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펠리페 데 헤수스 칼데론 이노호사(Felipe de Jesús Calderón Hinojosa펠리페 데 헤수스 칼데론 이노호사스페인어, 1962년 8월 18일)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멕시코의 제63대 대통령을 역임한 멕시코의 정치인이다. 그는 국민행동당(PAN) 소속으로, 비센테 폭스 대통령 재임 시절 에너지부 장관을 지냈다. 2006년 대통령 선거에서 논란이 많은 선거 절차와 근소한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취임 직후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을 선포하여 멕시코 마약 전쟁을 시작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마약 전쟁으로 인한 폭력 증가와 경제 위기, 그리고 그의 행정부와 관련된 여러 논란으로 특징지어진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펠리페 칼데론은 멕시코 미초아칸주 모렐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정치적 활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
2.1. 어린 시절 및 가족 배경
펠리페 데 헤수스 칼데론 이노호사는 1962년 8월 18일 멕시코 미초아칸주 모렐리아에서 카르멘 이노호사 칼데론과 루이스 칼데론 베가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루이스 칼데론 베가는 국민행동당(PAN)의 공동 창립자이자 중요한 정치인이었다. 루이스 칼데론 베가는 주 정부 직책을 역임하고 연방 하원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대부분의 삶을 당 내에서 일하며 여가 시간 대부분을 국민행동당을 홍보하는 데 보냈다. 어린 펠리페 칼데론은 아버지의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소년 시절 그는 당의 팸플릿과 전단지를 배포하고, 국민행동당 선거 운동 차량을 타고 집회에서 구호를 외쳤다.
2.2. 교육
모렐리아에서 성장한 후, 칼데론은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에스쿠엘라 리브레 데 데레초(Escuela Libre de Derecho)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멕시코 자치기술대학교(ITAM)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2000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존 F. 케네디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3. 정치 경력
칼데론은 대통령이 되기 전 다양한 정치적 직책을 역임하며 멕시코 정치계에서 입지를 다졌다.
3.1. 초기 정치 활동
칼데론은 20대 초반에 국민행동당(PAN) 청년 운동의 회장을 맡았다. 그는 입법부의 지역 대표를 지냈으며, 두 차례에 걸쳐 연방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1995년에는 미초아칸주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3.2. 국민행동당 (PAN)에서의 역할
칼데론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국민행동당의 전국 대표를 역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국민행동당은 14개 주 주도를 계속 통제했지만, 연방 하원에서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30년간 국민행동당 당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2018년 11월 당을 탈당하고 2021년 총선에 출마할 목적으로 '자유 멕시코'(México Libre스페인어)라는 자체 정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이 정당은 "현금 기부금의 출처가 확인되지 않아 감독, 투명성, 책임 원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INE에 의해 등록이 거부되었다.
3.3. 내각 직책
비센테 폭스 대통령 취임 직후, 칼데론은 국영 개발 은행인 바노브라스(Banobras)의 총재로 임명되었다. 그는 정치적 반대자들로부터 약 30.00 만 USD에서 50.00 만 USD 상당의 부동산 금융을 위해 특정 법적 절차를 남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가 발생하자 그는 거래를 공식화하기 위해 다른 수단을 사용했다.
이후 그는 에르네스토 마르텐스의 뒤를 이어 대통령 내각의 에너지부 장관으로 합류했다. 그는 2004년 5월, 비센테 폭스 대통령이 산티아고 크렐의 대통령 야망을 지지하면서 자신의 대통령 야망을 비판한 것에 항의하며 장관직을 사임했다.
4. 2006년 대통령 선거 운동 및 논란
펠리페 칼데론의 2006년 대통령 선거 운동은 치열한 당내 경선을 거쳐 진행되었으며, 선거 결과는 멕시코 사회에 큰 논란과 분열을 야기했다.
4.1. 선거 운동
국민행동당 당원들은 펠리페 칼데론을 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택했다. 그는 2005년 말 세 차례의 예비 선거에서 비센테 폭스 대통령 시절 내무부 장관을 지낸 유력 후보 산티아고 크렐과 할리스코주 주지사를 지낸 알베르토 카르데나스를 큰 차이로 꺾고 당내 경선에서 승리했다. 그의 후보 지명은 많은 분석가들을 놀라게 했다. 국민행동당은 그의 경쟁적인 예비 선거를 당내 민주주의의 신호로 내세웠다.
칼데론의 선거 운동은 첫 번째 대통령 후보 토론회 이후 탄력을 받았다. 2005년 12월부터 2006년 3월까지 대부분의 여론 조사에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와 로베르토 마드라소에 이어 3위를 기록했지만, 이후 여론 조사 수치는 3월부터 5월까지 그가 로페스 오브라도르를 앞섰으며, 일부 여론 조사에서는 9%포인트까지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유리한 추세는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토론회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두 번째 대통령 후보 토론회 이후 꺾였다. 최종 여론 조사 결과는 그의 상대 후보의 이전 우위가 더욱 줄어들었음을 보여주었으며, 일부 여론 조사에서는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앞섰고, 다른 여론 조사에서는 칼데론이 앞섰으며, 또 다른 여론 조사에서는 기술적인 무승부를 나타냈다.
4.2. 선거 결과 및 논쟁
2006년 7월 2일 선거 당일, IFE는 경합이 너무 치열하여 출구 조사를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후보들에게 승리 선언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두 후보 모두 이 요청을 따르지 않았다. 먼저 민주혁명당 후보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자신이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고, 곧이어 칼데론도 IFE가 발표한 초기 수치를 근거로 승리를 선언했다.
7월 3일, 비공식 PREP 데이터베이스의 예비 결과는 칼데론이 1.04%의 근소한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7월 6일, IFE는 공식 투표 집계를 발표했는데, 칼데론이 로페스 오브라도르를 0.58% 차이로 간신히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로페스 오브라도르와 그의 연합은 여러 투표소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전국적인 재검표를 요구했다. 결국 연방선거재판소는 만장일치로 그러한 재검표가 근거 없고 비현실적이라고 선언하고, 합당한 주장이 있는 약 9.07%의 투표소에 대해서만 재검표를 명령했다.
2006년 9월 5일, 연방선거재판소가 선거에서 부정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판사가 투표를 변경한 후, 칼데론은 재판소에 의해 로페스 오브라도르를 233,831표, 즉 0.56% 차이로 앞서며 만장일치로 대통령 당선자로 선언되었다. 선거 재판소는 증거 없는 사소한 부정행위는 선거를 무효화하기에 불충분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 판결은 구속력이 있고 최종적이며 항소할 수 없었다.
5. 대통령 재임 (2006-2012)
펠리페 칼데론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멕시코의 사회, 경제, 안보 분야에 걸쳐 다양한 정책과 중요한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특히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 선포는 그의 행정부의 가장 큰 특징이자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5.1. 취임 및 내각
멕시코 헌법은 대통령이 하원인 하원에서 의회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민주혁명당 야당은 칼데론의 취임 선서를 막겠다고 위협했다. 민주혁명당이 절차를 방해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전에, 국민행동당은 취임식이 예정된 날보다 사흘 먼저 의회 본회의장을 장악했다.
2006년 11월 30일, 퇴임하는 비센테 폭스 대통령과 당시 대통령 당선자 펠리페 칼데론 이노호사는 국영 텔레비전에 나란히 서서 폭스 대통령이 대통령 휘장을 사관생도에게 넘겨주었고, 사관생도는 이를 칼데론에게 전달했다. 이후 폭스 대통령은 지난 6년간 멕시코를 위해 헌신하며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는 내용의 짧은 연설을 했다. 칼데론은 이어서 멕시코 국민에게 연설하며 하원에서의 취임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밝히고 단결을 촉구했다.
12월 1일 연방 의회에서 열린 칼데론의 취임식은 긴장감이 넘쳤으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민주혁명당 의원들이 선거 부정 의혹에 항의하며 그의 취임을 방해하려 소리쳤고, 일부 의원들은 폭력적인 난투극을 벌이는 가운데 칼데론은 간신히 취임 선서를 낭독했다. 취임 후 그는 보안상의 이유로 서둘러 건물을 떠났다. 부정 주장 외에도 칼데론은 멕시코 역사상 당선된 대통령 후보 중 가장 낮은 득표율(35.8%)로 취임하여, 그의 행정부는 심각한 정통성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취임 한 달 만에 칼데론은 마약 카르텔 및 조직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멕시코 마약 전쟁을 시작했다. 이는 복잡한 선거 이후 새로운 대통령이 대중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즉각적인 전략으로 많은 이들에게 여겨졌다.
칼데론 내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직책 | 장관 | 재임 기간 | ||||||
---|---|---|---|---|---|---|---|---|
대통령 | 펠리페 칼데론 | 2006-2012 | ||||||
내무부 장관 | 프란시스코 라미레스 아쿠냐 | 2006-2008 | 후안 카밀로 모리뇨* | 2008 | 페르난도 고메스-몬트 | 2008-2010 | 프란시스코 블레이크 모라* | 2010-2011 |
외교부 장관 | 파트리시아 에스피노사 | 2006-2012 | ||||||
재무부 장관 |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 2006-2009 | 에르네스토 코르데로 아로요 | 2009-2011 | 호세 안토니오 메아데 쿠리브레냐 | 2011-2012 | ||
국방부 장관 | 기예르모 갈반 갈반 | 2006-2012 | ||||||
해군부 장관 | 마리아노 사이네스 멘도사 | 2006-2012 | ||||||
경제부 장관 | 에두아르도 소호 | 2006-2008 | 헤라르도 루이스 마테오스 | 2008-2010 | 브루노 페라리 | 2010-2012 | ||
사회개발부 장관 | 베아트리스 사발라 | 2006-2008 | 에르네스토 코르데로 아로요 | 2008-2009 | 에리베르토 펠릭스 게라 | 2009-2012 | ||
법무부 장관 | 에두아르도 메디나-모라 | 2006-2009 | 아르투로 차베스 차베스 | 2009-2011 | 마리셀라 모랄레스 | 2011-2012 | ||
공공보안부 장관 | 헤나로 가르시아 루나 | 2006-2012 | ||||||
통신교통부 장관 | 루이스 텔레스 | 2007-2009 | 후안 몰리나르 오르카시타스 | 2009-2011 | 디오니시오 페레스-하코메 | 2011-2012 | ||
노동사회복지부 장관 | 하비에르 로사노 알라르콘 | 2006-2011 | 로살린다 벨레스 후아레스 | 2011-2012 | ||||
환경천연자원부 장관 | 후안 라파엘 엘비라 케사다 | 2006-2012 | ||||||
에너지부 장관 | 헤오르히나 케셀 | 2006-2011 | 호세 안토니오 메아데 쿠리브레냐 | 2011 | 호르디 에레라 플로레스 | 2011-2012 | ||
농업축산농촌개발어업식품부 장관 | 알베르토 카르데나스 | 2006-2009 |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마요르가 카스타녜다 | 2009-2012 | ||||
공공교육부 장관 | 호세피나 바스케스 모타 | 2006-2009 | 알론소 루함비오 | 2009-2012 | 호세 앙헬 코르도바 | 2012 | ||
보건부 장관 | 호세 앙헬 코르도바 | 2006-2011 | 살로몬 체르토리브스키 | 2011-2012 | ||||
관광부 장관 | 로돌포 엘리손도 토레스 | 2006-2010 | 글로리아 게바라 | 2010-2012 | ||||
농업개혁부 장관 | 아벨라르도 에스코바르 프리에토** | 2006-2012 | ||||||
법률 고문 | 다니엘 카베사 데 바카 | 2006-2008 | 미겔 알레시오 로블레스 | 2008-2012 |
- 사망
- 이전 행정부에서 유임
5.2. 국내 정책
칼데론 행정부는 경제, 보건, 교육, 환경, 사회 분야에서 다양한 국내 정책을 추진했다.
5.2.1. 경제 정책

칼데론 행정부의 주요 경제 목표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 빈곤 감소, 모든 계층의 생활 수준 보호였다. 행정부는 투자를 유치하고, 석유 및 미국 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줄여 경제를 다각화하며, 거대 경제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인프라를 개선하고, 일자리를 늘리고, 빈곤을 줄이며, 중산층을 확대하고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금융 상품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가장 어려운 계층의 구매력을 보호하기 위해, 행정부는 대침체와 유럽 국가 부채 위기 중에도 물가와 이자율을 상대적으로 낮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통화 위기를 피했다. 2011년 기준으로 멕시코의 총 구매력 평가 기준 GDP는 세계 11위였다. 멕시코 경제는 행정부 재임 기간 중 1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 경제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칼데론 행정부 기간 동안 총 외국인 직접 투자는 704.94 억 USD에 달했다. 인프라 투자와 자유 무역 협정을 통해 행정부는 많은 자동차 회사로부터 투자를 유치하여 멕시코에 공장을 건설하고 기존 시설과 멕시코에서 생산되는 모델을 확장하도록 했다. 멕시코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 제조업체 중 하나가 되었고, 2년 연속 자동차 생산 및 수출 기록을 경신했다. 멕시코는 또한 신생 항공 산업과 대규모 전자 및 소비재 산업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 모두 숙련된 노동력을 위한 상당한 투자 자본과 고부가가치 제조업을 유치하고 있다. 하이네켄은 이 행정부 동안 멕시코 음료 산업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새로운 수출 기회를 확대하고 미국 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 멕시코의 중요한 수출 부문을 다각화하기 위해 멕시코는 미국 국경을 넘어 유럽 연합, 동아시아 및 라틴 아메리카와의 무역 협정을 확대했다. 새로운 인프라가 멕시코 경제를 다각화하고 향후 몇 년간 안정성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태평양 연안의 주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간의 새로운 협력 협정인 태평양 동맹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 확대를 모색하면서 유럽 부채 위기에서 발생하는 일부 변동으로부터 참여 국가들을 고립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멕시코는 전 세계적으로 긍정적인 무역 관계와 무역 협상을 유지하여 멕시코를 개방 경제로 만들고 모든 멕시코 지역에 대한 무역 기회를 늘리며 새로운 인프라의 도움을 받았다.
2006년 내내 국제 옥수수 가격이 급등하여 칼데론 임기 첫 달에 토르티야 가격이 인플레이션되었다. 토르티야는 멕시코 최빈곤층이 소비하는 주식이기 때문에, 가격 상승에 대한 전국적인 우려는 즉시 칼데론 행정부에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 대통령은 옥수수 현지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토르티야에 대한 가격 상한제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이 가격 통제는 정부와 그루마, 빔보를 포함한 많은 주요 토르티야 생산 회사 간의 토르티야 가격 안정화 협정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토르티야 1킬로그램당 8.5 MXN의 가격 상한선을 두었다. 이는 옥수수 가격 상한선이 시장이 전국적으로 모든 가격을 낮추도록 유인할 것이라는 희망에서 비롯되었다. 비판론자들은 이 협정이 구속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해당 제품 가격의 최대 30% 인상(킬로그램당 5.95 MXN에서 8.5 MXN으로)을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토르티야 가게는 이 협정을 무시하여 8.5 MXN을 훨씬 초과하는 가격 인상을 초래했다. 정부 야당은 이를 빈곤층 시민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실패한 증거로 해석했다. 그러나 소리아나와 코메르시알 멕시카나와 같은 여러 주요 슈퍼마켓은 협정 가격보다 낮은 킬로그램당 5.1 MXN에 토르티야를 판매했는데, 이는 가격 통제 반대론자들에게 가격 통제와 토르티야 가격 안정화 협정이 불필요했다는 명확한 증거로 해석되었다. 또한 소비자 보호 정부 기관인 프로페코(PROFECO)는 "과도한" 가격을 부과하는 토르티야 생산자들을 감옥에 보낼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멕시코 은행 총재 기예르모 오르티스는 이 협정을 소비자들에게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며, 인플레이션 상승에 맞서기 위한 수단으로 계속 유지할 것을 촉구했다.
선거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칼데론 대통령은 일자리 시장에 진입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첫 일자리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고등 교육을 졸업한 젊은이들과 한 번도 일해본 적 없는 수백만 명의 여성을 포함하여 첫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기업에 현금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으로의 이민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2008년 이후 미국의 경기 침체를 포함한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미국으로의 이민은 감소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멕시코 인적 자원 관리자 협회 회장 루이스 가르시아는 긍정적인 효과를 예상했으며, 넥스텔 멕시코 자회사의 경우 2006년 신규 채용 인력의 14%가 "첫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예시로 들었다. 노동부 장관 하비에르 로사노 알라르콘은 이 프로그램만으로는 필요한 만큼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에 불충분하며, 추가 투자를 허용하기 위한 심층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칼데론 대통령은 취임 첫날 대통령과 내각 장관들의 급여를 제한하는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이 조치는 입법부나 사법부의 많은 관료와 공무원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루포 레포르마가 제기한 정보 공개 요청에 따르면, 이 대통령령은 546명의 고위 공무원에게 영향을 미치며 정부에 약 1300.00 만 USD를 절약해 줄 것으로 예상되었다. 야당은 10%의 급여 삭감이 충분히 포괄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2006년 선거에서 그의 상대 후보와 마찬가지로 칼데론은 통과될 경우 정부의 세 가지 부문 모두에서 공무원 급여를 낮추고 보상에 상한선을 부과하는 법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제안에는 공무원 보수를 더욱 투명하게 하고 재정 감사를 받도록 하는 조치도 포함되었다.
5.2.2. 보건 정책

칼데론 행정부의 보편적 의료 보장 정책은 행정부의 가장 인기 있는 정책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는 이 정책을 현실화하기 위해 세구로 포풀라르(Seguro Popular)를 출범시켰다. 그의 정책을 통해 상당한 의료 인프라가 구축되었고, 전국 여러 지역에서 의료 접근성이 확대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비용이 크게 절감되어 많은 의약품이 이미 무료로 배포되었다. 비센테 폭스 행정부 시절에는 4천만 명만이 공공 의료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칼데론의 보편적 의료 시스템 구현 노력 덕분에 현재 1억 명 이상의 멕시코인들이 자국의 의료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칼데론 행정부 동안 1,000개 이상의 병원이 신설되었고, 2,000개 이상이 재건축 및 확장되었다.
2009년 신종플루 유행병이 멕시코를 강타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를 팬데믹으로 선포했다. 행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신종플루 유행에 대한 정보를 세계에 공개하는 데 단호하게 대처했으며, 학교를 포함한 많은 공공 서비스를 폐쇄하는 등 확산 방지를 위한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칼데론 대통령은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기침을 공중으로 하지 않고 팔꿈치에 하는 등 유행병 동안 취해야 할 기본적인 예방 조치를 시연했다. 2009년과 2010년 독감 시즌 동안 타미플루와 백신이 사용되었으며, 강력한 조치와 질병의 확산 및 심각성 감소 덕분에 일부 사망자는 분명히 예방되었다. 사람들이 집에 머물게 하고 효과적인 전략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정책은 바이러스의 치명적인 형태가 감지하고 식별하기 더 어려운 경미한 형태만큼 쉽게 퍼지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칼데론의 대처에 대한 비판은 그의 행정부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는 초기 주장부터, 나중에 행정부가 취한 조치를 과장했다는 주장까지 다양했다.
멕시코 게놈 프로젝트는 부분적으로 신종플루 발생에 대한 대응으로 칼데론 행정부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멕시코의 1억 명 이상의 인구에게 질병 및 당뇨병과 같은 다른 건강 문제의 예방 및 치료와 관련하여 유전적 표지자를 더 잘 찾아내고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로젝트의 효능에 대한 연구는 히메네스-산체스 박사에 따르면 "오늘날 멕시코의 독특한 H1N1 인플루엔자 A 사망률이 유전적 변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멕시코 인구의 게놈 다양성에 대한 지식은 독감과 같은 감염을 포함한 일반적인 질병에 대한 감수성을 부여하는 유전적 변이를 식별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또한 특정 유전적 집단의 사람들에게 맞춤형 의약품을 생산하고,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물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약물유전체학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칼데론은 이 성과를 칭찬하며 "멕시코 인구의 게놈 지도는 과학과 공중 보건에 대한 멕시코의 필수적인 기여이다. 이 연구는 멕시코 인구의 건강 관리를 개선하기 위해 멕시코에서 게놈 의학을 개발하는 중요한 이정표를 나타낸다. 이러한 중요한 이정표를 달성한 우리 국립 게놈 의학 연구소(INMEGEN)를 칭찬한다"고 말했다.
5.2.3. 교육 정책
칼데론은 멕시코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대학(96개)을 설립했다. 또한 그는 6세에서 11세 사이의 어린이들에게 초등학교에 대한 완전한 보장과 안전한 자리를 부여한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5.2.4. 환경 정책
펠리페 칼데론 행정부는 8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고 녹색 기술 기업을 멕시코로 유치하는 등 다양한 정책 조치를 통해 삼림 벌채 및 기후 변화를 포함한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멕시코는 또한 삼림 벌채를 크게 줄였다. 여기에는 풍력 발전소에 대한 25.00 억 USD 투자가 포함된다. 칼데론 행정부 동안 16개의 새로운 멕시코 보호 자연 지역이 지정되었다.
5.2.5. 사회 정책
2011년 칼데론은 폭력 피해자를 위한 사회 지원 사무소(Procuraduría Social para Víctimas de la Violencia스페인어)를 설립했다. 칼데론 행정부 동안 1.65 만 km 이상의 주간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5.3. 안보 정책

칼데론은 고위 공무원 급여 상한제를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취임 첫날 멕시코 연방 경찰과 멕시코군의 급여 인상을 명령했다.
칼데론 정부는 2006년 12월 취임 직후, 자신의 고향인 미초아칸주에서 점점 더 치명적인 폭력 사태가 증가함에 따라 마약 카르텔에 대한 대규모 단속 작전을 명령했다. 마약 단속 작전을 강화하기로 한 결정은 연방 정부와 멕시코 마약 카르텔 간의 지속적인 분쟁으로 이어졌다. 2007년 1월 19일, 마약 갱단에 대한 군사 작전이 시작된 지 5주 만에 멕시코 군인과 연방 경찰은 멕시코의 7대 주요 마약 카르텔 중 하나인 디아스 파라다 갱의 우두머리 페드로 디아스 파라다를 체포했다. 다음 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조치로 정부는 여러 마약 갱단 우두머리를 미국으로 송환했다.
멕시코 정부는 또한 멕시코 군인과 연방 경찰을 여러 도시에 파견했는데, 특히 티후아나와 시우다드후아레스가 그러했다. 티후아나와 시우다드후아레스에서는 많은 경찰관이 마약 카르텔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아 군대가 모든 지역 경찰관에게 무기를 반납하도록 명령했다. 조치가 취해진 다른 주로는 미초아칸, 타마울리파스, 타바스코, 게레로가 있다.
2007년 1월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칼데론은 "우리는 매우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 예를 들어 미초아칸주에서는 지난 6개월 평균 대비 살인율이 거의 40% 감소했다. 우리가 작전을 수행하는 지역에서 국민들의 지지가 늘어났고, 이는 매우 중요했다. 여론 조사도 이를 확인시켜 주었으며, 우리는 이 문제가 우리에게 우선순위라는 것을 모두에게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7년 4월 9일, 멕시코 국방부는 칼데론 대통령 취임 후 4개월 동안 다음과 같은 성과를 보고했다. 마약상 1,102명 체포, 약 5.00 억 MXN 압수, 마리화나 556 kg 압수, 군용 무기 1,419정, 항공기 2대, 자동차 630대, 마약을 운반하는 해상 선박 15척 압수, 불법 활주로 285개, 마약 캠프 777개, 마리화나 농장 52,842개, 아편 양귀비 농장 33,019개 파괴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2009년 12월 16일, 멕시코 해군은 한때 중요한 마약 밀매업자였던 아르투로 벨트란-레이바를 사살했다. 칼데론 임기 동안 가장 수배된 마약왕 37명 중 25명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
정부는 마약왕들을 체포하는 데 비교적 성공했지만, 시우다드후아레스, 티후아나, 마타모로스와 같은 미국 국경을 따라 분쟁 지역에서는 마약 관련 폭력이 여전히 높았다. 카를로스 파스쿠알 주멕시코 미국 대사와 같은 일부 분석가들은 이러한 폭력 증가는 펠리페 칼데론의 군사적 조치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주장했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멕시코의 살인율은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지만, 현재 멕시코는 살인율이 가장 높은 상위 10개국 중 하나로 간주된다. 칼데론이 2006년 말 조직 범죄에 대한 군사 전략을 시작한 이래로 조직 범죄 관련 폭력 사망자가 "2006년 말 이후 15,000명 이상 사망"하는 등 놀라운 증가세를 보였다. 2008년 멕시코에서는 5,000명 이상이 살해되었고, 2009년에는 9,600명, 2010년에는 전국적으로 15,000명 이상의 살인이 발생했다. 2010년 3월 19일, 누에보레온주 몬테레이 공과대학 학생이었던 하비에르 프란시스코 아레돈도 베르두고(23세)와 호르헤 안토니오 메르카도 알론소(24세)가 멕시코에서 멕시코 육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처음에는 군대가 살인과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고, 나중에는 젊은이들이 "무장한" 마약상이라고 거짓으로 비난했다. 2011년에는 살인 사건이 더 많았고, 2012년에는 2011년과 비슷한 비율을 보였으며, 2012년은 대통령 교체 시기이자 전국적으로 높은 보안 지출이 있었던 해였다. 2010년과 2011년의 살인 사건은 20,000~27,000건 범위였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공공보안부 장관을 지낸 헤나로 가르시아 루나는 2020년 미국에서 수백만 유로의 뇌물을 받고 시날로아 카르텔을 보호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미국 법무부는 "그의 지원 덕분에 [시날로아] 조직은 당국의 상당한 개입 없이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칼데론 대통령의 장관에 대한 지지는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언론과 야당은 가르시아 루나와 마약 밀매의 연관성을 널리 비난했다. 2023년 2월 21일, 가르시아 루나는 마약 밀매를 포함한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가르시아 루나의 유죄 판결 이후, 칼데론의 국방부 차관이었던 토마스 앙헬레스 다우아하레 장군은 칼데론이 가르시아 루나와 카르텔의 연관성을 알고 있었다고 선언했다. 같은 달, 여론 조사에서 참가자의 84%가 칼데론에 대한 조사도 원한다고 밝혔다.
칼데론 정부는 세계 최초로 이스라엘 스파이웨어 페가수스를 사용했으며, 이는 정치적 반대자와 언론인을 감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자신도 나중에 엔리케 페냐 니에토 정부에 의해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감시당했다.
5.4. 외교 정책

칼데론은 폭스 대통령 임기 동안 시작된 카스타녜다 독트린으로 알려진 외교 정책을 계속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이는 에스트라다 독트린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 시장'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의 중재를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칼데론은 폭스 행정부 동안 시작된 유사한 자금 및 인프라 프로젝트인 푸에블라-파나마 계획(PPP)과 통합된 메조아메리카 통합 개발 프로젝트의 지지자였다. 칼데론은 메조아메리카 통합 개발 프로젝트/PPP를 확장하여 이제 콜롬비아를 포함시키고 조직 범죄에 대한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폭스 행정부 전반기 외교부 장관이자 "카스타녜다 독트린"의 지지자였던 호르헤 G. 카스타녜다는 칼데론의 리더십과 메조아메리카 통합 개발 프로젝트/PPP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우고 차베스의 좌익 정책 리더십에 대한 대응책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칼데론은 "(PPP의) 도전은 이 지역에서 견고한 기반을 가진 민주적 관행을 육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정표는 미국과 멕시코 정부, 그리고 중앙아메리카 국가들 간의 안보 협력 이니셔티브인 메리다 이니셔티브였다. 이는 마약 밀매 및 초국가적 범죄의 위협에 맞서 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칸쿤 협정은 칼데론과 그의 팀의 능숙한 처리 덕분으로 널리 칭찬받은 성공이었으며, 기립 박수를 받았다. 칸쿤 기후 협정을 주최하고 의장직을 맡아 목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고 기후 변화로 인한 개발도상국 피해 보상에 대한 합의를 재확인한 것 외에도, 멕시코는 2012년 G20 의장국을 맡아 로스카보스에서 정상 회담을 개최하는 등 G20의 신뢰를 얻었다.
펠리페 칼데론은 이민 개혁을 주요 우선순위 중 하나로 삼았으며, 2008년 멕시코 의회와 함께 멕시코 내 불법 이민을 비범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미국 내 불법 멕시코 이민자들의 지위를 명확히 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2007년 3월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 전, 칼데론은 양국 간에 장벽을 건설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미국 상원이 포괄적 이민 법안을 거부하자 칼데론 대통령은 이 결정을 "심각한 실수"라고 비판했다.
6. 철학 및 이념
칼데론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이다. 그는 낙태에 반대하는 생명 옹호론자이지만, 강간 피해자, 임신이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 또는 심각한 태아 기형의 경우 낙태를 보장하는 멕시코 법률을 지지했다. 그는 소량의 코카인 및 기타 마약을 치료를 받기로 동의하는 중독자들에게 합법화할 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했으며, 말기 환자가 침습적 치료나 생명 연장을 위한 비정상적인 노력을 거부할 수 있는 존엄사 이니셔티브를 승인했다.
그의 경제 정책 견해에서 그는 균형 재정 정책, 단일세, 낮은 세금, 그리고 자유 무역을 지지한다. 2023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를 지지했다. 그의 선거 운동 메시지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도전"을 강조했다. 과거는 국유화, 수용, 국가 경제 통제, 권위주의를 의미하는 반면, 미래는 민영화, 자유화, 시장 경제 통제,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7. 개인적인 삶
그는 연방 의원으로 활동했던 마르가리타 사발라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마리아, 루이스 펠리페, 후안 파블로 세 자녀를 두었다. 칼데론은 로마 가톨릭 신자이다. 멕시코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멕시코시티 남부의 고급 주택가인 라스 아길라스에 거주했다.
8. 논란
칼데론은 공직 경력 동안 여러 주요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8.1. 알코올 의존 의혹
칼데론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멕시코 언론에서는 그가 연설이나 공개 석상에서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고, 말을 더듬거나 기이한 발언을 하는 것을 근거로 그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수많은 보도가 나왔다. 2011년 2월 2일, 하원의 야당 의원들은 "술 취한 사람에게 당신의 차를 운전하게 하겠습니까? 아니죠? 그렇다면 왜 당신의 나라를 운영하게 합니까?"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다음 날, 언론인 카르멘 아리스테기는 이 사건을 보도하며, 대통령이 알코올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지만", "이것은 민감한 주제"이며 칼데론 대통령이 이 비난에 답변할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로 인해 아리스테기는 자신의 라디오 쇼를 진행하던 MVS 뉴스 회사로부터 "윤리 강령 위반"으로 해고되었다. 이 해고는 광범위한 대중 시위를 초래했고, 아리스테기는 며칠 후 복직되었다. 그녀와 MVS 라디오는 그녀의 복귀에 대해 공식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다.
2012년 8월 CNN 보도는 해고와 재고용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했다. 2월 4일, 아리스테기가 칼데론 대통령의 알코올 중독 가능성에 대해 방송에서 언급한 직후, MVS 사장 호아킨 바르가스 고메스는 칼데론의 대변인 알레한드라 소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바르가스는 아리스테기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고, 그날 늦게 내각 관료로부터 아리스테기 자신이 공개적으로 사과하지 않는 한 MVS의 방송 주파수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정부가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2월 5일, 소타는 바르가스에게 사과 성명서를 건네며 아리스테기에게 방송에서 읽으라고 지시했다. 2월 6일, 아리스테기는 거부했고, 바르가스는 즉시 그녀를 해고했다. 몇 시간 만에 소타는 바르가스에게 아리스테기의 해고 소식에 대한 소셜 네트워크의 강렬한 반응에 놀랐다고 말했다. 며칠간의 대중적 항의와 바르가스와 칼데론의 여러 대표자들 간의 광범위한 소통 끝에 아리스테기는 2월 21일 복직했다.
2012년, 언론인 훌리오 셰레르 가르시아는 국민행동당 전 대표 마누엘 에스피노 바리엔토스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칼데론의 전신"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칼데론의 대통령 재임 전후의 알코올 중독 의혹에 대한 많은 사례를 자세히 설명한다. 2017년 3월, 대통령직을 마친 지 5년 후 펠리페 칼데론은 멕시코주 주지사 후보 호세피나 바스케스 모타를 지지하는 집회에 참석했다. 많은 언론 매체는 칼데론이 행사 중에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고, 균형을 잡는 데 눈에 띄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2019년 10월, 언론인 페데리코 아레올라는 이 주장이 거짓이며 자신이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이 소문을 퍼뜨리는 데 일조했지만, 칼데론이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아레올라는 2006년 대통령 후보였을 때 칼데론에게 중상모략을 당한 후 칼데론의 알코올 중독에 대한 소문을 지어냈다고 말했다.
8.2. 미국 정보기관 감시 스캔들
2013년 7월 10일, 멕시코 신문 엑셀시오르는 웹사이트에 2007년 2월 칼데론 행정부가 미국 국무부의 감청 시스템 설치를 승인하여 조직 범죄 및 마약 밀매 퇴치를 위해 전화 통화, 이메일 및 기타 인터넷 서비스를 분석, 처리, 저장하도록 허용했다고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는 메리다 이니셔티브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2013년 9월 여러 신문과 뉴스 웹사이트가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 자신이 대통령 후보였을 때 NSA에 의해 감시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스캔들은 페냐 행정부에 의해 대체로 무시되었다. 2013년 10월 21일, 데어 슈피겔은 NSA가 칼데론과 다른 내각 구성원의 이메일을 감시했다고 폭로했다. 같은 날 칼데론은 자신이 외교부 장관 호세 안토니오 메아데 쿠리브레냐와 직접 통화하여 자신에 대한 감시에 대해 "가장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트윗했다. 나중에 칼데론은 개인적인 피해보다는 멕시코 기관에 대한 불만이라고 트윗하며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멕시코 언론인 라이문도 리바-팔라시오는 (10월 21일과 23일 칼럼에서) 칼데론 행정부가 미국 정보기관과 전반적인 양자 협력에 부여한 특권을 비판하며, "워싱턴이 그를 조롱하고 배신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썼다. 리바-팔라시오는 미국 정보기관이 현장 작전을 조율하고 멕시코 당국이 자체 조사를 하기 전에 구금된 사람들을 심문하기까지 했다고 썼다. 리바에 따르면, 이러한 특권은 불법적인 감시로 이어졌으며, 이는 미국 정보기관이 멕시코 정치 세계의 지도를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는 많은 문서에서 주요 관심사가 멕시코의 정치적 안정과 미래이며, 이후 페냐가 선거에 출마하는 동안 그에 대한 감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칼데론이 페냐에게 자신의 이메일과 내각 구성원 이메일에 대한 감시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비판하며, 칼데론이 2009~2010년에 불법 감시에 대한 첫 주장이 나왔을 때 그렇게 했어야 했다고 선언했다. 2013년 10월 22일, CNN멕시코는 칼데론이 스파이를 따돌리기 위해 민감한 정보를 이메일로 보내는 것을 피했고, 다른 내각 구성원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는 암호로 이야기했다고 웹사이트에 보도했다. 2013년 10월 23일, 미겔 앙헬 오소리오 총 내무부 장관은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칼데론에 대한 불법 감시에 대해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8.3. 특정 사건 및 비판
칼데론은 그의 과거 직책과 관련된 특정 의혹 및 비판에 직면했다.
Fobaproa는 1994~1995년 멕시코 금융 위기 이후 민간 은행을 재정적으로 구제하기 위한 정부 후원 노력으로, "12월의 실수"로도 알려져 있다. Fobaproa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였다. 지지자들은 이 노력이 멕시코 경제를 구하고 위기의 악화를 막았다고 주장하는 반면, 비판자들, 특히 민주혁명당,은 Fobaproa가 부패를 저지르는 데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 2006년 대통령 선거 운동 동안 민주혁명당은 펠리페 칼데론이 Fobaproa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이 비난은 칼데론이 Fobaproa의 실행 뒤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러나 Fobaproa의 실행은 PRI의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펠리페 칼데론은 PRI가 제안한 것과는 다른 Fobaproa 대안 프로젝트를 제안함으로써 입법부(의회)에서만 참여했다. 당시 멕시코 정부의 입법부는 지금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Fobaproa는 계속해서 뜨거운 논쟁의 주제로 남아있다.
2006년 6월 6일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펠리페 칼데론이 그의 처남인 디에고 사발라가 설립한 소프트웨어 회사인 힐데브란도에 대규모 계약을 주었다고 비난했다. 칼데론은 이 회사에 소액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칼데론이 에너지부 장관으로 재임한 8개월 동안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또한 이 회사가 탈세를 했다고 비난했다. 칼데론은 토론회와 이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자신이 재임하는 동안 가족 중 누구에게도 계약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단호히 부인했다. 현 에너지부 장관 페르난도 카날레스 클라리온도 계약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부인했으며, 언론에 부정행위가 실제로 발생했는지 불분명하다고 보도했다。 정부 계약 웹사이트인 콤프라넷에 따르면, 민주혁명당이 언급한 연방 정부와 사업을 한 유일한 회사는 "메타 데이터, S.A. de C.V."였는데, 이 회사는 칼데론이 에너지부 장관 임기를 마치기 직전에 힐데브란도에 인수되었다. 메타 데이터는 1997년부터 정부와 사업을 해왔으며, 이는 국민행동당이 연방 정부를 장악하기 전, 칼데론이 에너지부 장관으로 8개월간 임명되기 전, 그리고 힐데브란도가 인수하기 훨씬 전부터였다. 이 계약 중 일부는 칼데론이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갱신된 것으로 보인다. 칼데론은 공식적으로 계약 갱신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힐데브란도는 정부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칼데론이 장관이 되기 전부터였다. 이 회사는 칼데론과의 관계가 정부가 자신들을 고용하는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또한 이 회사는 계약 가치가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언급한 만큼 높지 않다고 부인했으며, 탈세도 부인했다. 연방 정부는 탈세 혐의를 계속 조사했다. 또한 국민행동당이 장악한 연방 재무부는 멕시코시티 정부가 힐데브란도에 대한 세금 정보를 로페스 오브라도르 캠페인에 불법적으로 제공했다고 비난했다. 로페스 오브라도르 팀은 연방 재무부 내 누군가가 세금 데이터를 유출했다고 말했다. 힐데브란도 스캔들의 영향은 여러 여론 조사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칼데론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 하락이었다. 예를 들어, 레포르마는 그를 로페스 오브라도르(37%)에 이어 2위(35%)로, 밀레니오는 로페스 오브라도르(34.2%)에 이어 2위(31%)로 평가했다. 펠리페 칼데론은 힐데브란도 사건에서 부패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계속 부인했으며, 그는 다른 여론 조사 결과에 따라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9. 수상 및 영예
칼데론은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외국으로부터 다양한 영예를 받았다.
- 벨리즈: 벨리즈 훈장
- 브라질: 남십자성 훈장 대십자장 (2007년 8월 7일)
- 칠레: 메리트 훈장 대십자장
- 덴마크: 코끼리 훈장 기사 (2008년 2월 18일)
- 엘살바도르: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 국가 훈장 대십자장 (2008년 3월 4일)
- 과테말라: 케찰 훈장 칼라 (2011년 7월 27일)
- 스페인: 이사벨라 가톨릭 훈장 칼라 기사 (2008년 6월 6일), 시민 공로 훈장 칼라 (2012년 11월 15일)
- 영국: 바스 훈장 명예 기사 그랜드 크로스 (2009년 3월 30일)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상을 수상했다.
- 세계 경제 포럼 WEF 글로벌 리더십 국가 리더십 상 (2012년 1월)
- 타임지 선정 "주목할 만한 인물" (2010년)
- 뉴 스테이츠먼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인" (2010년 9월)
- 라틴 트레이드지 "브라보 비즈니스 어워드 올해의 리더" (2009년 10월)
- 라틴 비즈니스 크로니클지 "올해의 리더" (2007년 12월 17일)
- 경제 및 기후 글로벌 위원회 명예 의장
10. 유산 및 평가
펠리페 칼데론의 대통령직과 공직 생활은 멕시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한다.
10.1. 긍정적 평가 및 업적
칼데론 행정부는 보편적 의료 보장, 교육 확장, 환경 보호 노력, 경제 안정 및 성장, 인프라 확충, 무역 다각화, 그리고 국제 무대에서의 리더십 등 여러 분야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세구로 포풀라르를 통한 보편적 의료 보장 확대와 역사상 가장 많은 대학 설립은 그의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환경 분야에서는 삼림 벌채 감소와 녹색 기술 투자 유치, 그리고 칸쿤 협정을 성공적으로 주최하며 국제적인 기후 변화 대응에 기여한 점이 인정받았다. 경제적으로는 대침체 속에서도 물가와 이자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외국인 직접 투자를 유치하며 경제 다각화를 추진한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의 지지율은 재임 기간 동안 변동을 보였지만, 대체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2007년 2월 58%에서 시작하여 2008년 6월에는 64%까지 상승했다가 2010년 3월 45%로 하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5월 54%, 2012년 2월 58%, 2012년 3월 66%까지 다시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2년 8월에는 46%로 하락했지만, 임기를 마칠 때 그의 행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64%에 달했으며, 25%만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0.2. 비판 및 부정적 평가

칼데론 행정부는 2006년 대선 결과의 정통성 논란, 그리고 특히 멕시코 마약 전쟁으로 인한 폭력 증가와 인명 피해에 대해 심각한 비판을 받았다. 취임 직후 선포된 마약 전쟁은 수만 명의 사망자를 초래했으며, 그의 공공보안부 장관 헤나로 가르시아 루나가 주요 마약 카르텔과 연루되어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은 그의 행정부의 부패 문제를 드러냈다. 또한, 정부가 페가수스 스파이웨어를 사용하여 정치적 반대자와 언론인을 감시했다는 폭로와 미국 정보기관의 감시 스캔들도 중요한 논란으로 남았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재임 기간 동안 제기된 알코올 의존 의혹이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요인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국가 부채가 GDP의 22.2%에서 35%로 증가했으며, 빈곤율도 43%에서 46%로 상승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또한 Fobaproa와 힐데브란도 사건과 같은 과거 직책과 관련된 특정 의혹들도 그의 공직 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러한 비판들은 칼데론의 유산에 복잡하고 논쟁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