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원
'프랑스'라는 국명은 라틴어 Francia프랑키아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프랑크족의 땅'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영어 단어 'frank'(자유로운)와 관련된 프랑크족의 명칭은 고대 프랑스어 'franc'(자유로운, 고귀한, 성실한)에서 비롯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자유로운, 복무 면제자; 자유민, 프랑크인'을 의미하는 중세 라틴어 'francus'에서 파생되었다. 이는 프랑크족의 고유 명칭인 프랑크어 '*Frank'가 후기 라틴어에 차용되면서 일반화된 것이다. 골 지방 정복 이후 프랑크족만이 세금 면제 대상이었기 때문에 '자유로운'이라는 의미가 채택되었다는 설과, 단순히 농노나 노예와 대조되는 자유민의 지위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Frank'의 어원은 불확실하지만, 전통적으로 '창' 또는 '투창'을 의미하는 게르만조어 'frankōn'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프랑크족의 투척용 도끼는 francisca프란키스카라틴어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 무기가 프랑크족의 사용으로 인해 명명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영어에서 'France'는 미국 영어에서는 /fræns/(프랜스)로, 영국 영어에서는 /frɑːns/(프란스) 또는 /fræns/(프랜스)로 발음된다. /ɑː/ 발음은 주로 용인 발음과 같이 trap-bath 분화가 있는 악센트에 한정되지만, 카디프 영어와 같은 일부 다른 방언에서도 들을 수 있다.
2. 역사
프랑스 영토의 역사는 약 180만 년 전 최초의 인류 흔적으로부터 시작된다. 구석기 시대를 거쳐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농업과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고, 이후 금속기가 등장하며 문화가 발전했다. 고대에는 켈트족 계열의 갈리아인이 거주했으며, 기원전 1세기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되어 갈로-로만 문화가 형성되었다. 5세기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프랑크 왕국이 성립되었고, 중세에는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를 거치며 왕권이 강화되고 영토가 확장되었다. 근세에는 부르봉 왕조 아래 절대왕정이 확립되었으나,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시대, 제정, 공화정을 반복하며 격동의 19세기를 보냈다. 20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으며, 전후에는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을 거치며 유럽 연합의 주도국으로 발전하고 현대 사회의 다양한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2.1. 선사 시대와 고대

현재 프랑스 영토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은 약 18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안데르탈인은 후기 구석기 시대까지 이 지역에 거주했으나, 기원전 35,000년경 호모 사피엔스로 점차 대체되었다. 이 시기에는 도르도뉴와 피레네산맥 지역에서 동굴 벽화가 등장했으며, 대표적인 예로 기원전 18,000년경으로 추정되는 라스코 동굴 벽화가 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기원전 10,000년경에는 기후가 온화해졌고, 기원전 7,000년경부터 서유럽의 이 지역은 신석기 시대로 접어들어 주민들이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기원전 4천년기에서 3천년기 사이에 인구와 농업이 발전한 후, 금속 시대가 도래하여 처음에는 금, 구리, 청동을, 나중에는 철을 다루기 시작했다. 프랑스에는 신석기 시대의 수많은 거석 기념물 유적이 있으며, 대표적으로 약 기원전 3,300년경의 카르나크 열석이 있다.
기원전 600년, 포카이아 출신의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이 마살리아(오늘날의 마르세유)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한편, 켈트족 부족들은 프랑스 동부와 북부 지역으로 침투하여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기원전 390년경, 갈리아인 추장 브렌누스와 그의 군대는 로마령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알리아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로마를 포위하여 약탈했다. 이로 인해 로마는 약화되었고, 갈리아인들은 기원전 345년 평화 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이 지역을 계속 괴롭혔다. 그러나 로마와 갈리아인들은 수 세기 동안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기원전 125년경, 갈리아 남부는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고, 로마인들은 이 지역을 Provincia Nostra프로빈키아 노스트라라틴어("우리의 속주")라고 불렀으며, 이는 프랑스어로 프로방스가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고 기원전 52년 갈리아인 추장 베르킨게토릭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를 여러 속주로 나누었고, 갈로-로만 시대에는 루그두눔(오늘날의 리옹)을 포함한 많은 도시들이 갈리아의 수도로 건설되었다. 서기 250년에서 290년 사이에 로마령 갈리아는 국경 요새가 게르만 부족에게 공격당하는 위기를 겪었다. 4세기 전반에는 상황이 개선되어 부흥과 번영의 시기를 맞이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이 증가했다. 그러나 5세기부터 게르만 부족의 침입이 재개되었다. 서고트족은 남서부에, 부르군트족은 라인강 유역에, 그리고 프랑크족은 북부에 정착했다.
2.2. 중세 초기 (5~10세기)

고대 후기, 갈리아는 여러 게르만 왕국과 남아있는 갈로-로만 영토로 나뉘었다. 브리튼 제도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을 피해 도망친 켈트족 계열의 브리튼인들은 서부 아르모리카에 정착했다. 아르모리카 반도는 브르타뉴로 이름이 바뀌었고 켈트 문화가 부활했다.
모든 프랑크족을 처음으로 통합한 지도자는 클로비스 1세였다. 그는 481년 살리 프랑크족의 왕으로 즉위하여 486년 로마 총독들의 마지막 군대를 격파했다. 클로비스 1세는 서고트 왕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 기독교로 세례를 받겠다고 약속했고, 이 약속이 전투를 보장했다고 전해진다. 클로비스 1세는 서고트족으로부터 남서부 지역을 되찾고 508년에 세례를 받았다. 클로비스 1세는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가톨릭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게르만 정복자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교황청으로부터 "교회의 장녀"라는 칭호를 받았고, 프랑스 왕들은 "프랑스의 가장 기독교적인 왕"으로 불렸다.
프랑크족은 기독교 갈로-로만 문화를 받아들였고, 고대 갈리아는 '프랑키아'("프랑크족의 땅")로 이름이 바뀌었다. 게르만계 프랑크족은 로망스어군을 채택했다. 클로비스는 파리를 수도로 삼고 메로빙거 왕조를 세웠으나, 그의 왕국은 그가 죽은 후 살아남지 못했다. 프랑크족은 토지를 사유 재산으로 취급하여 상속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클로비스의 왕국에서 파리, 오를레앙, 수아송, 랭스 등 네 개의 왕국이 등장했다. 마지막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궁재(가정 총책임자)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궁재 중 한 명인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갈리아 침공을 격퇴했다. 그의 아들 단신왕 피핀은 약화된 메로빙거 왕조로부터 프랑키아의 왕위를 찬탈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들을 재통일하고 서유럽과 중앙유럽에 걸쳐 제국을 건설했다.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포되어 프랑스 정부와 가톨릭교회의 오랜 역사적 관계를 확립한 샤를마뉴는 서로마 제국과 그 문화적 위용을 부활시키려 했다. 샤를마뉴의 아들 루트비히 1세 경건왕은 제국을 통일된 상태로 유지했으나,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은 루트비히 1세의 세 아들 사이에서 동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으로 분할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은 현대 프랑스가 차지하는 지역과 거의 일치하며 그 전신이었다.
9세기와 10세기 동안 바이킹의 침입에 위협받던 프랑스는 분권화된 국가가 되었다. 귀족들의 칭호와 토지는 세습되었고, 왕의 권위는 세속적이기보다는 종교적이 되어 덜 효과적이었으며 귀족들의 도전을 받았다. 이리하여 프랑스에 봉건제가 확립되었다. 일부 왕의 봉신들은 너무 강력해져서 왕에게 위협이 되었다.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정복왕 윌리엄은 자신의 칭호에 "잉글랜드 왕"을 추가하여 프랑스 왕의 봉신이자 동등한 존재가 되어 반복적인 긴장을 야기했다.
2.3. 중세 중후반기 (10~15세기)

카롤링거 왕조는 987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했고, 그해 위그 카페가 프랑크족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후손들은 전쟁과 상속을 통해 나라를 통일했다. 1190년부터 카페 왕조의 통치자들은 "프랑크인의 왕"이 아닌 "프랑스 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후대의 왕들은 15세기까지 자신들의 직속 왕령지(프랑스 왕령)를 현대 프랑스의 절반 이상으로 확장했다. 왕권은 더욱 확고해졌으며, 귀족, 성직자, 평민을 구분하는 계층적 사회 구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귀족들은 성지에 대한 기독교도의 접근권을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 기사들은 200년간의 십자군 운동에서 대부분의 증원군을 구성했으며, 아랍인들은 십자군을 Franj프란즈아랍어라고 불렀다. 프랑스 십자군은 프랑스어를 레반트 지역으로 전파하여 고대 프랑스어가 십자군 국가의 링구아 프랑카("프랑크인의 언어")의 기초가 되었다. 1209년에는 오늘날 프랑스 남서부에서 이단으로 간주된 카타리파를 제거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11세기부터 앙주 백작령의 통치자였던 플랜태저넷 왕가는 멘과 투렌 등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후, 잉글랜드에서 피레네산맥까지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여 현대 프랑스의 절반을 차지했다. 프랑스와 플랜태저넷 제국 사이의 긴장은 백 년간 지속되었고, 1202년부터 1214년 사이에 필리프 2세가 제국의 대륙 영토 대부분을 정복하여 잉글랜드와 아키텐만이 플랜태저넷 왕가에 남게 되었다.
샤를 4세는 1328년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왕위는 플랜태저넷 가문의 에드워드가 아닌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에게 넘어갔고,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3세가 되었다. 필리프 6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정은 중세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필리프 6세의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단속적인 백년 전쟁에 돌입했다. 국경은 변했지만, 프랑스 내 잉글랜드 왕들의 영지는 수십 년 동안 광범위하게 유지되었다. 잔 다르크와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들과 함께 프랑스의 반격은 대부분의 잉글랜드 대륙 영토를 되찾았다. 프랑스는 흑사병으로 타격을 입어 1,700만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다.
2.4. 근세 (15세기~1789년)

프랑스 르네상스는 문화 발전과 프랑스어의 표준화를 가져왔고, 프랑스어는 빌레르코트레 칙령에 따라 프랑스의 공식 언어이자 유럽 귀족 사회의 언어가 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전쟁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쟁자가 되었으며, 이는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외교 정책의 많은 부분을 결정지었다. 프랑스 탐험가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땅을 요구하며 프랑스 식민제국 확장의 길을 열었다. 프로테스탄트의 부상은 프랑스를 프랑스 종교 전쟁으로 알려진 내전으로 이끌었다. 이로 인해 위그노들은 영국 제도와 스위스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다. 전쟁은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으로 끝났으며, 이 칙령은 위그노에게 어느 정도의 종교적 자유를 부여했다. 합스부르크 스페인 군대는 1589년부터 1594년까지 가톨릭을 지원했으며 1597년에 프랑스를 침공했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1635년부터 1659년까지 전면전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3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루이 13세 치하에서 리슐리외 추기경은 국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그는 반항적인 영주들의 성을 파괴하고 사병 사용을 비난했다. 1620년대 말까지 리슐리외는 "왕실의 무력 독점"을 확립했다. 프랑스는 30년 전쟁에 참전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 프로테스탄트 측을 지원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프랑스는 대서양 노예 무역의 약 10%를 차지했다.
루이 14세가 미성년이었을 때 프롱드의 난으로 알려진 혼란이 발생했다. 이 반란은 봉건 영주들과 최고 법원들이 왕실의 절대 권력에 반발하여 일으킨 것이었다. 왕정은 17세기 루이 14세 통치 기간 동안 절정에 달했으며, 이 기간 동안 프랑스는 영향력을 더욱 증대시켰다. 영주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궁신으로 만듦으로써 군대에 대한 그의 지휘권은 도전을 받지 않게 되었다. "태양왕"은 프랑스를 유럽의 주도적인 강국으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가 되었고 유럽 정치, 경제, 문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어는 20세기까지 외교, 과학, 문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가 되었다. 프랑스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영토를 장악했다. 1685년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수천 명의 위그노를 추방시키고, 노예 제도의 법적 틀을 제공하고 프랑스 식민지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흑인법을 공포했다.
루이 15세(재위 1715년~1774년)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7년 전쟁(1756년~1763년)에서 패배한 후 누벨프랑스와 대부분의 인도 영토를 잃었다. 그러나 로렌과 코르시카를 획득하는 등 유럽 본토 영토는 계속해서 성장했다. 루이 15세의 취약한 통치, 그의 궁정의 퇴폐를 포함하여 왕정의 신뢰를 떨어뜨렸고, 이는 부분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길을 열었다.
루이 16세(재위 1774년~1793년)는 돈, 함대, 군대로 미국을 지원하여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는 복수했지만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이는 혁명에 기여한 요인이 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일부는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일어났으며, 산소 명명(1778년)과 승객을 태운 최초의 열기구(1783년)와 같은 과학적 돌파구는 프랑스 과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프랑스 탐험가들은 해상 원정을 통해 과학 탐험 항해에 참여했다. 합리주의를 주요 정당성의 원천으로 옹호하는 계몽주의 철학은 왕정의 권력과 지지를 약화시켰고 혁명의 한 요인이 되었다.
2.5. 프랑스 혁명 (1789년~1799년)

프랑스 혁명은 1789년 삼부회 소집으로 시작되어 1799년 18 브뤼메르 쿠데타와 프랑스 통령정부 수립으로 끝난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시기였다. 혁명의 많은 사상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이며, 그 가치와 제도는 현대 정치 담론의 중심에 남아 있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들의 복합체였으며, 앙시앵 레짐은 이를 관리할 수 없었다. 재정 위기와 사회적 고통은 1789년 5월 삼부회 소집으로 이어졌고, 6월에는 국민의회로 전환되었다.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의회에 의한 일련의 급진적인 조치로 이어졌으며, 그중에는 봉건제 폐지, 가톨릭교회에 대한 국가 통제, 인권 선언 등이 있었다.
이후 3년은 정치적 통제를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었으며, 경제 불황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1792년 4월 프랑스 혁명 전쟁 발발 이후의 군사적 패배는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이어졌다. 9월에는 군주제가 폐지되고 프랑스 제1공화국으로 대체되었으며, 1793년 1월에는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
1793년 6월 또 다른 봉기 이후 헌법이 정지되고 권력이 국민공회에서 공안위원회로 넘어갔다. 약 16,000명이 공포 정치 기간 동안 처형되었으며, 이는 1794년 7월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끝났다.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반대로 약화된 공화국은 1795년 총재정부로 대체되었다. 4년 후인 1799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쿠데타로 통령정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2.6. 나폴레옹 시대와 19세기 (1799년~1914년)

나폴레옹은 1799년 제1통령이 되었고, 이후 프랑스 제1제정(1804년~1814년; 1815년)의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 변화하는 유럽 연합 세력들은 나폴레옹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의 군대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같은 신속한 승리로 유럽 대륙 대부분을 정복했다.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들은 새롭게 수립된 일부 왕국의 군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승리는 프랑스 혁명 사상과 개혁, 즉 미터법, 나폴레옹 법전, 인권 선언 등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공격하여 모스크바까지 진격했다. 그 후 그의 군대는 보급 문제, 질병, 러시아의 공격, 그리고 마침내 겨울로 인해 와해되었다. 이 비참한 원정과 그에 따른 유럽 군주국들의 봉기 이후 나폴레옹은 패배했다. 약 백만 명의 프랑스인이 나폴레옹 전쟁 중에 사망했다. 망명에서 잠시 돌아온 후, 나폴레옹은 마침내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했고, 부르봉 왕정은 새로운 헌법적 제한과 함께 복원되었다.
신뢰를 잃은 부르봉 왕조는 1830년 7월 혁명으로 전복되었고, 입헌군주제인 7월 왕정이 수립되었다. 프랑스군은 알제리 정복을 시작했다. 불안은 1848년 프랑스 혁명과 7월 왕정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노예제 폐지와 남성 보통선거 도입이 1848년에 다시 제정되었다. 1852년,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이자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2제정의 황제로 선포되어 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그는 해외, 특히 크림반도, 멕시코, 이탈리아에 프랑스의 개입을 늘렸다.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한 후 퇴위했고, 그의 정권은 제3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1875년까지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은 완료되었으며, 기근, 질병, 폭력으로 인해 약 825,000명의 알제리인이 사망했다.

프랑스는 17세기 초부터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19세기와 20세기에 그 제국은 크게 확장되어 대영 제국에 이어 두 번째로 커졌다. 수도권 프랑스를 포함하여 총면적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거의 1300.00 만 km2에 달했으며, 이는 세계 육지의 9%에 해당한다. 벨 에포크로 알려진 세기 전환기는 낙관주의, 지역 평화, 경제 번영, 기술, 과학 및 문화 혁신이 특징이었다. 1905년, 국가 세속주의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2.7. 20세기 초중반 (1914년~1946년)

프랑스는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독일의 침공을 받았고 영국의 방어를 받았다. 북부의 부유한 공업 지역이 점령되었다. 프랑스와 연합국은 엄청난 인적, 경제적 비용을 치르고 중앙 동맹국에 대해 승리했다. 이로 인해 140만 명의 프랑스 군인이 사망했으며, 이는 인구의 4%에 해당한다. 전간기는 극심한 국제적 긴장과 인민전선 정부가 도입한 사회 개혁(예: 연차 유급 휴가, 8시간 노동일, 여성의 정부 참여)이 특징이었다.
1940년,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아 신속하게 패배했다. 프랑스는 북부의 독일 점령 지역, 이탈리아 점령 지역, 그리고 나머지 프랑스 영토인 미점령 지역으로 나뉘었으며, 이는 프랑스 남부와 프랑스 제국으로 구성되었다. 독일과 협력하는 권위주의 정권인 비시 정부가 미점령 지역을 통치했다. 샤를 드골이 이끄는 망명 정부인 자유 프랑스는 런던에 수립되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약 16만 명의 프랑스 시민, 그중 약 75,000명의 유대인이 절멸 수용소와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국은 노르망디에 상륙했고, 8월에는 프로방스에 상륙했다. 연합국과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승리하여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GPRF)와 함께 프랑스 주권이 회복되었다. 드골이 수립한 이 임시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협력자들을 공직에서 숙청했다. 또한 여성에게 참정권을 확대하고 사회 보장 제도를 창설하는 등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다.
2.8. 현대 (1946년~현재)

새로운 헌법은 강력한 경제 성장(영광의 30년)을 보인 프랑스 제4공화국(1946년~1958년)을 탄생시켰다. 프랑스는 나토의 창립 회원국이었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1954년 베트민에게 패배했다. 프랑스는 당시 프랑스의 일부이자 백만 명이 넘는 유럽 정착민(피에 누아르)의 본거지였던 알제리에서 또 다른 반식민주의 분쟁에 직면했다. 프랑스는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고문과 탄압, 초법적 살인을 체계적으로 사용했다. 이 분쟁은 거의 쿠데타와 내전으로 이어질 뻔했다.
1958년 5월 위기 동안 약한 제4공화국은 대통령 권한이 강화된 제5공화국에 자리를 내주었다. 전쟁은 1962년 에비앙 협정으로 끝났고, 이는 알제리 독립으로 이어졌지만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50만에서 100만 명 사이의 사망자와 200만 명이 넘는 국내 실향민이 발생했다. 약 백만 명의 피에 누아르와 하르키가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피신했다. 제국의 잔재는 프랑스 해외 데파르트망 및 영토이다.
냉전 기간 동안 드골은 서구권과 동구권에 대해 "국가 독립"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나토의 군사 통합 사령부에서 탈퇴(동맹에는 남아 있음)하고, 핵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프랑스를 네 번째 핵보유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프랑스-독일 관계를 회복하여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유럽의 균형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초국가적 유럽의 발전에 반대하고 주권 국가를 선호했다. 1968년 5월 봉기는 엄청난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이는 보수적인 도덕적 이상(종교, 애국심, 권위에 대한 존중)이 보다 자유주의적인 도덕적 이상(세속주의, 개인주의, 성혁명)으로 전환되는 분수령이었다. 봉기는 정치적으로 실패했지만(드골주의 정당이 이전보다 강력해짐), 이는 프랑스 국민과 드골 사이의 분열을 예고했고, 드골은 사임했다.
드골 이후 시대에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경제 중 하나로 남아 있었지만, 높은 실업률과 공공 부채 증가를 초래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프랑스는 초국가적 유럽 연합 발전의 선두에 서 있었으며, 특히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서명하고, 1999년 유로존을 설립하고, 2007년 리스본 조약에 서명했다. 프랑스는 나토에 완전히 재통합되었으며 이후 나토가 후원하는 대부분의 전쟁에 참여했다. 19세기 이후 프랑스는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주로 고용되지 않으면 고국으로 돌아가는 유럽 가톨릭 국가 출신의 남성 외국인 노동자였다. 1970년대에 프랑스는 경제 위기에 직면했고, 새로운 이민자(주로 북서 아프리카의 마그레브 출신)가 가족과 함께 프랑스에 영구 정착하고 시민권을 취득하도록 허용했다.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무슬림이 보조금을 받는 공공 주택에 거주하며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다. 정부는 이민자들이 프랑스 가치와 규범을 준수해야 하는 이민자 동화 정책을 시행했다.
1995년 대중교통 폭탄 테러 이후 프랑스는 이슬람 단체의 표적이 되어 왔으며, 특히 2015년 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공개 집회를 촉발하여 440만 명이 모였다. 2015년 11월 파리 테러는 130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영토에서 발생한 가장 치명적인 테러였고, 2004년 마드리드 열차 폭탄 테러 이후 유럽 연합에서 가장 치명적인 테러였다. ISIS를 억제하기 위한 프랑스의 군사 노력인 샤말 작전은 2014년에서 2015년 사이에 1,000명 이상의 ISIS 병력을 사살했다.
3. 지리
프랑스는 서유럽에 위치하며, 본토 외에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해외 영토와 집합체를 포함한다. 프랑스 본토는 북해, 영국 해협, 대서양, 지중해와 접하고 있으며,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모나코, 안도라, 스페인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알프스산맥, 피레네산맥 등 주요 산맥과 파리 분지, 아키텐 분지 등 넓은 평야, 센 강, 루아르 강, 론 강, 가론 강 등 주요 강이 국토를 가로지른다. 기후는 서안 해양성, 대륙성, 지중해성, 산악 기후 등 다양하게 나타나며, 풍부한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을 자랑한다. 여러 국립공원과 자연보호구역이 지정되어 있으며, 정부는 환경 문제 해결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3.1. 위치와 국경
프랑스 영토와 인구의 대부분은 서유럽에 위치하며, 이를 프랑스 본토라고 한다. 북쪽으로는 북해, 북서쪽으로는 영국 해협,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동쪽으로는 지중해와 접한다. 육상 국경은 북동쪽으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동쪽으로 독일과 스위스, 남동쪽으로 이탈리아와 모나코, 남쪽과 남서쪽으로 안도라와 스페인과 접한다. 북동쪽을 제외하고 프랑스 육상 국경의 대부분은 피레네산맥, 알프스산맥, 쥐라산맥, 라인강과 같은 자연 경계와 지리적 특징으로 대략적으로 구분된다. 프랑스 본토에는 가장 큰 섬인 코르시카를 포함한 다양한 해안 섬들이 있다. 프랑스 본토는 대부분 북위 41도에서 51도, 서경 6도에서 동경 10도 사이에 위치하며, 유럽 서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아 북부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본토의 대륙 부분은 남북으로 약 1000 km, 동서로 약 1000 km에 걸쳐 있다.
프랑스 본토의 면적은 55.15 만 km2로, 유럽 연합 회원국 중 가장 넓다. 프랑스의 총면적은 해외 데파르트망과 영토(아델리랜드 제외)를 포함하여 64.38 만 km2이며, 이는 지구 전체 육지 면적의 0.45%에 해당한다. 프랑스는 북부와 서부의 해안 평야부터 남동부의 알프스산맥, 남중부의 중앙산지, 남서부의 피레네산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해외 데파르트망과 영토 덕분에 프랑스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배타적 경제 수역(EEZ)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면적은 1103.50 만 km2에 달한다. 프랑스의 EEZ는 전 세계 모든 EEZ 총면적의 약 8%를 차지한다.
3.2. 지형과 수계
프랑스 본토는 매우 다양한 지형과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다. 고생대 헤르키니아 조산 운동 시기에 아르모리카산지, 중앙산지, 모르방산지, 보주산맥, 아르덴산맥, 그리고 코르시카섬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산지들은 남서부의 아키텐 분지와 북부의 파리 분지와 같은 여러 퇴적 분지를 구분한다. 론강 계곡과 같은 다양한 자연 통로는 용이한 교통을 가능하게 한다. 알프스, 피레네, 쥐라산맥은 훨씬 젊고 침식이 덜 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해발 4810.45 m의 몽블랑은 알프스산맥의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에 위치하며 서유럽 최고봉이다. 지자체의 60%가 지진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그 위험도는 보통 수준이다.
해안선은 대조적인 풍경을 제공한다. 프랑스 리비에라를 따라 펼쳐진 산맥, 코트달바트르와 같은 해안 절벽, 랑그도크의 넓은 모래 평야 등이 있다. 코르시카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다. 프랑스는 센강, 루아르강, 가론강, 론강 등 4대 주요 강과 그 지류로 구성된 광범위한 하천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의 총 유역 면적은 본토 영토의 62% 이상을 차지한다. 론강은 중앙산지와 알프스산맥을 나누며 카마르그에서 지중해로 흘러든다. 가론강은 보르도 직후 도르도뉴강과 합류하여 지롱드강 어귀를 형성하는데, 이는 서유럽에서 가장 큰 강어귀로 약 100 km를 흘러 대서양으로 유입된다. 다른 수계는 북동쪽 국경을 따라 뫼즈강과 라인강으로 흘러든다. 프랑스는 3개 대양에 걸쳐 1100.00 만 km2의 해양 수역을 관할하며, 이 중 97%가 해외 영토에 속한다.
3.3. 기후
프랑스 본토의 기후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서부 해안 지역은 서안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온화하며 연중 강수량이 고르다. 내륙으로 갈수록 대륙성 기후의 특징이 강해져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우며, 강수량은 여름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남부 지중해 연안은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건조하고 덥고, 겨울은 온화하고 습윤하다. 알프스, 피레네 등 산악 지역은 산악 기후를 보여 고도에 따라 기온 변화가 크고 강설량이 많다. 해외 영토는 위치에 따라 열대 기후, 아열대 기후, 온대 기후 등 다양한 기후를 나타낸다.
3.4. 환경

프랑스는 1971년 세계 최초로 환경부를 창설한 국가 중 하나이다. 프랑스는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원자력 발전에 대한 대규모 투자로 인해 이산화탄소 배출량 기준 19위에 올라 있으며, 현재 원자력은 프랑스 전력 생산의 75%를 차지하여 오염을 줄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예일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가 실시한 2020년 환경성과지수에 따르면, 프랑스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환경 의식이 높은 국가로 평가되었다.
모든 유럽 연합 회원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2020년까지 1990년 수준의 탄소 배출량을 최소 20% 감축하기로 합의했다. 2009년 기준 프랑스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중국보다 낮다. 프랑스는 2009년에 탄소세를 부과할 예정이었으나, 프랑스 기업에 부담을 줄 것이라는 우려로 계획은 폐기되었다.
숲은 프랑스 국토 면적의 31%를 차지하며, 이는 유럽에서 네 번째로 높은 비율로 1990년 이후 7% 증가한 수치이다. 프랑스 숲은 140종 이상의 나무를 포함하여 유럽에서 가장 다양한 생물 다양성을 자랑한다. 프랑스는 2018년 산림 경관 보전 지수 평균 점수 4.52/10으로 세계 123위를 기록했다. 프랑스에는 9개의 국립공원과 46개의 자연공원이 있다. 지역 자연공원(parc naturel régional파르크 나튀렐 레지오날프랑스어) 또는 PNR은 지역 당국과 중앙 정부 간의 공공 시설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거주 농촌 지역을 포괄하며, 경관과 유산을 보호하고 해당 지역의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목표로 한다. 2019년 기준 프랑스에는 54개의 PNR이 있다.
4. 정치
프랑스는 대의 민주주의 국가이며, 단일 이원집정부제 공화국이다. 민주주의 전통과 가치는 프랑스 문화, 정체성, 정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은 1958년 9월 28일 국민투표로 승인되었으며,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로 구성된 기본 틀을 확립했다. 이는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의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해 의회제와 대통령제의 요소를 결합하는 동시에 입법부에 비해 행정부의 권한을 크게 강화하고자 했다.
4.1. 정부 구조


행정부는 두 명의 지도자로 구성된다. 대통령은 현재 에마뉘엘 마크롱으로, 국가원수이며 5년 임기로 직접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총리는 현재 프랑수아 바이루로, 정부수반이며 대통령이 임명하여 정부를 이끈다.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거나 국민투표를 통해 의회를 우회할 권한이 있으며, 판사와 공무원을 임명하고, 국제 협약을 협상 및 비준하며, 군대의 총사령관 역할을 한다. 총리는 공공 정책을 결정하고 공무원을 감독하며, 국내 문제에 중점을 둔다.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크롱은 재선되었다. 두 달 후, 2022년 6월 총선에서 마크롱은 의회 과반수를 잃어 소수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입법부는 양원제인 프랑스 의회로 구성되며, 하원인 국민의회와 상원인 상원으로 이루어진다. 국민의회 의원인 députés는 지역구를 대표하며 5년 임기로 직접 선출된다. 국민의회는 과반수 투표로 정부를 해임할 권한을 가진다. 상원의원은 선거인단에 의해 6년 임기로 선출되며, 3년마다 의석의 절반이 선거에 부쳐진다. 상원의 입법 권한은 제한적이며, 양원 간 의견 불일치 시 국민의회가 최종 결정권을 가진다. 의회는 대부분의 법률 분야, 정치적 사면, 재정 정책에 관한 규칙과 원칙을 결정할 책임이 있지만, 정부는 대부분의 법률에 관한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작성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2017년까지 프랑스 정치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두 그룹에 의해 지배되었다. 하나는 좌파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와 그 후신인 사회당(1969년), 다른 하나는 우파인 골리스트당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랑스 인민연합(1947년), 공화국을 위한 민주연합(1958년), 공화국연합(1976년), 대중운동연합(2007년), 그리고 공화당(2015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급진 중도주의 정당인 전진하는 공화국(LREM)이 사회당과 공화당을 모두 제치고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2017년과 2022년 대통령 선거 결선에서 LREM의 상대는 성장하는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N)이었다. 2020년 이후 유럽 생태녹색당(EELV)은 주요 도시의 시장 선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국가 차원에서는 좌파 정당 연합(NUPES)이 2022년 하원에서 두 번째로 큰 투표 블록으로 선출되었다. 우익 포퓰리즘 정당인 RN은 2022년 국민의회에서 최대 야당이 되었다.
유권자는 헌법상 의회가 통과시킨 개정안과 대통령이 제출한 법안에 대해 투표할 권한이 있다. 국민투표는 프랑스 정치와 외교 정책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유권자들은 알제리 독립, 대통령 직접 선거, 유럽 연합 결성, 대통령 임기 단축과 같은 문제에 대해 결정해 왔다.
4.2. 행정 구역

2016년부터 프랑스는 18개의 행정 레지옹으로 나뉜다. 이 중 코르시카를 포함한 13개 레지옹은 프랑스 본토에 있으며, 5개는 해외 레지옹이다. 레지옹은 다시 101개의 데파르트망으로 세분화되며, 주로 알파벳순으로 번호가 매겨진다. 이 데파르트망 번호는 우편번호에 사용되며 이전에는 차량 번호판에도 사용되었다. 101개 프랑스 데파르트망 중 5개(프랑스령 기아나,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마요트, 레위니옹)는 해외 레지옹(ROM)에 속하며, 동시에 해외 데파르트망(DOM)이기도 하여 본토 데파르트망과 동일한 지위를 누리고 유럽 연합에 포함된다.
101개 데파르트망은 335개의 아롱디스망으로, 아롱디스망은 다시 2,054개의 캉통으로 세분화된다. 이 캉통들은 다시 36,658개의 코뮌으로 나뉘며, 코뮌은 선출된 시의회를 가진 지방 자치 단체이다. 파리, 리옹, 마르세유 세 코뮌은 45개의 시급 아롱디스망으로 세분화된다.
18개 레지옹과 101개 데파르트망 외에도 프랑스 공화국은 5개의 해외 집합체(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생바르텔레미, 생마르탱, 생피에르 미클롱, 왈리스 푸투나), 1개의 수이 제네리스 집합체(누벨칼레도니), 1개의 해외 영토(프랑스령 남방 및 남극 지역), 그리고 태평양에 있는 1개의 섬 영토(클리퍼턴섬)를 보유하고 있다. 해외 집합체와 영토는 프랑스 공화국의 일부를 구성하지만, 2007년 과들루프에서 분리된 생바르텔레미를 제외하고는 유럽 연합이나 그 재정 구역의 일부를 구성하지 않는다. 태평양 집합체(COM)인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왈리스 푸투나, 누벨칼레도니는 유로 가치와 엄격하게 연동된 CFP 프랑을 계속 사용한다. 반면, 5개 해외 레지옹은 이전에 프랑스 프랑을 사용했고 현재는 유로를 사용한다.
4.3. 대외 관계

프랑스는 국제 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며, 거부권을 가진 UN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 중 하나이다. 2015년에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은 국제기구에 가입하여 "세계에서 가장 네트워크가 잘 된 국가"로 묘사되었다. 여기에는 G7, 세계무역기구(WTO), 태평양 공동체(SPC), 인도양 위원회(COI) 등이 포함된다. 또한 카리브 국가 연합(ACS)의 준회원국이며, 84개 프랑스어 사용 국가로 구성된 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la Francophonie오르가니자시옹 앵테르나시오날 드 라 프랑코포니프랑스어(OIF)의 주도적인 회원국이다.
국제 관계의 중요한 허브로서 프랑스는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외교 공관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네스코, 인터폴, 국제도량형국, OIF 등 여러 국제기구의 본부를 유치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외교 정책은 유럽 연합 회원국으로서의 역할에 크게 좌우되었으며, 프랑스는 EU의 창립 회원국이었다. 1960년대 엘리제 조약 이후 프랑스는 통일 독일과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켜 EU의 가장 영향력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1904년부터 프랑스는 영국과 "우호 협상"을 유지해 왔으며, 특히 군사적으로 양국 간의 유대가 강화되었다.
프랑스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회원국이지만, 드골 대통령 시절 미국과 영국 간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항의와 프랑스 외교 및 안보 정책의 독립성을 보존하기 위해 합동 군사 지휘부에서 제외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인 2009년 4월 4일 프랑스는 나토 합동 군사 지휘부에 다시 합류했다.
프랑스는 과거 아프리카 식민지(프랑카프리크)에서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코트디부아르와 차드의 평화 유지 임무에 경제 원조와 군대를 공급했다. 2012년부터 2021년까지 프랑스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은 말리 북부 분쟁에서 말리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했다.
2017년 프랑스는 절대액 기준으로 미국, 독일,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개발 원조 공여국이었다. 이는 프랑스 GNP의 0.43%에 해당하며, OECD 국가 중 12번째로 높은 수치이다. 원조는 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인도주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는 정부 프랑스 개발청을 통해 제공되며, "인프라 개발, 의료 및 교육 접근성, 적절한 경제 정책 시행,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강화"에 중점을 둔다.
4.3.1. 대한민국과의 관계
한국과 프랑스의 첫 공식적인 접촉은 1886년 조불 수호 통상 조약 체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조약은 양국 간 외교 관계의 시작을 알렸으며, 이후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양국 관계는 다소 소원해지기도 했으나, 전후 복구 과정과 경제 발전 시기에 다시금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현대에 이르러 대한민국과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양국 정상 간의 교류와 외교적 협의가 활발하며, 국제 무대에서도 유사한 입장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으로도 프랑스는 한국의 중요한 교역 상대국 중 하나이며, 항공우주, 자동차, 명품, 제약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투자와 기술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첨단 기술과 한국의 제조 역량이 결합된 합작 사업들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기도 했다.
문화 교류는 양국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프랑스에서는 한국 영화, K-팝 등 한류가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프랑스 영화, 문학, 미술 등에 대한 관심이 높다. 양국 정부는 문화 교류 증진을 위해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으며,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는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이, 대한민국 서울에는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 각각 설치되어 양국 간의 교류와 협력을 지원하고 있다.
주요 협력 분야로는 과학기술, 교육, 관광 등이 있으며, 특히 항공우주 분야에서의 공동 연구 개발과 학생 및 학자 교류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관광객 교류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앞으로도 대한민국과 프랑스는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국제 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기여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4.3.2. 일본과의 관계
프랑스와 일본의 관계는 19세기 중반 에도 막부 말기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1858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과 유사한 형태로 일불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면서 양국 간의 외교 및 무역 관계가 수립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프랑스로부터 법률, 군사,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것을 배웠다. 사법 제도 개혁에는 귀스타브 에밀 부아소나드와 같은 프랑스 법학자들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육군 창설 초기에는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지도를 받았다. 또한, 많은 일본인 예술가들이 파리로 유학하여 인상주의 등 당시 프랑스의 예술 사조를 일본에 소개했다.
20세기 초, 양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고 일본이 추축국에 가담하면서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은 양국 관계에 긴장을 야기했다.
전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프랑스와의 관계는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냉전 시대에는 양국 모두 서방 진영에 속해 있었으며, 경제 및 문화 교류가 점차 확대되었다. 프랑스는 일본에게 유럽의 주요 교역 상대국 중 하나였으며, 일본 기업들의 유럽 시장 진출 교두보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는 프랑스 영화, 문학, 패션 등이 일본에서 꾸준한 인기를 누렸고, 일본 문화 역시 프랑스에 소개되며 상호 이해를 증진시켰다.
현대에 이르러 프랑스와 일본은 정치, 경제, 문화, 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긴밀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양국은 G7 회원국으로서 국제 현안에 대해 협력하고 있으며, 기후 변화, 테러 방지 등 글로벌 과제 해결에도 함께 노력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상호 투자와 무역이 활발하며, 특히 첨단 기술, 에너지, 관광 분야에서의 협력이 두드러진다. 문화 교류는 더욱 다채로워져, 재팬 엑스포와 같은 일본 대중문화 행사가 프랑스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프랑스 문화 행사 또한 일본에서 꾸준히 개최되고 있다.
4.3.3. 미국과의 관계
프랑스와 미국은 역사적으로 깊고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양국의 관계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프랑스가 미국을 지원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미국의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양국은 자유, 민주주의, 인권이라는 공통된 가치를 바탕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19세기와 20세기 초, 많은 미국 예술가와 작가들이 파리에서 활동하며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 역시 미국의 문화와 기술 발전에 관심을 가졌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와 미국은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으며, 이는 양국 간의 동맹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는 나토(NATO) 창설 회원국으로서 공산주의 확산에 공동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샤를 드골 대통령 집권 이후 프랑스는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하며 나토의 군사 통합 지휘부에서 탈퇴하는 등 때때로 미국과 입장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양국은 중요한 무역 및 투자 파트너이다. 프랑스 기업들은 미국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있으며, 미국 기업들 또한 프랑스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상호 영향력이 크다. 프랑스 영화, 문학, 패션, 요리는 미국에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미국의 대중문화 역시 프랑스에 널리 퍼져 있다.
주요 국제 문제에 있어서 프랑스와 미국은 종종 긴밀히 공조하지만, 때로는 정책적 견해차를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프랑스는 미국의 군사 개입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양국 관계가 일시적으로 경색되기도 했다. 그러나 테러 방지, 기후 변화 대응, 국제 평화 유지 등 글로벌 현안에 대해서는 대체로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술, 에너지, 안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며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4.3.4. 독일과의 관계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는 수세기에 걸친 갈등과 화해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국경을 맞대고 유럽 대륙의 패권을 다투며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특히 19세기 후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양국 관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양국 지도자들은 과거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와 공동 번영을 위한 새로운 관계 구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1963년 엘리제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간 화해와 협력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조약은 이후 유럽 통합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은 유럽 연합(EU)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파트너로 여겨진다. 양국은 EU의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 긴밀히 협의하며, 유럽 통합 심화와 공동 외교안보 정책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유로화 도입, 솅겐 조약 등 EU의 주요 성과들은 프랑스와 독일의 강력한 지지와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양국은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다. 많은 독일 기업들이 프랑스에 투자하고 있으며, 프랑스 기업들 또한 독일 시장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인적 교류와 문화 교류도 활발하며, 양국 정부는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 공동 연구 프로젝트 등을 통해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때때로 특정 현안에 대해 양국 간의 입장 차이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긴밀한 협력 관계는 유럽 전체의 안정과 번영에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관계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4.3.5. 기타 주요 국가와의 관계
프랑스는 영국, 중국, 러시아 및 아프리카 프랑코포니 국가 등 다양한 국가들과 중요한 외교 및 경제 관계를 맺고 있다.
영국과는 역사적으로 오랜 경쟁과 협력 관계를 반복해왔다. 현재는 나토(NATO) 회원국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안보 및 국제 문제에 대해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에도 경제, 문화, 안보 분야에서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국방 분야에서의 협력이 주목받는다.
중국과는 경제 관계가 심화되고 있다. 프랑스는 중국의 유럽 내 주요 교역 상대국 중 하나이며, 중국은 프랑스 명품, 농산물, 항공 기술 등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양국은 기후 변화, 국제 보건 등 글로벌 이슈에 대해서도 협력하지만, 인권 문제나 남중국해 문제 등에서는 입장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복잡하다. 역사적으로 문화적 교류가 있었으나, 냉전 이후 유럽 안보 문제와 관련하여 긴장과 협력이 교차해왔다. 프랑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대러 제재에 동참하고 있으나, 외교적 해결을 위한 대화 채널은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에너지 분야에서의 상호 의존도도 중요한 변수이다.
아프리카 프랑코포니 국가들과는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는 이들 국가에 대한 개발 원조, 경제 협력, 안보 지원 등을 지속하고 있으며, 프랑코포니 국제 기구(OIF)를 통해 프랑스어권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인해 때로는 관계에 어려움이 따르기도 하며, 해당 지역의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문제에 대한 프랑스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이 외에도 프랑스는 캐나다, 인도, 브라질 등 여러 지역 강국들과도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관계를 구축하며 다자주의 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4.4. 군사

프랑스군(Forces armées françaises포르스 아르메 프랑세즈프랑스어)은 대통령을 최고 사령관으로 하는 프랑스의 군대 및 준군사 조직이다. 프랑스 육군(Armée de Terre아르메 드 테르프랑스어), 프랑스 해군(Marine Nationale마린 나시오날프랑스어, 이전 명칭 Armée de Mer), 프랑스 공군 및 우주군(Armée de l'Air et de l'Espace아르메 드 레르 에 드 레스파스프랑스어), 그리고 농촌 지역에서 군경찰 및 민간 경찰 역할을 하는 국가헌병대(Gendarmerie nationale장다르므리 나시오날프랑스어)로 구성된다.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 중 하나이며 EU 내에서 가장 크다. 크레디트 스위스의 2015년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세계 6위, 유럽 2위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2023년 프랑스의 연간 군사비 지출은 613.00 억 USD으로, GDP의 2.1%에 해당하며, 세계 8위의 군비 지출국이다. 1997년 이후 징병제는 폐지되었다.
프랑스는 1960년부터 공인된 핵보유국이다.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CTBT)과 핵확산방지조약의 당사국이다. 프랑스 핵전력(이전 명칭 Force de Frappe포르스 드 프라프프랑스어)은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을 장착한 4척의 트리옹팡급 잠수함으로 구성된다. 잠수함 함대 외에도 프랑스는 약 60기의 ASMP 중거리 공대지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50기는 공군 및 우주군이 미라주 2000N 장거리 핵타격기를 사용하여 운용하며, 약 10기는 프랑스 해군의 쉬페르 에탕다르 모데르니제(SEM) 공격기가 핵추진 항공모함 샤를 드골(R91)에서 운용한다.
프랑스는 주요 군수 산업과 세계 최대 규모의 항공우주 부문을 보유하고 있다. 라팔 전투기, 샤를 드골 항공모함, 엑조세 미사일, 르클레르 전차 등을 생산했다. 프랑스는 주요 무기 판매국이며, 핵추진 장치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기체계 설계가 수출 시장에 제공된다.
프랑스 정보기관 중 하나인 해외안보총국은 국방부 산하 군대의 일부로 간주된다. 다른 하나인 국내안보총국은 내무부 산하에서 운영된다. 프랑스의 사이버 보안 능력은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로 꾸준히 평가받고 있다.
2022년 프랑스의 무기 수출액은 총 270.00 억 EUR로, 전년도인 2021년의 117.00 억 EUR보다 증가했다. 특히 아랍에미리트(UAE) 단독으로 프랑스 총 무기 수출액에 160.00 억 EUR 이상을 기여했다. 프랑스의 주요 방산업체로는 다소, 탈레스, 사프란 등이 있다.
4.5. 사법

프랑스는 주로 성문법에서 법이 발생하는 대륙법계를 사용한다. 판사는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해석할 뿐이다(특정 분야에서의 사법 해석의 양은 보통법 체계의 판례법과 유사하게 만든다). 법의 지배의 기본 원칙은 나폴레옹 법전(주로 루이 14세 치하에서 성문화된 왕법에 기초함)에 명시되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원칙에 따라, 법은 사회에 해로운 행위만을 금지해야 한다.
프랑스 법은 사법과 공법이라는 두 가지 주요 분야로 나뉜다. 사법에는 특히 민법과 형법이 포함된다. 공법에는 특히 행정법과 헌법이 포함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프랑스 법은 민법, 형법, 행정법이라는 세 가지 주요 법 분야로 구성된다. 형법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만 적용될 수 있다(형사 소급효 법은 금지된다). 행정법은 많은 국가에서 종종 민법의 하위 범주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각 법체계는 특정 최고 법원에 의해 주도된다. 일반 법원(형사 및 민사 소송 처리)은 파기원이, 행정 법원은 국참사원이 주도한다. 모든 법률은 적용되기 위해 프랑스 공화국 관보에 공식적으로 공표되어야 한다.
프랑스는 금지 조항 제정의 동기로 종교법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신성모독죄와 소도미법(후자는 1791년에 폐지)을 폐지했다. 그러나 "공공 품위에 반하는 위반"(contraires aux bonnes mœurs) 또는 공공 질서 교란(trouble à l'ordre public)은 동성애의 공공연한 표현이나 거리 매춘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프랑스는 일반적으로 LGBTQ 권리에 대해 긍정적인 평판을 받고 있다. 1999년부터 동성 커플을 위한 시민 연대 협약이 허용되었고, 2013년부터 동성결혼과 성소수자 입양이 합법화되었다. 언론에서의 차별적 발언을 금지하는 법률은 1881년만큼 오래되었다. 일부에서는 프랑스의 증오 발언 금지법이 너무 광범위하거나 가혹하여 표현의 자유를 저해한다고 간주한다.
프랑스에는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법률이 있으며, 1990년 게소법은 홀로코스트 부인을 금지한다. 2024년, 프랑스는 유럽 연합 국가 중 최초로 헌법에 낙태를 명시적으로 보호했다.
종교의 자유는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의해 헌법적으로 보장된다. 1905년 프랑스 교회와 국가 분리법은 라이시테(국가 세속주의)의 기초이다. 국가는 알자스-모젤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않으며, 알자스-모젤에서는 가톨릭, 루터교, 칼뱅교, 유대교의 교육과 성직자에게 계속해서 보조금을 지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종교 단체를 인정한다. 의회는 1995년부터 많은 종교 운동을 위험한 컬트로 지정했으며, 2004년부터 학교에서 눈에 띄는 종교적 상징물 착용을 금지했다. 2010년에는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가리는 이슬람 베일 착용을 금지했으며, 국제앰네스티와 휴먼 라이츠 워치와 같은 인권 단체는 이 법이 무슬림에 대한 차별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법은 대부분의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5. 경제
프랑스는 상당한 정부 개입과 다양한 부문이 특징인 사회적 시장경제를 가지고 있다. 약 2세기 동안 프랑스 경제는 지속적으로 세계 10대 경제 대국 중 하나로 평가받아 왔으며, 현재 구매력 평가(PPP) 기준 세계 9위, 명목 GDP 기준 세계 7위이며, 두 지표 모두에서 유럽 연합 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는 상당한 경제력을 가진 강대국으로 간주되며, G7 선진 공업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G20 주요 경제국 그룹의 회원국이다.
프랑스 경제는 고도로 다각화되어 있으며, 서비스업이 노동력과 GDP 모두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공업 부문은 GDP의 5분의 1과 비슷한 비율의 고용을 차지한다. 프랑스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제조업 국가이며, 제조업 생산량 기준 세계 8위(1.9%)를 차지한다. 농업과 같은 1차 산업이 창출하는 GDP는 2% 미만이지만, 프랑스 농업 부문은 가치 기준으로 가장 큰 규모 중 하나이며 전체 생산량에서 EU를 선도하고 있다.
2018년 프랑스는 세계 5위의 교역국이자 유럽 2위의 교역국이었으며, 수출액은 GDP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유로존과 광범위한 유럽 단일 시장 회원국으로서 자본, 상품, 서비스, 숙련 노동력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다. 특정 산업, 특히 농업 분야에서 보호무역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경제 발전을 위해 유럽의 자유 무역과 상업 통합을 촉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2019년에는 외국인 직접 투자(FDI) 유치 부문에서 유럽 1위, 세계 13위를 기록했으며, 유럽 국가들과 미국이 주요 투자국이었다. 1800년에 설립된 프랑스 은행에 따르면, FDI의 주요 수혜 부문은 제조업, 부동산, 금융 및 보험이었다. 파리 지역은 유럽 본토에서 다국적 기업이 가장 많이 밀집된 지역이다.
디리지슴 원칙에 따라 정부는 역사적으로 경제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지시적 계획과 국유화와 같은 정책은 영광의 30년으로 알려진 30년간의 전례 없는 전후 경제 성장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82년 정점에 달했을 때 공공 부문은 산업 고용의 5분의 1과 신용 시장의 5분의 4 이상을 차지했다. 20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규제를 완화하고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을 줄였으며, 현재 대부분의 주요 기업은 민간 소유이다. 국가 소유는 현재 운송, 국방, 방송 분야에서만 우세하다. 경제 역동성과 민영화 촉진 정책은 프랑스의 세계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2020년 블룸버그 혁신 지수에서 세계 10대 혁신 국가 중 하나로 선정되었으며, 2019년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서는 15위(2018년보다 2계단 상승)를 차지했다.
La Bourse de Paris라 부르스 드 파리프랑스어는 1724년에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증권거래소 중 하나이다. 2000년에는 암스테르담 및 브뤼셀 증권거래소와 합병하여 유로넥스트를 형성했으며, 2007년에는 뉴욕 증권거래소와 합병하여 세계 최대 증권거래소인 NYSE 유로넥스트를 설립했다. NYSE 유로넥스트의 프랑스 지사인 유로넥스트 파리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주식 시장이다. 가장 가치 있는 프랑스 기업의 예로는 LVMH, 로레알, 소시에테 제네랄 등이 있다.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세계 주요 농업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여전히 "세계적인 농업 강국"이다. 프랑스는 세계 6위의 농산물 수출국이며, 74.00 억 EUR 이상의 무역 흑자를 창출하고 있다. "구대륙의 곡창"이라는 별명을 가진 프랑스는 전체 토지의 절반 이상이 농경지이며, 그중 45%가 곡물과 같은 영구 경작지로 사용된다. 이 나라의 다양한 기후, 광범위한 경작지, 현대적인 농업 기술, 그리고 EU 보조금은 프랑스를 유럽 최고의 농업 생산국 및 수출국으로 만들었다.
5.1. 경제 구조와 주요 산업
프랑스는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2024년 명목 GDP 기준 약 3.17 조 USD (세계 7위), 구매력 평가(PPP) 기준 약 4.36 조 USD (세계 9위)에 달한다. 최근 몇 년간 경제 성장률은 비교적 완만하게 유지되고 있다. 산업 구조는 서비스업이 GDP와 고용의 약 70% 이상을 차지하며 경제를 주도하고 있으며, 그 뒤를 이어 제조업(약 17%), 건설업(약 6%), 농업(약 2%) 순이다.
프랑스의 주요 산업은 다음과 같다.
- 항공우주 산업: 에어버스 본사가 위치하며, 민간 항공기, 군용기, 위성, 우주 발사체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소 항공과 같은 방산업체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자동차 산업: 르노, PSA 그룹(푸조, 시트로엥) 등 자국 브랜드가 강세를 보이며, 유럽 자동차 시장의 주요 생산국이다. 최근에는 전기차 및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도 적극적이다.
- 명품 산업: LVMH(루이비통, 디오르 등), 케링(구찌, 생로랑 등), 에르메스, 샤넬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다수 보유하고 있으며, 패션, 화장품, 주얼리, 와인 및 증류주 분야에서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 제약 산업: 사노피와 같은 글로벌 제약회사가 있으며, 연구 개발 투자와 혁신을 통해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 관광 산업: 세계 최고의 관광 대국으로, 파리, 프랑스 리비에라, 루아르 계곡 등 다양한 관광 자원을 바탕으로 막대한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다. (관광 섹션에서 상세 설명)
- 농식품 산업: 유럽 최대의 농업 생산국으로, 와인, 치즈, 육류, 곡물 등 다양한 고품질 농산물과 가공식품을 생산 및 수출한다.
- 에너지 산업: 원자력 발전 비중이 매우 높아 에너지 자립도가 비교적 높으며, 프랑스 전력공사(EDF)는 유럽 최대 전력 회사 중 하나이다. (에너지 섹션에서 상세 설명)
- 화학 산업: 기초 화학제품부터 정밀 화학, 특수 화학제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 외에도 금융, 정보통신기술(ICT), 생명과학, 환경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프랑스 기업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정부는 연구개발(R&D) 투자 확대와 스타트업 육성을 통해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5.2. 관광

프랑스는 2023년 약 1억 명의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며 스페인(8,500만 명)과 미국(6,600만 명)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관광 대국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관광객들의 평균 체류 기간이 짧아 관광 수입 면에서는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연간 방문객 수 기준)는 다음과 같다: 에펠탑(620만 명), 베르사유 궁전(280만 명), 프랑스 국립 자연사 박물관(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뮈제왬 나시오날 디스트ัว르 나튀렐프랑스어)(200만 명), 퐁뒤가르(150만 명), 개선문(120만 명), 몽생미셸(100만 명), 생트샤펠(683,000명), 오쾨니스부르 성(549,000명), 퓌드돔산(500,000명), 피카소 미술관(441,000명), 카르카손(362,000명).
프랑스, 특히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박물관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미술관(2022년 770만 명)이며, 오르세 미술관(330만 명)은 주로 인상주의 작품을, 오랑주리 미술관(102만 명)은 클로드 모네의 대형 수련 연작 8점을 소장하고 있다. 조르주 퐁피두 센터(300만 명)는 현대 미술 전문이다. 디즈니랜드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테마파크로, 2009년 디즈니랜드 파크와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파크를 합쳐 1,500만 명의 방문객을 기록했다. 연간 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프랑스 리비에라(프랑스어: Côte d'Azur)는 파리 지역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연간 6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루아르 계곡의 성들(프랑스어: châteaux)과 루아르 계곡 자체는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프랑스는 52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문화적 관심이 높은 도시, 해변과 해변 휴양지, 스키 리조트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평온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농촌 지역(녹색 관광)을 자랑한다. 작고 그림 같은 프랑스 마을들은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레 플뤼 보 빌라주 드 프랑스프랑스어) 협회를 통해 홍보된다. "주목할 만한 정원" 라벨은 문화부가 분류한 200개 이상의 정원 목록이다. 이 라벨은 주목할 만한 정원과 공원을 보호하고 홍보하기 위한 것이다. 프랑스는 성 야고보의 길을 따라 또는 매년 수백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하는 오트피레네주의 마을 루르드로 향하는 많은 기독교 순례객들을 끌어들인다.
5.3. 에너지
프랑스는 세계 10위의 전력 생산국이다. 프랑스 정부가 대주주인 프랑스 전력공사(EDF)는 프랑스의 주요 전력 생산 및 배급 업체이며, 세계 최대 전력 회사 중 하나로 전 세계 매출 3위를 기록하고 있다. 2018년 EDF는 주로 원자력 발전을 통해 유럽 연합 전력의 약 5분의 1을 생산했다. 2021년 프랑스는 유럽 최대 에너지 수출국이었으며, 주로 영국과 이탈리아로 수출했고, 세계 최대 전력 순수출국이었다.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프랑스는 에너지 안보를 위한 강력한 정책을 추진해 왔으며, 특히 원자력 에너지에 막대한 투자를 해왔다. 프랑스는 원자력 발전소를 보유한 32개국 중 하나이며, 가동 중인 원자로 수(56기) 기준으로 세계 2위이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전력의 70%가 원자력으로 생산되며, 이는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높은 비율이다. 슬로바키아와 우크라이나만이 원자력 발전으로 전력의 과반수(각각 약 53%, 51%)를 생산한다. 프랑스는 원자력 기술 분야의 세계적인 선도국으로 간주되며, 원자로와 연료 제품이 주요 수출품이다.
프랑스가 원자력 발전에 크게 의존함에 따라 다른 서방 국가에 비해 재생 가능 에너지 도입이 상대적으로 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에서 2019년 사이에 프랑스의 재생 가능 에너지 생산 능력은 꾸준히 증가하여 거의 두 배가 되었다. 수력 발전은 단연코 주요 에너지원으로, 프랑스 재생 가능 에너지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전력의 13%를 기여하고 있다. 이는 노르웨이와 터키에 이어 유럽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원자력 발전과 마찬가지로 에귀종, 에탕 드 술셈, 부글랑호와 같은 대부분의 수력 발전소는 EDF가 관리한다. 프랑스는 2040년까지 수력 발전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5.4. 교통

프랑스의 철도망은 2008년 기준 2.95 만 km로, 독일에 이어 서유럽에서 두 번째로 광범위하다. SNCF가 운영하며, 고속 열차로는 탈리스, 유로스타, TGV가 있으며, TGV는 상업 운행 시 시속 320 km/h로 달린다. 유로스타는 유로터널 셔틀과 함께 채널 터널을 통해 영국과 연결된다. 안도라를 제외한 모든 인접 유럽 국가와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주요 도시 대부분에 지하철이나 트램이 버스 서비스를 보완하는 등 도시 내 연결망도 잘 발달되어 있다.
프랑스에는 약 102.72 만 km의 사용 가능한 도로가 있으며, 이는 유럽 대륙에서 가장 광범위한 도로망이다. 파리 지역은 가장 밀집된 도로 및 고속도로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사실상 프랑스 전역과 연결된다. 프랑스 도로는 또한 인접한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안도라, 모나코의 도시들과 연결되는 상당한 국제 교통량을 처리한다. 연간 등록비나 도로세는 없지만, 대부분 민간 소유인 고속도로 이용은 대규모 코뮌 인근을 제외하고는 통행료를 통해 이루어진다. 신차 시장은 르노, 푸조, 시트로엥과 같은 국내 브랜드가 지배하고 있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량인 미요 대교를 보유하고 있으며, 노르망디교와 같은 많은 중요한 교량을 건설했다. 디젤 및 휘발유 자동차와 트럭은 프랑스 대기 오염과 온실가스 배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프랑스에는 464개의 공항이 있다. 파리 인근에 위치한 샤를 드골 공항은 프랑스에서 가장 크고 분주한 공항으로, 대부분의 대중 및 상업 교통량을 처리하며 파리를 전 세계 거의 모든 주요 도시와 연결한다. 에어 프랑스는 국영 항공사이지만, 수많은 민간 항공사가 국내외 여행 서비스를 제공한다. 프랑스에는 10개의 주요 항구가 있으며, 그중 가장 큰 항구는 마르세유에 있으며,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큰 항구이기도 하다. 가론강을 통해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미디 운하를 포함하여 1.23 만 km의 수로가 프랑스를 가로지른다.
5.5. 과학 기술

중세 이후 프랑스는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해왔다. 11세기 초, 프랑스 태생의 교황 실베스테르 2세는 주판과 혼천의를 다시 도입하고 아라비아 숫자와 시계를 유럽 대부분 지역에 소개했다. 12세기 중반에 설립된 파리 대학교는 여전히 서구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학술 기관 중 하나이다. 17세기에는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가 과학 지식 습득 방법으로 합리주의를 개척했고, 블레즈 파스칼은 확률론과 유체 역학 연구로 유명해졌다. 두 사람 모두 이 시기 유럽에서 꽃피운 과학 혁명의 핵심 인물이었다. 17세기 중반 루이 14세가 프랑스 과학 연구를 장려하고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국립 과학 기관 중 하나였다.
계몽주의 시대는 생태학적 천이를 인식한 최초의 박물학자 중 한 명인 생물학자 뷔퐁 백작과 연소에서 산소의 역할을 발견한 화학자 라부아지에의 업적으로 특징지어진다.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지식"에 대한 대중의 접근을 목표로 하는 백과전서를 출판했다. 19세기의 산업 혁명은 프랑스에서 눈부신 과학 발전을 이루었으며, 오귀스탱 프레넬은 현대 광학을 창시했고, 사디 카르노는 열역학의 기초를 다졌으며, 루이 파스퇴르는 미생물학을 개척했다. 이 시기의 다른 저명한 프랑스 과학자들의 이름은 에펠탑에 새겨져 있다.
20세기의 유명한 프랑스 과학자로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 방사능 연구로 유명한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 피에르와 마리 퀴리; 물리학자 폴 랑주뱅; HIV 공동 발견자인 바이러스학자 뤽 몽타니에 등이 있다. 손 이식은 1998년 프랑스 리옹에서 장미셸 뒤베르나르를 포함한 국제팀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그는 이후 최초의 성공적인 양손 이식을 수행했다. 원격 수술은 2001년 9월 7일 자크 마레스코가 이끄는 프랑스 외과 의사들에 의해 대서양을 건너 최초로 시행되었다. 안면 이식은 2005년 11월 27일 베르나르 드보셸에 의해 처음 시행되었다. 프랑스는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12위를 차지했으며, 2019년 16위에서 상승했다.
6. 인구
프랑스는 약 6,860만 명의 추정 인구(2025년 1월 기준)로 세계에서 20번째, 유럽에서 3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며, 유럽 연합 내에서는 독일에 이어 2번째이다. 21세기 동안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높은 자연 인구 증가율로 선진국, 특히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였다. 2006년에는 출산율만으로 유럽 연합의 거의 모든 자연 인구 증가를 담당했으며, 2006년에서 2016년 사이에는 EU 전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인구 증가를 보였고, 자연 출산이 인구 증가의 대부분을 차지한 EU 4개국 중 하나였다. 이는 1973년 베이비붐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으며, 합계출산율이 1994년 최저 1.7명에서 2010년 2.0명으로 상승한 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2011년 이후 프랑스의 출산율은 꾸준히 감소하여 2023년에는 여성 1인당 1.79명으로, 인구 대체 수준인 2.1명에 미치지 못하며 1800년의 최고치인 4.41명보다 훨씬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출산율과 조출생률은 여전히 EU에서 가장 높으며, 평균 1.5명인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프랑스 여성의 첫 출산 평균 연령은 29.1세로 EU 평균인 29.7세보다 약간 낮다.
많은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인구도 고령화되고 있다. 평균 연령은 41.7세이며, 프랑스인의 약 5분의 1이 65세 이상이다. 2024년까지 프랑스인 3명 중 1명이 60세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출생 시 기대수명은 82.7세로 세계 12위이며,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와 레위니옹 지역은 각각 84.07세와 83.55세로 기대수명 4위와 11위를 기록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인구 증가는 연평균 0.6%였으며, 2011년 이후 연간 성장은 0.4~0.5% 사이였고, 프랑스는 2044년까지 계속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민자들이 이러한 추세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2010년 프랑스 본토 신생아의 약 27%가 최소 한 명의 외국 태생 부모를 두었고, 또 다른 24%는 프랑스 해외 영토를 제외한 유럽 외 지역에서 태어난 부모를 최소 한 명 두었다. 2021년에는 외국 태생 어머니의 자녀 비율이 23%였다.
6.1. 인구 통계와 동향

2025년 1월 기준 프랑스의 추정 총인구는 약 6,860만 5,616명이며, 프랑스 본토의 인구는 약 6,635만 1,959명이다. 이는 세계 20위, 유럽 연합 내 2위의 인구 규모이다. 인구 밀도는 km2당 약 108명이다.
최근 수십 년간 프랑스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출산율을 유지해왔다. 2010년 합계출산율은 2.0명으로 정점을 찍었으나, 이후 점진적으로 감소하여 2023년에는 1.79명을 기록했다. 이는 인구 대체 수준인 2.1명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전히 유럽 연합 평균보다는 높은 수치이다. 출생 시 평균 기대수명은 2022년 기준 82.7세(남성 79.8세, 여성 85.6세)로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다.
인구 고령화는 프랑스 사회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다. 2023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약 21.3%이며,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망률은 1,000명당 약 9.7명 수준이다.
이민은 프랑스 인구 구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매년 상당수의 이민자가 유입되며, 특히 북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의 비중이 높다.
6.2. 주요 도시
프랑스는 고도로 도시화된 국가로, 2021년 기준 대도시권 인구를 기준으로 한 주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 수도인 파리가 13,171,056명으로 압도적인 1위이며, 그 뒤를 리옹(2,308,818명), 마르세유(1,888,788명), 릴(1,521,660명), 툴루즈(1,490,640명), 보르도(1,393,764명), 낭트(1,031,953명), 스트라스부르(864,993명), 몽펠리에(823,120명), 렌(771,320명) 등이 잇고 있다. 니스의 경우, INSEE의 2020년 대도시권 경계 개정 이후 칸-앙티브 대도시권과 분리되었으나, 이 둘을 합하면 2021년 인구 조사 기준으로 1,019,905명에 달한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농촌 인구 유출은 지속적인 정치적 문제였다.

순위 | 도시 | 레지옹 | 인구 |
---|---|---|---|
1 | 파리 | 일드프랑스 | 13,171,056 |
2 | 리옹 | 오베르뉴론알프 | 2,308,818 |
3 | 마르세유 |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 1,888,788 |
4 | 릴 | 오드프랑스 | 1,521,660 |
5 | 툴루즈 | 옥시타니 | 1,490,640 |
6 | 보르도 | 누벨아키텐 | 1,393,764 |
7 | 낭트 | 페이드라루아르 | 1,031,953 |
8 | 스트라스부르 | 그랑테스트 | 864,993 |
9 | 몽펠리에 | 옥시타니 | 823,120 |
10 | 렌 | 브르타뉴 | 771,320 |
11 | 그르노블 | 오베르뉴론알프 | 722,904 |
12 | 루앙 | 노르망디 | 709,065 |
13 | 니스 |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 626,218 |
14 | 툴롱 |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 581,948 |
15 | 투르 | 상트르발드루아르 | 522,597 |
16 | 낭시 | 그랑테스트 | 508,793 |
17 | 클레르몽페랑 | 오베르뉴론알프 | 508,699 |
18 | 생테티엔 | 오베르뉴론알프 | 500,562 |
19 | 캉 | 노르망디 | 478,105 |
20 | 오를레앙 | 상트르발드루아르 | 456,452 |


이 문단은 주요 도시들의 개요를 제공하며, 각 도시의 역사적 배경, 주요 명소, 문화적 특징, 경제적 중요성 등을 간략히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는 툴루즈와 니스 및 다른 주요 도시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6.3. 민족 구성과 이민

역사적으로 프랑스인은 주로 켈트-갈리아 기원이었으며, 수세기에 걸친 각 이주와 정착을 반영하는 상당한 이탈리아족(로마인)과 게르만족(프랑크인)의 혼혈이 있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프랑스는 다양한 이웃 민족 및 언어 집단을 통합했으며, 서쪽의 브르타뉴 요소, 남서쪽의 아키텐인 요소, 북서쪽의 스칸디나비아 요소, 북동쪽의 알레만니 요소, 남동쪽의 리구리아 요소가 그 증거이다.
지난 1세기 반 동안의 대규모 이민은 더욱 다문화적인 사회를 형성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되어 1958년 프랑스 헌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정부는 민족 및 혈통에 대한 데이터 수집을 금지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인구 통계 정보는 민간 부문 조직이나 학술 기관에서 나온다. 2004년 앵스티튀 몽테뉴는 프랑스 본토 내에 백인이 5,100만 명(인구의 85%), 북서 아프리카인이 600만 명(10%), 흑인이 200만 명(3.3%), 아시아인이 100만 명(1.7%)이라고 추정했다.
2008년 국립 인구 통계 연구소(INED)와 프랑스 국립 통계 경제 연구소(INSEE)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가장 큰 소수 민족 집단은 이탈리아인(500만 명)이었고, 그 다음으로 북서 아프리카인(300만~600만 명),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250만 명), 아르메니아인(50만 명), 터키인(20만 명) 순이었다. 또한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그리스 등 다른 유럽 민족 집단의 상당한 소수 민족도 존재한다. 프랑스에는 2만에서 40만 명 사이의 집시(로마인) 인구가 있으며, 많은 외국 로마인들이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로 자주 추방된다.
현재 프랑스 인구의 40%가 20세기 초 이후 다양한 이민 물결의 후손(적어도 부분적으로)인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에서 1935년 사이에만 약 110만 명의 순 이민자가 프랑스로 유입되었다. 다음으로 큰 물결은 1960년대에 약 160만 명의 피에 누아르가 북서 아프리카 영토인 알제리와 모로코의 독립 이후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발생했다. 이들은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출신의 수많은 전 식민지 주민들과 스페인 및 포르투갈 출신의 수많은 유럽 이민자들과 합류했다.
프랑스는 여전히 주요 이민 대상국으로, 매년 약 20만 명의 합법 이민자를 받아들인다. 2005년에는 약 5만 건의 신청(2004년보다 15% 감소)으로 서유럽에서 망명 신청자를 가장 많이 받아들인 국가였다. 2010년 프랑스는 약 48,100건의 망명 신청을 받아 세계 5대 망명 수용국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신청 건수가 증가하여 2017년에는 결국 100,412건으로 두 배가 되었다. 유럽 연합은 회원국 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지만, 프랑스는 동유럽 이민을 억제하기 위한 통제를 확립했다. 외국인의 권리는 외국인 입국 및 체류 및 망명권에 관한 법률에 명시되어 있다. 이민은 여전히 논쟁적인 정치 문제이다.
2008년 INSEE는 외국 태생 이민자의 총수가 약 500만 명(인구의 8%), 프랑스 태생 후손은 650만 명(인구의 11%)이라고 추정했다. 따라서 프랑스 인구의 거의 5분의 1이 1세대 또는 2세대 이민자였으며, 그중 500만 명 이상이 유럽 출신이고 400만 명이 마그레브 혈통이었다. 2008년 프랑스는 주로 모로코, 알제리, 터키 출신의 137,000명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2022년에는 32만 명 이상의 이민자가 프랑스로 유입되었으며, 대다수는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2014년 INSEE는 2009년에서 2012년 사이에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수가 크게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이러한 증가는 해당 기간 동안 여러 유럽 국가를 강타한 금융 위기의 결과였다. 프랑스의 스페인 이민자 통계에 따르면 2009년에서 2012년 사이에 107% 증가하여 인구가 5,300명에서 11,000명으로 증가했다. 2012년 프랑스로 온 외국인 총 229,000명 중 거의 8%가 포르투갈인, 5%가 영국인, 5%가 스페인인, 4%가 이탈리아인, 4%가 독일인, 3%가 루마니아인, 3%가 벨기에인이었다.
6.4. 언어
프랑스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로망스어인 프랑스어이다. 1635년부터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프랑스어에 대한 프랑스의 공식 기관이었지만, 그 권고는 법적 효력이 없다. 프랑스에는 오크어, 브르타뉴어, 카탈루냐어, 플람스어(네덜란드어 방언), 알자스어(독일어 방언), 바스크어, 코르시카어(이탈리아어 방언)와 같은 지역 언어도 사용된다. 이탈리아어는 1859년 5월 9일까지 코르시카의 공식 언어였다.
프랑스 정부는 개인이 출판물에 사용하는 언어를 규제하지 않지만, 상업 및 직장 의사소통에서는 프랑스어 사용이 법으로 의무화되어 있다. 프랑스 공화국 영토 내에서 프랑스어 사용을 의무화하는 것 외에도, 프랑스 정부는 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la Francophonie오르가니자시옹 앵테르나시오날 드 라 프랑코포니프랑스어와 같은 기관을 통해 유럽 연합과 전 세계에서 프랑스어를 홍보하려고 노력한다. 프랑스어 외에도 프랑스에는 77개의 토착 소수 언어가 있으며, 8개는 프랑스 본토에서, 69개는 프랑스 해외 영토에서 사용된다. 전 세계적으로 약 3억에서 5억 명의 사람들이 모국어 또는 제2언어로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연합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실시하고 프랑스에서는 INSEE가 15,3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7년 성인 교육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어는 전체 인구의 87.2%, 즉 약 5,581만 명의 모국어였으며, 그 다음으로 아랍어(3.6%, 230만 명), 포르투갈어(1.5%, 96만 명), 스페인어(1.2%, 77만 명), 이탈리아어(1.0%, 64만 명) 순이었다. 다른 언어 원어민은 나머지 인구의 5.2%를 차지했다.
6.5. 종교

프랑스는 종교의 자유가 헌법상 권리인 세속 국가이다. 프랑스의 종교 정책은 라이시테라는 개념에 기반을 두며, 이는 정부와 공공 생활이 특정 종교와 분리되어 완전히 세속적으로 유지되는 엄격한 정교분리 원칙이다. 알자스와 모젤 지역은 지방법이 루터교, 가톨릭교, 유대교에 대한 공식 지위와 국가 지원을 규정하고 있어 일반적인 프랑스 규범의 예외이다.
가톨릭교는 천 년 이상 프랑스의 주요 종교였으며, 한때는 국가의 국교였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교회의 장녀(프랑스어: Fille aînée de l'Église)로 여겨졌으며, 프랑스 국왕은 항상 교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1464년 교황으로부터 가장 기독교적인 폐하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 군주제는 특히 국왕이 교황청이 아닌 주교를 선출하는 "갈리아주의" 정책을 통해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역할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2012년 기준 프랑스의 47,000개 종교 건물 중 94%가 여전히 가톨릭 교회이다. 19세기에 왕정과 세속 공화정 사이를 오간 후, 1905년 프랑스는 앞서 언급한 라이시테 원칙을 확립한 1905년 교회와 국가 분리법을 통과시켰다.
정부는 특정 종교 공동체에 대한 특정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군목과 앞서 언급한 알자스-모젤의 지방법과 같은 유산 법규는 예외). 정부는 종교 교리를 다루지 않는 공식적인 법적 기준에 따라 종교 단체를 인정하며, 종교 단체는 정책 결정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이언톨로지교, 하나님의 자녀들, 통일교, 태양의 사원 교단과 같은 일부 종교 단체는 프랑스에서 컬트(sectes, 프랑스어로는 경멸적인 용어로 간주됨)로 간주되어 공인된 종교와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다.
6.6. 보건
프랑스 보건 시스템은 정부 국민건강보험으로 대부분 재정을 조달하는 보편적 의료보장 시스템 중 하나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0년 세계 보건 시스템 평가에서 프랑스가 세계에서 "거의 최고의 전반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프랑스 보건 시스템은 1997년 WHO에 의해 세계 1위로 평가받았다. 2011년 프랑스는 GDP의 11.6%, 즉 1인당 4086 USD를 보건에 지출했으며, 이는 유럽 국가들의 평균 지출액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보건 지출의 약 77%는 정부 지원 기관에서 부담한다.
암, 에이즈, 낭포성 섬유증과 같은 만성 질환(affections de longues durées) 환자에 대한 치료는 일반적으로 무료이다. 출생 시 기대수명은 남성 78세, 여성 85세이다. 프랑스에는 인구 1,000명당 3.22명의 의사가 있으며, 2008년 1인당 평균 의료비 지출은 4719 USD였다. 2007년 기준, 프랑스 인구의 약 14만 명(0.4%)이 HIV/AIDS를 앓고 있다.
6.7. 교육
1802년, 나폴레옹은 중등 교육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로, 학생들을 고등 교육이나 직업으로 준비시키는 리세를 창설했다. 쥘 페리는 19세기 후반 개혁을 이끌어 무상, 세속, 의무 교육(현재는 만 16세까지 의무)을 확립한 프랑스 현대 학교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프랑스 교육은 중앙집권화되어 있으며 초등, 중등, 고등 교육의 세 단계로 나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국제 학생 평가 프로그램(PISA)은 2018년 프랑스 교육을 OECD 평균에 가까운 수준으로 평가했다. 프랑스는 PISA 참여국 중 학교 어린이들이 교사로부터 받는 지원과 피드백 수준이 가장 낮다고 인식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 프랑스 학교 어린이들은 다른 OECD 국가에 비해 교실의 징계 분위기와 행동에 대해 더 큰 우려를 보고했다.
고등 교육은 공립 대학교와 정치학 분야의 시앙스 포 파리, 경제학 분야의 HEC 파리, 공학 분야의 에콜 폴리테크니크, 사회학 분야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그리고 국가 그랑제콜 경력을 위한 국립행정학교와 같이 명망 있고 선발 과정이 까다로운 그랑제콜로 나뉜다. 그랑제콜은 프랑스의 고위 공무원, CEO, 정치인 대부분을 배출한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7. 문화
프랑스는 수 세기 동안 서양 문화 발전의 중심지였으며 문화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술, 건축, 문학, 철학, 음악, 영화, 패션, 요리 등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정부는 문화부 운영을 통해 예술 창작을 장려하고 문화유산을 보존하며 대중에게 개방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도 다수 보유하고 있으며,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프랑스를 찾는다.
7.1. 미술

프랑스 미술의 기원은 르네상스 시대 플랑드르 미술과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장 유명한 중세 프랑스 화가인 장 푸케는 이탈리아를 처음 여행하고 초기 르네상스를 직접 경험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 회화 퐁텐블로파는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프리마티초와 로소 피오렌티노와 같은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 바로크 시대의 가장 유명한 프랑스 예술가 두 명인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은 이탈리아에서 거주했다.
프랑스 예술가들은 18세기에 이전 바로크 양식을 더 친밀하게 모방한 로코코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궁정에서 지지받던 예술가 앙투안 와토, 프랑수아 부셰,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작품이 프랑스에서 가장 대표적이다. 프랑스 혁명은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나폴레옹은 자크루이 다비드와 같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예술가들을 선호했고, 영향력 있는 미술 아카데미는 아카데미즘으로 알려진 양식을 정의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회화에 대한 영향력은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와 같은 새로운 회화 양식의 발전과 함께 커졌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로는 카미유 피사로,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있었다. 인상주의 양식의 2세대 화가들인 폴 세잔, 폴 고갱, 툴루즈로트렉, 조르주 쇠라 또한 예술적 진화의 선두에 있었으며, 야수파 예술가 앙리 마티스,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초, 조르주 브라크와 파리에 거주하던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에 의해 입체주의가 발전했다. 빈센트 반 고흐, 마르크 샤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바실리 칸딘스키와 같은 다른 외국 예술가들도 파리 또는 그 근처에 정착하여 활동했다.
프랑스에는 많은 미술관이 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18세기 이전의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국영 루브르 미술관이다.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 후반(주로 인상주의와 야수파 운동)의 프랑스 회화를 모으기 위해 국립 미술 컬렉션을 대대적으로 재편성하여 1986년 옛 오르세역에 개관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2018년 세계 최고의 미술관으로 선정되었다. 현대 작품은 1976년 조르주 퐁피두 센터로 이전한 국립 근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세 국영 박물관은 연간 약 1,70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다.
7.2. 건축

중세 시대에 많은 요새화된 성들이 봉건 영주들에 의해 그들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어졌다. 살아남은 프랑스 성들 중 일부는 시농, 앙제르성, 거대한 뱅센성, 그리고 소위 카타르 성들이다. 이 시대에 프랑스는 서유럽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로마네스크 건축을 사용했다.
원래 Opus Francigenum 즉 "프랑스 작품"이라고 불렸던 고딕 건축은 일드프랑스에서 탄생했으며 유럽 전역에서 모방된 최초의 프랑스 건축 양식이었다. 프랑스 북부는 가장 중요한 고딕 대성당과 바실리카의 본고장이며, 그중 첫 번째는 왕실 묘지로 사용된 생드니 대성당이다. 다른 중요한 프랑스 고딕 대성당으로는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과 아미앵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왕들은 또 다른 중요한 고딕 교회인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백년 전쟁에서의 최종 승리는 프랑스 건축 발전의 중요한 단계를 알렸다. 이때는 프랑스 르네상스 시기였고 이탈리아에서 여러 예술가들이 프랑스 궁정으로 초대되었다. 1450년부터 루아르 계곡에 많은 주거용 궁전이 지어졌으며, 그 첫 번째 예가 몽소로성이다. 이러한 주거용 성의 예로는 샹보르성, 슈농소성, 앙부아즈성 등이 있다.
르네상스와 중세 말 이후, 바로크 건축이 전통적인 고딕 양식을 대체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바로크 건축은 종교 분야보다 세속 분야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세속 분야에서 베르사유 궁전은 많은 바로크 양식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베르사유 확장을 설계한 쥘 아르두앵 망사르는 바로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프랑스 건축가 중 한 명이었으며, 앵발리드의 돔으로 유명하다. 가장 인상적인 지방 바로크 건축물 중 일부는 당시 아직 프랑스가 아니었던 낭시의 스타니슬라스 광장과 같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군사 건축 분야에서는 보방이 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인 요새 중 일부를 설계하여 영향력 있는 군사 건축가가 되었으며, 그 결과 그의 작품 모방품은 유럽 전역, 아메리카, 러시아, 터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혁명 이후, 공화주의자들은 신고전주의를 선호했지만, 이는 파리 팡테옹이나 툴루즈 카피톨과 같은 건물들로 혁명 이전에 프랑스에 도입되었다. 제1제정 기간 동안 지어진 에투알 개선문과 생트 마리 마들렌 교회는 앙피르 양식 건축의 가장 좋은 예를 보여준다.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새로운 도시 계획과 건축의 물결이 일어났다. 팔레 가르니에와 같은 신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건물들이 지어졌다. 당시 도시 계획은 매우 조직적이고 엄격했으며, 특히 오스만의 파리 개조가 두드러졌다. 이 시대와 관련된 건축 양식은 영어로 제2제국 양식이라고 불리며, 이 용어는 제2프랑스 제국에서 유래했다. 이때 유럽과 프랑스 전역에서 강력한 고딕 부흥이 있었으며, 관련 건축가는 외젠 비올레르뒤크였다. 19세기 후반, 귀스타브 에펠은 가라비교와 같은 많은 다리를 설계했으며, 에펠탑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다리 설계자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다.
20세기에는 프랑스-스위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프랑스에 여러 건물을 설계했다. 최근에는 프랑스 건축가들이 현대 건축 양식과 구 건축 양식을 결합했다. 루브르 피라미드는 오래된 건물에 현대 건축을 추가한 예이다. 프랑스 도시 내에서 통합하기 가장 어려운 건물은 멀리서도 보이는 고층 건물이다. 예를 들어, 파리에서는 1977년 이후 새 건물의 높이가 37 m 미만이어야 했다. 프랑스 최대 금융 지구는 라데팡스이며, 이곳에는 상당수의 고층 건물이 있다. 환경에 통합하기 어려운 다른 거대한 건물로는 대형 교량이 있으며, 이러한 방식의 예로는 미요 대교가 있다. 유명한 현대 프랑스 건축가로는 장 누벨, 도미니크 페로, 크리스티앙 드 포르잠파르크, 폴 앙드뢰 등이 있다.
7.3. 문학과 철학

가장 초기의 프랑스 문학은 오늘날의 현대 프랑스가 단일하고 통일된 언어를 가지지 못했던 중세 시대부터 시작된다. 여러 언어와 방언이 있었고, 작가들은 자신만의 철자법과 문법을 사용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란슬로-성배와 같은 프랑스 중세 문헌의 일부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세 명의 유명한 중세 작가로는 크레티앵 드 트루아, 크리스틴 드 피잔(오일어), 기욤 9세 공작(오크어)이 있다. 많은 중세 프랑스 시와 문학은 롤랑의 노래와 무훈시와 같은 카롤링거 왕조 주기의 전설에서 영감을 받았다. 1175년 페루 드 생 클루드가 쓴 여우 이야기는 중세 캐릭터 레나르(여우)의 이야기를 다루며 초기 프랑스 문학의 또 다른 예이다. 16세기 중요한 작가로는 다섯 편의 인기 있는 초기 피카레스크 소설을 쓴 프랑수아 라블레가 있다. 라블레는 또한 엡타메롱의 저자인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와 정기적으로 교류했다. 또 다른 16세기 작가로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수상록으로 문학 장르를 시작한 미셸 드 몽테뉴가 있다.
프랑스 문학과 시는 18세기와 19세기에 번성했다. 드니 디드로는 백과전서의 주요 편집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백과전서의 목표는 그의 세기의 모든 지식을 요약하고 무지와 반계몽주의와 싸우는 것이었다. 같은 세기에 샤를 페로는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 푸른 수염을 포함한 어린이 동화의 다작 작가였다. 19세기 초, 상징주의 시는 프랑스 문학에서 중요한 운동이었으며, 샤를 보들레르, 폴 베를렌, 스테판 말라르메와 같은 시인들이 있었다.
19세기는 많은 프랑스 작가들의 저술을 목격했다. 빅토르 위고는 모든 문학 장르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때때로 "역대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여겨진다. 위고의 시는 셰익스피어, 단테, 호메로스의 시와 비교되어 왔다. 그의 소설 레 미제라블은 역대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로 널리 여겨지며, 노트르담의 꼽추는 여전히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세기의 다른 주요 작가로는 알렉상드르 뒤마( 삼총사와 몽테크리스토 백작), 쥘 베른( 해저 2만리), 에밀 졸라( 루공-마카르 총서), 오노레 드 발자크( 인간 희극), 기 드 모파상, 테오필 고티에, 스탕달( 적과 흑, 파르므의 수도원) 등이 있으며, 이들의 작품은 프랑스와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 중 하나이다.
20세기 초 프랑스는 문학적 자유의 안식처였다. 미국, 영국 및 기타 영어권 국가에서 외설로 금지된 작품들은 해당 작가의 모국에서 구할 수 있게 되기 수십 년 전에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작가들을 그들의 글로 처벌하는 것을 꺼렸고, 기소는 드물었다. 20세기의 중요한 작가로는 마르셀 프루스트, 루이페르디낭 셀린, 장 콕토, 알베르 카뮈, 장폴 사르트르가 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인 어린 왕자를 썼다.
중세 철학은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가 등장할 때까지 스콜라 철학이 지배했다. 근대 철학은 17세기 프랑스에서 르네 데카르트, 블레즈 파스칼, 니콜라 말브랑슈의 철학으로 시작되었다. 데카르트는 고대 이후 최초로 선배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철학 체계를 구축하려 했던 서양 철학자였다. 18세기 프랑스는 볼테르가 계몽주의를 구현하고 장자크 루소의 작품이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등 주요 철학적 공헌을 했다. 프랑스 철학자들은 20세기에 실존주의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 카뮈, 사르트르의 작품을 포함하여 이 분야에 주요한 공헌을 했다. 이 시기의 다른 영향력 있는 공헌으로는 시몬 베유의 도덕적, 정치적 작품,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포함한 구조주의에 대한 공헌, 미셸 푸코의 탈구조주의 작품 등이 있다.
7.4. 음악

프랑스는 길고 다양한 음악 역사를 가지고 있다. 17세기에는 루이 14세 덕분에 황금기를 맞았는데, 그는 재능 있는 음악가와 작곡가들을 왕실 궁정에 고용했다. 이 시기의 작곡가로는 마르크앙투안 샤르팡티에, 프랑수아 쿠프랭, 미셸리카르 드랄랑드, 장바티스트 륄리, 마랭 마레 등이 있으며, 모두 궁정 작곡가였다. "태양왕" 사후 프랑스 음악 창작은 활기를 잃었지만, 다음 세기에는 장필리프 라모의 음악이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다. 라모는 프랑스 오페라의 지배적인 작곡가이자 프랑스 하프시코드의 주요 작곡가가 되었다.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프랑스는 가브리엘 포레,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같은 주목할 만한 작곡가들을 배출했다. 클로드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은 인상주의 음악과 가장 두드러지게 관련된 인물이다. 두 작곡가는 새로운 음악 형식과 새로운 사운드를 발명했다. 드뷔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 한 명이었으며, 비전통적인 음계와 반음계주의 사용은 그 뒤를 이은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음악은 감각적인 내용과 무조성의 빈번한 사용으로 유명하다. 에릭 사티는 20세기 초 파리 아방가르드의 핵심 멤버였다. 프랑시스 풀랑크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피아노 모음곡 영원한 세 개의 악장(1919년), 발레 암사슴들(1923년), 하프시코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골풍의 협주곡(1928년), 오페라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1957년), 소프라노,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위한 글로리아(1959년) 등이 있다. 20세기 중반에는 모리스 오아나, 피에르 셰페르, 피에르 불레즈가 현대 클래식 음악 발전에 기여했다.
그 후 프랑스 음악은 20세기 중반 팝과 록 음악의 급속한 출현을 따랐다. 비록 영어권 창작물이 프랑스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샹송 프랑세즈로 알려진 프랑스 팝 음악 또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 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랑스 예술가로는 에디트 피아프, 조르주 브라상스, 레오 페레, 샤를 아즈나부르, 세르주 갱스부르 등이 있다. 현대 팝 음악은 인기 있는 프랑스 힙합, 프랑스 록, 테크노/펑크, 턴테이블리스트/DJ의 부상을 목격했다. 영어권 국가에 비해 프랑스에는 록 밴드가 거의 없지만, 누아르 데지르, 마노 네그라, 니아데라, 레 리타 미츠코, 그리고 최근에는 슈퍼버스, 피닉스, 고지라, 또는 샤카 퐁크와 같은 밴드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7.5. 영화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영화와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프랑스인인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영화를 창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알리스 기블라셰 또한 프랑스 출신이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의 누벨 바그를 포함한 몇몇 중요한 영화 운동이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정부의 보호 덕분에 강력한 영화 산업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는 여전히 영화 제작의 선두 주자이며, 2015년 기준 다른 어떤 유럽 국가보다 많은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영화제 중 하나인 칸 영화제를 개최한다.
강력하고 혁신적인 영화 전통 외에도 프랑스는 유럽 및 전 세계 예술가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 영화는 때때로 외국 영화와 얽혀 있다. 폴란드(로만 폴란스키,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안제이 주와프스키), 아르헨티나(가스파 노에, 에드가르도 코자린스키), 러시아(알렉상드르 알렉세예프, 아나톨 리트바크), 오스트리아(미카엘 하네케), 조지아(겔라 바블루아니, 오타르 이오셀리아니) 출신 감독들이 프랑스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반대로, 프랑스 감독들은 뤽 베송, 자크 투르뇌, 프랑시스 베베르와 같이 다른 나라, 특히 미국에서 왕성하고 영향력 있는 경력을 쌓았다. 프랑스 영화 시장은 할리우드가 지배하고 있지만, 프랑스는 미국 영화가 총 영화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작은 유일한 국가로, 독일 77%, 일본 69%에 비해 50%에 불과하다. 프랑스 영화는 프랑스 총 영화 수익의 35%를 차지하며, 이는 미국을 제외한 선진국 중 가장 높은 비율로, 스페인 14%, 영국 8%와 비교된다. 2013년 프랑스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영화 수출국이었다.
문화를 다른 상업 제품과 다르게 취급하는 정치적 개념인 문화적 예외를 옹호하는 일환으로, 프랑스는 1993년 WTO의 자유화 부문 목록에 문화 및 시청각 자료를 포함시키지 않도록 모든 EU 회원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더욱이, 이 결정은 2005년 유네스코 투표에서 확인되었으며, "문화적 예외" 원칙은 198개국이 찬성하고 미국과 이스라엘 단 2개국만이 반대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7.6. 패션

패션은 17세기부터 프랑스의 중요한 산업이자 문화 수출품이었으며, 현대 "오트쿠튀르"는 1860년대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파리는 런던, 밀라노, 뉴욕과 함께 세계적인 패션 중심지 중 하나로 여겨지며, 많은 최고의 패션 하우스의 본거지 또는 본사가 있는 곳이다. 오트쿠튀르라는 표현은 프랑스에서 법적으로 보호되는 명칭으로, 특정 품질 기준을 보장한다.
프랑스와 패션 및 스타일(la mode라 모드프랑스어)의 연관성은 주로 루이 14세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프랑스의 명품 산업은 점차 왕실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프랑스 왕실은 유럽의 취향과 스타일의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샤넬, 디올, 지방시와 같은 위대한 쿠튀리에 하우스 설립을 통해 1860년~1960년대에 고급 패션(haute couture오트 쿠튀르프랑스어) 산업의 지배력을 다시 강화했다. 프랑스 향수 산업은 해당 분야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그라스 마을을 중심으로 한다.
딜로이트가 집계한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 브랜드인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LVMH)는 매출 기준 세계 최대 명품 회사로, 2위 경쟁업체보다 두 배 이상 많은 매출을 올렸다. 더욱이 프랑스는 매출 기준 상위 10대 명품 회사 중 3개사(LVMH, 케링, 로레알)를 보유하고 있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다.
7.7. 요리
지역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북부에서는 버터와 크림이 일반적인 재료인 반면, 남부에서는 올리브유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프랑스의 각 지역에는 전통 특선 요리가 있다. 남서부의 카술레, 알자스의 슈크루트, 로렌 지역의 키슈, 부르고뉴의 뵈프 부르기뇽, 프로방스의 타프나드 등이 그것이다. 프랑스는 포도주와 치즈로 가장 유명하며, 이들은 종종 생산지(AOC)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다. 식사는 일반적으로 앙트레('전채'), 플라 프랭시팔('주요리'), 그리고 프로마주('치즈') 또는 데세르('후식')의 세 코스로 구성되며, 때로는 치즈나 후식 전에 샐러드가 제공되기도 한다.
프랑스 요리는 프랑스의 삶의 질과 매력의 핵심 요소로도 여겨진다. 프랑스 출판물인 미슐랭 가이드는 엄선된 소수의 식당에 우수성을 나타내는 미슐랭 스타를 수여한다. 스타를 획득하거나 잃는 것은 식당의 성공에 극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006년까지 미슐랭 가이드는 프랑스 식당에 620개의 스타를 수여했다.
포도주 전통 외에도 프랑스는 맥주와 럼주 주요 생산국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세 가지 주요 양조 지역은 알자스(국내 생산량의 60%), 노르파드칼레, 로렌이다. 프랑스 럼주는 대서양과 인도양의 섬에 있는 증류소에서 만들어진다.
7.8. 스포츠

프랑스는 "세계 최대의 연례 스포츠 행사"인 연례 사이클 대회 투르 드 프랑스를 개최한다. 프랑스에서 인기 있는 다른 스포츠로는 축구, 유도, 테니스, 럭비 유니언, 페탕크 등이 있다. 프랑스는 1938년 및 1998년 FIFA 월드컵, 2007년 럭비 월드컵, 2023년 럭비 월드컵과 같은 행사를 개최했다. 또한 1960년 유럽 네이션스컵, UEFA 유로 1984, UEFA 유로 2016, 2019년 FIFA 여자 월드컵도 개최했다. 생드니의 스타드 드 프랑스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며 1998년 FIFA 월드컵과 2007년 럭비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곳이다. 1923년부터 프랑스는 르망 24시 스포츠카 내구 레이싱으로 유명하다. 파리 마스터스와 4대 그랜드 슬램 토너먼트 중 하나인 프랑스 오픈을 포함한 여러 주요 테니스 토너먼트가 프랑스에서 열린다. 프랑스 무술에는 사바트와 펜싱이 있다.

프랑스는 현대 올림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 귀족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올림픽 부활을 제안했다. 아테네가 그리스 기원을 참조하여 첫 번째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후, 파리는 1900년에 두 번째 올림픽을 개최했다. 파리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로잔으로 이전하기 전 첫 번째 본거지였다. 1900년 이후 프랑스는 5번 더 올림픽을 개최했다. 1924년 하계 올림픽과 2024년 하계 올림픽 모두 파리에서 개최되었으며, 세 번의 동계 올림픽(1924년 샤모니, 1968년 그르노블, 1992년 알베르빌)도 개최했다. 올림픽과 유사하게 프랑스는 1924년 프랑스 청각 장애인 자동차 정비공인 외젠 루벤스-알카이스의 아이디어로 파리에서 제1회 하계 데플림픽을 개최하며 청각 장애인을 위한 올림픽(데플림픽)을 도입했다.
축구 국가대표팀과 럭비 유니언 국가대표팀 모두 팀 유니폼 색상과 프랑스 삼색기를 참조하여 "Les Bleus"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축구는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180만 명 이상의 등록 선수와 18,000개 이상의 등록 클럽이 있다.
롤랑 가로스라고도 불리는 프랑스 오픈은 매년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파리 스타드 롤랑 가로스에서 2주 동안 열리는 주요 테니스 토너먼트이다. 세계 최고의 클레이 코트 테니스 선수권 대회이자 4대 연례 그랜드 슬램 토너먼트 중 두 번째이다.
럭비 유니언은 특히 파리와 프랑스 남서부에서 인기가 있다. 럭비 유니언 국가대표팀은 모든 럭비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매년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에 참가한다.
7.9. 대중 매체

2021년, 웨스트-프랑스, 쉬드 웨스트, 라 부아 뒤 노르, 도피네 리베레, 르 텔레그람, 르 프로그레와 같은 지역 일간지가 르몽드, 르 피가로, 레키프(스포츠), 르 파리지앵, 레 제코(금융)와 같은 전국지의 판매량을 두 배 이상 앞질렀다. 대도시 중심가에 배포되는 무료 일간지는 계속해서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주간지 부문에는 프랑스에서 발행되는 400개 이상의 전문 주간지가 포함된다.
가장 영향력 있는 뉴스 잡지는 좌파 성향의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중도 성향의 렉스프레스, 우파 성향의 르 푸앵(2009년 40만 부 이상)이지만, 주간지 중 가장 많은 발행 부수를 기록하는 것은 TV 잡지와 여성 잡지이며, 그중 마리끌레르와 엘르는 해외판도 있다. 영향력 있는 주간지에는 탐사 및 풍자 신문인 르 카나르 앙셰네와 샤를리 에브도, 그리고 파리 마치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산업화된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쇄 매체는 인터넷의 부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2008년 정부는 이 부문의 개혁과 재정적 자립을 돕기 위한 주요 계획을 시작했지만, 2009년에는 기존 보조금 외에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인쇄 매체에 60만 유로를 지원해야 했다.
1974년, 수년간의 라디오 및 텔레비전 중앙 집중식 독점 이후, 정부 기관인 ORTF는 여러 국가 기관으로 분리되었지만, 이미 존재하던 3개의 TV 채널과 4개의 국영 라디오 방송국은 계속해서 국가 통제하에 있었다. 1981년이 되어서야 정부는 영토 내 자유 방송을 허용하여 라디오에 대한 국가 독점을 종식시켰다.
7.10. 상징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은 역사와 전통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형성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상징물은 다음과 같다.
- 삼색기(Le drapeau tricolore): 파란색, 하얀색, 빨간색의 세로 줄무늬로 이루어진 국기는 프랑스 혁명 정신인 자유·평등·박애를 상징한다. 파란색과 빨간색은 파리 시의 전통적인 색이며, 하얀색은 왕실을 상징한다.
- 라 마르세예즈: 프랑스의 국가로, 프랑스 혁명 당시 라인강 주둔군을 위해 작곡된 행진곡이다. 혁명 정신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힘찬 곡조가 특징이다.
- 마리안: 자유와 공화국을 의인화한 여성상이다. 일반적으로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있으며, 프랑스 공화국의 이상을 상징한다. 관공서, 동전, 우표 등 다양한 곳에서 볼 수 있다.
- 수탉(Le coq gaulois): 고대 로마인들이 갈리아 지역과 주민을 '갈루스(Gallus)'라고 불렀는데, 이는 라틴어로 '수탉'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수탉은 프랑스 민족의 용맹함과 자부심을 나타내는 비공식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스포츠 국가대표팀의 엠블럼 등에서 자주 사용된다.
-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프랑스 공화국의 국가 표어로, 프랑스 혁명의 핵심 가치를 나타낸다.
- 속간: 고대 로마에서 권위와 사법권을 상징했던 다발로 묶은 막대기와 도끼이다. 프랑스에서는 정의와 공화국의 힘을 상징하며, 비공식적인 국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 백합 문양(Fleur-de-lis): 역사적으로 프랑스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이었으며, 순수, 지혜, 기사도 등을 의미한다. 현재도 일부 지역이나 단체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이 외에도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바게트, 와인 등도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7.11. 공휴일
프랑스의 주요 국경일 및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 1월 1일: 새해 첫날(Jour de l'An)
- 부활절 월요일(Lundi de Pâques): 춘분 후 첫 보름달 이후 첫 번째 일요일 다음 날 (날짜 변동)
- 5월 1일: 노동절(Fête du Travail)
- 5월 8일: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일(Victoire 1945)
- 예수 승천일(Ascension): 부활절로부터 39일 후 목요일 (날짜 변동)
- 성령 강림 주일 월요일(Lundi de Pentecôte): 예수 승천일로부터 10일 후 월요일 (날짜 변동)
- 7월 14일: 바스티유의 날(Fête Nationale) -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Assomption)
-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Toussaint)
-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기념일(Armistice 1918)
- 12월 25일: 크리스마스(Noël)
알자스 및 모젤 지역은 역사적인 이유로 성금요일(Vendredi Saint)과 12월 26일(Saint Étienne)을 추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공휴일이 주말과 겹칠 경우 대체 공휴일은 일반적으로 주어지지 않지만, 특정 공휴일이 목요일이나 화요일에 해당될 경우, 금요일이나 월요일을 추가로 쉬어 연휴(faire le pont)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