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formation
소바나의 힐데브란트는 토스카나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개혁적인 시각을 형성하고 교회 개혁의 길을 걷게 되었다.
1.1. Birth and childhood
그레고리오는 1015년경 또는 1020년경, 1023년경, 1028년경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 남부 그로세토의 소바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힐데브란트였으며, 이탈리아어로는 Ildebrando일데브란도이탈리아어, 독일어로는 Hildebrand힐데브란트독일어라고도 불렸다. 그는 비천한 집안 출신으로,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어린 시절 그는 학업을 위해 로마로 보내져 아벤티노 언덕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 프리오라토 성당의 수도원에서 공부했으며, 그의 삼촌이 그 수도원의 원장이었다고 전해진다.
1.2. Education and early influences
힐데브란트의 스승 중에는 박식한 아말피 대주교 라우렌시오와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되는 요한네스 그라티아누스가 있었다. 1046년 수트리 공의회에서 요한네스 그라티아누스가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승인 하에 폐위되어 독일로 망명했을 때, 힐데브란트는 그를 따라 쾰른으로 갔다. 이 경험은 세속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이 필요하다는 그의 시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일부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1048년 그레고리오 6세가 사망한 후 힐데브란트는 클뤼니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비록 그가 클뤼니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그곳에서 그는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신학, 교회법, 철학을 공부하면서 교회 개혁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발전시켰다.
2. Early ecclesiastical career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부터 로마 교황청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교회의 개혁 정책을 주도했다.
2.1. Service under earlier popes
1049년 힐데브란트는 툴의 아빠스 브루노와 함께 로마로 돌아왔으며, 브루노는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 레오 9세가 되었다. 레오 9세는 힐데브란트를 부제이자 교황청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힐데브란트는 레오 9세의 치세에 성직매매와 성직자 혼인을 반대하는 법령을 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54년 레오 9세는 투르의 베렌가리우스가 촉발한 성체성사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힐데브란트를 프랑스 투르의 교황 특사로 파견했다.
레오 9세가 사망한 후, 후임 교황 교황 빅토르 2세는 그를 교황 특사로 재차 임명했다. 빅토르 2세의 뒤를 이은 교황 스테파노 9세는 힐데브란트와 루카의 안셀모를 독일로 보내 황후 아그네스로부터 자신의 교황 선출에 대한 승인을 받아오도록 지시했다. 스테파노 9세는 로마로 돌아오기 전에 사망했지만, 힐데브란트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로마 귀족들이 대립교황 베네딕토 10세를 선출하면서 발생한 교회 위기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그네스 황후의 지지 덕분에 베네딕토 10세는 폐위되었고, 피렌체 주교가 교황 니콜라오 2세로 즉위했다. 힐데브란트는 카푸아의 리카르도 1세가 보낸 300명의 노르만족 기사들과 함께 대립교황이 피신한 갈레리아 안티카 성을 점령하는 데 직접 참여했다. 1058년에서 1059년 사이에 그는 로마 교회의 수석부제로 서임되어 교황청 행정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2.2. Role in papal elections and reforms
1061년 10월 교황 선거에서 루카의 대안셀모가 교황 알렉산데르 2세로 선출될 당시 힐데브란트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새 교황은 힐데브란트와 그의 지지자들이 고안한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교황 고문으로 활동하던 시절, 힐데브란트는 이탈리아 남부 노르만 왕국과의 화해, 이탈리아 북부의 파타리아 운동과의 반독일 동맹 체결, 그리고 무엇보다도 추기경들에게 새로운 교황 선출에 대한 배타적 권한을 부여하는 교회법의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황제의 개입을 막기 위한 중요한 조치였다.
3. Papacy (1073-1085)
그레고리오 7세의 교황 재위 기간은 그의 교황권 강화 비전과 교회의 독립을 위한 개혁 의제를 추진하는 데 집중되었다.
3.1. Election and reform agenda

1073년 4월 21일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사망하자,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장례 미사가 거행되던 중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 "힐데브란트를 교황으로!", "복되신 베드로께서 수석부제 힐데브란트를 선택하셨다!"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힐데브란트는 즉시 피하여 한동안 숨었지만, 결국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서 발견되어 모인 추기경들에 의해 로마 사제단의 동의와 군중의 환호 속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힐데브란트의 교황 선출이 순전히 자발적인 것인지 아니면 사전에 계획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당시와 이후로도 논쟁이 많았다. 힐데브란트를 지지했던 수트리의 주교 베니조에 따르면, 이 함성은 산 클레멘테 성당의 추기경 사제 휴고 칸디두스가 설교단으로 달려가 군중에게 연설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확실히 그의 선출 방식은 반대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에 대한 많은 비난은 개인적인 반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으며,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그의 승진을 공격하기 위해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의심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선출은 607년에 제정된 교황 헌장에 위배되어 매우 불규칙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교회법은 교황의 장례 후 3일이 지나야 교황 선거를 시작할 수 있도록 금지하고 있었다. 또한 추기경 주교들에게 후보 지명권을 독점적으로 부여한 교황 니콜라오 2세의 헌장에도 위배되었고, 황제와의 협의 요건도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서 두 번째 선거를 통해 자신의 선출을 재확인받았다.
그레고리오 7세의 초기 교황 서한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명확히 인정하며 그의 선출과 인기에 대한 의혹을 불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1073년 5월 22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고, 6월 29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에 주교로 서품되어 교황으로 즉위했다. 그의 선출을 선언한 문서에서 선거인들은 그레고리오 7세를 "경건한 사람, 인간적이고 신적인 지식에 능통한 사람, 공평과 정의를 탁월하게 사랑하는 사람, 역경에 굳건하고 번영에 절제하는 사람, 사도의 말에 따라 품행이 바르고, 흠 없고, 겸손하며, 신중하고, 순결하며, 손님 대접에 너그럽고,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으로, 어린 시절부터 이 어머니 교회의 품에서 너그럽게 양육되었고, 그의 삶의 공로로 이미 수석부제직의 존엄에 올랐다"고 칭송했다. 이어서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수석부제 힐데브란트를 교황이자 사도의 후계자로 선택하며, 이제부터 영원히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을 가지게 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레고리오 7세의 초기 대외 정책은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족과의 화해를 목표로 했지만, 양측은 결국 만나지 못했다. 북유럽 제후들에게 십자군 원정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후, 베네벤토의 란둘프 6세와 카푸아의 리카르도 1세와 같은 다른 노르만 제후들의 지지를 얻은 그레고리오 7세는 1074년 로베르 기스카르를 파문할 수 있었다. 같은 해 그레고리오 7세는 라테라노 궁전에서 성직매매를 규탄하고 성직자들의 독신주의를 재천명하는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법령들은 다음 해(2월 24일-28일) 파문의 위협 아래 더욱 강조되었다. 특히 그레고리오 7세는 오직 교황만이 주교를 임명하거나 해임하거나 교구에서 교구로 이동시킬 수 있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훗날 서임권 투쟁의 원인이 되었다.
3.1.1. Papal vestments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아고스티노 바라비치니 바리아니는 1073년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 선출 직후 붉은색 망토를 착용함으로써 장엄하게 교황권을 부여받았음을 알린 최초의 교황이었다고 평가했다. 전통적으로 선출된 교황은 붉은색(모제타, 신발, 망토)과 흰색(수단, 양말)의 두 가지 색상 의복을 착용했다.
3.2. Core principles and vision for the Church
그레고리오 7세의 평생 과업은 교회가 하느님에 의해 세워졌으며, 하느님의 뜻이 유일한 법인 단일 사회에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확신에 기반을 두었다. 그는 교회가 신성한 기관으로서 모든 인간 구조, 특히 세속 국가보다 우월하며, 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황은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자이므로 그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불복종하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단순히 한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를 멸절시키려는 방향으로 교회를 이끌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결과를 얻고자 하는 정치인으로서 그레고리오 7세는 실제로는 다른 입장을 취해야 했다. 그는 국가의 존재를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으로 인정했으며, 교회와 국가의 공존을 신성한 명령으로 묘사하고, 성직권과 황제권 사이의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두 권력을 동등한 위치에 놓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교회가 국가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으며, 그는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중요한 분쟁 사항이 로마로 회부되기를 바랐으며, 항소는 자신에게 직접 제기되도록 했다. 로마 중심의 교회 통치 집중화는 자연스럽게 주교들의 권한 축소를 수반했다. 주교들은 자발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독립성을 주장하려 했기 때문에, 그의 교황 재위 기간은 고위 성직자들과의 투쟁으로 가득했다. 그는 성직자들의 강제적인 독신주의를 지지하고 성직매매를 공격하는 그의 투쟁과 관련하여 교황 수위권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레고리오 7세가 사제 독신주의를 교회에 처음 도입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전임자들보다 더 큰 에너지로 이 투쟁을 전개했다. 1074년 그는 결혼한 사제를 허용한 주교들에게 백성들의 순종을 면제하는 회칙을 발표했다. 다음 해에는 결혼한 사제들에 대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고, 이 성직자들의 수입을 박탈했다. 사제 혼인에 대한 캠페인과 성직매매에 대한 캠페인 모두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4. Investiture Controversy and conflict with Henry IV
그레고리오 7세의 교황 재위 기간 중 가장 결정적인 갈등은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서임권 투쟁이었다.
4.1. Initial tensions and first excommunication
그레고리오 7세의 주요 정치적 목표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정립이었다. 하인리히 3세 사망 이후 독일 군주국의 힘은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경험 없는 아들 하인리히 4세는 큰 내부 어려움에 직면하여 그레고리오 7세가 교회를 강화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2년 동안 작센 반란으로 인해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1074년 5월 하인리히 4세는 뉘른베르크에서 교황 특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레고리오 7세가 파문한 자신의 고문들과 계속 친분을 유지한 죄를 참회하고, 순명을 맹세하며 교회 개혁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1075년 6월 9일 랑엔살자 전투 (1075년)에서 작센 공국을 물리치자마자 그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자신의 주권을 재확인하려 했다. 하인리히 4세는 백작 에버하르트를 롬바르디아에 보내 파타리아에 맞서게 했고, 논란이 많았던 밀라노 대교구에 성직자 테달드를 대주교로 임명했으며, 노르만족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접근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1075년 12월 8일자 강력한 서신으로 응답했다. 서신에서 그는 하인리히 4세가 약속을 어기고 파문된 고문들을 계속 지지했다고 비난했다. 동시에 교황은 구두 메시지를 통해 하인리히 4세에 대한 교회의 파문뿐만 아니라 왕위 박탈까지 위협했다. 한편 그레고리오 7세는 첸시오 1세 프란지파네의 위협을 받았는데, 그는 1075년 성탄절 밤에 교회에서 교황을 기습하여 납치했지만, 다음 날 풀려났다.
교황의 고압적인 요구와 위협은 하인리히 4세와 그의 궁정을 격분시켰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그들은 1076년 1월 24일 보름스 공의회를 급히 소집했다. 독일 고위 성직자들 중에는 그레고리오 7세에게 많은 적이 있었고, 한때 그레고리오 7세와 친밀했으나 이제는 적대자가 된 로마의 추기경 휴고 칸디두스가 이 기회를 위해 급히 독일로 향했다. 칸디두스는 회의에서 교황에 대한 일련의 비난을 쏟아냈고, 회의는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직을 상실했다고 결의했다. 비난으로 가득 찬 한 문서에서 주교들은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했다. 다른 문서에서는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로마인들에게 새 교황을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공의회는 두 명의 주교를 이탈리아로 보냈고, 그들은 피아첸차 시노드에서 롬바르디아 주교들로부터 유사한 폐위 선언을 얻어냈다. 트레비소의 롤란드는 라테라노 대성전에 막 모인 시노드 앞에서 교황에게 이러한 결정들을 통보했다. 잠시 동안 참석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곧 엄청난 분노가 터져 나왔고, 그레고리오 7세의 진정시키는 말 덕분에 특사의 목숨이 구원될 수 있었다.
다음 날인 1076년 2월 22일,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을 엄숙히 선포하고, 그의 왕권을 박탈하며, 그의 신하들의 충성 맹세를 해제했다. 이 선고의 실질적인 효과는 전적으로 하인리히 4세의 신하들, 특히 독일 제후들에게 달려 있었다. 당시 증거들은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이 독일과 이탈리아 모두에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시사한다.
30년 전, 하인리히 3세는 교황직을 주장하는 세 명의 부적절한 인물을 폐위시켰고, 이는 교회와 여론으로부터 인정받는 공헌이었다. 하인리히 4세가 이 절차를 다시 시도했을 때 그는 지지를 받지 못했다. 독일에서는 그레고리오 7세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되었고, 이는 제후들이 봉건 군주인 하인리히 4세에 맞서는 데 힘을 실어주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황제가 교황에 대항할 귀족 회의를 소집했을 때, 소수의 귀족만이 응답했다. 한편, 작센족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반란을 재개했고, 반왕당파 세력은 매달 힘을 키웠다.
4.2. Walk to Canossa

하인리히 4세는 이제 파멸에 직면했다. 교황 특사인 파사우의 알트만 주교가 열성적으로 조장한 동요의 결과로, 제후들은 새로운 독일 통치자를 선출하기 위해 10월 트레부르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라인강 좌안의 오펜하임에 주둔하고 있던 하인리히 4세는 모인 제후들이 그의 후계자를 합의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간신히 왕위 상실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화는 판결을 단순히 연기했을 뿐이었다.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반드시 배상하고 복종해야 하며, 만약 그가 파문 기념일까지 여전히 파문 상태에 있다면 그의 왕위는 공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그레고리오 7세를 아우크스부르크로 초대하여 갈등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후들과 교황에 동시에 맞설 수 없었던 하인리히 4세는 정해진 기한 이전에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사면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사절단을 통해 시도했지만, 그레고리오 7세가 그의 제안을 거부하자 그는 직접 이탈리아로 향했다. 교황은 이미 로마를 떠나 독일 제후들에게 1077년 1월 8일 만토바에서 그들의 호위를 기대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호위대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카노사에 도착했다는 하인리히 4세의 소식을 들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그의 가까운 동맹인 토스카나의 마틸다의 보호 아래 카노사 성에 피신해 있었다. 하인리히 4세는 부르고뉴를 통과하며 롬바르디아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무력을 사용할 유혹을 뿌리쳤다. 놀랍게도 황제는 자신의 자존심을 꺾고 눈 속에서 겸손하게 교황 앞에서 참회했다. 이 카노사의 굴욕은 곧 전설이 되었으며, 교황권력이 황제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카노사의 굴욕 사건은 교황권의 전성기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며, 그레고리오 7세가 1080년에 하인리히 4세를 두 번째 파문하였으나 전혀 효력이 없었고, 1084년에는 강제 폐위당한 후 로마 시민들로부터 버림받아 로마에서 사실상 추방당했다. 이는 교황권과 황제권이 역전되는 전환기이자 교황권력이 전성기로 나아가기 위한 초반 과도기에 벌어진 사건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화해는 긴 협상과 하인리히 4세의 명확한 서약 이후에야 이루어졌으며, 그레고리오 7세는 정치적 함의를 고려하여 마지못해 양보했다. 만약 그레고리오 7세가 사면을 거부했다면, 그를 중재자로 초청한 아우크스부르크의 제후 회의는 무력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참회하는 자가 교회로 다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그레고리오 7세의 그리스도교적 의무가 그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능가했다. 파문 철회는 진정한 해결을 의미하지 않았는데, 교황과 황제 사이의 주요 문제인 서임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갈등은 불가피했다.
4.3. Renewed conflict and second excommunication
하인리히 4세의 파문에 대한 복종은 독일 귀족들의 반란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그의 사면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1077년 3월 포히하임에서 그들은 슈바벤 공작 루돌프 폰 라인펠덴을 경쟁 통치자로 선출했고, 교황 특사들은 중립을 선언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이후 몇 년 동안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며, 거의 동등한 힘을 가진 두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했고, 각 세력은 교황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여 우위를 점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불확실한 태도는 결국 양측의 신뢰를 잃게 했다. 마침내 그는 1080년 1월 27일 플라르히하임 전투에서 루돌프가 승리한 후 루돌프 편을 들기로 결정했다. 작센족의 압력과 이 전투의 중요성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인해 그레고리오 7세는 관망 정책을 포기하고 1080년 3월 7일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과 폐위를 다시 선언했다.
이번 교황의 파문은 4년 전과는 매우 다른 반응을 얻었다. 널리 부당하게 내려진 것으로 여겨졌고, 그 권위 또한 의문시되었다. 특히 1077년에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하고 파문을 해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귀족들이 루돌프를 대립 국왕으로 선출하며 하인리히 4세에게 적대 행위를 한 상황이었다. 파문이 철회되었다는 것은 귀족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 했던 충성 맹세가 다시 유효해졌다는 뜻이므로, 충성해야 할 의무가 있는 귀족들이 위법 행위를 한 셈이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교황은 즉시 대립왕과 그의 추종자 전부를 파문했어야 했으나, 화해를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3년간 내전 상황에서 양자의 눈치를 살피기만 했다. 그러다가 1080년에 와서야 다시 하인리히 4세에게 두 번째 파문을 내린 것은 이미 파문이 해제되었고, 파문을 받아야 할 대상은 교황의 조치에 불복한 루돌프와 반대파 귀족들이었기에 부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 더 경험이 많아진 황제는 파문을 불법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그는 브릭센 공의회를 소집했고, 1080년 6월 25일 참석한 30명의 주교들은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라벤나 대주교 구이베르트(Wibert)를 그의 후임자로 선출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10월 15일에 반격하여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미친" "폭군적인" 분열주의자 위베르트 대신 새로운 대주교를 선출할 것을 명령했다. 1081년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에서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항하는 갈등을 시작했다. 이때 황제는 더 강한 위치에 있었다. 13명의 추기경이 교황을 떠났고, 경쟁 황제 루돌프 폰 슈바벤은 10월 16일에 사망했다. 1081년 8월 새로운 황제 후보로 룩셈부르크의 헤르만이 나섰지만, 그는 독일에서 교황 지지 세력을 규합하지 못했고, 하인리히 4세의 힘은 최고조에 달했다.
4.4. Henry IV's retaliation and the Sack of Rome
교황의 주요 군사적 지지자인 토스카나의 마틸다는 하인리히 4세의 군대가 아펜니노 산맥 서쪽 길을 통과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그는 라벤나에서 로마로 접근해야 했다. 로마는 1084년 독일 왕에게 항복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여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교황이 허락한다면 구이베르트를 죄수로 넘기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공의회에 출두하여 참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이러한 조건에 따르는 척하면서도 공의회 개최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소수의 주교들이 모였고, 그레고리오 7세는 다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하인리히 4세는 3월 21일 다시 로마에 입성하여 1084년 3월 24일 자신의 지지자인 라벤나 대주교 구이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즉위시켰고, 클레멘스 3세는 다시 하인리히 4세를 황제로 대관했다. 한편 그레고리오 7세는 로베르 기스카르와 동맹을 맺었고,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로 진격하자 하인리히 4세는 치비타 카스텔라나로 도주했다. 1084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3만 6,000명의 노르만 및 사라센족 군대가 로마로 진격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로베르가 도착하기 3일 전에 퇴각하여 불필요한 전투를 피했다. 반교황 세력은 로베르 군대의 로마 진입에 반대하며 저항했다. 이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서임권 분쟁으로 인해 독일군이 로마를 3년간 포위하여 외부와 교류가 단절되고 민생 경제가 매우 어려워진 것에 분노했다. 그럼에도 교황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로베르의 군대는 도성 안으로 진입하며 도심 곳곳에 불을 지르고 혼란을 야기했다. 그 틈을 이용해 빠르게 도심을 가로질러 산탄젤로 성으로 진입하여 교황을 구출했다. 구출 작전 중 저항군과의 시가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약탈도 자행되었다. 약탈이 끝난 후 로마는 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많은 성당이 불탔는데 이는 당시 성당들이 군사적 요새의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성당 방화는 숨어있는 저항군을 제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4.5. Exile and death
교황은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노르만 군대가 도심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여 피해가 극심해지자 로마 시민들은 분노했고 교황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압박을 가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레고리오 7세는 노르만 군대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로마 시민들에게 버림받은 교황은 처음에 몬테카시노로 갔다가, 나중에는 해안가에 있는 살레르노 성으로 피신했으며, 그곳에서 1085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 그는 살레르노에서 노르만족의 포로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사망하기 3일 전, 그는 하인리히 4세와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즉위한 구이베르트를 제외하고 자신이 선고한 모든 파문을 철회했다. 그의 살레르노 대성당의 석관에 새겨진 묘비명은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러므로 나는 망명지에서 죽는다"라고 되어 있다. 이 문구는 시편 45편 8절의 "주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의를 미워하시니, 하느님 곧 주님의 하느님께서 기쁨의 기름을 부어 당신 동료들보다 더 높이 들어 올리셨나이다"를 변형한 것이다.
5. Papal policy across Europe
신성 로마 제국을 넘어 그레고리오 7세는 유럽 전역의 여러 지역에서 교황권을 주장하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5.1. Relationship with major European powers
그레고리오 7세의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는 그의 대독일 정책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황제와 갈등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에 그는 다른 통치자들에게는 독일 왕에게 보류했던 온건함을 종종 보여야 했다. 노르만족의 태도는 그에게 혹독한 현실을 깨닫게 했다. 교황 니콜라오 2세 치세에 노르만족에게 주어진 큰 양보는 이탈리아 중부로의 진출을 막는 데 무력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권에 대한 예상된 보호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그레고리오 7세가 하인리히 4세에게 압박을 받았을 때, 로베르 기스카르는 그를 외면했으며, 자신이 독일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에만 개입했다. 그리고 로마를 점령한 후 그는 도시를 자신의 군대에 내주었고, 그의 행동으로 인한 대중의 분노는 그레고리오 7세의 망명을 초래했다.
5.1.1. England and William the Conqueror
1076년 그레고리오 7세는 렌의 생트 멜랑 수도원 수도사 돌 외엥을 돌드브르타뉴의 주교로 임명하면서, 윌리엄 1세의 지지를 받던 현직 주교 유타엘(성직매매로 악명 높았음)과 돌의 귀족들이 지지하던 길뒤엥(너무 어림)을 모두 거부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또한 돌 외엥에게 대주교의 팔리움을 수여하면서, 돌의 대교구 지위 및 팔리움 사용 권리에 대한 오랜 사건이 최종 결정될 때 성좌의 판결에 복종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윌리엄 왕은 자신이 매우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교회의 운영에 독단적으로 간섭했으며, 주교들의 로마 방문을 금지하고, 주교직과 수도원장직을 임명했으며, 교황이 영적 권력과 세속 권력의 관계에 대한 다른 원칙들을 설파하거나 그에게 무역을 금지하거나 사도좌의 봉신임을 인정하라고 명령했을 때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윌리엄은 특히 교황이 잉글랜드 교회를 두 개의 관구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불쾌해했는데, 이는 그가 새로 획득한 왕국의 통일성을 강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직자 임명 문제에서 세속 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점점 더 강조하는 그레고리오 7세의 주장은 더욱더 논쟁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는 또한 주교들이 유효성과 지침을 위해 로마를 따르도록 강요하며, 주교들의 정기적인 로마 방문을 요구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잉글랜드 왕에게 그의 교회 정책을 변경하도록 강요할 힘이 없으므로, 승인할 수 없는 것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윌리엄 왕에게 특별한 애정을 확언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전반적으로 윌리엄의 정책은 교회에 큰 이익이 되었다.
5.1.2. France and Philip I
프랑스의 필리프 1세는 성직매매와 교회에 대한 폭력 행사로 인해 즉각적인 조치(파문, 폐위 및 성무 정지)의 위협을 받았다. 1074년 이러한 조치들이 임박해 보였지만, 그레고리오 7세는 위협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자제했다. 비록 국왕의 태도에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일에서 곧 발생할 갈등에 자신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루시 백작 에블 2세가 이끄는 알안달루스로의 십자군 원정을 조직하려 시도했다.
5.1.3. Normans in Southern Italy
그레고리오 7세와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는 그의 독일 정책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신성 로마 제국과의 갈등에 그의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에, 그는 종종 다른 통치자들에게는 독일 왕에게는 주지 않았던 온건함을 보여야 했다. 노르만족의 태도는 그에게 혹독한 현실을 깨닫게 했다. 교황 니콜라오 2세 치세에 그들에게 주어진 큰 양보는 이탈리아 중부로의 진출을 막는 데 무력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권에 대한 예상된 보호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그레고리오 7세가 하인리히 4세에게 심하게 압박을 받았을 때, 로베르 기스카르는 그를 외면했으며, 자신이 독일군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에만 개입했다. 그리고 로마를 점령한 후 그는 도시를 자신의 군대에 내주었고, 그의 행동으로 인한 대중의 분노는 그레고리오 7세의 망명을 초래했다.
5.2. Claims of papal sovereignty
그레고리오 7세는 여러 국가에서 교황권의 주권을 확립하고, 교황청이 스스로 주장하는 소유권을 인정받으려 시도했다. "오래된 관례"에 따라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는 로마 교회에 속한다고 여겨졌다. 스페인, 헝가리, 크로아티아 또한 교회의 소유로 주장되었으며, 덴마크 국왕에게도 그의 왕국을 교황의 봉신으로서 통치하도록 유도하려 시도했다. 교회 정책 및 교회 개혁에 있어 그레고리오 7세는 홀로 서지 않았으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잉글랜드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 랜프랭크가 그에게 가장 가까웠고, 프랑스에서는 훗날 리옹 대주교가 되는 디에의 위그가 그의 지지자였다.
5.3. Relations with Eastern Christian lands
그레고리오 7세는 특히 동방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 사이의 교회 대분열은 그에게 큰 타격이었고, 그는 과거의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미하일 7세 두카스 황제와 연락을 취하는 데 성공했다.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슬람 공격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고 동로마 황제의 정치적 난처함이 커지자, 그는 대규모 군사 원정을 구상하고 신자들에게 성묘 교회를 되찾는 일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제1차 십자군의 전조가 되었다. 그는 원정 병력을 모집하는 노력에서 동방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을 강조하며, 서방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돕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서신은 폴란드, 키예프 루스, 보헤미아에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아르메니아를 로마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6. Internal church reforms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의 제도적, 도덕적 개혁을 추진하고 지원하는 데 주력했다.
6.1. Enforcement of clerical celibacy and anti-simony

그레고리오 7세의 평생 과업은 교회가 하느님에 의해 세워졌으며, 하느님의 뜻이 유일한 법인 단일 사회에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확신에 기반을 두었다. 그는 교회가 신성한 기관으로서 모든 인간 구조, 특히 세속 국가보다 우월하며, 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황은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자이므로 그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불복종하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정치가로서 실제로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는 국가의 존재를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으로 인정했으며, 교회와 국가의 공존을 신성한 명령으로 묘사하고,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두 권력을 동등한 위치에 놓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교회가 국가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으며, 그는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중요한 분쟁 사항이 로마로 회부되기를 바랐으며, 항소는 자신에게 직접 제기되도록 했다. 이러한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 통치의 중앙집권화는 자연스럽게 주교들의 권한 축소를 수반했다. 주교들은 자발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독립성을 주장하려 했기 때문에, 그의 교황 재위 기간은 고위 성직자들과의 투쟁으로 가득했다.
교황직의 우월성을 확립하기 위한 그레고리오 7세의 투쟁은 성직자 독신주의를 의무화하고 성직매매를 타파하려는 그의 노력과도 관련이 깊다. 그레고리오 7세가 사제 독신주의를 교회에 처음 도입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의무화하기 위해 전임자들보다 더 큰 에너지로 이 투쟁을 전개했다. 1074년 그는 결혼한 사제를 허용한 주교들에게 백성들의 순종을 면제하는 회칙을 발표했다. 다음 해에는 결혼한 사제들에 대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고, 이 성직자들의 수입을 박탈했다. 이러한 사제 혼인 반대 캠페인과 성직매매 반대 캠페인 모두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저술은 주로 교회 통치의 원칙과 실천에 관한 것이다. 그의 생전에 쓰인 글들은 '그레고리오 7세의 등록 또는 서한집'이라는 제목으로 모아져 있다. 그의 현존하는 서한 대부분은 현재 바티칸 비밀 문서고에 보관된 그의 등록부에 보존되어 있다.
6.2. Promotion of universities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근대 대학의 개념을 장려하고 규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79년 그의 교황령은 최초의 유럽 대학으로 발전한 대성당 학교의 규제적 설립을 명령했다.
7. Doctrine of the Eucharist
그레고리오 7세는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실재 현존 교리를 확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평가받았다. 그레고리오 7세가 투르의 베렌가리우스에게 이 신앙을 고백하도록 요구했던 내용은 바오로 6세의 1965년 회칙 《신앙의 신비》에 인용되어 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마음으로 믿고 공개적으로 고백합니다. 제대에 놓인 빵과 포도주는 거룩한 기도의 신비와 구세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고유하며 생명을 주는 살과 피로 실체적으로 변화되고, 축성된 후에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신앙 고백은 12세기부터 유럽 교회에서 "성찬례 르네상스"를 촉발시켰다.
8. Legacy and reception
그레고리오 7세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평가받았다.
8.1. Canonization and historical significance
그레고리오 7세는 1584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8년 5월 24일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교황권 강화, 교회 개혁, 영적 쇄신에 기여한 인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8.2. Positive assessments
그는 위대한 개혁가 교황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그레고리오 개혁을 시작했다. 그의 노력은 교황권의 강화를 이끌었고 교회의 영적 쇄신에 기여했다. 그는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교황 교리를 확립했다. 그의 서한 모음집은 중세 교회법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는 교회법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자 H. E. J. 카우드레이는 그레고리오 7세가 놀라울 정도로 유연했으며, "그의 열정, 도덕적 힘, 종교적 신념은 그가 다양한 남녀의 충성과 봉사를 놀라운 정도로 유지하도록 보장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이름은 교황 수위권 발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8.3. Criticisms and controversies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권의 독재적인 사용으로 인해 일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서임권 투쟁에서 그를 반대했던 산티 마르티노 에 실베스트로의 추기경 베노는 그레고리오 7세를 마법, 잔인함, 폭정, 신성 모독으로 비난했으며, 이는 영국의 개신교도 존 폭스와 같은 후대 가톨릭 교회 반대자들에 의해 열렬히 반복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그를 "교황이 아니라 거짓 수도사"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선출이 불규칙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두 번째 파문은 부당하게 선포된 것으로 널리 여겨졌고, 그 권위 또한 의문시되었다. 이러한 두 번째 파문은 교황권 남용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기도 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야심이 신성 로마 제국과의 분열을 심화시켜 십자군과 중세의 갈등을 초래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8.4. Enduring influence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 수위권의 전형이 되었고, 그의 기억은 긍정적 및 부정적으로 모두 소환되어 후대 저술가들의 가톨릭 교회와 교황권에 대한 태도를 반영했다. 그의 행동은 교회법의 발전, 교황권의 진화, 그리고 영적 권력과 세속 권력 사이의 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교황 수위권 발전의 역사에서 피할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교황권과 교회를 세속 권력의 통제로부터 해방시켰고,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통일성을 재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