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리안스 파하르스(Marians Pahars마리안스 파하르스라트비아어)는 라트비아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현 축구 감독이다. 선수 시절 주로 스트라이커로 활약했으며, 사우샘프턴에서 프리미어리그와 EFL 챔피언십에서 뛰는 등 경력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다. 또한, 라트비아 상위 리그의 스콘토 FC에서 두 차례 활약했다. 그는 라트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1년 동안 75경기에 출전하여 15골을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로서 축구 경력을 이어갔으며, 스콘토의 감독을 시작으로 라트비아 U-21 축구 국가대표팀 및 성인 라트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이후 FK 옐가바와 시에나에서 클럽 감독을 역임했다. 그의 라트비아 이름은 '마리안스'이지만, 영국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마리안'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라트비아의 마이클 오언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며 자국 축구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2. 생애 초기 및 선수 경력 시작
마리안스 파하르스는 1976년 8월 5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르노바이에서 라트비아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를 열렬히 응원하며 축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약 8살이 되던 해, 스콘토의 유리이스 안드레예프스 코치가 그의 학교를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파하르스는 축구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안드레예프스는 파하르스의 축구 경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8세에 파르다우가바 리가에 입단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고, 이후 스콘토-메탈스를 거쳐 1995년 스콘토 FC 1군 팀에 합류했다. 초기에는 주로 윙어로 뛰는 미드필더였으나, 점차 스트라이커 역할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1995년 시즌에는 9경기에서 8골을 기록하며 최고의 득점률을 보였고, 다음 시즌에는 28경기에서 12골을 추가하며 라트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전성기에는 '라트비아의 마이클 오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8년 시즌에는 스콘토에서 26경기 19골을 기록하며 빅클럽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살레르니타나 (이탈리아), 베르더 브레멘 (독일), 카지노 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며, 라트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게리 존슨의 추천으로 사우샘프턴의 데이브 존스 감독에게 영입되었다.
3. 클럽 경력
마리안스 파하르스는 라트비아 리그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무대로 진출하여 사우샘프턴에서 전성기를 보냈으며, 이후 다시 라트비아 리그로 복귀하며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3.1. 스콘토 FC (1기)
파하르스는 파르다우가바 리가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스콘토-메탈스를 거쳐 1995년 스콘토 FC에 입단했다. 스콘토에서 그는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특히 1995년에는 9경기에서 8골을 넣으며 인상적인 득점력을 보여주었고, 이듬해인 1996년에는 28경기에서 12골을 기록하며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했다. 스콘토에서의 활약은 그가 라트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정규 멤버로 발돋움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98년 시즌에는 26경기에서 19골을 기록하며 유럽의 여러 빅클럽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US 살레르니타나 1919, 독일의 SV 베르더 브레멘, 오스트리아의 FC 레드불 잘츠부르크 등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당시 라트비아 대표팀 감독이었던 게리 존슨의 추천으로 사우샘프턴의 데이브 존스 감독에게 영입되었다.
3.2. 사우샘프턴
파하르스는 사우샘프턴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활약하며 그의 선수 경력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3.2.1. 입단 및 초기 성공
파하르스는 1999년 2월 10일 옥스퍼드 유나이티드와의 리저브팀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7대1 승리를 이끌었다. 사우샘프턴은 스콘토 FC와 약 80.00 만 GBP의 이적료에 합의했고, 취업 허가 문제와 PFA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며 1999년 3월에 사우샘프턴에 합류했다. 이로써 그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최초의 라트비아 선수가 되었다.
그는 1999년 4월 5일 코번트리 시티와의 원정 경기에서 70분 교체 투입되어 데뷔전을 치렀다. 더 델에서 열린 홈 데뷔전은 4월 17일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였는데, 교체 투입되어 중요한 동점골을 넣었고 거의 역전골까지 기록할 뻔하며 3대3 무승부를 이끌었다. 당시 사우샘프턴은 프리미어리그 잔류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으며, 시즌 최종전에서 승리해야만 잔류를 확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파하르스는 에버턴과의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하며 2대0 승리를 이끌었고, 사우샘프턴은 다음 시즌에도 프리미어리그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999-2000 시즌 동안 33경기에 출전하여 13골로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이때 데이브 존스 감독은 글렌 호들로 교체되었고, 호들 감독은 파하르스를 측면 공격수로 기용하여 그의 드리블과 속도로 상대 팀을 위협하고, 동료들에게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직접 득점하는 역할을 맡겼다.
3.2.2. 부상과 기복
2000-01 시즌 초반에는 스트라이커로서 6골을 넣으며 인상적인 출발을 보였으나, 다시 원래 포지션으로 돌아오면서 폼이 저하되었다. 그는 여전히 동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위협적인 선수였지만, 경기력은 기복이 심했고 시즌 총 득점은 9골에 그쳤다.
다음 시즌 초반에도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인 그는 2001년 9월 15일 볼턴 원더러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교체 투입되어 결승골을 기록했다. 이후 세 달 동안 꾸준히 득점을 이어갔으며, 11월 24일 찰턴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는 1대0 승리의 결승골을 기록하며 세인트 메리즈 스타디움에서의 팀 첫 승리를 안겼다. 불행히도 새해 이후 득점이 다시 줄었지만, 그는 리그와 FA컵에서 총 16골을 기록하며 사우샘프턴 소속으로 개인 최고 득점 시즌을 보냈다. 파하르스의 16골과 공격 파트너 제임스 비티의 14골은 두 선수가 프리미어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음을 의미했다.
2002년 여름, 파하르스는 탈장 수술을 받아 프리시즌 전체를 결장했다. 9월 11일 에버턴과의 홈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1대0 승리를 이끌었지만,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시즌 초반에는 잦은 출전 중단이 있었고, 10월 5일 맨체스터 시티와의 홈 경기에서 받은 레드카드로 인한 출전 정지는 그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2002년 11월에는 발목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시즌 대부분을 결장했으며, 2003년 FA컵 결승전을 앞두고 또 한 번의 수술을 받으며 2002-03 시즌은 그에게 매우 불행하게 마무리되었다.
2003-04 시즌 초반 역시 부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며, 리저브팀으로 복귀하려던 시도도 부상 재발로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UEFA 유로 2004 본선 진출을 확정 지은 라트비아 대표팀 경기에서 마지막 몇 분을 뛸 수 있었다. 유로 2004 본선 진출이라는 추가적인 동기 부여를 통해 그는 완전히 컨디션을 회복했고, 세인트의 선발 라인업에 3경기 연속으로 복귀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시즌 첫 골이자 1년여 만에 터진 골은 2003년 12월 21일 지역 라이벌 포츠머스와의 홈 경기에서 나왔는데, 환상적인 오른발 슛으로 골문 구석을 갈라 3대0 승리를 이끌었다.
부상에서 회복한 후, 그는 2004-05 프리시즌 기간 중 스윈던 타운과의 원정 경기에서 다시 부상을 입었다. 이미 세 번의 수술을 받은 동일한 발목에 거친 태클을 당하면서 시즌 초반을 결장하게 되었다. 리저브팀 복귀는 희망적이었지만, 문제가 다시 발생하면서 시즌 전체를 결장하게 되었다. 결국 사우샘프턴은 28년간의 잉글랜드 최상위 리그 생활을 마감하고 강등되는 좌절스러운 상황을 맞이했다.
2005-06 시즌 역시 부상으로 인해 복귀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는 답답한 시즌이었다. 그는 시즌 동안 10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지만, 이는 그의 사우샘프턴 경력을 이어가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결국 2006년 5월, 사우샘프턴에서 7년 동안 156경기에 출전하여 45골을 기록한 후, 그의 계약이 다음 시즌에 갱신되지 않을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3.2.3. 사우샘프턴과의 이별
2006년 4월 30일, 시즌 마지막 경기 후 파하르스는 세인트 메리즈 스타디움 경기장 주변을 돌며 사우샘프턴 선수들과 함께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감사 세리머니'에 참여하며 팬들과 작별을 고했다. 이는 선수 본인과 많은 사우샘프턴 팬들에게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3.3. 이후 클럽 경력
2006년 7월, 파하르스는 조지아의 전 국가대표 테무리 케츠바이아가 감독을 맡고 있던 키프로스 팀인 아노르토시스 파마구스타와 계약했다. 그러나 그는 이 클럽에서 자주 부상에 시달렸고, 결국 2008년 1월에 계약이 해지되었다.
2008년, 그는 친정팀인 스콘토 FC로 돌아와 한 시즌 동안 뛰면서 국내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이 시즌 후 스콘토를 떠나 유르말라에 합류하여 국내 리그 두 경기를 뛰고 선수 경력을 마감했다.

4. 국가대표 경력
파하르스는 1996년 초 라트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고, 1996년 3월 12일 키프로스와의 원정 친선 경기에서 1대0으로 패하며 데뷔전을 치렀다. 국가대표 첫 골은 1997년 2월 17일 폴란드와의 홈 친선 경기에서 3대2로 패한 경기에서 기록했다. 그는 총 75경기에 출전하여 15골을 기록했다.
라트비아는 월드컵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2001년 6월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를 꺾고 발틱컵에서 우승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파하르스는 이 두 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기록했다. 이후 2001년 11월에는 3년 연속으로 올해의 라트비아 축구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2003년 11월 19일 튀르키예와의 경기에서 2대2 무승부를 기록하며 UEFA 유로 2004 본선 진출을 확정 지을 때 경기 막판에 출전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완전한 몸 상태를 회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2004년 2월 18일 카자흐스탄과의 친선 경기에서 3대1로 승리하며 2002년 5월 이후 처음으로 국가대표 골을 기록했다.
시즌 내내 부상 문제가 많았던 그는 UEFA 유로 2004 본선에서 라트비아의 3개 조별리그 경기에 모두 교체 선수로 출전하며 대회 분위기를 경험했다.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라트비아 | 1996 | 5 | 0 |
1997 | 13 | 2 | |
1998 | 11 | 5 | |
1999 | 6 | 2 | |
2000 | 6 | 0 | |
2001 | 8 | 4 | |
2002 | 6 | 1 | |
2003 | 1 | 0 | |
2004 | 6 | 1 | |
2005 | 0 | 0 | |
2006 | 3 | 0 | |
2007 | 9 | 0 | |
총계 | 75 | 15 |
번호 | 날짜 | 경기장 | 상대팀 | 득점 | 결과 | 대회 |
---|---|---|---|---|---|---|
1. | 1997년 2월 17일 | 키프로스 데리니아 | 폴란드 | 1-2 | 2-3 | 1997 키프로스 국제 축구 토너먼트 |
2. | 1997년 7월 10일 | 리투아니아 빌뉴스 | 에스토니아 | 2-1 | 2-1 | 1997 발틱컵 |
3. | 1998년 6월 25일 | 에스토니아 발가 | 에스토니아 | 1-0 | 2-0 | 1998 발틱컵 |
4. | 1998년 2월 8일 | 몰타 타아 칼리 | 몰타 | 1-1 | 1-2 | 1998 몰타 국제 축구 토너먼트 |
5. | 1998년 2월 10일 | 알바니아 | 1-0 | 2-2 | ||
6. | 2-2 | |||||
7. | 1998년 9월 6일 | 노르웨이 오슬로 | 노르웨이 | 1-0 | 3-1 | UEFA 유로 2000 예선 그룹 2 |
8. | 1999년 6월 5일 | 라트비아 리가 | 슬로베니아 | 1-0 | 1-2 | |
9. | 1999년 10월 9일 | 노르웨이 | 1-1 | 1-2 | ||
10. | 2001년 4월 25일 | 산마리노 | 1-0 | 1-1 | 2002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6조 | |
11. | 2001년 6월 2일 | 벨기에 브뤼셀 | 벨기에 | 1-3 | 1-3 | |
12. | 2001년 7월 3일 | 리가, 라트비아 | 에스토니아 | 2-1 | 3-1 | 2001 발틱컵 |
13. | 2001년 7월 5일 | 리투아니아 | 2-1 | 4-1 | ||
14. | 2002년 5월 22일 | 핀란드 헬싱키 | 핀란드 | 1-0 | 1-2 | 친선경기 |
15. | 2004년 2월 18일 | 키프로스 라르나카 | 카자흐스탄 | 1-1 | 3-1 | 2004 키프로스 국제 축구 토너먼트 |
5. 감독 경력
마리안스 파하르스는 선수 은퇴 후 코치로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으며, 여러 클럽과 라트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5.1. 스콘토 FC
2010년, 파하르스는 알렉산드르스 스타르코프스 감독의 스콘토에서 비탈리이스 아스타피에프스와 함께 수석 코치직을 수락했다. 그는 2010년 다시 한번 라트비아 리그 우승을 경험했는데, 이번에는 수석 코치로서였다.
2011년, 스타르코프스가 바쿠로 떠나자 파하르스는 스콘토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두 시즌 동안 팀을 이끌면서 2011년 발틱 리그 우승과 라트비아 컵 우승을 이끌었으며, 2012년에는 라트비아 상위 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2년 12월, 파하르스는 스콘토 FC를 떠났고, 타마즈 페르티아가 후임 감독이 되었다.
5.2. 라트비아 국가대표팀
파하르스는 LFF로부터 라트비아 U-21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 제안을 수락하며 다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부임 직후인 2013년 7월 11일, 알렉산드르스 스타르코프스 감독이 사임하자 파하르스는 성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감독으로서 파하르스는 라트비아를 2014 발틱컵과 2016 발틱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2014년과 2018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으며, 2016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 진출에도 실패했다. 그는 2017년 6월 1일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5.3. FK 옐가바
파하르스는 라트비아 국내 축구 무대로 돌아와 2018 라트비아 상위 리그 시즌을 앞두고 옐가바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첫 시즌에 팀을 6위로 이끌었다. 그의 두 번째 시즌에는 옐가바가 라트비아 상위 리그에서 7위를 차지하며 전 시즌보다 소폭 순위가 하락했고, 파하르스는 해당 시즌을 끝으로 클럽을 떠났다.
5.4. 시에나
2021년 1월 26일, 파하르스는 당시 이전 파산으로 인해 세리에 D에 속해 있던 이탈리아 클럽 시에나의 감독으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그는 부임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2월 10일, 좋지 않은 성적을 이유로 사임했다.
6. 축구 외 활동
파하르스는 2020년 리가 시의회 선거에 리가를 섬기기 위해 존경받는 당의 후보로 출마했으나 당선되지 못했다.
7. 플레이 스타일
마리안스 파하르스는 포워드로서 타고난 스피드와 유연한 드리블 기술을 겸비하고 있었다. 뛰어난 보디 밸런스를 바탕으로 상대 수비수를 돌파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원래 포지션인 중앙 공격수 외에도 양 측면 미드필더로도 활약할 수 있었으며, 이는 그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는 특징이었다.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 덕분에 그는 '라트비아의 마이클 오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8. 수상 및 업적
마리안스 파하르스는 선수 및 감독으로서 다음과 같은 수상 및 업적을 기록했다.
- 선수 시절
- 스콘토 FC
- 비르스리가: 1995, 1996, 1997, 1998
- 라트비아 컵: 1995, 1997, 1998
- 개인
- 올해의 라트비아 축구 선수: 1999, 2000, 2001
- 감독 시절
- 발틱컵: 2014, 2016
- 스콘토 FC
9. 경력 통계
9.1. 클럽
클럽 | 시즌 | 리그 | 국내컵 | 리그컵 | 유럽 | 총계 | ||||||
---|---|---|---|---|---|---|---|---|---|---|---|---|
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파르다우가바 | 1994 | 라트비아 상위 리그 | 17 | 3 | - | 17 | 3 | |||||
스콘토-메탈스 | 1995 | 라트비아 상위 리그 | 16 | 4 | - | 16 | 4 | |||||
스콘토 | 1995 | 라트비아 상위 리그 | 9 | 8 | - | 9 | 8 | |||||
1996 | 28 | 12 | - | 28 | 12 | |||||||
1997 | 22 | 5 | - | 22 | 5 | |||||||
1998 | 26 | 19 | - | 26 | 19 | |||||||
총계 | 85 | 44 | - | 85 | 44 | |||||||
사우샘프턴 | 1998-99 | 프리미어리그 | 6 | 3 | 0 | 0 | 0 | 0 | - | 6 | 3 | |
1999-2000 | 33 | 13 | 2 | 0 | 3 | 0 | - | 38 | 13 | |||
2000-01 | 31 | 9 | 4 | 0 | 2 | 0 | - | 37 | 9 | |||
2001-02 | 36 | 14 | 1 | 1 | 2 | 1 | - | 39 | 16 | |||
2002-03 | 9 | 1 | 0 | 0 | 1 | 0 | - | 10 | 1 | |||
2003-04 | 14 | 2 | 1 | 0 | 1 | 0 | - | 16 | 2 | |||
2004-05 | 0 | 0 | 0 | 0 | 0 | 0 | - | 0 | 0 | |||
2005-06 | 챔피언십 | 8 | 1 | 2 | 0 | 0 | 0 | - | 10 | 1 | ||
총계 | 137 | 43 | 10 | 1 | 9 | 1 | 0 | 0 | 156 | 45 | ||
아노르토시스 파마구스타 | 2006-07 | 키프로스 퍼스트 디비전 | 17 | 4 | - | 17 | 4 | |||||
2007-08 | 2 | 0 | - | 2 | 0 | |||||||
총계 | 19 | 4 | - | 19 | 4 | |||||||
스콘토 | 2008 | 라트비아 상위 리그 | 19 | 8 | - | 19 | 8 | |||||
유르말라 | 2009 | 라트비아 상위 리그 | 2 | 0 | - | 2 | 0 | |||||
경력 총계 | 295 | 106 | 295 | 106 |
9.2. 감독 경력
팀 | 시작일 | 종료일 | 기록 | ||||
---|---|---|---|---|---|---|---|
경기수 | 승 | 무 | 패 | 승률 | |||
스콘토 | 2011년 1월 11일 | 2012년 12월 21일 | 78 | 44 | 20 | 14 | 56.41% |
라트비아 | 2013년 7월 11일 | 2017년 6월 1일 | 33 | 7 | 11 | 15 | 21.21% |
옐가바 | 2018년 3월 27일 | 2019년 11월 9일 | 60 | 15 | 14 | 31 | 25.00% |
시에나 | 2021년 1월 25일 | 2021년 2월 10일 | 5 | 0 | 1 | 4 | 0.00% |
총계 | 176 | 66 | 46 | 64 | 37.50% |
10. 유산 및 평가
마리안스 파하르스는 라트비아 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뛴 최초의 라트비아 선수로서 자국 축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사우샘프턴에서의 활약은 그를 클럽의 상징적인 선수로 만들었고, 특히 팀의 프리미어리그 잔류를 이끌었던 1998-99 시즌의 결정적인 두 골은 팬들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비록 잦은 부상으로 인해 선수 경력 후반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의 타고난 재능과 득점력은 여전히 높이 평가된다.
감독으로서도 라트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발틱컵에서 두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라트비아 축구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로 남아있다. '라트비아의 마이클 오언'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빠르고 기술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많은 팬들에게 사랑받았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경기장 안에서의 성과를 넘어, 라트비아 축구의 발전과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한 중요한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