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이노세 나오키는 1946년 11월 20일 나가노현 시모미노치군 이이야마정(현 이이야마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초등학교 교사였으며, 이이야마에서 결혼했다. 그는 생후 2년 6개월 만에 나가노시로 이주하여 오조지 바로 아래에 살았다. 1950년 5월, 그가 3세 6개월이었을 때 아버지가 협심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1.1. 어린 시절 및 교육
이노세는 신슈 대학 교육학부 부속 나가노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나가노현 나가노 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신슈 대학 인문학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70년에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사회주의 운동 이론가인 시미즈 신조의 세미나에 참여했으며, 신좌익 학생 운동의 지도자로서 이른바 '하얀 헬멧'(중핵파)에 소속되었다. 1967년 하네다 투쟁을 시작으로 신좌익 학생 운동이 고양되던 시기에, 1969년에는 신슈 대학 전공투 의장을 맡았다. 그는 대학 교내에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학생 운동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반미 및 반이스라엘 성격의 10.21 국제반전의 날 투쟁 (1969년)과 사토 총리 방미 저지 투쟁에 참여했다. 이노세는 자신이 참여했던 1969년 사토 총리 방미 저지 투쟁을 끝으로 1960년대 후반 학생 운동이 막을 내렸다고 보고 있으며, 그 이후의 운동은 이른바 전공투 운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학 졸업 후 상경하여 결혼했다. 그는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등의 경험을 거쳐 1972년 메이지 대학 대학원 정치경제학 연구과 정치학 전공 박사 전기 과정에 입학하여 하시카와 분조 교수에게 일본 정치사상을 사사했다. 학생 운동을 떠난 후, '일상성의 연속이 보통의 생활'이라는 생각으로 '그러한 일상성에서 일본의 근대와 내셔널리즘을 다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셔널리즘 연구자인 하시카와 분조에게 가르침을 청했다고 한다.
2. 작가 및 언론인 경력
학업을 마친 후 이노세는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83년 저서 昭和16年夏の敗戦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일본어을 통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패배를 예측했던 총력전 연구소의 분석 결과를 다루었다. 이 책에서 그는 총력전 연구소가 전황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일본이 자명한 물자 열세로 전쟁에서 승리할 방법이 없을 것이며, 전쟁이 길어지고 소련이 개입하면 일본이 패배할 것이므로, 미국과의 전쟁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음을 주장했다. 그는 총력전 연구소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일부로 비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냉철한 분석을 수행한 싱크탱크에 불과했다고 강조했다.
2.1. 주요 저서 및 수상 경력
이노세는 1987년 일본 천황 이미지의 발전을 다룬 帝の肖像미카도노 쇼조일본어를 저술하여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과 자포니즘 학회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세이부 그룹과 쓰쓰미 요시아키의 황족과의 관계를 엮어 기술한 것이다. 1996년에는 재정 투융자가 관료들의 낙하산 인사를 지원하는 구조를 고발한 日本国の研究일본국의 연구일본어로 분게이슌주 독자상을 수상하며 도로공단 민영화의 시발점을 마련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이 외에도 미시마 유키오 평전인 ペルソナ페르소나일본어 (1995년), 다자이 오사무 평전인 ピカレスク피카레스크일본어 (2000년), 그리고 기쿠치 간에 대한 こころの王国코코로노 오코쿠일본어 (2004년) 등이 있다. 1993년 저서 黒船の世紀쿠로후네노 세이키일본어는 2009년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1995년 미시마 유키오 평전인 ペルソナ페르소나일본어는 2012년 영어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다.
2.2. 언론 활동 및 사회 비평
이노세는 일본의 지배 계층과 개혁에 대한 그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해 왔다. 그의 오랜 제안은 4대 공공 도로 공사의 민영화와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우편 저축 시스템의 개혁이었다. 이러한 개혁 의지를 바탕으로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행정개혁단에 합류하여 행정개혁 담당 대신의 자문기관인 행혁단행평의회에서 활동했으며, 2002년에는 일본도로공단의 도로관계 4공단 민영화 추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비용 절감에 대한 타협 없는 주장을 펼쳐 일부 다른 임명자들이 위원회 직책을 거절할 정도였다.
이노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정부가 연합국을 이길 수 없다는 데이터를 무시하고 1941년 도쿄가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정보 접근을 금지했기 때문에 일본이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러한 행동이 오늘날 관료들에 의해 경제 문제에 대해 반복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부채에 시달리는 일본을 돕기 위해 관료들이 반드시 공개하지 않는 정확한 정보를 국민들이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당국이 (처음) 발표한 것보다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사람들이 공유한다면 어떤 개혁이든 실행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2007년에는 지방분권 개혁 추진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도쿄 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 객원교수를,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객원교수를,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도쿄공업대학 세계문명센터 특임교수를 역임하며 학술 활동을 병행했다.
3. 정치 경력
이노세 나오키는 작가이자 언론인으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했으며, 도쿄도의 부지사와 도지사를 역임하며 다양한 정책과 활동을 펼쳤다.
3.1. 도쿄도 부지사 시절
2007년 6월 15일, 이시하라 신타로 당시 도쿄도지사는 이노세가 도쿄도 부지사로 봉사하는 데 동의했다고 발표하며, "우리의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많은 차이점에 대해 토론하고 논의하는 것이 건전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노세는 처음에 도쿄도의회 자민당 의원들과는 상반된 입장을 보였고, 취임 직후 자민당이 추진하던 도시 재개발 계획을 뒤집기도 했다. 그러나 이시하라 도지사의 압력으로 자민당 의원들과 협력하게 되었다.
3.1.1. 동일본 대지진 대응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이노세는 미야기현 게센누마시의 중앙공민관에 고립된 446명을 도쿄 소방청에 지시하여 구출하도록 했다. 이 구출 작전은 게센누마시 사회복지협의회 마더스홈 원장의 아들(영국 거주)이 트위터를 통해 "불바다. 안 될 수도. 힘내자"라는 내용의 휴대전화 이메일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아들은 지상 접근이 어렵다며 공중 구출을 요청했고, 이 트윗이 이노세에게 전달되었다. 이노세는 즉시 도쿄 소방청 방재부장을 호출하여 헬기 출동을 직접 지시했고, 방재부장도 즉시 출동을 결정했다. 현지에서의 출동 요청이 없던 상황에서 헬기 출동은 극히 이례적인 조치였다. 당시 공민관에 고립된 인원은 십여 명으로 추정되었으나, 헬기가 도착하여 현장을 확인한 결과 446명으로 밝혀졌다. 이노세는 이 사건과 동일본 대지진 이후 도쿄도 부지사로서 어떻게 지휘했는지를 2012년 3월 발간한 저서 決断する力결단하는 힘일본어에 정리했으며, 救出-3.11気仙沼公民館に取り残された446人구출: 3.11 게센누마 공민관에 고립된 446명일본어이라는 다큐멘터리 작품으로도 자세히 다루었다.
3.1.2. 도쿄 천연가스 발전소 프로젝트
2011년 5월, 이노세는 가와사키 천연가스 발전소를 시찰하며 비교적 좁은 부지에서도 건설이 가능하고 가스터빈과 증기터빈을 결합한 '복합 사이클 방식'으로 발전 효율이 높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2011년 8월, 그는 '도쿄 천연가스 발전소 프로젝트팀'(PT)을 발족하고 '도쿄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건설 후보지, 사업 방식, 국가 규제 완화 제안 등을 검토했다. 이 PT에는 도쿄도 환경국, 교통국, 하수도국 등 9개 국이 부처 간 장벽을 넘어 참여했다. 그는 원자력 발전소 1기 규모에 해당하는 1 GW급 발전소 건설을 목표로 9월에 5개 적합지를 발표했고, 전력 시장 개혁을 추진했다. 2012년 5월에는 에도가와구의 가사이 수재생센터 부지, 고토구의 스나마치 수재생센터 부지, 중앙 방파제 바깥 매립지 등 3개 후보지로 압축하고, 도쿄 전력에 대한 장기 계약 매전과 신규 전력 소매 사업자(PPS)로서의 사업을 결합하면 수익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도쿄도는 2012년 6월부터 3개 후보지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절차를 시작했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전력 부족을 보완하고 소비자들이 도쿄 전력 외의 다른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는 유연한 시장으로 개혁하기 위해, 이노세는 2012년 5월 16일 경제산업성의 에다노 유키오 장관과 만나 노후 화력 발전소 교체 시 신규 참여를 촉진하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신규 전력 소매 사업자(PPS)에 대한 재정 지원책을 마련하여 "(현재 3.5%에 불과한) 신규 전력 소매 사업자의 시장 점유율을 30%까지 늘리는 정책을 전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나아가 7월 18일에는 후루카와 모토히사 국가전략 담당 대신과 만나 노후 화력 발전소의 교체 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환경영향평가 절차 간소화를 요청하는 요망서를 제출했다.
3.1.3. 도쿄 전력 개혁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경영난에 빠진 도쿄 전력은 2011년 12월, 니시자와 도시히오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기업 대상 대규모 요금 인상 방침을 발표했다. 이듬해 2012년 1월 17일, 일률적으로 2.6 JPY 인상이 발표되자, 대규모 수요자이자 중소기업을 관할하는 행정 주체이며 최대 주주인 도쿄도를 대표하여 이노세 나오키는 1월 26일 기자회견을 통해 도쿄 전력, 원자력 손해배상 지원 기구, 경제산업상에 대해 "연료비 등 부담 증가, 경영 합리화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명확한 정보 공개를 요구한다"는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 명의의 긴급 호소를 발표하며 '제동'을 걸었다. 그는 이 호소에서 도내 도쿄 전력 계열사를 정리하는 것만으로 1년에 100.00 억 JPY를 마련할 수 있다는 독자적인 분석을 발표하며, 인상 근거가 되는 연료비 증가 내역을 제시하지 않으면 인상에 응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중소기업에 대한 '애정이 없다'며 배려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도쿄 전력은 3월에 인상 완화책을 발표했다. 3월에는 경제산업상 에다노 유키오를 방문하여 도쿄 전력의 추가 합리화 방안으로 계열사 등과의 수의계약 비율을 30% 삭감할 것을 제안했다. 2011년 11월에 공개되었던 긴급 특별 사업 계획에서 10년간 2.60 조 JPY로 명시되었던 구조조정 금액을 추가로 5000.00 억 JPY 증액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에다노는 이를 수용하고 종합 특별 사업 계획에 반영하도록 원자력 손해배상 지원 기구와 도쿄 전력에 지시하겠다고 명언했다. 5월에 공개된 종합 특별 사업 계획에서는 합리화 금액이 3.30 조 JPY로 증액되었다.
2012년 4월 27일에는 도쿄도로서 5가지 주주 제안을 발표했다. 법인 주주들에게 호소문을 발송하고, 개인 주주들에게도 찬동을 요청했다. 이 제안의 첫 번째 항목으로 공인회계사 카시타니 타카오를 사외이사로 추천했는데, 도쿄 전력은 5월 14일 발표한 신규 임원 체제에서 7명의 사외이사 중 한 명으로 카시타니를 내정했다. 또한 도쿄 전력은 '고객 서비스 우선을 사명으로 한다'는 경영 이념을 정관에 기재하도록 요구하는 등 도쿄도의 다른 주주 제안에 대해 '정관에 맞지 않다'고 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거의 경영 방침에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3.1.4. 도쿄 지하철, 도에이 지하철 일원화
2010년 4월, 이노세는 프로젝트팀을 구성하여 다중 행정의 상징이었던 '도쿄의 지하철 일원화' 검토를 시작했다. 6월 29일, 도쿄 지하철 (구 제도고속도교통영단) 주주총회에 도쿄도 대표로 참석하여, 도쿄 지하철 주식을 거의 절반씩 보유한 일본 정부와 도쿄도, 그리고 도쿄 지하철을 포함한 3자 협의 기관 설립을 제안하여 합의를 얻어냈다.
그 결과, 8월 3일 국토교통성에서 '제1회 도쿄 지하철 일원화 등에 관한 협의회'가 개최되었고, 이어서 제2회는 9월 8일 도쿄도청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도쿄 지하철 자회사 12곳의 임원 보수 등 실체가 공개되었다. 또한 병행하여 교통 정책 및 회사 경영 전문가들로 구성된 유식자 회의 '도쿄 지하철을 생각하는 간담회'를 개최했다.
2011년 2월 3일에 열린 제4회 '도쿄 지하철 일원화 등에 관한 협의회'에서는 도쿄 지하철과 도에이 지하철의 '일원화'는 보류되었지만, 도쿄도의 승인 없는 도쿄 지하철 주식 매각을 저지하고, 환승 할인 금액 인상, 양사 간 연락역 확충 등의 시행을 명시한 합의 문서가 도출되었다. 협의 결과, 일원화를 가로막는 '장벽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구단시타역의 도쿄 지하철 한조몬선과 도에이 지하철 신주쿠선 홈을 가르고 있던 이른바 '바보의 벽' 철거 공사가 시작되어, 2012년 6월 도쿄 지하철 주주총회에 앞서 철거 현장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일원화가 도에이 지하철의 빚을 메트로에 전가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 이노세는 "도에이도 2006년에 흑자 전환했으며, 경상 이익 상승 추세도 메트로와 동일한 수준"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경상 이익만으로는 설비 투자나 채무 상환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으며, 도에이 지하철의 빚 상환에 직접 보조금이 투입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쿄 지하철에 빚을 전가하지 않는다는 근거로는 불충분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러한 민간 기업으로서의 회계나 대형 사철의 비즈니스 모델로 이해하려는 견해에 대해 이노세는 "도쿄 지하철은 사철의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라 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그 이유 중 하나로, 1970년대 이후 일본 정부와 도쿄도가 영단 지하철 (도쿄 지하철의 전신)에 5400.00 억 JPY의 보조금을 절반씩 지급했으며, 도에이 지하철에도 양측이 절반씩 8600.00 억 JPY를 지출했음을 들었다.
이노세는 야마노테선 내의 도쿄 지하철 경영은 연선 개발을 통한 자산 형성이 어려운 대신 공적 자금이 투입되어 막대한 빚을 갚는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지하철 일원화는 심의회 등의 계획 명칭을 비롯하여 도쿄 도심부 지하철 건설 초기부터 이미 구상되어 있었다(예: 구단시타역의 구조·설계)고 덧붙였다.
3.1.5. 도쿄 수도 사업 해외 진출
2010년 4월, 이노세는 '해외 사업 조사 연구회'를 설립하여 도쿄도 수도국의 해외 진출을 추진했다. 이 연구회는 상사 등 60여 개 기업을 대상으로 청취 조사를 거쳐 6월에 도쿄 수도 국제 공헌 미션 파견국을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몰디브 5개국으로 결정했다. 8월에는 첫 단계로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정부 고위 관계자들에게 도쿄 수도 시스템의 우수성을 홍보했다. 9월에는 일본을 방문한 말레이시아의 피터 친 장관과 함께 도쿄도 수도국 수운용센터를 시찰했다.
3.1.6. '언어의 힘' 재생 프로젝트
2010년 4월, 젊은이들의 활자 이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처 간 연계 프로젝트팀인 '언어의 힘' 재생 프로젝트를 출범했다. 그는 "일본인에게 부족한 것은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토론하는 '언어 기술'"이라며, 쓰쿠바 언어기술교육연구소장 미모리 유리카 등 '언어'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젊은 직원들을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고, 신규 채용 직원을 대상으로 언어 표현력 향상 연수를 실시했다. 이후 직원 연수를 계속하면서 도쿄 시민을 대상으로 11월 3일에는 '독서'와 '언어'를 주제로 한 행사 '멋진 언어를 만나는 축제 - '언어의 힘'을 도쿄에서'(장소: 도쿄 국제 포럼)를 개최했다. 또한 2011년에는 이 프로젝트의 내용을 묶어 言葉の力-「作家の視点で国をつくる」언어의 힘: '작가의 시점으로 국가를 만들다'일본어를 출간했다.
3.1.7. 참의원 의원 숙소 건설 반대
부지사 취임 직후, 시미즈다니 공원 (도쿄도 지요다구기오이초)에 인접한 녹지(도쿄도 풍치 지구)에 건설될 예정이었던 참의원 의원 숙소 건설 중단을 제안하고,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를 현지로 안내했다. 이시하라는 그 자리에서 "(숲을 파괴하고 숙소를 건설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이노세는 건설 예정지 주변 주민들의 반대 운동에 대해 닛케이 BP의 자신의 칼럼에서 "신규 의원 숙소 건설 예정지는 기슈 도쿠가와 번저 터로, 수령 100년 이상의 나무를 포함한 약 4959 m2의 아름다운 자연림이 남아 있다. 중의원은 호화로운 아카사카 의원 숙소로 국민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상 16층(56 m 높이), 총 80세대가 모두 79 m2 규모의 호화로운 신규 의원 숙소를 짓는 것보다 환경을 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당시 자민당 도쿄도 지부 간사장이었던 우치다 시게루 (지요다구 출신 도의원)와의 대립의 원인이 되었다. 이 내용은 2016년 저서 東京の敵도쿄의 적일본어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3.1.8. '주산기 의료 체제 정비 프로젝트팀'(PT)
2008년 11월, 도쿄도 내에서 중증 임산부의 수용 거부가 잇따르자, "의사나 행정이 아닌 환자 측의 관점에서 문제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며 '주산기 의료 체제 정비 프로젝트팀'(PT)을 발족했다. 도쿄도립 보쿠토 병원 등 4차례 현장 시찰을 실시하고, NICU 병상당 수지 분석을 통해 운영 비용(약 4000.00 만 JPY)이 진료 보수와 보조금 총액(약 3300.00 만 JPY)을 초과하고 있음을 분석했다. 이에 따라 병원이 NICU를 늘리기 어려운 현 상황을 파악하고, 2009년 3월 이노세는 마스조에 요이치 후생노동대신을 방문하여 NICU (신생아 집중치료실) 정비 촉진에 관한 긴급 요청서를 제출했다. 이어서 4월에는 세미오픈 시스템의 추가 보급 등 10개 항목의 제안을 포함한 주산기 의료 체제 정비 PT 보고서를 정리했다.
3.1.9. 홋카이도 유바리시로 도쿄도 공무원 파견
"도쿄도 직원이 유바리시에 가서 재정 파탄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도쿄가 가진 노하우와 높은 수준을 수도 정부로서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싶다"는 취지로 2008년 1월부터 도쿄도 공무원 2명을 2년간 유바리시에 파견했다. 또한, '타임리 연수'라는 명목으로 단기 직원 파견도 실시했다. 10월에는 폐교의 비품 청소 및 정리 지원을 위해 6명을 파견했으며, 2009년 1월에는 '눈 치우기 대'로서 도쿄도 직원 10명을 추가로 파견하여 복지 시설의 제설 작업을 지원했다. '눈 치우기 대'에는 이노세의 요청에 따라 오사카부와 히로시마시에서도 각각 2명씩 직원이 파견되었다. 이 외에도 2009년 6월에는 멜론 농가 수확 지원을 위해 6명을 파견했다. 당시 파견되었던 도쿄도 직원 중에는 훗날 유바리 시장이자 홋카이도지사가 되는 스즈키 나오미치가 있었다. 2010년 12월, 도쿄도 청소년 건전 육성에 관한 조례 반대파에게 트위터로 "유바리시에 가서 눈을 치우면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농담성 발언을 했고, 이에 성인 만화가 우라시마 레이지는 2011년 1월 실제로 유바리시를 방문하여 눈을 치우기도 했다. 이후 이노세 부지사와 우라시마의 만남과 대담이 성사되었고, 이 과정은 니코니코 동화를 통해 생중계되기도 했다.
3.1.10. 저출산 고령화 대책
2009년 6월, 이노세는 도쿄도의 고령자 인구 증가와 고령자 시설 및 배리어 프리 주택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주거' PT'를 발족하고 팀장을 맡았다. 발족 당시 이노세는 "수도 정부, 수도 공무원으로서 가스미가세키의 수직 행정을 도쿄에서부터 바로잡아 나가야 하며, 도쿄도가 내각부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의 기개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도 '주거' PT는 주택 정책을 담당하는 도쿄도 도시정비국과 고령자 복지를 담당하는 도쿄도 복지보건국 등 여러 부서에서 부처를 넘나드는 인력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제기된 케어 부착 주택은 이후 국가 정책인 서비스 부착 주택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3.2. 도쿄도지사 시절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가 사임한 후, 2012년 11월 1일 이노세는 도지사 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는 이시하라의 후임으로 지명받았고, 2012년 12월 16일 치러진 2012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총 4,338,936표를 얻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도쿄도 역사상 개인 최다 득표 기록이었다. 12월 18일 공식적으로 제18대 도쿄도지사에 취임했으며, 아오시마 유키오와 이시하라 신타로에 이어 3회 연속으로 작가 출신이 도쿄도지사가 되는 기록을 세웠고, 최초의 전후 출생 도지사가 되었다. 그러나 후술할 자금 제공 문제로 도의회 등으로부터 거센 추궁을 받았고, 2013년 12월 19일 사임을 표명한 뒤 12월 24일 취임 1년여 만에 도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도지사 임기는 372일로, 도쿄도 역사상 가장 짧은 임기였다.
3.2.1. 2020년 하계 올림픽 유치
도쿄도지사로서 이노세는 도쿄의 2020년 하계 올림픽 성공적인 유치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2012년 런던에서 열린 2012년 하계 올림픽에 참석하여 도쿄의 유치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시하라 전 지사의 올림픽 유치 방침을 이어받아 2020년 올림픽의 도쿄 유치를 성공시켰다.
3.2.2. 주요 정책 및 활동
이노세 도지사 재임 중 추진된 주요 정책과 활동은 다음과 같다.
- 에너지 정책 (도쿄 천연가스 발전소 프로젝트):** 이노세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의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도쿄 천연가스 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2011년 5월 가와사키 천연가스 발전소를 시찰하며 높은 발전 효율과 좁은 부지 활용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2011년 8월에는 도쿄 천연가스 발전소 프로젝트팀(PT)을 발족, 원전 1기분에 해당하는 1 GW 규모의 발전소 건설을 목표로 세웠다. 2012년 5월에는 에도가와구, 고토구 등에 있는 수처리센터 부지를 최종 후보지로 선정하고, 도쿄 전력과의 장기 계약을 통한 매전과 신규 전력 소매 사업자(PPS) 사업을 결합하여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경제산업성에 규제 완화를 제안하며 신규 전력 소매 사업자의 시장 점유율을 30%까지 늘리는 정책을 주장했다.
- 지하철 일원화:** 2010년 4월, 다중 행정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도쿄의 지하철 일원화'를 검토하기 위한 프로젝트팀을 구성했다. 그는 도쿄 지하철과 도에이 지하철의 일원화를 추진하며, 양측의 환승 할인 확대 및 연락역 확충을 위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특히 구단시타역의 도쿄 지하철 한조몬선과 도에이 지하철 신주쿠선 홈을 가로막던 '바보의 벽' 철거 공사를 진행시키며 상징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노세는 도에이 지하철의 부채를 도쿄 지하철에 전가한다는 비판에 대해, 도에이 지하철이 2006년 이후 흑자 전환했으며, 도쿄 지하철이 사철이 아닌 공적 성격을 띠고 공적 자금을 투입받았음을 강조하며 반박했다.
- 수도 사업 해외 진출:** 2010년 4월 '해외 사업 조사 연구회'를 설립하여 도쿄도 수도국의 해외 진출을 추진했다.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몰디브 등 5개국을 중점 파견국으로 선정하고, 말레이시아를 시작으로 도쿄 수도 시스템의 우수성을 홍보했다.
- 도쿄 전력 개혁:**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경영난에 빠진 도쿄 전력의 요금 인상에 대해, 그는 도쿄도의 대규모 수요자 및 최대 주주로서 도쿄 전력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대기'를 요청했다. 도쿄 전력 계열사의 효율성 개선을 통해 연간 100.00 억 JPY 절감 가능성을 제시했고, 이는 결국 도쿄 전력의 요금 인상 완화 및 구조조정 규모 확대(최대 3.30 조 JPY)로 이어졌다. 그는 또한 외부 전문가를 사외이사로 추천하는 등 도쿄 전력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주주 제안을 주도했다.
- 후쿠시마 원전 사고 대응 (부지사 시절):** 도지사 취임 전 부지사 시절에 동일본 대지진 당시 게센누마시 공민관에 고립된 446명을 도쿄 소방청 헬기를 동원하여 구출하는 등 재난 대응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3.3.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도쿄도지사직 사임 후 이노세는 작가 활동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실제로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
2022년 제26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일본유신회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44,212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로써 그는 5년간의 공민권 정지 처분 이후 다시 국회의원이 되며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현재 일본유신회 국회의원단 참의원 간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4. 사상 및 주장
이노세 나오키는 일본의 국가 정체성, 사회 문제, 그리고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여러 저서와 공개 발언을 통해 피력해 왔다.
그는 전후 일본 사회를 "디즈니랜드 국가"라고 비유하며 비판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전후 사회는 '예상 밖'의 일이 허용되는 사회였다. 미국에 방위를 맡김으로써 전쟁을 국가의 예상 밖의 일로 여겨왔다"고 주장했다. 이노세는 오키나와를 비롯한 전국에 미군 기지를 두고 도쿄 상공도 미군에 의해 사용이 제한되는 현실을 많은 일본인이 알면서도 모른 척해왔다고 비판했다. 그는 "전후 일본은 일전하여 방위를 포기하고 이른바 반주권 국가가 되었다. 일본의 전후 66년간은 미국이라는 문지기에게 보호받는 역사상 특이한 '디즈니랜드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디즈니랜드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막연한 불안감을 품으면서도 그렇게 믿으려 해왔다"고 진단했다. 나아가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전후'에서 '재난 후'로의 역사적 전환은, 모든 위험을 '예상 밖'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발생 가능한 위험을 '예상'하는 사회로의 전환점을 의미하며, 더 이상 '예상 밖'이라는 말로 변명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도쿄 전력을 전후 사회의 상징으로 보았으며, 후쿠시마 사고 당시 도쿄 전력이 내세운 변명 또한 '예상 밖'이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노세는 담배와 흡연에 대한 자신의 강력한 입장을 표명해 왔다. 그는 저명한 애연가로, 금연 운동을 "히스테리적인 금연 파시즘"이라고 비판하며 흡연자들이 세수에 기여하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2000년경 대학의 금연 강의실에서 흡연하며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으며, 한 학생이 이를 만류하자 "내 강의에서는 이 교실이 분연이다. 너희들 자리는 금연이지만 교단은 흡연석. 불만이 있으면 수강하지 않아도 좋다"고 일축했다고 한다. 2017년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도 금연 회의실에서 아이코스를 피우다가 제작진의 주의를 받았으나, "이 연기는 수증기이다"라고 반박하며 흡연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연기를 내뿜는 궐련과 적은 수증기만 나오는 가열식 담배를 동등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을 펼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노세는 마스크 착용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의 권장 방침에 반대하며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탈마스크'를 주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마스크의 감염 예방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며 2022년 10월 참의원 예산위원회 질의에서 "일본인의 마스크는 레이와의 상투이자 얼굴 팬티"라고 발언하며 마스크를 벗었다가 위원장으로부터 주의를 받기도 했다. 그는 2023년 출간한 저서 太陽の男 石原慎太郎伝태양의 남자 이시하라 신타로전일본어의 후기에서 "일본인은 마스크를 좋아한다. 바깥을 걸을 때는 벗어도 좋다는 지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불어도, 자전거를 타도, 차를 운전해도 마스크를 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서의 마스크는 후진적인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사례이며, 일본을 덮고 있는 동조 압력이 이 수십 년간의 정체를 초래했음은 분명한 듯하다"고 기술했다. 그는 또한 2023년 2월 후생노동성 '자문위원회'가 입학식·졸업식 마스크 착용에 대해 제시한 견해에 대해 "이 감염병 전문가들의 거만한 말투. 졸업식에는 조건부로 잠깐만 마스크를 벗게 해준다고? 국민이 여기까지 지시받을 이유가 없다. 그보다 코로나 관련 예산을 95.00 조 JPY까지 부풀린 책임, 적어도 그 아픔 정도는 느껴주었으면 좋겠다"고 비판했다.
5. 개인 생활

이노세 나오키는 1970년 도쿄로 이주한 후 결혼하여, 1974년과 1978년에 두 자녀(1남 1녀)를 두었다. 그의 첫 배우자인 이노세 유리코는 2013년 7월, 그가 도쿄도지사로 재임 중이던 시기에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2016년 10월 배우이자 화가, 영상작가인 니나가와 유키와의 교제가 알려졌고, 2018년 4월 약혼을 발표한 뒤 같은 해 12월 말 재혼했다.
개인적인 취미로는 매일 조깅을 즐기는 달리기 애호가로, 2012년 도쿄 마라톤을 완주하기도 했다. 또한 유도 검은 띠를 보유하고 있다.
6. 논란 및 스캔들
이노세 나오키의 경력은 여러 논란과 스캔들로 얼룩졌으며, 특히 도쿄도지사 재임 기간 중 발생한 금전 스캔들은 그의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주었다.
6.1. 도쿠슈카이 그룹 자금 스캔들
2013년 11월, 이노세는 도쿠슈카이 그룹으로부터 거액의 현금을 수수한 의혹에 휩싸였다. 보도에 따르면 2012년 도지사 선거를 앞둔 11월, 이노세는 도쿠슈카이 의료법인 창립자 도쿠다 토라오에게 "도지사 선거에 출마한다"고 인사하며 도쿠다 타케시 중의원을 통해 "남으면 돌려줄 테니 우선 1.00 억 JPY를 부탁한다"고 전화로 요청했다고 한다. 도쿠다 토라오는 "5000.00 만 JPY로 대응하라"며 "국회의원회관에서 전달하여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도쿠다 타케시 의원에게 지시했고, 도쿠다 타케시 의원 사무실에서 이노세에게 직접 현금으로 5000.00 만 JPY를 전달했다. 이 금액은 선거운동 비용수지 보고서, 도지사 자산 보고서, 정치자금 보고서에 기재되지 않았다.
이노세 도지사는 수수된 자금을 '차입금'이라고 설명하며 "도쿠슈카이 측에서 제안이 있었고,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해 빌렸다. 5000.00 만 JPY라는 액수가 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해명했다. 그는 11월 26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차용증을 언론에 제시하며 "원래 이노세가 도쿠슈카이에서 돈을 빌린 것은 도지사 선거 시 자민당 도쿄도연이 협력하지 않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에, 포스터 부착 등을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렌고가 협력해 주었기에 5000.00 만 JPY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이 수뢰로 추궁받았으니 완전히 억울한 누명이다"라고 말했다. 이때 공개된 차용증은 A4용지 한 장에 날인이나 수입인지 없이 이노세의 서명만 있는 간소한 형태여서 온라인상에서는 이노세가 든 차용증의 콜라주 이미지가 유포되기도 했다. 이 대출은 무이자에 무담보였으며, 은행 계좌가 아닌 금고에 보관되었고, 일본 선거 자금 당국에 이노세의 자산으로 신고되지 않았다.
도쿠슈카이 의료법인 그룹은 도쿄도 내에도 병원과 보험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도쿄도는 그룹의 노인 보건 시설에 약 7.50 억 JPY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또한 도쿠슈카이는 무사시노 도쿠슈엔이라는 노인 보건 시설 설립을 신청했고, 도쿄도는 인근 시설 수를 고려하여 150병상 규모를 인가했다. 150병상 규모의 시설의 경우 도쿄도가 최대 9.60 억 JPY의 공사비를 보조하므로, 이번 5000.00 만 JPY가 그 대가성 뇌물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선거운동 비용수지 보고서에 기재되지 않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도쿄 시민들에게 고발되었고, 시민 단체들은 5000.00 만 JPY가 정치 활동을 위한 차입금으로 인정될 경우 정치자금규정법에 따라 정치자금수지 보고서에 기재해야 하므로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에도 해당된다고 지적했다.
도쿄도 의회는 12월에 이노세에 대한 4일간의 공개 질의를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노세의 사건 경위에 대한 기억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이에 의회는 이노세 조사를 위한 특별 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이는 도의회가 도지사를 정식으로 조사한 첫 사례였다.
아사히 신문은 12월 12일 사설에서 이노세의 사임을 촉구했으며, 마이니치 신문도 같은 날 그가 도지사로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12월 16일 산케이 신문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도쿄 응답자의 89%가 이노세의 자금 설명이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63%는 그가 올림픽 개최 도시의 대표로서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노세는 2013년 12월 19일, 이시하라 전 도지사 및 아베 신조 총리 등 여러 고위 정치인들의 직접적인 압력에 따라 도지사직 사임을 발표했다. 사임 연설에서 그는 자신을 정치에 '아마추어'라고 표현하며, "다음 도지사는 도쿄를 올림픽을 통해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정치 전문가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도쿄도 의회는 12월 24일 그의 사임을 승인하고 공식화했다.
이노세는 이후 저서에서 "(실제로 돈을 빌렸을 때는 5000.00 만 JPY가 들어 있던) 종이 가방을 접어 가지고 있던 가방에 넣었다. (도의원이 준비한) 발포 스티로폼 블록은 접거나 구부리거나 나눌 수 없었다. 그러니 가방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 총무 위원회를 "인민 재판"이라고 부르며 "완전한 비판 대회였다", "나는 10시간이나 서서 답변해야 했다. 나를 희생양 삼아 도의원들이 점수를 버는 것이 목적이었고 진상 규명은 뒷전이었다. 당시 내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모습까지 방송되었는데, 그것은 궁지에 몰려 식은땀을 흘린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체력의 한계 때문이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땀 흘리는 부분만 잘린 영상이 반복적으로 확산되었다.
2014년 3월 28일, 도쿄지검 특수부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이노세를 약식 기소했다. 특수부는 자금의 성격에 대해 5000.00 만 JPY가 선거 비용으로 사용된 흔적이 없고, 도지사 선거 이후 2013년 2월 시점에서 반환 움직임이 있었으며, 실제로 같은 해 9월에 상환되었다는 점 등을 인정하여 이를 차입금으로 판단하고, 차입금이 선거 자금 수지 보고서에 기재되지 않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처리했다. 도쿄 간이재판소는 벌금 50.00 만 JPY의 약식 명령을 내렸다. 이노세는 즉시 납부했으며, 벌금형이 확정됨에 따라 정치자금규정법 규정에 의거하여 5년간 공민권이 정지되었다. 이로써 이노세에 대한 수사는 종결되었다.
이노세는 이 일련의 소동을 "부지사가 되었을 때 시미즈다니 공원 옆에 건설 예정이었던 참의원 의원 숙소를 백지 철회한 것으로 인해 지요다구 출신의 '도의회 자민당의 실세'였던 도쿄도 지부 간사장 우치다 시게루에게 미움을 샀다. 그래서 총무 위원회가 복수의 무대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치다를 "도쿄의 암덩어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6.2. 올림픽 유치 관련 부적절 발언
2013년 4월, 이노세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2020년 올림픽 유치 경쟁국인 튀르키예와 이스탄불에 대해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했다. "인프라와 매우 정교한 시설을 아직 건설하지 않은 두 나라를 비교해 보라. 때때로 브라질처럼 처음으로 경기장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들은 알라 (신)만을 공통으로 공유하며, 서로 싸우고 계급이 있다"고 말한 것이 국내외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에 대해 이노세 도지사는 4월 29일 "올림픽 유치 전체에 대해 발언했으나, 인터뷰의 일부만 발췌되어 헤드라인으로 보도되었다. 진의가 전달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다음 날인 4월 30일에는 도쿄도청에서 "이슬람 세계에 오해를 불러일으킨 표현에 대해 죄송하다. 안일했다고 하면 안일했다"며 "부적절한 발언이 있었음에 사과드린다"고 해명하고 사과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올림픽 유치 행동 강령은 제14항 '도시 간의 관계'에서 "각 도시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IOC 위원이나 IOC 자체에 대한 것과 동일한 존경을 다른 도시에 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유치 경쟁에서 가장 큰 금기 사항으로 여겨진다. 이후 2013년 5월 9일, 이노세는 직접 주일본 튀르키예 대사관을 방문하여 셀다르 크르츠 주일본 특명전권대사와 약 1시간 동안 회담하고 "불쾌감을 드린 점에 대해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노세의 위원장 체제 하에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6.3. 명예훼손 소송
2012년 10월 부지사 시절, 이노세는 자신이 원작을 맡았던 만화 ラストニュース라스트 뉴스일본어에 대해 "멍청한 각본가가 닛폰 TV에서 재구성하여 싸구려 보도 드라마로 만들었다"고 트위터에 올렸다. 이 발언은 드라마 ストレートニュース (テレビドラマ)스트레이트 뉴스일본어 (2000년, 닛폰 TV)를 비판한 것으로 추정되며, 해당 드라마의 각본가인 반 가즈히코는 '표절'이라는 오명을 씌웠다며 2013년 3월 28일 도쿄지방재판소에 5.50 억 JPY의 손해배상과 사과 트윗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2014년 3월 26일, 이노세가 반 가즈히코에게 100.00 만 JPY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사과 트윗을 게재하는 것으로 화해가 성립되었다.
6.4. 기타 논란
- 여성 후보자에 대한 성희롱 의혹 보도:** 2022년 6월 12일, 제26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기치조지역 앞에서 가두 연설을 하던 이노세가 도쿄도 선거구에 출마하는 에비사와 유키를 소개하면서 에비사와 유키의 어깨나 어깨띠 너머 가슴을 여러 차례 만지는 영상이 SNS상에 퍼져 논란이 되었다. 영상을 본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역겹다", "성희롱이다"라는 비판이 잇따르며 SNS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이노세는 같은 달 17일 트위터를 통해 "경솔한 면이 있었다. 충분히 인식을 고쳐 주의하며 행동하겠다"고 반성의 뜻을 밝혔으나, 같은 날 다른 게시물에서는 "짜깁기 보도이다", "의도적으로 확산시키는 사람들이 있다"고 트윗하며 성희롱 행위를 지적하는 사용자들을 잇달아 차단했다。 마쓰이 이치로 일본유신회 대표는 투개표일에 출연한 라디오에서 "(이노세 씨는) 팀이기 때문에 친하게 어깨를 안고 소개하는 것인데 말이죠. 그러니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발언하며 옹호했다.
이노세는 9월 6일, 이 영상을 보고 "틀림없이 성희롱이 아닐까요"라고 말한 조치 대학의 미우라 마리 교수 및 그 댓글을 게재한 아사히 신문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으로 1100.00 만 JPY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소장에서 이노세는 "연설회는 공공 도로상에서, 게다가 다수의 청중 앞에서 진행된 것이므로, 그 자리에서 연설하는 정치인이 동석한 다른 정치인에게 성희롱을 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원고는 에비사와 씨의 가슴(유방) 부근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어깨에 손을 댄 것은 소개 시 친애의 정을 표현한 것이고, 그 직전에 오토키타 히데유키 의원의 어깨에 손을 댄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성희롱 행위를 부인했다.
논란과 관련하여 에비사와 유키 본인도 논란 직후 블로그에서 이노세가 주장하는 사실 경과를 언급하며 "가슴을 만지지 않았고, 만약 닿았다고 해도 그것은 어깨띠를 두드린 결과이며, 이상하게 만질 의도는 전혀 없었음이 명백하다. 이노세 씨는 이름을 잘못 말한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어깨를 여러 번 두드린 것은 미안하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나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고,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적으며 이노세의 주장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이에 대해 허프포스트는 "괴롭힘이 권력 관계가 있고 저항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쉽게 일어난다는 구조를 경시하고, '괴롭힘이 아니다'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영상을 본 사람들은 '자신보다 권력 있는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정치판에서는 웃어넘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타인의 몸에 부주의하게 접촉하는 것은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인식의 업데이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023년 12월 15일, 도쿄지방재판소는 이노세가 미우라 교수와 아사히 신문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의도적으로 여성의 가슴에 접촉한 것은 진실로 인정된다", "전제하는 사실이 중요한 부분에서 진실である와의 증명이 있다"고 판단하여 청구를 기각했다. 2024년 10월 9일, 도쿄고등재판소는 청구를 기각한 1심 도쿄지방재판소의 판결을 지지하며 이노세의 항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고등재판소 판결은 기사에 대해 이노세가 의도적으로 여성의 가슴에 접촉한 것은 진실이며, 여성이 불쾌감을 느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논평이라고 지적했다. 기사가 논평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본 1심 판결은 타당하다고 보았다.
- 국회 심의 중 부적절한 행동:** 2023년 4월 12일, 참의원 헌법심사회 심의 중 아사다 히토시 의원이 헌법 개정에 대해 발언하는 옆에서 이노세가 껌을 계속 씹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4월 14일 이시이 준이치 참의원 의원운영위원장은 해당 위원회 이사회를 통해 각 교섭단체에 긴장감을 가지고 심의에 임할 것을 촉구했다. 이사회에서 히가시 도루 의원(일본유신회)은 이노세에게 엄중 주의를 주었다고 보고했다. 이노세의 사무실은 취재에 대해 "음식물 반입 금지는 알았지만, 껌까지 금지인 줄은 몰랐다. 앞으로는 주의하겠다"고 해명했다.
또한 2023년 6월 5일, 참의원 지방 디지털 위원회에서 이노세는 크게 하품을 한 후, 입헌민주당의 고누마 다쿠미 의원이 발언하는 도중에 이노세의 휴대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위원회실에서는 휴대 전화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고누마 의원의 주의에 대해 이노세는 "미안, 미안"하고 사과했다.
7. 저서 목록
이노세 나오키는 작가이자 언론인으로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작품들은 일본 사회의 주요 이슈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깊이 있는 분석을 담고 있다.
7.1. 영어 번역본
- The Century of Black Ships: Chronicles of War between Japan and America더 센추리 오브 블랙 쉽스: 크로니클즈 오브 워 비트윈 재팬 앤 아메리카영어 (2009년, VIZ Media LLC)
- Persona: A Biography of Yukio Mishima페르소나: 어 바이오그래피 오브 미시마 유키오영어 (2013년, Stone Bridge Press)
7.2. 일본어 원서
- 昭和16年夏の敗戦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일본어 (1983년, 세카이분카샤; 1986년, 분슌분코; 2010년, 주코분코)
- 死者たちのロッキード事件사자들의 록히드 사건일본어 (1983년, 분게이슌주)
- 日本凡人伝일본 범인전일본어 (1983년, 유미타테샤; 1985년, 신초분코)
- あさってのジョー내일의 조일본어 (1985년, 신초샤)
- ミカドの肖像미카도노 쇼조일본어 (1986년, 쇼가쿠칸; 쇼가쿠칸 라이브러리, 신초분코, 쇼가쿠칸분코)
- 天皇の影法師천황의 그림자일본어 (1987년, 아사히신문사; 신초분코, 아사히분코, 주코분코)
- 死を見つめる仕事죽음을 바라보는 일일본어 (1987년, 신초샤)
- 二度目の仕事-日本凡人伝두 번째 일: 일본 범인전일본어 (1988년, 신초샤)
- 土地の神話토지의 신화일본어 (1988년, 쇼가쿠칸; 1993년, 신초분코)
- ノンフィクション宣言논픽션 선언일본어 (1988년, 분게이슌주)
- ニューズの冒険뉴스 모험일본어 (1989년, 분게이슌주)
- 今をつかむ仕事지금 잡는 일일본어 (1989년, 신초샤)
- ふるさとを創った男고향을 만든 남자일본어 (1990년, 일본방송출판협회)
- 欲望のメディア욕망의 미디어일본어 (1990년, 쇼가쿠칸)
- ミカドの国の記号論미카도의 나라의 기호론일본어 (1991년, 쇼가쿠칸)
- ニュースの考古学뉴스 고고학일본어 (1992년, 분게이슌주)
- 迷路の達人 猪瀬直樹エッセイ全集成미로의 달인 이노세 나오키 에세이 전집성일본어 (1993년, 분게이슌주)
- 禁忌の領域 ニュースの考古学2금기의 영역 뉴스 고고학2일본어 (1993년, 분게이슌주)
- 黒船の世紀 ミカドの国の未来戦記흑선 세기 미카도국의 미래 전기일본어 (1993년, 쇼가쿠칸)
- 交通事故鑑定人S氏の事件簿교통사고 감정인 S 씨의 사건부일본어 (1994년, 분게이슌주)
- ニュースの考古学 3뉴스 고고학 3일본어 (1994년, 분게이슌주)
- ペルソナ-三島由紀夫伝페르소나: 미시마 유키오전일본어 (1995년, 분게이슌주)
- Tokyo Requiem도쿄 레퀴엠일본어 (1995년, 가와데쇼보신샤)
- ニッポンを読み解く!일본을 해독하다!일본어 (1996년, 쇼가쿠칸)
- 瀕死のジャーナリズム죽어가는 저널리즘일본어 (1996년, 분게이슌주)
- 日本国の研究일본국의 연구일본어 (1997년, 분게이슌주)
- 僕の青春放浪나의 청춘 방랑일본어 (1998년, 분게이슌주)
- マガジン青春譜 川端康成と大宅壮一매거진 청춘보: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야 소이치일본어 (1998년, 쇼가쿠칸)
- 続・日本国の研究속 일본국의 연구일본어 (1999년, 분게이슌주)
- 明日も夕焼け내일도 노을일본어 (2000년, 아사히신문사)
- 二十世紀-日本の戦争20세기: 일본의 전쟁일본어 (2000년, 분슌신쇼)
- ピカレスク-太宰治伝피카레스크: 다자이 오사무전일본어 (2000년, 쇼가쿠칸)
- 小論文の書き方소논문 쓰는 법일본어 (2001년, 분슌신쇼)
- ラストチャンス라스트 찬스일본어 (2001년, 고분샤)
- 日本の近代 猪瀬直樹著作集일본의 근대 이노세 나오키 저작집일본어 (전12권, 2001-2002년, 쇼가쿠칸)
- 제1권: 構造改革とはなにか-新篇日本国の研究구조개혁이란 무엇인가: 신편 일본국의 연구일본어
- 제2권: ペルソナ-三島由紀夫伝페르소나: 미시마 유키오전일본어
- 제3권: マガジン青春譜-川端康成と大宅壮一매거진 청춘보: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야 소이치일본어
- 제4권: ピカレスク-太宰治伝피카레스크: 다자이 오사무전일본어
- 제5권: ミカドの肖像미카도노 쇼조일본어
- 제6권: 土地の神話토지의 신화일본어
- 제7권: 欲望のメディア욕망의 미디어일본어
- 제8권: 日本人はなぜ戦争をしたか-昭和16年夏の敗戦일본인은 왜 전쟁을 했는가: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일본어
- 제9권: 唱歌誕生-ふるさとを創った男창가 탄생: 고향을 만든 남자일본어
- 제10권: 天皇の影法師천황의 그림자일본어
- 제11권: 日本凡人伝일본 범인전일본어
- 제12권: 黒船の世紀 ガイアツと日米未来戦記흑선 세기: 가이아쓰와 일미 미래 전기일본어
- 日本システムの神話일본 시스템의 신화일본어 (2002년, 가도카와 쇼텐)
- 日本復活のシナリオ 論客20人の結論일본 부활 시나리오: 논객 20인의 결론일본어 (2002년, PHP 연구소)
- 道路の権力 道路公団民営化の攻防1000日도로의 권력: 도로공단 민영화 공방 1000일일본어 (2003년, 분게이슌주)
- 決戦・郵政民営化결전: 우정 민영화일본어 (2005년, PHP 연구소)
- ゼロ成長の富国論제로 성장의 부국론일본어 (2005년, 분게이슌주)
- こころの王国 菊池寛と文藝春秋の誕生코코로노 오코쿠: 기쿠치 간과 분게이슌주의 탄생일본어 (2004년, 분게이슌주)
- 道路の決着도로의 결착일본어 (2006년, 쇼가쿠칸)
- 作家の誕生작가의 탄생일본어 (2007년, 아사히신쇼)
- 空気と戦争공기와 전쟁일본어 (2007년, 분슌신쇼)
- 日本の信義 知の巨星十人と語る일본의 신의: 지식 거성 10인과 이야기하다일본어 (2008년, 쇼가쿠칸)
- 国を変える力 ニッポン再生を探る10人の提言나라를 바꾸는 힘: 일본 재생을 찾는 10인의 제언일본어 (2008년, 다이아몬드샤)
- 霞ヶ関「解体」戦争가스미가세키 '해체' 전쟁일본어 (2008년, 소시샤)
- ジミーの誕生日 アメリカが天皇明仁に刻んだ「死の暗号」지미의 생일: 미국이 천황 아키히토에게 새긴 '죽음의 암호'일본어 (2009년, 분게이슌주)
- 東京の副知事になってみたら도쿄의 부지사가 되어보니일본어 (2010년, 쇼가쿠칸 101 신쇼)
- 壊れゆく国부서져가는 나라일본어 (2010년, 닛케이 BP샤)
- 猪瀬直樹の仕事力이노세 나오키의 일의 힘일본어 (2011년, 우시오출판사)
- 地下鉄は誰のものか지하철은 누구의 것인가일본어 (2011년, 주코신쇼)
- 突破する力돌파하는 힘일본어 (2011년, 세이슌신쇼 인텔리전스)
- 言葉の力 「作家の視点」で国をつくる언어의 힘: '작가의 시점'으로 국가를 만들다일본어 (2011년, 주코신쇼 라쿠레)
- 決断する力결단하는 힘일본어 (2012년, PHP 비즈니스 신쇼)
- 解決する力해결하는 힘일본어 (2012년, PHP 비즈니스 신쇼)
- さようならと言ってなかった わが愛 わが罪안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의 사랑 나의 죄일본어 (2014년, 매거진 하우스)
- 救出: 3・11気仙沼 公民館に取り残された446人구출: 3.11 게센누마 공민관에 고립된 446명일본어 (2015년, 가와데쇼보신샤)
- 民警민경일본어 (2016년, 후소샤)
- 東京の敵도쿄의 적일본어 (2017년, 가도카와 신쇼)
- 日本国・不安の研究 「医療・介護産業」のタブーに斬りこむ!일본국·불안 연구: '의료·개호 산업'의 금기를 파고들다!일본어 (2020년, PHP 연구소)
- 公 日本国・意思決定のマネジメントを問う공: 일본국 의사결정의 경영을 묻다일본어 (2020년, 뉴스픽스)
- カーボンニュートラル革命탄소 중립 혁명일본어 (2021년, 비즈니스샤)
- 太陽の男 石原慎太郎伝태양의 남자 이시하라 신타로전일본어 (2023년, 주오고론신샤)
7.3. 공저/편저
- ミカドと世紀末미카도와 세기말일본어 (1987년, 헤이본샤) - 야마구치 마사오 공저
- 東京、ながい夢도쿄, 긴 꿈일본어 (1989년, 가와데쇼보신샤) - 기타지마 게이조 사진·해설
- 猪瀬直樹「戦う講座1」この国のゆくえ이노세 나오키 '싸우는 강좌1' 이 나라의 행방일본어 (2006년, 다이아몬드샤) - 편저
- 東京からはじめよう 国の再生をめぐる9つの対論도쿄에서 시작하자: 국가 재생을 둘러싼 9가지 대담일본어 (2007년, 다이아몬드샤) - 편저
- 戦争・天皇・国家 近代化150年を問いなおす전쟁·천황·국가: 근대화 150년을 다시 묻다일본어 (2015년, 가도카와 신쇼) - 다하라 소이치로 공저
- 正義について考えよう정의에 대해 생각하자일본어 (2015년, 후소샤 신쇼) - 아즈마 히로키 공저
- 国民国家のリアリズム국민국가의 리얼리즘일본어 (2017년, 가도카와 신쇼) - 미우라 루리 공저
- 明治維新で変わらなかった日本の核心메이지 유신으로 바뀌지 않은 일본의 핵심일본어 (2017년, PHP 신쇼) - 이소다 미치후미 공저
- リーダーの教養書 11名の選者による〈保存版〉ブックガイド리더의 교양서: 11명의 선정자가 뽑은 <보존판> 북 가이드일본어 (2017년, 겐토샤) - 데구치 하루아키, 구스노키 겐, 오카지마 에쓰코, 나카지마 사토시, 오타케 후미오, 하세가와 마리코, 모리타 마사오, 오무로 마사시, 오카모토 유이치로, 우에다 노리유키 공저
- ここから始まる 人生100年時代の男と女여기서부터 시작: 인생 100년 시대의 남자와 여자일본어 (2018년) - 니나가와 유키 공저
- 平成の重大事件 日本はどこで失敗したのか헤이세이의 중대 사건: 일본은 어디서 실패했는가일본어 (2018년, 아사히신쇼) - 다하라 소이치로 공저
- ニッポン 2021-2050 データから構想を生み出す教養と思考法일본 2021-2050: 데이터로 구상을 창조하는 교양과 사고법일본어 (2018년, KADOKAWA) - 오치아이 요이치 공저
8. 평가 및 영향

이노세 나오키는 일본의 고질적인 관료주의와 사회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으며, 이는 그의 정치적 경력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도로공단 및 우정 민영화와 같은 행정 개혁을 주도하며 일본 사회의 비효율성을 해소하려는 진보적 개혁가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특히 도쿄도 부지사와 도지사 재임 기간 중에는 도쿄 전력 개혁, 지하철 통합 추진, 수도 사업 해외 진출 등 구체적인 정책들을 통해 행정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유치 성공은 그의 리더십과 추진력을 보여주는 주요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경력은 여러 논란과 스캔들로 인해 빛이 바랬다. 특히 도쿠슈카이 그룹 자금 스캔들은 투명성 부족과 윤리적 문제점을 드러내며 공직자로서의 신뢰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인한 도지사 사임과 공직선거법 위반 판결은 그의 정치적 행보에 큰 오점으로 남았다. 2020년 하계 올림픽 유치 관련 부적절 발언이나 여성 후보자에 대한 성희롱 의혹 보도 및 이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 패소, 그리고 국회 심의 중의 부적절한 행동 등은 그가 공적 영역에서 보여야 할 품위와 타인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게 했다. 이러한 논란들은 그의 개혁적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모습으로, 대중에게 혼란스러운 평가를 안겨주었다.
이노세 나오키는 일본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고 개혁을 추구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윤리 문제와 부적절한 언행으로 인해 대중의 신뢰를 잃고 정치적 좌절을 겪은 복합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그의 사례는 일본 정치에서 개혁 의지와 공직자의 윤리적 책임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9. 관련 항목
- 이시하라 신타로
- 마스조에 요이치
- 2020년 하계 올림픽 도쿄 유치 계획
- 도쿄도지사
- 일본유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