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교육
셸링은 1775년 1월 27일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레온베르크에서 요제프 프리드리히 셸링과 고틀리빈 마리 클레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교 신학자이자 동양학 교수였으며, 슈바벤 경건주의를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셸링은 1783년부터 1784년까지 뉘르팅겐의 라틴어 학교에 다녔으며, 그곳에서 5년 연상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을 알게 되었다. 그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고대 언어에 능통한 신동이었으며, 10대 초반에는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에 통달했다. 이후 그는 튀빙겐 근처 베벤하우젠의 수도원 학교에 다녔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곳의 채플린이자 동양학 교수였다.
1790년 10월 18일, 15세의 나이에 셸링은 일반적인 입학 연령인 20세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뷔르템베르크 복음주의 루터교회의 신학교인 튀빙겐 슈티프트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이 신학교에서 그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횔덜린과 한 방을 쓰며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들 세 사람은 프랑스 혁명에 열광하고 임마누엘 칸트와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의 철학에 관심을 보였으며, 진보와 자유를 갈망했다. 신학교의 감시 속에서도 그들은 당시 진행 중이던 프랑스 혁명과 새로운 철학적 흐름에 자극받았으며, 때로는 그들의 언행에 대해 학교 측으로부터 지도를 받기도 했다. 이들은 목사가 되는 대신 사상이나 문학의 길을 택했다.
셸링은 교부들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을 연구했다. 그의 관심은 점차 루터교 신학에서 철학으로 옮겨갔다. 1792년에는 "인간의 악의 기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철학적 고찰(창세기 3장)의 비판적 철학적 해명 시도"라는 제목의 석사 학위 논문으로 졸업했다. 1795년에는 고틀로프 크리스티안 슈토르의 지도 아래 "바울 서신 개정자 마르키온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했다. 이 시기에 그는 칸트와 피히테의 저작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그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셸링은 또한 당시 피히테의 하우스메이트였던 철학자 야코프 헤르만 오베라이트와 편지를 통해 '상호작용', '실용주의', 그리고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1797년, 셸링은 귀족 가문의 두 젊은이를 가르치면서 그들의 동반자로 라이프치히를 방문했고,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강의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서 그는 화학과 생물학을 포함한 당시의 물리학 연구에 매료되었다. 그는 또한 드레스덴을 방문하여 작센 선제후의 소장품들을 관람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예술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1797년 8월부터 6주간의 드레스덴 방문 동안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과 카를 프리드리히 슐레겔 형제, 그리고 그의 미래의 아내인 카롤리네(당시 아우구스트 빌헬름의 아내)와 노발리스를 만났다.
2. 학문적 경력과 철학적 발전
셸링의 학문적 경력과 철학적 사상은 그의 생애 동안 여러 단계를 거치며 변화했다. 그의 사상은 크게 초기 저술과 예나 시기, 뷔르츠부르크 및 뮌헨 시기, 그리고 베를린 시기와 후기 철학으로 구분된다.

2.1. 초기 저술과 예나 시기
셸링은 1793년 하인리히 에버하르트 고틀로프 파울루스의 정기간행물 『메모라빌리아』에 기고했다. 1794년에는 피히테 사상의 해설서인 『일반적으로 철학의 한 형식의 가능성에 대하여』를 출판했는데, 이 저작은 피히테 자신에게도 인정받아 셸링이 철학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1795년의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또는 인간 지식의 무조건적인 것에 대하여』는 여전히 피히테적 관념론의 틀 안에 있었지만, 피히테의 방법을 보다 객관적으로 적용하고 바뤼흐 스피노자의 견해를 융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피히테와 프리드리히 임마누엘 니트하머의 『철학 저널』에 논문과 서평을 기고하며 물리 및 의학 연구에 몰두했다. 1795년에는 10통의 편지로 구성된 『독단론과 비판론에 대한 철학적 서한』을 출판하여 칸트 체계에 대한 옹호와 비판을 동시에 제시했다.
1796년에서 1797년 사이에 쓰인 『독일 관념론의 가장 오래된 체계 기획』이라는 중요한 원고는 헤겔의 필체로 남아있으며, 1916년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에 의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셸링의 저작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헤겔이나 횔덜린이 저자라는 주장도 있다. 이 원고에 등장하는 "새로운 신화" 개념은 셸링의 대작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1800)에도 나타나며, 동일철학 시기에는 셸링 예술철학의 기본 개념 중 하나가 된다. 1797년에는 피히테의 『자연법의 기초』를 예견한 논문 『자연법의 새로운 연역』을 발표했다. 그의 물리학 연구는 『자연철학에 관한 이념들』(1797)과 『세계 영혼에 대하여』(1798)라는 논문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념들』에서 셸링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를 언급하고 그의 『단자론』을 인용하며, 자연철학 시기 동안 라이프니츠의 자연관을 높이 평가했다. 이 시기 셸링은 "나는 스피노자주의자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헤겔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사상적 변화를 드러내기도 했다.
2년간의 가정교사 생활을 마친 후, 1798년 10월, 23세의 셸링은 예나 대학교의 철학 비정규 교수로 초빙되었다. 예나에서의 시기(1798~1803)는 셸링을 낭만주의의 지적 격변의 중심에 두었다. 그는 『세계 영혼에 대하여』를 읽고 셸링의 자연철학의 시적 특성을 높이 평가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총리였던 괴테는 셸링을 예나로 초청했다. 그러나 셸링은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또 다른 기둥이었던 프리드리히 실러의 작품을 움직였던 윤리적 관념론에는 공감하지 않았다. 셸링의 후기 저작인 『예술 철학 강의』(1802/03)는 실러의 숭고 이론을 면밀히 검토했다.
예나에서 셸링은 처음에는 피히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특히 자연에 대한 그들의 다른 개념들은 점차적인 이견으로 이어졌다. 피히테는 그에게 초월론적 철학, 특히 피히테 자신의 『지식학』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낭만주의 학파의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어가던 셸링은 피히테의 사상을 차갑고 추상적이라고 비판하며 거부했다.
셸링은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과 그의 아내 카롤리네 슐레겔과 특히 친밀했다. 셸링은 카롤리네의 어린 딸 아우구스테 뵈머와도 가까워졌다. 카롤리네는 슐레겔을 버리고 셸링과 결혼하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테는 1800년에 이질로 사망했는데, 많은 이들이 그녀의 치료를 감독했던 셸링을 비난했다. 그러나 로버트 리처즈는 그의 저서 『삶의 낭만적 개념』에서 셸링의 개입은 대부분 무관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현장에 불려온 의사들이 아우구스테의 병이 불가피하게 치명적이라고 모든 관련자에게 확신시켰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테의 죽음은 셸링과 카롤리네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슐레겔은 베를린으로 이사했고, 괴테는 슐레겔이 이혼을 추진하는 것을 도왔다. 셸링의 예나 시기는 끝났고, 1803년 6월 2일 그와 카롤리네는 예나를 떠나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식은 셸링이 이미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학창 시절 친구인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을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였다.
예나 시기에 셸링은 헤겔과의 친밀한 관계를 재개했다. 셸링의 도움으로 헤겔은 예나 대학교의 사강사가 되었다. 헤겔은 『피히테 철학과 셸링 철학의 차이』(1801)라는 책을 쓰고, 피히테와 카를 레온하르트 라인홀트와 같은 그의 관념론적 선배들에 맞서 셸링의 입장을 지지했다. 1802년 1월부터 헤겔과 셸링은 『철학 비판 저널』을 공동 편집하며 자연 철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지만, 셸링은 편집에 계속 참여하기에는 너무 바빴고, 이 잡지는 주로 헤겔의 출판물이었으며 셸링의 사상과는 다른 사상을 옹호했다. 셸링이 밤베르크로 이사하면서 이 잡지는 1803년 봄에 발행을 중단했다.
1800년, 셸링은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셸링은 초월론적 철학과 자연 철학이 서로 상보적이라고 설명했다. 피히테는 셸링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피히테의 이론에서 자연은 비아(Nicht-Ich독일어, 즉 객체)로서 철학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철학의 본질적 내용은 인간 지성의 주관적 활동이기 때문이었다. 셸링이 1801년 『내 철학 체계의 서술』을 출판한 후, 그들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해졌다. 피히테는 철학이 개인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제목을 터무니없다고 여겼다. 더욱이 이 책에서 셸링은 피히테가 독단론으로 거부했던 스피노자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자연과 정신은 양적으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고 선언했다. 셸링에 따르면, 절대자는 동일성에 대한 무관심이었고, 그는 이것을 본질적인 철학적 주제로 간주했다.
2.2. 뷔르츠부르크 및 뮌헨 시기
예나를 떠난 후, 셸링은 잠시 밤베르크로 가서 아달베르트 프리드리히 마르쿠스와 안드레아스 뢰슐라우프와 함께 존 브라운의 이론인 브루노니안 의학 체계를 연구했다. 1803년 9월부터 1806년 4월까지 셸링은 새로운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이 시기에 셸링은 예나에서의 마지막 시기에 연구했던 '자아' 철학에 대해 강의하며, 모든 존재자 안에 주체성과 객체성의 통일로서 절대자가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점을 증명하려 했다. 이는 그의 견해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고, 피히테와 헤겔과의 최종적인 결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보수적인 가톨릭 도시인 뷔르츠부르크에서 셸링은 동료들과 정부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는 1806년 뮌헨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겸 뮌헨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비서로, 그 후에는 과학 아카데미의 철학 부문 비서로 국가 공무원 직위를 얻었다. 1806년은 또한 셸링이 피히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책을 출판한 해이기도 했다. 1807년 셸링은 헤겔이 서문을 써달라고 보낸 헤겔의 『정신 현상학』 원고를 받았다. 자신의 철학 이론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발견하고 놀란 셸링은 헤겔에게 자신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추종자들을 조롱하려 했는지, 아니면 자신을 조롱하려 했는지 명확히 해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헤겔은 결코 답장하지 않았다. 같은 해, 셸링은 미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연설을 미술 아카데미에서 했다. 헤겔은 이에 대해 친구에게 가혹한 비판을 썼다. 그 후 그들은 서로의 강의실과 책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평생을 보냈다.
뮌헨에서의 공직을 사임하지 않고, 그는 잠시 슈투트가르트에서 강의를 했고(『슈투트가르트 사적 강의』, 1810), 에를랑겐 대학교에서 7년간 강의했다(1820~1827). 1809년, 그가 생전에 출판한 마지막 책인 『자유론』을 출판하기 직전에 카롤리네가 사망했다. 3년 후 셸링은 카롤리네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파울리네 고터와 결혼하여 충실한 동반자를 얻었다.
뮌헨에 오래 머무는 동안(1806~1841) 셸링의 문학 활동은 점차 중단되었다. 이는 헤겔 철학 체계의 압도적인 힘과 영향력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셸링이 빅토르 쿠쟁의 저작 번역본 서문에서 헤겔주의(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초기 사상)에 대한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헤겔 사망 후인 1834년이 되어서였다. 이러한 적대감은 분명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1822년 에를랑겐에서 진행된 철학사 강의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날카롭게 표현되었고, 셸링은 이미 신화와 종교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는데, 그의 견해로는 이는 논리적 또는 사변적 철학의 부정에 대한 진정한 긍정적 보완을 구성했다.
2.3. 베를린 시기 및 후기 철학

헤겔의 가르침의 명백한 결과보다 종교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더 긍정적인 것을 약속하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소문은 대중의 관심을 강력하게 끌었다.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의 비판적 저술과 헤겔 학파 내부의 불화는 당시 지배적인 철학으로부터의 증대하는 소외감을 나타냈다. 헤겔주의자들의 본거지인 베를린에서 이는 셸링에게 그가 비축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을 얻으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이는 1841년이 되어서야 실현되었는데, 셸링이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이자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되면서 대학에서 강의를 할 권리를 얻었고, 이 권리를 행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의 강의에 참석했던 이들 중에는 쇠렌 키르케고르 (셸링이 "참을 수 없는 헛소리"를 한다고 말하고 강의를 제시간에 끝내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미하일 바쿠닌 (그것을 "흥미롭지만 다소 중요하지 않다"고 불렀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알렉산더 폰 훔볼트 (셸링의 자연철학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래의 교회 역사가 필립 샤프, 그리고 프리드리히 엥겔스 (헤겔의 지지자로서 "위대한 인물의 무덤을 모욕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참석했다) 등이 있었다. 그의 강의의 첫 번째 강연은 많은 청중의 참석과 호평을 받았다. 셸링의 성공으로 인해 그의 오랜 적수였던 하인리히 파울루스의 적개심이 더욱 날카로워졌고, 이는 계시 철학 강의의 축어적 보고서가 몰래 출판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셸링은 이 해적판에 대한 법적 비난과 금지를 얻는 데 실패했고, 1845년에 공개 강의를 중단했다.
셸링의 새로운 긍정 철학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1854년 8월 20일 바트 라가츠에서 그가 사망한 후에야 이용 가능했다. 그의 아들들은 그의 베를린 강의록 4권을 출판했다. 1권은 『신화 철학 서론』(1856), 2권은 『신화 철학』(1857), 3권과 4권은 『계시 철학』(1858)이었다. 셸링은 자신의 후기 철학을 칸트, 피히테, 헤겔의 순수 '소극 철학'과 구별되는 '적극 철학'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논리적 또는 사변적 철학의 부정에 대한 진정한 긍정적 보완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셸링 자신은 1830년대에 자신의 초기 철학을 소극 철학, 후기 철학을 적극 철학이라고 불렀으며, 헤겔을 비롯한 다른 철학자들은 소극 철학에만 관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소극 철학은 "무엇이 무엇인가"(das Was독일어)에만 관심을 가졌고, "무엇이 존재하는가"(das Dass독일어)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후기 활동이야말로 후자의 질문에 답하는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셸링은 보수적인 사상가로 여겨졌으며, 프로이센 왕가는 헤겔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사상에 대한 일종의 방어벽이 될 것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증 과학이 융성하고 헤겔주의 철학이 널리 퍼져 있던 당시 베를린의 사상계에서 셸링은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의 후기 사상은 동시대인들에게 거의 이해받지 못했으며, 베를린에서의 그의 강의에는 거의 청강생이 없었다. 그의 후기 사상이 제대로 평가받기까지는 거의 100년을 기다려야 했다.
3. 주요 철학적 주제
셸링의 철학은 그의 생애 동안 여러 단계로 발전했지만, 몇 가지 핵심적인 개념과 주제는 지속적으로 탐구되었다. 그의 사상은 크게 자연철학, 동일철학, 그리고 자유 철학이라는 세 가지 주요 주제로 요약될 수 있다.
3.1. 자연철학 (Naturphilosophie)
셸링의 자연철학은 이상적인 것이 현실로부터 솟아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경험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변화는 이원성의 개념, 즉 자연이 자신을 표현하는 극성적 대립으로 이어진다. 자연의 역동적인 단계들은 근본적인 팽창력과 수축력의 균형으로서의 물질, 빛(그 하위 과정인 자기, 전기, 화학 반응 포함), 그리고 유기체 (그 구성 단계인 생식, 과민성, 감각성 포함)이다.
셸링은 처음에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유기체의 재생산을 위해 발전시킨 자기 조직화 개념을 채택했다. 그러나 셸링은 이 개념을 생명의 원초적 출현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과 속의 출현이라는 측면으로 확장했다. 그는 이를 현대의 자기 조직화 이론과 유사한 포괄적인 자연사 이론으로 만들고자 했다. 철학자 마리-루이제 호이저-케슬러는 이러한 유사성을 상세히 설명했으며, 이후 슈투트가르트 대학교에서 물리적 자기 조직화 이론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헤르만 하켄의 조교가 되었다. 만프레트 아이겐은 호이저-케슬러가 "자기 조직화의 물리적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다"고 평가했다.
셸링은 그의 자연철학 시기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라이프니츠의 자연관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플라톤의 자연관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는 『티마이오스 원고』(1794) 등에서 드러난다. 1796년부터 1798년까지 라이프치히에 머물며 당시의 자연과학 강의를 청강했고, 생물학, 화학, 물리학 등 최신 지식에 자극받았다. 셸링은 유기체를 자연의 최고 형태로 간주하고, 이를 모델로 삼아 역학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현상을 역동적인 과정으로 파악하는 도식을 제시하고자 했다.
피히테는 자연을 철학의 대상이 아닌 비아로 보았기 때문에, 셸링이 자연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셸링은 "자연은 보이는 정신이며, 정신은 보이지 않는 자연이다"라고 말했다. 셸링은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모든 생명이 자연의 산물이라고 보았으며, 이는 그의 첫 독립적인 철학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3.2. 동일철학 (Philosophy of Identity)
1801년경(일부 연구자들은 1800년)부터 셸링 철학의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다. 이 시기는 무차별적 동일성(Identität독일어)을 원리로 삼고, 절대자의 자기 전개에 대한 서술의 학문으로 수행되는 철학, 즉 '동일철학'이다. 셸링의 동일철학은 임마누엘 칸트와 바뤼흐 스피노자의 철학이 결합된 형태로 이해되기도 한다.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1800)에서 셸링은 초월론적 철학과 자연철학이 서로 보완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피히테는 셸링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피히테의 이론에서 자연은 비아(Nicht-Ich, 즉 객체)로서 철학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철학의 본질적 내용은 인간 지성의 주관적 활동이기 때문이었다. 셸링이 1801년 『내 철학 체계의 서술』을 출판한 후, 피히테는 철학이 개인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제목을 터무니없다고 여겼다. 더욱이 이 책에서 셸링은 피히테가 독단론으로 거부했던 스피노자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자연과 정신은 양적으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고 선언했다. 셸링에 따르면, 절대자는 동일성에 대한 무관심이었고, 그는 이것을 본질적인 철학적 주제로 간주했다.
절대자는 자연과 정신 모두의 동일하고 무차별적인 절대적 기저이다.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동일하며, 보편적이고 정신적인 힘으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 힘은 자연과 정신 모두에서 생산적이다. 차이점은 정신에서는 생산적인 힘이 의식적인 지성인 반면, 자연에서는 무의식적인 지성이라는 것이다. 셸링은 자연을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원고 속에 숨겨진 시"라고 표현했으며, 우주를 "놀라운 싹처럼 잠들어 있다"고 비유했다. 자연과 정신, 무의식과 의식, 필연성과 자유 사이의 동일성은 비객관적이며, 철학에 의해서만 가정될 수 있을 뿐 외적으로 드러날 수 없다. 예술가의 작품의 외적인 표현은 보이지 않는 고요함과 웅장함의 표현이다. 무한이 유한하게 표현되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셸링은 예술을 "철학의 유일하고 진정한 영원한 기관이자 문서"라고 보았다. 『브루노』(1802), 『학문론 제14강』(1802/1803년 여름 강의), 『예술의 철학』(1802/1803년 겨울 강의)에서 이러한 입장은 동일철학의 이론적 전제 위에서 다시 전개된다. 예술은 관념적인 것의 절대적 잠재성으로서 "예술의 우주에서 전체를 보여준다." 이러한 예술은 실재적인 자연에 대해 관념적인 자연의 상으로서 우월성을 유지하면서 병치되며, 또한 절대적인 철학에 대해서는 그 완성의 모습을 예시하는 대상으로, 즉 인간의 최고 정신적 산물이자 생산 활동으로 이해된다. 셸링은 이러한 최고 수준의 예술이 오직 자연을 충분히 파악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고대인들이 가졌지만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신화(셸링은 여기서 그리스 신화에서 신화의 이상적인 모습을 찾는다)를 대체할 "새로운 신화"를 요청한다. 새로운 신화의 내실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야마구치 카즈코는 교훈시로서의 자연철학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으며, 셸링 자신이 그러한 자연철학을 완성하려는 의지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동일철학에서 후기 철학으로의 전환은 카를 아우구스트 폰 에셴마이어의 비판, 즉 "어떻게 무차별성에서 차이/유한성이 도출되는가?"라는 질문에서 촉발되었다. 셸링은 이 질문에 답할 필요성을 느끼고 『철학과 종교』(1804)를 저술했다. 이 책의 구상은 1802년에 이미 있었고, 원래는 『브루노』의 제2부로 기획되었으나, 셸링은 이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논의할 필요성을 느껴 대화편이 아닌 산문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그의 오랜 관심사였던 "악의 기원 문제"를 다시 다루었으며, 유한성의 발생은 본래 동일했던 것들의 "타락"(Abfall독일어)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왜 타락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 책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이러한 결점은 헤르만 첼트너 등에 의해 지적되기도 했다. 이 문제는 1809년의 『자유론』에서 다시 크게 다루어진다.
1807년에 출판된 헤겔의 『정신 현상학』에서 셸링의 동일철학은 비판받았다. 셸링에게 절대자는 동일성 속에 있으며 직관을 통해 파악되지만, 헤겔은 그 무매개적 파악의 타당성을 비판하고, 오히려 개념에 의한 철학을 주장했다. 헤겔이 셸링의 직관 개념을 비꼬아 "권총에서 튀어나오는 직관"이나 "모든 소가 검은 밤"이라고 표현한 것은 셸링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이는 튀빙겐 시절부터 이어져 온 두 사람의 우정을 끝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셸링은 헤겔의 『정신 현상학』이 나오기 전까지 독일 최고의 철학자로 여겨졌으나, 이후 헤겔의 그림자에 가려지게 되었다. 이후 헤겔은 셸링에게 가장 중요한 논적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헤겔의 이러한 비판이 셸링 본인보다는 그의 추종자들인 셸링주의자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헤겔 또한 셸링에게 보낸 서한에서 유사한 해명을 했다).
3.3. 자유 철학 (Philosophy of Freedom)
1809년에 출판된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셸링 사상의 큰 전환점으로 간주된다. 이 저작에서 셸링은 인간적 자유의 근거를 탐구하며, 인간 안에 악에 대한 적극적인 가능성이 있음을 본다. 셸링에 따르면, 인간은 악을 행할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인간적 자유의 본질이자 인간을 모든 존재자의 정점에 두는 이유이다. 이는 기독교 및 서양 사상에서 '악을 행하지 않는 자유'로서의 자유 이해와 정반대되는 입장이다.
셸링은 이러한 자유가 인간에게 가능한 근거를 신의 존재 양태에서 찾는다. 신 안에는 신의 일부이지만 신 자체는 아닌 "신 안의 자연"이 존재하며, 이는 신 자신과 대립한다. 자신을 숨기고 닫으려는 신 안의 자연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신 자신에게는 "근거"(Grund독일어)이며, 태어나려는 갈망과 숨으려는 힘이라는 두 가지 방향성이 신 안에서 서로 다툰다. 신은 자신 안에 있는 이러한 대립을 스스로 극복하고 사랑으로 이를 덮는다. 그리하여 신과 그의 피조물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피조물의 정점인 인간 안에, 이 눈부신 대립은 자유의 가능성으로 다시 나타난다. 셸링은 이 시기에 헤겔의 비판을 재검토하며, 세계가 순전히 이성적인 질서라는 자신의 이상주의적 가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이성적인 것이 존재할 가능성과 악이 우세한 힘일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인간의 자유가 진정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선과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유를 위해서는 두 가지 원리가 필요한데, 하나는 욕망으로 표현되는 신비로운 토대이며, 다른 하나는 창조적인 힘으로서 지배할 수 있는 예리한 판단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지성에 봉사해야 할 충동의 어둠을 지성 위에 놓았고, 이러한 전도(顚倒)가 성경에서 언급된 타락이며, 악이 출현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육화된 신은 이를 해결하고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로 재배열했다.
여기서 셸링은 그가 이전까지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않았던 신의 인격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또한, 이제 셸링에게 필연성과 자유의 대립은 동일철학 시기처럼 단순히 절대자 안에서 본질적으로 무차별적인 관념적 대립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들 안에 분명히 대립이 존재하며, 그 대립을 가능하게 하는 장과 그 양상, 나아가 그러한 대립을 초월하는 것의 가능성이 이제 문제시된다.
『자유론』은 셸링이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외팅거와 가톨릭 신학자 프란츠 폰 바더를 통해 알게 된 야콥 뵈메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자유론』의 용어인 "신 안의 자연", "근거", "무저갱"(Ungrund독일어, '바닥 없음')은 뵈메의 용어법에서 유래한다. 셸링은 신비주의 사상에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며, 이미 동일철학 시기부터 신플라톤주의와의 유사성도 지적되었다(예: 『브루노』). 또한 1812년 미발표 대화편 『클라라』에서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호의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셸링은 신비주의를 전적으로 긍정한 것이 아니라, 오성적·논변적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전이성적 또는 비합리적인 것을 신비주의 사상가들이 가지고 있음을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표현 자체는 철학의 입장에서 볼 때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셸링은 "창조에 최종 목표가 있는가? 있다면 왜 한 번에 도달하지 못했는가? 왜 처음부터 완성이 실현되지 않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왜냐하면 신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오직 자유를 맛본 자만이 모든 것을 그 형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온 우주에 퍼뜨리려는 열망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 앞이나 밖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신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신 안에 포함해야 한다. 모든 철학은 이를 말하지만, 이 근거를 단지 개념으로만 말할 뿐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세계의 세대들』(1811-15, 미완성)은 셸링의 후기 사상을 발전시킨 저작으로, 세계의 역사를 신 그 자체의 생성과 자기 전개의 역사로 서술하려는 장대한 구상이었다. 이 책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부분으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과거 부분만 여러 번 다시 쓰였고 결국 출판되지 않았다. 셸링은 이 저작에서 이전의 자연철학과 동일철학을 신 안의 어둡고 무의식적인 원리와 의식적인 원리 사이의 근본적인 갈등에 대한 새로운 믿음과 결합시켰다. 신은 실재의 근거와 관계함으로써 우주를 이해 가능하게 만들지만, 자연이 완전한 지성이 아니므로 실재는 이상적인 것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것 내부의 결핍으로 존재한다. 세 가지 보편적인 시대는 우리에게만 구별될 뿐 영원한 신 안에서는 구별되지 않으며, 따라서 신 이전의 신의 원리가 존재를 지향하는 신성한 의지인 시작, 이러한 성장의 일부이자 매개된 성취인 현재 시대, 그리고 신이 의식적이고 완전하게 자신에게 자신인 최종성을 포함한다.
4. 주요 저작
셸링의 철학적 저작들은 그의 사상 발전의 각 단계를 보여준다. 다음은 그의 주요 저작들을 연대순으로 나열하고 각 저작의 핵심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 것이다.
| 연도 | 원제 (독일어) | 주요 내용 |
|---|---|---|
| 1792 | Antiquissimi de prima malorum humanorum origine philosophematis Genes. III. explicandi tentamen criticum et philosophicum | 인간의 악의 기원에 대한 가장 오래된 철학적 고찰(창세기 3장)의 비판적 철학적 해명 시도 (석사 학위 논문) |
| 1793 | Ueber Mythen, historische Sagen und Philosopheme der ältesten Welt | 가장 오래된 고대의 신화, 역사적 전설, 철학적 주제에 대하여 |
| 1794 | Ueber die Möglichkeit einer Form der Philosophie überhaupt | 일반적인 철학의 한 형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피히테 사상 해설, 명성 획득) |
| 1795 | De Marcione Paulinarum epistolarum emendatore | 바울 서신 개정자 마르키온에 대하여 (박사 학위 논문) |
| 1795 | Vom Ich als Prinzip der Philosophie, oder über das Unbedingte im menschlichen Wissen |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또는 인간 지식의 무조건적인 것에 대하여 (피히테적 관념론과 스피노자 사상 융합) |
| 1795 | Philosophische Briefe über Dogmatismus und Kritizismus | 독단론과 비판론에 대한 철학적 서한 (칸트 체계에 대한 옹호와 비판) |
| 1796 | Abhandlung zur Erläuterung des Idealismus der Wissenschaftslehre | 지식학의 관념론 해명에 대한 논문 |
| 1796/97 | Das älteste Systemprogramm des deutschen Idealismus | 독일 관념론의 가장 오래된 체계 기획 (새로운 신화 개념 도입) |
| 1797 | Neue Deduction des Naturrechts | 자연법의 새로운 연역 (피히테의 자연법 연구 예견) |
| 1797 | Ideen zu einer Philosophie der Natur als Einleitung in das Studium dieser Wissenschaft | 자연철학에 관한 이념들 (물리학 연구의 결실, 라이프니츠 언급) |
| 1798 | Von der Weltseele | 세계 영혼에 대하여 (괴테에게 인정받음) |
| 1800 | System des transcendentalen Idealismus |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 (초월론적 철학과 자연철학의 상보성 설명) |
| 1801 | Ueber den wahren Begriff der Naturphilosophie und die richtige Art ihre Probleme aufzulösen | 자연철학의 참된 개념과 그 문제 해결의 올바른 방식에 대하여 |
| 1801 | Darstellung des Systems meiner Philosophie | 내 철학 체계의 서술 (스피노자 평가, 자연과 정신의 본질적 동일성 선언) |
| 1802 | Bruno oder über das göttliche und natürliche Prinzip der Dinge | 브루노, 또는 사물의 신적 및 자연적 원리에 대하여 (피히테 간접 비판) |
| 1802 | On the Relationship of the Philosophy of Nature to Philosophy in General | 자연철학과 일반 철학의 관계에 대하여 |
| 1802-03 | Vorlesung über die Philosophie der Kunst | 예술 철학 강의 (실러의 숭고 이론 검토) |
| 1802-03 | Vorlesungen über die Methode des akademischen Studiums | 학문적 연구 방법에 대한 강의 |
| 1804 | System der gesamten Philosophie und der Naturphilosophie insbesondere (유고) | 전체 철학과 특히 자연철학의 체계 |
| 1804 | Philosophie und Religion | 철학과 종교 (악의 문제 재검토, 유한성을 '타락'으로 설명) |
| 1805-08 | "Aphorismen über die Naturphilosophie" | 자연철학에 대한 아포리즘 (뷔르츠부르크 강의록 발췌) |
| 1807 | On the Relation of the Plastic Arts to Nature | 조형 예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하여 (뮌헨 강연) |
| 1809 |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über das Wesen der menschlichen Freiheit und die damit zusammenhängenden Gegenstände |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탐구 (생전 마지막 출판작, 자유, 악, 신의 존재 탐구) |
| 1810 | Clara. Oder über den Zusammenhang der Natur- mit der Geisterwelt (유고) | 클라라: 또는 자연과 정신 세계의 연관성에 대하여 (스베덴보리 사상 긍정적 소개) |
| 1810 | Stuttgart Seminars | 슈투트가르트 세미나 |
| 1811-15 | Weltalter | 세계의 세대들 (미완성, 과거, 현재, 미래 3부작 구상, 과거 부분만 작성) |
| 1815 | "Ueber die Gottheiten von Samothrake" | 사모트라케의 신들에 대하여 (『세계의 세대들』의 일부로 구상된 논문) |
| 1830 | Darstellung des philosophischen Empirismus (유고) | 철학적 경험론의 서술 |
| 1833-34 (추정) | Zur Geschichte der neueren Philosophie | 근대 철학사에 대하여 |
| 1842 | Philosophie der Mythologie (강의) | 신화 철학 (베를린 강의, 사후 출판) |
| 1854 | Philosophie der Offenbarung (강의) | 계시 철학 (베를린 강의, 사후 출판) |
5. 개인적인 삶
셸링은 1803년 6월 2일 예나를 떠나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의 아내였던 카롤리네 슐레겔과 결혼했다. 그러나 1809년, 그의 마지막 출판작인 『자유론』이 나오기 직전에 카롤리네가 사망했다. 3년 후인 1812년, 셸링은 카롤리네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파울리네 고터와 재혼했으며, 그녀에게서 충실한 동반자를 찾았다. 셸링은 1854년 8월 20일 스위스 바트 라가츠에서 사망했다.
6. 수용과 영향
셸링의 철학은 시대에 따라 그 평가와 수용이 크게 달라졌다. 그의 사상은 동시대 철학자들로부터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후대에는 한동안 헤겔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그의 독창적인 사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음이 밝혀졌다.
6.1. 역사적 수용
셸링의 명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동이 심했다. 그의 작업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콜리지는 때로는 완전한 인정 없이 『문학적 자서전』과 같은 작품에서 셸링의 사상을 영어권 문화에 소개했다. 콜리지의 비평 작업은 영향력이 있었으며, 그가 셸링의 무의식 개념을 영어 문학에 도입했다.
1950년까지 셸링은 독일에서도 거의 잊힌 철학자였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는 신칸트주의와 신헤겔주의 철학자들, 예를 들어 빌헬름 빈델반트나 리하르트 크로너는 셸링을 피히테와 헤겔을 잇는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후기 철학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고, 1790년대와 19세기 첫 10년간의 자연철학과 예술철학이 주요 초점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쿠노 피셔는 셸링의 초기 철학을 "미학적 관념론"으로 특징지으며, 예술을 "철학의 유일하고 진정한 영원한 기관이자 문서"로 평가한 주장에 초점을 맞췄다. 게오르크 루카치와 같은 사회주의 철학자들은 그를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간주했다.
1950년대에 들어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1954년, 셸링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제 셸링 학술대회가 열렸다. 카를 야스퍼스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이 그의 사상의 독특함과 관련성에 대해 발표했고, 관심은 존재의 기원에 대한 그의 후기 작업으로 옮겨갔다. 셸링은 위르겐 하버마스의 1954년 박사 학위 논문 주제이기도 했다.
1955년, 야스퍼스는 『셸링』을 출판하여 그를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제시했다. 1954년 학술대회 조직자 중 한 명인 발터 슐츠는 "셸링 후기 철학에서 독일 관념론의 완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셸링이 특히 1840년대 베를린 강의를 통해 독일 관념론을 완성했으며, 헤겔이 미완으로 남긴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했다고 주장했다. 슐츠는 셸링이 헤겔에게 훨씬 일찍 추월당했다는 당시의 생각과는 대조적으로, 셸링을 헤겔이 미완으로 남긴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한 인물로 제시했다.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셸링에게서 배운 것이 나의 철학적, 신학적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썼다.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1957~58년 자연에 대한 강의에서 자신의 자연 존재론 프로젝트를 셸링의 그것에 비유했다.
6.2. 후대 사상에 미친 영향
셸링의 사상은 낭만주의, 실존주의, 정신분석학, 환경 철학 등 다양한 분야와 후대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 낭만주의**: 셸링의 사상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를 통해 영어권 낭만주의에 소개되었으며, 특히 그의 '무의식' 개념은 큰 영향을 주었다.
- 정신분석학**: 셸링의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899)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셸링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진화론에서 나타나는 무의식적 요소 등 내면의 요소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 실존주의**: 카를 야스퍼스는 셸링을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보았고, 마르틴 하이데거는 1936년 강의에서 셸링의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서 서양 존재론의 핵심 주제인 존재, 실존, 자유를 발견하고 이를 상세히 설명했다.
- 가톨릭 신학**: 19세기 튀빙겐 대학교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 그룹인 가톨릭 튀빙겐 학파는 셸링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의 계시 철학을 가톨릭 신학과 조화시키려 시도했다.
- 환경 철학**: 1970년대 이후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셸링의 자연철학, 특히 자연과 지적 삶을 하나의 체계와 방법으로 포괄하고 자연을 철학의 중심 주제로 복원하려는 그의 의도는 현대적 맥락에서 재평가되었다. 그의 독일 예술계, 특히 낭만주의 문학과 시각 예술과의 영향 및 관계는 1960년대 후반부터 필리프 오토 룽게부터 게르하르트 리히터, 요제프 보이스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관심은 최근 몇 년 동안 애런 게어와 같은 환경 철학자의 작업을 통해 다시 활성화되었는데, 그는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고 생태학과 생태 철학의 이해를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셸링주의 과학의 전통을 확인했다.
- 기타**: 슬라보예 지젝은 셸링의 중기 작품(『세계의 세대들』 포함)을 자크 라캉의 작업과 통합하려는 두 권의 책을 썼다. 셸링의 변증법은 대립하는 것들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로, 그의 사상을 헤겔의 사상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 역할을 했다. 후기 셸링이 탐구한 신 안의 대립과 악의 문제는 루이지 파레이손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6.3. 비판과 논쟁
셸링의 철학은 그의 생애 동안 여러 비판과 논쟁에 직면했다.
- 변화무쌍한 사상**: 일부 학자들은 셸링을 비범하지만 주제를 자주 바꾸고 완전한 철학 체계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종합 능력이 부족한 '변화무쌍한 사상가'로 평가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셸링의 사상이 깊은 단절로 특징지어지지 않으며, 대신 인간의 자유, 절대자, 정신과 자연의 관계와 같은 몇 가지 공통된 주제에 항상 초점을 맞췄다고 주장한다.
- 헤겔과의 논쟁**: 헤겔은 『정신 현상학』(1807)에서 셸링의 동일철학을 비판하며, 절대자를 직관을 통해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오히려 개념에 의한 철학을 주장했다. 헤겔은 셸링의 직관 개념을 비꼬아 "권총에서 튀어나오는 직관"이나 "모든 소가 검은 밤"이라고 표현했으며, "거기서는 모든 소가 검다"고 말했다. 이러한 표현은 셸링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이는 튀빙겐 시절부터 이어져 온 두 사람의 우정을 끝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헤겔은 셸링에게 가장 중요한 논적 중 한 명이 되었다.
- 피히테와의 결별**: 피히테는 셸링이 자연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피히테는 자연을 비아(Nicht-Ich독일어)로 보았기 때문에 철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셸링이 『내 철학 체계의 서술』(1801)에서 철학을 개인화하고 스피노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피히테와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단절로 이어졌다.
- 자연철학에 대한 과학적 비판**: 셸링의 자연철학은 유비적 경향과 경험적 지향의 부족으로 인해 과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셸링의 자연철학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 베를린 시기 강의에 대한 비판**: 셸링이 베를린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쇠렌 키르케고르는 그의 강의를 "참을 수 없는 헛소리"라고 평가했고,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에 관심이 있었던 반면 셸링은 신의 실존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비판했다. 미하일 바쿠닌은 "흥미롭지만 다소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헤겔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위대한 인물의 무덤을 모욕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강의에 참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하인리히 파울루스에 의해 그의 계시 철학 강의 내용이 몰래 출판되면서 셸링은 이를 법적으로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 야코비의 비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는 『야코비 씨의 신성한 사물에 대한 저작 기념비』에서 셸링을 무신론자로 비난했고, 셸링은 이에 반박하는 저작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