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خالد بن الوليد بن المغيرة المخزوميKhālid ibn al-Walīd ibn al-Mughīra al-Makhzūmī아랍어, 585년 또는 592년 ~ 642년)는 이슬람 초기 정통 칼리파 시대의 탁월한 군사 지도자이자 무장이었다. 그는 이슬람 역사에서 '알라의 검'(سيف الله사아프 알라아랍어, '신이 뽑은 검' 또는 '알라의 검')이라는 이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칼리드는 초기에는 메카의 쿠라이쉬족 기병대장으로서 무함마드와 이슬람 공동체에 대항했으나,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무함마드와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 2대 칼리파 우마르의 치세 동안 이슬람 국가의 확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리다 전쟁을 통해 아라비아 반도 내 반란 부족들을 진압하고 이슬람 공동체를 통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이라크 정복과 비잔티움 제국의 시리아 정복에 핵심적인 지휘관으로 참여하며 이슬람 세력의 영토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군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며 시리아 전역을 이슬람 제국의 지배하에 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사학자들은 그를 초기 이슬람 시대에서 가장 유능하고 뛰어난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 행동 중 일부, 특히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 처형 사건과 같은 사안들은 오늘날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의 명성이 개인 숭배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우마르 칼리프에 의해 군 지휘권이 박탈되는 등 정치적 견제를 받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이 섹션에서는 칼리드의 어린 시절, 교육 배경, 그리고 그가 속한 가문의 영향력에 대해 다룬다.
칼리드는 약 592년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히자즈 (서부 아라비아) 메카의 지역 분쟁 조정자였던 알왈리드 이븐 알무기라였다.
2.1. 어린 시절 및 교육
칼리드는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았으나 회복되었으며, 이로 인해 왼쪽 뺨에 흉터가 남았다. 쿠라이쉬족의 관습에 따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라비아 사막의 베두인 부족에게 보내져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건조하고 오염되지 않은 사막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5~6세가 되어 메카의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다. 어려서부터 칼리드는 말을 타고 창, 칼, 활과 같은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으며, 특히 창 사용에 능숙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용감한 전사이자 씨름 선수로 쿠라이쉬족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칼리드는 미래의 2대 칼리프인 우마르의 사촌이었으며, 서로 매우 닮았다고 전해진다.
2.2. 가문 및 부족 배경
칼리드의 아버지는 쿠라이쉬족의 주요 씨족이자 메카의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귀족이었던 바누 마크줌 출신이었다. 알왈리드 이븐 알무기라는 8세기 역사가 이븐 히샴과 이븐 두라이드, 9세기 역사가 이븐 하비브에 의해 꾸란의 메카 수라에서 언급된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조롱자'로 지목된다. 마크줌 씨족은 메카 상업을 예멘과 에티오피아 등 해외 시장에 소개한 공로를 인정받았으며, 쿠라이쉬족 사이에서 지성, 고귀함, 부유함으로 명성을 쌓았다. 그들의 명성은 칼리드의 할아버지인 알무기라 이븐 압둘라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칼리드의 삼촌인 히샴 이븐 알무기라는 '메카의 영주'로 불렸으며, 그의 사망 날짜는 쿠라이쉬족이 그들의 달력 시작점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역사가 무함마드 압둘하이 샤반은 칼리드를 그의 씨족과 메카 전반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
칼리드의 어머니는 유목민 바누 힐랄 부족 출신의 알 아스마 빈트 알 하리스 이븐 하즌으로, 일반적으로 Lubaba al-Sughra('작은 루바바')로 알려져 있다. 이는 그녀의 이복 언니인 루바바 빈트 알 하리스와 구별하기 위함이다. 루바바 알-수그라는 약 622년에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그녀의 이복 언니인 마이무나 빈트 알 하리스는 무함마드의 아내 중 한 명이 되었다. 칼리드는 어머니 쪽 친척들을 통해 베두인(유목 아랍인)의 생활 방식에 매우 익숙해졌다.
3. 이슬람 이전의 삶과 무함마드에 대한 반대
마크줌 씨족은 무함마드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으며, 칼리드의 사촌이자 씨족의 탁월한 지도자인 아므르 이븐 히샴 (아부 자흘)은 약 616~618년에 무함마드의 씨족인 쿠라이쉬의 바누 하시미에 대한 보이콧을 조직했다. 무함마드가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후, 아부 자흘 휘하의 마크줌 씨족은 624년 바드르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무함마드에 맞서 전쟁을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 아부 자흘을 포함한 칼리드의 부계 사촌 약 25명과 수많은 다른 친척들이 살해당했다.

이듬해, 칼리드는 메디나 북쪽 우후드 전투에서 무함마드와 대치한 메카 군 기병대 우익을 지휘했다. 역사가 도널드 라우틀리지 힐에 따르면, 칼리드는 우후드산 비탈에 있는 무슬림 전선에 대한 정면 공격 대신, 산을 우회하여 무슬림 측면을 통과하는 "현명한 전술"을 채택했다. 그는 우후드 서쪽 와디 카나트 계곡을 따라 진격하여 계곡 남쪽 루마산에서 무슬림 궁수들에게 저지당했다. 전투 초반에는 무슬림이 우위를 점했지만, 대부분의 무슬림 궁수들이 메카군의 진영을 약탈하기 위해 자리를 이탈하자 칼리드는 무슬림 후방 방어선에 생긴 틈을 향해 돌격했다. 이어진 패주에서 수십 명의 무슬림이 살해되었다. 전투 서술은 칼리드가 전장을 누비며 창으로 무슬림들을 살해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샤반은 쿠라이쉬족이 무함마드를 상대로 유일하게 승리한 우후드 전투에서 칼리드의 "군사적 천재성"을 높이 평가했다.
628년,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움라 (메카로의 소순례)를 수행하기 위해 메카로 향하자, 쿠라이쉬족은 무함마드의 출발 소식을 듣고 200명의 기병을 파견하여 그를 요격했다. 칼리드가 기병대 선두에 있었고, 무함마드는 비정상적이고 험난한 우회로를 택하여 그와의 대결을 피하고 결국 메카 변두리의 후다이비야에 도달했다. 무함마드의 경로 변경을 인지한 칼리드는 메카로 철수했다. 이후 3월에 무슬림과 쿠라이쉬족 사이에 후다이비야 조약이 체결되었다.
4. 이슬람 개종과 무함마드 시대의 복무
칼리드는 6 AH (약 627년) 또는 8 AH (약 629년)에 쿠라이쉬족 출신인 아므르 이븐 알아스와 함께 무함마드 앞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현대 역사가 마이클 레커는 칼리드와 아므르가 8 AH에 개종했다는 기록이 "아마도 더 신뢰할 만하다"고 언급한다. 역사가 아크람 디야 우마리는 칼리드와 아므르가 후다이비야 조약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메디나로 이주했으며, 이는 쿠라이쉬족이 새로운 무슬림 개종자들을 메카로 송환하라는 요구를 철회한 후였다고 주장한다. 개종 후, 역사가 휴 N. 케네디에 따르면, 칼리드는 "그의 상당한 군사적 재능을 새로운 무슬림 국가를 지원하는 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칼리드는 629년 9월 무함마드의 명령으로 현재의 요르단에 위치한 무타 원정에 참여했다. 이 습격의 목적은 7월에 비잔티움 제국에 패배한 후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군대가 시리아 (로마 속주)에서 철수한 후 전리품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무슬림 분견대는 비잔티움 사령관 테오도루스 (헤라클리우스의 형제)가 이끄는 주로 아랍 부족민들로 구성된 비잔티움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고, 여러 고위 무슬림 지휘관들이 살해되었다. 칼리드는 임명된 지휘관들의 죽음 이후 군대의 지휘를 맡았고, 상당한 어려움 속에서도 무슬림 병사들의 안전한 철수를 감독했다. 무함마드는 칼리드에게 명예 칭호인 '알라의 검'(Sayf Allah아랍어)을 부여하여 보상했다. 이 칭호를 받은 시기와 장소에 대한 이슬람 문헌의 기록은 다양하다. 8세기와 9세기 초 역사가들은 이 칭호가 아부 바크르 칼리파(재위 632~634년)가 칼리드의 리다 전쟁에서의 성공을 인정하여 부여했다고 기록한 반면, 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무함마드가 무타 전투에서 비잔티움에 맞서 칼리드의 역할에 대해 이 칭호를 부여했다는 보고가 이슬람 역사서에 퍼지기 시작했다.

629년 12월 또는 630년 1월, 칼리드는 무함마드의 메카 함락에 참여했으며, 이후 대부분의 쿠라이쉬족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 전투에서 칼리드는 '베두인 이주자들'(muhajirat al-arab아랍어)이라 불리는 유목민 병력을 이끌었다. 그는 도시로 진격하는 두 주요 부대 중 하나를 이끌었으며, 이후 쿠라이쉬족과의 전투에서 그의 병사 3명이 사망하고 8세기 무함마드 전기 작가인 이븐 이샤크에 따르면 12명의 쿠라이쉬족이 살해당했다. 칼리드는 그 해 말 후나인 전투에서 무슬림 선봉대에서 베두인 바누 술라임을 지휘했다. 이 대결에서 쿠라이쉬 개종자들의 유입으로 강화된 무슬림군은 타이프에 기반을 둔 쿠라이쉬족의 전통적 라이벌인 사키프와 그들의 유목민 동맹인 하와진을 물리쳤다. 칼리드는 이어서 메카와 타이프 사이의 나클라 지역에 있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종교에서 숭배되던 여신 중 하나인 알우자의 우상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칼리드는 메카에서 약 80 km 남쪽에 위치한 얄람람의 바누 자디마 부족에게 이슬람을 전파하도록 파견되었으나, 이슬람 전통 기록에 따르면 그가 부족을 불법적으로 공격했다고 한다. 이븐 이샤크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드는 자디마 부족민들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지만, 이어서 칼리드의 이슬람 개종 이전에 자디마족이 그의 삼촌 파키흐 이븐 알무기라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로 부족민 여러 명을 처형했다. 9세기 역사가 이븐 하자르 알아스칼라니의 서술에 따르면, 칼리드는 자디마족의 억양에 익숙하지 않아 부족민들의 신앙 수용을 이슬람에 대한 거부나 모독으로 오해하여 그들을 공격했다. 두 기록 모두에서 무함마드는 칼리드의 행동에 대해 자신은 무죄라고 선언했지만, 그를 해고하거나 처벌하지는 않았다. 역사가 W. 몽고메리 와트에 따르면, 자디마 사건에 대한 전통적 기록은 "칼리드에 대한 정황적인 비방에 불과하며,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630년 후반, 무함마드가 타부크에 있을 때 칼리드를 파견하여 오아시스 시장 마을인 두마트 알잔달을 점령하게 했다. 칼리드는 이곳의 항복을 받아내고 주민들에게 무거운 벌금을 부과했다. 칼리드는 족장 중 한 명인 킨다 부족의 우카이디르 이븐 압둘말리크 알사쿠니에게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와 함께 항복 조약을 체결하도록 명령했다. 631년 6월, 칼리드는 무함마드로부터 480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즈란의 기독교 및 다신교 혼합 부족인 바누 하리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 부족은 개종했으며, 칼리드는 그들에게 꾸란과 이슬람 율법을 가르친 후 발하리스 대표단과 함께 메디나의 무함마드에게 돌아왔다.
5. 리다 전쟁 (아라비아 통일)
이 섹션에서는 무함마드 사후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생한 리다 전쟁에서 칼리드의 핵심적인 역할과 그의 군사 작전을 상세히 설명한다.
632년 6월 무함마드 사망 후, 그의 초기이자 친근한 동료 중 한 명인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무함마드의 계승 문제는 무슬림들 사이에 불화를 야기했다.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이주한 후 그를 맞이했던 메디나 원주민인 안사르는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려 했다. 무함마드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 대부분의 쿠라이쉬족 출신인 무하지룬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었다. 한 그룹은 무함마드와 더 가까운 친족인 그의 사촌 알리를 옹호했고, 다른 그룹은 쿠라이쉬 귀족 출신의 새로운 개종자들의 지지를 받아 아부 바크르를 지지했다. 후자는 저명한 무하지룬인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와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라의 핵심적인 개입으로 안사르의 주장을 물리치고 계승했다. 칼리드는 아부 바크르의 계승을 강력히 지지했다. 13세기 학자 이븐 아빌 하디드의 저서에 보존된 보고서에 따르면 칼리드는 아부 바크르의 지지자였으며 알리의 후보에 반대했고, 아부 바크르는 "질문할 필요도 없고, 그의 성격을 조사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
메카, 메디나, 타이프 주변에 거주하는 부족들을 제외한 아라비아의 대부분 부족들은 무함마드 사후 신생 무슬림 국가에 대한 충성을 중단했거나, 메디나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이슬람 역사서는 아부 바크르가 부족들에 대한 이슬람 통치를 확립하거나 재확립하려는 노력을 리다 전쟁 (배교자들과의 전쟁)으로 묘사한다. 이 전쟁에 대한 현대 역사가들의 견해는 상당히 다양하다. W. 몽고메리 와트는 부족들의 반대가 본질적으로 반이슬람적이라는 이슬람적 특징화에 동의하는 반면, 율리우스 벨하우젠과 C. H. 베커는 부족들이 종교로서의 이슬람보다는 메디나에 대한 세금 의무에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레오네 카에타니와 버나드 루이스의 견해에 따르면, 메디나와 관계를 맺었던 반대 부족들은 종교적, 재정적 의무를 무함마드와의 개인적인 계약으로 여겼다. 무함마드 사후에 다른 조건을 협상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아부 바크르에 의해 거부되었고, 아부 바크르는 그들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리다 전쟁 동안 아라비아의 여섯 주요 분쟁 지역 중 두 곳은 나지드 (중앙 아라비아 고원)에 집중되었다. 하나는 툴라이하 휘하의 바누 아사드, 타이 부족, 가타판 부족의 반란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자 빈트 알 하리스가 이끄는 바누 타밈 부족의 반란이었다. 두 지도자 모두 예언자라고 주장했다. 아부 바크르가 주 알콰사 전투에서 가타판 부족의 메디나 위협을 진압한 후, 그는 칼리드를 나지드 지역의 반란 부족들에게 파견했다. 아부 바크르는 이전에 대부분의 무슬림 군대를 우사마 이븐 자이드 휘하에 비잔티움 시리아를 공격하도록 파견했었는데, 이는 유목 부족들이 무슬림의 권위를 저버려 히자즈 지역의 무슬림 도시들에 위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역사가 엘리아스 슈파니는 우사마의 원정대가 무함마드가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병력이었으며, 안사르, 무하지룬, 메카와 메디나 지역의 베두인 부족민 대부분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오히려 생계를 위해 습격에서 얻은 전리품에 의존하는 가난하고 약탈적인 무슬림들로 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레커는 칼리드가 우사마 군대가 돌아오기 전에 나지드 지역의 부족들에게 배치되었다고 주장하며, 와트(Watt)는 우사마가 돌아온 후 칼리드가 대규모 군대와 함께 파견되었다고 언급한다. 칼리드는 아부 바크르가 처음 두 명의 후보인 자이드 이븐 알카타브와 아부 후다이파 이븐 우트바가 임무를 거부한 후 세 번째로 지명한 캠페인 지휘관이었다. 그의 병력은 무하지룬과 안사르로 구성되었다. 캠페인 내내 칼리드는 상당한 작전적 독립성을 보였으며 칼리프의 지시를 엄격히 따르지 않았다. 샤반의 말에 따르면, 그는 "단순히 격파해야 할 대상을 격파했을 뿐"이었다.
5.1. 부자카 전투와 툴라이하 진압
칼리드의 초기 목표는 툴라이하 추종자들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632년 후반, 그는 툴라이하의 군대와 부자카 전투에서 대결했는데, 이 전투는 아사드 부족 영토 내에 있는 동명의 우물가에서 발생했다. 칼리드의 군대가 부자카에 도착하기 전에 타이 부족은 무슬림에게 투항했는데, 이는 타이 부족의 족장인 아디 이븐 하팀의 양측 중재의 결과였다. 아디 이븐 하팀은 메디나로부터 그의 부족과 전통적인 아사드 라이벌 부족에 대한 세금 징수관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칼리드는 전투에서 아사드-가타판 연합군을 물리쳤다. 툴라이하가 패배에 가까워지자, 가타판 부족의 바누 파자라 지파가 족장인 우야이나 이븐 히슨의 지휘 아래 전장을 이탈했고, 이로 인해 툴라이하는 시리아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족인 아사드족은 이후 칼리드에게 복종했으며, 이때까지 중립을 지키며 양측 중 어느 편에 충성할지 갈등의 결과를 기다리던 바누 아미르도 뒤따랐다. 우야이나는 붙잡혀 메디나로 끌려갔다. 부자카에서의 승리 결과, 무슬림은 나지드 대부분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다.
5.2.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 처형과 야마마 정복
부자카 전투 이후, 칼리드는 현재 알 카심 주에 위치한 알-부타에 본부를 둔 반란군 타밈 부족의 족장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에 대한 진압 작전을 이어갔다. 말리크는 무함마드에 의해 그의 타밈 부족인 야르부 지파의 자선세(사다카) 징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무함마드 사망 후 메디나로 이 세금을 보내는 것을 중단했다. 이에 아부 바크르는 칼리드에게 그를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칼리드는 이 작전과 관련하여 그의 군대 내에서 분열에 직면했는데, 안사르 부족은 아부 바크르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을 때까지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하지 말라는 지시를 인용하며 처음에는 남았다. 칼리드는 칼리프가 임명한 사령관으로서 그러한 명령이 그의 특권이라고 주장했지만, 안사르 부족에게 참여를 강요하지 않고 무하지룬과 부자카 전투 이후의 베두인 탈주자들로 구성된 병력과 함께 행군을 계속했다. 안사르 부족은 내부 협의 후 결국 칼리드에게 다시 합류했다.
대부분의 무슬림 전통 자료에 따르면, 632년 칼리드의 군대는 말리크와 그의 야르부 씨족원 11명을 만났다. 야르부족은 저항하지 않고 이슬람 신앙을 선포하여 칼리드의 진영으로 호송되었다. 칼리드는 부족원들의 포획자 중 한 명이었던 안사르 부족원이 그들의 무슬림으로서의 증언 때문에 포로들의 불가침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를 처형했다. 그 후, 칼리드는 말리크의 과부인 움무 타밈 빈트 알민할과 결혼했다. 칼리드의 행동 소식이 메디나에 전해지자, 아부 바크르의 수석 보좌관이 된 우마르는 칼리드를 처벌하거나 지휘권에서 해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아부 바크르는 그를 용서했다.
8세기 역사가 사아프 이븐 우마르의 기록에 따르면, 말리크는 그의 야르부 씨족의 예언자 여성 사자(Sajah)와도 협력했지만, 타밈 씨족의 경쟁 씨족들에게 패배한 후 사자의 대의를 버리고 알-부타의 진영으로 후퇴했다. 그곳에서 그는 작은 일행과 함께 무슬림에게 발견되었다. 현대 역사가 빌페르트 마델룽은 사이프의 기록을 부정하며, 만약 말리크가 이슬람을 떠났다면 우마르와 다른 무슬림들이 칼리드의 말리크 처형에 항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W. 몽고메리 와트는 리다 전쟁 동안 타밈 부족에 대한 기록이 일반적으로 "불분명하다 ... 부분적으로는 칼리드의 적들이 이야기를 왜곡하여 그를 모함했기 때문이다"라고 간주한다. 현대 역사가 엘라 란다우-타세론의 견해에 따르면, "말리크의 경력과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은 서로 상충하는 전통들의 더미 아래 묻혀 있을 것이다."
5.2.1. 무사일리마 제거와 야마마 정복

경쟁 타밈 부족 파벌과의 갈등에서 일련의 좌절을 겪은 후, 사자는 무슬림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인 무사일리마, 나지드 동부 농업 변경 지대인 알야마마의 정착민 바누 하니파 부족 지도자에게 합류했다. 무사일리마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이주하기 전에 이미 예언자임을 주장했으며, 무함마드에게 그의 신성한 계시를 상호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무함마드는 이를 거부했다. 무함마드 사망 후 야마마에서 무사일리마에 대한 지지가 급증했으며, 야마마는 풍부한 밀밭과 대추야자뿐만 아니라 메디나를 동아라비아의 바레인과 오만 지역과 연결하는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 아부 바크르는 슈라흐빌 이븐 하사나와 칼리드의 사촌 이크리마 이븐 아비 자흘을 군대와 함께 파견하여 야마마의 무슬림 총독인 무사일리마의 부족 친척 투마마 이븐 우탈을 지원하게 했다. 현대 역사가 메이어 제이콥 키스터에 따르면, 이 군대가 제기한 위협 때문에 무사일리마가 사자와 동맹을 맺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크리마는 무사일리마의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고, 이후 아부 바크르로부터 오만과 마흐라 술탄국 (중앙 남부 아라비아)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슈라흐빌은 칼리드의 대규모 군대가 도착할 것을 예상하여 야마마에 남았다.
나지드 베두인족에 대한 승리 후, 칼리드는 하니파족의 군사적 역량에 대한 경고와 승리 시 부족에 대한 엄격한 조치를 취하라는 아부 바크르의 지시를 받고 야마마로 향했다. 12세기 역사가 이븐 후바이시 알 아사디는 칼리드와 무사일리마의 군대가 각각 4,500명과 4,000명이었다고 주장하지만, 키스터는 초기 무슬림 기록의 대부분이 인용한 훨씬 더 큰 숫자를 과장된 것이라고 일축한다. 아크라바 평원에서 무사일리마에 대한 칼리드의 처음 세 번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무슬림들이 초기에 실패한 이유로는 무사일리마 전사들의 강인함, 그들의 칼의 우수성, 그리고 칼리드 군대 내 베두인 병력의 변덕스러움이 모두 언급되었다. 칼리드는 안사르족 타비트 이븐 카이스의 조언에 따라 다음 전투에서 베두인족을 제외했다.
하니파족에 대한 네 번째 공격에서, 칼리드 휘하의 무하지룬과 타비트 휘하의 안사르는 무사일리마의 부관을 죽였고, 무사일리마는 그의 군대 일부와 함께 도망쳤다. 무슬림들은 하니파족을 무사일리마가 무슬림에 대한 최후의 저항을 벌이기 위해 사용했던 커다란 폐쇄된 정원으로 추격했다. 그 정원은 무슬림에 의해 습격당했고, 무사일리마는 살해당했으며, 대부분의 하니파족은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정원은 양측의 높은 사상자 때문에 '죽음의 정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칼리드는 이 캠페인 초기에 포로로 잡힌 하니파족 무자아 이븐 알무라라에게 무사일리마 사망 후 야마마 요새에 있는 하니파족의 병력, 사기, 의도를 평가하도록 지시했다. 무자아는 하니파족의 여성과 아이들을 남성처럼 옷을 입히고 요새 입구에 세워 칼리드와의 협상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속임수를 썼다. 그는 칼리드에게 하니파족이 여전히 무슬림에 맞서 싸울 결의를 가진 수많은 전사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러한 평가와 그의 병사들의 피로감 때문에 칼리드는 아부 바크르가 후퇴하는 하니파족을 추격하고 하니파 포로들을 처형하라는 지시에도 불구하고, 무자아의 조언을 받아들여 하니파족과의 휴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칼리드와 하니파족 간의 협정은 부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무기와 갑옷, 금은 재고를 넘겨주는 것을 수반했다. 아부 바크르는 이 조약을 비준했지만, 칼리드의 양보에 반대하며 하니파족이 무사일리마에게 영원히 충성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조약은 칼리드가 무자아의 딸과 결혼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레커에 따르면, 무자아의 계략은 이슬람 전통에 의해 "칼리드의 정책을 보호하기 위해 발명되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협상된 조약이 무슬림에게 큰 손실을 입혔기 때문이다." 칼리드는 하니파족과의 조약에 포함된 각 마을에서 과수원과 밭을 할당받았고, 조약에서 제외된 마을은 징벌적 조치를 받았다. 이들 마을 중에는 무사일리마의 고향인 알-하드다르와 마르아트가 있었는데, 이들 주민은 추방되거나 노예로 전락했으며, 마을은 타밈 부족의 씨족민들로 재정착되었다.
5.3. 리다 전쟁의 종결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리다 전쟁의 아랍 부족에 대한 최종 진압은 633년 3월 이전에 이루어졌지만, 카에타니는 이 전쟁이 634년까지 계속되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바레인의 부족들은 634년 중반까지 무슬림에 저항했을 수 있다. 초기 이슬람 기록 중 일부는 칼리드가 하니파 부족에 대한 승리 후 바레인 전선에서 역할을 수행했다고 기록한다. 슈파니는 이를 가능성이 없다고 보지만, 칼리드가 이전에 그의 군대에서 분견대를 파견하여 바레인의 주요 무슬림 사령관 알아라 알하드라미를 지원했을 가능성은 인정한다.
칼리드가 중요한 역할을 한 무슬림의 전쟁 노력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권위를 약화시키려던 아라비아의 강력한 부족들에 대한 메디나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신생 무슬림 국가의 위신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레커에 따르면, 칼리드와 다른 쿠라이쉬족 장군들은 "리다 전쟁 동안 장거리에 걸쳐 대규모 다부족 군대를 동원하는 귀중한 경험을 얻었고" "아라비아 전역의 부족 정치에 대한 쿠라이쉬족의 깊은 이해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6. 페르시아 정복 (이라크 전역)
이 섹션에서는 칼리드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이라크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의 군사 작전과 그에 대한 현대적 평가를 다룬다.
야마마가 평정된 후, 칼리드는 이라크 (하부 메소포타미아)의 사산조 제국 영토를 향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는 군대를 재편성했는데, 이는 아마도 무하지룬의 주력 부대가 메디나로 철수했기 때문일 수 있다. 역사가 칼릴 아타미나에 따르면, 칼리드 군대의 잔여 병력은 메디나 주변 지역의 유목 아랍인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의 족장들은 무함마드의 '동료들'(sahaba아랍어)이 비워둔 지휘관직을 대체하도록 임명되었다. 역사가 프레드 도너는 무하지룬과 안사르가 여전히 그의 군대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무자이나 부족, 타이 부족, 타밈 부족, 아사드 부족, 가타판 부족 출신의 많은 유목 아랍인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칼리드에 의해 임명된 부족 파견대 지휘관은 타이 부족의 아디 이븐 하팀과 타밈 부족의 아심 이븐 아므르였다. 그는 633년 늦은 봄 또는 초여름에 약 1,000명의 전사들과 함께 이라크 남부 국경에 도착했다.
칼리드의 공격 초점은 유프라테스강 서쪽 강변과 그곳에 거주하는 유목 아랍인들이었다. 캠페인 여정의 세부 사항은 초기 무슬림 기록에서 일관성이 없지만, 도너는 "칼리드의 이라크 초기 캠페인 진행 과정은 매우 명확하게 추적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9세기 역사가 알발라두리와 칼리파 이븐 카야트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드의 이라크에서의 첫 주요 전투는 우불라 (현대 바스라 근처의 고대 아폴로고스)와 인근 쿠라이바 마을의 사산조 주둔군에 대한 승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알타바리 (923년 사망)는 그 승리를 칼리드에게 귀속시키는 것을 오류로 간주하며, 우불라는 나중에 우트바 이븐 가지반 알마지니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주장한다. 도너는 우트바에 의한 도시 정복이 "634년보다 다소 늦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받아들이지만, 역사가 칼리드 야흐야 블랭킨십은 "칼리드가 적어도 그곳을 습격했을 수 있지만, (우트바가) 실제로 그 지역을 점령했다"고 주장한다.
우불라 근처에서 칼리드는 유프라테스강 서쪽 강변을 따라 진군하며, 유목민들의 침입으로부터 이라크 국경을 지키는 소규모 사산조 주둔군과 충돌했다. 이 충돌은 자트 알살라실, 나흐르 알마라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우불라 바로 북쪽에서 연결하는 운하), 마다르 (우불라에서 북쪽으로 며칠 걸리는 도시), 울라이스 (아마도 고대 무역 중심지인 볼로게시아스) 및 왈라자에서 발생했다. 마지막 두 곳은 알히라 근처에 있었는데, 알히라는 주로 아랍인들이 거주하는 시장 도시이자 중부 유프라테스 계곡의 사산조 행정 중심지였다.
알히라의 함락은 칼리드의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사령관 아자드비흐 휘하의 페르시아 기병대를 소규모 충돌에서 격파한 후, 칼리드와 그의 군대 일부는 성벽 없는 도시로 진입했다. 알히라의 아랍 부족 귀족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도시 서쪽 사막 변두리의 유목 부족과 혈연 관계가 있는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이었는데, 그들은 흩어져 있는 요새화된 궁전들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 동안 칼리드 군대의 다른 부분은 알히라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했는데, 이들 중 많은 마을이 함락되거나 무슬림에게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알히라의 아랍 귀족들은 칼리드와 협정을 맺고 항복했는데, 이 협정으로 도시는 알히라의 교회와 궁전이 방해받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는 대가로 조공을 지불했다. 알히라가 매년 지불해야 할 금액은 60,000 또는 90,000 NaN 경 dirham에 달했으며, 칼리드는 이를 메디나로 보냈는데, 이는 칼리파국이 이라크에서 받은 첫 조공이었다.
알-히라 주변 지역에서의 교전 동안 칼리드는 알무타나 이븐 하리타와 그의 바누 샤이반 부족으로부터 중요한 지원을 받았다. 알무타나와 그의 부족은 칼리드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 국경 지역을 상당 기간 습격해왔지만, 알무타나의 이전 활동이 신생 무슬림 국가와 연관되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칼리드가 떠난 후, 그는 알무타나에게 알-히라와 그 주변 지역의 실질적인 통제권을 맡겼다. 그는 우불라와 왈라자에서의 교전 동안 쿠트바 이븐 카타다 휘하의 줄 부족 사두스 씨족과 알마두르 이븐 아디 휘하의 바누 이즐 부족으로부터 유사한 지원을 받았다. 이들 부족은 모두 바누 바크르 연합의 지류였으며, 칼리드가 그들의 부족 지역 밖에서 활동할 때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칼리드에게 합류하지 않았다.
칼리드는 유프라테스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강 동쪽 강변의 안바르 (도시)를 공격했고, 그곳에서 사산조 지휘관으로부터 항복 조건을 확보했다. 이후 그는 바크르족과 쿠다아 부족 연합의 부족민들이 자주 찾는 주변 시장 마을을 약탈한 후,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오아시스 마을이자 안바르 남쪽 약 90 km 떨어진 아인 알탐르를 공격했다. 칼리드는 그곳에서 나미르 부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마을 요새를 포위할 수밖에 없었다. 나미르 부족은 사산조와 동맹을 맺은 기독교 추장 힐랄 이븐 아카가 이끌고 있었는데, 칼리드는 그를 물리친 후 십자가형에 처했다. 아인 알탐르는 항복했고, 칼리드는 북쪽의 산다우다 마을을 점령했다. 이 단계에 이르러 칼리드는 하부 유프라테스의 서부 지역과 그곳에 거주하던 나미르족, 타그립 부족, 이야드 부족, 타이말라트 및 대부분의 이즐족을 포함한 유목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6.1. 현대적 평가
아타미나는 아부 바크르가 칼리드에게 이라크 원정을 지시했다는 이슬람 전통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는 무슬림 국가의 역량이 주로 시리아 정복에 집중되던 시기에 아부 바크르가 이라크에 관심이 없었음을 인용한다. 시리아와 달리 이라크는 무함마드나 초기 무슬림들의 야망의 초점이 아니었으며, 쿠라이쉬족은 이슬람 이전 시기부터 시리아에서처럼 이라크 지역에서 교역 이권을 유지하지도 않았다. 샤반에 따르면, 칼리드가 이라크를 습격하는 데 아부 바크르의 승인을 요청하거나 받았는지, 아니면 칼리프의 반대를 무시했는지 불분명하다. 아타미나는 전통 기록에 칼리드가 일방적으로 원정을 시작했음을 암시하는 단서가 있다고 언급하며, 이는 무사일리마의 패배 후 칼리드 군대 내 무하지룬의 메디나 복귀가 칼리드의 이라크 야망에 대한 그들의 반대를 나타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샤반은 칼리드 군대에 남은 부족민들이 전리품의 전망에 동기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리다 전쟁 이후 아라비아에서 발생한 경제 위기 속에서 더욱 그러했다.
프레드 도너에 따르면, 아랍 부족들을 복속시키는 것이 이라크에서 칼리드의 주요 목표였을 수 있으며, 페르시아 군대와의 충돌은 부족들이 사산조 페국과 연합한 결과로 불가피하게, 비록 우발적으로 발생했을지라도, 일어났다. 케네디의 견해에 따르면, 칼리드가 이라크 사막 국경으로 나아간 것은 북동 아라비아 부족들을 진압하는 "그의 작업의 자연스러운 연속"이었으며, 모든 유목 아랍 부족들을 메디나의 권위 아래 두려는 메디나의 정책과 일치했다. 마델룽은 아부 바크르가 리다 전쟁과 초기 이슬람 정복 동안 쿠라이쉬 귀족들에게 의존했으며, 칼리프가 마크줌 씨족에게 그 지역에 대한 이권을 할당하기 위해 칼리드를 이라크로 파견했다고 추측한다.
이라크 정복에서 칼리드의 역할 범위는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패트리샤 크론은 칼리드가 이라크 전선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하며, 동시대의 비아랍어 자료, 즉 세베오스의 아르메니아어 연대기(약 661년)와 후지스탄 연대기 (약 680년)의 명백한 모순을 인용한다. 전자는 이슬람의 시리아 정복이 이미 진행 중일 때만 아랍 군대가 이라크를 정복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이슬람 자료의 주장과 대조된다. 후자는 칼리드를 시리아의 정복자로만 언급한다. 크론은 전통적인 보고서들을 주로 이라크에 기반을 둔 압바스 왕조 시대(750년 이후) 자료들의 일반적인 주제의 일부로 보는데, 이는 초기 무슬림들의 시리아에 대한 초점을 이라크 쪽으로 축소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한다. 크론의 평가는 R. 스티븐 험프리스에 의해 "전통적인 자료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으로 간주되는 반면, 칼리드 야흐야 블랭킨십은 이를 "너무 일방적이다... 칼리드가 이라크 역사 전통에서 주요 영웅이라는 사실은 그가 초기 정복에 참여했을 때만 생길 수 있는 연관성을 시사한다"고 평가한다.
7. 시리아 정복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
이 섹션에서는 칼리드가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이동한 과정, 비잔티움 제국과의 주요 전투들, 그리고 그의 지휘권 박탈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다.
모든 초기 이슬람 기록은 칼리드가 이미 그곳에 있는 무슬림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아부 바크르의 명령으로 이라크를 떠나 시리아로 향했다고 동의한다. 이 기록들 대부분은 칼리프의 명령이 시리아 주둔 무슬림 사령관들의 증원 요청으로 인해 촉발되었다고 주장한다. 칼리드는 634년 4월 초에 시리아로의 행군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정복한 이라크 도시들에 소규모 무슬림 주둔군을 남겨두고 알무타나 이븐 하리타의 총체적인 군사 지휘를 받도록 했다.
아인 알탐르에서의 칼리드 작전 이후 사건들의 연대기적 순서는 일관성이 없고 혼란스럽다. 도너에 따르면, 칼리드는 시리아로의 행군을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 주요 작전을 더 수행했으며, 이 작전들은 종종 자료들에 의해 행군 중에 발생한 사건들과 혼동되어왔다. 그 중 하나는 두마트 알잔달에 대한 작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발리흐강 지류와 팔미라 북동쪽의 자발 알 비슈리 산맥까지 이르는 상부 유프라테스 계곡 서쪽 강변을 따라 존재하는 나미르족과 타그립 부족에 대한 작전이었다. 어떤 교전이 먼저 발생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둘 다 북부 아라비아와 시리아 스텝의 주로 유목민인 아랍 부족들을 메디나의 통제하에 두려는 무슬림의 노력이었다.
두마트 알잔달 작전에서 칼리드는 아부 바크르의 지시를 받거나, 작전 지휘관 중 한 명인 알왈리드 이븐 우크바의 요청을 받아, 주 지휘관 이야드 이븐 간메의 오아시스 마을 포위가 흔들리자 이를 지원하도록 했다. 이 마을의 수비대는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을 맺은 가산족, 타누크족, 살리흐족, 바흐라족, 바누 칼브족 등 유목민 동맹 부족들의 지원을 받았다. 칼리드는 아인 알탐르를 떠나 두마트 알잔달로 향했고, 그곳에서 연합 무슬림군은 격렬한 전투에서 수비대를 물리쳤다. 이후 칼리드는 무함마드 사망 후 메디나를 이탈했던 도시의 킨다족 지도자 우카이디르를 처형했고, 칼브족 족장 와디아는 무슬림 진영의 타밈족 동맹들의 중재로 목숨을 건졌다.
역사가 미하엘 얀 드 호이예와 카에타니는 칼리드가 이라크 작전 이후 두마트 알잔달 원정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며, 전통적인 자료에 언급된 도시는 알-히라 근처에 있는 동명의 마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역사가 라우라 베키아 바글리에리는 그들의 평가를 "논리적"이라고 부르며, "칼리드가 시리아의 무슬림 군대에 합류하는 임무를 지연시키면서 그렇게 멀리 벗어나는 우회로를 택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고 썼다. 바글리에리는 그 오아시스가 이야드 이븐 간메나 또는 아므르 이븐 알아스에 의해 정복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아므르 이븐 알아스는 리다 전쟁 동안 두마트 알잔달에 바리케이드를 친 와디아를 진압하는 임무를 이전에 맡았기 때문이다. 칼리드의 이라크에서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크론은 칼리드가 631년 캠페인에서 두마트 알잔달을 확실히 점령했으며, 그곳에서 사막을 건너 시리아 정복에 참여했다고 주장한다.
7.1. 시리아 사막 횡단 행군

대부분의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칼리드의 시리아로의 일반적인 행군 시작점은 알-히라였으며, 알-발라두리의 기록만이 아인 알탐르로 명시한다. '사막 횡단'이라고 불리는 일반적인 행군의 이 구간은 알-히라 출발 후 불분명한 단계에서 발생했다. 이 단계에서 칼리드와 그의 병사들-500명에서 800명 사이의 병력-은 쿠라키르라는 우물에서 시작하여 6일 밤낮 동안 광활하고 물 없는 사막을 횡단하여 수와라는 곳에서 물을 찾았다. 병사들이 이 거리를 말과 낙타와 함께 횡단할 만큼 충분한 물통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칼리드는 약 20마리의 낙타에게 평소보다 더 많은 물을 마시게 한 뒤 입을 봉하여 낙타들이 음식을 먹어 위장의 물을 상하게 하는 것을 막았다. 행군 매일, 그는 병사들이 낙타의 위장에 저장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여러 마리의 낙타를 도살하게 했다. 낙타를 물 저장고로 활용하고 수와에서 물 공급원을 찾아낸 것은 타이족의 라피 이븐 아므르라는 안내자가 칼리드에게 준 조언의 결과였다.
두마트 알잔달과 상부 유프라테스 계곡에서의 앞서 언급된 작전들을 제외하고, 전통적인 기록들은 알-히라 출발 이후 칼리드의 시리아로 가는 경로에서 두 가지 사건에만 동의한다: 쿠라키르와 수와 사이의 사막 횡단, 그리고 이후 수와 근처 또는 그곳에서 바흐라 부족에 대한 습격 및 팔미라의 항복을 초래한 작전들. 그 외에는 칼리드의 행군 경로를 추적하는 데 서로 다르다.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도너는 칼리드가 다마스쿠스 근교로 향한 세 가지 가능한 경로를 요약한다: 북쪽에서 팔미라를 경유하는 두 경로와 남쪽에서 두마트 알잔달을 경유하는 한 경로. 케네디는 자료들이 각자의 행군 경로를 "동등하게 확신하고 있으며", "어떤 버전이 정확한지 알 방법이 전혀 없다"고 언급한다.
첫 번째 팔미라-다마스쿠스 경로는 칼리드가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상류로 행군하여 - 이전에 점령했던 곳들을 지나 - 자발 알-비슈리로 향하고, 그곳에서 팔미라, 알카리야타인, 후와린을 거쳐 남서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다마스쿠스 지역에 도달하는 경로이다. 이 경로에서 사막 행군이 발생했을 수 있는 유일한 구간은 자발 알-비슈리와 팔미라 사이지만, 두 지점 사이의 거리는 6일 행군보다 상당히 짧고 여러 수원지가 존재한다. 두 번째 팔미라-다마스쿠스 경로는 알-히라와 팔미라 사이를 아인 알탐르를 통해 비교적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경로이다. 아인 알탐르와 팔미라 사이의 사막 구간은 6일 행군을 뒷받침할 만큼 길고 수원지가 드물지만, 쿠라키르나 수와로 해석될 수 있는 지명은 없다. 두마트 알잔달-다마스쿠스 경로에서는 그러한 지명들이 존재한다. 즉, 와디 시르한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있는 '쿠라키르'와 연관된 굴반 쿠라키르 유적지, 그리고 다마스쿠스 동쪽 150 km 떨어진 수와와 동일시되는 사바아 비야르 유적지이다. 이 두 유적지 사이의 구간은 건조하며 6일 행군 서술과 일치한다.
사막 횡단은 칼리드의 원정 중 가장 유명한 일화이자 중세 이슬람 정복(Futuh아랍어) 문학 전반에서 매우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케네디는 사막 횡단이 "역사와 전설 속에 자리 잡았다. 아랍 자료들은 그의 (칼리드의) 인내심에 감탄했으며; 현대 학자들은 그를 전략의 대가로 보았다"고 썼다. 그는 칼리드가 "잊을 수 없는 군사적 인내의 위업"인 사막 횡단을 감행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며, "그의 시리아 도착은 그곳에서 무슬림 군사 성공의 중요한 요소였다"고 덧붙였다. 역사가 모셰 길은 이 행군을 "비교할 수 없는 위업"이자 "탁월한 지휘관으로서의 칼리드의 자질"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역사가 라이언 J. 린치는 칼리드의 사막 횡단이 이슬람 전통 작가들이 이라크와 시리아의 무슬림 정복을 연결하고 정복을 작가들의 논쟁적 동기와 일치하는 "잘 계산된, 단일한 사건"으로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학적 구성이라고 본다. 린치는 "무슬림 청중들을 흥분시키고 즐겁게 했을" 이 행군 이야기가 "사회적 기억의 조각들"로부터 만들어졌으며, 주민들이 "유명한 장군"과의 "연관을 통해 일정 수준의 명성을 얻기 위해" 자신들의 도시나 지역의 정복을 칼리드의 공으로 돌렸다고 주장한다.
8. 시리아 정복
대부분의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최초의 무슬림 군대는 13 AH (634년 초봄) 초에 메디나에서 시리아로 파견되었다. 무슬림 군대의 지휘관들은 아므르 이븐 알아스,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안, 슈라흐빌 이븐 하사나, 그리고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라였다. 그러나 아부 우바이다는 아부 바크르 사망 후 우마르가 칼리파 직위를 계승한 634년 여름이 되어서야 시리아에 파견되었을 수 있다. 도너에 따르면, 전통적인 기록들이 최초의 무슬림 군대가 시리아에 배치된 시점을 몇 달 늦게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633년 가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이는 무슬림 군대와 비잔티움 군대 간의 첫 충돌이 634년 2월에 발생했다고 기록한 익명의 시리아어 724년 연대기와 더 잘 일치한다. 칼리드가 이라크를 떠날 무렵, 시리아의 무슬림 군대는 이미 지역 비잔티움 주둔군과 여러 차례 소규모 교전을 벌였고 남부 시리아 시골 지역을 장악했지만, 어떤 도시 중심부도 통제하지 못했다.
칼리드는 시리아 주둔 무슬림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알-발라두리, 알-타바리, 이븐 아탐, 알-파사위 (987년 사망), 이븐 후바이시 알-아사디가 인용한 기록에 따르면, 아부 바크르는 칼리드의 군사적 재능과 전적을 이유로 이라크에서 시리아로의 재배치 과정의 일환으로 칼리드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알-발라두리의 한 기록에서는 칼리드의 임명이 이미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지휘관들 간의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아타미나는 "아므르 이븐 알아스와 같은 인물이 자발적으로 그러한 결정에 동의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마르는 칼리프직에 오른 후 칼리드를 총사령관으로 확정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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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드는 그의 군대가 사막을 횡단한 후 다마스쿠스 북쪽 마르즈 라히트 초원에 도착했다. 그는 그해 부활절인 634년 4월 24일에 도착했으며, 이는 대부분의 전통적인 기록에서 언급되는 드물게 정확한 날짜로, 도너는 이 날짜가 정확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곳에서 칼리드는 부활절을 기념하던 가산족 그룹을 공격하기 전에 그 자신이나 그의 부관 지휘관들이 다마스쿠스 주변의 구타 농업 지대를 습격했다. 이후 칼리드와 이전 무슬림 군대의 지휘관들 (아므르 제외)은 다마스쿠스 남동쪽 보스라에 집결했다. 보스라는 하우란 지역에 위치한 교역 중심지로, 역사적으로 아라비아의 유목 부족들에게 밀, 기름, 포도주를 공급했으며, 무함마드도 젊은 시절 방문한 적이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628년 사산조의 철수 이후 도시에 제국 주둔군을 재설립하지 않았을 수 있으며, 무슬림 군대는 포위 공격 중 미미한 저항에 직면했다. 보스라는 634년 5월 말에 항복했으며, 이는 시리아에서 무슬림에게 함락된 최초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칼리드와 무슬림 지휘관들은 7월에 아즈나다인에서 비잔티움 제국과의 첫 주요 대결에 참여하기 위해 아므르에 합류하기 위해 서쪽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이 전투는 무슬림에게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고, 비잔티움 제국군은 요르단강 동쪽의 주요 도시인 펠라 (아랍어로 '팔(Fahl)')로 후퇴했다. 무슬림들은 그들을 추격하여 팔 전투에서 또 다른 주요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교전에서 아므르와 칼리드 중 누가 전체 지휘권을 가졌는지는 불분명하다.
8.1. 다마스쿠스 공방전
아즈나다인과 팔 전투에서 살아남은 비잔티움 군대의 잔여 병력은 북쪽 다마스쿠스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비잔티움 지휘관들은 제국 증원군을 요청했다. 칼리드는 진격했으며, 아마도 마르즈 알-사파르 평원에서 비잔티움 부대를 격파한 후 도시를 포위했을 것이다. 다섯 명의 무슬림 지휘관들은 각각 도시의 한 문을 봉쇄하는 임무를 맡았고, 칼리드는 바브 샤르키 (동문)에 주둔했다. 다마스쿠스 바로 북쪽의 바르제에 배치된 여섯 번째 부대는 비잔티움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파견한 구원군을 격퇴했다.
다마스쿠스의 무슬림 함락과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다마스쿠스에 기반을 둔 이븐 아사키르 (1175년 사망)에 의해 보존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칼리드와 그의 병사들이 바브 샤르키 문을 돌파했다. 칼리드와 그의 병사들은 도시의 동쪽 성벽을 넘어 바브 샤르키의 경비병들과 다른 수비병들을 죽였다. 그의 병력이 동쪽에서 진입하는 동안, 아부 우바이다가 이끄는 무슬림 병력은 도시의 고위 관리인 만수르 이븐 사르준이 이끄는 다마스쿠스 귀족들과의 협상 후 서쪽 바브 알자비야 문을 통해 평화롭게 진입했다. 무슬림 군대는 도시 중심부에서 만나 항복 조건을 합의했다. 반면 알-발라두리는 칼리드가 바브 샤르키를 통해 평화롭게 진입했고, 아부 우바이다는 서쪽에서 무력으로 진입했다고 주장한다. 현대 연구는 아부 우바이다가 포위 당시 시리아에 도착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카에타니는 앞서 언급된 전통들에 대해 의문을 표했고, 동양학자 앙리 라멘스는 아부 우바이다를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안으로 대체했다.
시리아 작가 텔 마흐레의 디오니시우스 (845년 사망)와 알렉산드리아 멜키트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 알렉산드리아의 유티키우스 (940년 사망)의 기록에 따르면, 만수르가 이끄는 다마스쿠스 주민들은 포위에 지쳐 포위자들의 결의에 확신을 갖게 되자, 바브 샤르키의 칼리드에게 안전 보장을 대가로 문을 열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칼리드는 이를 수락하고 항복 협정 초안 작성을 명령했다. 칼리드 조약의 여러 버전이 초기 무슬림 및 기독교 문헌에 기록되었지만, 대체로 주민들의 생명, 재산, 교회는 지즈야 (인두세) 지불을 대가로 보호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제국 소유의 재산은 무슬림들에게 몰수되었다. 이 조약은 초기 무슬림 정복 기간 동안 시리아 전역뿐만 아니라 이라크와 이집트에서도 체결된 항복 협정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알와키디 (823년 사망)와 이븐 이샤크가 인용한 기록에 따르면, 다마스쿠스는 635년 8월/9월에 항복했지만, 포위 기간에 대한 기록은 4개월에서 14개월까지 다양하다.
8.2. 야르무크 전투와 시리아 정복

636년 봄, 칼리드는 다마스쿠스에서 골란고원의 옛 가산족 수도인 자비야로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는 헤라클리우스가 파견한 대규모 비잔티움 군대가 접근함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이 군대는 바한과 테오도르 트리트리우스가 이끄는 제국군과 가산족의 필라르크 자발라 이븐 알아이함이 이끄는 기독교 아랍 경량 기병대, 그리고 조르지우스(아랍인들은 자라자라고 부름)가 이끄는 아르메니아 지원군을 포함한 국경 수비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병력 규모는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많다. 도너는 비잔티움군이 무슬림보다 4대 1로 수적으로 우세했다고 보며, 발터 E. 카에기는 비잔티움군이 15,000~20,000명 이상의 병력으로 "아마도 수적 우위를 누렸을 것"이라고 썼고, 존 월터 잔도라는 무슬림이 36,000명(칼리드 군대 10,000명 포함)이고 비잔티움군이 약 40,000명으로 "숫적으로 거의 동등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잔티움 군대는 자비야의 무슬림 진지 서쪽 루카드강 지류에 진영을 구축했다. 칼리드는 이에 따라 철수하여 야르무크강 북쪽, 루카드강이 야르무크강과 만나는 지점 근처에 진지를 잡았다. 이 지역은 높은 언덕, 수원지, 다마스쿠스와 갈릴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 그리고 가산족의 역사적인 방목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한 달 이상 동안 무슬림들은 아드리앗 (현대 다라아)과 데이르 아유브 근처의 진영 사이의 전략적 고지를 점유했으며, 636년 7월 23일 자비야 외곽에서 벌어진 소규모 교전에서 비잔티움군을 물리쳤다. 잔도라는 비잔티움군의 기독교 아랍 및 아르메니아 지원군이 이탈하거나 전향했지만, 비잔티움군은 여전히 "강력했으며", 카타프락트 중기병의 선봉대와 보병 후방대로 구성되어 무슬림 방어선에 접근했다고 주장한다.

칼리드는 그의 기병대를 두 개의 주요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무슬림 보병대의 우익과 좌익 뒤에 배치하여 비잔티움 중기병의 잠재적인 포위 공격으로부터 병력을 보호했다. 그는 200~300명의 정예 기병대를 그의 방어선 중앙을 지원하도록 배치했으며, 데이르 아유브 근처의 무슬림 진영에 궁수들을 배치하여 들어오는 비잔티움 군대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도록 했다。 비잔티움의 무슬림 좌우익에 대한 초기 공격은 연이어 실패했지만, 그들은 무슬림 전선 전체가 후퇴하거나, 동시대 기독교 기록들이 주장하듯이, 후퇴를 가장할 때까지 기세를 유지했다.
비잔티움 군대는 무슬림을 그들의 진영으로 추격했다. 그곳에서 무슬림들은 낙타 떼의 다리를 묶어 보병들이 싸울 수 있는 일련의 방어선을 만들었으며, 비잔티움 기병대는 쉽게 뚫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비잔티움 군대는 무슬림 궁수들의 공격에 취약해졌고, 그들의 기세는 꺾였으며, 좌익은 노출되었다. 칼리드와 그의 기병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비잔티움 보병과 기병 사이의 간격을 활용하여 비잔티움 좌익을 뚫고 들어갔다. 칼리드는 상대방의 중기병을 양쪽에서 포위했지만, 비잔티움군이 보병과 멀리 떨어진 북쪽으로만 탈출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틈을 남겨두었다. 9세기 비잔티움 역사가 테오파네스 고백자에 따르면, 비잔티움 보병은 바한 휘하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아마도 테오도르가 기병 공격에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후 보병대는 격파되었다.
비잔티움 기병대는 그 사이에 루카드와 알란강 지류 사이의 지역으로 북쪽으로 철수했다. 칼리드는 그들을 추격하여 재집결을 막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 그는 이어서 야간 작전을 통해 루카드 다리를 점령했는데, 이는 비잔티움군이 철수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였다. 무슬림은 8월 20일 비잔티움 진영을 공격하여 대부분의 비잔티움 병력을 학살했거나, 비잔티움 진영에 공황을 유발하여 수천 명이 야르무크의 협곡에서 서쪽으로 후퇴하려다 사망하게 했다.
잔도라는 야르무크에서의 무슬림 승리를 무슬림 군대의 응집력과 "우수한 리더십", 특히 칼리드의 "창의성" 덕분이라고 평가하며, 비잔티움 군대 내의 광범위한 불화와 칼리드가 "정확하게 예측"한 테오도루스의 관습적인 전술과 대비시켰다. 길의 견해에 따르면, 헤라클리우스 군대 앞에서 칼리드가 철수하고, 다마스쿠스를 대피시키고, 야르무크 지류에서 반격한 것은 "그의 탁월한 조직 능력과 전장에서의 기동 기술의 증거"이다. 비잔티움 군의 패주는 시리아에 남아 있던 그들의 마지막 효과적인 군대가 파괴되었음을 의미하며,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에서의 초기 무슬림의 전과를 즉시 확보하고, 12월 다마스쿠스를 탈환할 길을 열었다. 이번에는 아부 우바이다가 다마스쿠스를 탈환했으며, 베카 계곡과 궁극적으로 시리아 북부 전체를 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잔도라의 평가에 따르면, 야르무크 전투는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으며, 궁극적으로 피레네산맥과 중앙아시아 사이로 칼리파국을 확장시킨 무슬림의 승리로 이어졌다.
8.3. 군 지휘권 박탈
칼리드는 우마르의 칼리프 즉위 초부터 6개월에서 2년 동안 (자료에 따라 다름) 시리아 무슬림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유지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대부분 우마르의 칼리드 해임이 야르무크 전투 이후에 일어났다는 데 동의한다. 칼리프는 칼리드의 자리에 아부 우바이다를 임명하고, 칼리드의 병력을 나머지 무슬림 지휘관들에게 재배치했으며, 칼리드를 아부 우바이다의 부관 중 한 명의 지휘 아래 두었다. 나중에 칼리드의 이전 병력 대부분은 이라크로 재배치되었다. 칼리드가 최고 지휘관 직위에서 해임된 다양한 이유가 초기 이슬람 자료에서 인용된다. 그 중에는 그의 독립적인 의사 결정과 메디나 지도부와의 최소한의 조율,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의 처형과 그 과부와의 결혼을 포함한 도덕적 비행에 대한 오래된 주장, 자격 있는 초기 무슬림 개종자들에게 불리하게 부족 귀족들에게 전리품을 아낌없이 분배했다는 비난, 칼리드와 우마르 사이의 개인적인 적대감, 그리고 우마르가 칼리드의 영웅적 명성이 무슬림들 사이에서 개인 숭배로 발전할 수 있다고 우려한 점 등이 있었다.
현대 역사가 드 호이예, 윌리엄 뮤어, 안드레아스 스트라토스는 우마르와 칼리드의 적대감이 칼리드 해임의 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샤반은 적대감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칼리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드 호이예는 칼리드가 부족 귀족들에게 사치스럽게 부여한 상금이 (무함마드를 포함한 초기 무슬림 지도자들 사이에서 흔한 관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고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일축한다. 뮤어, 베커, 스트라토스, 필립 K. 히티는 야르무크 전투 이후 시리아에서 무슬림의 전과로 인해 군사령관을 아부 우바이다와 같은 유능한 행정가로 교체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칼리드가 결국 해임되었다고 제안했다.
아타미나는 앞서 언급된 모든 이유에 의문을 제기하며, 시리아의 상당 부분이 비잔티움 제국의 통제하에 남아 있고 헤라클리우스가 그 지방을 포기하지 않은 시기에 해임의 원인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타미나는 "그의 모든 군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부 우바이다가 "칼리드의 비할 데 없는 재능을 대체할 만한 가치 있는 인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메디나에 정규 상비군이 없었고, 다른 전선으로 병력을 재배치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시리아에서 무슬림의 전과에 대한 비잔티움의 위협이 모두 시리아의 오래된 아랍 부족들을 기반으로 한 방어 구조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야기했다. 이들 부족은 비잔티움의 동맹 역할을 했었다. 메디나가 주요 동맹인 가산족에게 요청했으나 거부된 후, 칼브족, 주담 부족, 라큼족과 관계를 맺었다. 이 부족들은 칼리드 군대에 속한 수많은 외부 아랍 부족민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칼리드의 초기 병력은 500~800명이었으나, 이라크 전선이나 아라비아에서 부족민들이 그의 군대에 합류하면서 10,000명까지 불어났고, 가족들을 포함하면 30,000~40,000명에 달했다. 아타미나는 우마르가 칼리드를 해임하고 시리아에서 그의 병력을 소환한 것이 칼브족과 그 동맹들에게 화해의 제스처였다고 결론 내린다.
8.4. 시리아 북부 작전
아부 우바이다와 칼리드는 다마스쿠스에서 북쪽으로 홈스 (비잔티움인들은 에메사라고 부름)로 진격하여 636년~637년 겨울에 도시를 포위했을 것이다. 포위는 비잔티움 수비병들의 여러 차례 출격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고, 도시는 봄에 항복했다. 항복 조건에 따라 주민들에게는 재산, 교회, 수차, 도시 성벽 보호를 보장받는 대가로 세금이 부과되었다. 성 요한 교회 부지의 4분의 1은 무슬림 사용을 위해 할당되었고, 버려진 주택과 정원은 아부 우바이다나 칼리드가 무슬림 병사들과 그 가족들에게 몰수하여 분배했다. 사막 스텝 지대와 가깝기 때문에 홈스는 아랍 부족민들에게 유리한 정착지로 간주되었고, 시리아에서 대규모 무슬림 인구를 확보한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시리아 북부의 후속 정복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고 부분적으로 모순된다. 칼리드는 아부 우바이다에 의해 킨나스린 (비잔티움인들은 칼키스라고 부름)과 인근 알레포를 정복하도록 파견되었다. 칼리드는 킨나스린 외곽에서 미나스라는 인물이 이끄는 비잔티움 군대를 격파했다. 그곳에서 칼리드는 주민들의 호소와 자신들이 비잔티움인들에게 강제 징집된 아랍인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그들을 살려주었다。 그는 이어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킨나스린을 포위했으며, 킨나스린은 638년 8월/9월에 항복했다. 그와 이야드 이븐 간메는 그 후 비잔티움 아나톨리아로 첫 무슬림 습격을 감행했다. 칼리드는 킨나스린을 본부로 삼아 아내와 함께 그곳에 정착했다. 칼리드는 638년 킨나스린의 아부 우바이다의 부지사로 임명되었다. 홈스와 킨나스린에 대한 작전은 시리아 북서부의 정복으로 이어졌고, 헤라클리우스가 에데사의 본부를 아나톨리아의 사모사타로, 궁극적으로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도록 촉발했다.
칼리드는 637년 또는 638년에 항복한 예루살렘 공방전에 참여했을 수 있다. 알-타바리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의 소프로니우스 총대주교에게 도시 주민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하는 우마르의 보증서의 증인 중 한 명이었다.
9. 군 지휘권 박탈 및 이후 활동
사아프 이븐 우마르에 따르면, 638년 후반 칼리드는 북시리아 원정에서 전리품을 사치스럽게 분배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여기에는 킨다족 귀족 알아샤트 이븐 카이스에게 준 금액도 포함되었다. 이에 우마르는 아부 우바이다에게 칼리드를 공개적으로 심문하고 심문 결과와 상관없이 그의 직위에서 해임하며, 킨나스린을 아부 우바이다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두라고 명령했다. 홈스에서 심문을 받은 후, 칼리드는 킨나스린과 홈스의 병사들에게 연이은 고별 연설을 한 후 우마르에 의해 메디나로 소환되었다. 사이프의 기록은 우마르가 시리아와 이라크 주둔 무슬림 주둔군에 칼리드가 비행 때문이 아니라 병사들이 "그(칼리드) 때문에 환상에 사로잡혔다"는 이유로 해임되었으며, 그들이 하느님보다 그에게 지나치게 신뢰를 둘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통지를 보냈다고 언급한다.
칼리드의 해고는 대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우마르가 칼리드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이 무슬림 정치권에 이미 알려져 해고에 대한 대중의 준비가 되어 있었거나, 또는 마크줌족이 이전에 무함마드와 초기 무슬림들에게 반대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마크줌족에 대한 기존의 적대감 때문일 수 있다. 이븐 아사키르의 기록에 따르면, 우마르는 638년 자비야에서 열린 무슬림 군대 평의회에서 칼리드가 전쟁 영웅, 부족 귀족, 시인들에게 전리품을 낭비하고 궁핍한 무슬림들을 위해 돈을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해임되었다고 선언했다. 참석한 지휘관들 중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는데, 다만 한 마크줌족만 우마르가 무함마드가 칼리드에게 부여한 군사적 권한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무슬림 법학자 이븐 시하브 알주흐리 (742년 사망)에 따르면, 639년 사망 전 아부 우바이다는 칼리드와 이야드 이븐 간메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우마르는 이야드만을 홈스 준드-킨나스린-자지라 지역의 총독으로 확정하고, 나머지 시리아 지역, 즉 다마스쿠스 준드, 요르단 준드, 팔레스타인 준드 지역의 총독으로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안을 임명했다.
10. 사망
칼리드는 21 AH (약 642년)에 메디나 또는 홈스에서 사망했다. 칼리드에 관한 하디스(예언자 언행록)에는 무함마드가 무슬림들에게 칼리드를 해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칼리드가 이슬람에 대한 막대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당할 것이라는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이슬람 문학 서사에서는 우마르가 칼리드를 해임한 것을 후회하고, 메디나의 여성들이 그의 죽음을 집단으로 애도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아타미나는 이 모든 것이 "이슬람 전통에서 묘사된 칼리드의 영웅적 인물에 대한 후대 세대의 동정심 표현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태국어 자료에 따르면 그는 순교자로 전사하기를 원했으나, 결국 병상에서 사망하게 되어 크게 낙담했다고 전해진다. 칼리드는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순교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내 몸에는 창이나 칼로 인한 상처 하나 없으니, 이제 늙은 낙타처럼 침대에서 죽어야 하는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에 그의 친구는 "오 칼리드여, 알라의 사도께서 당신에게 '알라의 검'이라는 칭호를 주셨고, 당신이 어떤 전장에서도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해놓으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불신자에게 살해된다면, 이는 알라의 검이 알라의 적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대화는 칼리드가 사망하기 하루 전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11. 유산 및 평가
이 섹션에서는 칼리드의 군사적 유산, 전술적 재능, 역사적 평가, 그리고 그의 행동을 둘러싼 긍정적 평가와 비판적 논란을 다룬다.
초기 기록들은 칼리드가 최고 지휘관직에서 해임된 후에도 정복 전쟁에서 가장 효과적인 지휘관이었다고 평가한다. 프레드 도너는 그를 "초기 이슬람 시대의 전술적 천재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역사가 캐럴 힐렌브란트는 그를 "모든 아랍 무슬림 장군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부르며, 험프리스는 그를 "리다 전쟁과 초기 정복 시대의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아랍 장군"이라고 묘사한다. W. 몽고메리 와트는 특히 무함마드 사망 직후 몇 년간 그의 "뛰어난 장군직" 덕분에 칼리드를 "아랍 제국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휴 케네디의 평가에 따르면, 칼리드는 "뛰어나고 무자비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독실한 무슬림들은 결코 그에게 완전히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초기 이슬람 기록들은 우후드 전투에서 무함마드와의 초기 대결, 리다 전쟁 중 아랍 부족민에 대한 잔혹하거나 비례적이지 않은 행동에 대한 그의 명성, 그리고 독실한 초기 개종자들을 불안하게 했던 그의 군사적 명성 때문에 칼리드에 대한 엇갈린 평가를 제시한다.
11.1. 군사적 재능과 전술
칼리드는 군사적 재능과 전술적 혁신으로 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우후드 전투에서 그의 기병대는 무슬림군 측면을 우회하여 적의 후방을 공격하는 기습 전술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무타 전투에서는 패배 위기에 처한 무슬림군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며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했다. 사막을 횡단하는 기상천외한 행군과 야르무크 전투에서의 포위 전술은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슬람 전통은 그의 전장 전술과 효과적인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다.
11.2. 긍정적 평가
역사가 리처드 블랙번에 따르면, 초기 자료에서 칼리드를 폄하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시대, 그리고 시리아 정복 시대 동안 "이슬람의 가장 강력한 전사"로 발전했다. 케네디는 "위대한 장군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져 왔고, 아랍 세계 전역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고 언급한다. 수니파 무슬림들은 칼리드를 전쟁 영웅으로 숭배하는 반면, 많은 시아파 무슬림들은 그를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 처형과 이슬람 전통의 애도 기간을 어기고 그의 과부와 즉시 결혼한 것에 대해 전쟁 범죄자로 간주한다.
11.3. 비판과 논란
칼리드의 군사 행동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바누 자디마 부족에 대한 공격과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 처형 사건은 그의 잔혹함과 독단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바누 자디마 사건에서는 무함마드의 의지와 달리 부족민들을 살해하여 무함마드의 분노를 샀다.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 처형은 이슬람으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으며, 그의 과부와 즉시 결혼한 것은 이슬람 법적 관습과 애도 기간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칼리드의 군사적 명성과 인기는 2대 칼리프 우마르에게 우려를 안겨주었다. 우마르는 백성들이 알라의 은혜가 아닌 칼리드의 개인적인 능력에 승리의 공을 돌려 개인 숭배로 이어질까 봐 염려했다. 이러한 우려는 칼리드의 군 지휘권 박탈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칼리드가 전리품을 부족 귀족들에게 아낌없이 분배하여 초기 무슬림 개종자들에게 불이익을 주었다는 비난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란들은 칼리드가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이 이슬람 공동체의 윤리적 가치와 정치적 안정성에 대한 논쟁을 야기했음을 보여준다. 시아파 무슬림은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 처형 등의 이유로 칼리드를 전쟁 범죄자로 간주하기도 한다.
11.4. 후대에 미친 영향
칼리드의 군사적 명성과 업적은 후대 이슬람 군사 사상가들과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혁신적인 전술과 리더십은 이슬람 제국 확장의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되며, 많은 후대 장군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아랍 세계 전역에서 여전히 위대한 장군으로 기억되며, 많은 거리와 장소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논란이 되는 행동들은 이슬람 법학자들과 역사가들 사이에서 정의와 윤리에 대한 논쟁을 지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군사적 영광과 함께 권력의 남용, 그리고 공동체의 통합을 위한 지도자의 책임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있다.
12. 가족 및 후손
칼리드의 장남은 술라이만이었고, 이로 인해 그는 '술라이만의 아버지'라는 뜻의 쿠냐(kunya쿤야아랍어, 부칭)인 아부 술라이만(Abu Sulayman아부 술라이만아랍어)으로 불렸다. 칼리드는 카삼 부족의 저명한 족장이자 시인인 아나스 이븐 무드릭의 딸 아스마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압둘 라흐만 이븐 칼리드는 아랍-비잔티움 전쟁에서 명망 높은 지휘관이 되었고, 시리아 총독이자 후일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창시자이자 초대 칼리파인 무아위야 1세의 측근이 되어 홈스-킨나스린-자지라 지역의 부지사를 역임했다. 칼리드의 또 다른 아들인 무하지르 이븐 칼리드는 656~661년에 칼리파로 통치했던 알리의 지지자였으며, 제1차 무슬림 내전 중 657년 시핀 전투에서 무아위야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 사망했다. 압둘 라흐만이 666년에 사망한 후, 이는 무아위야의 명령에 의한 독살로 알려져 있는데, 무하지르의 아들 칼리드는 그의 삼촌의 살해에 대한 복수를 시도했고 체포되었지만, 무아위야는 나중에 칼리드가 피값을 지불한 후 그를 풀어주었다. 압둘 라흐만의 아들 칼리드는 668년 또는 669년에 비잔티움 제국에 맞선 해군 작전의 지휘관이었다.
역사 기록에서 칼리드 가족 구성원들의 추가적인 중요한 역할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남성 직계 후손은 750년 우마이야 칼리파국이 붕괴될 무렵 또는 그 직후에 시리아에서 발생한 역병으로 그의 남성 후손 40명 모두가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고 11세기 역사가 이븐 하즘은 기록한다. 그 결과, 그의 거주지와 메디나의 여러 다른 주택을 포함한 그의 가족 재산은 칼리드의 형제 알왈리드 이븐 알왈리드의 증손자 아유브 이븐 살라마에게 상속되었다. 이 재산들은 적어도 9세기 후반까지 아유브의 후손들이 소유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칼리드는 무함마드 예언자로부터 메디나의 예언자의 모스크 바로 동쪽에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한 토지를 부여받았으며, 이는 무함마드 사망 전에 완공되었다. 비교적 늦은 개종(대부분의 이용 가능한 토지는 이미 초기 개종자들에게 부여된 상태)으로 인해 작은 부지였지만, 칼리드는 크기에 대해 불평한 후 무함마드로부터 메디나의 다른 집들보다 더 높게 지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칼리드는 그의 집을 자선 기금으로 선언하여 후손들이 판매하거나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을 금지했다. 12세기 시리아의 젠기 왕조의 수석 카디 (이슬람 판사)였던 카말 알딘 무함마드 알샤흐라주리는 메디나에 있던 칼리드의 집을 매입하여 남성을 위한 리바트 ('자선 숙소' 또는 '호스피스')로 개조했다。
12세기 아랍 시인 이븐 알카이사라니의 가족은 무하지르 이븐 칼리드의 후손임을 주장했지만, 13세기 역사가 이븐 칼리칸은 이 주장이 칼리드의 혈통이 초기 이슬람 시대에 단절되었다는 아랍 역사가 및 계보학자들의 합의와 모순된다고 언급한다. 여성 직계 후손은 살아남았을 수 있으며, 15세기 홈스의 수피 종교 지도자 시라즈 알딘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알마크주미가 이를 주장했다. 오스만 제국에 합병될 때까지 아나톨리아에서 공국을 통치했던 이스판디야르 왕조의 지도자 키질 아흐메드 베이는 자신의 왕조가 칼리드의 후손임을 조작했다. 16세기 인도의 통치자 셰르 샤 수리 휘하의 수르 부족 또한 칼리드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13. 기념 및 유적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시대(1182년~1260년)부터 홈스는 칼리드의 묘지와 모스크가 있는 장소로 명성을 얻었다. 12세기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는 묘지에 칼리드와 그의 아들 압둘 라흐만의 묘가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무슬림 전통은 칼리드의 묘가 이 도시에 있다고 믿어왔다. 이 건물은 최초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인 살라흐 앗 딘 (재위 1171년~1193년)에 의해 변경되었고, 13세기에도 다시 변경되었다. 맘루크 술탄국의 술탄 바이바르스 (재위 1260년~1277년)는 1266년 홈스의 칼리드 영묘에 자신을 기리는 비문을 새겨 자신의 군사적 업적을 칼리드의 업적과 연결시키려 했다. 17세기 칼리드 영묘를 방문한 무슬림 학자 압둘 가니 알나불시는 칼리드가 그곳에 묻혔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그 묘가 무아위야의 손자 칼리드 이븐 야지드의 것이라는 다른 이슬람 전통도 언급했다. 현재의 모스크는 1908년 오스만 제국 당국이 건물을 재건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4. 관련 항목
- 이슬람의 역사
- 초기 무슬림 정복
- 아랍-비잔티움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