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직업 경력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는 1959년 6월 13일 시비우 구시가지에서 트란실바니아 작센인 가문인 구스타프 하인츠와 수잔 요한니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여동생 크리스타 요한니스(1964년생)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국영 기업의 기술자로 일했고,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이오하니스는 자신의 가족이 약 850년 전, 구체적으로는 1500년경 시비우 주 치스너디에에 정착했다고 밝혔다. 1992년, 그의 부모님과 여동생은 철의 장막 붕괴 후 대부분의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이 그랬듯이, 독일의 귀환법에 따라 시민권을 취득하고 독일 바이에른 주 뷔르츠부르크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오하니스는 루마니아에 남아 살고 일하기로 결정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이오하니스는 클루지나포카의 바베슈-볼리아이 대학교 물리학부를 1983년에 졸업했다.
1.2. 직업 경력
졸업 후 1983년부터 1989년까지 고향 시비우의 여러 학교와 대학에서 고등학교 물리 교사로 재직했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독일어 학교인 자무엘 폰 브루켄탈 국립대학에서 근무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시비우 군 교육감 대리였으며, 1999년부터 2000년 시장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시비우 군 공립학교의 총 교육감으로 재직했다.
2. 정치 경력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는 1990년 루마니아 독일인 민주포럼(FDGR/DFDR)에 가입하여 1997년부터 트란실바니아 교육 위원회 위원으로, 1998년부터 시비우 지역 당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1년에는 전임 에버하르트 볼프강 비트슈토크의 뒤를 이어 FDGR/DFDR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1. 시비우 시장

2000년 루마니아 지방 선거에서 FDGR/DFDR의 시비우 지부는 이오하니스를 시장 후보로 지명했다. 당시 FDGR/DFDR 지도부는 포럼을 대표하고 지역 정치적 가시성을 확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으나, 이오하니스의 예상치 못한 승리에 놀랐다. 시비우의 독일계 소수 민족(특히 트란실바니아 작센인) 인구가 2% 미만으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오하니스는 69.1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2004년(88.69%), 2008년(83.26%), 2012년(77.89%)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세 차례 연속 재선에 성공했다. 이로써 그는 알베르트 되르와 한스 융에 이어 루마니아 도시의 세 번째 독일계 시장이 되었다.
시장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도시의 인프라를 복구하고 지방 행정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오하니스는 구시가지의 대대적인 보수 덕분에 시비우를 루마니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로 만든 공로를 널리 인정받고 있다. 첫 임기 동안 이오하니스는 사회민주당(PSD), FDGR/DFDR, 민주당, CDR, PRM으로 구성된 시의회와 협력했다. 2004년부터는 그의 당인 FDGR/DFDR이 시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FDGR/DFDR은 23명의 의원 중 14명을 차지했으며, 민주자유당(PDL)이 4명, 사회민주당이 3명, 국민자유당이 2명이었다.
이오하니스는 해외 관계자 및 투자자들과 접촉을 구축했다. 시비우는 2007년 룩셈부르크 시와 함께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되었다. 룩셈부르크는 12세기 많은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이 오늘날 룩셈부르크 지역에서 트란실바니아로 이주했다는 사실 때문에 시비우와 이 영광스러운 지위를 공유하기로 결정했다. 중세 시대에 주로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에 의해 건설된 시비우는 수세기 동안 트란실바니아 독일 민족의 문화 중심지였으며, 20세기 중반까지는 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시였다. 이후 많은 독일인들이 제2차 세계 대전 후, 특히 철의 장막 붕괴 후 몇 달 만에 1990년에 도시를 떠났다.
2005년 11월 7일, 이오하니스는 유로링크-유럽의 집(Eurolink - House of Europe)에 의해 "유럽 루마니아를 위한 올해의 인물"(Personalitatea anului pentru o Românie europeană루마니아어)로 지명되었다.
2.2. 총리 후보 지명
2009년 10월 14일, 에밀 보크 총리 정부가 의회 불신임 결의로 전복된 후, 야당 의회 그룹(국민자유당, 사회민주당, 루마니아 헝가리인 민주 연합(UMR), 보수당(PC), 소수 민족 그룹)의 지도자들은 이오하니스를 총리직 후보로 제안했다. 루마니아 국내 정치권 외부 출신인 이오하니스는 독립적인 정치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당(FDGR/DFDR)은 일관되게 국민자유당과 동맹을 맺었고, 이오하니스는 이전 유럽 의회 선거에서 국민자유당을 위해 선거 운동을 했다.
이후 국민자유당, 사회민주당, UDMR 및 의회의 소수 민족 그룹은 이오하니스를 과도 정부 총리 공동 후보로 제시했다. 10월 14일, 이오하니스는 자신의 후보 지명을 수락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10월 15일, 트라얀 버세스쿠 대통령은 루마니아의 저명한 경제학자 루치안 크로이토루를 총리로 지명하고, 그에게 다음 정부 구성을 맡겼다.
크로이토루의 지명 전날, 버세스쿠는 "일부 당들이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를 제안했다. 나는 그가 총리가 될 가능성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나의 선택은 다른 [국민 통합 정부] 해결책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사회민주당이나 다른 당[국민자유당]에서 제안했기 때문에 그러한 제안을 거부했다"고 언급하며, 당시 가장 큰 의회 세력인 자유민주당(PDL)이 제시한 제안만을 고려해야 한다는 법적 제약을 언급했다. 이 제약은 다른 당들에 의해 이의가 제기되었으며, 당시 금융 및 경제 위기를 고려할 때 총리는 해당 분야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야당은 대통령이 이오하니스를 지명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 미르체아 제오아너는 버세스쿠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통해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고 비난했다. 국민자유당 지도자이자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크린 안토네스쿠는 이오하니스가 아닌 다른 후보 지명을 저지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크로이토루가 지명된 후, 안토네스쿠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이오하니스를 총리로 지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3일 후인 10월 18일, 제오아너는 안토네스쿠가 이오하니스를 안토네스쿠의 대통령 출마를 위한 "선거 대리인"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안토네스쿠는 언론에 이오하니스가 "자신을 이용하도록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제오아너와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10월 18일 저녁 부쿠레슈티에서 이오하니스와 두 번째 회의를 가졌다. 전날 참석을 발표했던 UDMR은 아침에 모든 지도자들이 도시에 없다고 발표했다. 국민자유당은 안토네스쿠가 아침에 클루지에서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고 발표한 후 낮은 수준의 대표자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했다. 10월 21일, 의회는 252표 찬성(사회민주당, 국민자유당, UDMR, 소수 민족 그룹)과 2표 반대로 이오하니스를 총리로 지명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청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2.3. 국민자유당(PNL) 활동
2013년 2월 20일,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는 크린 안토네스쿠와 함께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자유당에 입당했음을 발표했다. 국민자유당 임시 총회에서 그는 당의 제1부대표로 선출되었다. 2014년 6월 28일 회의에서 그는 95%의 득표율로 국민자유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2.4. 대통령 후보 및 당선

2009년 이오하니스는 대통령직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지만, 그 해는 아니라고 했다. 또한 컬린 포페스쿠-터리체아누 전 총리는 2009년 10월 27일과 2010년 4월 23일에 이오하니스가 미래에 총리나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국민자유당과 민주자유당은 2014년 여름부터 정치 우파를 강화하기 위한 절차를 시작했다. 두 당은 결국 국민자유당이라는 이름으로 합병되었지만, 선거에서는 기독교 자유 연합(Alianța Creștin-Liberală루마니아어)이라는 동맹으로 나섰다. 8월 11일, 이 동맹은 이오하니스를 11월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정했고, 그는 공식 대통령 후보로 등록되었다. 2014년 8월 말 인터뷰에서 이오하니스는 자신을 루마니아 대통령직에 출마하는 "정치 장교"라고 묘사했다. 그는 1차 투표에서 30.37%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하여 2차 투표에 진출했다. 11월 16일 2차 투표에서 그는 54.43%의 득표율로 루마니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3. 대통령직 (2014-2025)
이오하니스는 2014년 12월 21일 트라얀 버세스쿠의 임기가 끝나면서 취임했다. 그의 대통령 선거 운동은 부패 척결과 사법 시스템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 이오하니스는 또한 강력한 친서방 외교 정책을 지지한다.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에 대해 이오하니스는 "이는 부쿠레슈티만이 제공할 수 있고 키시너우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며, "이 특별한 관계는 특히 우리 [루마니아 국가]에 의해 육성되고 강화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취임 시 이오하니스는 국민자유당(PNL) 당원 자격을 정지했다. 루마니아 헌법은 대통령이 재임 기간 동안 정당의 정식 당원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니콜라에 퍼운이 제안한 일부 경범죄 사면 및 특정 형벌 사면 관련 법안은 클라우스 이오하니스와 그가 이끌던 당의 주도로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이는 국민자유당이 사법 위원회에 17번이나 법안을 부결시킬 것을 요청한 끝에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총리 빅토르 폰타와의 협력은 임기 초 양측 모두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으나,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은 채 해외 순방을 단행하고, 특히 폰타가 22건의 부패 혐의로 형사 기소되면서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로 인해 이오하니스는 폰타에게 총리직 사임을 요구했다. 루마니아 의회와의 관계도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이오하니스는 국가반부패청의 의원 면책 특권 해제 요청을 거부하며 의회가 의원들을 옹호하는 것을 비판했다. 사법 시스템과 관련하여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는 부패에 대한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했다. 또한 이오하니스는 형법 개정 시도에 대해 불만을 표명했다. 외교 정책 측면에서 이오하니스는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함께 2015년 11월 4일 부쿠레슈티에서 양국 정상 회담 중 부쿠레슈티 나인을 창설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은 이 기구 창설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부쿠레슈티 나인은 불가리아, 체코, 에스토니아, 헝가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의 9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통령으로서 이오하니스는 의회 정당들과 협의하는 습관을 들였다. 2015년 1월 12일 첫 번째 협의는 2017년까지 국방부에 최소 국내총생산의 2%를 보장하는 정치적 합의를 목표로 했다. 두 번째 협의는 의회 회기의 입법 우선순위, 즉 루마니아 디아스포라의 투표, 선거 운동 및 정당 자금 지원, 의원 면책 특권 해제에 초점을 맞췄다. 의회가 1월 28일에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오하니스는 선거법 현황과 의원 체포 또는 기소 승인에 대한 사법부 요청 거부에 대해 또 다른 일련의 협의를 조직했다. 대통령과 정당 간의 다른 회의는 빅 브라더 법안 패키지와 국가 방위 전략에 초점을 맞췄다.
2016년 2월, 국세청은 단 보이쿨레스쿠 소유의 두 TV 방송국에 대해 철거 통지서를 보냈다. 보이쿨레스쿠는 2014년 8월 6천만 유로 상당의 부패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는 인택트 미디어 그룹 사건에서 국세청의 접근 방식이 "성급하고", "부적절하며", "언론의 자유는 사소한 행정적 이유로 억압될 수 없다"고 밝혔다. 그의 입장은 지지자들과 공인들로부터 비판의 물결을 받았다. 같은 맥락에서 이오하니스는 몰도바와의 통일은 트란스니스트리아 분쟁, 루마니아와 몰도바 간의 경제 안정 및 부패 척결의 차이점을 고려할 때 "덜 심각한 접근 방식"이며, 양국 상황이 안정될 때 논의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2014년 선거 운동 동안 통일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동 정치로 비난하는 통일주의자들 사이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2018년 3월, 베사라비아와 루마니아의 통합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그는 해당 문제에 대한 본회의 투표에 불참했다.
이오하니스는 2021년 루마니아 정치 위기의 주된 책임자로 여겨지며, 2021년 11월 CURS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35%가 그를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비평가들은 그가 2021년 말 USR을 정부에서 배제하여 사회민주당이 다시 집권하도록 허용한 것을 비난한다. 이는 2021년 11월 25일 루마니아를 위한 국가 연합이 설립되고 치우커 내각이 취임하면서 일어났다. 두 달 후, 이오하니스는 새로운 연합을 칭찬하며 "루마니아 정치 계급은 민주적 성숙을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이오하니스는 2017-2019년 사회민주당-ALDE 연합 기간 동안 사회민주당을 비판했던 점을 들어 비난을 받았다. 2020년 루마니아 총선에서 그는 유권자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며 사회민주당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오하니스를 지지했던 루마니아의 일부 공인들은 그의 이중 잣대와 부적절한 통치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이러한 비평가들에는 블라디미르 티스머네아누, 투도르 키릴러, 라두 파라스키베스쿠,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 안드레이 오이스테아누, 아다 솔로몬, 마리우스 마놀레, 크리스티안 투도르 포페스쿠, 가브리엘 리체아누 등이 포함된다. 연합의 통치는 권위주의적, 비자유주의적, 도둑정치적, 그리고 부패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공식적으로 루마니아 대통령은 어떤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지만, 이오하니스는 국민자유당의 사실상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2023년 6월 12일, 국가 연합 의정서에 따라 니콜라에 치우커가 사임했다. 다음 날, 이오하니스는 마르첼 치올라쿠를 다음 총리로 지명했다. 치우커는 2023년 6월 13일 루마니아 상원 의장이 되었다. 국민자유당이 치우커 내각에서 UDMR이 맡았던 개발, 공공 사업 및 행정부 장관직을 차지하기로 결정한 후 UDMR도 연합에서 탈퇴했다. 2023년 6월 15일, 루마니아 의회는 치올라쿠 내각을 통과시켰다. 이오하니스는 사회민주당-국민자유당 연합을 다시 칭찬하며, 루마니아 정치에 도입된 이 새로운 모델인 정부 순환이 "지금까지 매우 잘 작동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오늘 우리가 총리 순환을 공식화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은 연합의 새로운 수준의 진지함을 보여준다"고 선언했다. 이오하니스의 대통령 임기 후반, 특히 치우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루마니아의 언론 자유는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 따라 하락했다(2021년 75.09점에서 2023년 69.04점으로). 치우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루마니아는 민주주의 후퇴를 경험했으며, 이코노미스트는 루마니아를 민주주의 측면에서 유럽 연합 국가 중 최하위로 평가했으며, 심지어 빅토르 오르반의 헝가리보다도 낮았다. 이코노미스트의 민주주의 지수는 또한 루마니아를 아프리카 국가 보츠와나보다 지속적으로 낮은 순위에 두었는데, 이는 이오하니스가 2014년 대통령 선거 운동 인터뷰에서 비꼬듯이 한탄했던 부분이며(당시 루마니아는 60위, 보츠와나는 20위), 그로 인해 그는 "민주주의를 공고히 할"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2024년 3월 12일, 이오하니스는 NATO 사무총장직에 출마를 선언하며, 러시아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상황에 대한 루마니아의 "깊은 이해"를 언급하며 동맹에 대한 "관점의 갱신"을 약속했다. 그는 마르크 뤼터 전 네덜란드 총리와 경쟁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오하니스는 2024년 6월 20일 후보직을 철회했다.
2024년 12월 2024년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가 무효화된 후, 이오하니스는 후임자가 선출될 때까지 루마니아 헌법 재판소에 의해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25년 2월 10일, 이오하니스는 "분열된 루마니아를 만들지 않기 위해" 루마니아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야당 의원들이 이오하니스의 직무 정지를 요구하는 동의안을 제출한 데 따른 것으로, 그의 사임은 2025년 2월 12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그는 이리에 볼로잔 상원 의장이 후임으로 임시 대통령직을 맡게 되었다.
3.1. 국제 관계 및 외교
이오하니스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루마니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외교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해외 방문과 국제 회의에 참여했다. 특히 유럽 연합(EU) 및 NATO 회원국들과의 협력을 강조하며 친서방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날짜 | 국가 | 도시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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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1일 | 프랑스 | 파리 | 공화주의 행진에 참여하여 테러 공격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
2015년 1월 15-16일 | 벨기에 | 브뤼셀 | 브뤼셀 공식 방문 및 옌스 스톨텐베르그 NATO 사무총장과 회담했다. |
2015년 2월 10일 | 프랑스 | 파리 | 프랑스 공식 방문 및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과 프랑스-루마니아 관계, 테러 방지,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
2015년 2월 25일 | 몰도바 | 키시너우 | 몰도바 공화국 공식 방문 및 니콜라에 티모프티 대통령과 회담하고, 친유럽 정당들과 양자 관계 및 몰도바의 유럽 통합 과정에 대해 논의했다. |
2015년 2월 26일 | 독일 | 베를린 | 독일 공식 방문 및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우크라이나 상황, 투자, 유럽 프로젝트, 법치주의 강화에 대해 논의했다. |
2015년 3월 12-13일 | 폴란드 | 바르샤바 | 폴란드 공식 방문 및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NATO, 몰도바에 대해 논의했다. |
2015년 3월 17일 | 우크라이나 | 키이우 | 우크라이나 공식 방문했다. |
2015년 9월 24-30일 | 미국 | 뉴욕, 워싱턴 D.C. | 유엔 총회에 루마니아 대표로 참석하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및 조 바이든 부통령과 회담했다. |
2015년 11월 4일 | 폴란드 | 부쿠레슈티 |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함께 부쿠레슈티 나인을 창설했다. 이 기구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에 대한 대응으로 창설되었다. |
2016년 3월 7-9일 | 이스라엘 | 예루살렘 | 이스라엘 국빈 방문했다. |
2016년 3월 10일 | 팔레스타인 | 라마야 | 팔레스타인 국빈 방문했다. |
2016년 3월 31일-4월 1일 | 미국 | 워싱턴 D.C. | 핵 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바락 오바마 대통령이 주최한 백악관 만찬에 참석했다. |
2016년 7월 8-9일 | 폴란드 | 바르샤바 | NATO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
2017년 6월 5-9일 | 미국 | 워싱턴 D.C. |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하고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다. |
2017년 7월 6일 | 폴란드 | 바르샤바 | 쓰리 시스 이니셔티브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
2019년 8월 20일 | 미국 | 워싱턴 D.C. | 백악관을 방문했다. |
2019년 10월 21-22일 | 일본 | 도쿄 | 아베 신조 총리와 회담하고 나루히토 천황의 즉위례 정전의 의에 참석했다. |
2020년 12월 29일 | 몰도바 | 키시너우 | 몰도바 공식 방문했다. |
2022년 6월 16일 | 우크라이나 | 키이우 |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와 함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했다. |
2023년 2월 2-3일 | 아제르바이잔 | 바쿠 | 아제르바이잔 공식 방문했다. |
2023년 3월 6-8일 | 일본 | 도쿄, 교토 | 일본 공식 방문했다. |
2023년 3월 9-10일 | 싱가포르 | 싱가포르 | 싱가포르 국빈 방문했다. |
2023년 3월 | 아랍에미리트 | 아부다비, 두바이 | 아랍에미리트 공식 방문했다. |
2023년 4월 |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티아고, 브라질리아, 리우데자네이루 |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공식 방문했다. |
2024년 3월 12일 | NATO | - | NATO 사무총장직에 출마를 선언했다가 2024년 6월 20일 철회했다. |
3.2. 사회 및 소수자 문제
이오하니스는 소수 민족의 권리, 이민 정책, 성소수자 권리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표명했다.
-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 이오하니스는 2014년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은 부쿠레슈티가 제공하고 키시너우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몰도바 시민들이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원한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선 후 그의 입장은 완화되어, 현재 루마니아는 몰도바가 친유럽 노선을 강화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가능한 통일은 양국 상황이 안정될 때 논의될 수 있다고 밝혔다. 2018년 3월 베사라비아와 루마니아의 통합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그는 통일 관련 본회의 투표에 불참하여 논란을 빚었다.
- 세케이족 자치**: 2017년 3월, 트란실바니아 남동부의 세케이족 공동체는 정치적, 행정적 자치, 자체 선출된 대통령과 깃발, 루마니아어와 함께 헝가리어를 공식 언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을 시작했다. 7월 이 지역을 방문한 이오하니스는 탈중앙화와 거주자의 민족적 기원에 기반한 지역 생성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대신 루마니아인과 헝가리인 간의 "우리에게 유일한 해결책"으로서 더 많고 개선된 협력을 주장하며, 지방 행정 개혁과 지역 개발을 강조했다.
2020년 4월 28일, 루마니아 헝가리인 민주 연합(UDMR/RMDSZ) 소속 두 의원이 2019년 12월 제출한 세케이랜드 자치 법안 초안이 루마니아 의회 하원에서 묵묵히 채택되었다. 당시 하원에서는 사회민주당(PSD)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국민자유당(PNL)은 소수 정부를 이끌고 있었다. 이 법안 초안은 45일간의 논의 기한을 초과하여 자동으로 채택되었다. 4월 29일,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는 텔레비전 연설에서 법안 채택을 비판하며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과 싸우는 동안, 사회민주당은 의회 비밀 사무실에서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인에게 넘겨주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설에서 헝가리어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안녕하세요(Bună ziua루마니아어), 친애하는 루마니아인 여러분; 안녕하세요(jó napot kívánok헝가리어), 사회민주당." 같은 날, 이 법안 초안은 루마니아 상원에서 국민자유당과 사회민주당 상원 의원 모두가 부결에 찬성하여 부결되었다.
대통령의 연설은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 페테르 시야르토 헝가리 외교통상부 장관은 이오하니스의 발언을 "특히 비문명적이고 증오를 선동하기에 적합하다"고 묘사하며 루마니아 대통령에게 "헝가리인들에게 더 많은 존중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보그단 아우레스쿠 루마니아 외교부 장관은 시야르토의 발언을 "도발적이고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연설에 대해 "루마니아에서 이토록 심한, 가장 반민주적이고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이런 발언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루마니아 야당인 사회민주당과 ALDE뿐만 아니라 USR (2019년부터 국민자유당 소수 정부를 지지해 왔다) 회원들에게도 비판받았다. 이오하니스는 국가차별방지위원회로부터 차별 및 민족/국적 기반 존엄성 침해로 5000 RON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 우크라이나 내 루마니아계 소수자 권리**: 이오하니스는 2017년 우크라이나의 교육법을 비판했다. 이 법은 우크라이나어를 국립 학교의 유일한 교육 언어로 지정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그는 2017년 10월 키이우 방문을 취소했다. 이오하니스는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교육법이 "소수 민족의 모국어 교육 접근을 극적으로 제한할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깊이 상처받았다. 우리에게는 우크라이나에 많은 루마니아인이 있다"고 말했다.
- 이민**: 이오하니스는 이민이 "통제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루마니아의 습관에 영향을 미친다"고 언급하며 유럽 국경 강화에 찬성했다. 그는 EU가 자국에 설정한 이민 할당량은 수용했지만, 유럽 위원회가 의무 할당량을 설정하는 것에는 여전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3.3. 비판 및 논란
이오하니스의 두 번째 임기는 민주주의 후퇴와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의 특징을 보였다. 특히 2021년 루마니아 정치 위기와 루마니아를 위한 국가 연합의 형성 이후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는 언론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또한 2021년 4월 이후 그의 지지율은 하락했는데, 유권자들이 그의 정치적 행동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며 사회민주당(PSD)을 선호하고 그의 전 정치적 동맹들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2023년 6월 여론 조사에 따르면 루마니아인의 90% 이상이 이오하니스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단 8%만이 그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2023년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 지수는 루마니아를 유럽 연합(EU) 내 민주주의 수준에서 최하위로 평가했으며, 심지어 빅토르 오르반의 헝가리보다도 낮았다. 이코노미스트의 민주주의 지수는 또한 루마니아를 아프리카 국가 보츠와나보다 지속적으로 낮은 순위에 두었다.
이오하니스는 2021년 루마니아 정치 위기의 주된 책임자로 여겨지며, 2021년 11월 CURS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35%가 그를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비평가들은 그가 2021년 말 USR을 정부에서 배제하여 사회민주당이 다시 집권하도록 허용한 것을 비난한다. 이는 2021년 11월 25일 루마니아를 위한 국가 연합이 설립되고 치우커 내각이 취임하면서 일어났다. 두 달 후, 이오하니스는 새로운 연합을 칭찬하며 "루마니아 정치 계급은 민주적 성숙을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이오하니스는 2017-2019년 사회민주당-ALDE 연합 기간 동안 사회민주당을 비판했던 점을 들어 비난을 받았다. 2020년 루마니아 총선에서 그는 유권자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며 사회민주당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오하니스를 지지했던 루마니아의 일부 공인들은 그의 이중 잣대와 부적절한 통치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연합의 통치는 권위주의적, 비자유주의적, 도둑정치적, 그리고 부패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2024년 11월 24일 치러진 2024년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NATO 회의론자인 컬린 조르제스쿠가 여론 조사와 달리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이오하니스는 선거에 러시아의 개입이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헌법재판소는 12월 6일 1차 투표 재실시를 명령했다. 이로 인해 후임 대통령 선출이 지연되면서 이오하니스는 5년의 임기를 넘어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오하니스의 러시아 개입 주장은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국정 운영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국민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야당에서는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 임기 연장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며 비판했고, 그는 탄핵 위기에 직면했다. 2025년 2월 10일, 이오하니스는 조기 사임을 발표했으며, 헌법재판소는 2월 11일 사임을 승인했다. 2월 12일에는 이리에 볼로잔 상원 의장이 대통령 대행으로 취임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4. 이념 및 정치적 입장
이오하니스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는 루마니아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강화하고 부패를 척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4.1.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에 대해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는 2014년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통일은 부쿠레슈티만이 제공할 수 있고 키시너우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몰도바 시민들이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원한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선 후 그의 입장은 완화되어, 현재 루마니아는 몰도바가 친유럽 노선을 강화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오하니스는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가능한 통일은 양국 상황이 안정될 때 논의될 수 있다고 밝혔다.
4.2. 세케이족 자치
2017년 3월, 트란실바니아 남동부의 헝가리계 세케이족 공동체는 자신들의 지역에 대한 자치를 요구하는 청원을 시작했다. 이오하니스는 7월 이 지역을 방문하여 탈중앙화와 거주자의 민족적 기원에 기반한 지역 생성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대신 루마니아인과 헝가리인 간의 협력을 "우리에게 유일한 해결책"으로 강조하며, 지방 행정 개혁과 지역 개발을 주장했다.
2020년 4월 28일, 세케이랜드 자치 법안 초안이 루마니아 의회 하원에서 묵묵히 채택되었다. 4월 29일,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는 텔레비전 연설에서 법안 채택을 비판하며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과 싸우는 동안, 사회민주당은 의회 비밀 사무실에서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인에게 넘겨주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설에서 헝가리어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안녕하세요(Bună ziua루마니아어), 친애하는 루마니아인 여러분; 안녕하세요(jó napot kívánok헝가리어), 사회민주당." 같은 날, 이 법안 초안은 루마니아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대통령의 연설은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으며, 그는 국가차별방지위원회로부터 차별 및 민족/국적 기반 존엄성 침해로 5000 RON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4.3. 우크라이나 내 루마니아계 소수자 권리
이오하니스는 2017년 우크라이나의 교육법을 비판했다. 이 법은 우크라이나어를 국립 학교의 유일한 교육 언어로 지정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그는 2017년 10월 키이우 방문을 취소했다. 이오하니스는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교육법이 "소수 민족의 모국어 교육 접근을 극적으로 제한할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깊이 상처받았다. 우리에게는 우크라이나에 많은 루마니아인이 있다"고 말했다.
4.4. 반부패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는 부패와의 싸움을 강력히 지지한다. 2014년 11월 집권 이후, 그는 부패 혐의로 기소된 정치인들에 대한 민감한 사건을 조사하는 검사들에게 여러 차례 지지 메시지를 보냈다. 2016년 2월 25일 국가반부패청 연례 회의에서 이오하니스는 국가반부패청의 업무가 매년 조사된 사건의 수와 복잡성, 그리고 범죄로부터 재산을 몰수하고 회수하는 최종 결정 측면에서 더욱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국가반부패청이 기능적인 기관의 모델이자 성과 표준을 만들었으며, 그들의 노력과 성과를 통해 정의로운 사회와 부패 없는 나라를 원하는 루마니아 시민들의 감사를 얻었다고 강조했다. 이오하니스는 기관, 자신들을 대표하도록 선출된 자들, 그리고 공직을 수행하는 자들이 실제로 국민을 섬기기를 원한다고 언급하며, 부패 척결에서 얻은 결과는 루마니아 국경 밖에서도 높이 평가되며 루마니아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강화하는 과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보증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무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헌법적 원칙을 적용하고, 시민을 모든 정책의 중심에 두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확립된 관행에 루마니아가 점점 더 강력하게 맞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루마니아 국가반부패청(DNA) 청장 라우라 코드루차 쾨베시의 직무 정지 요구를 거부했다.
4.5. 성소수자 권리
루마니아의 성소수자 권리 및 루마니아의 동성결혼 인정에 대해 이오하니스는 루마니아 사회가 아직 명확한 답변을 내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언급하며, 대통령으로서 이 문제를 논의에 부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어떤 소수자도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다수는 소수자를 보호할 때 강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차이와 다양성을 수용할 것을 주장한다: "누구도 다른 집단에 속하거나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받아서는 안 된다."
가족을 위한 연합(Coaliția pentru Familie루마니아어)이 시작한 헌법 제48조 개정(동성 결혼 금지) 발의와 관련하여 이오하니스는 관용과 상호 수용의 개념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2016년 10월 19일 기자회견에서 "종교적 광신주의와 최후통첩식 요구의 길을 따르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그것들을 믿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는다. 나는 관용, 신뢰, 그리고 타인에 대한 개방성을 믿는다"고 말했다. 이로써 이오하니스는 루마니아에서 동성 결혼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최초의 고위 공직자가 되었다. 그의 반응은 워싱턴 포스트를 포함한 국제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루마니아의 종교 및 보수 단체들은 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그의 입장을 비판했다.
4.6. 이민
이오하니스는 이민이 "통제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루마니아의 습관에 영향을 미친다"고 언급하며 유럽 국경 강화에 찬성했다. 그는 EU가 자국에 설정한 이민 할당량은 수용했지만, 유럽 위원회가 의무 할당량을 설정하는 것에는 여전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5. 사생활
이오하니스는 1989년 시비우의 게오르게 라저르 국립대학 영어 교사인 루마니아계 카르멘 러주르커와 결혼했다. 그들은 자녀가 없다. 이오하니스는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루마니아어, 영어에 능통하고 프랑스어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의 원래 독일어 표기는 Johannis이지만, 출생 증명서에 루마니아 공무원이 Iohannis로 등록한 이후 두 표기를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주로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로 구성된 루마니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복음교회(독일어 루터교회)의 일원이다. 2014년 현재 그의 부모님, 여동생, 조카는 뷔르츠부르크에 거주하고 있다.
6. 훈장 및 수상 경력
6.1. 국제 및 국내 수상
- 2023년 - 독일 바트하르츠부르크 시민 재단이 수여하는 독일 시민상
- 2023년 - 독일 연방 공화국 본의 추방자 방지 센터가 수여하는 프란츠 베르펠 인권상
- 2020년 - 독일 연방 공화국 주데텐 독일인 고향 협회가 수여하는 유럽 카를 4세 상
- 2020/2021년 - 독일 연방 공화국 아헨 시가 수여하는 카롤루스 대제 상
- 2020년 - 독일 연방 공화국 마그데부르크 시가 수여하는 오토 황제 상
- 2020년 - 쿠덴호페-칼레르기 유럽 사회가 수여하는 유럽 쿠덴호페-칼레르기 상
- 2019년 - 루마니아 독일인 민주포럼, 시비우가 수여하는 명예 메달 (골든 에렌나델)
- 2018년 - 독일 연방 공화국 뮌헨의 한스 자이델 재단이 수여하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상
- 2017년 - 미국 워싱턴 D.C.의 미국 유대인 위원회가 수여하는 '국민을 위한 빛' 상
- 2017년 - 독일 연방 공화국 젬퍼 오페라 볼 드레스덴 성 조지 메달
- 2016년 - 독일 연방 공화국 킬의 헤르만 엘러스 재단이 수여하는 헤르만 엘러스 상
- 2016년 - 네덜란드 왕국 케르크라데의 EURIADE 재단이 수여하는 마르틴 부버-플라케
- 2010년 - 루마니아 시비우의 유대인 공동체 친구 명예 메달
- 2010년 - 독일 해외 거주자 협회 명예패
6.2. 국가별 명예 훈장
- 2023년 - 포르투갈 공화국 자유 훈장 대목장
- 2022년 - 리투아니아 공로 훈장 대십자장
- 2022년 - 라트비아 공화국 삼 성 훈장 사령관 대십자장 (1등급)
- 2022년 - 팔레스타인 국가 대목장
- 2021년 - 에스토니아 공화국 테라 마리아나 십자 훈장 목장
- 2019년 - 루마니아군 명예 휘장
- 2017년 - 크로아티아 공화국 토미슬라프 왕 대훈장 및 대성장
- 2016년 - 슬로바키아 공화국 백색 이중 십자 훈장 (1등급)
- 2016년 - 프랑스 공화국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장
- 2016년 - 폴란드 공화국 백수리 훈장
- 2016년 -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장 (특별 등급)
- 2016년 - 불가리아 공화국 스타라 플라니나 훈장 리본
- 2016년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기사 대십자장
- 2016년 - 룩셈부르크 대공국 나사우 가문 황금 사자 훈장
- 2016년 - 리투아니아 공화국 비타우타스 대공 훈장 목장 (1등급)
- 2016년 - 예루살렘 성도 및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총대주교청 성묘 기사단 훈장
- 2016년 - 몰도바 공화국 훈장
- 2015년 - 포르투갈 공화국 엔리케 왕자 훈장 대목장
- 2014년 -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장교 십자장
- 2011년 - 루마니아 국가 공로 훈장 기사
- 2009년 - 벨기에 왕국 왕관 훈장 장교
- 2009년 - 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장
- 2009년 - 룩셈부르크 대공국 공로 훈장 장교
- 2008년 - 이탈리아 공화국 이탈리아 연대성 성 훈장 사령관
7. 저술 활동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는 주로 정치에 초점을 맞춘 세 권의 책을 출판했다.
- 2014년 - 단계별로(Pas cu pas루마니아어, Schritt für Schritt독일어): 자서전적 저서이자 가우데아무스 국제 도서 및 교육 박람회 역사상 베스트셀러로, 그의 고향 시비우(Hermannstadt독일어) 시장으로서의 정치 경력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 2015년 - 첫걸음(Primul pas루마니아어, Erster Schritt독일어): 2014년에 출판된 단계별로의 속편이다. 이 책은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미래 계획을 설명한다.
- 2019년 - EU.RO - 유럽에 대한 열린 대화(Ein offener Dialog über Europa독일어): 유럽 연합(EU)에 대한 입문서이자 통계 자료집이다.
8. 선거 경력
8.1. 시비우 시장 선거
선거 | 소속 | 1차 투표 | 2차 투표 | ||||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
2000 | 루마니아 독일인 민주포럼 | 20,629 | 33.10% | 1위 | 46,286 | 69.18% | 1위 |
2004 | 루마니아 독일인 민주포럼 | 73,621 | 88.69% | 1위 | |||
2008 | 루마니아 독일인 민주포럼 | 50,107 | 83.26% | 1위 | |||
2012 | 루마니아 독일인 민주포럼 | 53,281 | 77.89% | 1위 |
8.2. 대통령 선거
선거 | 소속 | 1차 투표 | 2차 투표 | ||||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
2014 | 기독교 자유 연합 | ||||||
2019 | 국민자유당 |
9. 역사적 평가 및 수용
클라우스 이오하니스는 루마니아의 정치 지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2000년부터 2014년까지 시비우 시장을 역임하며 도시의 인프라를 현대화하고 관광 산업을 활성화하여 시비우를 루마니아의 주요 관광지로 변모시킨 공로를 인정받는다. 특히 2007년 시비우가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통령 재임 초기에는 부패 척결과 사법 시스템 강화를 강조하며 루마니아의 법치주의를 공고히 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는 루마니아 역사상 최초의 소수 민족 출신 대통령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며, 친서방 외교 정책을 통해 루마니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재임 후반기는 상당한 비판과 논란에 휩싸였다. 2021년 루마니아 정치 위기 이후 그의 통치 스타일은 민주주의 후퇴, 비자유민주주의, 권위주의적 경향을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언론 자유 탄압 의혹과 낮은 지지율은 그의 리더십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2023년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 지수에서 루마니아가 유럽 연합 국가 중 민주주의 수준에서 최하위를 기록한 것은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민주적 가치가 훼손되었다는 비판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그는 2021년 정치 위기의 주된 책임자로 지목되었으며, 루마니아 구국 연합을 정부에서 배제하고 사회민주당이 다시 집권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 비난받았다. 과거 사회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던 그의 이중적인 태도 또한 많은 공인과 국민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2024년 대선 무효화 사태 이후 탄핵 위기에 직면하며 결국 2025년 2월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것은 그의 임기 말 정치적 위기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전반적으로 이오하니스는 루마니아의 정치적 안정과 서방 통합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민주적 원칙과 투명성 측면에서 상당한 비판을 받은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