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東孝아즈마 다카시일본어는 일본의 저명한 무도인이자 격투 가라테와 종합격투기의 발전사에 큰 획을 그은 공도의 창시자이다. 그는 극진 가라테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 무술의 안전성과 실용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 머리 가격, 던지기, 그래플링 등 다양한 기술을 허용하면서도 선수 보호를 위한 독특한 보호 장비를 도입한 독자적인 무술 시스템을 구축했다. 아즈마 다카시의 이러한 시도는 무술계에 안전하고 포괄적인 수련 환경을 제공하며, 신체적·정신적·사회적 발전을 추구하는 공도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스포츠로서의 실용성을 중시하면서도 선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그의 중도좌파적이고 진보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는 대도숙의 창립자이자 대표 사범으로서 공도의 국제적 확산을 주도했으며, 특히 러시아에서 큰 성과를 거두며 전 세계적인 무도 스포츠로서 공도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초기 생애 및 무술 입문
아즈마 다카시는 1949년 5월 22일 일본 미야기현 게센누마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이던 1965년 게센누마 고등학교의 유도부에 입단하면서 처음으로 무술과 접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일본 육상자위대에서 복무했으며, 1971년에는 와세다대학 제2문학부에 재학 중 극진회관에 입문하여 공수도 수련에 매진했다.
3. 극진 가라테 경력
아즈마 다카시는 1971년 극진회관에 입문하여 본격적으로 공수도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와세다대학 극진 공수도부(와세다대 극진회)를 창설하고 초대 주장을 역임했다. 이 시기 그는 야마자키 데루토모와 사토 가쓰아키 등에게 지도를 받으며 기술을 연마했다. 아즈마는 극진회관이 주최하는 각종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인간 기관차'(人間機関車)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주특기는 로우킥이었다.
그의 주요 극진 가라테 대회 전적은 다음과 같다.
- 1973년 제5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사토 도시카즈에게 패해 1회전 탈락.
- 1974년 제6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로야마 하쓰오에게 준결승에서 승리했으나, 결승에서 사토 가쓰아키에게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했다.
- 1975년 제1회 오픈 토너먼트 세계 공수도 선수권 대회: 니노미야 조코에게 패해 6위에 그쳤다.
- 1976년 제8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다시 니노미야 조코에게 패하며 3위를 기록했다.
- 1977년 제9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나카무라 마코토에게 승리하고 결승에서 나카야마 다케오에게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 1979년 제11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나카무라 마코토에게 패배하며 3위에 올랐다.
- 1979년 제2회 세계 공수도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나카무라 마코토에게 패배하며 4위를 기록했다.
아즈마 다카시는 전임자인 미야모토 가즈노리로부터 극진회관 미야기현 지부장을 이어받아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북토기 대회(北斗旗大会)의 전신인 미야기 TV배 전 도호쿠 공수도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4. 공도의 창립과 발전
아즈마 다카시는 극진 가라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 풀컨택트 가라테의 규칙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고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무술을 창조하고자 대도숙을 설립하고 이후 '공도'를 개발했다. 공도는 타격, 던지기, 그래플링 기술을 모두 허용하며, 안전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 독특한 보호 장비와 경기 체급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4.1. 동기와 초기 구상
아즈마 다카시는 극진 가라테의 풀컨택트 규칙에서 심각한 머리 부상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그는 또한 신체적으로 작은 선수들이 큰 선수들에 비해 불리하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본인 스스로도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심한 충격을 여러 번 받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싸움에서 칼라를 잡고 헤드 버팅을 하는 데 능숙했다"고 언급하며 극진 가라테의 풀컨택트 규칙이 매우 제한적이라고 느꼈다고 밝혔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아즈마는 현실적이고 다재다능한 격투 스타일을 만들고자 했다. 이는 머리 가격, 팔꿈치 공격, 헤드 버팅, 던지기 기술, 유도의 관절기 등 효과적인 공격 및 방어 기술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 아즈마가 초기에 개발한 무술은 극진 가라테와 유도의 하이브리드 형태였다. 극진 가라테를 기반으로 했지만, 규칙은 크게 변경되었다. 이 스타일은 단일 무술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초기 유도와 가라테의 혼합뿐만 아니라 다양한 무술의 기술을 활용하고자 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권투, 무에타이, 주짓수, 레슬링 등 여러 무술 기술이 대도숙 스타일에 통합되었다. 또한, 머리에 대한 손 기술을 허용하면서도 발차기 기술 시 머리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는 보호 장비가 도입되었다.
4.2. 대도숙 설립
대도숙 조직은 1981년 2월 17일에 공식적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첫 도장은 미야기현에 '가라테도 대도숙'(空手道大道塾)이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었다. 이 시기에 대도숙 내에서 수련되던 무술 스타일은 '격투 가라테'(格闘空手가쿠토 가라테일본어, 즉 '싸우는 가라테') 또는 '컴뱃 가라테 대도숙'(Combat Karate Daidojuku)으로 알려졌다. 같은 해, 대도숙 출신 선수들은 '1981년 북토기 가라테 선수권 대회'에서 처음으로 대회에 참가하여 경쟁에 데뷔했다.
대도숙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일본 무술 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무술 산업에서 몇 안 되는 종합격투기 단체 중 하나였으며, K-1과 'U-시리즈' 프로모션이 일본 주류 무술계에 진입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대도숙 소속의 격투 가라테 수련자인 이치하라 미노키는 UFC 2에 출전하여 UFC에 참가한 최초의 일본인 파이터가 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 무술 단체들이 UFC의 도전을 꺼려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이치하라는 호이스 그레이시에게 패배했다. 1990년대 대도숙은 '더 워즈'(THE WARS)라는 이름의 킥복싱 이벤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이벤트는 '글러브를 착용한 풀컨택트 가라테' 규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대도숙의 최고 실력자들을 선보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대도숙의 에이스였던 오사다 겐이치와 세이도카이칸의 사타케 마사아키 간의 꿈의 대결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대도숙 소속 선수들은 다양한 무술 잡지 표지에 실리며, 당시 일본 무술계에서 세이도카이칸과 함께 최전선을 이끌었다. 1995년 '가라테도 대도숙' 협회는 공식적으로 '국제 격투 가라테 연맹 대도숙'(Kakuto Karate International Federation Daidojuku, KKIF)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4.3. 공도로의 전환과 독특한 특징
1990년대 중반부터 대도숙은 미디어 중심의 홍보에서 벗어나, 설립 이래 추구해왔던 '안전하면서도 실용적인' 스타일 개발이라는 본래의 방향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2001년, 대도숙의 창립자이자 회장인 아즈마 다카시는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대도숙이 추진하는 스타일을 이제부터 '공도'(空道구도일본어)로 칭할 것이며, 공도가 독립적인 무도 무술이 될 것임을 발표했다. 대도숙과 공도 간의 관계는 고도칸과 유도의 관계와 유사하다. 같은 해, 대도숙은 첫 세계 선수권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공도를 국제 무대에 진출시켰다.
공도는 무도의 철학에 기반을 두어 전 세계로 확장되었으며, 모든 강사와 지도자들은 국제공도연맹(KIF)에 의해 인증되고 등록된다. 공도는 일본 문부과학성의 지원을 받는 등 사회 및 체육 교육 단체로서의 활동을 목표로 하는 독특한 격투 단체이다.
공도 선수, 즉 쿠도카는 공식 유니폼인 '도기' 또는 '쿠도기'를 착용한다. 이는 유도 도복과 유사하게 던지기에 강한 재질이지만, 전통적인 가라테 도복보다 소매가 짧다. 이러한 디자인은 잡기 및 던지기 기술에 이상적이다. 공도 수련자들은 식별을 쉽게 하기 위해 흰색과 파란색 도복을 사용한다. 모든 선수들은 도복, 머리 보호대, 공도 붕대, 마우스가드, K.I.F. 승인 글러브(주먹을 보호하지만 그래플링을 위해 손가락은 자유롭고 덮이지 않도록 디자인됨), 그리고 심각한 안면 손상과 뇌 외상으로부터 선수를 보호하는 특수 K.I.F. 승인 플렉시글라스 바이저를 착용해야 한다. 미성년 선수들은 공도 도복, 플렉시글라스 헬멧, 글러브 외에 정강이 보호대와 몸통 보호대도 착용해야 한다. 미성년 선수 보호에 관한 규정은 대회마다 다를 수 있다.
공도에서는 선수의 체급을 체중이 아닌 '신체 지수'(Physical Index, PI)를 기준으로 분류한다. 신체 지수는 체중(kg)과 신장(cm)을 합산한 값이다.
신체 지수별 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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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cm 미만 |
230 cm - 240 cm |
240 cm - 250 cm |
250 cm - 260 cm |
260 cm - 270 cm |
270 cm 이상 |
이러한 카테고리 분류 시스템은 다른 격투 스포츠나 무술에서 일반적으로 체중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과 달리 독특하다. 이 시스템은 체중뿐만 아니라 신장도 고려함으로써, 일반적으로 팔 길이가 길어 장거리에서 유리한 점을 평가하려는 시도이다.
공도의 기본 규칙은 명확하다. 각 대회는 자체 규칙을 사용하지만, 이 역시 기본 규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공도 세계 선수권 대회에 적용되는 규정에 따르면, 그라운드 파이팅은 두 번만 허용되며 각각 30초를 초과할 수 없다. 또한 등이나 사적인 부위에 대한 가격은 금지된다. 경기는 13 m x 13 m의 다다미 매트에서 진행되며, 그 안에 9 m x 9 m의 경기 구역이 있다. 경기 구역의 네 모서리에는 심판 네 명과 매트 내부에 한 명의 심판이 배치된다. 점수 부여 원칙은 기술의 강도에 기반을 두는데, 이는 기술과 신체 능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점수는 기술 자체가 아닌 효과성, 즉 상대방이 얼마나 충격을 느꼈는지에 따라 부여된다. 점수 등급은 1점부터 8점까지이다. 일본어로 점수는 코카(koka), 유코(yuko), 와자아리(wazari), 잇폰(ippon)이라고 불리며 각각 1점, 2점, 4점, 8점에 해당한다(상대방이 8점을 획득하면 승리한다). 이외에도 승리는 서브미션 또는 초크아웃, 녹아웃, 또는 경기 종료 시점에 더 많은 점수를 얻은 선수에게 주어진다. 동점일 경우, 심판의 판정으로 결정되거나 재경기가 진행된다.

5. 무술 철학
아즈마 다카시의 무술 철학은 궁극적으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격투 스타일을 추구하며, 선수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는 대도숙을 창립할 당시 "정말로 다른 종목에도 뒤지지 않는 가라테, 실전에서는 지지 않는 가라테를 만들고 싶지만, 현 시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약한 태도를 보인 적이 있다. 그는 다양한 격투기에서 10명의 대표를 뽑는다면 가장 강한 것은 스모, 두 번째는 레슬링의 130 kg 초과급, 세 번째는 권투의 헤비급이라고 주장하며, 그러면 가라테는 몇 위가 될 것인지 당시 스승이었던 오야마 마스타쓰에게 반기를 드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만화가 이타가키 게이스케는 아즈마가 1위로 스모를 꼽은 것에 대해 "그만큼 스모가 대단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도는 적절한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가능한 한 실제 싸움에 가깝게 대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공도는 규제가 매우 적고, 특수 기술과 동작을 사용한다. 공도의 기술에는 실제 싸움의 모든 스펙트럼이 포함된다. 즉, 스탠딩 타격, 던지기 기술, 그래플링 및 그라운드 싸움이다. 공도 수련은 주로 기본기(kihon), 일반 체력 훈련 및 실전 대련으로 구성된다. 극진 가라테의 카타는 공도에서는 대체 없이 제외되었다.
공도는 신체적, 정신적 발달을 모두 고려하는 포괄적인 무술이자 철학이다. 예의와 같은 전통적인 일본 무도 예절이 지켜지며, 특정한 일본식 인사 의례가 존재하고, 전통적인 수련복인 게이코기를 착용하며, 기술의 명칭은 일본어로 되어 있다.
공도의 도장훈은 다음과 같다.
"공도를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위대한 신체적, 정신적 강인함을 기르고, 스스로를 교육하며 지능을 얻고, 사람들과 유대감을 형성하고 감정을 풍부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을 함양하고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구성원이 될 것이다."
6. 리더십 및 국제 활동
아즈마 다카시는 대도숙과 국제공도연맹의 창시자이자 회장으로서 공도의 세계적인 확산을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국제 활동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는 다른 무술 단체들과의 교류를 통해 공도의 기술적 발전을 모색하고, 공직 활동을 통해 무술계에 폭넓게 기여했다.
6.1. 국제적 확장
공도는 일본 내 100개 이상의 도장과 전 세계 50개 이상의 국가에서 수련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공도의 창시국인 일본보다 현재 더 많은 공도 수련생을 보유하고 있다.
공도가 러시아에 확산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 1991년: 러시아 최초의 대도숙 가라테도 지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개설되었다.
- 1994년 5월: 아즈마 다카시 창시자가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 공도 연맹의 해외 지부가 모스크바에 개설되었다.
- 1994년 7월 7일: 모스크바 정의부에 모스크바 대도숙 가라테도 연맹이 등록되었다.
- 1994년 5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최초의 국제 대도숙 토너먼트인 '모스크바 컵'이 조직 및 개최되었다.
- 1996년: 알렉세이 코노넨코 선수가 자신의 체급에서 1위를 차지하며 일본에서 러시아 선수 최초로 승리했다.
- 2004년: 러시아 공도 연맹이 설립되었다.
- 2001년 이후: 러시아 공도 공식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같은 해 러시아 선수들은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를 획득했다.
- 2003년: 러시아, 일본, 발트 3국, 아제르바이잔,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 선수들이 참가한 제2회 국제 토너먼트 '발틱 스테이츠 오픈 컵'에서 러시아 공도 선수들이 심판팀을 이끌었다.
- 2011년: 제1회 공도 월드컵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 2013년 1월 13일: 로만 아나슈킨이 공도 6단 자격을 획득하며 일본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이 단위를 받았다.

6.2. 다른 무술과의 교류 및 상호작용
1990년대에 대도숙은 여러 무술 단체와 인재 교류를 활발히 진행했으며, 이는 공도 창시 이후 중단되었다. 1990년대에 대도숙은 서브미션 아츠 레슬링과 협정을 맺었으며, 이후 우슈, 산수, 아이키도 S.A., 파라에스트라, 하텐카이 등과 교류했다. 또한 대도숙 소속 일부 선수들은 라이즈와 같은 다른 무술 단체에서도 경기를 치렀다. 대도숙은 과거 일본 권법 및 슈토와 같은 다른 무술 단체와도 경쟁했다. 또한 무에타이, 산수, 태권도 수련자들과도 대결한 경험이 있다.
6.3. 공직 임명 및 기여
아즈마 다카시는 2008년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동시에 개최된 베이징 무술 토너먼트에서 산수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이 대회는 IOC의 승인 하에 진행되었으며, 대도숙 소속의 사사자와 가즈유키 선수가 이 대회에 출전했다. 두 사람 모두 도쿄 무술 산수 클럽 소속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공식적인 활동은 그가 무술계 전반에 걸쳐 폭넓게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7. 저작 및 미디어 출연
아즈마 다카시는 자신의 무술 철학과 기술을 설명하는 여러 저작물을 남겼으며, 영화에도 출연하여 무술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확장했다.
7.1. 저서
- 『하미다시 가라테』(はみだし空手Hamidashi Karate일본어, 1982년, 후쿠쇼도): 그의 초창기 무술 철학을 담은 저작이다.
- 『격투 가라테』(格闘空手Kakuto Karate일본어, 1983년, 후쿠쇼도)
- 『격투 가라테 2』(格闘空手2Kakuto Karate 2일본어, 1986년, 후쿠쇼도)
- 『오이 마사아키!』(オーイ まさぁーき!Oi Masaaki!일본어, 2001년, 분게이샤)
- 『하미다시 가라테에서 공도로』(はみだし空手から空道へHamidashi Karate Kara Kudo E일본어, 2002년, 후쿠쇼도)
- 『공도 입문』(空道入門Kudo Nyumon일본어, 베이스볼 매거진사)
7.2. 영화 출연
- 켄카 가라테 극진권(けんか空手 極真拳Kenka Karate Kyokushinken일본어, 1975년, 도에이):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오야마 마스타쓰(지바 신이치)의 대전 상대로 출연했다.
- 지상 최강의 가라테 시리즈(地上最強のカラ테シリーズChijo Saikyo no Karate Series일본어, 1980년, 산쿄 영화): 본인으로 출연했다.
8. 개인 생활 및 기타 소속
아즈마 다카시는 무술계에서의 활동 외에도 미나토 게센누마 대사로서 대중에게 알려진 활동을 했다. 그는 대도숙 공도 9단, 극진 무도회 8단, 고도칸 유도 3단 등 다양한 무술 단의를 소유하고 있었다.
9. 사망
아즈마 다카시는 2021년 4월 3일 오후 2시 35분, 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71세였다. 그의 사망 후 대도숙의 대표직은 오사다 겐이치가 이어받았다.
10. 유산과 평가
아즈마 다카시는 안전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공도를 창시하고 대중화하는 데 기여하며 무술계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그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은 전통적인 풀컨택트 가라테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격투 스포츠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10.1. 공헌과 긍정적 평가
아즈마 다카시는 극진 가라테의 단점을 보완하고, 머리 가격을 포함한 보다 현실적인 격투 기술을 허용하면서도 선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독특한 보호 장비를 도입하여 공도를 창시했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무술을 넘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발전을 강조하는 포괄적인 무도 철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신체 지수를 기반으로 한 체급 분류 시스템은 그의 혁신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가 이끈 국제공도연맹은 일본 문부과학성의 지원을 받아 사회 및 체육 교육 단체로서 활동하며 공도의 위상을 높였다.
공도의 발전에 기여한 유명 수련자 및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세미 슐트: 종합격투기 선수이자 킥복서. 1996년, 1997년 북토기 챔피언.
- 로만 아나슈킨: 러시아의 저명한 무술가로, 공도 7단 검은 띠를 보유하고 있다.
- 니시 요시노리: 종합격투기 선수이자 와주츠 케이슈카이(Wajyutsu Keishukai) 체육관 설립자. 1984년, 1985년 북토기 챔피언.
- 리 해스델: 종합격투기 선수이자 킥복서.
- 구로키 가츠마사: 프로레슬러로, 매그넘 도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이치하라 미노키: 종합격투기 선수이자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 참가자.
- 디샤 파타니: 인도 배우이자 피트니스 애호가.
- 콜리얀 에드거: 러시아 공도 명예 스포츠 마스터, 육군 맨손 격투기 러시아 스포츠 마스터 후보, 컴뱃 삼보 러시아 스포츠 마스터 후보. 공도 세계 챔피언 2회 (2005년, 2009년), 공도 세계 선수권 은메달리스트 (2014년), 공도 세계 선수권 동메달리스트 (2018년), 공도 월드컵 우승자 (2011년), 유럽 공도 챔피언 (2008년), 러시아 공도 챔피언 5회.
- 카토 히사키: 벨라토르 MMA와 킥복싱에서 활동하는 종합격투기 선수.
- 악쉐이 쿠마르: 발리우드 슈퍼스타이자 무술가.
- 타프시 파누: 발리우드 배우이자 무술가.
- 메훌 보라: 공도 5단 검은 띠 보유자이자 인도 무술 자가 홍보인.
- 블라디미르 조린: 러시아 공도 국가대표팀 코치, 동양 무술 공도 국제 심판, 러시아 공도 연맹 부회장, 공도 6단 검은 띠, 저서 『공도의 기초』 저자. 로만 아나슈킨과 함께 러시아 공도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 이리나 바이코바: 2005년 여자 무제한급 공도 세계 챔피언, 러시아 공도 챔피언 18회, 2008년 유럽 공도 챔피언. 공도 4단 보유자.

10.2. 계승과 연속성
아즈마 다카시의 사망 후, 대도숙과 국제공도연맹의 리더십은 그의 오랜 제자이자 대도숙의 핵심 인물이었던 오사다 겐이치에게 승계되었다. 오사다 겐이치는 2021년 4월 11일 대도숙의 신임 대표(塾長)로 취임하여 아즈마의 비전을 이어받아 공도의 지속적인 발전과 세계적인 확산을 이끌고 있다. 이러한 승계는 아즈마가 구축한 시스템과 철학이 후대에도 계승되어 공도라는 무술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