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및 경력 초기
하라다 마사히코는 홋카이도 가미카와정에서 건설 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6살 위의 형과 함께 4인 가족으로 성장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의 특성상 집 근처에 스키장이 있어 어린 시절부터 스키는 그의 삶의 일부였다.
1.1. 유년기와 교육
하라다 마사히코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스키점프를 시작하여 스키 점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의 첫 점프는 약 7 m였지만, 당시 그에게는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엄청난 쾌감이었다고 회고한다. 가미카와정립 가미카와 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전국 중학교 선수권 대회에서 두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도카이 대학 부속 제4고등학교(현 도카이 대학 부속 삿포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인터하이(전국 고등학교 종합 체육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학창 시절 하라다는 울보에 낯가림이 심한 성격이었으나, 스키 점프를 통해 정신적으로 성장하며 현재의 밝은 웃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아오치 세이지와 그가 소속된 유키지루시 유업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다.
1.2. 프로 경력 시작
고등학교 졸업 후 1987년에 유키지루시 유업(현 유키지루시 메그밀크)에 입사하여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하라다의 실력은 일본 국가대표에 발탁될 정도였으나, 세계 정상급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스키 날을 V자로 벌려 비행하는 'V-점프'를 조기에 도입하여 시도했다. 이는 그의 비거리를 크게 늘리는 데 기여했으며, 23세에 1992년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에 처음 출전하며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1990년대 이후 하라다는 일본을 대표하는 스키점프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2. 스키 점프 선수 경력
하라다 마사히코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 스키 점프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였다. 그는 독특한 점프 스타일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국제 무대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동계 올림픽과 FIS 노르딕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에서 다수의 메달을 획득했다.
2.1. 올림픽
하라다 마사히코는 1992년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까지 총 5회 동계 올림픽에 출전하며 일본 스키 점프의 상징적인 존재로 활약했다.
2.1.1.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은 하라다 마사히코의 선수 경력에 있어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대회에서 하라다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주목받았으나, 이러한 기대는 그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스키점프 라지힐 단체전에서 일본은 마지막 점프만을 남겨두고 2위 독일을 무려 55점 차이로 크게 앞서고 있었다. 팀의 마지막 주자인 하라다는 105 m 이상만 뛰어도 일본의 금메달이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중압감에 휩싸인 하라다는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았고, 결국 97.5 m라는 실패 점프에 그쳤다. 이로 인해 일본은 독일에 역전을 허용하며 아쉽게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착지 직후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은 하라다에게 가사이 노리아키, 니시카타 진야, 오카베 다카노부 등 팀 동료들이 달려와 "은메달도 자랑스러운 거니 고개를 드세요"라며 위로했다. 하라다는 훗날 동료들의 이 따뜻한 격려가 그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이 실패 이후 하라다는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헤프게 웃지 마라", "너 때문에 졌다"는 등의 비난을 받으며 1년 이상 집에 대한 괴롭힘을 당하는 등 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또한 동료인 후나키 가즈요시의 점프 폼을 의식하며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당신답게 뛰면 된다"는 격려에 힘입어 1995-96 시즌부터 원래의 폼을 되찾았고, 점차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2.1.2.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은 하라다 마사히코에게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의 실패를 씻어내고 영웅으로 거듭나는 기회가 되었다. 직전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자로서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지만, 국내 언론에서는 그를 "본선에 약한 선수"로 불안하게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는 개최국에서 금메달을 획득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지고 경기에 임했다.
개인 노멀힐에서는 1차 시기에서 91.5 m를 기록하며 선두에 나섰으나, 2차 시기에서는 예상치 못한 경기 중단과 불리한 바람의 영향으로 비거리가 줄어들어 5위에 머물렀다. 개인 라지힐에서는 1차 시기에서 강한 맞바람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120 m에 그치며 6위로 밀려났다. 당시 하라다는 "세계에서 가장 느린 속도에 강한 선수"로 평가받았지만, 노멀힐에서의 부담감과 경직된 자세로 인해 도약에 실패한 결과였다. 그러나 2차 시기에서 하라다는 "두 다리가 부러져도 좋다"는 비장한 각오로 137 m의 올림픽 기록 타이 점프를 성공시키며 최장 비거리를 기록했다. 이 점프는 비록 착지 자세가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를 6위에서 3위로 끌어올려 극적으로 동메달을 획득하게 했다. 그의 비거리가 자동 측정 가능한 135 m를 넘어섰기 때문에, 하라다의 기록은 마지막 점프 선수(안드레아스 비트헬츨)의 점프가 끝난 약 10분 후에야 발표되었다.
라지힐 단체전에서 하라다는 3그룹의 1차 시기에서 악천후 속에서 점프를 해야만 했다. 거센 눈보라로 인해 거의 앞을 볼 수 없었으며, 활주로에 쌓인 눈 때문에 스키가 미끄러지지 않아 활주 속도가 느려졌다. 하라다는 같은 그룹의 다른 선수들보다도 훨씬 느린 87.1 km/h의 속도로 도약하여 79.5 m에 그쳤다. 기술적으로는 실패한 점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본인들은 4년 전의 악몽을 떠올렸다. 당시 오카베 다카노부는 "그 악천후에서는 하라다 선수가 아니었다면 우리(오카베, 사이토, 후나키)는 더 짧게 떨어져 금메달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하라다를 옹호하기도 했다.
1차 시기 종료 시 일본은 4위로 밀려났으나, 선두와의 점수 차이가 크지 않아 역전 우승의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대설로 인해 1차 시기 종료 후 경기가 중단될 가능성도 있었으나, 니시카타 진야, 다카하시 류지, 가사이 요시코 등 25명의 테스트 점프 선수들이 악천후 속에서도 단 한 명의 넘어짐 없이 시기를 완수하며 경기 재개가 가능함을 입증했다.
하라다는 2차 시기에서 다시 한번 "두 다리가 복잡 골절되어도 좋다"는 각오로 137 m의 최장 비거리 점프를 선보이며 금메달 획득의 주역이 되었다. 점프 후 하라다는 엄청난 압박감에서 해방되어 몸의 힘이 풀린 채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흐느끼면서도 다음 점프를 준비하던 동료 후나키 가즈요시를 향해 "후나키~! 후나키~!"라고 외치며 응원을 보냈다. 금메달 확정 직후 NHK와의 인터뷰에서는 "오늘은 나가노니까", "네 명이 바통을 넘겨줬어요", "1차 시기 후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또 모두에게 폐를 끼치는 건가 싶어서... 정말 힘들었어...", "하지만... 지붕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흐느끼면서도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하라다는 이 대회에서 개인 노멀힐, 개인 라지힐, 단체전 모두에서 최장 비거리를 기록했다. 또한, 1998-1999 시즌 월드컵에서는 시즌 5승을 기록하며 개인 최고 종합 순위인 4위를 달성했다.
2.1.3. 그 외 올림픽 출전
- 1992년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 첫 올림픽 출전으로 개인 라지힐 4위를 기록하며 일본 선수 중 3대회 만에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개인 노멀힐은 14위, 단체 라지힐은 4위에 올랐다. 그는 이 대회가 가장 즐거운 올림픽이었다고 회상하며, 압박감 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뛰어 세계 무대에서 자신을 알릴 수 있었던 것에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개인전에서는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하고 개인 노멀힐과 라지힐 모두 20위에 그쳤다. 단체전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37세의 나이로 5회 연속 올림픽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개인 노멀힐 예선에서 95 m를 기록했으나, 점프 직후 무작위 검사에서 스키판 길이가 국제 스키 연맹(FIS) 규정에 위반되는 것으로 밝혀져 실격 처리되었다. 2005년에 도입된 BMI 규정에 따르면, 하라다의 등록 신장 174 cm에 허용되는 스키 길이는 신장의 146%(254 cm)까지이며, 이 경우 스키복과 부츠를 착용한 체중이 61 kg 이상이어야 했다. 그러나 하라다의 체중은 60.8 kg으로, 단 200 g이 부족했다. 실제로 그가 사용한 스키판은 253 cm였다. 하지만 유키지루시 스키부와 전일본 스키 연맹에 공식 등록된 하라다의 당시 시즌 신장은 173 cm였고, 이 경우 60 kg 이상이면 253 cm까지의 스키판 사용이 허용되었다. 과거 4차례 올림픽 출전 시 그의 등록 신장도 모두 173 cm였다. 하라다는 "초보적인 실수였다. 선발해주셨는데 죄송하다"고 말하며 모든 책임을 본인에게 돌렸으나, 왜 하라다의 신장이 1 cm 더 높게 등록되었는지는 불분명하며, 일본 팀의 확인 및 지원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 대회에서의 실격은 하라다에게는 선수 생활의 마지막 주요 공식 대회가 되었다.
2.2. FIS 노르딕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
하라다 마사히코는 FIS 노르딕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 1991년 발 디 피엠메 대회** (이탈리아)
- 개인 노멀힐: 15위
- 개인 라지힐: 17위
- 1993년 팔룬 대회** (스웨덴)
- 개인 노멀힐:
금메달 금메달
- 개인 라지힐: 4위
- 단체 라지힐: 5위 (스다 겐진, 오카베 다카노부, 가사이 노리아키, 하라다 마사히코)
- 개인 노멀힐:
- 1995년 선더베이 대회** (캐나다)
- 개인 노멀힐: 52위
- 1997년 트론헤임 대회** (노르웨이)
- 개인 노멀힐:
은메달 은메달
- 개인 라지힐:
금메달 금메달
- 단체 라지힐:
은메달 은메달 (후나키 가즈요시, 오카베 다카노부, 하라다 마사히코, 사이토 히로야)
- 개인 노멀힐:
- 1999년 람자우 대회** (오스트리아)
- 개인 노멀힐:
동메달 동메달
- 개인 라지힐: 6위
- 단체 라지힐:
은메달 은메달 (가사이 노리아키, 미야히라 슈지, 하라다 마사히코, 후나키 가즈요시)
- 개인 노멀힐:
- 2001년 라흐티 대회** (핀란드)
- 개인 노멀힐: 5위
- 개인 라지힐: 33위
- 단체 노멀힐: 4위 (미야히라 슈지, 오카베 다카노부, 하라다 마사히코, 가사이 노리아키)
- 단체 라지힐: 4위 (미야히라 슈지, 요시오카 가즈야, 가사이 노리아키, 하라다 마사히코)
2.3. FIS 스키 점프 월드컵
FIS 스키 점프 월드컵의 개인 및 단체전 세부 기록은 다음과 같다.
- 개인전 통산 9승 (2위 3회, 3위 9회)
- 단체전 통산 3승 (2위 2회, 3위 2회)
- 첫 출전: 1987년 1월 24일, 일본 삿포로 - 15위
- 최종 출전: 2002년 12월 15일, 독일 티티제-노이슈타트
- 시즌 종합 최고 순위: 1997-98 시즌 4위
2.3.1. 시즌 종합 순위
하라다의 월드컵 시즌별 개인 종합 순위 및 4힐 토너먼트, 스키 플라잉, 노르딕 토너먼트 순위는 다음과 같다.
시즌 | 종합 | 4힐 토너먼트 | 스키 플라잉 | 노르딕 토너먼트 | 스키점프 컵 |
---|---|---|---|---|---|
1986/87 | 85 | - | N/A | N/A | N/A |
1987/88 | - | 80 | N/A | N/A | N/A |
1989/90 | 52 | - | N/A | N/A | N/A |
1990/91 | - | 61 | - | N/A | N/A |
1991/92 | 29 | - | - | N/A | N/A |
1992/93 | 16 | 6 | - | N/A | N/A |
1993/94 | 15 | 21 | - | N/A | N/A |
1994/95 | 59 | 64 | - | N/A | N/A |
1995/96 | 5 | 18 | - | N/A | align=center |
1996/97 | 29 | 42 | - | 13 | 24 |
1997/98 | 4 | 10 | 21 | 13 | align=center |
1998/99 | 9 | 8 | 8 | 18 | 9 |
1999/00 | 11 | 6 | 15 | 53 | 11 |
2000/01 | 26 | 21 | 50 | 53 | N/A |
2001/02 | 38 | 31 | N/A | 59 | N/A |
2002/03 | - | - | N/A | - | N/A |
2.3.2. 개인전 우승
하라다 마사히코는 월드컵 개인전에서 총 9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No. | 시즌 | 날짜 | 장소 | 힐 | 규모 |
---|---|---|---|---|---|
1 | 1995/96 | 1995년 12월 8일 | 빌라흐 | 빌라허 알펜아레나 K90 | 노멀힐 |
2 | 1996년 2월 18일 | 아이언마운틴 | 파인 마운틴 스키 점프 K120 | 라지힐 | |
3 | 1996년 3월 1일 | 라흐티 | 살파우셀카 K90 (야간) | 노멀힐 | |
4 | 1996년 3월 3일 | 라흐티 | 살파우셀카 K114 | 라지힐 | |
5 | 1997/98 | 1997년 12월 8일 | 빌라흐 | 빌라허 알펜아레나 K90 | 노멀힐 |
6 | 1997년 12월 12일 | 하라호프 | 체르타크 K90 | 노멀힐 | |
7 | 1997년 12월 21일 | 엥겔베르그 | 그로스-티틀리스-샨체 K120 | 라지힐 | |
8 | 1998년 1월 11일 | 람자우암다흐슈타인 | 마텐샨체 K90 | 노멀힐 | |
9 | 1998년 3월 13일 | 트론헤임 | 그라노센 K120 | 라지힐 |
2.3.3. 단체전 우승
하라다 마사히코는 월드컵 단체전에서 총 3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단체전 우승 대회 | |||||
---|---|---|---|---|---|
회수 | 시즌 | 날짜 | 개최지 | 종목 | 멤버 |
1 | 1992/93 | 1993년 3월 27일 | 플라니차 | 라지힐 | 하라다 마사히코 가사이 노리아키 오카베 다카노부 아자키 나오키 |
2 | 1995/96 | 1996년 3월 2일 | 라흐티 | 라지힐 | 하라다 마사히코 니시카타 진야 오카베 다카노부 사이토 히로야 |
3 | 2000/01 | 2001년 1월 19일 | 파크시티 | 라지힐 | 후나키 가즈요시 요시오카 가즈야 하라다 마사히코 가사이 노리아키 |
2.4. 점프 스타일 및 기술
하라다 마사히코의 점프 스타일은 다른 선수들과 비교할 때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약 시 위로 높이 뛰어오르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비행 궤적이 다른 선수들보다 높은 곡선을 그리며 낙하하는 형태였다. 이는 하라다의 뛰어난 도약력 덕분에 가능한 스타일이었으며, 활주 속도가 느린 조건에서도 비거리가 크게 줄어들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도약 타이밍이 맞지 않을 경우,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처럼 큰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단점도 존재했다.
릴레함메르 올림픽에서의 실패 이후 슬럼프에 빠졌을 때, 그는 후나키 가즈요시와 같은 낮은 비행 궤적의 점프 스타일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더욱 깊은 부진에 빠졌다. 하지만 1995년 여름경부터 다시 원래의 높은 점프 스타일로 돌아가면서 슬럼프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후나키의 스타일을 통해 얻은 좋은 부분들이 결합되어, 높은 임팩트를 가지면서도 타이밍이 다소 맞지 않아도 비거리 손실을 줄일 수 있는 '하라다형' 스타일을 완성했다. 이 시기 하라다는 다른 선수들보다 약 2 m 짧은 활주만으로도 K점을 크게 넘는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그의 이러한 기술은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단체전 1차 시기에서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도 비록 비거리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한 점프를 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이후 하라다는 당시 일본 점프계의 주류였던, 도약 동작을 최대한 억제하는 스타일로 변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슬럼프를 겪은 후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직전에는 활주 자세에서 무릎 각도를 더 예각으로 만드는 변화를 주었다. 이 스타일은 파워를 얻는 데 유리하지만, 방향성 및 타이밍 조절이 어려워 임팩트를 중시하는 자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렵부터 세계 스키점프 스타일의 주류는 과거 하라다가 실천했던 "저속에서도 비거리를 늘리는 높은 점프"로 바뀌어갔고, 당시 세계 기술이 하라다에게 겨우 따라잡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현재 세계 스키점프계를 석권하고 있는 시몬 아만 역시 전형적인 하라다형 점퍼로 평가받는다.
또한, 하라다는 비거리가 너무 길어 착지 시 텔레마크 자세를 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비행 자세 점수에서 불리하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비거리를 조절하여 텔레마크를 넣을 수 있었던 경기에서는 결코 낮은 점수를 받지 않았다. 1998년 9월 12일 하쿠바에서 열린 서머 그랑프리 대회에서는 5명의 비행 자세 심판 전원에게 20점 만점을 받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3. 은퇴 및 지도자 경력
하라다 마사히코는 2006년 3월 20일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하고, 3월 25일 이토컵 시즌 파이널 오쿠라야마 나이트 점프 대회를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은퇴 후에도 그는 유키지루시 유업에 남아 유키지루시 메그밀크 스키부 코치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스키점프 중계 해설자로도 활약하고 있다. 2014년 4월에는 사이토 히로야 전 감독의 뒤를 이어 동 스키부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2015년 10월에는 전일본 스키 연맹 이사로 선임되어 일본 스키계 행정가로서의 활동도 시작했다.
2021년 4월에는 유키지루시 메그밀크 스키부 총감독으로 승진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 일본 선수단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023년 4월부터는 유키지루시 메그밀크 스키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후배 선수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선수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현역 시절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는지 깨달았으며, 일본 스키계에 은혜를 갚고자 전일본 스키 연맹 이사직을 수락했다고 밝혔다.
4. 인물 및 대중적 이미지
하라다 마사히코는 뛰어난 선수 경력뿐만 아니라 특유의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인 면모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릴레함메르에서의 쓰라린 실패와 나가노에서의 극적인 재기 과정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정신력과 인간 승리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유럽에서 "Happy Harada해피 하라다영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오스트리아의 안드레아스 골드베르거와 함께 인기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인물됨과 국제적인 인지도를 바탕으로 2007년 삿포로시에서 개최된 2007년 FIS 노르딕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의 특별 홍보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겉으로는 항상 밝고 유쾌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하라다의 내면은 매우 진지하고 성실하다. 그는 변명이나 불평을 일절 하지 않으며, 고민 또한 혼자 삭이는 성격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슬럼프 시기에 적절한 지도를 받지 못하거나,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실격 사태 시 코치나 스태프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오랜 기간 일본 스키점프계를 지탱하며 수많은 실패와 대점프를 통해 스키 점프의 호쾌함, 어려움, 훌륭함, 그리고 애절함을 팬들에게 온전히 전달해 온 그는 "미스터 점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고향인 가미카와정에는 하라다의 이름을 딴 NPO 법인 "스마일 하라다"가 설립되어 있으며, 하라다는 직접 운영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꼬마 하라다컵 점프 대회" 등 법인이 주최하는 행사에 주빈으로 참여하여 꿈나무들을 격려하고 있다.
하라다는 나가노 동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중 후나키 가즈요시나 시미즈 히로야(스피드스케이팅)가 소속 기업을 떠나 프로 선수로 전향한 것과 달리, 소속사인 유키지루시 유업에 대한 강한 애사심을 바탕으로 현역 은퇴 후에도 계속해서 회사에 남아 스키 점프 활동에 기여했다. 그의 이러한 애사심은 유키지루시 유업이 주최한 올림픽 축승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우리 회사의 우유 덕분입니다"라는 농담 섞인 발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00년에 발생한 유키지루시 집단 식중독 사건 당시에는 하라다 역시 사과 기자회견에 참석해야 했으며, 회사의 스포츠 활동 자숙으로 인해 하라다 개인에게도 악영향이 미쳤다. 그러나 경영 재건의 일환으로 유키지루시 유업이 대부분의 스포츠 활동에서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키점프 부만은 존속시켰고 하라다는 계속해서 회사 직원으로서 경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5. 주요 경기 기록
하라다 마사히코의 주요 국제 및 국내 대회 경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5.1. 동계 올림픽
참가한 동계 올림픽 각 종목의 세부 기록을 연도별로 정리한다.
- 1992년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 (프랑스)
- 개인 노멀힐: 14위
- 개인 라지힐: 4위
- 단체 라지힐: 4위 (우에하라지 지로, 하라다 마사히코, 가사이 노리아키, 스다 겐진)
-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 (노르웨이)
- 개인 노멀힐: 55위 (2차 시기 실패 점프 54.5 m)
- 개인 라지힐: 13위
- 단체 라지힐:
은메달 은메달 (니시카타 진야, 오카베 다카노부, 가사이 노리아키, 하라다 마사히코)
-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일본)
- 개인 노멀힐: 5위
- 개인 라지힐:
동메달 동메달
- 단체 라지힐:
금메달 금메달 (오카베 다카노부, 사이토 히로야, 하라다 마사히코, 후나키 가즈요시)
-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 (미국)
- 개인 노멀힐: 20위
- 개인 라지힐: 20위
- 단체 라지힐: 5위 (미야히라 슈지, 야마다 다이키, 하라다 마사히코, 후나키 가즈요시)
-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이탈리아)
- 개인 노멀힐: 실격
5.2. FIS 노르딕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
참가한 FIS 노르딕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 각 종목의 세부 기록을 연도별로 정리한다.
- 1991년 발 디 피엠메 대회** (이탈리아)
- 개인 노멀힐: 15위
- 개인 라지힐: 17위
- 1993년 팔룬 대회** (스웨덴)
- 개인 노멀힐:
금메달 금메달
- 개인 라지힐: 4위
- 단체 라지힐: 5위 (스다 겐진, 오카베 다카노부, 가사이 노리아키, 하라다 마사히코)
- 개인 노멀힐:
- 1995년 선더베이 대회** (캐나다)
- 개인 노멀힐: 52위
- 1997년 트론헤임 대회** (노르웨이)
- 개인 노멀힐:
은메달 은메달
- 개인 라지힐:
금메달 금메달
- 단체 라지힐:
은메달 은메달 (후나키 가즈요시, 오카베 다카노부, 하라다 마사히코, 사이토 히로야)
- 개인 노멀힐:
- 1999년 람자우 대회** (오스트리아)
- 개인 노멀힐:
동메달 동메달
- 개인 라지힐: 6위
- 단체 라지힐:
은메달 은메달 (가사이 노리아키, 미야히라 슈지, 하라다 마사히코, 후나키 가즈요시)
- 개인 노멀힐:
- 2001년 라흐티 대회** (핀란드)
- 개인 노멀힐: 5위
- 개인 라지힐: 33위
- 단체 노멀힐: 4위 (미야히라 슈지, 오카베 다카노부, 하라다 마사히코, 가사이 노리아키)
- 단체 라지힐: 4위 (미야히라 슈지, 요시오카 가즈야, 가사이 노리아키, 하라다 마사히코)
5.3. FIS 스키 점프 월드컵
FIS 스키 점프 월드컵의 개인 및 단체전 세부 기록은 다음과 같다.
- 개인전 통산 9승 (2위 3회, 3위 9회)
- 단체전 통산 3승 (2위 2회, 3위 2회)
- 첫 출전: 1987년 1월 24일, 일본 삿포로 - 15위
- 최종 출전: 2002년 12월 15일, 독일 티티제-노이슈타트
- 시즌 종합 최고 순위: 1997-98 시즌 4위
5.3.1. 시즌 종합 순위
하라다의 월드컵 시즌별 개인 종합 순위 및 4힐 토너먼트, 스키 플라잉, 노르딕 토너먼트 순위는 다음과 같다.
시즌 | 종합 | 4힐 토너먼트 | 스키 플라잉 | 노르딕 토너먼트 | 스키점프 컵 |
---|---|---|---|---|---|
1986/87 | 85 | - | N/A | N/A | N/A |
1987/88 | - | 80 | N/A | N/A | N/A |
1989/90 | 52 | - | N/A | N/A | N/A |
1990/91 | - | 61 | - | N/A | N/A |
1991/92 | 29 | - | - | N/A | N/A |
1992/93 | 16 | 6 | - | N/A | N/A |
1993/94 | 15 | 21 | - | N/A | N/A |
1994/95 | 59 | 64 | - | N/A | N/A |
1995/96 | 5 | 18 | - | N/A | align=center |
1996/97 | 29 | 42 | - | 13 | 24 |
1997/98 | 4 | 10 | 21 | 13 | align=center |
1998/99 | 9 | 8 | 8 | 18 | 9 |
1999/00 | 11 | 6 | 15 | 53 | 11 |
2000/01 | 26 | 21 | 50 | 53 | N/A |
2001/02 | 38 | 31 | N/A | 59 | N/A |
2002/03 | - | - | N/A | - | N/A |
5.3.2. 개인전 우승
하라다 마사히코는 월드컵 개인전에서 총 9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No. | 시즌 | 날짜 | 장소 | 힐 | 규모 |
---|---|---|---|---|---|
1 | 1995/96 | 1995년 12월 8일 | 빌라흐 | 빌라허 알펜아레나 K90 | 노멀힐 |
2 | 1996년 2월 18일 | 아이언마운틴 | 파인 마운틴 스키 점프 K120 | 라지힐 | |
3 | 1996년 3월 1일 | 라흐티 | 살파우셀카 K90 (야간) | 노멀힐 | |
4 | 1996년 3월 3일 | 라흐티 | 살파우셀카 K114 | 라지힐 | |
5 | 1997/98 | 1997년 12월 8일 | 빌라흐 | 빌라허 알펜아레나 K90 | 노멀힐 |
6 | 1997년 12월 12일 | 하라호프 | 체르타크 K90 | 노멀힐 | |
7 | 1997년 12월 21일 | 엥겔베르그 | 그로스-티틀리스-샨체 K120 | 라지힐 | |
8 | 1998년 1월 11일 | 람자우암다흐슈타인 | 마텐샨체 K90 | 노멀힐 | |
9 | 1998년 3월 13일 | 트론헤임 | 그라노센 K120 | 라지힐 |
5.3.3. 단체전 우승
하라다 마사히코는 월드컵 단체전에서 총 3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단체전 우승 대회 | |||||
---|---|---|---|---|---|
회수 | 시즌 | 날짜 | 개최지 | 종목 | 멤버 |
1 | 1992/93 | 1993년 3월 27일 | 플라니차 | 라지힐 | 하라다 마사히코 가사이 노리아키 오카베 다카노부 아자키 나오키 |
2 | 1995/96 | 1996년 3월 2일 | 라흐티 | 라지힐 | 하라다 마사히코 니시카타 진야 오카베 다카노부 사이토 히로야 |
3 | 2000/01 | 2001년 1월 19일 | 파크시티 | 라지힐 | 후나키 가즈요시 요시오카 가즈야 하라다 마사히코 가사이 노리아키 |
5.4. 점프 스타일 및 기술
하라다 마사히코의 점프 스타일은 다른 선수들과 비교할 때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약 시 위로 높이 뛰어오르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비행 궤적이 다른 선수들보다 높은 곡선을 그리며 낙하하는 형태였다. 이는 하라다의 뛰어난 도약력 덕분에 가능한 스타일이었으며, 활주 속도가 느린 조건에서도 비거리가 크게 줄어들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도약 타이밍이 맞지 않을 경우,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처럼 큰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단점도 존재했다.
릴레함메르 올림픽에서의 실패 이후 슬럼프에 빠졌을 때, 그는 후나키 가즈요시와 같은 낮은 비행 궤적의 점프 스타일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더욱 깊은 부진에 빠졌다. 하지만 1995년 여름경부터 다시 원래의 높은 점프 스타일로 돌아가면서 슬럼프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후나키의 스타일을 통해 얻은 좋은 부분들이 결합되어, 높은 임팩트를 가지면서도 타이밍이 다소 맞지 않아도 비거리 손실을 줄일 수 있는 '하라다형' 스타일을 완성했다. 이 시기 하라다는 다른 선수들보다 약 2 m 짧은 활주만으로도 K점을 크게 넘는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그의 이러한 기술은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단체전 1차 시기에서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도 비록 비거리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한 점프를 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이후 하라다는 당시 일본 점프계의 주류였던, 도약 동작을 최대한 억제하는 스타일로 변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슬럼프를 겪은 후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직전에는 활주 자세에서 무릎 각도를 더 예각으로 만드는 변화를 주었다. 이 스타일은 파워를 얻는 데 유리하지만, 방향성 및 타이밍 조절이 어려워 임팩트를 중시하는 자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렵부터 세계 스키점프 스타일의 주류는 과거 하라다가 실천했던 "저속에서도 비거리를 늘리는 높은 점프"로 바뀌어갔고, 당시 세계 기술이 하라다에게 겨우 따라잡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현재 세계 스키점프계를 석권하고 있는 시몬 아만 역시 전형적인 하라다형 점퍼로 평가받는다.
또한, 하라다는 비거리가 너무 길어 착지 시 텔레마크 자세를 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비행 자세 점수에서 불리하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비거리를 조절하여 텔레마크를 넣을 수 있었던 경기에서는 결코 낮은 점수를 받지 않았다. 1998년 9월 12일 하쿠바에서 열린 서머 그랑프리 대회에서는 5명의 비행 자세 심판 전원에게 20점 만점을 받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6. 은퇴 및 지도자 경력
하라다 마사히코는 2006년 3월 20일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하고, 3월 25일 이토컵 시즌 파이널 오쿠라야마 나이트 점프 대회를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은퇴 후에도 그는 유키지루시 유업에 남아 유키지루시 메그밀크 스키부 코치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스키점프 중계 해설자로도 활약하고 있다. 2014년 4월에는 사이토 히로야 전 감독의 뒤를 이어 동 스키부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2015년 10월에는 전일본 스키 연맹 이사로 선임되어 일본 스키계 행정가로서의 활동도 시작했다.
2021년 4월에는 유키지루시 메그밀크 스키부 총감독으로 승진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 일본 선수단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023년 4월부터는 유키지루시 메그밀크 스키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후배 선수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선수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현역 시절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는지 깨달았으며, 일본 스키계에 은혜를 갚고자 전일본 스키 연맹 이사직을 수락했다고 밝혔다.
7. 인물 및 대중적 이미지
하라다 마사히코는 뛰어난 선수 경력뿐만 아니라 특유의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인 면모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릴레함메르에서의 쓰라린 실패와 나가노에서의 극적인 재기 과정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정신력과 인간 승리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유럽에서 "Happy Harada해피 하라다영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오스트리아의 안드레아스 골드베르거와 함께 인기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인물됨과 국제적인 인지도를 바탕으로 2007년 삿포로시에서 개최된 2007년 FIS 노르딕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의 특별 홍보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겉으로는 항상 밝고 유쾌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하라다의 내면은 매우 진지하고 성실하다. 그는 변명이나 불평을 일절 하지 않으며, 고민 또한 혼자 삭이는 성격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슬럼프 시기에 적절한 지도를 받지 못하거나,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실격 사태 시 코치나 스태프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오랜 기간 일본 스키점프계를 지탱하며 수많은 실패와 대점프를 통해 스키 점프의 호쾌함, 어려움, 훌륭함, 그리고 애절함을 팬들에게 온전히 전달해 온 그는 "미스터 점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고향인 가미카와정에는 하라다의 이름을 딴 NPO 법인 "스마일 하라다"가 설립되어 있으며, 하라다는 직접 운영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꼬마 하라다컵 점프 대회" 등 법인이 주최하는 행사에 주빈으로 참여하여 꿈나무들을 격려하고 있다.
하라다는 나가노 동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중 후나키 가즈요시나 시미즈 히로야(스피드스케이팅)가 소속 기업을 떠나 프로 선수로 전향한 것과 달리, 소속사인 유키지루시 유업에 대한 강한 애사심을 바탕으로 현역 은퇴 후에도 계속해서 회사에 남아 스키 점프 활동에 기여했다. 그의 이러한 애사심은 유키지루시 유업이 주최한 올림픽 축승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우리 회사의 우유 덕분입니다"라는 농담 섞인 발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00년에 발생한 유키지루시 집단 식중독 사건 당시에는 하라다 역시 사과 기자회견에 참석해야 했으며, 회사의 스포츠 활동 자숙으로 인해 하라다 개인에게도 악영향이 미쳤다. 그러나 경영 재건의 일환으로 유키지루시 유업이 대부분의 스포츠 활동에서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키점프 부만은 존속시켰고 하라다는 계속해서 회사 직원으로서 경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8. 주요 경기 기록
하라다 마사히코의 주요 국제 및 국내 대회 경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8.1. 동계 올림픽
참가한 동계 올림픽 각 종목의 세부 기록을 연도별로 정리한다.
- 1992년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 (프랑스)
- 개인 노멀힐: 14위
- 개인 라지힐: 4위
- 단체 라지힐: 4위 (우에하라지 지로, 하라다 마사히코, 가사이 노리아키, 스다 겐진)
-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 (노르웨이)
- 개인 노멀힐: 55위 (2차 시기 실패 점프 54.5 m)
- 개인 라지힐: 13위
- 단체 라지힐:
은메달 은메달 (니시카타 진야, 오카베 다카노부, 가사이 노리아키, 하라다 마사히코)
-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일본)
- 개인 노멀힐: 5위
- 개인 라지힐:
동메달 동메달
- 단체 라지힐:
금메달 금메달 (오카베 다카노부, 사이토 히로야, 하라다 마사히코, 후나키 가즈요시)
-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 (미국)
- 개인 노멀힐: 20위
- 개인 라지힐: 20위
- 단체 라지힐: 5위 (미야히라 슈지, 야마다 다이키, 하라다 마사히코, 후나키 가즈요시)
-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이탈리아)
- 개인 노멀힐: 실격
8.2. FIS 노르딕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
참가한 FIS 노르딕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 각 종목의 세부 기록을 연도별로 정리한다.
- 1991년 발 디 피엠메 대회** (이탈리아)
- 개인 노멀힐: 15위
- 개인 라지힐: 17위
- 1993년 팔룬 대회** (스웨덴)
- 개인 노멀힐:
금메달 금메달
- 개인 라지힐: 4위
- 단체 라지힐: 5위 (스다 겐진, 오카베 다카노부, 가사이 노리아키, 하라다 마사히코)
- 개인 노멀힐:
- 1995년 선더베이 대회** (캐나다)
- 개인 노멀힐: 52위
- 1997년 트론헤임 대회** (노르웨이)
- 개인 노멀힐:
은메달 은메달
- 개인 라지힐:
금메달 금메달
- 단체 라지힐:
은메달 은메달 (후나키 가즈요시, 오카베 다카노부, 하라다 마사히코, 사이토 히로야)
- 개인 노멀힐:
- 1999년 람자우 대회** (오스트리아)
- 개인 노멀힐:
동메달 동메달
- 개인 라지힐: 6위
- 단체 라지힐:
은메달 은메달 (가사이 노리아키, 미야히라 슈지, 하라다 마사히코, 후나키 가즈요시)
- 개인 노멀힐:
- 2001년 라흐티 대회** (핀란드)
- 개인 노멀힐: 5위
- 개인 라지힐: 33위
- 단체 노멀힐: 4위 (미야히라 슈지, 오카베 다카노부, 하라다 마사히코, 가사이 노리아키)
- 단체 라지힐: 4위 (미야히라 슈지, 요시오카 가즈야, 가사이 노리아키, 하라다 마사히코)
8.3. FIS 스키 점프 월드컵
FIS 스키 점프 월드컵의 개인 및 단체전 세부 기록은 다음과 같다.
- 개인전 통산 9승 (2위 3회, 3위 9회)
- 단체전 통산 3승 (2위 2회, 3위 2회)
- 첫 출전: 1987년 1월 24일, 일본 삿포로 - 15위
- 최종 출전: 2002년 12월 15일, 독일 티티제-노이슈타트
- 시즌 종합 최고 순위: 1997-98 시즌 4위
8.3.1. 시즌 종합 순위
하라다의 월드컵 시즌별 개인 종합 순위 및 4힐 토너먼트, 스키 플라잉, 노르딕 토너먼트 순위는 다음과 같다.
시즌 | 종합 | 4힐 토너먼트 | 스키 플라잉 | 노르딕 토너먼트 | 스키점프 컵 |
---|---|---|---|---|---|
1986/87 | 85 | - | N/A | N/A | N/A |
1987/88 | - | 80 | N/A | N/A | N/A |
1989/90 | 52 | - | N/A | N/A | N/A |
1990/91 | - | 61 | - | N/A | N/A |
1991/92 | 29 | - | - | N/A | N/A |
1992/93 | 16 | 6 | - | N/A | N/A |
1993/94 | 15 | 21 | - | N/A | N/A |
1994/95 | 59 | 64 | - | N/A | N/A |
1995/96 | 5 | 18 | - | N/A | align=center |
1996/97 | 29 | 42 | - | 13 | 24 |
1997/98 | 4 | 10 | 21 | 13 | align=center |
1998/99 | 9 | 8 | 8 | 18 | 9 |
1999/00 | 11 | 6 | 15 | 53 | 11 |
2000/01 | 26 | 21 | 50 | 53 | N/A |
2001/02 | 38 | 31 | N/A | 59 | N/A |
2002/03 | - | - | N/A | - | N/A |
8.3.2. 개인전 우승
하라다 마사히코는 월드컵 개인전에서 총 9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No. | 시즌 | 날짜 | 장소 | 힐 | 규모 |
---|---|---|---|---|---|
1 | 1995/96 | 1995년 12월 8일 | 빌라흐 | 빌라허 알펜아레나 K90 | 노멀힐 |
2 | 1996년 2월 18일 | 아이언마운틴 | 파인 마운틴 스키 점프 K120 | 라지힐 | |
3 | 1996년 3월 1일 | 라흐티 | 살파우셀카 K90 (야간) | 노멀힐 | |
4 | 1996년 3월 3일 | 라흐티 | 살파우셀카 K114 | 라지힐 | |
5 | 1997/98 | 1997년 12월 8일 | 빌라흐 | 빌라허 알펜아레나 K90 | 노멀힐 |
6 | 1997년 12월 12일 | 하라호프 | 체르타크 K90 | 노멀힐 | |
7 | 1997년 12월 21일 | 엥겔베르그 | 그로스-티틀리스-샨체 K120 | 라지힐 | |
8 | 1998년 1월 11일 | 람자우암다흐슈타인 | 마텐샨체 K90 | 노멀힐 | |
9 | 1998년 3월 13일 | 트론헤임 | 그라노센 K120 | 라지힐 |
8.3.3. 단체전 우승
하라다 마사히코는 월드컵 단체전에서 총 3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단체전 우승 대회 | |||||
---|---|---|---|---|---|
회수 | 시즌 | 날짜 | 개최지 | 종목 | 멤버 |
1 | 1992/93 | 1993년 3월 27일 | 플라니차 | 라지힐 | 하라다 마사히코 가사이 노리아키 오카베 다카노부 아자키 나오키 |
2 | 1995/96 | 1996년 3월 2일 | 라흐티 | 라지힐 | 하라다 마사히코 니시카타 진야 오카베 다카노부 사이토 히로야 |
3 | 2000/01 | 2001년 1월 19일 | 파크시티 | 라지힐 | 후나키 가즈요시 요시오카 가즈야 하라다 마사히코 가사이 노리아키 |
8.4. 점프 스타일 및 기술
하라다 마사히코의 점프 스타일은 다른 선수들과 비교할 때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약 시 위로 높이 뛰어오르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비행 궤적이 다른 선수들보다 높은 곡선을 그리며 낙하하는 형태였다. 이는 하라다의 뛰어난 도약력 덕분에 가능한 스타일이었으며, 활주 속도가 느린 조건에서도 비거리가 크게 줄어들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도약 타이밍이 맞지 않을 경우,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처럼 큰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단점도 존재했다.
릴레함메르 올림픽에서의 실패 이후 슬럼프에 빠졌을 때, 그는 후나키 가즈요시와 같은 낮은 비행 궤적의 점프 스타일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더욱 깊은 부진에 빠졌다. 하지만 1995년 여름경부터 다시 원래의 높은 점프 스타일로 돌아가면서 슬럼프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후나키의 스타일을 통해 얻은 좋은 부분들이 결합되어, 높은 임팩트를 가지면서도 타이밍이 다소 맞지 않아도 비거리 손실을 줄일 수 있는 '하라다형' 스타일을 완성했다. 이 시기 하라다는 다른 선수들보다 약 2 m 짧은 활주만으로도 K점을 크게 넘는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그의 이러한 기술은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단체전 1차 시기에서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도 비록 비거리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한 점프를 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이후 하라다는 당시 일본 점프계의 주류였던, 도약 동작을 최대한 억제하는 스타일로 변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슬럼프를 겪은 후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직전에는 활주 자세에서 무릎 각도를 더 예각으로 만드는 변화를 주었다. 이 스타일은 파워를 얻는 데 유리하지만, 방향성 및 타이밍 조절이 어려워 임팩트를 중시하는 자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렵부터 세계 스키점프 스타일의 주류는 과거 하라다가 실천했던 "저속에서도 비거리를 늘리는 높은 점프"로 바뀌어갔고, 당시 세계 기술이 하라다에게 겨우 따라잡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현재 세계 스키점프계를 석권하고 있는 시몬 아만 역시 전형적인 하라다형 점퍼로 평가받는다.
또한, 하라다는 비거리가 너무 길어 착지 시 텔레마크 자세를 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비행 자세 점수에서 불리하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비거리를 조절하여 텔레마크를 넣을 수 있었던 경기에서는 결코 낮은 점수를 받지 않았다. 1998년 9월 12일 하쿠바에서 열린 서머 그랑프리 대회에서는 5명의 비행 자세 심판 전원에게 20점 만점을 받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9. 은퇴 및 지도자 경력
하라다 마사히코는 2006년 3월 20일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하고, 3월 25일 이토컵 시즌 파이널 오쿠라야마 나이트 점프 대회를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은퇴 후에도 그는 유키지루시 유업에 남아 유키지루시 메그밀크 스키부 코치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스키점프 중계 해설자로도 활약하고 있다. 2014년 4월에는 사이토 히로야 전 감독의 뒤를 이어 동 스키부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2015년 10월에는 전일본 스키 연맹 이사로 선임되어 일본 스키계 행정가로서의 활동도 시작했다.
2021년 4월에는 유키지루시 메그밀크 스키부 총감독으로 승진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 일본 선수단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023년 4월부터는 유키지루시 메그밀크 스키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후배 선수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선수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현역 시절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는지 깨달았으며, 일본 스키계에 은혜를 갚고자 전일본 스키 연맹 이사직을 수락했다고 밝혔다.
10. 인물 및 대중적 이미지
하라다 마사히코는 뛰어난 선수 경력뿐만 아니라 특유의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인 면모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릴레함메르에서의 쓰라린 실패와 나가노에서의 극적인 재기 과정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정신력과 인간 승리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유럽에서 "Happy Harada해피 하라다영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오스트리아의 안드레아스 골드베르거와 함께 인기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인물됨과 국제적인 인지도를 바탕으로 2007년 삿포로시에서 개최된 2007년 FIS 노르딕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의 특별 홍보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겉으로는 항상 밝고 유쾌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하라다의 내면은 매우 진지하고 성실하다. 그는 변명이나 불평을 일절 하지 않으며, 고민 또한 혼자 삭이는 성격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슬럼프 시기에 적절한 지도를 받지 못하거나,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실격 사태 시 코치나 스태프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오랜 기간 일본 스키점프계를 지탱하며 수많은 실패와 대점프를 통해 스키 점프의 호쾌함, 어려움, 훌륭함, 그리고 애절함을 팬들에게 온전히 전달해 온 그는 "미스터 점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고향인 가미카와정에는 하라다의 이름을 딴 NPO 법인 "스마일 하라다"가 설립되어 있으며, 하라다는 직접 운영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꼬마 하라다컵 점프 대회" 등 법인이 주최하는 행사에 주빈으로 참여하여 꿈나무들을 격려하고 있다.
하라다는 나가노 동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중 후나키 가즈요시나 시미즈 히로야(스피드스케이팅)가 소속 기업을 떠나 프로 선수로 전향한 것과 달리, 소속사인 유키지루시 유업에 대한 강한 애사심을 바탕으로 현역 은퇴 후에도 계속해서 회사에 남아 스키 점프 활동에 기여했다. 그의 이러한 애사심은 유키지루시 유업이 주최한 올림픽 축승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우리 회사의 우유 덕분입니다"라는 농담 섞인 발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00년에 발생한 유키지루시 집단 식중독 사건 당시에는 하라다 역시 사과 기자회견에 참석해야 했으며, 회사의 스포츠 활동 자숙으로 인해 하라다 개인에게도 악영향이 미쳤다. 그러나 경영 재건의 일환으로 유키지루시 유업이 대부분의 스포츠 활동에서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키점프 부만은 존속시켰고 하라다는 계속해서 회사 직원으로서 경기에 참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