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교육
에다노 유키오는 1964년 5월 31일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의 평범한 샐러리맨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유키오'는 할아버지가 존경했던 일본의 헌정의 신으로 불리는 오자키 유키오에서 따온 것으로, 글자는 다르지만 획수가 좋은 이름을 택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 이름의 유래에 영향을 받아 정치인을 꿈꾸게 되었다.
그는 우쓰노미야시립 미네 초등학교와 우쓰노미야시립 요토 중학교에서 모두 학생회장을 지냈다. 중학교 학생회장 선거에서는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설 후 강당 2층 난간에서 끈질기게 투표를 호소하는 열정적인 모습으로 당선되었다. 도치기현립 우쓰노미야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교내 변론대회에서 3년 연속 우승했으며, 환경 문제, 노동 문제, 공무원, 일본교직원조합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또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는 합창부에 소속되어 중학교 2학년과 3학년 때 2년 연속으로 NHK 전국 학교 음악 콩쿠르에서 전국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도호쿠 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여 법조계를 목표로 삼았다. 도호쿠 대학에서는 헌법학자 고지마 가즈시의 세미나에 참여하며 헌법과 법률이 도구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1987년에 도호쿠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24세의 나이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수습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으며 (등록 번호: 22259, 사법수습 43기, 제2 도쿄 변호사회 소속), 도쿄의 법률 사무소에 취직했다. 그는 이를 "샐러리맨보다 정치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 초기 정치 경력
에다노 유키오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며,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이던 1992년 5월, 전 구마모토현 지사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일본신당을 창당하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1. 일본신당 입당
1992년 11월, 일본신당이 다음 총선을 앞두고 일본 내에서 처음으로 후보자 공개 모집을 발표했을 때, 에다노는 호소카와가 내세운 이상주의와 반부패에 끌려 응모를 결심하고 논문을 제출했다. 1993년 초, 일본신당은 150여 명의 지원자 중 서류 심사를 통해 15명 내외의 후보를 선발했고, 에다노도 이 심사를 통과했다. 같은 해 2월 21일 2차 심사가 진행되었고, 4월 13일 당은 에다노와 출판사 사장 미우라 가즈오 두 명을 최종 합격자로 발표했다. 동시에 에다노를 정수가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난 옛 사이타마 제5구에, 미우라를 옛 이와테 제1구에 배정한다고 발표했다.
에다노는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선거 자금이 부족했고, 정치 경험이 없었으며, 중의원이 가을이 아닌 6월에 해산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급박하게 일정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 길가에서 연설하는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진행했으며, 이는 당시 노다 요시히코가 사용하던 전략과 유사했다. 그는 선거에서 2위를 차지하며 당선되었고, 우에다 기요시에 근소한 차이로 뒤졌다.
2.2. 초기 의회 활동과 정책 노력
총선 후, 1950년대 이후 자민당이 참여하지 않은 첫 내각인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했다. 에다노는 상공위원회 위원이 되어 당의 공약이었던 PL법 입안에 기여했다. 또한 일본신당의 당칙 개정을 담당하며 '호소카와 대표의 개인 상점'으로 불리던 당 운영의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당 사무국의 반대로 실패했다. 1994년 4월 호소카와 총리가 사임하고 하타 쓰토무 내각이 출범하자, 그는 자민당 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여 하타 쓰토무에게 투표했다. 하타 내각 출범 당시 일본신당이 신당 사키가케와의 통일회파를 해소하고 신생당 등이 포함된 새 회파 '개신'에 참여한 것에 반발하여, 5월에 일본신당을 탈당했다. 이후 원내 회파 '민주의 바람'을 결성했고, 곧이어 신당 사키가케, 그룹 세이운과 함께 통일회파 '사키가케·세이운·민주의 바람'에 합류했다. 같은 해 6월, 이 회파 내에서 의견이 나뉘었던 하타 내각에 대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에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1994년 6월, 자민당, 사회당, 사키가케가 연립한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했다. 에다노는 이를 계기로 신당 사키가케에 합류하여 간 나오토 정책조사회장 아래에서 정책조사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1996년 1월 제1차 하시모토 내각이 수립되었을 때, 그는 총리 지명에서 반기를 들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무라야마 도미이치로부터 후계 지명을 받은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 총재에게 투표했다. 이는 하시모토가 PL법 대상에서 혈액제제를 제외하는 데 저항했던 '후생족'의 거물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연립 여당의 행정 개혁 프로젝트 팀 좌장을 맡아, 1996년 5월에는 국가공무원 인사 일괄 채용 및 낙하산 인사 규제를 포함한 공무원 제도 개혁에 대한 좌장 초안을 제시했다. 또한 같은 해 6월에는 초당파 청년 의원들이 참여하는 정책 연구회 '시바 료타로 철학 연구회'의 발기인이 되어 회를 발족시켰다. 이 모임은 하토야마 유키오 신당(구 민주당 구상)을 염두에 둔 청년 정치인들의 교류회로 여겨졌다.
그는 1995년부터 약해 에이즈 문제를 추적하여 진상 규명과 화해를 실현하며 주목받았다. 1995년 1월 약해 에이즈 재판의 원고 변호인단으로부터 접촉을 받아 국가의 책임을 확신했다. 8월에는 이데 쇼이치 후생대신과 피해자들의 면담을 관료들에게 비밀리에 추진했다. 10월 법원에서 화해 권고가 나왔음에도 후생성이 책임을 인정하지 않자, 중의원 후생위원회에서 추궁했다. 당시 후생성의 대응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 주위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1996년 1월부터 하시모토 내각의 후생상으로서 약해 에이즈 문제에 임한 간 나오토를 지원하여 '군지 파일' 발견 등 진상 규명과 국가의 화해 수용을 이끌어냈다. 2월 대신 사죄 자리에서 사회를 맡았으며, 7월에는 아베 히데오 전 에이즈 연구반 반장 등에 대한 증인 신문에서 질문에 나섰다.
3. 민주당 시대
에다노 유키오는 1996년 구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3.1. 민주당 창당 및 초기 역할
1996년 10월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이타마현 제5구에 자원봉사 중심의 선거운동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소선거구에서는 자민당 현직 의원인 후쿠나가 노부히코에게 패했으나, 중복 입후보했던 비례 기타칸토 블록에서 비례 부활로 재선에 성공했다. 1997년 구 민주당 정책조사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사민당 출신 의원들의 족벌적 체질을 비판하는 구 민주당 내 청년 중의원 의원들로 구성된 정치 집단 '2010년의 회'를 결성하고 대표 간사가 되었다.
1998년 1월, 구 민주당을 포함한 중의원 야당들이 통일 회파인 민주우애태양국민연합을 결성했고, 에다노는 그 일원이 되었다. 같은 달, 민우련 청년 중의원 의원들의 연구회 '대시의 회' 발족에 참여했다. 야당 의원이 된 후, 부부별성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민법 개정안, 행정 감시원 법안, 장기 이식 법안, 아동 매춘·아동 포르노 금지 법안 등을 제출했다. 법안 제출 수와 위원회 발언 수는 독보적이었으며, '의원 입법 붐'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98년 4월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책조사회 필두 부회장에 취임했다. 금융국회에서는 금융 재생법 제정에 관여했다. 당시 대장 관료와 수구파 의원을 배제하고, 전문 지식을 갖춘 청년 정치인들 간의 숙의를 거쳐 법안이 만들어진 것이 새로운 정치의 형태로 주목받았고, 시오자키 야스히사, 이시하라 노부테루 등과 함께 '정책 신인류'로 불렸다.
1999년 1월, 간 나오토에게 마쓰자와 시게후미가 도전하는 형태가 된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논헌'과 '우정 3사업·특수법인의 민영화'를 내세운 마쓰자와 시게후미의 추천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9월 대표 선거에서는 간 나오토의 선거 대책 사무국장을 맡았지만, 간은 결국 하토야마 유키오에게 패했다. 같은 해 10월, 하토야마 신체제에서 정책조사회 대리인이 되었고, 다음 내각의 내각관방부장관을 역임했다.
3.2. 야당 민주당 시절 역할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으며, 이는 신생 민주당에게도 전반적으로 성공적인 선거였다. 2000년 11월에는 민주당의 옛 사키가케계 출신을 중심으로 한 3선 이하 청년 의원들의 새로운 연구회를 결성하고 간사가 되었다. 2001년 4월에는 전년도에 결성한 연구회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한 연구회 '고봉회'의 발족에 참여했다.
2002년, 센고쿠 요시토, 마에하라 세이지와 함께 핵심 멤버로서 정치 그룹 '능운회'를 설립했다。 그는 회계 책임자에 취임했다. 2002년 12월 대표 선거에서 간 나오토가 당 대표로 복귀하자 정책조사회장에 취임했으며, 다음 내각의 내각관방장관이 되었다.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의 매니페스토를 발표했으며, 이 선거에서 그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2004년, 대표가 간 나오토에서 오카다 가쓰야로 바뀌면서 당 헌법 조사회장에 취임했다. 2005년 9월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고이즈미 선풍으로 민주당이 고전하는 가운데, 자신은 마키하라 히데키에 완승하며 5선 의원이 되었다. 오카다의 후임을 다투는 대표 선거에서는 동맹인 마에하라 세이지를 지원했다. 같은 해, 정권 전략 및 보도 담당 간사장 대리에 취임했다. 이 무렵부터 정치 그룹 '나라의 형태 연구회'(간 그룹)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2006년 오자와 이치로가 대표로 취임한 이후 한동안 당직에서 물러났다. 2008년 9월 당 대표 선거에서 마에하라 세이지, 오카다 가쓰야 등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무투표로 오자와가 재선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출마를 모색했으나, 추천인을 확보하지 못해 단념했다.
에다노는 2009년 8월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당선되어 6선 의원이 되었으며, 그가 소속된 민주당도 대승을 거두며 정권이 민주당으로 이양되었다.
3.3. 집권 민주당 내각 (하토야마, 간, 노다 내각)
2009년 민주당이 집권한 이후, 에다노 유키오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간 내각, 노다 내각에서 여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3.1. 내각관방장관 및 도호쿠 대지진 대응
2009년 9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발족했을 때, 처음에는 그가 각료로 기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강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그와 오자와 이치로 사이의 갈등이 원인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같은 해 10월, 당시 행정쇄신담당대신이었던 센고쿠 요시토의 임명으로 내각부에 설치된 행정쇄신회의의 사업 분류 팀 총괄역을 맡았다. 이 사업 분류는 예산 편성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국민들의 주목을 받았고, 하토야마 내각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 분류 작업에서는 원자력 시설 등 방재 대책 등 위탁비, 원자력 시설 등 방재 대책 등 교부금 등이 다루어졌다. 2010년 1월, 센고쿠가 국가전략담당대신을 겸임하게 되면서 에다노는 센고쿠를 보좌할 총리 보좌관으로 기용될 것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임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센고쿠의 겸임을 해제하는 형태로 행정쇄신담당대신에 취임하게 되었다.
2010년 5월 말, 하토야마 내각이 총사퇴하자, 후임 대표 선거에서 마에하라 세이지, 오카다 가쓰야 등과 함께 간 나오토를 지지했다. 같은 해 6월, 그는 민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7월, 간사장으로서 치른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개정 전보다 10석이 줄어든 44석을 얻는 데 그쳐 참의원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9월 간 제1차 개조 내각 발족과 함께 간사장직에서 물러났고, 후임 간사장 오카다 가쓰야의 요청으로 간사장 대리에 취임했다.

2011년 1월 14일 단행된 내각개조에 따라 간 제2차 개조 내각의 내각관방장관 (오키나와·북방 대책 담당 대신 겸임)에 취임했다. 46세 7개월의 나이로 내각관방장관에 취임한 것은 역사상 두 번째로 젊은 기록이었다. 3월 초에는 마에하라 세이지 외무대신이 사임함에 따라 후임 외무대신 마쓰모토 다케아키가 임명될 때까지 임시 외무대신을 겸임했다. 6월 27일부터는 총리 보좌관이 된 렌호의 후임으로 행정쇄신담당대신도 겸임하게 되었다. 이는 하토야마 내각이 총사퇴한 지 약 1년 만에 행정쇄신담당대신으로 다시 기용된 것이었다.
내각관방장관 취임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과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다. 에다노는 두 사태에 대한 정부의 주요 대변인 역할을 맡아 매일 복구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한 그의 강도 높은 업무 부담과 정력적인 대응 스타일은 해외 일부 언론에서 TV 드라마 『24시』의 잭 바우어에 비유되기도 했다.

에다노는 재난 정보의 일원화를 지시한 것으로 보도되었는데, 예를 들어 문부과학성은 3월 15일 밤 이후 후쿠시마 원전 반경 20 km에서 30 km 이내 지역의 방사선량을 관측 차량으로 측정하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기자가 건강 영향을 묻자 담당자는 "데이터 평가는 하지 않는다. 내각관방장관의 지시로 코멘트할 수 없다"고 답했다. 또한, 산케이 신문 기자는 에다노가 "정보는 어디선가 일원화하여 허가 없이 공개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SPEEDI 정보 공개가 중단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다노의 지시와는 달리, 원자력 안전보안원이 분석한 SPEEDI 예측 결과 45건 중 2건만이 총리실에 전달되었다. 반면, 문부과학성은 재난 직후 외무성을 통해 이 분석 결과를 미군에 즉시 제공했다.
미국 원자력 규제 위원회(NRC)가 도쿄 전력 후쿠시마 재해 직후의 내부 문건을 공개했는데, 그중에는 에다노가 일본 지원을 위해 총리실에 원자력 전문가를 상주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요미우리 신문에 따르면 에다노는 "협력은 감사하지만, 총리실 내 출입은 삼가 달라"는 추가 요청을 했다고 한다.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3호기 원자로 건물에서 수소 폭발이 발생하자, 내각의 원자력 안전 위원회는 대피 반경을 20 km에서 30 km로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에다노 등은 대규모 대피 계획 수립이 필요해 혼란이 우려된다며 "대피 구역을 30 km로 확대하는 것은 좋지만, 실내 대피로 제한하는 것이 낫다"고 반박했다. 3월 12일 새벽 2시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벤트 개방에 대비한 주민 안전 고려에 대해 "발전소로부터 3 km 이내 대피, 10 km 이내 실내 대피 조치로 주민들의 안전은 충분히 확보된다"고 설명했다.
2011년 4월, 문부과학성은 어린이 방사선 안전 기준으로 시간당 3.8 마이크로시버트(연간 33 밀리시버트에 해당)를 제시했지만, 제염 방법은 지방 정부에 맡기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원전 주변 지방 정부들은 오염 가능성이 있는 학교 운동장의 표토를 독자적으로 제거했다. 에다노는 표토의 방사성 폐기물 위험을 인정했지만, 문부과학성 지침에 따라 처리한다면 표토 제거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는 견해를 밝혔다.
3.3.2. 경제산업대신

2011년 9월 2일, 노다 내각 발족과 함께 내각관방장관 및 행정쇄신담당대신직에서 물러났다. 처음에는 "일개 사병으로서 정부를 지지하겠다"고 말했지만, 같은 달 12일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둘러싼 부적절한 언행으로 사임한 하치로 요시오의 후임으로 제16대 경제산업대신에 취임하며 불과 10일 만에 내각에 복귀했다. 2011년 10월 3일에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원자력 손해배상 지원 기구 담당) 직책도 추가되었다. 2011년 11월, 그가 소속된 능운회는 조직 개편을 단행하여 마에하라 세이지가 회장이 되고 에다노는 간사장에 취임했다.
2012년 4월 13일, 정기 검사로 가동이 중단된 간사이 전력 오이 발전소 3, 4호기에 대해 간사이 전력의 안전 대책이 정부 기준을 충족했음을 확인하고 안전 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오이 원전이 재가동되지 않고 그해 2010년 수준의 폭염이 닥칠 경우, 간사이 전력 관할 지역 내에서 최대 20% 정도의 전력 부족이 예상되며 전기 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여 "오이 원전 재가동의 필요성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음 날인 14일, 그는 후쿠이현의 니시카와 잇세이 지사와 만나 3, 4호기 재가동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했다. 6월 1일, 그는 "두 기 모두 7월까지는 전력을 완전 가동하지 못할 것"이라며, 간사이 전력 관할 지역 내에서 15% 전력 절감 요청이 시작되는 7월 2일에 맞춰 재가동이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을 밝혔다.

6월 16일, 정부는 니시카와 지사의 동의를 얻어 재가동을 공식 결정했다. 6월 18일, 간사이 전력의 야기 마코토 사장에게 재가동 준비 작업의 안전을 철저히 하도록 지시하며, 재가동의 전제 조건인 안전 대책 확인을 요구했다. 이후 7월 25일, 4호기의 완전 가동 재개에 대해 간사이 전력의 야기 사장이 가동이 중단된 다카하마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 "우선적으로 재가동하는 방향으로 정부와 조율하고 싶다"고 발언하자, 에다노는 "매우 불쾌한 발언이다. 안전을 철저히 확인하지 않고 재가동은 있을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그해 9월에 설립될 원자력 규제 위원회의 평가와 판단을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8월 28일, 여름철 전력 절감 목표를 달성한 간사이 전력 관할 지역의 전력 수급 상황에 대해, 그는 오이 원전이 재가동되지 않았다면 상황이 "매우 심각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9월 15일, 아오모리현에서 미무라 지사와 원자력 시설이 있는 시정촌 단체장들과 회담을 가졌다. 에다노는 오마 원자력 발전소와 시마네 원자력 발전소 3호기 건설에 대해 언급했으며, 이 두 곳은 2011년 지진 이후 건설이 중단된 상태였다. 그는 시마네 원전 건설 재개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9월에는 시마네 원전 건설 재개가 승인되었으며, 10월에는 오마 원전도 건설 재개가 허가되었다.
3.4. 내각 퇴진 후 민주당 활동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하여 야당으로 전락했지만, 에다노는 사이타마현 제5구 소선거구에서 5%p 차이로 당선되어 자신의 지역구를 유지했다. 이는 사이타마현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소선거구를 지킨 유일한 사례였다. 2014년 9월, 그는 민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자신의 소선거구를 지켜냈지만, 이번에는 불과 2%p 차이의 훨씬 더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2015년 1월 민주당 대표 선거 이후에도 오카다 가쓰야 대표 체제에서 간사장 직을 유지했다.
2016년 3월, 민주당과 유신당, 개혁의 시야가 합병하여 민진당이 결성되었고, 에다노는 새 당에 합류하여 합병 후에도 간사장 직을 유지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민진당 헌법 조사회장에 취임했다. 이듬해인 2017년 7월 27일, 민진당 대표 렌호는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민진당 후보들이 일본공산당보다 저조한 성적을 거두는 등 부진한 결과를 낸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을 발표했다. 렌호의 사임에 따른 9월 대표 선거에 출마했으나, 마에하라 세이지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
4. 입헌민주당 대표 시절
2017년 9월, 민진당 대표 선거에서 마에하라 세이지에게 패한 후, 에다노 유키오는 새로운 정치적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4.1. 입헌민주당 창당
2017년 9월 28일 오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열린 민진당 양원 의원 총회에서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는 희망의 당으로의 사실상 합류를 제안했다. 당시 마에하라는 평화안전법제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마에하라의 제안은 수락되었고, 에다노는 처음에는 모두가 희망의 당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약 두 시간 뒤, 희망의 당 대표인 고이케 유리코는 "희망의 당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사람 중 안보 법제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9월 29일, 고이케는 정례 기자회견에서 안보 법제 용인과 헌법 개정 등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민진당 내 좌파 및 리버럴계 의원들을 배제하겠다고 명확히 밝혔다.

9월 30일 새벽, 교도 통신은 에다노가 무소속 출마를 검토하기 시작했으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전 의원들과 신당을 결성하는 것도 시야에 두고 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민진당 전현직 의원 15명의 '배제 명단'이 유포되었다. 그날 밤, 에다노는 나가쓰마 아키라, 쓰지모토 기요미, 곤도 쇼이치, 후쿠야마 데쓰로 등과 함께 도쿄의 한 호텔 방에서 신당 창당을 전제로 협의를 가졌다. 이 회동에서는 마에하라에게 민진당 공천을 요구하기로 확인했다.
10월 1일, 신주쿠역 주변에서는 아베 정권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출발 직전, 에다노는 니시신주쿠 공원에 나타나 "아베 정권이 파괴한 입헌주의,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정보 공개 등을 지키고 싸우겠다"고 연설했다. 현장에서는 "에다노"를 외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위 참가자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필요한 것은 리버럴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에다노 씨가 신당을 만들면 응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같은 날 저녁, 에다노는 민진당 본부 임원실에서 마에하라에게 합류를 원치 않는 의원들을 민진당 소속으로 공식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마에하라는 이를 거부했다. 에다노에게 남은 길은 신당 창당 또는 무소속 출마뿐이었다. 비슷한 시기, 희망의 당에서 거부당한 다른 후보들도 새로운 당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인터넷에서는 에다노가 새로운 당의 유력한 리더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앞서 호텔에서 만났던 네 명은 다음 날인 2일에 에다노가 혼자서 창당 기자회견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명은 '민주당', '신민주당', '입헌민주당' 세 가지 안 중에서 에다노가 선택하게 되었다. 후쿠야마는 즉시 아는 디자이너에게 세 가지 로고 디자인을 의뢰했다.
세 가지 당명 안 중 '민주당'은 온라인 선거대책본부 직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시나요? 인터넷 검색을 하면 민주당 정권 시절의 부정적인 단어들이 나열됩니다." 또한 당명에 '신(新)'이 들어간 정당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징크스도 있었다. 결국, 구 민주당에서 민진당으로 이행할 때 검토되었던 '입헌민주당'이 채택되었다. 이 당명은 전전(戰前)의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 등과 같이 '입헌'이 들어간 당명은 에다노에게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왔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에다노는 후쿠야마에게 '입헌민주당'으로 결정했음을 알렸다.
같은 날 10월 2일 오전, 에다노는 렌고 본부를 방문하여 고즈 리키오 회장과 회담했다. 희망의 당이 리버럴파의 합류를 인정하지 않는 현 상황과 신당을 결성할 방침 등을 설명했다. 민진당을 탈당한 후, 그날 저녁 그는 혼자 기자회견에 나서 "아베 정권의 폭주를 막는 역할을 하겠다"며 신당 '입헌민주당'을 창당한다고 밝혔다.
다음 날 10월 3일 오전, 나가쓰마는 도쿄도 선거 관리 위원회를 통해 총무대신에게 신당 설립을 신고했고, 수리되었다. 같은 날 오후, 희망의 당은 중의원 선거 1차 공천자 192명을 발표했는데, 이 중에는 에다노의 지역구에 대항할 다카기 히데후미 변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공산당은 입헌민주당과의 협력을 표명하며 사이타마 제5구에 출마할 예정이던 후보를 철회했다.
4.2. 당 지도부 및 주요 선거
2017년 10월에 치러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민주당은 희망의 당을 제치고 총선에서 놀랍게도 2위를 차지하며 5석 더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에다노 자신도 자신의 지역구에서 마키하라 히데키를 20%p 가까이 벌려 압도적으로 이기며 9선에 성공했다. 이는 에다노에게는 19%p의 득표율 증가였다. 에다노는 당 설립 발표부터 선거까지 20일 동안 2757.00 만 JPY의 개인 후원금을 모금했는데, 이는 과거 그의 모금액은 물론 당시 아베 신조 총리의 모금액과 비교해도 매우 뛰어난 금액으로 평가되었다.
2020년 9월 14일, 2017년 총선에서 창당된 입헌민주당은 해체되고, 다음 날 새로운 형태로 다시 입헌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이는 국민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대다수 세력이 입헌민주당과 합류하여 더욱 통합된 야당 그룹을 형성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마키 유이치로와 후쿠시마 미즈호 등 양 당에 일부 분열 세력이 남았다. 에다노는 뒤이은 2020년 입헌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이즈미 겐타에 맞서 출마하여 40%p 차이로 승리했다.
4.3. 대표직 사임

2021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민주당은 전체 의석을 96석으로 늘렸지만, 합병 이전의 109석에 비하면 오히려 줄어든 결과였다. 자민당의 전 간사장 이시하라 노부테루나 아마리 아키라와 같은 거물급 정치인들을 꺾는 등 성과도 있었지만, 오자와 이치로가 50년 만에 처음으로 소선거구에서 낙선하는 등 당은 손실을 입었다 (오자와는 비례 대표로 재선되었다). 에다노 자신도 사이타마현 제5구에서 불과 3%p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했으며, 다음 날까지도 당선이 확실치 않았다. 총선 당일 밤에는 대표직 사임을 부정했지만, 당의 전반적인 대패로 인해 11월 2일 당 간부 회의에서 사임 의사를 발표하며 "새로운 체제를 정비하여 내년 참의원 선거 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별 국회 폐회일인 11월 10일을 사임 날짜로 정하고, 이후 당원들이 참여하는 대표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밝혔다.
2021년 11월 5일, 그는 당내 그룹 '생추어리'에 가입하여 고문으로 취임했다. 11월 12일, 그의 대표직 사임이 공식적으로 수락되었고, 다음 대표 선거 일정이 확정되었다.
2023년, 당직 없이 3년을 보낸 후 이즈미 겐타 대표가 당의 기세를 되찾는 데 실패하자 그가 다시 입헌민주당 대표직을 맡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2023년 8월, 당 대표 시절 발표했던 매니페스토인 '에다노 비전'의 개정판을 공개했다. 2024년 7월 11일, 그는 가을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가 유출되었다. 에다노는 이 유출을 비난했지만, 8월 9일 X(구 트위터)를 통해 공식적으로 대표 선거 출마를 발표했다. 9월 23일에 치러진 2024년 입헌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그는 전 총리 노다 요시히코에게 180대 232로 패배했다. 10월 1일, 그는 당 최고 고문으로 취임했다.
2024년 10월 15일, 제5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공시되었고, 사이타마 5구에서는 에다노 외에도 현직 법무대신인 자민당의 마키하라, 레이와 신센구미의 쓰지무라 치히로, 일본공산당의 야마모토 유코가 입후보했다. 10월 17일 요미우리 신문은 초반 판세에서 "에다노와 마키하라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이라고 보도했다. 자민당은 정치 자금 파티 수입 비자금 문제, 통일교 문제, 그리고 10월 23일 발각된 비공천 후보에 대한 2000.00 만 JPY 지급 문제 등으로 역풍을 맞았다. 10월 27일 총선이 실시되었고, 투표 마감 시간인 저녁 8시 직후 아사히 신문은 에다노의 당선 확정을 보도하며 그가 11선 의원이 되었음을 알렸다. 자민당은 비례 북간토 블록에서 7석을 얻었으며, 노나카 아쓰시가 7위 (73.937%)로 당선되고 8위 (72.602%)였던 마키하라는 의석을 잃었다.
2024년 11월 13일, 그는 중의원 헌법심사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에다노는 취임 인사에서 "공정하고 원만한 심사회 운영에 힘쓰고, 폭넓은 합의 형성을 목표로 일치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거듭하겠다"고 밝혔다.
5. 정치적 견해 및 정책
에다노 유키오는 자신의 정치적 사상에 대해 "리버럴이자 보수"라고 설명하며, 이 두 개념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화합으로 귀함을 삼는다"는 일본의 오랜 역사와 전통 정신을 중시해야 할 '보수의 전통'으로 꼽았다. 그는 자유를 존중하고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며, 자유방임적 자기 책임론이 아닌 상호부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리버럴이자 동시에 보수라고 주장했다. 그는 스스로를 '주류 보수'로 여기며, 전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선생님이 건강하실 때 다시 한번 리버럴한 정권을 만들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5.1. '입헌 민주주의'
2017년 입헌민주당을 창당할 당시, 그는 '국가 권력이 헌법에 의해 제한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성립한다'는 입헌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유라쿠초 연설에서 "최근 들어 우리는 다시 한번 입헌주의라는 단어를 떠올려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일본입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21세기 정치의 대립 축은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의 하향식 방식인지 아니면 풀뿌리로부터의 상향식 방식인지에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숫자가 많다고 마음대로 결정하는 위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풀뿌리 민주주의입니다. 강한 자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결국 당신에게 흘러내려올 것이라는 위로부터의 경제 정책이 아니라, 삶을 끌어올려 경제를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상향식 정치의 실현을 역설했다.
5.2. 헌법 논쟁
에다노 유키오는 헌법, 특히 일본국 헌법 제9조 개정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5.2.1. 제9조 및 자위권
2013년 9월 10일, 민주당 헌법 종합 조사회장에 임명된 에다노는 헌법 제9조 개정 초안을 발표했다. 이 초안은 2017년 12월 2일에 철회되었다.
개헌 초안에서 추가될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제9조의2
1항 우리나라에 대해 급박하고 부당한 무력 공격이 이루어지고, 이를 배제하기 위한 다른 적절한 수단이 없는 경우, 필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우리나라 단독으로, 또는 국제 법규에 따라 우리나라의 평화와 독립 및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타국과 공동으로,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
2항 국제 법규에 따라 우리나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타국의 부대에 대해 급박하고 부당한 무력 공격이 이루어지고, 이를 배제하기 위한 다른 적절한 수단이 없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평화와 독립 및 국가와 국민의 안전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경우, 필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해당 타국과 공동으로,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에다노는 논설 본문에서 "애초에 개별적 자위권이냐 집단적 자위권이냐는 이원론으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며, "그러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정치인이나 학자 정도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판단이 미묘한 한계 사례에 대해 비합리성이 발생하지 않도록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 외 대부분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해서는 확대 해석이 발생하지 않도록 명확하게 부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강력한 제동 장치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헌법학자 니시 오사무는 에다노가 제안한 제9조의2와 제9조의3이 한정적인 집단적 자위권 행사 그 자체라고 평가하며, 이는 그의 현재 헌법 개정 반대론과 모순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에다노는 자위권 행사의 요건을 명문화한 조항을 현행 제9조와 별도로 '제9조의2', '제9조의3'으로 추가하여 헌법 해석의 폭을 최대한 좁힘으로써 무원칙한 군사력 증강에 제동을 걸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당시 내각의 판단으로 헌법 해석을 변경할 가능성"이 현행 헌법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하며, 해석 변경으로 집단적 자위권 일부 행사를 용인하려는 아베 정권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의 초안인 제9조의2 제2항은 일본의 안전을 지키는 타국의 군대가 공격받았을 경우, 필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이는 전통적인 '개별적 자위권'의 범위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견해가 에다노 자신은 물론 헌법학자 하세베 야스오에 의해 제기되었다. 하세베 야스오는 에다노의 개헌안이 과거 내각법제국장관 등 정부 견해에서 제시된 생각을 헌법에 명문화하려는 것이며, '긴급 출동 호위'를 포함하여 모두 개별적 자위권 행사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아베 신조 총리가 추진한 '해석 개헌'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해 자위대가 '지구 반대편'까지 가서 무력 행사를 할 수 있다고 국회에서 답변하는 등 범위가 무한정 확대될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양자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에다노의 초안은 그 해석이 오해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신문 논설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는 헌법 개정안'으로, 자민당의 개헌안과 유사한 생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대해 에다노 본인은 기사를 명시하며 "나의 과거 초안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지 않았다"고 부정했으며, 헌법학적 관점에서는 하세베 야스오 등 에다노와 일치하는 견해가 존재한다.
에다노는 『통판생활』의 헌법 특집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에서 아베 신조 정권의 해석 개헌에 의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에 대해 "헌법에 구속되어야 할 정부가 자의적으로 기존 헌법 해석과 정합성이 없는 해석으로 변경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입헌주의의 명확한 부정이다.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현행 헌법의 최대 문제점은 자위권 등을 규정한 조문이 없어 모든 것이 해석에 맡겨져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자의적으로 변경 가능한 해석이 아니라, 제동 장치를 '명문화'하는 것"을 언급했다 (에다노는 이를 '헌법 제9조의 제3의 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개헌 초안에 대해서는 "전수 방위를 기본으로, 개별적 자위권으로 선을 긋는다"고 설명했다. 에다노의 개헌안은 현행 제9조(1항 및 2항)에는 손대지 않고 그대로 '제9조의1'로 하며, '제9조의2'와 '제9조의3'을 두어 아베 정권 이전의 헌법 해석이 쌓아온 전수 방위의 범위와 자위권의 제약을 명문화하는 것이다. 그는 "조문의 '해석의 폭'을 좁히면 좁힐수록 공권력이 이를 무시하고 폭주할 위험을 줄일 수 있다"며, "앞으로도 일본을 군사 대국으로 만들지 않고, 침략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제동 장치를 확실히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5.2.2. 안전 보장 관련 법제
에다노는 평화주의와 전수방위를 유지하는 입장을 견지하며, 제9조 개정이 이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라면 찬성한다고 밝혀왔다. 제3차 아베 신조 내각이 추진한 안보 법제는 '해외에서 전쟁할 수 있는 법률' (전수 방위를 일탈하는 것)이며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추인하게 될 자위대 가헌론 (아베 내각이 검토하고 있는 제9조 개정안)을 비판하고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동시에 안보 법제가 "명확히 헌법 위반임을 알 수 있는" 헌법 개정안이 제시된다면 이를 부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현 상황이 해외에서 전쟁할 수 있는 상황이므로, 동시에 '해외에서 전쟁할 수 없다' '일본 영토·영역이 공격받지 않는 한 전쟁할 수 없다'고 명기하지 않으면, 국민들이 생각하는 전수 방위의 자위대와는 달라진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에다노는 일본공산당 등 이른바 호헌파(개헌 자체에 반대하는 세력)와도 협력하여, 호헌파 집회에서도 아베 내각의 헌법 '개악'에 대한 반대와 입헌주의 옹호를 호소했다.
민주당 간사장 시절인 2015년에는 아베 내각이 추진하는 안전 보장 관련 법안(평화 안전 법제)에 대해 "국민 여론과 총리 간의 싸움이다. 내각을 퇴진시켜 안보 법제를 저지하겠다"고 주장하며, 전전(戰前) 일본을 예로 들어 "(메이지 헌법의) 해석 변경이 이루어진 결과, 군부가 폭주했다. 지금과 매우 흡사하다"고 말했다. 이 법안이 통과된 후인 2017년에는 안보 법제를 용인하는 희망의 당에 합류하지 않고 입헌민주당을 결성하여 안보 법제의 백지화를 내세웠다. 2021년 중의원 선거 당시에도 평화안전법제의 폐지와 입헌주의의 회복을 요구하는 시민연합과 안보 법제 위헌 부분 폐지 등의 정책 합의에 서명했다.
반면 2023년 12월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각의 결정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위헌 부분은 사라진다"며 안보 법 개정은 불필요하다는 인식을 밝히고, "안보 정책으로서 문제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입헌주의 관점에서 문제 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2024년 8월 시사통신사와의 인터뷰에서도 "현행 운용은 개별적 자위권으로 설명되는 범위다. 법률은 현 상황에서는 문제 없다"는 인식을 표명했다.
5.2.3. 총리의 중의원 해산권 제약
야당 민주당 시절인 2004년 헌법 조사회에서 그는 일본국 헌법 제7조 (국사 행위) 제3호를 근거로 한 제7조 해산에 대해, 근거 요건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하며 다른 국사 행위와 마찬가지로 법규상에 명확히 규정하여 정비·개선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2017년에는 일본과 동일한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선진국인 영국 의회 임기 고정법이나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을 참고하여, 헌법 제7조를 근거로 해온 총리의 해산권을 제약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영국의 경우 내각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어 총리가 사임 대신 해산을 결정하거나, 의원 {{sfrac|2|3}}의 찬성을 필요로 하는 '의회 자율 해산'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만 해산이 가능하다. 독일 역시 다음 총리 지명 하에 내각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어 총리가 해산을 결정하거나, 총리가 제출한 신임 결의가 부결되어 해산을 결정하는 경우에만 해산할 수 있다. 헌법학자 기무라 소타는 영국에서 해산권이 제한된 경위에 대해, 총리의 자유로운 해산권이 (정부) 여당의 편의(여당에게 유리한 시점)에 맞춰 선거를 정당화하는 제도가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고 설명하며, 해산권 제약이 특정 세력의 편의가 선거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5.3. 경제 정책
에다노 유키오는 일본 경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정책적 입장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5.3.1. 구조 개혁 및 고용
그는 메이지 시대 이후 지속되어 온 서구에 따라잡고 능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캐치업형 사회'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인식하고, 일본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를 다양성과 독창성 있는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 업계의 호송선단 방식을 비롯한 중앙집권의 관료 기구에 의한 경제 통제와, 종신고용제 및 연공서열형 임금 등으로 구축된 순종적이고 동질적인 노동력은 부족한 자본과 인재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합리적이었지만, 다른 나라들의 노동력 질이 향상되어 이제는 규격 대량 생산 분야에서 가격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중앙집권을 폐지하고 지방 분권을 통해 지역별 개성을 살린 경쟁을 촉진하며, 규제 완화를 통해 슘페터가 논한 바와 같은 독창적인 기술 혁신과 경영 개혁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물품이 풍부한 일본에서 소비를 활성화시키려면, 잠재적 수요가 있는 요양·보육을 대표하는 노후·육아 관련 분야를 육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5.3.2. 소비세 및 금융 정책
에다노는 직업 이동과 고용의 유동화를 촉진하여 산업 구조를 바꿔야 하며, 공공 사업에 의한 경기 부양책이 아닌 실업 대책이나 사회 보장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거품 경제 붕괴 후 일본은 내수 주도 경제로 전환했어야 하지만, 노동자 파견법 완화 등이 제조업의 규격 대량 생산에 주력하는 수출 의존적 경제 구조를 유지시켰다고 비판하며 당시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요양, 의료, 교육, 보육 등 저출산 고령화 대응 사업에 재정을 투입하여 고용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조업에서 국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분야는 품질 관리나 기술력을 포함한 고부가가치 분야에 한정되며, 고부가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직업 내 훈련을 실천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고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위장 청부를 엄격히 비판하며, 특히 캐논의 위장 청부에 대해서는 식품 위장 문제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악질적인 행위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또한 절대적인 금액과는 별개로, 저소득층의 소득 상승분은 소비로 돌아가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판단했다.
2013년 5월 29일, 허핑턴 포스트 (현 허프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소비세 증세는 중장기적으로 경제 활성화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014년 9월 시점의 일본 재정 상황에서는 소비세 증세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2017년 8월 민진당 대표 선거에서는 "소비세 인상은 현 시점에서 보류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2019년 소비세 10% 인상과 관련하여, 처음에는 "먼저 8%로 되돌린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올렸다가 내리면 혼란이 생긴다"며 일단 증세된 후의 감세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2021년 6월, 중의원 본회의에서 "세율 5%로의 한시적인 소비세 감세를 목표로 한다"고 표명했다. 같은 해 10월 중의원 선거에서는 그가 대표를 맡은 입헌민주당은 '한시적인 소비세 5% 감세'를 공약에 포함했다. 그러나 2022년 10월 28일, 에다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에다논 토크' 라이브 방송에서 "중의원 선거에서 후회하는 것은 한시적이라 할지라도 소비세 감세를 언급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강하게 반성하고 있다"며 "두 번 다시 감세는 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5.3.3. 자유 무역 및 금융 위기 대응
그는 금융 정책에서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금융 완화의 결과로 엔화 약세가 지속되면 코스트 푸시형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임금·국민 생활 향상에 마이너스 요인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일본 디플레이션의 요인이 인구 감소를 포함한 사회 성숙화에 따른 수요 감소와 중간층의 빈곤화라는 구조 자체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금리를 올리면 경제가 성장한다고 보았다. 다만 2017년 8월 인터뷰에서는 "현재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금융 완화를 정권 교체로 중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총리가 되어도 지속할 것이다. 금융 정책은 시시각각의 상황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당위론'만으로는 추진할 수 없다"며 금융 완화의 지속을 시사했다.
민주당 정권 시절에는 TPP 협상 참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경제산업대신 취임 후에는 "TPP가 중장기적으로 지진 재해 복구를 뒷받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2012년 중의원 선거 당시에는 농업 분야에 대한 관세는 전면적으로 철폐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1998년 금융 위기 당시, 그는 공적 자금은 예금자 보호와 건전한 대출자 보호에 한정해야 한다며, 파탄 전 처리에는 일관되게 반대했다. 그는 부실 채권을 처리하지 않으면 금융기관의 대출 회피가 계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부실 채권 처리를 강제하여 과소 자본 상태로 만든 후 공적 자금으로 재건해야 하며, 엄격한 심사와 강제적인 자본 주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중 채무 문제(소비자 금융 문제)에 대해서는 소비자 금융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취했으며, 아베 내각에서는 회색 지대 금리 제도를 추궁했다. 그는 회색 지대 금리 제도를 부활시키려는 아마리 아키라, 니시카와 고야 등 금융 서비스 제도 검토회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고토다 마사즈미와 공동 대표를 맡는 초당파 의원 연맹을 결성했다.
5.4. 에너지 정책
에다노 유키오는 원자력 발전 정책에 대해 그의 입장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오이 발전소 재가동 문제와 관련하여, 2012년 3월 5일 예산 위원회에서는 "안전 확인이 된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원자력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경제산업대신으로서 오이 원전 재가동을 결정한 후인 2012년 8월에는 "확실히 (원자력) 의존도를 낮춰나갈 것이지만, 그 탈피 과정에서 현재 시점에서는 오이 원전처럼 안전성이 확인된 것은 어느 정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해 9월 15일에는 오마 원전 건설 계획을 둘러싸고 "이미 건설 허가가 나온 원전의 취급을 변경할 생각은 없다"고 밝히며, 동일본 대지진 이후 공사가 중단된 착공 중인 국내 원전에 대해 건설 재개를 용인한다는 입장을 각료로서 처음으로 표명했다.
입헌민주당 창당 이후에는 원전 재가동 반대로 입장을 바꾸어, "재생 가능 에너지를 통해 원전 제로는 현실적이다. 사고가 발생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1년 2월, 향후 원자력 정책에 대해 니시닛폰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원전 사용후 핵연료의 행방을 결정하지 않고서는 최소한 원자력 발전을 중단한다고 선언할 수 없다. 사용후 핵연료는 쓰레기가 아니라는 약속으로 맡겨진 것"이라며 "원전을 중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당 안팎으로 파문을 일으켰고, 같은 달 26일 에다노는 발언의 의도에 대해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원전을 중단하는 것을 명확히 시작할 것이다. 다만, (폐로를 포함하여) 원전을 제로로 만드는 목표는 100년 단위의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5.5. 외교 및 안보
에다노 유키오는 외교 및 안보 문제에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여러 선택지(외교 카드)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라크 전쟁 개전 당시 일본에 미국 무조건 지지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외교 과정을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체제가 중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중국 전체가 민주화되어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 주둔이 불필요해질 때를 대비하여 한반도, 대만, 아세안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경제 통합을 추진하여 미중 양국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중국 강경파로 알려져 있다.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회의에 참가했을 때는 중국의 핵 실험에 반대하는 현수막을 들고 가다 공안 당국에 몰수당했고, 회의장에서 항의문을 종이에 크게 써서 당국에 제지당하기도 했다.
2010년 10월 2일, 사이타마시 강연에서 센카쿠 열도 중국 어선 충돌 사건을 언급하며 "중국에는 법치주의가 통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상대해야 한다. 그러한 나라와 경제적 파트너십을 맺는 기업은 낙관적이다. 컨트리 리스크를 포함하여 자기 책임으로 경영에 임해야 한다", "중국과의 전략적 호혜 관계는 있을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은 분명히 정치 체제가 다르며, 미국이나 대한민국과의 관계처럼 신뢰 관계를 가지고 일을 추진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발언했다. 또한 중국을 '악한 이웃'이라고 부르면서도, "악한 이웃이라도 이웃이다. 그 나름대로의 교류는 계속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2011년 2월 10일 중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공명당 사토 시게키의 질의에 대해 "직접 특정 국가를 악한 이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라며 "좋은 이웃이든 악한 이웃이든 이웃과는 잘 지낼 수밖에 없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일중 양국이) 서로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해명했다.
그는 민주당 일본-대만 우호 의원 연맹에 소속되어 있으며, 자주 대만을 방문하여 대만 정치인들과 교류하고 있다. 대표적인 친대만파 의원 중 한 명이다. 그는 전 중화민국 총통 이등휘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으며, 2010년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행정 쇄신 담당) 취임 회견에서도 언급했다. 2020년 7월 30일 이등휘가 서거했을 때, 그는 트위터에 "마음속 깊이 애도의 뜻을 표한다. '존경하는 정치인은 누구인가?'라고 자주 질문받지만, 직접 뵌 선배들 중에서는 망설임 없이 이등휘 선생님이다. 군사 독재 체제를 평화롭게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인 체제로 이행시킨 정치력은 20세기 가장 훌륭한 정치인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생전에 선생님을 여러 번 뵐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소중한 재산이다. 일전에 타이베이에서 총통 재임 중이던 선생님을 뵈었을 때, 동료 의원이 '정치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정치란 시간의 함수'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때부터 약 20년이 지난 지금,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통감하며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는 추도 글을 올렸다.
티베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티베트 망명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2005년에는 초당파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티베트 문제를 생각하는 의원 연맹의 대표에 취임했다. 2008년에는 티베트 탄압이 악화될 경우 후진타오 주석의 방일을 환영할 수 없다는 티베트 의원 연맹 성명을 작성했다. 2009년에 의원 연맹 대표직에서 물러났으며, 현재는 명예 고문을 맡고 있다.
그는 비둘기파를 자처하지만 현실주의자이며, 유사법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는 극단적인 좌우익 의견에는 비판적이며, "확실히 요코미치 다카히로 씨나 그의 측근들의 안전 보장 정책 등이 너무나 터무니없고 문제라서 종종 짜증이 날 때도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오키나와현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에 대해서는 내각관방장관 재임 시 " (미일 합의는) 국가 간의 약속이며, 또한 여러 경위를 거쳐 이루어진 합의"라며 " (합의를) 확실히 바탕으로 대응해 나갈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정부 방침에 따라 동시에 오키나와 주민들의 염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며, 나고시헤노코 주변으로 이전한다는 미일 합의를 추진할 의사를 밝혔다. 입헌민주당 창당 후에는 "헤노코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지 않는 해결책을 위해 미국 정부와 재협상해야 한다. 오키나와의 분열과 대립을 낳는 건설을 계속 강행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가 있다"고 말하며 사실상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고, 민주당 정권 시절과의 정합성에 대해서는 "입헌민주당은 새로운 정당이다. 과거의 교훈을 바탕으로 당내에서 이전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고 논의해 왔다"고 설명했다。
2021년 7월 1일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에 축전을 보냈다.
2021년 10월 24일 방송된 NHK의 '일요 토론'에서 그는 국방비 증액에 대해 "시대에 뒤떨어진 전투기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며 정밀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사 저널리스트 JSF에 따르면, F-35는 2021년 현재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이며, 스위스가 가장 높이 평가하여 차기 전투기로 채택한 기종이므로 에다노의 발언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되었다.
5.6. 법률 및 행정 정책
에다노 유키오는 법률 시스템, 경찰 권한 및 행정 개혁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다양하게 제시했다.
5.6.1. 법률 및 경찰 제도
그는 경찰 권력이 지나치게 확대되지 않도록 행동했으며, 경찰에 대한 감시 기구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1995년 옴진리교 사건에서 일본 경찰이 경미한 죄목으로 별건체포를 반복한 것에 대해 예산위원회에서 지적하며, "만약 경찰이 안이하게 체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다면, 전쟁 전의 경찰 국가로 향해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1999년 통신 감청법 제정 당시, 그는 남용 방지를 위한 제도적 제동 장치가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는 도청에는 제삼자의 입회인과 본인에게 통보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무위원회에서 질의에 나서기 전에 자민당-공명당 연립 정권이 심의 시간의 여야 합의를 깨고 강행 처리를 강행했다. 그는 공모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으며, '공모죄에 반대하는 초당파 국회의원과 시민 긴급 원내 집회'의 발기인을 맡았다.
아동 포르노 처벌법 개정에 대해, 아동 포르노를 소지하는 것만으로 처벌을 부과하는 단순 소지 규제에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 이유로 아동 포르노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점과 수사권 남용의 우려를 들며, 처벌 대상 확대는 적극적으로 수집·구매한 자에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6.2. 행정 및 공공 사업

그는 낙하산 인사 및 재취업에 대해, 예를 들어 퇴직 후 20년 동안 또는 허가를 요하는 경우, 혹은 자신이 재직한 관청으로부터 업무를 발주받거나 수주하는 기업에 대한 재취업에 대해서는 퇴직 후 20년 동안 허가를 요하는 제도 등을 제안했다.
영주 외국인에 대한 지방 참정권에 대해서는 지방 자치라는 관점에서 본래는 지방 자치 단체별로 결정하면 좋다고 하면서도, 현 상황에서는 지방 자치 단체의 선거 결과가 국익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며 국가와 지방의 역할 분담 시스템을 비판하고, 현 상황에서의 참정권 부여에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국회에 강력한 조사 권한을 가진 행정감시원(일본판 GAO)을 설치하여 행정에 대한 외부 감사 기능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6년 행정감시원 법안을 제안하며 중의원 행정개혁 특별위원회에서 총무청 행정감찰국이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행정감시원 창설의 의의를 주장했다. 이 논의는 결산행정감시위원회 설치로 이어졌다. 2005년에는 민주당 헌법 조사회장으로서 정리한 헌법 제언에 행정감시원 설치를 포함시켰다.
그는 이권 유도형 공공 사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1997년 정비 신칸센 예산 및 관련 법안에 대해 구 민주당은 찬성했지만, 에다노는 다른 도시 출신 젊은 의원들과 함께 반대하며 반기를 들었다.
5.6.3. 표현의 자유
자민당과 공명당 등이 추진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지나친 아동 포르노 등의 표현 규제 법안에 대해 오랫동안 규제 반대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는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법안의 문제점을 심의에서 추궁하며 표현의 자유를 위해 노력했다.
5.7. 기타 입장
에다노 유키오는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5.7.1. 복지 및 의료 정책
후쿠시마현립 오노 병원 사건에서 의사·간호사의 소송에 대해 지휘권 발동을 주장했으며, 의료 과실 책임에 대해서는 일반 업무상 과실치사죄와는 별도로 규정할 것을 제안했다.
고액의 비용이 드는 불임 치료에 대해, 부인이 불임 치료를 통해 아이를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의 지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소득 제한이 있는 횟수 제한부 무료화를 주장했다.
뇌사 상태에서의 장기 이식에는 찬성하지만, 뇌사를 법으로 사람의 사망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1997년 장기 이식 법안 심의에서는 뇌사를 사람의 사망으로 규정하지 않는 법안(가네다 세이이치안)의 제안자로서 "뇌사 상태에서는 자신의 장기를 제공하여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그 안에서 자신의 목숨을 단축하는 자기 결정도 허용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발언했다. 2009년 장기 이식법 개정안 심의에서는 뇌사 판정 기준을 엄격히 하는 C안의 제안자가 되었다.
5.7.2. 제로 코로나 정책
2021년 2월, 그는 '위드 코로나에서 제로 코로나로'를 제창했다. 우선 코로나19 감염을 철저히 억제한 후 경제 활동을 재개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자민당은 "그때까지 기다리면 일본 경제가 죽는다"고 반박했다. 감염병 학자들 사이에서도 '제로 코로나 정책' 지지 목소리가 나왔다. 일본 정부가 채택한 '위드 코로나 정책'은 서구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근절을 목표로 하면 경제적 손실이 막대하므로, 의료 붕괴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감염을 억제하며 오랫동안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제로 코로나 정책은 일단 감염자를 제로로 억제하면 이후 경제를 부활시킬 수 있으므로, 장기적인 이익을 고려하면 대만, 뉴질랜드처럼 오히려 경제적으로도 이득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일단 제로로 만들더라도 이후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억제책은 필요하다. 양 정책에는 장단점이 있으며, 변이 바이러스의 출현에 따라 전략 재고가 필요하므로, 2021년 12월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 유리한지에 대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5.7.3.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
그는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의 실현을 초선 당시의 공약으로 내세운 이래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1998년 제142회 통상 국회 이래 2014년까지 4회에 걸쳐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을 위한 민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자로 국회에 제출했다。 자사연립 정권 시절인 1996년에 법제 심의회가 답신한 부부별성 선택을 인정하는 민법 개정안에 대해 "자녀의 성을 혼인 신고 시에 결정하는 등 개정안에는 불충분한 점도 있지만, 별성 제도를 법제화한다는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며 정부 제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안은 일부 자민당 의원들의 반대로 국회 제출이 계속 보류되었다. 1997년에는 "별성 부부의 자녀의 성은 출생 시 부모가 협의하여 결정한다"는 법제심의회 안보다 진일보한 민법 개정안(민주당 안)의 제안자가 되어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논전을 펼쳤다.
이 문제의 반대론자들이 '일본의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 그는 "글자로 남아있는 것만 해도 1500년, 1600년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부부가 같은 성을 사용하게 된 것은 고작 지난 150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 150년 정도의 역사는 1500년 역사 속에서 급격하게 변화한 150년이며, 그 짧은 150년을 내세워 '역사와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라고 비판했다.
5.7.4. 국기 및 국가
그는 국기국가법에 반대했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국기는 국제법과의 조화 속에서 명문화하는 의미가 있으며, 국기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국가에 대해서는 "많은 국민이 국가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며, 정치적 의도에 좌우될 수 있는 명문법으로 하기보다는 관습법의 영역에서 대응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다. 그는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법적으로 국기·국가로 위치시키는 것 자체에는 찬성했다.
5.7.5. 비례대표 의원 처우
2016년 2월 26일, 민주당 비례 홋카이도 선출 중의원 의원 스즈키 타카코가 탈당계를 제출했을 때, 에다노는 "스즈키는 소선거구에서는 당선되지 못하고 비례 대표로 구제된 것이므로, 이는 민주당의 당명을 써준 여러분의 의석이다. 탈당할 것이라면 의석을 돌려주어야 한다", "중대한 반당 행위다"라고 지적하며 제명 처분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입헌민주당 대표 시절인 2018년 10월 이후, 비례 도카이 지구 블록 선출 의원인 히요시 유타, 아오야마 마사유키 두 의원이 탈당계를 제출했을 때는 제명을 보류하고 탈당계를 수리했다 (참고로 도카이 지구 블록의 입헌민주당 후보는 명단 등재자 전원이 당선되었으므로, 두 명이 의원직을 사임하더라도 다음 당선자는 나오지 않는다).
5.7.6. 아이치 엑스포 반대
그는 2005년에 개최된 아이치 엑스포에 반대하는 집회에 1995년에 참여했다.
6. 개인 생활
에다노는 아내 가즈코(전 일본항공 국제선 객실 승무원)와 쌍둥이 아들 두 명을 두고 있다. 1998년 10월에 결혼했다. 부부 별성을 인정하는 민법 개정안의 제안자이므로 사실혼을 할 것인지 주목받았지만, "그녀가 법적 혼인을 원했기 때문에" 혼인 신고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양가의 공통 지인 소개로 4월에 반쯤 맞선 형태로 만났고, 7월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2019년에는 『에다노 가문의 비밀 - 복귀 부인의 20년』을 고분샤에서 출판했다.
그는 불임으로 2002년부터 아내와 함께 불임 치료를 시작했고, 4년 뒤인 2006년 7월에 쌍둥이 아들을 얻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여동생은 2022년 현재 에다노의 정책 비서로 일하고 있다.
혈액형은 B형이다. 취미는 노래방이며, 자신 있는 노래는 와다 아키코의 '아노 가네오 나라스노와 아나타'이다. 애창곡은 케야키자카46의 '불협화음'이다. (이 인연으로 케야키자카46의 방송 프로그램인 '케야키라고, 쓸 수 없어?'에 VTR 메시지로 출연한 경험도 있다.) 바둑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북간토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다. 축구에서는 고향인 오미야를 홈타운으로 하는 오미야 아르디야를 응원하며, 아르디야 후원회의 개인 회원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시즌 개막 전에 열리는 선수 격려회에도 바쁜 와중에도 자주 참석했다.
그는 흡연자이다. 초당파 흡연자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의원 연맹 '모쿠모쿠카이'에 소속되어 있다. 개정 건강증진법이 전면 시행된 2020년 4월 이후에도 금지된 중의원 의원 회관 사무실 내 흡연을 계속했다. 이에 대해 에다노는 "제도를 명확히 인식하고 엄격하게 운용하는 인식이 부족했다"고 반성하면서도 "아마 (사무실 내에서 흡연하는) 의원이 많고,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은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말하며 자신 외에도 의원 회관 사무실에서 흡연하는 의원이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심한 근시로 인해 소프트 콘택트 렌즈를 애용하며, 가끔 안경을 쓰고 등장하기도 한다. 『다카포』 잡지의 '내 인생 최고의 한 권'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의 이야기』를 꼽았다.
2002년에는 야마모토 잇타, 후쿠야마 데쓰로, 미즈노 겐이치와 함께 잡지를 통해 정치 자금의 전체상과 진정에 대한 대응을 상세히 공개했다.
동일본 대지진 발생 당시에는 내각관방장관으로서 연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트위터에는 에다노의 건강을 걱정하며 수면을 취하도록 권하는 댓글이 많이 올라왔고, 이러한 댓글에는 '#edano_nero'라는 해시태그가 확산되었다. 일련의 움직임은 『월스트리트 저널』과 『가디언』에도 소개되었고, 이 기사를 읽은 작가 윌리엄 깁슨은 트위터에 "Edano, sleep"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일부에서는 105시간 동안 잠들지 않고 일했다고도 전해지며, 『데일리 텔레그래프』 보도에서는 미국 인기 드라마 『24시』에 빗대어 '정계의 잭 바우어'로 보도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는 그의 모습을 지칭하는 '에다루(枝る)'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이 '에다루'는 다이슈칸 서점이 주최하는 '제6회 '더 메이쿄 국어사전' 대상 모두가 만드는 국어사전!'에서 최우수 작품상 10점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후, 일부 인터넷 상에서는 방사능을 두려워하여 "가족을 싱가포르로 피신시켰다"는 악성 유언비어가 확산되었으나,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를 명확히 부인했다。 이 유언비어를 잠재우기 위해 에다노의 아내는 한때 일본 여권을 항상 소지하며 해외로 나가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정부 회견 등에서 수어 통역사를 동반하게 한 것은 내각관방장관 시절의 에다노였다. 이 관습은 자민당 정권으로 넘어간 후에도 계승되었다. 에다노는 가두 연설에서도 수어 통역사를 동반했으며, 이후 다른 당들도 이를 따랐다.
그는 아이돌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아이돌 노래를 좋아한다). 노래방 애창곡을 늘리기 위해 노래를 외운다고 말한 바 있다. 입헌민주당 대표 시절에는 정례 회견에서 아이돌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입헌민주당 결성 전인 2017년 10월 1일, 민진당 본부를 떠난 후 "혼자 노래방에 가고 싶다. (케야키자카46의) '불협화음'을 부를 거야"라고 주변에 말한 것으로 산케이 신문이 보도했다. 또한 10월 2일 '보도 스테이션'에서는 에다노에게 '불협화음'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를 묻는 인터뷰 장면이 방송되었고, 에다노는 "한번 타협하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후에 에다노는 "엘리베이터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혼잣말로 자연스럽게 나왔다. 정말 그냥 부르고 싶었을 뿐이다. 가사와의 연관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역시 일부 기자들이 반응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노래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성 학원 대학 종합연구소에서 객원 교수로 재직했다.
7. 논란과 비판
에다노 유키오는 그의 경력 동안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2010년 3월 27일, 한일 병합 100주년을 맞아 당시 일본 국무대신(정부 혁신 담당)이었던 에다노 유키오는 "중국과 한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화는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다... 중국과 한국이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서울신문은 "되풀이되는 日 고위직 망언 구제불능인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일본 고위 관료들의 반복되는 망언을 비판했다.
2010년, 『신초 45』 잡지에 에다노가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입후보 당시 JR 동일본 노조 오미야 지부 집행위원장과 "나는 JR 총련 및 JR 동일본 노조가 내세우는 강령(활동 방침)을 이해하고 연대하여 활동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교환했다는 기사가 실렸다고 산케이 신문이 보도했다. 에다노는 이 각서가 "일반적인 정책 협정을 맺는 일정의 기본 양식대로"라며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견해를 밝혔고, JR 동일본 노조와의 관계에 대해 "렌고의 각 산별 노조와 교류하는 범위 내에서 교류하고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앞으로 JR 총련·JR 동일본 노조로부터 정치 자금 제의가 있어도 거절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당시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는 JR 총련 및 JR 동일본 노조에 대해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시절 "가쿠마루파 활동가들이 상당수 침투해 있다"는 질문 주위서 답변서에 에다노가 행정쇄신담당대신으로서 서명했음을 페이스북에서 언급했다.
2010년 6월 28일 방송된 후지 TV의 '신 보도 2001'에서 그는 렌고 산하의 국공 관련 노동조합 연합회와 공산당계 전국노동조합총연합 산하의 일본 국가 공무원 노동 조합 연합회를 지칭하며 "국가 공무원 노동조합이 지지하는 대부분은 공산당이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곳은 거의 없다"고 발언했다. 이에 일본공산당의 이치다 다다요시가 "거짓말이다. 취소하라"고 반박하는 장면이 있었다. 다음 날인 28일자 『신분 아카하타』는 "터무니없는 공산당 공격"이라고 보도했다. 에다노는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해를 사지 않도록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도 정치의 책임이다"라고 답했다.
2020년 7월 5일,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 투표일 당일, 에다노는 트위터에 "우쓰노미야 민민에서 자란 나는 18세에 우쓰노미야를 떠난 후 센다이에서도 도쿄에서도 교자 전문점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는 글을 올리며, 그 글에 '#우쓰노미야'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입헌민주당이 지원하던 우쓰노미야 겐지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랐고, 투표일 당일 특정 후보에 대한 투표 유도는 공직선거법에서 금지되어 있어 인터넷 상에서는 '탈법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2021년 4월 2일, 에다노는 기자회견에서 스가 내각의 코로나19 대응을 비판하며 "하루빨리 퇴진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나아가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소수 정당이 잠정적으로 선거 관리 내각을 맡는 사례가 있다고 설명하며, "내 아래의 내각이 당면한 위기 관리와 선거 관리를 맡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잠정적인 정권 이양을 주장했다. 그러나 중의원 내 입헌민주당의 의석 점유율은 24%에 불과했으며, 당내에서는 비현실적이고 "입헌주의가 아니다"라는 당혹감이 나왔고, 일부 여당 의원들도 비판했다.
저널리스트 스즈키 에이트가 작성한 '구 통일교 관련 단체와 관계가 있었던 현직 국회의원 168명'에 따르면, 에다노는 2006년 통일교계 언론인 『세계일보』에 좌담 기사가 게재된 것으로 알려졌다. 입헌민주당 또한 이를 인정했다.
8. 대중적 이미지 및 평가
에다노 유키오는 그의 정치 경력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언론에 비춰졌다.
간 나오토는 1998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에서, 1996년 후생대신으로서 약해 에이즈 사건 해명에 관여할 때 같은 신당 사키가케 소속 의원이었던 에다노와 협력했던 경험을 언급하며, "그는 초선 의원이었지만 변호사 출신이어서 법률에도 해박했고, 그전에도 정책 전문가로 활약했다"고 평가했다. 간과 에다노는 신당 사키가케 이후 같은 정당에 소속되어 왔다. 에다노는 오랫동안 간의 측근 의원이었으며, 간 제2차 개조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지냈다.
인터넷상에서는 '에다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기이 민보 보도에 따르면, 에다노는 황당한 질문에도 비웃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며, 외신으로부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평가받는 동시에 "정보를 전부 공개하지는 않는다"고도 평가받았다.
구 입헌민주당 대표 시절에는 당의 이념 중 하나로 '상향식'을 내세웠지만, 그의 당 운영 방식이 당내 젊은층과 구 국민민주당 의원들로부터 '독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를 리더십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다.
9. 저작물 및 미디어
에다노 유키오는 여러 저작물을 출판했으며, 다양한 미디어에도 출연했다.
9.1. 저서 및 저술
- 『그래도 정치는 바꿀 수 있다 시민파 젊은 의원의 분투기』 (1998년 5월 1일, 매니지먼트 신샤) 214쪽 ISBN 978-4837803935
- 『'사업 분류'의 힘』 (2010년 4월 16일, 슈에이샤 신서) 208쪽 ISBN 978-4087205404
- 『저널리즘·권력·여론을 묻다』 (저자: 가토 고이치, 오쿠다이라 야스히로, 사이토 다카오, 와카미야 게이분, 에다노 유키오) (2010년 9월 26일, 신센샤) ISBN 9784787710154
- 『에다노 유키오 학생에게 말하다 희망의 싹은 있다』 (2012년 2월 16일, 성 학원 대학 출판회) ISBN 9784915832956
- 『매맞아도 말해야 할 것. 「탈근대화」와 「부의 재분배」』 (2012년 9월 28일, 도요케이자이 신보샤) 240쪽 ISBN 978-4492212028
- 『에다노 비전 지탱하는 일본』 (2021년 5월 20일, 분게이슌주 분슌 신서) 256쪽 ISBN 978-4166613144
9.2. 관련 서적
- 『에다노 유키오의 진가』 (저자: 마이니치 신문 취재반) (2018년 3월 20일, 마이니치 신문 출판) ISBN 9784620325132
- 『긴급 출판! 에다노 유키오, 영혼의 3시간 대연설 아베 정권이 불신임에 합당한 7가지 이유』 (편자: 하버 비즈니스 온라인 편집부) (2018년 8월 9일, 후소샤) ISBN 9784594080631
9.3. 미디어 출연 및 묘사
- 닛케이 스페셜 캄브리아 궁전 다음 리더들에게 묻는다! 정치는 변할 수 있는가? (2010년 5월 31일, TV 도쿄)
- 후세 히로시 - 닛폰 TV 『1000년 후에 남기고 싶은...보도 영상』 (2011년 12월 23일 방송)
- 스가와라 다이키치 - 영화 『태양의 뚜껑』 (2016년 7월 16일 개봉)
- 이노우에 하지메 -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데이즈』 (2023년 6월 1일 공개) ※역할명은 '관방장관'.
10. 소속 단체
- 라의 회
- 티베트 문제를 생각하는 의원 연맹 (명예 고문)
- 항구 평화를 위해 진상 규명법의 성립을 목표로 하는 의원 연맹
- 모쿠모쿠카이 (애연가 의원 연맹)
11. 선거 이력
선거명 | 회차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 여부 | 선거 방식 | 연령 |
---|---|---|---|---|---|---|---|---|---|
1993년 총선거 | 40회 | 옛 사이타마 5구 | 일본신당 | 96,926 표 | 16.11%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29 |
1996년 총선거 | 41회 | 비례 기타칸토 블록 (사이타마 5구) | 구 민주당 | 51,425 표 | 25.17% | 3위 | 비례 당선 (석패) |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 | 32 |
2000년 총선거 | 42회 | 사이타마 5구 | 민주당 | 106,711 표 | 45.52%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36 |
2003년 총선거 | 43회 | 사이타마 5구 | 민주당 | 95,626 표 | 56.41%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39 |
2005년 총선거 | 44회 | 사이타마 5구 | 민주당 | 103,014 표 | 48.68%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41 |
2009년 총선거 | 45회 | 사이타마 5구 | 민주당 | 130,920 표 | 59.15%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45 |
2012년 총선거 | 46회 | 사이타마 5구 | 민주당 | 93,585 표 | 45.37%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48 |
2014년 총선거 | 47회 | 사이타마 5구 | 민주당 | 90,030 표 | 46.09%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50 |
2017년 총선거 | 48회 | 사이타마 5구 | 구 입헌민주당 | 119,091 표 | 57.40%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53 |
2021년 총선거 | 49회 | 사이타마 5구 | 입헌민주당 | 113,615 표 | 51.38%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57 |
2024년 총선거 | 50회 | 사이타마 5구 | 입헌민주당 | 107,778 표 | 50.98% | 1위 | 당선 | 소선거구제 | 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