비숍(1978년~1994년)을 두었다. 재클린은 10월 19일 포트 루퍼트 총살형 집행대 앞에서 모리스와 함께 살해당했다. 부모가 사망한 후, 블라디미르는 이복 형제자매들과 함께 캐나다로 갔으나, 16세에 토론토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6. 유산과 평가
모리스 비숍과 그의 혁명은 그레나다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며, 그의 유산은 여전히 논쟁과 추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6.1. 역사적 평가
모리스 비숍의 리더십과 업적, 그리고 논란이 되는 측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교육, 보건, 여성 인권 등 사회 복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실업률과 문맹률을 낮추는 등 그레나다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특히, 인민혁명정부가 추진했던 풀뿌리 민주주의 시도와 대중 조직을 통한 참여 유도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강조된다.
그러나 비숍 정부는 선거를 중단하고 언론과 야당을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는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혁명적 전환기의 필요성 때문이었으나, 정치적 자유를 제한했다는 점에서 비판적 평가가 뒤따른다. 특히 인민혁명군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구금하는 등 인권 침해에 관여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궁극적으로 그의 죽음과 뒤이은 미국의 침공은 그레나다 혁명의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며, 그의 통치가 남긴 유산에 대한 복합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6.2. 기념 및 영향
2009년 5월 29일, 그레나다의 국제공항(구 포인트 살린 국제공항)은 모리스 비숍 국제공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명칭 변경 기념식에서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총리 랄프 곤살베스는 "카리브해의 뛰어난 아들에 대한 늦은 명예는 그레나다 역사에서 부정의 장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비숍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추모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사상과 업적은 여전히 카리브해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과 흑인 해방 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