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체스네키 줄러는 헝가리의 유서 깊은 체스네키 가문 출신으로, 그의 초기 생애는 가문의 재정적 어려움과 개인적인 학문적, 군사적 열망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1.1. 가문 및 배경
체스네키 줄러의 아버지는 발명가이자 가난한 귀족이었으며, 어머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발칸반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상업적 관계를 맺고 있던 부유한 곡물 상인의 외동딸이자 상속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그들의 재산 대부분은 세르비아 정부에 의해 압류되었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가문의 재정적 어려움을 더욱 심화시켰다.
1.2. 교육 및 초기 영향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줄러는 학업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고 문학과 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가족은 그가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되기를 권유했으나, 그는 곧 마음을 바꾸었다. 본콤파니 가문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의 군사 학교에 진학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오랜 가문 친구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상원의원이었던 엔리코 산 마르티노 디 발페르가 백작의 소개로 문화 엘리트와 상류 사회에 발을 들였다. 이탈리아어와 문화에 매료된 젊은 사관생도 체스네키는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여러 시를 모국어로 번역했다. 그는 단눈치오를 존경했으며, 이후 그의 발칸반도에서의 모험은 단눈치오의 카르나로 섭정국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2.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동
체스네키 줄러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헝가리 예비역 장교로서 복무하고, 크로아티아 국왕의 부관을 지냈으며, 명목상 마케도니아 공국의 국가 원수를 역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동시에 그는 반나치즘과 유대인 구출에 헌신하는 인도주의적 면모를 보였다.
2.1. 헝가리에서의 복무
1940년 제2차 빈 중재 이후, 그는 헝가리 예비역 장교로서 북부 트란실바니아 점령 및 재통합 작전에 참여했다. 이 작전 중 보여준 용맹함으로, 당시 헝가리 왕국의 섭정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는 그에게 비테즈 칭호를 수여하고, 트란실바니아 해방 기념 메달과 용맹 메달을 수여했다.
2.2. 크로아티아에서의 역할
1941년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된 후,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수립되었다. 이탈리아와 신생국 대표 간의 협상에 따라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조카인 아이모네 공작이 토미슬라브 2세라는 이름으로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크로아티아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헝가리어에 능통했으며, 로마에서 아이모네 공작을 만난 적이 있던 체스네키 줄러는 새로운 군주의 부관이자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바코니 백작"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국왕이 실제로 자그레브의 왕좌에 오르지 않았고, 우스타샤 정권의 잔혹함에 깊이 실망한 체스네키 백작은 이 직책을 떠났다.
2.3. 피친도스 공국 및 마케도니아 공국에서의 역할
1941년 8월, 체스네키 줄러 이슈트반 백작은 "마케도니아의 대공(Grand Voivode)" 또는 "공작(Duke)"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가문은 중세 마케도니아에서 봉건 영주 직위를 가졌으며, 반파시즘 성향의 이탈리아 당국과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지역 마케도니아 자치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남서부 마케도니아에 마케도니아 소국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 칭호의 정당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43년, 그는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알치비아데 디아만디에 의해 핀두스와 모글레나 계곡 주변에 형성된 블라흐족 국가인 피친도스 공국의 섭정으로 선언되었다. 그는 이후 마케도니아 공국에서 "율리우스 1세"라는 이름으로 명목상의 국가 원수가 되었다. 율리우스 공작은 단지 명목상의 통치자였으며, 연합국 정부와 연락을 취했다. 그의 의도는 아로마니아인과 메글레노-루마니아인을 위한 자치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하고 나치 독일이 발칸반도 지역을 장악하면서, 그는 유대인 친척과의 관계 때문에 강제로 퇴위당하고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본어 소스에 따르면, 그의 형인 미하이 체스네키가 미카엘 1세로 즉위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부하면서 공국 자체가 소멸되었다.
2.4. 반나치즘 및 인도주의 활동
체스네키 줄러 이슈트반 백작은 강력한 반공주의 성향을 가진 보수적인 군주주의자였지만, 그는 항상 나치즘과 반유대주의를 경멸했다. 그의 누이 중 한 명은 헝가리 유대인과 결혼했으며, 이 유대인 친척은 훗날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었다.
체스네키는 또한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에서 여러 유대인의 생명을 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전쟁 후 그의 공적은 이스라엘에서 인정받았으며, 그는 이스라엘로부터 "열방의 의인" 칭호를 받았다.
2.5. 정치적 활동 및 감시
체스네키 백작은 토미슬라브 국왕이 연합군과 별도의 평화 협정을 맺으려는 비밀 계획을 알고 있었으며, 발칸반도에 연합군의 개입 경로를 열어 마케도니아인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에도 자유를 보장하고 소련군으로부터 구원하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그는 미클로시 칼라이의 헝가리 정부와 크로아티아 내 로르코비치-보키치 쿠데타 참가자들 사이의 연락책 역할도 수행했다. 호르티 섭정의 전쟁 중 진영 변경 시도가 실패한 후, 그는 게슈타포의 수색 대상이 되었다.
3. 전후 생활 및 망명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체스네키 줄러는 헝가리 공산 정권의 탄압을 피해 망명길에 올랐다.
3.1. 망명 생활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부다페스트에 있었다. 그의 반나치즘 경력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점령한 헝가리에서 체스네키 줄러는 "노동 계급의 적"으로 선포되어 망명을 강요받았다. 그는 토미슬라브 2세 국왕(당시 아이모네 디 아오스타 공작)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갔으며, 이후 브라질에서 생활했다.
3.2. 사망
체스네키 줄러는 1970년에 브라질에서 사망했다.
4. 평가 및 유산
체스네키 줄러의 삶은 복잡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인도주의적 활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4.1. 인도주의적 활동에 대한 인정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의 박해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다.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에서 유대인들을 구출한 그의 공적은 전후 이스라엘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며, 그는 "열방의 의인" 칭호를 받았다. 이는 그의 반나치즘 신념과 인류애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남아 있다.
4.2. 가문의 유산

체스네키 줄러의 가문은 헝가리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으나, 그의 생애 동안 재정적 어려움과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그의 인도주의적 활동은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으며, 그의 삶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개인의 신념과 행동이 어떻게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