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배경
네도 나디는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유명한 펜싱 사범 주세페 나디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펜싱 훈련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다.
1.1. 어린 시절과 펜싱 입문
네도 나디는 1894년 6월 9일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리보르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키는 1.88 m였다. 그의 아버지 주세페 나디 (Giuseppe Nadi주세페 나디이탈리아어)는 저명한 펜싱 사범이었고, 그의 남동생은 훗날 올림픽 펜싱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알도 나디였다. 네도는 일곱 살 때 리보르노에 있는 아버지의 체육관에서 플뢰레로 첫 펜싱 레슨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에게 플뢰레와 사브르를 가르쳤지만, 에페는 "규율이 없는 무기"라고 여겨 가르치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나디 형제는 따로 연습을 하러 다녔으며, 에페 기술은 본질적으로 독학으로 익혔다.
1.2. 초기 활동과 성과
펜싱 경력 초기에 네도 나디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린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즉위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세 가지 무기를 다루는 실력을 선보여 은상을 수상했다. 이는 그의 초기 펜싱 실력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과였다.
2. 올림픽 경력
네도 나디는 두 차례의 올림픽에 참가하여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으며, 특히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서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2.1.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191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조국 이탈리아 대표로 첫 출전했다. 당시 나이는 18세 29일로, 그는 이 대회에서 플뢰레 개인전 금메달을 획득하며 올림픽 펜싱 역사상 최연소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그는 결선 라운드에서 7연승을 거두며 동료 선수 피에트로 스페치알레와 오스트리아의 리하르트 페르데르베르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외에 사브르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5위를 기록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6년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올림픽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취소되었다. 네도 나디는 이 기간 동안 이탈리아 육군에 복무했으며, 전투에서의 용맹함을 인정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은 그의 선수 경력을 잠시 중단시켰지만, 그는 전쟁 후 다시 펜싱 선수로 복귀했다.
2.3.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네도 나디는 다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열린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는 전쟁 패전국인 중앙유럽 국가들과 소비에트 연방이 불참했다. 특히 당시 펜싱 강국이었던 헝가리의 불참은 네도 나디에게 금메달 획득의 더 큰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개인전 플뢰레와 사브르는 물론, 세 가지 펜싱 종목(플뢰레, 에페, 사브르)의 단체전에도 모두 출전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올림픽에서 네도 나디의 활약은 펜싱 선수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경지로 찬사를 받았다. 그는 개인 플뢰레 종목 결선에서 10승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고, 이는 8년 만에 올림픽 플뢰레 개인전 2연패를 달성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주세페 나디는 에페를 "거칠고 규율 없는 무기"라고 여겨 나디가 에페 종목에 출전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플뢰레는 상대방 몸통에만 득점이 인정되고, 사브르는 상체와 마스크에 득점이 인정되는 것과 달리, 에페는 신체의 어떤 부분이라도 유효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도 나디는 동생 알도를 포함한 이탈리아 에페 팀을 이끌고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했다. 다만 개인 에페 종목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네도 나디의 완벽한 균형 감각, 타이밍 조절, 빠른 반사 신경은 어떤 펜싱 스타일에서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는 큰 어려움 없이 개인 사브르 종목에서 11대 9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획득했고, 이 대회에서 동생 알도 나디는 은메달을 추가했다. 단체 사브르 종목에서도 이탈리아 팀은 그를 중심으로 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결과적으로 나디는 개인전 금메달 2개(플뢰레, 사브르)와 단체전 금메달 3개(플뢰레, 에페, 사브르)를 포함해 총 5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는 단일 올림픽에서 펜싱 선수가 획득한 최다 금메달 기록이며, 이후 1972년에 마크 스피츠가 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전체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 단일 대회 최다 금메달 기록이기도 했다. 그의 동생 알도는 단체전 금메달 3개와 사브르 개인전 은메달 1개를 추가하여, 나디 형제는 한 올림픽에서 가족으로서 스포츠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는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 개회식에서 이탈리아 선수단 기수를 맡기도 했다.
3. 말년 경력과 기여
올림픽에서의 위업 이후 네도 나디는 프로 선수로 전향하는 등 직업적인 변화를 겪었으며, 펜싱계에 대한 지속적인 기여를 이어갔다.
3.1. 프로 전향과 코치 활동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서의 성공 이후, 네도 나디는 프로 선수로 전향하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자키 클럽에서 펜싱 코치로 활동했다. 몇 년 후 그는 로마로 돌아와 아마추어 자격을 회복했다. 1932년에는 현역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3.2. 이탈리아 펜싱 연맹 회장
1935년부터 1940년 사망할 때까지 이탈리아 펜싱 연맹의 회장직을 역임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나디에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이탈리아 펜싱팀의 코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나디는 이를 수락했다. 그의 지도 아래 이탈리아 펜싱팀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이탈리아 펜싱 선수들은 개인 에페에서 금, 은, 동메달을 모두 휩쓸며 단체전 금메달을 손쉽게 획득했다. 또한 플뢰레에서는 개인 금메달과 동메달, 단체전 금메달을, 사브르에서는 개인 은메달과 단체전 은메달을 획득하며 대회를 지배했다.
4. 유산과 평가
네도 나디는 펜싱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독보적인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4.1. 기록과 독보적인 업적
네도 나디는 한 올림픽에서 플뢰레, 에페, 사브르 세 가지 무기 종목 모두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유일한 펜싱 선수라는 독보적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서 획득한 5개의 금메달은 한 대회에서 펜싱 선수가 획득한 최다 금메달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기록은 1972년 올림픽에서 수영 선수 마크 스피츠가 7개의 금메달을 획득하기 전까지 단일 올림픽 대회 최다 금메달 기록이기도 했다. 그는 총 6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올림픽 역사상 가장 위대한 펜싱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4.2. 기념과 추모
네도 나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독일 뮌헨에는 그의 이름을 딴 장소들이 있다. 1972년 1972년 뮌헨 올림픽을 위해 올림픽 선수촌과 함께 조성된 뮌헨의 작은 인공호수인 나디제(Nadisee나디제독일어)와 인근의 나디슈트라세(Nadistraße나디슈트라세독일어)가 바로 그 예이다. 이들은 위대한 이탈리아 펜싱 선수 네도 나디를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5. 같이 보기
- 알도 나디
- 펜싱
- 올림픽 다관왕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