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경력
기에레크는 어린 시절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광부로 일하며 노동자의 삶을 경험하고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그의 정치 경력과 노동자 계급에 대한 이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는 1913년 1월 6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 입헌왕국의 소스노비에츠 내 포롬브카에서 광부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모두 탄광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의 미망인이 된 어머니는 홀로 그와 누이를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23년 그가 10살 되던 해, 가족은 일자리를 찾아 프랑스 북부로 이주했다. 에드바르트는 프랑스에서 초등학교 교육을 마쳤고, 13세의 어린 나이에 석탄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훗날 벨기에 탄광에서 일할 당시에는 진폐증을 앓게 되었다.
1.2. 초기 활동
1931년 기에레크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주의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1934년 파업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폴란드에 추방되었다. 폴란드에서 군사 복무를 마친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아내 스타니스와바 예드루시크와 함께 벨기에로 이주하여 와테르셰이의 석탄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다. 1939년에는 벨기에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벨기에 점령 기간 동안에는 공산주의 벨기에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다. 전쟁 후에도 그는 폴란드 이민자 공동체 내에서 정치 활동을 이어갔으며, 폴란드 노동자당 벨기에 지부의 공동 창립자이자 벨기에 주재 폴란드인 전국 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1948년 35세의 나이로 22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폴란드로 귀국했다.
2. 폴란드 연합노동자당 내 경력
폴란드로 돌아온 기에레크는 광부 출신이라는 배경과 숙련된 조직가로서의 능력을 바탕으로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내에서 빠르게 입지를 다졌으며, 특히 실롱스크 지역에서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했다.
2.1. 당내 기반 구축 및 중앙 진출
1948년 폴란드로 귀국한 기에레크는 카토비체 지역 폴란드 노동자당 조직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 12월, 그는 소스노비에츠 대표로 폴란드 노동자당과 폴란드 사회당의 통합 대회에 참여하여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PZPR) 창립에 기여했다. 1949년에는 바르샤바에서 2년 과정의 고위 당원 훈련을 받았으며, 지적 역량보다는 당 업무에 대한 높은 동기를 인정받았다. 1951년 로만 잠브로프스키의 지시로 파업 중이던 탄광에 파견되어 설득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며 폭력 사태를 막아냈다.
그는 1952년부터 폴란드 의회인 세임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3월 제2차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중앙위원회 중공업 부서장으로서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제1서기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 1956년 3월 에드바르트 오하프가 당 제1서기가 되자 기에레크는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으나, 스스로 자신의 자질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1956년 6월 28일, 포즈난 1956년 시위가 발생하자 그는 포즈난으로 파견되었고, 이후 정치국 위임으로 포즈난 사태의 원인과 경과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이끌었다. 위원회는 7월 7일 보고서를 제출하며 사태의 원인을 노동자들의 불만을 이용한 외부의 반사회주의적 음모로 규정했다.
1956년 7월 기에레크는 정치국 위원이 되었으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오하프를 대신하여 제1서기가 된 10월까지 짧게 재임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기에레크를 정치국에 유임시키지 않은 고무우카를 비판했으나, 기에레크는 경제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직을 유지했다. 그는 1959년 3월 제3차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대회에서 정치국에 다시 복귀했다.

1957년 3월부터 1970년까지 그는 중앙위원회 업무 외에 카토비체 주의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제1서기를 겸직했다. 이 기간 동안 기에레크는 카토비체 지역에서 개인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했으며, 당내 젊은 기술관료 파벌의 전국적인 리더로 부상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실용적이고 비이념적이며 경제 발전에 중점을 둔 관리자로 평가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 지도자들에게 아첨하며 당내 정보원 역할을 하는 태도로도 알려져 있었다. 기에레크가 잘 관리하던 실롱스크 고지대의 산업적 우위와 그가 소련과 맺은 특별한 관계는 그를 고무우카의 유력한 후계자로 만들었다.
바르샤바 대학교 법학 교수 미에치스와프 마넬리는 1960년부터 기에레크를 알고 지냈으며, 1971년에 그에 대해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는 광신적이거나 열성적이지 않은 구시대적 공산주의자이다.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으며 거의 실용적이다. 그는 역사가 공산당에 부여한 선도적 역할에 깊이 신뢰하며, 정부는 강력하고 흔들림 없이 통치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 기에레크의 당내 별명은 '촘베'였고, 실롱스크는 '폴란드 카탕가'였다. 그곳에서 그는 거의 독립적인 군주처럼 활동했으며, 효율적이고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찾는 데 재능이 있는 유능한 조직가였다. 그의 측근에는 엔지니어, 경제학자, 교수, 작가, 당 관료, 보안 요원 등 모든 직업군이 망라되어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1968년 폴란드 정치 위기 당시 기에레크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8년 3월 8일 바르샤바에서 학생 시위가 발생한 직후인 3월 14일, 그는 카토비체에서 주 전체의 당원 10만 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를 주도했다. 그는 당시 진행 중이던 시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한 첫 정치국 위원이었으며, 후에 그의 동기는 미에치스와프 모차르의 당내 음모로 위협받던 고무우카 정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 기에레크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적들"이 "평화로운 실롱스크의 물을 교란하고 있다"고 강력한 언어로 비난했으며, 그들에게 선동적인 비난을 쏟아붓고 "국민"을 "선택된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를 계속할 경우 "뼈가 으스러질 것"이라고 암시했다. 3월 19일 바르샤바에서 열린 당 회의 참가자들이 지지의 표현으로 고무우카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외치자 기에레크는 당황했다고 전해진다. 1968년의 사건들은 모스크바 내 후원자들의 눈에도 기에레크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3. 제1서기 재임 기간 (1970-1980)
기에레크는 1970년 12월, 전임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의 실각 이후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제1서기직에 올랐다. 그의 재임 기간은 폴란드 경제의 현대화와 서방 개방 정책으로 시작되었으나, 후반기에는 과도한 외채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사회적 불안과 노동자 시위에 직면하며 결국 실각의 원인이 되었다.

1970년 폴란드 1970년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압된 후, 기에레크는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의 제1서기로 고무우카를 대체하며 폴란드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인이 되었다. 1971년 1월 말, 그는 새로 얻은 권위를 걸고 슈체친과 그단스크를 직접 방문하여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과 협상했다. 이 협상을 통해 봉기의 원인이 되었던 소비자 물가 인상 조치가 철회되었다. 기에레크의 인기 있는 조치 중 하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되어 전후 바르샤바 구시가 복원 계획에서 제외되었던 바르샤바 왕궁의 재건을 결정한 것이었다. 국영 언론은 그의 해외 성장 배경과 능숙한 프랑스어 실력을 강조했다.
기에레크 팀의 등장은 집권 공산주의 엘리트의 마지막 세대 교체를 의미했으며, 이 과정은 1968년 고무우카 시대에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전전 폴란드 공산당 출신의 주요 원로 지도자들을 포함한 수천 명의 당 활동가들이 책임 있는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그 자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경력을 시작한 인물들로 채워졌다. 이러한 대대적인 개편은 1971년 12월 소집된 제6차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대회 전후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형성된 노멘클라투라 계급은 유럽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했다. "당은 이끌고, 정부는 통치한다"는 원칙에 따라 당의 역할을 희생시키면서 행정부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1970년대 내내 기에레크 다음으로 가장 눈에 띄는 최고 지도부 인사는 피오트르 야로셰비치 총리였다. 1971년 5월부터 기에레크의 경쟁자였던 미에치스와프 모차르는 점차 권력에서 멀어졌다.
역사학자 크시슈토프 포미안에 따르면, 기에레크는 집권 초기에 정권의 오랜 관행이었던 폴란드 가톨릭교회와의 단속적인 대결을 포기하고 협력을 선택하여, 폴란드 공산주의 통치 기간 동안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게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교회는 물리적 인프라를 현저히 확장했으며, 당국과 야당 활동가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자주 관여하는 중요한 정치적 제3세력이 되었다.
3.1. 경제 현대화와 서구와의 관계

고무우카를 실각시킨 봉기가 주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발생했으므로, 기에레크는 경제 개혁을 약속하고 산업을 현대화하며 소비재의 가용성을 늘리는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그의 "개혁"은 주로 대규모 외자 차입에 의존했으며, 주요한 시스템 개편은 동반되지 않았다. 1970년대 전반기에 폴란드가 누리던 투자 붐으로 인해 더 깊은 개혁의 필요성은 가려졌다.
기에레크 제1서기의 서방 지도자들, 특히 프랑스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서독의 헬무트 슈미트와의 좋은 관계는 폴란드가 외국의 원조와 차관을 받는 데 촉매제가 되었다. 기에레크는 폴란드를 서방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에 개방한 인물로 널리 평가받는다. 그 자신도 해외를 광범위하게 여행했으며, 미국 대통령 세 명을 포함한 중요한 외국 손님들을 폴란드에 초청했다. 기에레크는 또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신뢰를 받았는데, 이는 그가 소련의 큰 간섭 없이 폴란드 경제의 세계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는 전임자 고무우카가 폴란드 국익에 반한다고 여겼을 소련의 양보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1976년에는 바르샤바에서 카토비체까지 폴란드 최초의 완전 개통된 고속도로를 열었다.

3.2. 사회적 변화와 생활 수준 향상
1970년대 전반기에 폴란드의 생활 수준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으며, 한동안 기에레크는 기적을 일으킨 인물로 칭송받았다. 폴란드인들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소형차와 같은 원하는 소비재를 구매할 수 있었고, 서방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해결하기 어렵던 주택 공급 문제 또한 해결될 조짐을 보였다. 수십 년 후에도 많은 이들이 이 시기를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번영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180만 개 이상의 아파트가 건설되었다. 또한, 그는 폴란드에서 피아트 126 자동차의 생산을 시작하고, 완공 당시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역이었던 바르샤바 중앙역의 건설을 주도했다. 검열이 완화되고 새로운 서방 사상에 대한 개방성이 증대되면서 폴란드는 동구권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다.
3.3. 경제적 어려움과 외채 문제
그러나 폴란드 경제는 1973년 유류 파동 동안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1976년에 이르러서는 물가 인상이 불가피해졌다. 1976년 6월 시위는 강제로 진압되었지만, 계획되었던 물가 인상은 취소되었다. 위기의 영향을 상쇄하기 위해 정권이 고군분투하면서 1970년대 후반에 가장 많은 외채가 누적되었다. 폴란드 정부는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을 수 없었고, 나라는 너무 심각한 부채를 짊어지게 되어 식량 부족으로 인해 배급 제도가 도입되었다.
3.4. 사회적 갈등과 야당의 성장

기에레크 통치 시기는 폴란드에서 조직적인 야당의 부상으로 특징 지어진다. 정권이 제안한 헌법 개정안은 1975년과 1976년 전환기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개정안에는 "국가의 사회주의적 성격",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의 주도적 역할, 그리고 폴란드-소련 동맹의 공식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광범위하게 반대되는 이 변경안들은 수많은 항의 서한과 다른 행동들을 유발했지만, 1975년 12월 제7차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대회에서 지지를 받았고 1976년 2월 세임에 의해 대부분 시행되었다. 조직적인 야당 세력은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1970년대 말에는 3,000~4,000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했다.
경제 상황 악화로 인해 1975년 말, 당국은 1971년에 동결되었던 식품 가격을 해제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피오트르 야로셰비치 총리는 고소득층에 유리한 재정 보상과 결합하여 가격 인상을 강행했다. 이 정책은 소련 지도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기에레크가 지지한 이 인상안은 야로셰비치에 의해 1976년 6월 24일 세임에서 발표되었다. 다음 날 파업이 발생했으며, 특히 라돔, 바르샤바의 우르수스 공장, 그리고 프워츠크에서 심각한 소요 사태가 발생했고 경찰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6월 26일, 기에레크는 전통적인 당의 위기 대처 방식으로 폴란드 도시들에서 대규모 대중 집회를 명령하여 국민들이 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문제아들"을 비난하도록 했다.

브레즈네프로부터 더 이상의 가격 조작을 시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기에레크와 그의 정부는 1976년 여름 불안정해진 시장을 구제하기 위해 다른 조치들을 취했다. 8월에는 설탕 배급을 위해 "상품 쿠폰"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배급 카드는 1989년 7월까지 유지되었으며, 이는 "역동적 발전" 정책이 끝났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1976년 6월 시위의 여파로, 주요 야당 단체인 노동자 방어 위원회(KOR)는 9월에 박해받는 노동자 시위 참가자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다른 야당 조직들도 1977년에서 1979년 사이에 설립되었지만, 역사적으로 KOR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1979년, 폴란드의 집권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반대 조언에도 불구하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본명 카롤 보이티와, 폴란드인)의 첫 폴란드 방문 (6월 2일~10일)을 마지못해 허용했다. 이전에 바티칸 시국에서 교황 바오로 6세를 만났던 기에레크는 방문 기간 동안 교황과 대화했다.
3.5. 대외 정책 및 소련과의 관계
기에레크는 서방 지도자들, 특히 프랑스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서독의 헬무트 슈미트와의 좋은 관계를 통해 외국의 원조와 차관을 확보했다. 그는 해외를 광범위하게 여행했으며, 세 명의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중요한 외국 손님들을 폴란드에 초청하며 폴란드를 서방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에 개방했다. 그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신뢰를 받았으며, 이 덕분에 소련의 큰 간섭 없이 폴란드 경제의 세계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임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폴란드 국익에 반한다고 여겼을 소련의 양보 요구를 기꺼이 수용했다.
1979년에는 폴란드 출신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를 방문하는 것을 마지못해 허용했으며, 기에레크는 교황과 직접 대화했다. 1980년 5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어진 서방의 소련 보이콧 이후, 기에레크는 바르샤바에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간의 회담을 주선했다. 7월에는 그의 단골 휴가지인 크림 반도를 방문하여 친구 브레즈네프와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그는 브레즈네프가 폴란드 상황(통제 불가능한 부채 포함)에 대해 비관적인 평가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낙관적인 예측으로 응답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국가와 자신의 곤경을 완전히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4. 실각과 정치적 몰락

1976년 물가 인상 정책 실패로 인해 기에레크가 큰 어려움을 겪자,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사임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의 팀 내부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에드바르트 바비우흐와 피오트르 야로셰비치가 이끄는 한 파벌은 그가 권력을 유지하기를 원했지만, 스타니스와프 카니아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이끄는 다른 파벌은 그의 리더십 유지에 관심이 적었다.
높은 외채, 식량 부족, 그리고 노후화된 산업 기반은 새로운 경제 개혁을 강행해야 하는 요인들이 되었다. 다시 한번, 1980년 여름, 물가 인상은 전국적인 시위를 촉발했으며, 특히 그단스크 조선소와 슈체친 조선소에서 심각한 파업이 발생했다. 이전과는 달리, 정권은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단스크 협정과 폴란드 노동자들과 체결된 다른 협정들을 통해 기에레크는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독립 노동조합인 솔리다르노시치가 탄생했다.

그 직후인 1980년 9월 초, 그는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 의해 스타니스와프 카니아로 교체되며 당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1970년대 초에는 대중적이고 신뢰받는 지도자였던 기에레크는 대부분의 협력자들에게 버림받고 불명예와 조롱에 둘러싸인 채 권좌에서 물러났다. 1980년 12월 제7차 전원회의는 기에레크와 야로셰비치에게 국가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물어 중앙위원회에서 해임했다. 1981년 7월, 전례 없는 조치로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제9차 임시 대회는 기에레크와 그의 측근들을 당에서 제명하기로 투표했다. 대의원들은 이들이 폴란드의 솔리다르노시치 관련 위기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고, 당시 제1서기였던 카니아는 그들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다음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제1서기인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은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 계엄령을 선포했다. 기에레크는 1981년 12월부터 1년간 구금되었다. 다른 구금된 야당 활동가들과 달리, 기에레크의 구금은 사회적 존경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그는 이 시대의 주요 추방자로서 정치 경력을 마감했다.
5. 말년과 사망
1980년대 내내 기에레크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상태로 지냈다. 1990년대에는 경제 변화의 사회적 비용이 많은 폴란드 국민들로 하여금 그의 통치 기간인 "옛날의 좋은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비록 경제학자들이 폴란드가 지속적으로 갚아야 할 빚에 대해 상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기에레크는 매우 인기 있는 동정 여론을 다시 얻었다.
기에레크는 자신의 고향 지역인 소스노비에츠에서 살다가 2001년 7월 29일, 치에신의 한 병원에서 진폐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말년을 남부 산악 휴양지 우스트롱 근처에서 보냈다. 당시 그의 통치는 더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으며, 1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평생의 아내 스타니스와바 예드루시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으며, 그중 한 명은 아담 기에레크 유럽의회 의원이다.
그의 회고록인 《중단된 10년》(Przewana dekada)과 《복제》(Replika)는 모두 1990년에 폴란드에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04년에는 1970년대 폴란드 인민공화국과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폴란드 유권자들이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경제부흥운동'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이 정당은 기에레크의 경제 정책을 옹호하며, 그가 정치적으로 완벽한 인물이었다고 추켜세웠다.
6. 유산 및 평가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통치 기간에 대한 폴란드 사회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일부에서는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경험한 생활 수준 향상과 현대화 노력을 긍정적으로 기억하며 향수를 느끼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그의 경제 정책이 초래한 막대한 외채와 장기적인 경제 위기의 책임을 비판한다.
6.1. 긍정적 평가와 대중적 향수
기에레크 정부는 1970년대 폴란드인들이 누렸던 향상된 생활 수준 때문에 일부 사람들에게는 좋게 기억된다. 그는 폴란드 대중들이 향수의 징후를 보인 유일한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지도자였으며, 특히 그의 사망 이후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폴란드인 중 45%가 기에레크의 유산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22%만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많은 잠언과 격언이 대중화되었는데, 이 중 일부는 식량 부족을 언급하는 내용이었고, 나중에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홍보되기도 했다.
1970년 12월 제1서기가 되었을 때, 기에레크는 자신의 임기 동안 거리에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실제로 1976년 보안군이 파업에 개입했을 때도 총기를 포기한 후에야 개입했으며, 1980년에는 전혀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이전 시기의 유혈 진압과 대조되며 긍정적인 측면으로 평가된다.
6.2. 비판과 경제적 책임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러한 개선이 대규모 외국 차관에 기반한 현명하지 못하고 지속 불가능한 정책에 의해서만 가능했으며, 이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경제 위기로 직접 이어졌다고 강조한다. 돌이켜보면, 240.00 억 USD가 넘는 차입금은 제대로 사용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식량 부족이 심화되고 배급 제도가 도입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사회학자이자 좌파 정치인인 마치에이 그둘라에 따르면, 1970년대 폴란드에서 일어난 사회문화적 변화는 1990년대 정치적 전환 이후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었다. 그는 정치 및 나중에는 자본 엘리트와 중산층이 노동계급을 희생시키면서 동맹을 맺는 정치적 흐름에 대해 "우리 사회의 세력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아이디어는 1970년대부터 동일하게 유지되었고, 대규모 연대의 시기(1980년~1981년)는 예외였다"고 말했다. 기에레크 시대 이후로 폴란드 사회는 (당시 부상하던) 중산층의 문화적 인식과 규범에 의해 헤게모니가 장악되었다. '경영', '주도성', '개성', 혹은 "교육받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라"는 개인주의적 격언이 질서정연함과 결합되면서 계급 의식과 사회주의적 평등주의 개념을 대체했고, 노동자들은 그들의 상징적 지위를 잃고 결국 소외된 계층으로 분리되었다.
7. 수상 및 서훈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는 재임 기간 및 생전에 다음과 같은 국내외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8. 관련 항목
- 폴란드의 역사 (1945년-1989년)
- 폴란드 인민 공화국
-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 솔리다르노시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