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부 하니파(أَبُو حَنِيفَة ٱلنُّعْمَان بْن ثَابِت بْن زُوطَا بْن مَرْزُبَان ٱلتَّيْمِيّ ٱلْكُوفِيّ아랍어, 699년경 ~ 767년)는 8세기 이슬람의 저명한 학자, 법학자, 신학자이자 수니파 이슬람 법학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하나피 법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이슬람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동시대인들로부터 학문적 깊이, 경건함, 절제, 관대함으로 칭송받았다. 그의 학파는 오늘날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튀르키예, 발칸반도, 러시아 및 일부 아랍 세계에서 지배적이다.
아부 하니파는 쿠파에서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헤자즈 지역의 메카와 메디나에서 수학했다. 법학자이자 신학자로서 경력을 쌓으면서 그는 법률적 판결과 신학에 이성의 사용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의 정치 권력에 독립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알만수르 칼리프의 최고 재판관직 제안을 거부하고 투옥되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방법론은 꾸란, 하디스 외에도 키야스(유추), 이스티흐산(선호) 등 이성적 사유를 중시하는 독창적인 접근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아부 하니파의 학문적 유산은 그의 제자들인 아부 유수프와 무함마드 알샤이바니 등을 통해 계승되어 하나피 법학파가 이슬람 법학의 주요 학파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 이름과 칭호
"아부 하니파"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일부 언어학자들은 "하니파"가 그의 방언으로 "잉크통"을 의미하며, 그가 항상 잉크통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잉크통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이 이름이 붙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부 역사가들은 그에게 하니파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기 때문에 "하니파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불렸다고 주장하지만, 반대 측에서는 그에게 그런 이름의 딸이 없다고 반박한다.
그는 또한 여러 존칭으로 불리는데, 대표적으로 '이슬람의 셰이크'를 의미하는 Shaykh al-Islam아랍어, '가장 위대한 이맘'을 의미하는 al-Imam al-A'zam아랍어, 그리고 '이맘들의 등불'을 의미하는 Siraj al-A'imma아랍어 등이 있다. 특히 '알이맘 알아잠'은 그의 학문적 위대함을 기리는 칭호로 널리 사용된다.
3. 초기 생애 및 배경
아부 하니파의 초기 생애에 대한 전기적 정보는 많지 않지만, 그가 쿠파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3.1. 출생과 가족
아부 하니파는 서기 699년(히즈라 80년)경 우마이야 칼리파국 시대 이라크의 쿠파에서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타비트 이븐 주타는 그가 태어날 당시 40세의 카불 출신 상인이었다. 아부 하니파는 주로 '카즈(khazz)'라는 일종의 비단 의류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상인으로 일했다. 그는 이 직업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으며, 자신의 저택 도서관을 제자들과 지식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3.2. 조상과 출신
아부 하니파는 일반적으로 페르시아인 혈통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부인 주타(Zuta)와 증조부인 마르주반(Marzuban)의 이름의 어원학적 제안이 이를 뒷받침한다. 역사가 알하팁 알바그다디는 아부 하니파의 손자인 이스마일 이븐 함마드의 진술을 기록했는데, 그는 아부 하니파의 혈통이 누만 이븐 타비트 이븐 마르주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페르시아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조상에 대한 다른 주장들도 존재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조부 주타는 카불에서 무슬림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혀 쿠파에서 노예로 팔렸고, 그곳에서 바누 바크르 부족의 한 지파인 타임 알라의 아랍 부족민에게 구매되어 해방되었다고 한다. 이후 주타와 그의 후손들은 타임 알라의 마왈리(피보호민)가 되었고, 이 때문에 아부 하니파가 때때로 "알타이미"로 언급되기도 했다.
반면, 아부 하니파의 손자인 이스마일은 자신의 가문이 대대로 자유 신분의 페르시아인이었으며, 한 번도 노예가 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부 하니파의 증조부를 "마르주반"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사산 제국 시대 변경 지방의 총독들이 맡았던 군사 직책을 아랍어로 표기한 형태이다. 또한, 그의 증조부의 본래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달을 의미하는 "마흐(Māh)"였다는 기록도 있다.
다른 정보원들은 그가 유프라테스강 연안의 도시 안바르 출신이라고 주장하며, "바빌로니아인" 또는 "나바테아인" 혈통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당시 무슬림들에게 고대 바빌로니아는 마술이나 의심스러운 요술을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있었고, "나바테아인"은 순수한 아랍인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어, 이러한 주장들은 아부 하니파에 대한 중상모략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알하팁 알바그다디의 저서 『바그다드사』에는 아부 하니파를 샤이탄, 다잘, 카피르, 유대인,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비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아부 하니파는 아마도 이란 세계에서 이라크로 이주해 온 가문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조부 주타는 카불 또는 니사, 테르메즈 등 동방에서 쿠파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4. 교육 및 학문 활동
아부 하니파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능을 보였으며, 꾸란과 수천 개의 하디스를 암기할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처럼 비단 상인으로 일하며 많은 이익을 얻었으나, 그의 넓은 식견과 비범한 지능을 알아본 일부 학자들의 권유로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4.1. 스승과 수학 과정
아부 하니파는 어린 시절부터 법학을 배우기 위해 여러 스승을 찾아다녔다. 그는 쿠파의 저명한 학자 하마드 이븐 아비 술라이만(737년 사망)의 법학 강의에 참석했으며, 18년 동안 그의 제자로 수학했다. 이 시기에 아부 하니파는 22세였다. 그는 스승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자신의 견해를 끈질기게 주장하는 것으로 유명하여, 때로는 스승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스승은 아부 하니파의 학구열과 밤늦게까지 기도와 꾸란 암송으로 밤을 지새우는 경건함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알와타드(Al-Watad)'라고 불렀다.
하마드 이븐 아비 술라이만이 바스라로 잠시 떠나게 되자, 아부 하니파는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강의와 파트와(법률 의견)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이전에 접해보지 못한 수많은 질문에 직면했으며,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스승의 귀환을 기다려 배움을 이어갔다. 하마드 이븐 아비 술라이만이 사망한 후, 아부 하니파는 40세에 그의 뒤를 이어 쿠파 이슬람 법학의 주요 권위자이자 쿠파 법학파의 수석 대표가 되었다.
아부 하니파는 하마드 이븐 아비 술라이만 외에도 메카와 메디나를 방문하며 많은 학자들로부터 지식을 습득했다. 그는 아나스 이븐 말리크, 자이드 이븐 알리, 자파르 알사디크 등 선지자 무함마드의 동반자(사하바) 세대와 그 다음 세대(타비운)의 학자들을 만나 법학, 하디스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탐구했다. 특히 자파르 알사디크에 대해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4.2. 학문 분야
아부 하니파는 법학(피크흐)을 주된 학문 분야로 삼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학문 분야를 탐구했다. 그는 칼람학(신학), 타우히드(일신론), 형이상학에 대한 논의에 참여했으며, 하디스 연구와 전승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는 하디스 수집 및 분류 과정과 전승자들의 신뢰성 여부를 심도 있게 다루어 이 분야에서도 큰 기여를 했다.
그는 법률적 판결과 신학에서 이성(Ra'i)의 사용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학파는 사후에 더욱 성장했으며, 그의 추종자 대부분은 결국 마투리디 학파의 신학을 따르게 되었다. 아부 하니파는 이슬람 신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알라의 속성에 대한 인간화 반대(anti-anthropomorphism) 입장을 강조했다. 그는 자흐미 이븐 사프완과 무카틸 이븐 술라이만의 극단적인 신학적 견해를 비판하며, 쿠라산 출신의 가장 사악한 두 집단으로 자흐미야(인간화 반대 극단론자)와 무샤비하(인간화론자)를 꼽았다.
5. 법학파 창시 및 주요 활동
아부 하니파는 이슬람 법학의 주요 학파 중 하나인 하나피 법학파를 창시하고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1. 하나피 법학파의 설립
아부 하니파는 쿠파에서 하마드 이븐 아비 술라이만의 뒤를 이어 이슬람 법학의 주요 권위자가 되었다. 그는 점차 법률 문제에 대한 권위자로 영향력을 얻었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온건한 합리주의적 이슬람 법학 학파를 설립했다. 이 학파는 쿠파 또는 이라크 학파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이슬람의 수도를 쿠파로 옮겼고, 많은 사하바(선지자 무함마드의 동반자)들이 그곳에 정착했기 때문에, 하나피 법학파는 이라크에 거주했던 1세대 무슬림들이 전수한 예언자적 전통에 기반한 많은 판결을 내렸다. 하나피 법학파는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통용되는 수니파 이슬람 법학 학파로 남아 있으며,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튀르키예, 발칸반도, 러시아 및 일부 아랍 세계에서 지배적이다.
아부 하니파는 이슬람 법학의 여러 분야에서 높이 평가되었으며, 무슬림 신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법학 분야에서 최고의 역량을 가진 법학자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학문적 성과, 경건함, 절제, 겸손함, 헌신,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5.2. 법학 방법론
아부 하니파가 이슬람 법을 도출한 원천은 중요성과 선호도 순서로 다음과 같다.
- 꾸란: 이슬람의 경전
- 하디스: 선지자 무함마드의 언행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전승
- 이즈마(Ijma'): 무슬림 공동체의 합의
- 키야스(Qiyas): 유추적 추론
- 이스티흐산(Istihsan): 법학적 재량 또는 선호
- 우르프(Urf): 이슬람 법을 시행하는 지역 주민들의 관습
유추적 추론(키야스)의 발전과 그 사용 범위 및 한계는 대부분의 무슬림 법학자들에게 인정되었지만, 이를 법적 도구로 확립한 것은 하나피 학파의 결과였다. 그의 일부 스승들도 키야스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현대 학자들은 아부 하니파가 이슬람 법의 일부로서 유추적 추론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제도화한 최초의 인물로 간주한다.
아부 하니파는 꾸란에 명시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에 대해 이성적 사유를 사용하여 법을 결정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법학적 판단에 있어 이성(Ra'i)과 개인적 판단(Istihsan)을 중시했으며, 이는 전통을 중시하는 다른 법학자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그는 이슬람 법학의 기초론(우스울 피크흐)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의 방법론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 계승되어 하나피 법학파의 특징이 되었다.
6. 정치적 관여와 투옥
아부 하니파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이는 그의 투옥으로 이어졌다.
6.1. 정치적 입장과 지원
아부 하니파는 생애의 대부분을 우마이야 칼리파국 통치하에서 보냈으며, 그의 성인기는 우마이야조의 쇠퇴와 몰락을 목격했다. 그는 우마이야조에 대한 자이드 이븐 알리의 반란(738년)을 지지했다. 이후 아바스 혁명을 지지했지만, 아바스 왕조의 정권은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알리 가문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아바스 왕조에 저항하는 '순수한 영혼' 무함마드와 그의 동생 이브라힘 알카마르의 반란(762년)을 지원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입장은 당시의 지배 권력에 대한 그의 독립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6.2. 재판관직 거부 및 투옥
서기 763년, 아바스 칼리프 알만수르는 아부 하니파에게 '카디 알쿠다트(Qadi al-Qudat)', 즉 국가의 최고 재판관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아부 하니파는 이 제안을 거절하며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하기를 선택했다. 그의 제자인 아부 유수프는 훗날 하룬 알라시드 칼리프에 의해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
아부 하니파는 알만수르에게 자신이 그 직책에 적합하지 않다고 답했다. 자신의 제안이 거부되자 격분한 알만수르는 아부 하니파가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아부 하니파는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제 주장은 두 배로 옳습니다. 어찌 폐하께서 거짓말쟁이를 존귀한 카디 직책에 임명하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응수했다. 이 답변에 더욱 분노한 알만수르는 아부 하니파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고문했다. 감옥에 갇힌 동안 그는 음식이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그는 면회가 허락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가르침을 전했다.
며칠 후, 알만수르의 친척 중 한 명이 "오 아미룰 무미닌, 폐하께서는 칼로 십만 번 자신을 채찍질하셨습니다"라고 간언했다. 이에 칼리프는 아부 하니파에게 그가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 3.00 만 DRH를 지불하고 석방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아부 하니파는 이 재산을 거부했다. 그러자 칼리프는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지만, 대신 대신들은 아부 하니파를 석방하고 가택 연금에 처하며 대중과의 접촉이나 외출을 금지할 것을 제안했다.
7. 죽음과 장례
아부 하니파는 히즈라 150년 라자브월 15일(서기 767년 8월 15일)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일부에서는 그가 알만수르에 대항하여 무장 봉기를 지지하는 법률적 의견(파트와)을 내렸기 때문에 알만수르가 그를 독살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사망 소식이 퍼지자 알만수르 칼리프는 "살아있든 죽었든 누가 나를 너에게서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쿠파의 한 학자는 "쿠파 시에서 학문의 빛이 꺼졌다. 그들은 다시는 그와 같은 학자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이들은 "이제 이라크의 무프티와 파키흐(법학자)가 사라졌다"고 애도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전해지며, 너무 많은 인파로 인해 장례 예배가 여섯 번이나 반복된 후에야 비로소 매장될 수 있었다. 역사가 알하팁 알바그다디는 사람들이 20일 동안이나 그를 위해 장례 기도를 드렸다고 기록했다. 그의 시신은 다섯 제자의 등에 실려 목욕 장소로 옮겨졌고, 알하산 이븐 이마라가 그를 목욕시켰으며, 알하라위가 물을 부었다. 그는 아들 함마드가 드린 예배를 마지막으로 아사르 예배 후에야 매장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이 좋은 땅이자 도난당하지 않은 땅인 알카이라잔 공동묘지에 묻히기를 유언했다.
수년 후, 바그다드의 아다미야 지역에 아부 하니파 모스크가 건설되었다.
8. 사상과 신학
아부 하니파는 이성적 사유를 중시하는 독자적인 신학적, 법학적 접근 방식을 확립했다.
8.1. 신학적 입장
아부 하니파는 알라의 속성에 대한 인간화 반대(Tashbih)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자흐미 이븐 사프완(745년 사망)이 인간화 반대론에서 너무 나아가 '알라(신)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을 비판했다. 반대로 무카틸 이븐 술라이만(767년 사망)은 알라를 피조물에 비유하는 극단적인 견해를 보였다.
알하팁 알바그다디는 그의 저서 『타리흐 바그다드』(바그다드 역사)에서 아부 하니파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쿠라산 출신의 가장 사악한 두 집단은 자흐미야(자흐미 이븐 사프완의 추종자들)와 무샤비하(인간화론자들)이다. 그는 아마도 무샤비하 대신 '무카틸리야'(무카틸 이븐 술라이만의 추종자들)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아부 하니파가 신의 속성을 인간의 속성과 동일시하거나 완전히 부정하는 양극단의 견해를 모두 배격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신학적 사상은 12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형성된 마투리디 학파에 계승되어 수니파 신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8.2. 법학적 접근
아부 하니파의 법학적 접근 방식은 꾸란과 하디스 외에 이성(Ra'i)과 개인적 판단(Istihsan)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는 법률적 판결에서 이성적 추론(키야스)의 사용을 선호했으며, 이를 이슬람 법의 정식적인 도구로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당시 전통을 엄격히 따르던 다른 학자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그는 법 해석에 있어 공동체의 합의(이즈마)와 지역 관습(우르프) 또한 중요한 근거로 삼았다. 아부 하니파는 법학적 재량(이스티흐산)을 통해 엄격한 유추적 추론의 적용이 부당한 결과를 초래할 경우, 더 선호되는 해결책을 채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유연하고 이성적인 접근 방식은 하나피 법학파가 다양한 지역과 문화권에서 널리 수용되는 데 기여했다.
9. 제자들과 학파의 계승
아부 하니파는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이들은 그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하나피 법학파가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수프 이븐 압드 알라흐만 알미지는 아부 하니파의 제자 중 97명의 하디스 학자들을 기록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훗날 저명한 하디스 학자가 되어 그들이 전수한 하디스는 『사히흐 알부하리』, 『사히흐 무슬림』 등 유명한 하디스 서적에 수록되었다. 이맘 바드르 알딘 알아이니는 아부 하니파에게서 하디스와 피크흐를 배운 학생 260명을 추가로 기록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제자로는 이슬람 세계 최초의 최고 재판관을 지낸 이맘 아부 유수프와 샤피이 학파의 창시자인 이맘 알샤피이의 스승이었던 이맘 무함마드 알샤이바니가 있다. 이 외에도 압둘라 이븐 무바라크, 알푸다일 이븐 이야드, 아부 누아임 파들 이븐 두카인, 말리크 이븐 미그왈, 다우드 타아이, 만딜 이븐 알리, 카심 이븐 마안, 하이아즈 이븐 비스탐, 후샤임 이븐 바시르 술라미, 알리 이븐 티비안, 와키 이븐 자라흐, 암르 이븐 마이문, 아부 이스마, 주하일 이븐 무아위아, 아피아 이븐 야지드 등이 그의 중요한 제자들이었다.
이들 제자들은 아부 하니파의 학문적 유산을 체계화하고 문서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아부 유수프와 무함마드 알샤이바니는 아부 하니파의 법학 방법론과 판결을 정리하여 하나피 법학파의 기초를 다졌다. 그들은 아부 하니파의 가르침을 강의와 저술을 통해 전파했으며, 이는 하나피 법학파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파 중 하나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 후대의 평가와 비판
아부 하니파는 이슬람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그의 학문적 방법론과 사상에 대한 비판도 존재했다.
10.1. 긍정적 평가
아부 하니파는 다양한 성스러운 지식 분야에서 높이 평가되었으며, 무슬림 신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생애 동안 최고 수준의 법학자로 인정받았다. 샤피이 학파의 저명한 하디스 학자 이븐 하잘 알아스칼라니는 아부 하니파에 대한 비판은 중요하지 않다고 언급하며, 아부 하니파와 같은 인물들은 "알라께서 그들을 높이 들어 올리셔서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고 모방하게 하신 정도에 있다"고 말했다.
이븐 타이미야는 아부 하니파의 지식을 높이 평가하며 그에 대한 비난들을 반박했다. 그는 "이맘 아부 하니파의 지식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훗날 이맘 아부 하니파에게 많은 거짓말을 덧씌웠는데,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한 글들의 목적은 이맘 아부 하니파를 더럽히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제자들인 이븐 카티르와 알다하비도 아부 하니파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을 광범위하게 반박하고 그의 공헌을 칭송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이맘'을 의미하는 al-Imām al-A'zam아랍어이라는 존칭을 받았으며, 1066년 추종자들이 세운 돔형 묘지는 오늘날까지 순례자들의 성지로 남아 있다. 이 묘지는 1535년 오스만 제국이 바그다드를 정복한 후 술레이만 대제에 의해 복원되었다.
10.2. 비판과 논란
아부 하니파는 아흐마드 이븐 한발, 압둘라 이븐 무바라크, 수피안 알타우리, 수피안 이븐 우야이나, 압둘 라흐만 알아우자이 등 여러 인물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후대 자료에 따르면, 이븐 아비 샤이바와 이븐 사드는 그를 이단자이자 선지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인물로 인식했으며, 알부하리의 스승인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 알후마이디는 아부 하니파의 사상을 반박하는 글을 처음으로 썼다.
자히리 학파의 학자 이븐 하즘은 수피안 이븐 우야이나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쿠파의 아부 하니파, 바스라의 알바티, 메디나의 말리크가 개입하기 전까지 사람들의 일은 조화로웠다." 초기 무슬림 법학자 하마드 이븐 살라마는 한때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노인으로 위장한 강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그 강도가 살아있다면 아부 하니파의 추종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맘 아흐마드 이븐 한발은 "이샤크 이븐 만수르 알카우사지가 나에게 전하기를, 내가 아흐마드 이븐 한발에게 '아부 하니파와 그의 동료들을 미워하는 자에게 보상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가 '그렇다, 알라 맹세코'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무한나 이븐 야흐야 아샤미는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 '나에게 아부 하니파의 의견은 똥과 같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러한 비판들은 주로 아부 하니파가 이성(Ra'i)과 개인적 판단(Istihsan)을 하디스보다 중시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11. 유산과 영향력
아부 하니파의 학문적 유산은 이슬람 법학, 신학,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가 창시한 하나피 법학파는 오늘날 전 세계 무슬림의 약 45%가 따르는 가장 널리 통용되는 수니파 법학 학파이다. 이 학파는 특히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튀르키예, 발칸반도, 러시아 및 일부 아랍 세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공식적인 마즈하브(법학파)였으며,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등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부 하니파는 이슬람 신학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신학적 사상은 훗날 마투리디 학파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는 꾸란과 하디스 외에 이성(Ra'i)과 개인적 판단(Istihsan)을 법 해석에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이슬람 법학의 방법론을 풍부하게 했다. 특히 키야스(유추적 추론)를 이슬람 법의 정식적인 도구로 확립한 것은 그의 중요한 공헌으로 평가된다.
아부 하니파의 가르침과 사상은 그의 수많은 제자들을 통해 계승되고 발전되었으며, 이들은 그의 학문적 유산을 체계화하고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전파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학파는 법률 문제에 대한 실용적이고 유연한 접근 방식으로 인해 다양한 사회와 문화권에서 널리 수용될 수 있었다.
12. 인물됨과 외모
아부 하니파는 그의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뛰어난 인품과 외모로도 기억된다.
알나드르 이븐 무함마드는 아부 하니파가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옷차림, 향기로운 냄새"를 가졌다고 회상했다. 그의 제자 아부 유수프는 그를 "잘생겼고, 외모가 가장 뛰어나며, 언변이 가장 유창하고, 목소리가 가장 감미로우며, 생각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아부 하니파의 아들 함마드는 그를 "매우 잘생겼고, 피부색이 검었으며, 자세가 좋았고, 향수를 많이 뿌렸으며, 키가 컸고,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할 때 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븐 알무바라크는 "아부 하니파보다 모임에서 더 존경받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며, 성품과 인내심이 더 뛰어난 사람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는 관대한 성품을 지녔으며, 부지런하고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승들을 매우 존경하여 자주 선물을 드렸으며, 자녀를 가르치는 스승들에게도 선물을 주었다.
13. 세대 구분 (타비운)
아부 하니파는 일부 권위자들에 의해 '타비운(Tabi'un)'으로 간주된다. 타비운은 선지자 무함마드의 동반자(사하바) 세대 다음 세대를 의미한다. 이러한 분류는 그가 최소한 네 명의 사하바, 특히 아나스 이븐 말리크를 만났다는 보고에 근거한다. 일부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아나스 이븐 말리크와 다른 선지자 무함마드의 동반자들로부터 하디스를 전수받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다른 견해에서는 아부 하니파가 여섯 명 정도의 동반자들을 어린 시절에 만났을 뿐이며, 그들로부터 직접 하디스를 전수받지는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부 하니파는 선지자 무함마드 사망 후 최소 60년 뒤에 태어났지만, 그가 젊었을 때까지 살아있던 1세대 무슬림들이 있었다. 선지자 무함마드의 개인 시종이었던 아나스 이븐 말리크는 히즈라 93년에 사망했고, 또 다른 동반자인 아불 투파일 아미르 빈 와틸라는 히즈라 100년에 사망했는데, 이때 아부 하니파는 최소 20세였다. 『알카이라트 알히산』의 저자는 전기 서적에서 정보를 수집하여 아부 하니파가 하디스를 전수받았다고 보고된 1세대 무슬림들의 이름을 16명이나 열거했는데, 여기에는 아나스 이븐 말리크, 자비르 이븐 압둘라, 사흘 이븐 사드 등이 포함된다.
아부 하니파는 자파르 알사디크의 제자이기도 했다. 자파르 알사디크는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이었으므로, 수니파 피크흐의 네 위대한 이맘 모두는 직간접적으로 선지자 무함마드의 가문(아흘 알바이트)과 연결되어 있다.
14. 기념 및 추모

아부 하니파의 묘지는 이라크 바그다드의 아다미야 지역에 위치한 아부 하니파 모스크 내에 있다. 그의 묘는 1066년 추종자들에 의해 돔으로 덮여 성지화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순례자들의 성지로 남아 있다.
1508년 사파비 제국의 이스마일 1세 샤에 의해 아부 하니파와 압둘 카디르 길라니의 묘를 포함한 수니파 성지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1533년 오스만 제국이 바그다드를 정복한 후, 술레이만 대제는 아부 하니파와 압둘 카디르의 묘를 비롯한 다른 수니파 유적지들을 재건했다. 21세기 현재 아부 하니파의 묘는 아부 하니파 모스크라는 종교 복합 단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15. 관련 항목
- 하나피 법학파
- 이슬람 법학
- 이맘
- 쿠파
- 바그다드
- 알만수르 칼리프
- 아부 유수프
- 무함마드 알샤이바니
- 자파르 알사디크