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기 및 교육
에르네스트 솔베이는 1838년 4월 16일 벨기에 브라방 왈롱주 레베크의 한 시골 마을에서 광산 소유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그 지역의 부르주아 계층에 속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생 알프레드 솔베이와 함께 기독교 기숙학교에 다니며 성장했다. 이 시기부터 솔베이는 과학 특히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에르네스트가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했고, 그는 리에주에서 공부하며 마카르뒤스 교수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17세가 되던 해, 그는 급성 흉막염에 걸려 대학 진학이 좌절되었다. 이 병으로 인해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던 그는 독학으로 학업을 계속하며 스스로 지식을 쌓아나갔다. 이처럼 정규 교육의 제약을 뛰어넘어 독학으로 얻은 지식과 실험 정신은 그의 후기 발명 활동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병에서 회복된 후에도 그는 앙리 베르제와 같은 저명한 화학자들의 공개 강연을 들으러 다니고, 산업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며 꾸준히 지식을 확장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2. 초기 경력 및 산업 혁신
에르네스트 솔베이는 젊은 시절부터 실무 경험과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화학 산업의 혁신을 이끌었다. 그의 직업적 경험은 솔베이 공정의 발명으로 이어졌고, 이는 솔베이 사의 설립과 세계적인 산업 확장의 기틀이 되었다.
2.1. 초기 직업 경험
솔베이는 21세부터 그의 삼촌이 운영하는 화학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가족 소유 상점의 회계사로 일했으며, 이후 브뤼셀 생조스에 있는 삼촌의 가스 공장에서 견습 관리자로 일하며 노동자들을 감독했다. 그는 근무 시간 틈틈이 가스 생산 과정에서 손실되는 암모니아의 농도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며 실용적인 연구에 몰두했다. 이러한 초기 직업 경험은 그가 화학 공정의 문제점을 직접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2. 솔베이 공정의 발명
1861년, 에르네스트 솔베이는 소금물(염화나트륨의 공급원)과 석회암(탄산칼슘의 공급원)을 이용하여 무수 탄산나트륨(탄산나트륨)을 제조하는 암모니아-소다 공정, 즉 솔베이 공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소금, 암모니아, 탄산 가스를 혼합하여 이 공정을 통해 탄산나트륨을 생산했다. 솔베이 공정은 기존의 르블랑 공정에 비해 훨씬 개선된 방식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탄산나트륨을 생산하는 반응은 화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적으로만 존재했으며, 여러 기업가들이 산업적 규모로 공정을 구현하려 시도했지만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벨기에 등지에서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솔베이는 1872년에 자신의 공정에 대한 특허를 획득하며 기술적 우위를 확고히 했다. 솔베이 공정의 등장으로 탄산나트륨의 가격은 크게 하락했다. 1870년 톤당 40 GBP였던 소다 가격은 1900년에는 톤당 12 GBP로 떨어지며, 화학 산업 전반에 걸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공정은 유리 및 세제 생산의 주요 원료인 탄산나트륨 제조에 필수적인 무기화학 분야에서 대규모 산업 시대를 열었다.
2.3. 솔베이 사(Solvay & Cie) 설립 및 확장
솔베이는 자신의 발명품을 산업화하기 위해 1863년 화학 회사인 솔베이 사(Solvay & Cie)를 설립했다. 그는 동생 알프레드 솔베이와 루이-필리프 아셰루아와 함께 소규모 팀을 구성하여 회사를 이끌었다. 첫 번째 공장은 벨기에 샤를루아에 합병된 쿠이예에 세워졌으며, 이후 1872년까지 공정 개선 작업을 지속했다.
초기 운영 비용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충당했고, 솔베이는 소다회의 시장 경제를 분석하고 필요한 사업 인가를 얻는 데 주력했다. 회사가 기술적,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는 기욤 넬리스, 외도르 피르메즈, 발렌틴 람베르트와 같은 세 명의 영향력 있는 사업가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금융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법, 상업, 산업 분야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들이었으며, 이들의 지원 덕분에 솔베이 사는 위기를 극복하고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솔베이 공정의 성공과 특허권 활용을 통해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곧 영국, 미국, 우크라이나의 리시찬스크,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전 세계 각지에 솔베이 공정 공장을 설립하며 글로벌 산업 확장을 이루었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약 70개의 솔베이 공정 공장이 가동되고 있다.
3. 자선 활동
에르네스트 솔베이는 자신의 특허를 통해 축적한 막대한 부를 인류 복지 증진이라는 숭고한 목표 아래 사회와 과학 발전에 기여하는 다양한 자선 활동에 사용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기부를 넘어, 학술 및 연구 기관 설립을 통해 사회 전체의 지식 기반을 확충하고 미래 세대의 성장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3.1. 교육 및 과학 기관 설립
솔베이는 자신이 세운 브뤼셀 자유대학교에 수많은 학술 기관들을 설립하며 교육과 과학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1894년에는 사회학 연구소(Institut des Sciences Sociales)를 설립하여 사회 문제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지원했으며, 이와 함께 국제 물리학·화학 연구소도 세워 기초 과학의 발전을 도모했다. 이어서 1895년에는 생리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생명 과학 분야의 연구 역량을 강화했다. 1903년에는 솔베이 경영대학원을 설립하여 미래의 비즈니스 리더를 양성하는 데 투자했다.
벨기에를 넘어 프랑스에서도 그의 자선 활동은 이어졌다. 프랑스 낭시에 전기공학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는 오늘날 국립 낭시 전기역학학교로 이어져 프랑스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그는 생리학, 물리학, 교육학 연구를 위한 재단 설립에 투자하며 인류 복지 증진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고자 했다.
3.2. 솔베이 회의
솔베이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1911년 시작된 일련의 중요한 물리학 회의인 솔베이 회의를 창설한 것이다. 이 회의는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와 화학자들을 초청하여 심도 있는 전문적인 논의를 진행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솔베이는 과학자들 간의 자유로운 학술 교류가 새로운 발견과 이론의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1911년 제1회 솔베이 회의에는 막스 플랑크, 어니스트 러더퍼드, 마리 퀴리, 앙리 푸앵카레, 그리고 당시 32세의 젊은 나이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참여하여 양자 역학과 방사능의 본질 등 당시 물리학계의 주요 현안들을 논의했다. 이후의 회의에는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막스 보른, 에르빈 슈뢰딩거 등 20세기 물리학의 거장들이 참여하며 양자 역학과 같은 혁명적인 이론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솔베이 회의는 과학 지식의 발전을 촉진하고 국제적인 과학 협력을 강화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 정치 경력
에르네스트 솔베이는 산업가이자 자선가로서의 삶 외에도 벨기에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자유당 소속으로 벨기에 상원 의원에 두 차례 선출되어 의정 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그는 사회 정책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일찍부터 표명했으며, 사회 개혁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생애 말년인 1918년에는 국무대신이라는 명예 직함을 수여받으며 국가에 대한 그의 공헌을 인정받았다.
5. 유산 및 영예
에르네스트 솔베이의 업적은 화학 산업과 과학 연구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5.1. 산업 및 과학에 미친 영향
솔베이 공정은 소다 생산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화학 산업과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공정은 기존 방식보다 효율적이고 경제적이었기 때문에 소다 가격을 크게 낮추어, 유리 및 세제와 같은 여러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다. 이는 대규모 무기화학 산업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설립한 연구소와 솔베이 회의를 통해 과학 연구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했다. 특히 솔베이 회의는 20세기 초 물리학의 주요 혁명인 양자역학의 태동과 발전에 중요한 토론의 장을 제공하며, 인류의 과학적 지식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산업과 과학이 상호 작용하며 발전하는 데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5.2. 영예 및 기념
솔베이는 그의 공헌을 인정받아 다양한 공식적인 영예를 수여받았다. 1918년에는 왕실 칙령에 따라 국무대신 직함이 부여되었다. 같은 해에는 벨기에의 최고 훈장 중 하나인 레오폴드 훈장의 그랜드 코르동(Grand Cordon)을 받았다.
1919년 11월 7일에는 프랑스의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그랜드 코르동을 수여받았다.

그의 이름을 딴 장소들도 여럿 존재한다. 미국의 솔베이 (뉴욕주)와 이탈리아의 로시냐노 솔베이는 각각 미국과 이탈리아에 세워진 최초의 솔베이 공정 공장이 위치했던 곳으로, 그의 산업적 유산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또한, 소행성 솔베이 (소행성)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 개인 생활 및 사망
에르네스트 솔베이의 개인 생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922년 5월 26일, 벨기에 이셀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이셀 묘지에 안장되었다.
7. 같이 보기
- 솔베이 사회학 연구소
- 에밀 박스바일러
- 솔베이 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