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란츠 폰 바더(Benedikt Franz Xaver Baader, Benedikt Franz Xaver Baader베네딕트 프란츠 크사버 바더독일어)는 1765년 3월 27일에 태어나 1841년 5월 23일에 사망한 독일의 가톨릭 철학자이자 신학자, 의사, 그리고 광산 공학자였다. 그는 당대의 경험주의를 비판하고, 데카르트 이후의 대부분의 서양 철학이 무신론으로 흐르고 있다고 보며 이를 강하게 비난했다. 바더는 스콜라주의의 부활을 이끌었던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동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이었으나, 후대 철학에 미친 그의 직접적인 영향은 덜 두드러진 경향이 있으며, 주요 학술 출판물에서 명시적으로 인용되기보다는 후대 사상가들의 난해한 논의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과 게르하르트 숄렘의 카발라 탐구에 촉매 역할을 했다는 점,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상에 그의 용어와 악의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흔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영향력이 인정된다. 바더는 또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학적 사유를 학계와 기독교 및 신지학 일반에 재도입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사상은 셸링 후기 및 낭만주의 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프란츠 폰 바더는 뮌헨에서 태어나 의학과 광산 공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철학 및 신학 탐구를 통해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하고 뮌헨 대학교에서 교수 활동을 펼쳤다.
2.1. 출생 및 가족 배경
베네딕트 프란츠 크사버 바더는 1765년 3월 27일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뮌헨에서 태어났다. 그는 요제프 프란츠 폰 파울라 바더(Joseph Franz von Paula Baader, 1733년 9월 15일 ~ 1794년 2월 16일)와 마리아 도로테아 로잘리아 폰 쇠프(Maria Dorothea Rosalia von Schöpf, 1742년 10월 25일 ~ 1829년 2월 5일)의 셋째 아들로, 두 사람은 1761년 5월 23일에 결혼했다. 1775년, 바더의 아버지 요제프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의 궁정 의사가 되었다. 바더의 두 형 또한 저명한 인물이었다. 첫째 형 클레멘스 알로이스 안드레아스 바더(Clemens Alois Andreas Baader, 1762년 4월 8일 ~ 1838년 3월 23일)는 작가였으며, 둘째 형 요제프 안톤 이그나츠 바더(Joseph Anton Ignaz Baader, 1763년 9월 30일 ~ 1835년 11월 20일)는 공학자였다.
2.2. 학업 및 초기 경력
프란츠 폰 바더는 잉골슈타트와 빈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잠시 동안 아버지의 진료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의사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깨달은 그는 곧 광산 공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바더는 프라이베르크에서 아브라함 고틀로프 베르너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고, 독일 북부의 여러 광산 지역을 여행했다. 1792년부터 1796년까지는 영국에서 거주했다.
영국에서 그는 데이비드 흄, 데이비드 하틀리, 윌리엄 고드윈의 경험주의를 접했으나, 이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다. 대신 그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루이 클로드 드 생 마르탱, 그리고 특히 야코프 뵈메의 신비주의적 사변에 더 큰 흥미를 느꼈다. 1796년 독일에 돌아온 그는 함부르크에서 F. H. 야코비를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셸링과도 교류했으며, 이 시기에 출판한 그의 저작들은 셸링의 영향을 받았으나, 바더는 셸링으로부터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들의 우정은 1822년경까지 이어졌는데, 바더가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현대 철학을 비난하자 셸링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도 바더는 자신의 직업에 계속 전념했다. 그는 유리 제조 시 탄산칼륨 대신 황산나트륨을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여 약 117 kg의 은에 해당하는 상금을 받았다. 1817년부터 1820년까지 광산 감독관직을 맡았으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820년에 은퇴한 후, 1822년부터 1825년까지 6부작으로 구성된 대표작 중 하나인 『인식의 발효(Fermenta Cognitionis)』를 출판했다. 이 저서에서 그는 현대 철학에 반대하며 뵈메의 사상을 연구할 것을 권장했다.
2.3. 철학 및 신학 탐구와 영향
바더는 영국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루이 클로드 드 생 마르탱, 그리고 특히 야코프 뵈메의 신비주의적 사변에 접하며 자신만의 철학적, 신학적 사유를 발전시켰다. 그는 이마누엘 칸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셸링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나, 칸트 철학의 주관성과 도덕과 자연의 분리를 비판했다. 그는 뵈메의 신지학에 자극을 받아, 인간 내부에서 신이 스스로를 전개하는 것이 본래의 어둠 속에 있는 정신 상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가톨릭의 입장에서 신학과 사변 철학의 통합을 주장하며 후기 셸링과 낭만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2.4. 교수 활동 및 말년
1826년, 뮌헨에 새로운 대학교가 개설되자 그는 철학 및 사변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1827년부터 1836년까지 4부작으로 구성된 강의록 『사변적 교의학(Speculative Dogmatics, Spekulative Dogmatik스페쿨라티베 도그마티크독일어)』을 출판했다. 1831년에는 『종교적 에로티시즘의 40가지 명제(Forty Sentences from a Religious Erotic)』를 뮌헨의 화가 에밀리에 린더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1838년,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민사 문제에 간섭하는 것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그 결과 생애 마지막 3년 동안 종교 철학 강의가 금지되었다. 그는 1841년 5월 23일에 사망했으며, 뮌헨의 알터 쉬트프리트호프에 묻혔다.
3. 철학 및 사상
바더의 철학은 주로 경구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으며, 이성과 계시의 조화를 추구하는 신비주의적 접근을 특징으로 한다.
3.1. 사유 체계 및 방법론
바더는 종종 난해한 경구나 신비적인 상징, 유비를 사용하여 글을 썼다. 그의 교리들은 짧은 단편적인 에세이, 야코프 뵈메와 루이 클로드 드 생 마르탱의 저작에 대한 주석, 또는 광범위한 서신과 일기 속에 주로 담겨 있다. 바더는 인간 이성만으로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으며, 신앙, 교회, 전통의 전제를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그의 관점은 스콜라주의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스콜라학자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신학과 철학이 대립하지 않고 이성이 권위와 계시에 의해 주어진 진리들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과 지식의 영역을 더욱 가깝게 만들려는 시도에서 그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파라켈수스, 그리고 뵈메의 신비주의에 접근한다.
3.2. 존재론 및 인식론
바더는 우리의 존재가 신이 우리를 인식하는 것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이는 "나는 생각되는 고로 나는 생각하고 존재한다(cogitor ergo cogito et sum코기토르 에르고 코기토 엣 숨라틴어)"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모든 자기 의식은 동시에 신 의식이며, 모든 지식은 신과 함께 아는 것, 신을 의식하는 것, 또는 신 안에 참여하는 것이다.
4. 신학
바더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신지학의 한 형태이다. 그는 신을 추상적인 존재(substantia수브스탄티아라틴어)가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인 근원적인 의지이자 영원한 과정 또는 활동(actus악투스라틴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1. 신, 삼위일체, 창조
바더에게 신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인 근원적인 의지이자 영원한 과정 또는 활동이다. 이 과정은 신의 자기-생성으로 기능하며, 여기에는 내재적 또는 비의적인 측면과 탁월적 또는 외의적인 측면을 구별할 수 있다. 오직 "원초적 의지"가 스스로를 생각하거나 의식할 때에만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것, 생산하는 자와 생산된 것을 구별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영이 되는 힘이 나온다. 신은 절대적인 영으로서만 자신의 실재성을 갖는다. 삼위일체(바더는 이를 Ternar테르나르라틴어라고 불렀다)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가능하며, "원초적 의지"와 구별되지는 않지만 그 옆에 존재하는 신의 영원하고 비인격적인 이념 또는 지혜 속에 반영되고 그를 통해 실현된다. 이 삼위일체의 개별적 측면들에는 신에 의해 영원하고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자연을 통해 인격과 구체적인 실재성이 부여된다. 이러한 존재의 측면들은 시간 속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존재의 자기 진화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영원한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수브 스페키에 아에테르니타티스라틴어)' 발생한다. 이 "자연"은 창조의 "자연"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데, 창조는 신의 사랑과 의지의 불필요하고 자유로우며 비시간적인 행위이며, 사변적으로 연역될 수 없고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보았다.
4.2. 인간론, 윤리학, 구원론
창조된 존재는 원래 세 가지 질서로 나뉘었다: 지성적인 존재인 천사; 비지성적인 물질 세계; 그리고 이 둘 사이를 중재하는 인간. 천사와 인간은 자유 의지를 부여받았다. 아담의 타락과 루시퍼의 타락은 필연적이지는 않았지만 가능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바더는 천사들이 신과 동등해지려는 욕망(교만) 때문에 타락했으며, 인간은 다양한 육체적 죄를 통해 자연의 수준으로 스스로를 떨어뜨림으로써 타락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세계, 즉 시간, 공간, 물질을 가진 세계는 인류의 타락 후에야 시작되었으며, 인류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기 위한 신의 선물로 창조되었다. 바더는 이러한 우주 이해를 바탕으로 여러 저작에서 생리학과 인류학 이론을 발전시켰지만, 대체로 뵈메의 사상과 일치한다. 그는 주로 다양한 죄의 악영향을 추적하고, 죄를 제거함으로써 자연의 조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윤리학 체계는 칸트주의처럼 도덕 법칙에 대한 순종만으로는 충분하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대신, 인간이 스스로는 이를 이룰 능력을 잃었지만, 신적인 질서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깨닫고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한 깨달음을 위해서는 은총이 필요하므로, 죄와 구원을 무시하는 어떠한 윤리 이론도 만족스럽거나 심지어 가능하지 않다고 여겼다. 선행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치유하는 덕이 주로 기도와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더는 19세기 가톨릭에서 가장 위대한 사변 신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 특히 리하르트 로테, 율리우스 뮐러, 한스 라센 마르텐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5. 정치 사상
바더는 이상적인 국가가 가톨릭 교회가 통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군주에 대한 복종과 계급의 불평등이 국가 질서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5.1. 국가와 통치의 원리
바더는 국가에 두 가지 필수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통치자에 대한 공통된 복종인데, 이것이 없으면 내전이나 침략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계급 불평등인데, 이것이 없으면 정부 조직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바더는 오직 신만이 인류의 진정한 통치자라고 생각했으므로, 정부에 대한 충성심은 오직 그 정부가 진정으로 기독교적일 때에만 확보되거나 주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제정치, 사회주의, 자유주의 모두에 동등하게 반대했다. 그의 이상적인 국가는 가톨릭교회가 통치하는 시민 공동체였으며, 그 원리는 수동적이고 비합리적인 경건주의와 지나치게 합리적인 개신교 교리 모두에 반대했다.
6. 젠더와 안드로지니
바더의 핵심 사상 중 하나는 그의 안드로지니 개념이다.
그는 안드로지니를 "두 성별의 조화로운 융합으로, 특정 무성애를 낳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종합이며, 자웅동체처럼 두 성별을 '격렬한 대립 속에서' 단순히 병치시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창세기의 인류 창조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의 문자적 표현을 따라, 바더는 인간이 원래 안드로지너스적 존재였다고 말한다. 남자나 여자 중 어느 한쪽이 "신의 형상과 모습"이 아니라, 오직 안드로지너스적 존재만이 그렇다고 보았다. 두 성별 모두 안드로지니의 원래 신성에서 동등하게 타락했다는 것이다. 안드로지니즘은 신에 대한 인간의 유사성이며, 인간의 초자연적인 상승이다. 따라서 성별은 사라져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바더는 결혼 성사를 천사적 양성성의 상징적인 회복으로 해석했다. 그는 "두 연인의 불가분의 결합 속에 있는 참된 사랑의 비밀과 성사는, 각자가 자신 안에서 안드로지니, 즉 순수하고 온전한 인류를 회복하는 것을 서로 돕는 데 있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은 원초적인 안드로지니의 회복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보았다. 바더는 세상의 종말이 다가옴에 따라 원초적인 안드로지니가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7. 주요 저작 및 편집본
바더의 주요 저술은 그의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 수집, 편집되어 출판되었으며, 일부 개별 저작들도 당대에 출판되었다.
그의 사후, 바더의 저작들은 여러 제자들에 의해 수집되고 편집되었다. 이 저작집은 1851년부터 1860년 사이에 라이프치히에서 주제별로 분류되어 총 16권으로 출판되었다.
| 권수 | 주제 |
|---|---|
| 제1권 | 인식론 |
| 제2권 | 형이상학 |
| 제3권 | 자연 철학 |
| 제4권 | 인류학 |
| 제5권 & 제6권 | 사회 철학 |
| 제7권 ~ 제10권 | 종교 철학 |
| 제11권 | 바더의 일기 |
| 제12권 | 루이 클로드 드 생 마르탱에 대한 주석 |
| 제13권 | 야코프 뵈메에 대한 주석 |
| 제14권 | 시간 |
| 제15권 | 바더의 전기 및 서신 |
| 제16권 | 이전 권들의 색인 및 요한 안톤 베른하르트 루트터벡의 사상 체계 개요 |
각 권의 서문에는 편집자들이 작성한 귀중한 서론이 붙어 있다.
바더의 주요 개별 저작은 다음과 같다.
- 『인식의 발효(Fermenta Cognitionis)』 (6부작, 1822년 ~ 1825년)
- 『사변적 교의학(Vorlesungen über spekulativen Dogmatik)』 (4부작, 1827년 ~ 1836년)
- 『종교적 에로티시즘의 40가지 명제(Forty Sentences from a Religious Erotic)』 (1831년)
최근에는 그의 저작들이 비판적으로 주석된 형태로 재출간되고 있다.
- 『자연 철학 텍스트(Texte zur Naturphilosophie) (1792-1808)』. (역사-비판적 주석판, 알베르토 본키노 편집, 라이덴/파더보른, 2021년)
- 『신비주의 및 신지학 텍스트(Texte zur Mystik und Theosophie) (1808-1818)』. (역사-비판적 주석판, 알베르토 본키노 편집, 라이덴/파더보른, 2021년)
- 『인식의 발효(Fermenta Cognitionis) (1822-1825)』. (역사-비판적 주석판, 알베르토 본키노 편집, 라이덴/파더보른, 2024년)
- 『사변적 교의학 강의록(Vorlesungen über speculative Dogmatik) (1828-1838)』. (역사-비판적 주석판, 알베르토 본키노 편집, 라이덴/파더보른, 2024년)
8. 영향 및 평가
바더는 19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사상은 후대 철학자 및 신학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8.1. 후대에 미친 영향
프란츠 폰 바더는 19세기 가톨릭에서 가장 위대한 사변 신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의 사상은 리하르트 로테, 율리우스 뮐러, 한스 라센 마르텐센 등 여러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철학적 영향은 종종 미묘하게 드러나며, 특정 주요 출판물에서 직접적으로 인용되기보다는 후대 사상가들의 난해한 논의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경향이 있다.
주목할 만한 예외는 발터 벤야민과 게르하르트 숄렘의 카발라 탐구의 기원을 설명하는 서신과 후기 해설에서 나타나는데, 바더와 몰리터가 그들의 탐구에 촉매 역할을 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된다. 바더의 영향이 숨겨지는 경향의 한 예는 마르틴 하이데거 사상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발견된다. 벤야민과 하이데거 모두 하인리히 리케르트의 1913년 세미나에서 초기 스콜라 사상의 주요 문제들을 재방문하는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바더가 그 길을 제시하고 벤야민과 하이데거의 정식화에 흔적을 남긴 영역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특징적인 방식으로) 바더의 작업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지만, 그의 용어와 악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그가 이 주제에 대해 바더를 읽었음을 시사한다. 하이데거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의 변신론에 대한 정식화를 둔스 스코투스의 일차 문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바더에게서 그 뿌리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바더는 오늘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의 신학적 참여를 학계와 기독교 및 신지학 일반에 재도입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의 사상은 후기 셸링과 낭만주의 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8.2. 비판 및 논쟁
바더는 그의 사상이 종종 난해한 경구나 신비적 상징으로 표현되어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그가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현대 철학을 비난한 것이 프리드리히 셸링과의 오랜 우정을 단절시키는 원인이 되는 등, 그의 사상적 입장이 일부 학자나 사상가들과의 관계에서 논쟁을 야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