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년 및 배경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스페인의 가톨릭 사제이자 오푸스 데이의 창설자로, 그의 유년기와 초기 교육은 그가 후에 오푸스 데이를 창설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1902년 1월 9일 스페인 우에스카 주의 작은 마을 바르바스트로에서 호세 에스크리바 이 코르잔과 마리아 데 로스 돌로레스 알바스 이 블락 부부의 여섯 자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호세 에스크리바는 운영하던 섬유 사업이 파산하여 1915년 가족과 함께 로그로뇨로 이주해야 했다. 로그로뇨에서 그의 아버지는 옷가게 점원으로 일했다. 에스크리바는 두 살 때 간질과 유사한 심각한 질병을 앓아 의사들이 곧 사망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성모 마리아상에 대한 신심이 깊은 토레시우다드로 그를 데려간 후 회복되었다고 전해진다. 어린 호세마리아는 맨발로 눈 위에 남겨진 수도사의 발자국을 보고 "무언가를 위해 선택되었다"는 첫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1.2. 교육 및 초기 사제직
그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 가톨릭 사제가 될 준비를 시작했다. 로그로뇨와 사라고사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동시에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 공부도 시작했다. 1924년 12월 20일 사라고사에서 부제로 서품되었고, 1925년 3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후 짧은 기간 동안 페르디게라의 시골 본당에서 사목하다가, 1927년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공부를 계속했다. 마드리드에서 그는 개인 교사로 일했으며, 왕립 산타 이사벨 수녀원과 성모 승천 작은 자매회가 운영하는 학교로 구성된 산타 이사벨 재단의 지도신부로 재직하며 도시 빈민, 병원 환자,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목했다.
2. 오푸스 데이 창설
오푸스 데이는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영적 비전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탄생했으며, 평신도와 사제가 일상생활의 성화를 추구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1. 창설 경위 및 초기 활동
1928년 10월 2일,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기도 피정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더욱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이 날 그는 가톨릭 신자들이 세속적인 일을 통해 자신을 성화할 수 있는 길인 오푸스 데이를 '보게 되었다'. 라틴어로 '하느님의 사업'을 뜻하는 오푸스 데이는 이처럼 1928년에 창설되었으며, 1950년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최종 인가를 받았다. 시성성의 선포문에 따르면, 그는 이 사명에 전적으로 헌신했으며, 초기부터 모든 사회 계층에서 광범위한 사도직을 수행했다. 특히 마드리드의 빈민가와 병원에서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사이에서 활동했다.
2.2. 스페인 내전 중 활동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에스크리바는 반성직자적인 스페인 공화파가 통제하는 마드리드를 피해 안도라와 프랑스를 거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스페인 국민파 본부가 있던 부르고스로 피신했다. 내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1939년에 끝나자 에스크리바는 마드리드로 돌아와 학업을 재개하여, 《라스 우엘가스 왕립 수도원 원장의 역사적 관할권》에 대한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3. 교황청 인가 및 확산
1943년 2월 14일, 에스크리바는 오푸스 데이와 긴밀히 연관된 성 십자가 사제회를 설립했다. 이 사제회를 통해 오푸스 데이 회원들이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교구 사제들도 자신의 교구장 주교에게 전적으로 종속된 상태에서 오푸스 데이의 영성과 수련 방법을 따르며 성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에스크리바는 1946년 로마로 거처를 옮겼다. 그를 '가경자'로 선포하는 교령에 따르면, 그는 "1947년과 1950년 6월 16일, 오푸스 데이를 교황청 직속 기관으로 승인받았다. 지칠 줄 모르는 사랑과 활동적인 희망으로 그는 전 세계 오푸스 데이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평신도들의 광범위한 동원... 복음화와 인간 복지 사업에 수많은 계획을 실행했으며,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 대한 성소를 어디에서나 증진시켰다... 무엇보다도 그는 오푸스 데이 회원들을 양성하는 일에 끊임없이 헌신했다."
3. 말년 및 국제적 확장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생애 후반기는 오푸스 데이의 세계적인 확장과 함께 그의 다양한 교회 직무 및 교육 기관 설립 활동으로 특징지어진다.
3.1. 오푸스 데이의 세계적 발전
어린 시절 그가 중병에서 회복된 장소인 토레시우다드에 대한 강한 신심을 바탕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오푸스 데이의 단장으로서 에스크리바는 토레시우드라 성당의 설계와 건축을 추진하고 감독했다. 새로운 성당은 에스크리바가 선종한 직후인 1975년 7월 7일에 봉헌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오푸스 데이의 영적 중심지이자 중요한 순례지로 남아 있다. 1975년 에스크리바가 선종할 무렵, 오푸스 데이 회원 수는 80개국에 약 6만 명에 달했다.
3.2. 교회 직무 및 학문적 기여
에스크리바는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몬시뇰로 임명되어 명예 고위 사제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1955년에는 로마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교황청 신학교와 대학교를 위한 성성과 교황청 교회법 공인 해석 위원회의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교황청 신학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보편적 성화 소명, 평신도의 역할, 그리고 미사가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초임을 재확인했다.
3.3. 교육 및 영적 사업
에스크리바는 1948년 로마에 오푸스 데이 남성 회원들을 위한 교육 센터인 성 십자가 로마 대학(Collegium Romanum Sanctae Crucis라틴어)을 설립했다. 1953년에는 여성 회원들을 위한 성 마리아 로마 대학(Collegium Romanum Sanctae Mariae라틴어)을 설립했는데, 이들 기관은 현재 교황청립 성십자가 대학교로 통합되었다. 또한 에스크리바는 팜플로나의 나바르 대학교와 페루의 피우라 대학교를 설립하여 오푸스 데이와 연계된 세속 교육기관으로 운영했다.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1975년 6월 26일 심장마비로 선종했으며, 향년 73세였다.
4. 사상 및 영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영적 사상은 평신도가 일상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성화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핵심으로 한다.
4.1. 보편적 성화 소명과 일상생활의 성화
에스크리바의 핵심 가르침은 '보편적 성화 소명'과 '일상생활의 성화'이다. 그는 가톨릭 신자들이 세속적인 일을 통해 자신을 성화할 수 있는 길인 오푸스 데이를 통해 "평범한 일을 통해 성화를 추구하라"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1928년 오푸스 데이 창설 이래 그는 평신도의 일상적인 직업 활동과 가정생활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성화의 길이며, 세상의 한가운데서 일하고 봉사함으로써 성덕을 쌓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평신도의 역할과 보편적 성화 소명이 강조되면서 교회 공식 가르침으로 재확인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시성식 강론에서 에스크리바를 "일상생활의 성인"이라 칭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적인 노동을 통해 하느님과 결합할 수 있다는 그의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하여 영적인 빛의 끊임없는 원천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4.2. 개인적 실천 및 신심
에스크리바의 영성은 깊은 기도 생활, 성모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신심, 그리고 육체적 고행 실천을 포함한다.
- 기도
에스크리바는 기도를 세상을 구원하는 비범한 '무기'로 여겼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에스크리바의 "오푸스 데이"라는 이름 설명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에스크리바는 자신이 무언가를 설립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일이 아니며, 주님께서 자신을 단순히 사용하고 계실 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것은 그의 일이 아니라 '오푸스 데이'(하느님의 사업)였다. 이는 그가 창조주와 끊임없는 대화 속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에스크리바를 기도의 달인으로 묘사하며, "사도직의 결실은 무엇보다도 기도와 강렬하고 지속적인 성사 생활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짧은 다섯 가지 기도나 열망은 그의 삶 전체를 보여준다. 16세에 이미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꼈을 때 "주님, 제가 보게 하소서!"(Domine, ut videam!라틴어)와 "성모님, 그렇게 되소서!"(Domina, ut sit!라틴어)를 바치기 시작했다. 젊은 사제 시절에는 "베드로와 함께 모두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Omnes cum Petro ad Iesum per Mariam!라틴어)가 그의 글에 자주 등장하며, 영혼을 구원하려는 그의 열정이 교회에 대한 굳건한 충실함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뜨거운 신심과 함께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기를 원합니다!"(Regnare Christum volumus!라틴어)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모든 이에게 전파하려는 그의 끊임없는 사목적 관심을 잘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Deo omnis gloria!라틴어)는 하느님께만 봉사하려는 그의 삶의 목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가톨릭 신학자들이 에스크리바의 영성에 감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스위스의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는 1963년 그의 저서 《길》이 종교 단체를 유지하기에는 "불충분한 영성"을 제공하며, "선진 보이 스카우트를 위한 작은 스페인어 매뉴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폰 발타자르는 에스크리바가 묘사한 기도 방식이 "거의 전적으로 자신, 즉 위대하고 강하며 이교도적인 미덕을 갖춘 사도적이고 나폴레옹적인 자기 자신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고 지적했다.
- 전례
에스크리바는 미사를 "그리스도인 내면생활의 원천이자 정점"으로 보았는데, 이 용어는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사용되었다. 그는 미사 거행에 관한 교회 당국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전례 분야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규정이 오푸스 데이 내에서 적용되도록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 그의 기도가 전통 전례와 많이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스크리바는 전례 개혁 전환을 어려워했으며, 새로운 의식에 관해 알바로 델 포르티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옛 전례, 특히 성반에 입맞춤하는 등의 일부 행위들을 그리워했지만, 교회의 규범에 대한 순종 정신으로 그를 위한 어떠한 예외도 요청하지 말라고 회원들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안니발레 부그니니, 전례 헌장 시행을 위한 평의회 비서가 에스크리바의 어려움을 알게 되자, 에스크리바에게 옛 전례를 사용하여 미사를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에스크리바는 옛 전례를 거행할 때 오직 한 명의 복사만이 배석했다.
1981년 오푸스 데이를 떠나 웨스트민스터 대교구의 사제가 된 블라디미르 펠츠만은 에스크리바의 개인 비서로 일했는데, 그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에스크리바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에 너무 실망하여 1967년이나 1968년에 자신과 알바로 델 포르티요를 데리고 "오푸스 데이를 그리스 정교회에 편입시킬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리스에 갔다"고 주장했다. 에스크리바는 당시 가톨릭교회가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고, 정교회가 자신과 오푸스 데이의 "충실한 잔여물"의 구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펠츠만은 에스크리바가 이러한 계획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하여 곧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푸스 데이 회원인 플라비오 카푸치와 오푸스 데이 정보실은 에스크리바가 가톨릭교회를 떠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부인했다. 오푸스 데이 정보실은 에스크리바의 1966년 그리스 방문은 그 나라에 오푸스 데이 조직을 설립할 타당성을 분석하기 위함이었고, 방문 전에 교황 바오로 6세와 안젤로 델아쿠아에게 보고했으며, 심지어 선물로 이콘을 가져왔다고 밝혔다.
- 육체적 고행
에스크리바는 "기쁨은 십자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가르쳤으며, "고통은 사랑의 시금석"이라고 여겼는데, 이러한 신념은 그의 삶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개인적으로 육체적 고행을 실천했으며, 오푸스 데이의 다른 회원들에게도 이를 권장했다. 특히 자발적인 고행 실천에 대한 그의 열정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비평가들은 에스크리바가 격렬하게 채찍질을 하여 그의 수도실 벽에 피가 튀었다는 증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행을 통한 속죄와 고통이 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은 가톨릭 교리와 실천에서 광범위한 선례를 가진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에스크리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스페인 내전 동안 그는 반종교적 박해의 분노를 직접 경험했으며, 풍부한 기도와 고행으로 양념된 끊임없는 사제 활동에서 매일 영웅적인 증거를 보여주었다. 머지않아 많은 이들이 그를 성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주교들이 그를 초청하여 사제들에게 피정을 설교하게 했으며, 이로써 스페인의 그리스도인 생활 쇄신에 크게 기여했다. 많은 수도회와 신심회 또한 그의 사목적 봉사를 요청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그가 공개적인 공격을 받도록 허락하셨다. 그는 항상 용서로 응답했으며, 심지어 비난하는 이들을 은인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하늘로부터 오는 축복의 원천이어서 하느님의 종의 사도직은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었다."
- 성모 마리아 신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10월 6일 삼종기도 후 강론에서 "성모님에 대한 사랑은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삶의 끊임없는 특징이었고, 그가 그의 영적 자녀들에게 남긴 유산의 탁월한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교황은 또한 "성 호세마리아는 《성모 성월의 묵주 기도》라는 아름다운 소책자를 썼는데, 이는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영적인 유아적 태도를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에스크리바는 10대 초반부터 이미 묵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사제로서 그는 보통 강론과 개인 기도를 복되신 동정녀께 대화하는 것으로 마쳤다. 그는 오푸스 데이 사무실의 모든 방에 동정녀 마리아의 성상을 두도록 지시했다. 그는 영적 자녀들에게 방에 들어갈 때마다 이 성상들에게 인사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고 그분께 마리아를 통해 돌아가자"는 마리아 사도직을 장려했다. 그는 과달루페의 성모상이 후안 디에고에게 장미를 주는 그림을 보며 "저렇게 죽고 싶다"고 말했다. 1975년 6월 26일, 과달루페의 성모 그림이 걸려 있던 자신의 작업실에 들어선 후 그는 바닥에 쓰러져 선종했다.
5. 인품 및 대인 관계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인품과 대인 관계는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논란을 포함하며, 그의 가족, 정치적 견해, 그리고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났다.
5.1. 전반적 기질 및 알려진 특징
에스크리바를 가장 잘 알았던 사람 중 한 명은 오푸스 데이가 시작된 마드리드의 주교 레오폴도 에이호 이 가라이였다. 에스크리바는 자주 그를 방문하여 보고했고, 둘은 매우 굳건한 우정을 쌓았다. 1943년 로마에 보낸 보고서에서 주교는 "그의 성격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의 에너지와 조직 및 통치 능력이다; 눈에 띄지 않게 지내는 능력도 있다. 그는 교회 계층에 가장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 그의 사제직의 매우 특별한 특징 중 하나는 그가 말과 글,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거룩한 어머니 교회와 로마 교황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에이호 이 가라이 주교는 1941년 톨레도의 예수회 관구장 카를로스 고메스 마르티노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에스크리바 신부는 사도적 사업을 위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모범적인 사제이며, 겸손하고 신중하며 일에 헌신적이고 주교에게 순종적이며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고 매우 견고한 영적, 교리적 형성을 갖추고 있다." 에이호 이 가라이는 스페인 팔랑헤의 한 장교에게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신부가 비밀스러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는 아이처럼 솔직하고 개방적이다!"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신경학자이며 "로고테라피"의 창시자이자 나치 강제 수용소 생존자인 빅토르 프랭클은 1970년 로마에서 에스크리바를 만났고, 후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상쾌한 평온함이 전체 대화를 따뜻하게 만들었다"고 썼으며, 그의 생각이 "믿을 수 없는 리듬"으로 흘러갔고, 마침내 그가 대화하는 사람들과 "즉각적인 접촉"을 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고 썼다. 프랭클은 계속해서 "에스크리바는 분명히 현재 순간에 완전히 살았고, 그 순간에 완전히 개방되었으며, 자신을 전적으로 그 순간에 바쳤다"고 말했다。
에스크리바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였던 알바로 델 포르티요에 따르면, 에스크리바에게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기본적인 자질이 있었다: 하느님께 대한 헌신과 하느님을 위한 모든 영혼에 대한 헌신; 하느님의 뜻에 관대하게 응답하려는 끊임없는 준비"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에스크리바의 성덕의 "비범함"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는 가장 많은 은사(초자연적 선물)를 받았고 그에 가장 관대하게 응답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존 L. 앨런 주니어는 2005년 오푸스 데이 창설자에 대한 영화들을 본 후, "에스크리바를 '살아있는' 상태로 볼 때 얻는 첫인상은 그의 활기, 그의 뛰어난 유머 감각이다. 그는 농담을 하고, 표정을 짓고, 무대를 돌아다니며, 대개 군중 속 사람들의 질문에 즉흥적으로 답하며 관객들을 폭소하게 만든다"고 썼다.
그러나 오푸스 데이의 초기 회원 중 한 명이자 에스크리바와 거의 20년간 교류하다가 관계를 끝낸 스페인 건축가 미겔 피삭과 같은 비평가들은 에스크리바를 경건하지만 허영심 많고, 비밀스럽고, 야심 찬 사람으로 묘사하며, 종종 폭력적인 분노를 사적으로 드러내고 타인이나 가난한 이들에게는 거의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영국 언론인 자일스 트렘릿에 따르면, "에스크리바의 전기들은 성인을 사랑스럽고 자상하며 카리스마 있는 인물 또는 비열하고 조작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인물로 상충되는 비전을 제시했다." 프랑스 역사가 에두아르 드 블레는 에스크리바를 "신비주의와 야심의 혼합"이라고 언급했다.
5.2. 가족 및 혈통 관계
오푸스 데이 창설자 에스크리바는 평생 동안 자신의 이름을 여러 차례 변경했다. 바르바스트로 대성당의 교회 기록에는 그가 태어난 지 나흘 만에 호세 마리아 훌리안 마리아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성은 에스크리바(Escriba)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학창 시절부터 호세 에스크리바는 "b 대신 v를 사용한 다소 더 고상한 철자"를 채택했다. 그의 첫 미사 기념물에도 그의 이름은 에스크리바(Escrivá)로 표기되어 있다. 루이스 카란델과 전 예수회 사제 마이클 월시 같은 비평가들은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연결하는 접속사 'y'("and")를 사용했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스페인 귀족 가문과 관련이 있지만, 1870년부터 스페인의 법적 이름 표기 형식이었다.
1940년 6월 16일, 스페인 보통 관보(Boletín Oficial del Estado스페인어)에는 에스크리바가 정부에 자신의 "첫 번째 성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로 쓰도록" 변경 허가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이 청원을 "에스크리바라는 이름이 동해안과 카탈루냐에서 흔하여 해롭고 성가신 혼란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정당화했다. 1943년 6월 20일, 41세였던 그는 바르바스트로 대성당의 등기부와 호세 마리아의 세례 증명서에 "에스크리바 성이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로 변경되었다"는 기록을 추가했다. 발라게르는 에스크리바의 부계 가족이 유래한 카탈루냐의 마을 이름이다.
오푸스 데이의 초기 회원 중 한 명이자 수년간 친구였던 건축가 미겔 피삭은 에스크리바가 아버지 회사의 파산으로 인해 아버지의 성을 가지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며, "귀족에 대한 큰 애착"을 가졌고, 마드리드 산타 이사벨 재단의 지도신부로 재직할 때 귀족 방문객들이 그의 이름이 에스크리바라는 것을 알고 그가 귀족인 에스크리바 데 로마니 가문에 속하는지 물어보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그를 무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작가이자 오푸스 데이 회원이며 에스크리바의 3권짜리 공식 전기를 쓴 안드레스 바스케스 데 프라다에 따르면, 이러한 행동은 야심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가족에 대한 공정성과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한다. 스페인어에서는 'b'와 'v'가 같은 방식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관료와 성직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에스크리바 가문의 이름을 공식 문서에 잘못 기재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 주된 문제였다고 한다. 에스크리바의 옹호자들은 또한 "데 발라게르"의 추가는 같은 성을 가졌지만 다른 지역에서 유래하여 다른 역사를 가진 이들과 자신을 구별할 필요성을 느낀 많은 스페인 가문들이 채택한 관행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에스크리바의 남동생 산티아고는 형이 "가족 구성원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잘 돌보았다고 말했다. 그들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에스크리바는 어머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이 항상 우리를 돌볼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 약속을 지켰다고 산티아고는 말했다. 에스크리바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남동생과 대화하고 산책할 시간을 내어 그에게 아버지처럼 행동했다. 가족이 마드리드로 이주했을 때, 그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산티아고는 "그의 이 조언에 대한 순종 덕분에, 그는 법학 강의를 통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그는 법률적 사고방식을 습득했다... 이는 훗날 오푸스 데이를 운영하는 데 매우 필요했다"고 말했다. 에스크리바는 또한 자신의 이름도 변경했다. '호세 마리아'에서 원래의 '호세마리아'로 바꿨다. 전기 작가들은 1935년경 그가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에 대한 그의 단일한 사랑이 마찬가지로 불가분했기 때문에 그의 두 이름을 합쳤다"고 말한다.
5.3. 정치 및 국가관
많은 동시대 인물들은 에스크리바가 민족주의보다는 애국심에 대해 설교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라. 애국심은 그리스도교적 덕목이다. 그러나 애국심이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민족, 다른 나라를 무관심, 경멸,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정의 없이 바라보게 하는 민족주의가 된다면, 그것은 죄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다른 나라들의 고귀한 열망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프랑스의 많은 영광은 나의 영광이다! 마찬가지로 독일인, 이탈리아인, 영국인... 그리고 아메리카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들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많은 것들이 나에게도 자랑의 원천이다. 가톨릭: 넓은 마음, 넓은 정신."
- 권위주의 정권 연관 의혹
비평가들은 에스크리바 개인뿐만 아니라 오푸스 데이 조직이 원래 "국민 가톨릭주의" 이념과 관련이 있었으며, 특히 스페인 내전과 그 직후 시기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권위주의 정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고 주장한다. 카탈루냐 사회학자 조안 에스트루치는 에스크리바가 "모든 시대의 영성 고전"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그 시대의 아이"이며, "특정 국가, 특정 시대, 특정 교회의 산물"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프랑코 장군의 스페인과 교황 비오 10세의 교회이다. 에스트루치는 에스크리바가 주장했듯이 오푸스 데이가 "스스로를 현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면, 오늘날 오푸스 데이는 "준군사적, 친파시즘적, 반모더니즘, 통합주의적(반동적) 조직"이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이는 가톨릭교회, 프랑코 정권, 그리고 에스크리바 몬시뇰 자신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에스트루치는 예를 들어, 에스크리바의 《길》 초판이 1939년 부르고스에서 완성되고 발렌시아에서 출판되었을 때, 내전에서 프랑코군의 군사적 승리를 의미하는 "승리의 해"(Año de la Victoria스페인어)라는 날짜와, 프랑코 지지 주교인 하비에르 라우수리카의 서문이 실렸는데, 이 서문은 독자에게 "항상 경계하고 주의를 기울이라, 왜냐하면 적은 잠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격언들을 당신의 삶으로 삼는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모방자이자 흠 없는 신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과 같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스페인은 옛 성인, 현자, 영웅들의 위대함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경고로 끝났다고 지적한다. 에스크리바는 1946년 4월 프랑코의 공식 거주지인 엘 파르도 왕궁에서 일주일간의 영적 피정 기간 동안 프랑코 장군과 그의 가족에게 직접 설교했다.
- 비판에 대한 반론
비토리오 메소리는 에스크리바와 프랑코주의 사이의 관계가 에스크리바와 오푸스 데이에 반대하여 퍼뜨려진 흑색선전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존 앨런은 자신의 연구에 따르면 에스크리바가 "친프랑코"라고 할 수도 없고(다른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프랑코를 공개적으로 칭찬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음), "반프랑코"라고 할 수도 없다고('친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음) 말한다. 앨런에 따르면 에스크리바가 프랑코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발언은 없었다. 에스크리바의 지지자들과 일부 역사가들은 정치에서 편파성을 피하려는 그의 개인적인 노력을 강조한다. 독일 역사가 페터 베르글라르 교수는 프랑코의 팔랑헤주의자들이 에스크리바를 "국제주의, 반스페인주의, 프리메이슨주의"로 의심했으며, "프랑코 정권의 첫 10년 동안 오푸스 데이와 에스크리바는 적이 아닌 새로운 스페인 국가의 지지자들에 의해 끈질기게, 거의 광신적으로 공격받았다. 에스크리바는 심지어 '프리메이슨 척결 재판소'에 보고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5.4. 수상 및 명예
에스크리바는 여러 상을 받았다.
- 알폰소 10세 대십자 훈장 (1951)
- 성 라이문도 페냐포르트 황금 십자 훈장 (1954)
- 이사벨라 카톨릭 훈장 대십자 (1956)
- 카를로스 3세 훈장 대십자 (1960)
- 사라고사 대학교 명예 박사 (스페인, 1960)
- 바르바스트로 시의 황금 메달 (1975)
일부 전기 작가들은 에스크리바가 이러한 상들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수여되었고, 그는 상을 주는 이들에게 자선심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러한 상들에 조금도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언론인 루이스 카란델은 오푸스 데이 회원들이 카를로스 3세 대십자 훈장의 휘장을 금으로 만들도록 돈을 지불했지만, 에스크리바가 화를 내며 이를 거부하고 대신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을 요구했다는 증언을 전한다. 카란델은 이 사건이 에스크리바의 삶에서 사회적 위신과 부의 상징에 대한 야심의 더 큰 패턴의 일부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호적인 전기 작가들은 에스크리바가 물질적인 것은 선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느님께만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그는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이 가장 많이 가졌다"고 선언했으며, 그의 사망 후 그의 소유물을 모으는 데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6. 논란 및 비판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를 둘러싼 주요 비판과 논란은 그의 영성의 깊이, 신학적 사고뿐만 아니라 비밀주의와 엘리트주의(대부분의 오푸스 데이 신자들이 교육, 소득, 사회적 지위 면에서 중하층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성격 문제, 사회적 지위 및 세속적 사치에 대한 야심 등 여러 측면에서 제기되었다. 특히 가톨릭교회의 그의 시성과 관련하여 비판이 집중되었다.
6.1. 권위주의 정권 지지 의혹
에스크리바에 대한 가장 논란이 많은 비난 중 하나는 그와 오푸스 데이가 극우 정권, 특히 스페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독재를 지지하는 데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1957년 이후, 여러 오푸스 데이 회원들이 프랑코 정부에서 장관으로 재직했다. 특히 1960년대 스페인 경제 기적과 가장 관련이 깊은 '기술 관료'들은 오푸스 데이 회원이었다. 여기에는 알베르토 울라스테레스, 마리아노 나바로 루비오, 그레고리오 로페스-브라보, 라우레아노 로페스 로도, 후안 호세 에스피노사, 파우스티노 가르시아-몬코 등이 포함된다. 이들 '기술 관료'의 대부분은 프랑코가 나이가 들고 허약해지면서 스페인 정부의 일상적인 통제권을 점점 더 행사하게 된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제독의 후원 아래 정부에 진입했다.
언론인 루이스 카란델은 1957년 울라스테레스와 나바로 루비오가 처음 정부에 임명되었을 때 에스크리바가 "그들이 우리를 장관으로 만들었다!"고 즐겁게 외쳤다고 주장했지만, 오푸스 데이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1958년 5월 23일, 에스크리바는 프랑코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어떤 정치 활동과도 무관하지만, 국가 원수의 권위 있는 목소리가 '스페인 민족은 국가적 양심의 분리할 수 없는 신앙이자 그 입법의 영감이 될 거룩한 가톨릭교회의 유일하고 참된 교리에 따라 하느님의 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명예로운 표식으로 여긴다'고 선포하는 것에 사제이자 스페인인으로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가톨릭 전통에 대한 충실함 속에서 항상 정부 활동의 성공에 대한 최선의 보장, 국가 공동체 내에서의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의 확실성, 그리고 권위 있는 직책을 맡은 이들에게 대한 신성한 축복이 발견될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각하에게 모든 종류의 행복을 베푸시고, 맡겨진 중대한 임무를 수행할 풍성한 은총을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1963년, 스위스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는 에스크리바의 영성을 통렬히 비판하며, 에스크리바의 종교 접근 방식을 "통합주의"의 한 형태로 특징지었다. 그는 "오푸스 데이 회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그 단체의 기반이 프랑코주의에 의해 형성되었음이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 해에 발표된 또 다른 에세이에서 폰 발타자르는 오푸스 데이를 "교회 내 통합주의적 권력 집중"으로 특징지으며, 통합주의의 주요 목표는 "세속적 수단을 통해 영적인 것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79년, 폰 발타자르는 오푸스 데이를 비난하는 한 신문 기사에서 자신의 이전 통합주의 비난을 인용한 것에 대해 거리를 두었다. 그는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에도 보낸 오푸스 데이 관구에 대한 개인 서한에서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하여 오늘날의 오푸스 데이에 대해 정확한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 반면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단체에 대한 많은 비판, 심지어 당신의 신문이 오푸스 데이 회원들이 제공하는 종교 교육에 대해 제기한 비판도 내게는 거짓이며 반성직자주의적으로 보인다"고 썼다. 폰 발타자르는 1984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도 에스크리바의 영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유지했지만, 오푸스 데이 조직 자체에 대한 비판은 갱신하지 않았다. 1988년, 폰 발타자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나, 다음 교황 선출 콘클라베에서 그 직위에 오르기 전에 선종했다.
"통합주의"라는 비난에 대해 에스크리바는 "오푸스 데이는 좌파도 우파도 중도도 아니다"라며, "종교적 자유에 관해서는 창립 이래 오푸스 데이가 어떤 종류의 차별도 실행한 적이 없다"고 선언했다. 오푸스 데이 관계자들은 개별 회원들이 어떤 정치적 성향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회원 중에는 프랑코 정권에 의해 망명해야 했던 작가 라파엘 칼보 세레르와 민주화 이행 후 첫 스페인 상원 의장이 된 언론인 안토니오 폰탄과 같이 1970년대 스페인에서 군주제 정치 야당의 중요한 인물들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존 앨런은 에스크리바가 반프랑코주의자도 친프랑코주의자도 아니었다고 썼다. 그러나 미겔 피삭과 데이미언 톰슨과 같은 오푸스 데이 비평가들은 이 단체가 "메시지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 증진"을 항상 추구했으며, 일관된 정치적 이념 없이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이들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다고 주장했다.
라틴 아메리카 정치에서 오푸스 데이의 개입 의혹도 논란의 주제였다. 미국 언론인 페니 레르누에 따르면, 1966년 아르헨티나 군사 쿠데타는 그 지도자인 후안 카를로스 온가니아 장군이 오푸스 데이가 후원한 영적 피정에 참석한 직후 일어났다. 1974년 라틴 아메리카 방문 중 에스크리바는 칠레를 방문했는데, 이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선출된 마르크스주의 정권을 축출하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 휘하의 우익 군사 독재 정권을 세운 칠레 쿠데타 9개월 후였다. 에스크리바는 독감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칠레 군사정부와의 개인적인 면담 초대를 거절했지만, 군사정부 구성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위대한 나라, 특히 마르크스주의 이단의 재앙에 위협받았을 때, 제가 얼마나 기도하고, 기도해 왔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기도하도록 했는지 알려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비평가들은 오푸스 데이 회원들이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지했으며, 1980년대 칠레의 "기적"에서 1960년대 스페인의 "기적" 당시 '기술 관료'들과 유사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요 우익 정치인 중에서는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공직을 맡지 않은 호아킨 라빈만이 명확히 오푸스 데이 회원으로 확인되었다. 또 다른 오푸스 데이 회원인 호르헤 사바그 비야로보스는 피노체트 정권에 반대했던 중도좌파 정당 소속이다. 독일 역사가 페터 베르글라르는 오푸스 데이를 파시스트 정권과 연결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중상"이라고 썼다. 언론인 노암 프리드랜더는 피노체트 정권과의 오푸스 데이 연루 의혹은 "입증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에스크리바의 여러 협력자들은 그가 독재를 실제로 경멸했다고 밝혔다. 에스크리바의 칠레 방문과 이후 오푸스 데이의 확산은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프랑코주의 스페인의 칠레 영향의 한 줄기로 식별되기도 한다.
6.2. 귀족 작위 관련 논란
에스크리바를 둘러싼 또 다른 논란은 그가 1968년 스페인 법무부에 페랄타 후작 작위의 복원을 요청하여 받았다는 사실이다. 공식 《왕국의 위대함과 칭호 안내》(Guía de grandezas y títulos del reino스페인어)에 따르면, 후작 칭호는 원래 1718년 카를 6세 (신성 로마 황제)가 나폴리 왕국의 국무, 사법, 전쟁 장관이었던 토마스 데 페랄타에게 수여한 것이다. 1715년까지 카를 대공은 "카를 3세"로서 스페인 왕위 계승권자였으며, 1711년부터 1740년까지 신성 로마 황제이자 나폴리 국왕으로 통치했다.
에스크리바가 귀족 작위를 성공적으로 청원한 것은 가톨릭 사제에게 어울리는 겸손함과는 상반되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같은 페랄타 후작 작위가 1883년 교황 레오 13세와 스페인 알폰소 12세 국왕에 의해 에스크리바와 부계 혈통 관계가 없는 코스타리카 외교관 마누엘 마리아 데 페랄타 이 알파로(1847-1930)에게 복원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복원 명령서에는 원래 작위가 1738년(1718년이 아님)에 오스트리아의 카를이 스페인 왕위 계승권자가 아닌 신성 로마 황제로서 후안 토마스 데 페랄타 이 프랑코 데 메디나에게 수여되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1884년에 벨기에 백작부인 제한 드 클레름보와 결혼했던 페랄타 대사는 1930년에 자녀 없이 사망했다. 코스타리카에 있는 그의 친척 중 누구도 후작 작위의 상속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그들 중 한 명은 에스크리바의 작위 주장을 반박하는 것으로 보이는 광범위한 계보학적 연구를 발표했다.
에스크리바는 페랄타 후작 작위를 공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1972년에 자신의 동생 산티아고에게 양도했다. 산티아고는 작위 복원 요청에 대해 "그 결정은 영웅적이었다. 왜냐하면 [호세마리아는] 그 결과 비난받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호세마리아는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적절한 시간이 흐른 후, 작위를 사용하지 않고 (사실 그는 결코 사용할 의도가 없었다), 그는 그 작위를 나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했다. 몬시뇰 에스크리바가 가족에게 호의를 베풀고 동생에게 양도할 의도로 원래 작위 복원을 요청했다는 주장은 1968년에 산티아고가 다른 귀족 작위인 산 펠리페 남작 작위의 복원을 자신을 위해 요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설득력이 떨어진다. 역사가 리카르도 데 라 시에르바와 건축가 미겔 피삭에 따르면, 에스크리바의 작위 요청은 귀족 출신이어야 하는 주요 회원 자격을 요구하는 가톨릭 종교 기사단인 몰타 기사단을 장악하려는 실패한 시도의 일부였을 수 있으며, 그의 오푸스 데이 부관인 알바로 델 포르티요는 이미 몰타 기사단 소속이었다. 데 라 시에르바에 따르면, "에스크리바 몬시뇰의 후작 작위에 대한 열망은 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특이성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용서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 작위가 위조에 기반했다는 것은 극도로 슬프고 심지어 극도로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6.3. 다른 가톨릭 지도자들과의 관계
교회 역사가이자 로마 크라레티아눔 대학교 교수인 지안카를로 로카 신부에 따르면, 에스크리바는 주교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추구했지만,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두 번 거절당했다. 첫 번째는 1945년, 두 번째는 1950년(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비토리아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도록 로비했을 때)이었다. 로카에 따르면, 두 경우 모두 교황청 관리들은 오푸스 데이의 조직과 에스크리바의 심리적 프로필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오푸스 데이의 전 회원인 사회학자 알베르토 몬카다는 에스크리바와 다른 가톨릭 교회 고위 관리들 간의 긴장된 관계에 대한 다양한 구술 증언을 수집하고 발표했다. 특히 몬카다는 당시 로마 오푸스 데이의 사무총장이었던 안토니오 페레스-테네사가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선출에 대해 에스크리바가 강렬한 불만을 표명했으며, 나중에 사적으로 교황의 영혼 구원에 대해 의심을 표명했다고 증언한다. 로마에서 에스크리바와 함께 일했던 마리아 델 카르멘 타피아에 따르면, 오푸스 데이의 창설자는 교황 요한 23세나 교황 바오로 6세를 "존경하지 않았고" 자신의 오푸스 데이 조직이 "교회보다 거룩함에서 우월하다"고 믿었다.
당시 교황청 사도 죄벌원의 섭정이었던 루이지 데 마지스트리스는 1989년 에스크리바의 시복 절차 중단 요청에 대한 비밀 투표에서 에스크리바와 예수회 사이에 "심각한 긴장이 있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라고 썼다. 데 마지스트리스는 이전에 에스크리바의 고해성사 신부였던 예수회 사제 발렌티노 산체스 신부가 예수회가 오푸스 데이의 제안된 헌법에 반대하면서 에스크리바와 거리를 두었다는 점을 암시했다. 언론인 루이스 카란델은 로마에서 에스크리바가 예수회 총장인 스페인 출신 페드로 아루페 신부와 거리를 두었으며, 아루페 신부가 한때 스페인 주재 교황대사 안토니오 리베리와 에스크리바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심스럽다고 농담했다고 말했다.
알베르토 몬카다에 따르면, 에스크리바가 로마에서 보낸 수년간은 오푸스 데이를 교구장 주교와 바티칸 교황청의 권위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캠페인에 주로 헌신했으며, 이는 에스크리바 사후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오푸스 데이가 자체 성직자와 교황에게만 종속되는 개인 교황 대리구로 설립되면서 마침내 달성되었다。 현재 오푸스 데이는 가톨릭교회에서 유일한 개인 교황 대리구이지만, 이 법적 지위는 군종 대리구나 개인 교황 대리구와 같은 다른 종류의 교회 위계 조직과 유사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목표인 신자들의 실제 상황에 더 적합한 사목적 돌봄을 제공하기 위한 결과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오푸스 데이의 사역은 교구의 사역을 보완하며, 어떤 경우에는 지역 주교의 요청에 따라 오푸스 데이 사제들이 본당의 사목적 돌봄을 맡는 등 더 직접적인 협력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에스크리바는 "오푸스 데이와 그 각 회원의 유일한 야망, 유일한 열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정한 소명 안에서 교회가 봉사받기를 원하는 대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라고 썼을 때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개인 교황 대리구 소속이라 해도 가톨릭 신자는 지역 교구장 주교의 권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7. 시복 시성 과정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시복 및 시성 과정은 많은 논란을 동반했지만, 그의 기적적인 치유 사례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지지 속에서 진행되었다.
7.1. 공식 절차 및 기적
1975년 6월 26일 에스크리바가 선종한 후, 그의 시복 및 시성 청원을 위한 신청서에는 전 세계인들의 수많은 증언과 청원 서한이 접수되었다. 에스크리바 선종 5주년을 맞아 신청서가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되어 시복 시성 절차 개시를 요청했다. 전 세계 주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전례 없는 수의 주교들이 에스크리바의 시복을 청원했다.
그의 시복 절차는 1981년 2월 19일 로마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1976년 지방종이라는 희귀병을 앓던 콘셉시온 보울론 루비오 수녀의 기적적인 치유 덕분이었다. 루비오 수녀의 가족은 에스크리바에게 치유를 간청했으며, 이 기적은 1991년 7월 6일 시성성 의료 자문단이 만장일치로 인정한 바 있다. 1990년 4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에스크리바가 그리스도교적 덕행을 "영웅적 수준"으로 지녔다고 선언하며 그를 가경자로 선포했고, 1992년 5월 17일 그를 복자로 선포했다.
1993년 3월 15일, 시성성 신청서에 새로운 기적 치유 사례가 접수되었다. 1992년 11월, 불치병인 만성 방사선 피부염으로 고통받던 마누엘 네바도 레이 박사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에스크리바의 전구를 통해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이 기적은 시성성에 의해 유효하다고 판정되었고, 2001년 12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승인을 받아 에스크리바의 시성이 가능하게 되었다. 오푸스 데이와 그 활동에 대해 종종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명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10월 6일 에스크리바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시성 미사에는 전 세계에서 온 42명의 추기경과 470명의 주교, 많은 수도회와 종교 공동체의 총장, 그리고 다양한 가톨릭 단체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시성 행사 기간 동안 교회 관계자들은 창설자의 메시지 유효성을 언급하며, 요한 바오로 2세가 에스크리바의 덕행에 대해 발표한 교령 《그리스도인 신자들 전체》(Christifideles omnes라틴어)를 반복했다. 이 교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적인 일을 통해 하느님과 연합하도록 초대함으로써,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고 세상이 지속되는 한 그들의 몫이 될 이 메시지의 적시성은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관계없이 영적 빛의 무궁무진한 원천으로 지속될 운명이다"라고 밝혔다.
7.2. 과정상의 비판
에스크리바의 시성 과정의 신속성에 대해 여러 비평가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에스크리바의 시복을 앞둔 1992년, 언론인 윌리엄 D. 몬탈바노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현대에서 가장 논쟁적인 시복"이라고 썼다. 비평가들은 이 과정이 불규칙성으로 얼룩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에스크리바 시성 재판을 주재했던 아우구스티노회 사제 라파엘 페레스를 시성 분야의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언급한다. 페레스는 에스크리바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며, 시성 청원자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았고", 1983년 절차가 간소화되어 "우리와 같은 세상에서 살았던 모범적인 인물"을 제시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과정이 빨랐다고 밝혔다. 시성 청원인 플라비오 카푸치도 바티칸에 제출된 6,000통의 청원 서한이 "진지함"을 보여주었다고 보고했다. 테레사 수녀는 에스크리바보다 훨씬 빠르게, 선종 6년 만에 시복되었다(에스크리바는 17년 만에 시복).
언론인 케네스 L. 우드워드에 따르면, 6,000쪽에 달하는 '포지시오' (성덕 후보자의 삶과 업적에 대한 공식 문서)는 기밀로 선언되었으나, 에스크리바의 시복 후 1992년 언론에 유출되었다. 우드워드는 2,000쪽의 증언 중 약 40%가 알바로 델 포르티요 또는 하비에르 에체바리아 로드리게스의 것이며, 이들은 오푸스 데이의 수장으로서 조직의 창설자가 성인으로 인정받는 데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인물들이라고 주장했다. '포지시오'에 인용된 유일한 비판적 증언은 오푸스 데이의 전 회원이었던 스페인 사회학자 알베르토 몬카다의 것이었는데, 그는 에스크리바와 개인적인 접촉이 거의 없었고 가톨릭교회를 완전히 떠났기 때문에 교회 당국이 그의 증언을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이 비판적 증언은 겨우 두 쪽을 차지했다.
시성 과정 비판자들은 또한 에스크리바의 사후 중재를 통해 이루어진 두 건의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치유"를 인증하는 데 관여한 의사들 중 일부, 예를 들어 심장 외과의사인 라파엘로 코르테시니 박사가 오푸스 데이 회원이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했다. 바티칸은 시성성의 의료 자문단이 알멘드랄레호 마을의 시골 의사였던 마누엘 네바도 레이 박사의 만성 방사선 피부염 3기 및 비가역 단계의 암성 상태 치유가 "매우 빠르고 완전하며 지속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만장일치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6개월 후, 신학 자문단도 이 치유를 에스크리바에게 만장일치로 돌렸다고 바티칸은 덧붙였다. 에스크리바의 시성 연도에, 오푸스 데이 주교는 시성 청원서가 에스크리바의 중재에 기인한 설명할 수 없는 의료적 은총 48건과 일반적인 은총 100,000건을 수집했다고 보고했다.
에스크리바의 성격에 비판적이며 시복 및 시성 과정에서 청취를 거부당했다고 주장하는 오푸스 데이 전 회원들에는 미겔 피삭(초기 회원 중 한 명이자 약 20년 동안 에스크리바와 교류했던 스페인의 유명 건축가), 블라디미르 펠츠만(체코 태생의 영국인 공학자이자 가톨릭 사제로 에스크리바의 개인 비서였음), 마리아 델 카르멘 타피아(로마 오푸스 데이 중앙 사무실에서 에스크리바와 일했으며 인쇄소를 지휘했음), 카를로스 알바스(에스크리바의 사촌 조카였던 스페인 변호사), 마리아 안구스티아스 모레노(에스크리바 생전에 오푸스 데이 여성 부문 책임자였음), 그리고 존 로슈(1959년부터 1973년까지 오푸스 데이 회원이자 케냐에서 학교를 운영했던 아일랜드 물리학자이자 과학 역사가) 등이 있다. 에스크리바와 오푸스 데이에 비판적인 여러 단체는 에스크리바의 시성 전후에 등장했는데, 여기에는 오푸스 데이 인식 네트워크(Opus Dei Awareness Network, ODAN영어)와 "오푸스 리브로스(OpusLibros스페인어)"가 포함되며, 이들 모두 오푸스 데이와 그 관행에 반대하는 전 회원들의 협력 단체이다.
언론인 케네스 L. 우드워드에 따르면, 공식 시복 전에 그는 "에스크리바와 긴밀히 생활하고/또는 일했던 여섯 명의 다른 남녀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제시한 허영심, 부패, 분노 발작, 부하직원에 대한 가혹함, 교황과 다른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의 사례는 그리스도인 성인에게서 기대할 만한 특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은 들을 수 없었다. 그들 중 적어도 두 명은 포지시오에서 이름으로 비난받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명예를 방어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가톨릭 신학자 리처드 맥브라이언은 에스크리바의 성인 지위를 "현대에서 가장 노골적인 정치화된 시성 사례"라고 불렀다. 가톨릭 작가이자 전기 작가인 존 앨런에 따르면, 이러한 견해는 다른 전 회원들, 현 회원들, 그리고 오푸스 데이 활동에 참여하는 약 90만 명의 사람들에 의해 반박된다. 그는 사실에 대한 해석이 "영성, 가정생활, 그리고 종교적 소명의 함의에 대한 개인의 기본적인 접근 방식에 달려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앨런의 오푸스 데이와 그 창설자에 대한 설명은 모든 평론가들에게 공정하다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판사들 사이의 불화 보고
에스크리바의 시성식은 가톨릭 교회 내부와 언론 모두에서 이례적인 관심과 비판을 받았다. 에스크리바의 시성 청원인이었던 플라비오 카푸치는 에스크리바에 대한 주요 비난들을 요약했다. "그는 성질이 나빴고, 잔인했으며, 허영심이 많았고,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와 가까웠으며, 친나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너무 실망하여 심지어 동방 정교회로 개종할 생각으로 그리스로 여행까지 했다"는 것이다.
우드워드의 《뉴스위크》 기사는 에스크리바의 시복 절차를 주재했던 시성성 판사 9명 중 2명이 절차 중단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반대자들은 루이지 데 마지스트리스(바티칸의 사도 죄벌원 법원에서 일했던 고위 성직자)와 후스토 페르난데스 알론소(로마에 있는 스페인 국립 교회의 총장)로 확인되었다. 우드워드에 따르면, 반대자 중 한 명은 에스크리바의 시복이 교회에 "심각한 공공 스캔들"을 야기할 수 있다고 썼다. 같은 기사는 실비오 오디 추기경이 에스크리바의 사망 직후 그를 서둘러 시성하는 것에 대해 많은 주교들이 "매우 불쾌해했다"고 선언했다고 인용했다. 호세 사라이바 마르틴스 시성성 장관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그러한 반대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다.
볼로냐의 성심의 사제회가 발행하는 학술지 《일 레뇨》(Il Regno이탈리아어)는 1992년 5월 에스크리바의 시복 절차 판사 중 한 명의 기밀 투표록을 재수록했는데, 여기서 판사는 절차 중단을 요청했다. 이 문서는 절차의 성급함, 시성 청원자들이 수집한 문서에서 비판적 증언의 거의 부재, 프랑코 정권 및 다른 가톨릭 조직과의 에스크리바 관계에 대한 문서의 부적절한 처리, 그리고 공식 증언 자체에서 에스크리바가 적절한 영적 겸손이 부족했다는 암시 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문서는 판사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저자는 자신이 1966년 교리성성의 공증인으로 재직하면서 에스크리바를 한 번 짧게 만났다고 밝히는데, 이는 해당 판사가 데 마지스트리스임을 암시한다.
투표 당시 사도 죄벌원의 섭정이었던 데 마지스트리스의 업무는 주로 고해성사 및 참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과 관련이 있었다. 교회법에 따르면, 고해성사 신부는 고해성사를 통해 참회자로부터 알게 된 어떤 것도 누설하지 않을 절대적인 의무가 있다. 1989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가는 투표록에서 데 마지스트리스는 주요 증인인 알바로 델 포르티요의 증언이 전체 절차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포르티요가 31년 동안 에스크리바의 고해성사 신부였기 때문이다.
존 앨런 주니어는 가톨릭 교회 내부의 일부 관찰자들에 따르면 데 마지스트리스가 에스크리바의 시성에 대한 반대로 인해 처벌받았다고 논평한다. 데 마지스트리스는 2001년 사도 죄벌원의 수장으로 승진했는데, 이는 바티칸 관료 조직에서 보통 추기경이 맡는 중요한 직책이다. 그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데 마지스트리스를 추기경으로 만들지 않았고, 2년도 채 되지 않아 그를 사도 죄벌원의 수장 자리에서 교체하여 사실상 은퇴를 강요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2015년 2월 14일 콘시스토리에서 데 마지스트리스를 추기경으로 서임한 결정은, 데 마지스트리스가 당시 89세가 되어 교황 선출 콘클라베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해설가들에 의해 요한 바오로 2세 재임 중 데 마지스트리스가 받았던 대우에 대한 위로로 해석되었다.
8. 유산 및 영향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메시지와 가르침의 중요성은 가톨릭 신자들과 다른 이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8.1. 광범위한 영향 및 평가
소르본 대학교 교수이자 프랑스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 회장이었던 프랑스 개신교 역사가 피에르 쇼뉘는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의 업적은 의심할 여지 없이 21세기를 특징지을 것이다. 이것은 신중하고 합리적인 예측이다. 이 동시대 인물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고 지나치지 말라"고 말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추기경으로 임명했지만 서임되기 전인 1988년에 선종한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는 에스크리바의 주요 저서 《길》을 "선진 보이 스카우트를 위한 작은 스페인어 매뉴얼"이라고 일축하며, 주요 종교 조직을 유지하기에는 매우 불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도사이자 영적 작가인 토마스 머튼은 에스크리바의 책이 "그 단순함 덕분에 많은 선을 행할 것인데, 이는 복음 메시지의 진정한 매개체"라고 선언했다.
오푸스 데이의 비평가들은 종종 에스크리바의 신학, 역사, 법학에 대한 지적 기여의 중요성과 독창성이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여러 고위 관계자들은 에스크리바의 영향과 그의 가르침의 관련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981년 에스크리바의 시복 시성 절차를 시작하는 교령에서 우고 포레티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썼다. "1928년 오푸스 데이를 창설한 이래 보편적 성화 소명을 선포했기 때문에,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은 교회의 교도권의 근본적인 핵심을 정확히 이루는 것, 즉 교회 생활에서 그토록 결실이 풍부한 메시지의 선구자로 만장일치로 인정받았다." 주교성성 장관이었던 세바스티아노 바지오 추기경은 에스크리바 선종 한 달 후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에도 오푸스 데이 창설자의 삶, 업적, 메시지가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에서 전환점이자,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독창적인 장을 이룬다는 것은 명백하다." 시복 절차의 바티칸 자문가는 "그는 가장 깊은 영적 원천에서 나온 인물과 같다"고 말했다. 빈 대주교 프란츠 쾨니히는 1975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푸스 데이의 강력한 힘은 아마도 그들의 깊은 평신도 영성에서 비롯될 것이다. 아주 초기에, 1928년 에스크리바 몬시뇰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온 교회 유산으로의 회귀를 예상했다... 그는 교회의 역사에서 세 번째 천년기의 여명기에 교회의 사목적 행동의 큰 주제들을 예상할 수 있었다."
미국 신학자 윌리엄 메이에 따르면, 에스크리바 가르침의 "절대적으로 중심적인" 부분은 "성화가 하느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통해 자녀들에게 자유롭게 주신 은총 때문에만 가능하며, 본질적으로 우리의 구속주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결합에 있다"는 것이다.
《길》, 《고랑》, 《대장간》,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등 에스크리바의 저서들은 계속해서 널리 읽히며, 평신도의 일상적인 성화 소명(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에서도 발견되는 메시지)을 강조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에스크리바의 시복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초자연적인 직관으로, 복자 호세마리아는 성화와 사도직에 대한 보편적 소명을 지칠 줄 모르고 설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일상생활의 현실 속에서 거룩해지도록 부르신다. 그러므로 노동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행해질 때 개인적인 성화와 사도직의 수단이 된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교령 《그리스도인 신자들 전체》는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적인 일을 통해 하느님과 연합하도록 초대함으로써-이는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고 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그들의 몫이 될 일이다-그의 메시지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관계없이 영적 빛의 무궁무진한 원천으로 지속될 운명이다."
8.2. 추모 및 기념 시설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를 기리기 위한 여러 기념 시설이 존재한다. 아일랜드 카히어에는 1959년 그의 방문을 기념하는 청동 동판이 있다. 2005년 8월 30일, 로마노 코시가 제작한 5 m 높이의 성 호세마리아 조각상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외벽에 설치되었다. 이 조각상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축성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대성당 외벽에 현대 성인상을 설치하기로 결정했으며, 성 호세마리아 조각상 옆에는 로스 안데스의 테레사, 칸파냐의 마르셀리노, 아르메니아의 그레고리오 등 다른 성인상들이 나란히 놓여있다. 그의 어린 시절 회복과 관련된 토레시우다드 성당 또한 오푸스 데이의 영적 중심지이자 중요한 순례지로 남아있다.
9. 저서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길》
- 《고랑》
- 《대장간》
- 《몬시뇰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와의 대화》
- 《하느님의 친구들》
-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
-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 《거룩한 묵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